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남자 밥해주기-93화 (93/93)

93화. 그 남자, 평생 밥해주기.

“차 사장. 아니, 은돈 씨. 이건 해도 해도 너무하잖아.”

도로 위.

운전대를 잡은 닥터 한이 룸미러로 뒷좌석의 은돈을 힐끔 응시했다.

토실토실 살이 오른 그녀의 얼굴은 흡사 호빵맨을 연상케 했고……

“아니 어떻게 3년 만에 그렇게 살이 찔 수가 있어?”

“그게……러시아 음식이 생각보다 입에 잘 맞더라구요……”

은돈이 통통한 뺨을 봉숭아 빛으로 물들이며 겸연쩍게 웃었다.

“아니 좀 찌면 어때?! 러시아에서 젤 잘 나가는 닭 요리 집 사장님인데!”

그 때 아부쟁이 미자가 불쑥 끼어들었다.

“은돈아, 그보다 너. 이번에 5호점 냈다며? 한국에도 점포 하나 차릴 생각 없어? 나 바지 사장 시켜주면 진짜 잘 할 자신 있는데.”

바지 사장? 은돈이 쯧쯧 혀를 차며 창밖으로 얼굴을 돌렸다.

“어, 다 왔네요. 여기예요, 선생님! 스톱!”

은돈의 외침에, 끼이익-! 닥터 한의 차가 급하게 멈춰 섰다.

이윽고 뒷문을 열고 내려선 은돈이 눈앞의 국제 컨벤션 센터를 긴장한 듯 올려다봤다.

“니가 여기서 강연회를 한다고……? 참 세상 오래 살고 볼 일이다.”

창밖으로 고개를 내민 미자가 빌딩건물을 올려다보며 혀를 내둘렀다.

그랬다. 은돈이 삼년 만에 한국 땅을 밟은 이유는 이곳에서 열리는 포럼에 강연자로 초청받았기 때문이었다.

“후. 나 다녀올게.”

짧게 심호흡을 한 은돈이 미자와 닥터 한에게 눈인사를 해보이곤 걸음을 옮겼다.

……그로부터 삼십 분 후. 컨벤션 센터 내부, 대 회의장.

투 엑스라지 사이즈의 정장으로 갈아입은 은돈의 모습이 보였다.

그녀가 멀리서 다가오는 남자를 발견하고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태영 씨!”

“와 차은돈, 이거 얼마만이야?”

깔끔한 수트남의 이름은 태영. 은돈과는 모스크바에서 열린 창업 설명회에서 만나 친해진 사이였다.

“고마워. 바쁠 텐데 내 초대에 응해줘서.”

“공짜로 비행기 티켓까지 받았는데, 무조건 와야죠.”

은돈이 유쾌하게 웃으며 태영과 대화를 주고받았다.

그즈음, 그녀의 곁으로 한 남자가 점점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슬림핏 수트 차림에 훤칠한 올림머리를 한 남자……그랬다. 그는 독현이었다.

삼 년이 지났음에도 여전한 수트빨과, 고고한 싸가지를 자랑하는.

“사장님, 포럼 발족 후에 열리는 CEO 간담회에 반드시 참여하셔야 합니다.”

비서인 듯 한 남자의 말에 너무 집중한 탓일까.

독현은 점차 가까워지는 은돈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고, 그것은 은돈 역시 마찬가지였다.

결국, 두 사람이 그렇게 서로를 지나치려는 순간.

“태영 씨, 여기 화장실이 어디……”

무심코 돌아 선 은돈이 정면으로 떡 마주친 독현을 보며, 충격에 말을 잇지 못했다.

“……차은돈?”

갑자기 맞닥뜨린 거구의 덩치녀. 그녀를 한눈에 알아본 독현의 눈빛이 출렁였다.쿵쾅 쿵쾅 쿵쾅. 은돈이 미친 듯 뛰는 가슴을 부여잡았다.

대체 어떻게 날 알아봤지? 헤어진 지 벌써 삼 년이나 지났건만.

그 사이 살이 20kg이나 불었건만!

“어떻게 된 거야? 왜 여기 있는 거지?”

독현의 물음에, 멘붕에 빠진 은돈의 억지웃음을 지었다.

“하……하하……그러게요. 제가 왜 여기 있을까~요?”

“……?”

독현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이맛살을 찌푸렸다.

