제10화
나갈까?
근데 또 하필이면 모습을 바꾸기 전에 이렇게 눈이 딱 마주쳐서…….
[너는 누구지?]
그사이 대공자가 다시 한번 내게 말을 걸었다. 나는 그제야 정처 없이 움직이던 눈동자를 한곳에 고정하고서 머쓱하게 미소 지었다.
꿈에 낯선 사람이 등장하는 건 꽤 흔한 일이니까, 대충 뭉개야지.
우선 저택 메이드라는 설정으로 가 볼까.
[유스틴 도련님. 벌써 점심시간이에요.]
재빨리 얼굴과 복장을 바꾸고 상냥히 말을 건네자, 대공자가 은빛 눈동자를 가늘게 뜨며 고개를 좌로 기울였다.
[역시 이상해.]
[…….]
[꿈이 통제를 벗어난 적은 한 번도 없는데. 난데없이 메이드라니.]
그냥 그러려니 넘어가면 좀 덧나냐, 이 깐깐한 녀석아.
나는 실금처럼 쪼개지려는 웃는 낯을 애써 유지하며 입 안 여린 살을 깨물었다.
조금 전의 말을 조합해 보면, 저 사람이 자각몽을 하루 이틀 꾼 건 아닌 것 같은데.
게다가 이 잘 정돈된 공간.
보통은 자각몽이라도 배경이 뭉개지거나 어딘가 부자연스러운 곳이 생기기 마련인데, 유스틴이라는 남자아이의 꿈에서는 그런 부분을 찾아볼 수 없었다.
나와 비슷한 능력, 비슷한 증상을 가진 또래 남자아이라.
역시 조금 더 대화를 나눠 보면 내 병에 대해 뭐라도 실마리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
[다시 묻지. 너는 누구지?]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있으려니, 유스틴이 인상을 찌푸리며 대답을 종용했다.
저 의심 넘치는 눈초리를 보건대, 메이드라고 우기고 넘어가는 작전은 실패한 듯싶었다.
이래서 눈치 빠른 아이는 싫다니까.
어차피 내가 말을 꺼내지 않는 이상, 제아무리 자각몽의 귀재라고 해도 이상한 꿈을 꿨다고밖에 생각하지 못할 텐데.
[……두려워 말라, 인간아.]
이왕 이렇게 된 거 뻔뻔하게 천사로 노선 변경하자.
꿈 하면 천사고, 천사 하면 꿈인 법. 예수님의 양아버지께서도 꿈에서 천사의 계시를 받았을 정도니까.
생각을 마친 즉시, 나는 내 모든 빅 데이터를 동원해 천사로 모습을 바꿨다.
새하얀 깃털로 이루어진 여섯 장의 날개를 돋우고, 주위에 후광도 두르고.
그러자 유스틴이 혼란스러운 기색으로 멍하니 입을 열었다.
[천사?]
그렇지, 그대로 믿는 거야!
[그래, 내가 바로―]
[천사라기엔 생긴 게 조금…….]
[아, 거참.]
무슨 애가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어? 너 진짜 천사 본 적 있어?
나도 모르게 기가 찬 소리를 내뱉자, 유스틴이 대번에 눈썹을 치켜올렸다. 나는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만면에 인자한 미소를 띠었다.
그래, 의심하든 말든 너 알아서 해라. 나는 내가 할 일을 할 테니.
[……당신이 정말 천사라면, 왜 하필 내 꿈에 온 거지?]
[네가 아프다는 네 어미의 기도가 하늘에 닿아 내려왔느니.]
[흐음.]
내 말에 유스틴이 사나웠던 눈매를 조금 누그러뜨렸다. 조금 미덥지 않긴 해도, 내가 천사라는 사실을 그럭저럭 수긍한 모양이었다.
아니면 그냥 개꿈을 꾸고 있는 거라고 치부하고 체념한 걸지도.
[그러니 놀라지 말라, 아이야. 내 너를 도우리라.]
[놀란 적 없습니다.]
[제법 당돌하구나.]
그래도 나름 천사 같은 모양새로 ‘내가 천사요’라고 선언했는데.
천사한테도 불퉁한 태도를 유지하는 걸 보면, 우리 친구 정말 크게 될 인재인 것 같아요.
나는 삐죽 솟아오르려는 눈썹을 내리누르며 손가락을 튕겼다.
동시에 딱딱하기 그지없었던 서재의 풍경이 일그러지고, 대신에 평화롭고 포근한 휴게실의 모습이 나타났다.
물론 그걸 마주하는 유스틴의 얼굴은 여전히 서재처럼 딱딱하기 그지없었지만.
마음에 들지 않니? 너를 위한 특별 진료소란다.
원한다면 누워 있어도 돼. 나는 지금 이 순간 더없이 자애로운 천사니까.
‘해치지 않아요, 우리 환자님.’
나는 마음 깊이 우러나는 미소를 띤 채 유스틴에게 손짓했다.
[앉으렴.]
[……?]
[말하지 않았느냐. 내 너를 돕겠노라고.]
진료를 봐야 처방전을 내주지 않겠어요, 환자님?
겸사겸사 케이스도 수집하고, 정말로 연관성이 있으면 그걸로 연구도 좀 하고.
먼저 의자에 다가가 앉아 있으려니, 멀리서 작게 헛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들려왔다. 제 앞에 펼쳐진 일련의 상황을 쉬이 이해하지 못한 탓인 듯싶었다.
[……이런 방식으로 어떻게 절 돕겠다는 겁니까?]
