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화
언성을 높이고 있던 두 사람의 시선이 동시에 내게 닿았다.
나는 그들을 향해 어색하게 웃음을 흘렸다.
……이런 빌어먹을 몸뚱이 같으니라고. 적어도 이 타이밍은 아니지 않냐.
“미아.”
이내 아버지가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내 애칭을 불렀다.
나는 몇 번 더 기침을 내뱉고서 슬그머니 인사를 건넸다.
“좋은 아침이에요, 아버지.”
상황은 전혀 좋아 보이지 않지만, 적어도 날씨 하나는 좋네요.
“침실에 있지 않고는.”
애꿎은 창문 너머로 시선을 옮기며 허허롭게 미소 짓고 있으려니, 아버지가 인상을 찌푸리며 말을 건넸다.
표정을 보아하니 내가 이곳에 있다는 사실이 영 마뜩잖은 듯싶었다.
티나한테 제 딸이 침실 밖으로 나오지 않도록 곁을 지키고 있으라고 당부했을 텐데, 내가 이곳에 있으니 당연히 당황스러우시겠지.
이따 티나가 혼나지 않도록 잘 달래야겠다. 나 때문에 괜히 불똥 튈라.
“바깥이 조금 소란스러워서요.”
덕분에 꿈에서도 갑자기 깨고, 그 정체 모를 꿈에서도 난데없이 쫓겨나게 되었답니다.
나는 여전히 생긋 웃는 얼굴로 또박또박 말을 내뱉었다.
그러고 보니 그 꿈은 진짜 뭐였을까. 아무리 봐도 제대로 된 꿈은 아니었는데. 게다가 그 꿈 주인.
꿈 주인은 진짜로 그냥 두고 넘어갈 수는 없어서…….
“이 아이가…….”
바로 그때, 앞쪽에서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서 앞에 선 사람을 마주 바라보았다.
왜요, 뭘 보쇼.
“바로 ‘그 따님’이로군요.”
그 순간, 나는 그의 눈에 깃든 작은 동정심을 발견해 냈다. 사채업자지만 의외로 인간 말종까지는 아닌 모양이었다.
앗, 그렇다면 더욱 자세히 봐 주십쇼. 제가 이렇게 아픈 사람입니다.
나는 곧장 눈에 힘을 풀고서 파리한 낯으로 인사를 건넸다.
“안녕, 콜록! 하세요……. 제가, 괜히 끼어든, 쿨럭! 켁……, 건 아닌지.”
어떠냐, 내 혼신의 연기가 담긴 병약 연기가! 물론 90퍼센트쯤은 진짜란다.
곧 죽을 안색으로 힘겹게 말을 잇자, 그의 입에서 자그마한 중얼거림이 새어 나왔다.
“……오늘내일한다더니.”
예, 맞습니다. 오늘내일한 지 한 7년 되었지만요. 이쯤 되면 좀 지긋지긋하죠.
“크흠.”
그렇게 몇 초간 나와 시선을 맞추던 남자가 이내 헛기침을 내뱉으며 시선을 돌렸다.
나는 속으로 방긋 미소 지으며 남몰래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저 표정을 보니 오늘은 이쯤에서 돌아갈 것 같군.
“오늘은 따님을 봐서 이만 가 보겠습니다. 내게도 저 또래의 여식이 있는 걸 다행으로 아십시오.”
이윽고 그가 전보다 낮아진 언성으로 선심 쓰듯 말했다. 그러다가도 그는 응접실을 벗어나다 말고 뒤를 돌아 기어코 경고를 날렸다.
“이번 달 말에 다시 이자를 받으러 오겠습니다. 만일 그때에도 돈이 준비되어 있지 않다면…….”
“…….”
“그때는 이렇게 쉽게 넘어가지 않을 겁니다.”
곧이어 마지막 말을 마친 남자가 쾅, 응접실 문을 닫고서 저택을 빠져나갔다.
나는 한숨을 내쉬는 아버지의 지친 어깨를 바라보며 그를 따라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상한 꿈이고 나발이고, 우선은 불난 우리 집 문제부터 해결하는 게 우선이겠군.
“네게 이런 모습을 보이고 싶지는 않았는데.”
둘만 남은 응접실 안, 어색한 정적을 먼저 깨트린 건 아버지였다.
그는 여전히 테이블 앞 소파에 앉은 채 손으로 연신 머리를 쓸어 넘겼다. 나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그의 곁에 다가가 앉았다.
“아버지.”
아버지의 이마에는 세월의 흐름이 여실히 느껴지는 깊은 주름이 새겨 있었다. 정확히는 살아온 세월보다 더 깊고 진한 주름이었다.
내가 멀쩡했다면 이런 고생은 하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물론 이런 말을 하면 아버지는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며 경을 치겠지만.
“얼마나 빌린 거예요?”
그렇기에 나는 구태여 그에게 얄팍한 위로를 건네는 대신, 상황 파악을 위한 질문을 던졌다.
물론 딱히 대답을 바란 건 아니었다. 애초에 아버지가 이런 질문에 답을 해 줄 사람도 아니고.
“네가 신경 쓸 필요는 없단다, 미아.”
옙, 아빠라면 당연히 그렇게 말할 줄 알고 있었습죠. 그렇다고 정보 캐기를 멈출 생각은 없지만.
나는 대답 대신 입술을 꾹 다물고서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어머니도 지금 상황에 대해서 알고 계시겠지.’
지금은 대공 저 시녀로 일하고 계시긴 하지만, 아버지가 가산 상황을 숨길 사람은 아니니까.
그건 결국 어머니께서도 막지 못할 정도로 상황이 좋지 못하다는 뜻일 테고.
