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화
나는 그대로 문고리를 돌리려다 말고 고개를 꺾었다.
허락받지 않은 사람과는 대화를 나누면 안 된다니.
그게 무슨 똥 같은 소리야?
[누가?]
[아버지가…….]
아버지가 애한테 그딴 말을 한다고?
들으면 들을수록 이해되지 않는 상황에, 미간에 자연스러운 주름이 피어올랐다.
문 한번 잘못 들어왔다가 어쩐지 그냥 지나쳐서는 안 될 현장을 발견해 버린 것 같은데.
설마 문 앞에 명패가 없던 것도, 아무도 얘한테 이름을 안 지어 줘서 그런 거 아니야?
[저기, 이름이 뭐예요?]
[……그게 뭐예요?]
환장하겠네, 진짜. 정말 이름이 없는 거였냐고.
지끈거리는 머리를 손으로 꾹꾹 누르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 이상 엮이면 진짜 골치 아파질 것 같은데. 내 온 직감이 소리쳐 외치고 있는데.
솔직히 이걸 보고도 어떻게 지나쳐! 나는 그렇게 자란 적 없다!
[저기요, 일단…….]
우선 정확한 상황 판단을 위해 몇 가지를 더 물어보려던 찰나였다.
그 순간 몸이 크게 휘청이는 느낌이 들더니, 손가락 끝부터 천천히 옅어지기 시작했다.
내 신체가 잠에서 깨고 있다는 전조였다.
하필 이런 때……!
나는 시시각각 옅어지는 손과 어둠 속을 번갈아 바라보며 소리를 내질렀다.
[거기!]
[네, 네?]
[이 시간에! 나중에 꼭 다시 올 테니까! 기다리고 있어요!]
[다시……?]
[그래! 다시!]
외침이 끝나기 무섭게, 몸이 무겁게 내려앉는 느낌이 전신을 휘감았다. 물 먹은 거대 스펀지 아래 파묻힌 것만 같은 이상한 기분이었다.
이건 아무리 반복해도 익숙해지지 않는단 말이야.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을 천천히 들어 올리며 얕게 신음을 흘렸다. 그러자 가까이서 티나의 근심 어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죄송해요, 아가씨. 시끄러우시죠.”
나는 이내 두 눈을 완전히 뜨고서 재빨리 상황을 살폈다.
연신 안절부절못하는 티나와 굳게 닫힌 침실의 문.
“대체 언제까지 기다리란 말입니까!”
그러고도 채 막지 못해 흘러들어 오는 누군가의 고함.
“아하.”
상황을 파악한 즉시,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손님이 왔구나.”
이건 꽤 드문 일인데.
시두스 가문은 손님이 자주 오지 않는 편에 속했다.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이야기였다.
옛날이면 몰라도 이제는 망하기 직전의 가문일 뿐인데, 누가 이런 가문과 친교를 나누고 싶겠는가.
유서 깊은 백작 가문이라는 점을 내세우려 해도, 그건 어디까지나 ‘결혼이 가능한 자녀’가 있을 때의 이야기지.
시두스 가문의 하나뿐인 영애는 결혼은 고사하고 오늘내일하는 몸인걸.
그러니 시두스 가문에 ‘손님’이 왔다면 답은 결국 하나였다.
이자를 받으러 온 대부업자겠지.
전부터 심상치 않아 보이더라니, 결국엔 사채에 손을 벌려야 하는 단계까지 와 버렸던 걸까.
이렇게 닦달하러 온 걸 보면 최근에 빌린 것도 아닌 것 같은데.
“금방 떠날 거예요.”
살포시 인상을 찌푸리자, 티나가 황급히 달래듯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내가 바깥의 소란을 두려워한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딱히 그런 건 아닌데. 티나는 나를 너무 심약한 사람으로 여기는 것 같단 말이야.
“언제부터 저 상태였어?”
바르작대는 이불을 걷어 내며 무심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자 티나는 몇 번 입술을 어물거리다가 조심스레 답했다.
