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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이 필요하신가요? (9)화 (9/154)

제9화

내 앞에 펼쳐진 문의 개수가 눈에 띄게 줄어든 걸 봐선 이미 늦은 아침인 것 같은데, 어제와는 달리 깰 기미가 보이지 않으니.

나는 여전히 바닥에 몸을 뉜 채 멀뚱히 두 눈을 깜빡였다.

어제 생각보다 더 무리했던 걸까. 아무리 생각해도 앓아누운 탓에 꿈에서 안 깨는 것 같은데.

보통은 이럴 때 악몽을 꾼다던데, 나는 오히려 능력이 더 견고해지는 것 같네.

[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생각을 마친 즉시, 몸이 뒤엎어지는 느낌과 함께 손가락 끝이 옅어지기 시작했다.

나는 그 기묘한 감각에 몸을 맡겼다가, 이내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을 들어 올렸다.

“아가씨……!”

시선이 멎은 곳에는 언제나처럼 티나가 울먹이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다만 평소와 다른 점이 있다면, 그녀의 곁에 아버지가 함께 있다는 정도일까.

“좋은 아침이에요.”

아침은 맞겠지?

나는 배시시 웃는 동시에 빠르게 주변을 훑었다.

이 온도, 햇살, 조명을 보니 아직 아침인 건 맞는데. 그렇게 오래 앓아누운 건 아닌 모양이다.

그보다는, 간밤의 성과를 어서 아버지께 알려 드려야지.

“아버지, 저…….”

“그래, 미아. 필요한 거라도 있니? 무엇이든 편하게 말해 보련.”

“어제 보물 일부 돈으로 환산한 거 남아 있죠? 최대한 빨리 탈레스 폐광산 출입을 통제해야 해요.”

물론 폐광산에 몰래 들어온다고 해서 사람들이 보물을 발견할 수 있을 리는 없지만, 그렇게 되면 폐광산을 웃돈 얹어서 팔 수 없잖아.

이것도 다 재산인데!

“우선 광산 주위에 철조망을 높게 두르고, 경비를 세우는 게 좋겠어요.”

출입에 이상이 생기면, 차라리 이곳을 자신이 사들이겠다는 결론에 다다를 것이다.

탈레스 폐광산을 사는 것쯤이야, 자신이 갖게 될 보물과 비교하면 새 발의 피일 테니까.

그럼 덩달아 다른 사람들 역시 이곳 입찰에 뛰어들 테고, 나는 그 모습을 구경하며 돈 냄새를 만끽…….

“미에나.”

바로 그 순간, 딱딱하게 굳은 음성이 귓가에 내려앉았다.

나는 그제야 행복 회로 가동을 멈추고서 목소리의 주인을 바라보았다.

역시나, 나를 바라보는 아버지의 눈빛에는 걱정과 더불어 미세한 분노가 깃들어 있었다.

어……, 분노?

“네가 지금 그런 걸 신경 쓸 때라고 생각하느냐?”

“네?”

“네 모습을 보렴. 앓아누웠지 않니. 그런데도 너는…….”

이내 그가 길게 한숨을 내쉬고서 내 손을 그러쥐었다.

“앞으로도 네가 매번 이런 식으로 앓게 되느니, 차라리 돈을 벌지 않는 게 백배는 낫다. 그래, 차라리 그만두는 게 낫겠구나!”

그가 으름장을 놓듯이 단호하게 말을 내뱉었다. 나는 두 눈을 멍하니 깜빡이며 그의 말을 곱씹었다.

그러니까, 지금.

고작 몇 시간 앓아누운 거로 돈 벌지 않겠다고 선언하신 거야?

아버지는 돈 버는 게 장난이세요?

이 정도로 근성이 없어서야, 나 죽으면 이 험한 세상 앞으로 어떻게 살아 나가려고?

“아버지.”

한편으로는 그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었기에, 나는 속마음을 말끔히 숨기고서 천천히 말문을 열었다.

“이번에는 장시간 마차를 타고 이동한 탓에 이러는 거예요. 아무리 체력 좋은 사람이라도 마차를 오래 타면 힘들기 마련이잖아요. 하물며 저희 가문의 마차는 그렇게 질이 좋은 편도 아니고요.”

“미아.”

“전 어제 정말로 즐거웠어요.”

돈 벌었으니까.