게다가 고리대금까지 손을 댄 걸 봐선, 빚으로 빚을 돌려 막다가 담보로 걸 것도 동나 더는 빌리지 못해 이 꼴이 난 게 분명했다.
이쯤 되면 티나가 아직 이곳에 남아 있는 이유가 궁금해질 지경인데.
“아가씨!”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때마침 티나가 응접실로 들이닥쳤다. 손에는 물잔이 놓인 트레이를 든 채였다.
뛰어온 것처럼 보이는데, 물잔에서 물이 한 방울도 흘러넘치지 않았다니. 티나는 역시 대단하단 말이야.
나는 짐짓 아무것도 모르는 척 그녀를 향해 손을 흔들어 보였다.
그러자 티나는 울화통이 터진다는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다가, 이내 내 옆에 앉은 아버지를 의식하고서 고개를 숙였다.
“죄송해요, 주인님. 아가씨 곁을 떠나지 말았어야 했는데…….”
“아니, 되었다. 보나 마나 미아가 또 미꾸라지처럼 빠져나온 거겠지. 소란을 잠재우지 못한 내 탓이다.”
“맞아요, 아버지. 티나는 잘못 없어요.”
내 말에 내게 닿은 두 사람의 눈초리가 실처럼 가늘어졌다. 아무래도 내가 영 좋지 못한 타이밍에 끼어든 듯싶었다.
내가 오지 않았으면 아직도 그 남자한테 싫은 소리를 듣고 있었을 거면서.
나는 한 번 입술을 삐죽였다가, 이내 언제 그랬냐는 듯 그의 손등 위에 내 손을 겹쳤다.
일단 일을 해결하기 전에 확실히 해야 할 게 있지.
“아버지.”
나직한 부름에 아버지가 눈동자를 데구르르 굴려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그 푸른 눈동자 안에 가득 찬 내 모습을 바라보며 슬며시 미소 지었다.
윤기 하나 없이 푸석한 머리카락, 움푹 파인 뺨, 그리고 버석하게 마른 입술.
빈말로라도 아름답다고 할 수 없는, 그러나 아버지에게는 누구보다 아름다울 하나뿐인 소중한 딸.
“이제는 저 때문에 가산을 탕진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그런 그에게 이런 말을 해야 하는 상황 자체가 마음 아팠지만.
“미에나.”
“충분히 노력했으니까요.”
그들은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동원하여 최선을 다했다. 그러니 이렇게 오래 살아남을 수 있었던 거지.
원래대로라면 몇 해 전에 이미 죽었어야 할 운명인데.
“그런 말 하지 말거라, 미아.”
내 말에 아버지가 단호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그의 눈매는 대부업자에게 삿대질을 당했을 때보다 더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나도 더 물러설 수 없었다.
고리대금이라니, 이 딸내미는 용납할 수 없다!
“그렇게 많은 돈을 허비하고 얻은 결과가 이거잖아요, 아버지.”
“허비라니, 무슨 그런 말을…….”
“냉정하게 생각해야 해요. 제가 떠난 후에도 두 분은, 이 저택의 사람들은 계속해서 살아가야 하잖아요.”
“말도 안 되는 소리!”
말이 이어질수록, 아버지의 미간에 피어오른 주름이 점점 깊어졌다. 그러고서 그는 급기야 내 손을 내치며 소리를 내질렀다.
나는 그 눈동자 안에 스민 노기와 죄책감, 연민, 그리고 괴로움을 외면하지 않으며 천천히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남은 시간이라도 아무 걱정 없이 보내고 싶어요, 아빠.”
“…….”
“함께 가고 싶은 곳에 가고, 예쁘고 좋은 걸 보고. 음, 먹을 수만 있다면 맛있는 음식도 먹고요.”
이곳에 있는 사람들이 나 때문에 절절매는 모습은 더 보고 싶지 않았다. 이건 정말로 진심이었다.
이미 나는 두 사람 덕에 숱한 애정을 받았고,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한 삶을 살았다.
그러니 이제는 두 사람이 나 때문에 더 힘들지 않았으면 좋겠어.
“꼭 금방이라도 떠날 사람처럼 말하는구나.”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내내 입을 다물고 계시던 아버지가 힘없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나는 다시 한번 그의 손을 맞잡으며 답했다.
“제 몸은 제가 제일 잘 아니까요.”
나는 무슨 짓을 하더라도 올해 겨울을 넘기지 못할 것이다. 확신할 수 있었다.
전생에서 이미 마주한 적 있던 죽음이 이 순간에도 시시각각 가까워지고 있는 게 느껴졌으니까.
“이제는 정말로 준비해야죠.”
우리가 헤어질 준비를.
평소처럼 담담하게 건넨 말에, 아버지의 눈시울이 붉게 달아올랐다.
이윽고 그는 인정할 수 없다는 듯 몇 번 고개를 내저었다가, 파르르 떨리는 손으로 내 손등을 쓸어내리며 길게 숨을 내쉬었다.
티나 역시 금방이라도 울 것만 같은 얼굴로 우리를 바라보다가, 나와 시선이 마주치자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나는 러그에 새겨진 물 자국을 모른 척하며 얕게 숨을 내쉬었다.
이제는 제법 익숙한 고통이 심장을 죄는 것만 같았다.
음, 이렇게까지 어두운 분위기를 잡으려고 했던 건 아닌데. 난 그냥 나 때문에 사채 쓰지 말라고 하려던 것뿐인데.
갑자기 분위기 초상집 되어 버렸네. 아직 초상 치르기엔 조금 이른데…….
“가끔 생각한단다.”
천 근 같던 정적을 깨트린 건 이번에도 역시 아버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