윽. 맥이 탁 풀려버린 은돈이 어깨를 늘어뜨렸다. 그리곤 모기 소리로 대답했다.

“오랜만이에요……사장님……”

얼마 후.

대회의실에서 벗어난 두 사람이 햇빛이 쏟아지는 복도 앞에 나란히 서 있었다.

“어떻게 니가 한국에 있는 거야.”

독현이 말문을 열자, 은돈이 머쓱한 듯 머리를 긁적거렸다.

“실은 제가……글로벌 청년 사업가 대표로 강연을 좀 하게 되서……”

“그럼, 그것 때문에 잠깐 귀국한 건가?”

“네……”

은돈이 고개를 푹 수그렸다.

“제가 멍청했어요. 외식 기업 포럼인데, 사장님이랑 마주칠 거란 생각을 왜 못했는지……”

하긴. 3년 만에 한국 땅을 밟자마자 구 남친과 맞닥뜨릴 줄 누가 예상이나 했겠어.

그것도 이런 뚱뚱보의 모습으로.

은돈의 입술 새로 옅은 한숨이 새어나왔다.

“어쨌든……오랜만이군.”

찰나의 정적을 깨고 독현이 입을 열었다.

“네. 오랜만이에요.”

은돈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후 두 사람 사이에 꽤나 형식적인 대화가 오갔다.

“러시아에서 사업을 한단 얘긴 들었어. 이쪽 업계에서 일하다 보니 알고 싶지 않아도 알게 되더군.”

알고 싶지 않아도.

3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말 한마디에 이렇게 가슴이 울렁거리는 건 왜 일까.

은돈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어렸다.

“전 한국 소식, 사장님 소식……하나도 모르고 지냈어요. 그게 편할 것 같아서요.”

“……그렇군.”

“참. 결혼 생활은 어때요?”

일순. 은돈의 물음에 독현의 입가가 묘하게 굳어졌다.

“3년 전에 약혼했으니까, 지금쯤 두 사람……부부 맞죠? 헛. 설마 벌써 애가 있다거나,”

“그러는 넌.”

독현이 그녀의 말을 자르며 물었다.

“넌 이지세랑 어떻게 지내.”

“네……?”

갑작스레 튀어나온 그 이름에, 은돈의 눈동자가 요동쳤다.

“같이 떠났다는 얘기 들었어. 러시아에서, 함께 지내는 건가.”

“그건……”

잠시 말끝을 흐리던 그녀가 곧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냥, 별 탈 없이 잘 지내요……저흰.”

“그래?”

“네.”

은돈의 대답을 끝으로, 서늘한 정적이 얼마간 이어졌고……그때 멀리서 태영이 나타났다.

“차은돈! 뭐해, 한참 찾았잖아. 곧 포럼 시작할 거야.”

“아, 네! 사장님 저……먼저 들어가 볼게요.”

어색한 인사를 건네며, 은돈이 독현의 곁을 지나쳤다.

그런데 그 때. 독현의 시선이 은돈의 왼손, 약지에 머물렀다.

삼 년 전, 자신이 선물한 프러포즈 반지가 여전히 그녀의 손가락에 끼워져 있었다.

독현이 혼란스러운 시선으로 저만치 멀어지는 은돈을 바라보았다.

***

“해외진출을 앞둔 국내 외식 기업들이 세계적인 브랜드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첫째, 철저한 현지화 전략이 필요합니다. 기존 한식의 정통을 과감히 탈피한……”

현장.

원형 테이블에 앉은 은돈이 자신의 순서를 기다리며 무대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아니, 사실 그녀의 모든 신경은 멀리 떨어진 독현의 테이블에 쏠려 있었다.

후우……안 돼. 그래. 의식하지 말자. 지금은 강연만 신경 쓰는 거야.

“다음으로, 글로벌 청년 사업가 대표인 차은돈 씨의 강연이 있겠습니다.”

굳게 마음을 다잡은 은돈이 이내 우렁찬 박수소리와 함께 몸을 일으켰다.

몇 분 후.

무대 위의 뚱녀, 아니 은돈이 뜨거운 조명을 받으며 마이크를 쥐었다.

“어, 일단……강연을 시작하기에 앞서, 제가 준비한 자료부터 함께 보시죠. 러시아에 가게를 오픈하면서 제작했던 홍보 영상인데요……”

은돈이 리모컨을 들고 빔 프로젝터를 향해 꾹 눌렀다.

