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화
[아무래도 주위 사람을 터는 게 빠르겠지?]
문제는 루스의 주변 인물이 대체 누구냐 이건데. 주변에 있는 문들을 털어 보려고 해도 이 문만 너무 동떨어져 있단 말이야.
‘아쉽게도 GPS 기능은 탑재되어 있지 않아서.’
환하게 빛나는 문 위에 달린 명패를 바라보며,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명패에는 「루미니스」라는 글자가 멋들어지게 음각되어 있었다.
혹시나 명패가 안 만들어지면 내가 직접 만들어서 달까 했는데, 알아서 잘 생겨났군.
본인이 ‘루미니스’를 이름으로 자각했으니 어쩌면 당연한 이야기지만.
이건 반대로 이야기하자면, 지금까지 아무도 그를 제대로 불러 준 적이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세상이 정말로 미쳐 돌아가는 거지…….]
말세야, 말세. 이런 세상은 싹 다 망해 버려야 하는데.
이런 말을 하면 언제나 망하는 쪽은 나였기에, 나는 구태여 입 밖으로 말을 내뱉지 않고 루스의 문에서 등을 돌렸다.
루스의 일은 굳이 따지자면 사적인 영역이니, 지금은 그보단 진짜 ‘일’에 집중할 시간이었다.
잠깐 다른 길로 새기는 했지만, 어쨌든 오늘의 목표는 패트릭 존슨이었으니까.
예상보다 루스와 이야기하는 데에 시간을 많이 할애했으니, 조금 서둘러야지. 그렇지 않으면 티나가 나를 깨울지도 몰라.
[아, 그러고 보니 풍경 바꿔도 되냐고 물어보는 걸 깜빡했네.]
계속 있다 보니 어둠이 익숙해져서 그만. 다음에 만날 땐 풍경 좀 바꿔도 되냐고 먼저 물어보고 시작해야지.
마지막으로 소소한 다짐까지 마친 후, 나는 다시 한번 패트릭 존슨이라는 이름이 적힌 종이비행기를 힘껏 날렸다.
그러자 종이비행기는 이번에도 몇 번 휘청거리는 듯싶더니 이내 순항하기 시작했다.
아직 잠에서 깨지 않았나 보네. 혹시나 그때 그 거상처럼 새벽 일찍 깨어나는 사람이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일정한 속도로 나를 안내하던 종이비행기가 어느 문 앞에 도착하자 툭 떨어졌다. 나는 문에 적힌 명패를 확인하고서 두어 번 헛기침을 내뱉었다.
제 아버지처럼 빛나는 문이지 않을까 했는데, 그건 또 아니네.
그 거상이 세상을 떠나고도 벌써 몇 달이 지났는데, 보물 지도에 관한 소식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을 때부터 조금 예상하던 일이지만.
이내 나는 몇 번 호흡을 가다듬고서 망설임 없이 패트릭 존슨의 문을 열어젖혔다.
동시에 루스의 꿈과는 전혀 다른, 주지육림을 방불케 하는 향락적인 광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말하자면.
개판이네.
[무엇 하느냐! 술과 고기를 더 가져오지 않고!]
패트릭 존슨이 거나하게 취한 얼굴로 외쳤다. 누군가 제 꿈에 난입했다는 사실은 꿈에도 모르는 듯싶었다.
……방금 거 좀 웃겼네. 꿈에 난입했다는 사실을 꿈에도 모른다니.
아무튼.
나는 빠르게 정신을 다잡고서 엄지와 검지를 딱, 튕겼다.
그러자 패트릭의 꿈이 크게 흔들림과 동시에, 잠옷 차림이었던 내 모습 역시 순식간에 뒤바뀌었다.
당연하게도 패트릭 존슨의 아버지, 거상 ‘로레인 존슨’의 외양이었다.
마침 배경도 화려하니, 내 주위에 후광만 조금 추가하면 아주 완벽하겠어.