“정말로 얼마 지나지 않았어요. 주인님께서 응접실로 향하신 게 아마도 15분 전쯤이니…….”
그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또 한 번 커다란 고함이 방 안으로 새어들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문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가, 문틈을 막은 천을 발견하고서 짧게 숨을 들이켰다.
정말 내가 못 듣게 하려고 최선을 다했구나. 이것도 결국엔 부모님이 지시한 거겠지.
“아가씨께서 편히 주무셔야 한다고…….”
내 시선을 눈치챈 티나가 덧붙여 설명했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나뿐인 딸한테 그런 모습을 보여 주고 싶지는 않았겠지. 특히나 이 일이 누구 때문에 벌어진 건지 따져 본다면 더더욱.
그러니까 그냥 포기하면 편하다니까, 이 사람들은 미련하게 그걸 못 해서는.
보통 소설에서는 능력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내쫓기 일쑤인데, 왜 우리 집은 그러질 않아서 이 고생이람.
“나가 봐야겠어.”
어쨌든 일단은 정확하게 사태를 파악하는 게 우선이다.
여전히 나를 괴롭히는 고통을 익숙하게 감내하며 침대 밖으로 다리를 내민 순간이었다.
“안 돼요, 아가씨.”
티나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내 앞을 막아서며 고개를 내저었다.
“주인님께서 무슨 일이 있어도 손님이 가실 때까지 아가씨를 안에서 모시라고 하셨어요.”
“티나.”
“아가씨께서는 몸도 성치 않으시잖아요…….”
여기서 내 몸 상태를 운운한다고? 물론 그게 당연하지만.
나는 딱히 반박할 말을 찾지 못하고 살포시 미간을 좁혔다.
여기서 ‘나 때문에 일어난 일이잖아’라고 말하면 티나는 그렇지 않다며 펄쩍 뛰겠지. 갑자기 산책하고 싶다고 해 봤자 씨알도 먹히지 않을 테고.
그렇다면 역시 방법은 이거 하나뿐인가.
“그래, 알았어.”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서 천천히 이불 속으로 기어들어 갔다. 그러자 곁에서 나지막한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고집부리지 않고 빠르게 단념했다는 사실이 그저 다행인 모양이었다.
그래, 티나.
내 나이가 몇인데 안 된다는 일에 아득바득 떼를 쓰겠니. 그것도 다 기력이 필요한 일인데.
얌전히 있을게, 얌전히…….
물론 내 몸의 의견이 뇌랑 합치하는지는 조금 두고 봐야겠지만.
“쿨럭, 쿠울럭! 케엑!”
곧바로 나는 보란 듯이 목을 긁으며 거세게 기침을 토해 내기 시작했다.
굳이 연기를 하려 하지 않아도 내내 기침을 참고 있었던 탓에, 한번 터진 기침은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그러니까, 곧 숨넘어갈 것처럼 거세게 말이다.
“아가씨!”
곧이어 티나가 내 상체를 일으켜 세우며 황급히 물을 건넸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그것을 받아 들었다가, 실로 자연스럽게 물잔을 엎질렀다.
이건 좀 과한가 싶긴 하지만, 앞으로를 위해선 어쩔 수 없지.
“티, 나, 콜록! 물, 물 좀, 퀄럭! 다시…… 올 때, 기침약도 같이…….”
“자, 잠시만요, 아가씨! 여기 계시면 금방 다녀올게요!”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티나가 허둥지둥대며 바르게 자리를 박찼다.
나는 그녀가 문을 열고 떠날 때까지 열성적으로 기침을 내뱉었다가, 이내 완전히 사라진 걸 확인하고서야 기침을 삼켰다.
내 침실에서 식당까지는 꽤 거리가 되지. 그리고 응접실은 식당의 반대편에 있고. 게다가 기침약까지 챙겨 오려면 조금 시간이 소요될 터였다.
그 말인즉, 튀려면 지금이 딱이라는 소리.
“미안, 티나.”
내가 또 가만히 있는 데는 이골이 나서 말이야.