그러나 기계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고……뻘쭘한 몇 초가 흘렀다.

“보, 보시죠.”

한 번 더 꾹. 또 꾹. 은돈이 연신 리모컨을 눌러 댔다.

이게 왜 안 되는 거지? 그녀의 이마 위로 식은땀이 송글송글 맺혔다.

그런데 그때, 적막한 공기를 깨고 독현이 가볍게 오른손을 들었다.

“질문 받습니까?”

“네? 네! 물론입니다!”

살았다. 무대 위의 그녀가 안도한 듯 독현을 내려다 봤다. 그런데.

“어째서 그 반지를 끼고 있는 겁니까.”

“네 그건!……네?”

놀란 은돈이 떨어뜨릴 뻔한 마이크를 가까스로 붙잡았다. 고개를 내리자, 자신의 왼손에서 빛나고 있는 반지가 보였다. 아……그녀의 입에서 짧은 신음이 쏟아졌다.

“호, 혹시 다른 분. 질문 없으신가요? 프로젝터가 잠시 고장 난 것 같은데 그동안,”

“반지. 왜 버리지 않은 거냐고 물었습니다.”

“……주제와 상관없는 질문은 받고 싶지 않은데요.”

은돈이 독현을 보지 않은 채 대답했다.

“혹시 러시아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대답하지 않겠습니다.”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그들은 아랑곳 않고 고집스런 대화를 이어갔다.

“……이지세와는, 어떻게 된 겁니까.”

“그것도 대답하고 싶지 않은데요.”

자꾸만 회피하는 은돈을 보며, 독현이 날카롭게 시선을 번득였다.

“질문을 바꾸죠. 애초에 이지세와 같이 떠나긴 한 겁니까?”

귓속을 파고드는 한마디. 은돈이 말문이 막힌 듯 입을 다물었다.

망했어. 처음부터 여길 오는 게 아니었는데……그녀가 체념한 듯 고개를 떨궜다.

“사장님이……나에 대해 그렇게 궁금한 게 많았는지 미처 몰랐네요. 갑자기 왜 이러는 거죠? 지난 삼 년간 연락 한번 없었으면서.”

“……”

“물론, 연락을 기다린 건 아니지만요.”

은돈이 굳어진 얼굴로 뒷말을 덧붙였다. 이게 뭐야……한심해 죽겠다 정말.

“죄송합니다. 강연은… 중단할게요.”

툭, 마이크를 내려놓은 그녀가 이내 머리를 쓸어 넘기며 무대에서 내려섰다.

***

“차은돈!”

로비. 앞서 가는 은돈의 팔을, 독현이 붙잡았다.

“……미안해. 네 강연, 망칠 의도는 없었어.”

“……됐어요.”

그의 사과가 진심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은돈이 덤덤히 입을 열었다.

“어차피 프로젝터도 고장 났겠다, 할 말도 죄 까먹었겠다, 딱 죽을 맛이었는데 사장님 덕분에 잘 빠져나왔죠 뭐.”

그녀가 잠시 말을 멈추고 호흡을 정리했다.

“반지는……도저히 버릴 수가 없어서 끼고 있었던 거예요.”

“뭐?”

“손가락에 맞춰서 사이즈를 두 번이나 늘렸어요. 죽어도 못 버리겠어서.”

“……”

“그렇다고 사장님한테 미련이 있다거나 그런 건 아니에요. 걱정 마요.”

은돈이 태연 한 척, 독현을 올려다봤다.

“이젠 그냥 습관처럼 끼고 있는 거니까. 문소라 씨한텐 말하지 말아줘요. 괜한 오해 받고 싶지 않,”

“나도 결혼 같은 거 한 적 없어.”

갑작스런 독현의 한마디가 은돈의 가슴을 흔들었다.

“물론 이제 와서 너한테 미련이 남아서 하는 소린 아냐.”

그가 은돈을 빤히 직시하며 말했다.

“두 사람……결혼 안 했다구요? 하지만 삼 년 전에 분명,”

“차였어. 삼 년 전 약혼식 날.”

독현이 스스럼없이 대꾸했다. 그 모습에 벙쪄 있던 은돈이 곧 저도 모르게 충동적인 한마디를 던졌다.

“나도……지세랑 같이 떠난 적 없어요.”

“……그럴 것 같더군. 어떻게 된 거야.”

“사실은.”