생각을 마친 즉시, 주변에 빛을 두르고서 곧바로 소리를 내질렀다.
[네 이노오옴! 노오옴노오옴노오옴―]
성량과 에코 모두 완벽하고.
쩌렁쩌렁 울려 퍼지는 목소리에 패트릭이 순간 당황하여 황급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뭐야! 대체 누가……, 아, 아버지?]
[이곳에서조차 향락에 빠져 네 아비가 온 것도 못 알아보다니!]
[지, 진짜 아버지시잖아…….]
다시 한번 노호를 내지르자, 패트릭 존슨이 숨을 곳을 찾는 것처럼 발걸음을 뒤로 물렸다.
그러나 조금 전까지 그의 곁에 있던 이들은 이미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상태였다.
대충 아무렇게나 내뱉은 건데, 반응을 보아하니 패트릭은 평소에도 제 아비에게 이런 소리를 듣고 살아온 듯싶었다.
어서 와, 이런 하이퍼 리얼리즘 꿈은 처음이지?
나는 기세를 놓치지 않고 계속해서 패트릭에게 일갈했다.
[내 죽어서까지 네 그 한심한 꼴을 보아야겠느냐!]
[죄, 죄송합니다, 아버지!]
[그나마 남겨 놓은 유산마저 이런 짓에 낭비하고 있으니, 쯧!]
[그, 그건…….]
패트릭이 아무런 말을 하지 못하고 그대로 고개를 숙였다.
아니, 그냥 찔러 본 거였는데 현실에서도 진짜 이러고 사는 거였냐고.
이 정도면 진짜 로레인 씨가 쳐들어와도 할 말 없겠는데. 오히려 나한테 고마워하는 거 아니야?
……아니지. 그 사람이라면 왜 제 보물 지도 정보를 함부로 흘리는 거냐며 내 멱살을 잡겠지.
[다 먹고살자고 하는 짓이니 좀 봐줍시다.]
[예? 잘 못 들었습니다……?]
[뭐?]
[아, 아닙니다!]
한쪽 눈썹을 슬쩍 치켜세우니, 패트릭이 깜짝 놀라 바닥에 엎드렸다.
이 정도로 겁주려던 건 아니었는데, 조금 죄책감 느껴지는걸.
이쯤 하고 본론으로 넘어가 볼까.
[내 유언장에 적힌 내용은 이미 보았겠지.]
[예, 예에.]
[한데 아직도 이렇다 할 소식이 없으니, 이건 필시 내 마지막 역작이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것일 터.]
로레인은 자격이 있는 사람이면 누구든 보물 지도에 접근할 수 있도록 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래서 얼마 전까진 나도 지금쯤이면 어느 정도 암호 해독에 진척이 있겠지, 누구든 암호를 해독하려고 덤벼들고는 있겠지 생각했지만.
저택으로 돌아와서 곰곰이 생각해 보니까 불현듯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
‘사망한 지 몇 개월이나 됐는데, 왜 유언장 관련해서 이야기가 없지?’
……설마, 유언장을 공개하지 않은 건가?
아니, 아마 백 퍼센트겠지. 그렇지 않고서야 패트릭이 저렇게 찔린 표정을 할 리가 없지.
[그, 그것이. 아무래도 가문의 유산을 타인에게 넘긴다는 게…….]
[남에게 빼앗기기 싫으면, 네가 암호를 해독해서 차지하면 되는 노릇 아니더냐!]
[저, 저도 노력은 하고 있습니다!]
내내 고개를 조아리고 있던 패트릭이 순간적으로 억울하다는 듯 얼굴을 치켜들고서 외쳤다. 이내 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다시 쥐구멍에 숨어들 듯 바짝 엎드렸지만.
‘솔직히 가문의 유산을 남에게 넘겨주기 싫은 마음은 백번 이해가 가.’
그로서는 보물 지도 자체를 비밀로 해야 했으니 암호도 혼자서 해독할 수밖에 없었을 터.