마지막 말은 가볍게 삼키며 미소 짓자, 아버지의 눈가에 희미하게 물 자국이 번졌다.

처연한 분위기와 목소리가 나름대로 잘 먹혀든 듯싶었다.

어렸을 때부터 고도로 단련한 내숭을 얕보면 안 되지.

“꼭 이런 일이 아니더라도, 두 분과 함께 어디든 놀러 가고 싶은데.”

그때도 내 몸을 핑계로 막아설 건가요? 진짜로? 언제 또 그렇게 놀 수 있을지 모르는데?

내친김에 한술 더 떠 올망졸망한 눈빛으로 묻자, 아버지의 입에서 한차례 긴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러고서 그는 이내 하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내저으며 입을 열었다.

“내 당장 황도에서 가장 좋은 마차를 주문하마. 몸에 부담이 최대한 덜 가는 것으로.”

“그것도 좋지만 일단 탈레스 폐광산을 좀 정비해 주세요, 아버지.”

“미아, 너는 이 상황에서도 꼭…….”

“헤헤.”

슬쩍 웃음을 흘리니, 결국에는 아버지도 나를 따라 웃으며 손끝으로 내 이마를 쓸어내렸다. 이마 끝에 닿은 그의 손은 순간 놀랄 정도로 차갑기 그지없었다.

‘식은땀이 난다 싶더니, 열이 올랐었구나.’

나는 그제야 내 상태를 정확히 깨닫고서 눈동자를 또르르 굴렸다.

아무래도 체력이 정말 예전 같지 않나 보네. 어찌 보면 당연한 얘기지만, 그래도 이 정도는 아닐 거라고 생각했는데. 앞으로 며칠간은 조심하는 게 좋겠어.

“사랑하는 내 딸, 미에나야.”

내 나름대로 반성하고 있으려니, 아버지가 또 한 번 나직이 입을 열었다.

“내 이제는 정말로 네가 원하는 대로 너를 웃으며 떠나보낼 준비를 하려 하지만.”

“…….”

“그것이 너를 정말로 포기한다는 걸 의미하는 건 아니란다.”

너무나 푸르르고, 또 따뜻한 눈동자가 흔들림 없이 나를 담아냈다.

“네가 진정 나와 네 어미와 함께 많은 것을 보고 즐기다 떠나고 싶은 거라면, 내가 너를 아끼는 만큼 너도 최대한 네 몸을 아껴 주었으면 좋겠구나.”

“아버지.”

“내게는 네가 제일 소중하단다. 그 어떤 보물도 너와 비견할 수 없어.”

차라리 내가 이 모든 고통을 짊어지고 싶을 정도로, 할 수만 있다면 대신 죽고 싶을 정도로.

다정하게 읊조리던 그의 목소리가 점점 힘을 잃고 종내에는 혼잣말처럼 흩어졌다.

내 귓속으로 스며드는 것은 막을 수 없는, 그의 진심이었다.

나는 맞잡은 손에 힘을 더하며 부드럽게 속삭였다.

“아버지께서 걱정하시는 일 없도록 주의할게요.”

나도 최대한 오래 버티다 가고 싶으니까.

“그보다, 어머니는요?”

그러고 보니 빚도 다 갚았겠다, 이제 어머니도 저택으로 돌아오셨으면 하는데.

순간 떠오르는 생각에 묻자, 아버지가 자애롭게 미소 지으며 답했다.

“이미 편지를 보냈단다. 이곳에서 대공 저까지 그리 멀지 않으니, 늦지 않게 답을 받을 수 있겠지.”

“빨리 돌아오셨으면 좋겠는데.”

“많이 보고 싶니?”

“당연하죠.”

어머니까지 저택으로 돌아오시면 그때는 진짜로 가족끼리 어디 놀러 가는 것도 좋지 않을까?

‘물론 탈레스 폐광산이 팔린 후에. 그전까지는 언제 손님이 저택에 들이닥칠지 모르니까.’

패트릭이 암호를 풀고 활동을 시작하면 내 꿈을 주의 깊게 생각했던 사람들도 활동을 시작할 터다.

그러니 패트릭 너만 잘하면 된다, 너만.

그렇다고 너무 일찍 오지는 말고. 그 머리로 빨리 해독할 수 있을 리는 없겠지만.

“그래도 최대한 빨리 철망 설치, 경비 배치…….”