은돈이 용기를 내 뭔가를 말하려는 찰나. 독현의 비서가 나타났다.

“사장님. 간담회가 곧 시작 될 겁니다. 유럽과 러시아의 빅 바이어가 모두 참석하는 자립니다. 가셔야 합니다.”

비서의 채근에, 독현이 난감한 듯 눈썹을 구겼다. 은돈이 그를 위해 먼저 입을 열었다.

“얼른 가보세요. 저도 미자랑 만나기로 해서……그럼 이만.”

“잠깐,”

독현이 돌아서는 은돈을 붙잡았다.

“출국이 언제지?”

“……내일이에요. 내일아침.”

“아침?”

“좀 빠르죠?”

그녀가 씁쓸하게 웃었다.

“……”

독현이 붙들었던 은돈의 어깨에서 스륵, 손을 거뒀다.

“저……그만 가볼게요.”

어차피 내일이면 헤어져야 할 사이. 은돈이 먼저 몸을 돌려세웠다.

남겨진 독현이 짙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다, 이내 비서와 함께 반대편으로 돌아섰다.

***

“그래서. 연락처도 안 주고 허무하게 헤어진 거야? 너 바보냐?”

in 옥상. 맥주 파티가 벌어진 평상 위.

미자와 닥터 한이 협공으로 은돈을 몰아붙였다.

“아니 은돈 씨, 연락처는 주고 왔어야지! 그래야 지독현이랑 문자를 하든, 영통을 하든 할 거 아냐!”

“그치만, 혼자 너무 오버하는 게 아닌가 싶어서……”

“야. 굳이 자기 결혼 안했다는 말을 너한테 왜 했겠어! 아직 미련이 있으니 그런 거지!”

미자가 답답하다는 듯 은돈을 흘겨봤다.

“솔직히 너도 아직 맘 있잖아? 그럼 차라리 먼저 연락해보던지. 지독현도 솔로, 너도 솔론데 뭐 어때? 이젠 문소라도 떨어져 나갔겠다, 지명준 회장인지 뭔지, 그 노친네도 한 풀 꺾였겠다, 딱이네!”

“……그렇게 간단한 게 아냐.”

은돈이 고개를 내저었다. 생각이 많은 듯한 얼굴이었다.

“난……러시아로 떠나야 하잖아. 이제 서로 갈 길이 다른데, 순간적인 감정에 취해서 후회하긴 싫어.”

에라이. 그녀가 캔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흠. 근데 너 지독현한테 내일 아침 비행기라고 말했다며? 어쩌면……공항에 미리 나와서 널 기다리고 있을 지도 몰라. 가지 말라고 울고불고 매달릴 지도?”

울고불고? 미자의 설레발에 은돈이 허탈한 듯 웃었다.

“그럴 일은 절대로 없어.”

그럼. 절대로 없고 말고……그녀가 괜한 기대조차 않는다는 듯 얼른 머리를 흔들었다.

***

“오미자 이 망할 것……”

다음날 아침, 인천공항.

은돈이 홀로 덩그러니 출국장 앞에 서 있었다.

“뭐? 지독현이 배웅을 나와? 날 붙잡아……?”

괜한 기대나 심어주지 말던가. 혹시 엇갈릴까봐 꼭두새벽부터 미리 나와 있었잖아.

은돈이 구시렁대면서도, 혹시나 하는 맘에 연신 주변을 두리번댔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오는 사람들 중에, 독현이 있지는 않을까.

드라마의 한 장면처럼 숨을 헐떡이며 내 앞에 나타나 주진 않을까. 날 벅차게 끌어안고는 가지 말라고……

“할 리가 없지.”

차은돈. 너 아직도 정신 못 차렸니. 어차피 부질없다는 거 알면서, 뭘 기대한 거야.

훅- 뜨거운 한숨을 내뿜으며, 그녀가 곧 출국장 안으로 걸음을 내딛었다.

……이십 분 후.

“여긴가……?”

비행기에 단 여섯 자리만 존재하는 퍼스트 클래스 석.

은돈이 호화로운 일등석에 어색 뻘쭘하게 몸을 앉혔다.

뭐, 내 돈 내고 타는 거 아니니 좋긴 하다만……적응 안 돼 죽겠네.

지잉-

“헙!?”

실수로 버튼이 눌린 건지, 은돈의 의자가 갑자기 180도 젖혀지기 시작했다.