한편으로는 또 향락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는 꼴을 보자니, 이것도 아들이라고 키웠을 로레인 씨만 불쌍하게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라.
솔직히 이건 로레인 씨의 잘못도 일부 있어요.
그렇게 알리고 싶었으면 차라리 죽기 직전에 신문이라든지 잡지라든지, 하다못해 사람을 써서라도 세상에 알리셨어야죠.
설마 아들이 자신의 유언을 그대로 묻어 버릴 거라고는 상상조차 못 한 걸 테지만.
[아들아들아들아들아아.]
뭐가 어찌 되었든, 내 목표는 여전히 하나뿐이다.
조금 누그러진 목소리로 패트릭을 부르자, 그가 조심스레 시선을 올려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슬쩍 입가에 미소를 내걸고서…….
[생전에는 한 번도 제게 이렇게 웃어 주시지 않던 분이신데.]
……다시 정색하고서 말을 건넸다.
[내 말을 잘 듣고 기억하거라. 암호 해독에 도움이 될 것이다.]
까먹으면 안 돼. 또 말해 주러 와도 되지만, 귀찮단 말이야. 게다가 멋도 안 살고.
내 말에 패트릭이 눈에 띄게 환해진 기색으로 나를 바라보다가, 곧 무언가 이상함을 느낀 것처럼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데, 아버지.]
[왜 그러느냐.]
[제게 이렇게 도움을 주실 거면, 애초에 보물이 있는 장소를 알려 주시면 되지 않습니까?]
이 양심도 없는 자식이, 자꾸 날로 먹으려 하네? 그게 되겠냐?
진심을 담은 싸늘한 눈빛으로 말없이 패트릭을 바라보자, 그가 곧 침을 꿀꺽 삼키며 시선을 내렸다.
나는 그가 보지 않는 틈을 타 슬쩍 입꼬리를 빼 당겼다.
물론 당장 돈이 급했다면 암호 해독 방법이 아닌, 장소를 알려 줬겠지.
‘하지만 지금은 그렇게 돈이 급한 게 아니거든.’
게다가 저 망나니 같은 성품을 보건대, 제대로 방비하지 않으면 몰래 폐광산으로 가 보물만 가지고 빠지려 들지 몰랐다.
그래서는 안 되지, 암.
물론 가장 중요한 이유는 그게 아니지만.
[시간이 없으니 빨리 시작하자꾸나.]
너 말고도 앞으로 꿈 몇 개 더 돌려면 급해.
나는 자꾸만 비집어 나오려는 웃음을 억지로 집어넣으며 근엄하게 말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로레인 씨.
나도 이 폐광……, 아니, 보물이 한 사람한테 독점당하는 건 바라지 않으니까.
보물은 경쟁할수록 좋지, 아무렴. 경쟁자가 많아야 입찰 가격도 올라가고, 그래야 내가 돈을 버니까.
이게 바로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상생 아니겠어?
물론 백날 뒤져 봐야 보물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을 테지만, 어쩌겠어? 꿈을 믿은 잘못이지.
불만 있으면 꿈으로 찾아오든가!
마지막 꿈에서 벗어나자마자, 나는 영혼까지 탈곡당한 것처럼 그대로 자리에 주저앉았다.
[와, 죽겠다.]
몸이 힘든 게 아니라 정신이 힘들다, 정신이.
어떻게 사람이 그렇게까지 못 외울 수가 있지? 왜 떠다 먹여 줘도 먹지를 못해?
‘하마터면 진짜 심한 욕할 뻔했네.’
패트릭에게 암호를 가르쳐 주기 위해 어르고 달래고 성내고 혼내는 데에 온 기력을 다 쏟아부었더니, 말 그대로 영혼이 빠져나가는 것만 같았다.
‘자, 이건 많이 본 형태의 암호지? 이게 어떤 단어로 치환된다고?’
‘이, 이 암호가 전에도 나왔다고요?’
‘……시험, 이 새끼야, 시험. 이 단어만 지금 열 번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