흐려지는 무의식 속에서 아무렇게나 말을 중얼거리자, 곧 이마에 조금 전과는 다른 따뜻한 감촉이 느껴졌다.

“푹 쉬렴, 미아.”

그보다 몇 배는 더 따뜻한 목소리를 마지막으로, 나는 다시금 잠에 빠져들었다.

* * *

그렇게 나는 하루 내내 잤다가 깼다가를 몇 번이나 반복했다. 패트릭을 가르치느라 꿈에서도 쉬는 게 쉬는 게 아니었다 보니, 아무래도 몸에 더 무리가 간 모양이었다.

그사이 어머니한테서는 답신이 왔다. 나는 그걸 흐린 정신으로 어떻게든 욱여넣었고.

그리고 바로 지금, 플라네타륨 아래서 그 편지를 다시 읽고 있었다.

[흐음.]

나는 편지지 끝에 적힌 ‘미안해요, 여보. 최대한 빨리 돌아갈게요.’라는 문장을 바라보며 긴 숨을 내쉬었다.

솔직히 편지를 받는 대로 돌아오실 줄 알았는데.

<대공자님께서 앓아누우신 탓에, 그분이 회복하실 때까지는 이곳에 더 머물러야 할 듯싶어요.

그나마 대공 부부께서 지금 황도 근처에 계셔서, 이동 소요 시간 자체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것 같아요.>

아버지께서 보낸 편지를 읽어 보진 않았지만, 아무래도 내 상태를 자세히 기술하진 않은 모양이었다.

기껏해야 빚을 모두 갚았으니 최대한 빨리 돌아오라고 적었겠지. 내 이야기는 어머니께서 돌아오면 직접 설명하려고 하셨을 테고.

이걸 아버지답다고 해야 할지.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고서 편지를 이어 읽었다.

<공자님의 증세가 미에나와 비슷해서 더 신경 쓰이네요.>

[나랑 증상이 비슷하다고.]

그래도 곧 회복될 것 같다고 적어 놓은 걸 보면, 나처럼 불치병은 아닌가 보지. 그건 조금 부럽네.

이윽고 나는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나 꿈속 서재를 빠져나갔다. 어머니의 꿈을 찾기 위함이었다.

처음 내 능력을 자각한 후로는 가족의 꿈에는 난입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이번만큼은 예외로 둬야지.

엄마도 내가 무척 보고 싶을 텐데. 나도 보고 싶고.

마침 편지에서도 황도 근처라고 했으니, 어머니의 꿈이 내 능력 범위 안에 들어와 있을 터였다.

[역시 진짜로 만나는 게 제일 좋은데.]

대공자인지 뭔지 하는 녀석이 빨리 나아야 할 텐데.

어머니의 이름을 적어 넣은 종이비행기를 따라 바지런히 걸음을 옮기려니, 곧 그녀의 명패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동시에 내 속물적인 눈알은 그새를 참지 못하고 귀신같이 빛나는 문을 포착해 냈다.

오, 얘도 만만치 않게 빛나는 문인데.

이름이…….

[유스틴 에버딘.]

그러고 보면 어머니께서 시녀로 일하는 가문이 에버딘 대공가였지.

그 집 대공과 대공 부인 이름은 유스틴이 아니었으니, 이 꿈의 주인은 앓아누웠다는 그 대공자일 테고.

[잠깐 구경만 하다 갈까.]

앓아누운 사람의 악몽은 과연 어떨지 구경 한번 해 보자고.

생각을 마친 나는 천천히 문고리를 돌려 꿈속으로 입장했다.

이윽고 내 시선을 사로잡은 건, 악몽이라고 하기에는 지독히도 평화롭지만 동시에 어딘가 이상한 풍경이었다.

루스의 꿈처럼 온통 까만 건 아니지만, 어쩐지 인위적으로 느껴지는 서재의 풍경.

마치 ‘내 서재’처럼…….

[뭐야.]

바로 그 순간, 누군가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귓속으로 파고들었다.

나는 홀린 듯 고개를 돌려 목소리의 주인공을 바라보았다.

칠흑같이 검은 머리카락에, 피곤함에 절은 차가운 은빛 눈동자.

나는 곧바로 알아차렸다.

[나는 이런 걸 만든 적이 없는데.]

얘 나랑 동류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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