이, 이럼 안 되는데……

본의 아니게 일자로 드러누운 그녀가 민망함에 콧등을 문질렀다.

“저, 저기요……저기……”

그녀가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승무원을 향해 손을 들었다. 그런데 그때,

“팔걸이 아래 버튼.”

통로를 사이에 둔 채 떨어져 있는 옆 좌석.

자동 칸막이가 지잉 열리며 그 옆 좌석에서 익숙한 얼굴이 나타났다.

“팔걸이 아래 버튼 누르면 돼.”

“……사장님?”

은돈이 자리에서 펄쩍 튀어 오르며 옆 좌석의 독현을 바라봤다.

“여, 여기서 지금 뭐해요?”

“보면 몰라. 독서 중이잖아.”

독현이 태연하게 외제차 카탈로그를 넘기며 대답했다.

“독서라니, 그건 책이 아니라……아니. 지금 이게 중요한 게 아니고! 사장님 여기서 뭐하는 거냐니까요? 내 몰카라도 찍는 중이에요?”

“몰카? 내가 그렇게 한가한 사람처럼 보이나?”

독현이 여전히 카탈로그에 집중 한 채 또박또박 운을 뗐다.

“현지 조사차, 출장 가는 길이야. 러시아로.”

현지조사……? 은돈이 입을 허 벌렸다.

“사장님. 러시아에 점포라도 내게요?”

점포라니. 독현이 어이없다는 듯 즉답을 내놓았다.

“러시아에 한식 레스토랑을 차릴까 해. 다원정이라고.”

“다원정이요? 그러니까 지금……난데없이 해외진출을 하겠다는 거예요?”

“난데없이라니. 불쾌하군.”

독현이 미간을 찌푸렸다.

“오래전부터 진행해온 일이야. 내가 외국 바이어들이 참가하는 포럼을 기웃거린 이유가 뭐겠어.”

그의 말에……은돈이 문득 어제 포럼에서 만난 독현의 비서를 떠올렸다.

‘사장님, 간담회가 곧 시작 될 겁니다. 유럽과 러시아의 빅 바이어가 모두 참석하는 자립니다. 가셔야 합니다.’

“정말……바이어까지 만난 거예요? 러시아에 올 작정으로요……?”

은돈이 그렇게 묻자, 독현이 다시 외제차 카탈로그로 시선을 내리며 말했다.

“그래. 러시아에 갈 거야.”

“……갑자기 왜요? 왜 허구 많은 나라 중 하필 러시안데요?”

그녀의 물음에, 잠시 침묵하던 독현이 이내 딴소리를 내뱉었다.

“원한다면, 다시 내 주방에서 일해도 돼.”

“……?!”

“넌 이제 돈도 많고 시간도 많잖아. 네 남는 시간, 내가 살게.”

그가 시선을 내리깐 채 태연자약하게 말했다.

“러시아에서 내 요리를 맡아줄 전담 요리사가 필요해. 근데 아무리 생각해도 너밖에 떠오르질 않아. 역시 니가 맡아줘야겠어.”

“사장님……?”

“니가 필요해, 난. 그러니까 거절 하지 마.”

난데없이 이어지는 그의 말들은, 어쩐지 사랑 고백처럼 묘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은돈이 가만히 독현을 응시했다.

느껴져. 지금 사장님이 몹시 긴장했다는 거. 나랑 눈조차 마주치지 않고 있잖아.

게다가 저 카탈로그는 아까부터 거꾸로 들고 있다고.

“……어쩌죠. 나 이제 사장님 주방 필요 없는데. 내 주방‘들’ 감당하기도 벅차거든요.”

들? 은돈의 거만한 대답에 독현이 살짝 미간을 좁혔다.

실망한 그를 보며 은돈이 저도 모르게 푸쉬시, 웃었다.

“근데 사장님 전담 요리사 자린…… 솔직히 좀 땡기네요. 그거, 파트타임 알바로도 가능해요?”

“뭐……?”

“사장님 애인이 아니라……전담요리사로 복직되는 거면. 한번 고려해 보려구요.”

은돈이 밝게 웃으며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아, 근데 사장님 요즘도 편식해요? 매운 거, 짠 거, 단 거, 여전히 입도 안 대죠? 흠. 그런 남잔 밥해주기 곤란한,”

“이젠 잘 먹어. 뭐든.”