결국 유스틴이 내 맞은편에 놓인 진료 의자에 앉으며 물었다.
정말이지 천사를 마주한다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삐딱하기 그지없는 태도였다.
물론 나는 진짜로 천사가 아니기 때문에, 그의 태도 따위는 신경 쓰지 않고 빙그레 미소 지었다.
[네가 병증을 앓고 있다는 기도를 들었다.]
그 병증 때문에 당장 돌아갈 수 없다는 어머니의 편지를 읽었다.
[내 너를 갸륵히 여겨 손을 내미니, 네 일과를 거짓 없이 고하라.]
안 그래도 바쁜데 또 와서 관찰할 수는 없으니 빨리 끝내고 헤어지자.
예쁜 말로 진심을 포장하고 또 한 번 부드러운 호선을 그렸다. 그러자 유스틴이 입가에 띤 미소의 반대만큼 목을 꺾었다.
목을 꺾어?
[전지하고 전능하다 하는 신의 사자치고는 굉장히 비효율적인 방식을 선택하시는군요.]
[너는 신자가 아니지 않느냐.]
딱 보니 무신론자같이 생겼고만.
[그럴수록 더 전능한 모습을 보여 주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네가 직접 기적을 본들, 신자가 되지는 않을 것 아니냐.]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 담담하게 답하니, 유스틴은 곧 입을 다물었다. 이번에도 내 말이 적중한 듯싶었다.
냉소적인 무신론자들이야 뻔하지. 이런 사람들은 꼭 기적도 없고, 설령 기적이 일어나도 그건 신의 축복이 아닌 제 노력의 결실이라고 생각한다.
어떻게 아냐면, 내가 그러거든.
마법은 있어도 기적은 없다.
눈앞에 천사가 나타난다고 해도, 그리고 그와 직접 대화를 나눌 수 있어도.
그들이 결코 나에게 무조건적인 구원의 손을 뻗지 않을 것임을 알고 있다.
[살다 보니 별 꿈을 다 꾸는군.]
그러니 아마 쟤도 내가 진짜 천사라고 믿기보다는, 요즘 자신이 너무 피곤한 탓에 자각몽이 흐려졌다고 생각하는 거겠지.
누차 말하지만, 뭐가 됐든 상관없다. 난 그저 할 일만 하면 되니까.
[그래서, 정확히 어디가 아프지?]
자, 일부러 편한 분위기로 조성했으니 마음 편히 말씀하세요.
일부러 후광의 밝기도 조금 낮추며 몸을 기울여 묻자, 유스틴이 한숨을 내쉬며 느릿하게 답하기 시작했다.
[……늘 머리가 무겁습니다.]
[열은?]
[그러고 보니 최근부턴 두통과 함께 열이 오른 것 같기도 하고.]
[아하.]
[입맛이 없고, 가슴이 두근거리고, 숨이 차고 어지럽기도 합니다.]
당연히 그러겠지. 그렇지 않으면 엄마가 굳이 ‘미에나와 증상이 비슷해요’라는 문장을 적진 않았겠지.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유스틴의 말에 의견을 조금 보탰다.
[그리고 오래 햇볕을 쐬면 어지럽고 조금만 오래 걸어도 숨이 차며, 조금만 기름진 음식을 먹어도 속이 뒤집히고, 그런 상태가 계속되면 결국 각혈하며 정신을 잃는…….]
[그건 죽을병 아닙니까?]
[……그 정도는 아니군.]
그래서 엄마가 ‘곧 회복될 것 같다’라고 한 거네.
부럽다, 이 자식.
가문도 빵빵하고 돈도 많고 관심도 받는데 죽을병은 아니라는 게.
끝내 없애지는 못했으나 이제는 가볍게 넘길 정도로 무뎌진 장난스러운 질투심을 뒤로하고, 나는 앞으로 기울였던 상체를 홱 뒤로 젖혀 자세를 편안하게 바꿨다.
천사는 이래도 돼.
[그럼 이번엔 네 평소 일과를 읊어 보라.]
[아무리 당신이 전지하지 않다고 해도 그 정도는 알고 있어야 하는 거 아닙니까?]
[억울하면 신자 되든가.]
어차피 내가 진짜 천사라고 생각하지도 않는 주제에.
뻔뻔한 태도로 일관하려니, 유스틴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언뜻 ‘하다 하다 이런 개꿈을 꾸게 되다니’ 따위의 중얼거림이 들린 것도 같고.
그래도 예상과는 달리 제법 성실하게 대답해 주고 있단 말이지. 자기 통제적이고 냉소적이지만 의외로 착한 친구구나.
[……일어나면 속이 좋지 않으니 아침은 거르고 대신에 신문을 읽고, 후계 수업을 듣고, 오후엔 사냥 연습을 조금 하고 돌아와 자선 사업 현황을 살피고, 아버님 곁에서 영지 운영 현황을 보고받고…….]
[일 외에 다른 건 안 하나?]
[물론 점심과 저녁은 챙기는 편입니다. 오찬이나 만찬에는 꼭 참석해야 하니까요.]
[아니, 그거 말고 휴식 같은 거.]
[밤이 되면 수면을 취합니다.]
[……꿈에선 뭐 하는데.]
[외워 놨던 이론서나 배웠던 것들을 복습하는 편입니다.]
오늘은 그러지 못해 굉장히 불쾌하다는 표정으로, 유스틴이 담담하게 말을 늘어놓았다.
나는 그를 향해 빙그레 웃어 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알겠다, 너의 병명.
너 이 새끼 과로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