나는 곧바로 침대를 벗어나 응접실을 향해 나름대로 열심히 뛰기 시작했다.
티나가 침실에 오기 전에 응접실에 도착하려면 꽤 빠듯하게 움직여야 할 듯싶었다.
이럴 때를 위해서 평소에 산책을 열심히 해 뒀지. 매해 겨울을 넘기지 못할 거라는 선고만 들은 것치고는 아직 꽤 튼튼하다고.
물론 한 번 뛸 때마다 수명이 몇 달은 더 줄어드는 것 같아지지만.
“헥, 허억. 아이고야…….”
이젠 이 짓도 두 번은 못 하겠다.
곧이어 응접실에 도착한 후, 가쁜 숨을 정돈하며 손으로 식은땀을 훔쳤다.
그나마 다행인 건 이 저택에 사용인이 많이 줄었다는 점이었다. 그렇지 않았으면 옛적에 사용인한테 붙잡혀서 침실로 끌려갔겠지.
사실 사용인이 줄어든 것도 임금을 제때 지급하지 못한 까닭이지만.
……결국엔 이것도 내 업보라 이거군. 나는 이내 몇 번 심호흡하고서 조심스레 응접실의 문을 열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응접실 안에서는 두 사람이 다투는 듯한 소리가 계속해서 들려오고 있었다.
정확히는 한 사람이 화를 내면 다른 한 사람이 쩔쩔매며 반박하는 모양새였다.
“돈을 빌렸으면 갚아야 할 것 아닙니까? 원금은커녕 이자조차 감당 못 하면 나보고 대체 어쩌라고!”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 하지 않았나. 게다가 이자를 그렇게 불리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그럼 애초에 내게 돈을 빌리지 말아야지. 돈은 빌려 놓고 이렇게 나 몰라라 하는 법이 어딨습니까!”
“아직 상환 기한도 남아 있지 않나!”
아이고, 개판이구먼. 이 정도면 누가 들어오는지도 모르겠어.
나는 조심스레 문고리를 비틀고서 소리가 나지 않도록 천천히 문을 열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역시나 두 사람의 모습이었다.
귀족이라기엔 품위가 다소 떨어져 보이는, 테이블 앞에 선 채 삿대질하는 남성과 그 앞에 앉은 아버지.
……지금 저 사람이 우리 아버지한테 손가락질하고 있는 거야?
열받네?
“그때까지 기다린다고 한들, 이자라도 갚을 수 있긴 한 겁니까? 최근에 듣자 하니 내게 담보로 건 광산도 이제 폐광이 되기 일보 직전이라고 하던데. 내게는 그럴 일 없다고 신신당부하더니!”
“그, 그건…….”
대부업자의 말에 아버지의 안색이 시퍼렇게 물들었다. 딱히 반박할 말을 찾지 못한 까닭이었다.
저 사람은 무슨 당연한 말을 하고 있담. 그러니까 고리대금업자한테까지 손을 벌린 거잖아.
역시 이 지경까지 오지 않도록 내가 좀 더 신경을 썼어야 했는데. 아니면 이제는 나 좀 포기하라고 설득해 봤어야 했어.
나는 설레설레 고개를 내젓고서 응접실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때까지도 두 사람은 누가 들어오건 말건 아랑곳하지 않은 채 계속해서 말싸움을 이어 나가고 있었다.
“돈을 갚을 능력이 없다면 이 저택이라도 받아 가야겠습니다!”
“우선 언성 좀 낮추고, 조금만 더 기다려 주게. 자네에게도 자식이 있지 않나. 아비의 정을 봐서라도…….”
아이고, 여기서 또 내 얘기가 나오다니. 혹시 내가 등장하면 안 되는 타이밍인가?
안쪽으로 걸음을 옮기다 말고 슬쩍 뒷걸음질 치려던 찰나였다.
애써 갈무리했던 숨이 한순간 꼬이더니, 이내 목구멍 깊숙한 곳에서 참지 못하고 기침이 터져 나왔다.
“콜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