조급해진 독현이 은돈의 말을 잘랐다.

“매운 거, 짠 거, 단 거. 해주면 해주는 대로 먹을게. 편식 같은 거 안 해. 일 년 삼백육십 오 일 한 가지 반찬으로 돌려막기 해도 돼. 그러니까……”

다시 돌아와 줄래?

독현의 다음 말을, 은돈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녀가 피식 웃으며 시선을 내렸다.

아직 확실한 건 아무것도 없다는 거. 나도 알아.

사장님과 내 관계가 이대로 흐지부지 끝날 수 있다는 것도.

만약, 다시 사귀게 되더라도 예전 같은 떨림은 없을지도 몰라.

어쩌면 둘 중 하나가 먼저 마음이 식어버릴지도.

하지만, 그럼에도 용기를 내고 싶어.

이 비행기에 오르기까지, 사장님이 얼마나 많은 고민을 했을 지 아니까.

왜 하필 러시아를 선택했는지 아니까. 이젠 나도 솔직해 지고 싶어.

“사장님. 이따 우리 도착하면……같이 맛있는 거 먹으러 가요.”

은돈이 옆 좌석을 향해 마치 데이트 신청 같은 한마디를 건넸다.

독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자신의 왼손을 힐끗 내려다보았다.

그의 왼손 네 번째 손가락엔 어느덧 은돈과 같은 디자인의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대체 언제쯤 알아봐줄까. 둔한 여자 같으니.

독현이 은돈을 바라보다, 이내 졌다는 듯 피식, 미소를 머금었다.

그 남자 밥해주기 END.

일 년 후.

하객들로 북적거리는 웨딩홀. 미자가 신부대기실로 유유히 걸음을 옮겼다.

“하여간 차은돈. 너도 참 징하다. 무슨 고무줄이여? 어떻게 몸무게가 늘었다 줄었다 하냐? 일 년 만에 다시 말라깽이가 됐네?”

미자가 눈부신 웨딩드레스 차림의 은돈을 보며 혀를 내둘렀다.

“너도 알잖아. 나 결혼 앞두고 한 달간 칡뿌리만 씹어 먹은 거.”

은돈이 꼬르륵 거리는 배를 움켜쥔 채 말했다.

“쯧쯧. 너 솔직히 말해봐. 지독현이 러시아에서 살 빼라고 꼽 줬지? 또 너한테 김밥 햄이래?”

“모르는 소리 마. 사장님은 내 before가 세상에서 젤 좋대. 만질 데가 더 많다나 뭐라나……”

은돈이 흐흣 웃으며 뺨을 발그레 붉혔다.

“야 작작해. 나 니 면상에 침 뱉을 뻔했어.”

일주일 전 애인과 결별한 탓일까. 미자는 잔뜩 날이 서 있었다.

“오 차 사장! 결혼 축하해!”

그때, 닥터 한을 시작으로 반가운 얼굴들이 대기실 안으로 우르르 몰려들었다.

“야 도니도니! 축하한다 임마! 누가 뭐래도 난 옛날부터 사장님 짝으로 널 밀었어!”

“에이 씨 부주! 내 축의금 봉투에 부주 이름 썼어요?”

다원정의 감초 역할을 톡톡히 해내던 부주와 경훈, 두 사람을 필두로 다원정 식구들이

앞 다퉈 은돈에게 축하 인사를 건넸다.

“감사해요 모두……”

부케를 든 은돈이 벌써부터 감정이 벅차오르는지 눈시울을 적셨다.

“흐흑……! 죄송해요. 제가 칡뿌리만 먹다보니 감정기복이 좀 심해져서……”

“자꾸 울면 화장 지워져.”

그때. 대기실 문 앞에 선 독현이 그렇게 말했다.

“와우 새신랑! 한 여자에 정착한 기분이 어떠신가?!”

닥터 한이 방정맞게 어깨동무를 하며 묻자, 독현이 그 팔을 홱 떨쳐냈다.

그리곤 자신의 신부에게 곧장 다가섰다.

“나 진짜 화장 번졌어요?”

은돈이 젖은 눈으로 독현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독현이 손끝으로 조심스레 그녀의 눈가를 닦아주며 대답했다.

“넌 예뻐서 좀 지워져도 돼.”

“사, 사장님……”

은돈이 당장이라도 침을 뱉을 기세로 입을 오므린 미자의 눈치를 살폈다.

“근데 이지세는 여전히 아무 연락 없어?! 여기 오면 볼 수 있을 줄 알았더니.”

그때, 부주의 투덜거림이 모두의 귀에 내리꽂혔다.

“내가 말이야. 오늘 도니도니 결혼식이라고 직접 약도까지 캡쳐해서 보내줬다고!”

“아마……안 올 거예요.”

은돈이 애써 웃으며 대답했다. 독현이 그런 신부를 바라보다 화제를 돌렸다.

“다 같이 기념사진이라도 찍지.”

“바라던 밥니다 사장님!”

부주와 경훈이 냉큼 신부의 곁에 달라붙어 포즈를 취했다.

“내 예비 와이프랑 찍는 건 안 돼. 나랑 찍어.”

독현이 심술궂게 말하며 그들을 은돈에게서 떼어냈다.

“야……지독현 사마가 원래 저런 이미지였냐? 예비 와이프라니……러시아에서 뭐 된통 잘못 먹은 거 아냐?”

미자의 소곤거림에, 울적해하던 은돈이 풋 웃으며 독현을 응시했다.

그녀와 눈이 마주친 독현 역시 살짝 미소를 지었다.

***

“신랑, 신부 동시 입장!”

막 예식이 시작 된 웨딩홀 내부.

새하얀 웨딩 베일을 얼굴위로 늘어뜨린 은돈이 독현의 팔짱을 낀 채 버진 로드 위를 걷기 시작했다.

수많은 인파가 그들을 향해 환호성을 내질렀고, 두 사람의 걸음걸음마다 플래시 세례가 터졌다.

웨딩드레스를 입은 은돈의 모습은 너무나 아름다워서, 그들의 결혼을 끝까지 반대하던 지명준 회장조차 마지못해 박수를 보낼 정도였다.

“야. 저기 저 사람 봤어? 대박. 완전 꽃미남.”

그 무렵, 여성 하객 몇몇이 웨딩홀 뒤쪽을 가리키며 소곤대기 시작했다.

그녀들의 시선을 따라간 곳엔, 아니나 다를까. 지세가 서있었다.

기자와 하객들이 뒤섞여 인산인해를 이루는 끝자리에 말없이 선 채, 그가 저 멀리 은돈을 바라보고 있었다.

드레스 차림의 은돈이 미자의 축가에 맞춰 신나게 춤을 추는 모습,

독현과 케익 커팅을 하고, 입맞춤을 나누며 눈시울을 붉히는 모습,

하객들이 터뜨리는 축포 속에서 깜짝 놀라 토끼 눈을 하는 모습.

“다행이다……좋아 보여서.”

지세가 센치하게 웃었다.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 은돈의 얼굴을 마주할 자신은 없지만.

살짝 시선을 내린 그가 3년 전, 인천 공항을 떠올렸다.

‘갈까……?’

함께 러시아로 떠나기로 했던 그 날.

은돈이 갈까, 하고 물으며 처음으로 자신에게 손을 내밀어 줬다.

내밀어 줬던 손.

할 수만 있다면 함께 떠나고 싶었다. 그래서 그 작은 손을 꽉 붙잡았었다.

하지만……결국 그의 선택은 은돈을 놓는 것이었다.

‘누나.’

출국 게이트 앞.

은돈을 손을 놓은 지세가 잠자코 운을 뗐다.

‘생각해봤는데……난 여기 남는 게 좋을 것 같아.’

‘뭐?’

‘잘 다녀와. 아프지 말고……울지도 말고.’

‘지세야, 너 갑자기 왜 그래?’

은돈의 눈빛이 가늘게 떨렸다.

갑작스러운 지세의 태도변화에 당혹감 대신 슬픔이 밀려들었다.

왜 갑자기 떠나지 않겠다고 하는 건지, 사실은 이유를 알 것 같아서.

‘너……자경 씨한테 무슨 소리 들은 거야? 본가 갔을 때……들은 거지?’

지세가 대답 없이 시선을 끌어내렸다. 그의 귓가로 친누나 자경의 음성이 밀려들었다.

‘이지세 이 멍청아! 정신 차려! 차은돈 걔, 니가 거짓말 했다는 거 알면서도 속아 주고 있는 거야. 니 손, 어떤 상탠지 알면서 모르는 척 하는 거라고! 널 위해서!’

지세가 다시 고개를 들고 은돈을 바라봤다.

‘누나.’

‘응.’

‘미안해……’

그가 뱉은 한마디가 은돈의 가슴을 푹 찔렀다.

결국 지세도, 자신도, 마음 한편으로는 이렇게 될 거라는 걸 예상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어차피……우린 같이 떠날 수 없었을 거야.

‘이거.’

그즈음, 지세가 조심스럽게 은돈의 왼손을 거머쥐었다.

그리곤 네 번째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주었다.

그건, 아주 로맨틱한 고백의 순간처럼 보였지만. 은돈은 알 수 있었다.

지세가 끼워 준 반지는, 다름 아닌 독현의 프러포즈 링이었다.

‘그때……던져 버렸다고 하지 않았어?’

은돈의 물음에 지세가 얼핏 미소를 머금었다.

버릴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은돈이 슬퍼할 테니까.

‘계속 돌려주고 싶었어. 미안해. 늦어서.’

그가 말을 마치곤 눈앞의 은돈을 천천히 응시했다.

너무 창피해서, 미안해서. 앞으로 이 얼굴을 다시 볼 수 있을까.

“……안녕. 차은돈.”

이윽고 지세의 입에서 마지막 인사가 떨어졌다.

‘지세야……이지세!’

등 뒤에서 들려오는 부름을 무시한 채, 이내 그가 공항을 벗어났다.

“자, 친구 분들! 단상 앞으로 나와 주세요!”

웨딩홀 내부.

옛 생각에 잠겨있던 지세가 사회자의 외침에 퍼뜩, 고개를 들었다.

저 멀리, 은돈과 독현의 곁에 모여든 익숙한 얼굴들이 보였다.

“하나 둘, 셋! 자 던지세요!”

“으라차!”

은돈이 요상한 기합과 함께 부케를 등 뒤로 던졌다. 그 순간 미자를 밀쳐낸 부주가 현란한 앞구르기로 부케를 뺏어들었다.

“예아! 나이스 캐치!”

환호성을 내지르는 부주와 깔깔대는 하객들. 그리고 활짝 미소 짓는 은돈.

지세가 그녀의 모습을 눈에 담으며 씽긋 웃었다.

“……결혼 축하해.”

진심으로 축하해 줄 수 있어서, 다행이야.

그의 동공이 옅게 일렁였다. 이내 그가 웨딩홀을 빠져나가기 위해 몸을 비틀었다.

그런데 그때.

“흑……흐흑……저기, 손수건 좀 빌릴 수 있을까요?”

통통한 체격에, 꽤 귀염상인 여자가 지세의 옷깃을 붙들었다.

“……?”

뜬금없는 상황에 지세가 여자를 내려다보았다.

“실은 오늘이, 바람난 제 구 남친과 친구년 결혼식이었어요……”

검은 마스카라 눈물을 흘리며, 여자가 주책 맞게 나불댔다.

“내가 이것들 작살을 내려고 얼마나 이를 갈았는데! 식장을 아주 엎어버리려고 했거든요. 근데……바보같이 웨딩홀 위치를 헷갈리는 바람에……걔넨 본점이 아니라 분점에서 했더라구요……”

처음 보는 낯선 남자 앞에서 여자는 줄줄이 소세지처럼 한풀이를 하고 있었다.

눈앞에서 펼쳐진 이 신선한 광경에, 지세가 미간을 좁혔다.

“어디서 본 것 같은데……”

왠지 여자를 낯이 익다고 느끼며 그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복수심에 눈이 먼 여자가 팽! 코를 풀며 외쳤다.

“아악! 박현우 그 개자식! 내가 살 빼고 이뻐져서 반드시 복수 하고 말 거야!”

……아. 알겠다.

여자는 은돈을 닮아 있었다. 생김새하며, 말투하며.

“닦을래요?”

어쩐지 여자에 대한 경계심이 풀어진 지세가, 자신의 손수건을 내밀었다.

“……코풀어도 돼요?”

돌아오는 황당한 대답에, 피식- 지세의 입가가 느슨해졌다.

그는 느끼지 못했지만, 두 사람 사이엔 분명 심장을 간질이는 이상 기류가 흐르고 있었다.

은돈을 닮은 그 여자의 이름이 혜영이라는 것과, 지금 이 순간이 새로운 사랑의 시작이었음을 지세가 깨달은 건 그로부터 일 년 후, 어느 봄날이었다.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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