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남자 밥해주기-90화 (90/93)

90화. 러시아에서 온 불청객.

그 후, 정신없는 며칠이 흘렀다.

기자들은 지회장이 의식을 회복했지만 휠체어 신세를 면치 못하게 됐다는 소식을 연달아 전달했고,

부도 위기였던 대성명가가 KM그룹의 자금을 지원받아 위기를 탈피했다는 소식 역시 입 아프게 떠들어댔다.

“야 차은돈! 너 또 안 먹었어!?”

행운빌라 201호.

작은 방에 이불을 뒤집어쓴 채 드러누운 은돈의 실루엣이 보였다.

미자가 그녀의 머리맡에 놓여있는 죽 그릇을 홱 집어 올렸다.

“아니 옆집 꽃총각 성의를 무시해도 유분수지! 매일같이 죽 끓여다 바치는데! 어떻게 입 한번을 안 대냐!? 벌써 며칠째 산송장처럼 누워만 있는 거여 대체!”

“……나가줘 제발.”

“야! 여기 내 집이거든!?”

다혈질 종자 미자가 이불을 확 걷어낸 후 은돈을 억지로 일으켰다.

“일어나 빨리! 언제까지 실연의 상처 속에서 허우적댈 거야!?”

“제발 좀 그냥 내버려둬……”

은돈이 다시 자리에 누워 이불을 뒤집어썼다.

“아니 지독현 사마랑은 예전에 헤어진 거 아니었어? 그땐 잘 버틴다 싶더니, 왜 이제와서 이 난리래?”

그땐……헤어졌어도 내심 다시 만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으니까.

하지만 이번엔 달라. 이젠 정말 끝이라는 게 실감나서……그래서 숨을 쉴 때마다 목구멍이 너무 따끔거리고 아파.

은돈의 꾹 감은 눈꺼풀이 가늘게 떨렸다. 이내 그 위로 뜨거운 눈물이 새어 나왔다.

“쯧쯧. 그래도 밥은 먹어야 할 거 아냐. 옆집 꽃총각. 어? 지세 걔가 니 걱정을 얼마나 하는 줄 알아? 내가 볼 땐 걔가 너보다 더 힘들 거 같어. 짝사랑이 얼마나 아픈 건데.”

블라 블라, 이어지는 미자의 잔소리에 은돈이 대꾸 없이 눈을 질끈 감았다.

***

최고급 프렌치 레스토랑.

테이블에 나란히 앉은 독현과 소라, 그리고 맞은편의 문회장이 보였다.

“자 건배하지.”

문회장이 와인 잔을 앞으로 내밀었다. 독현이 그를 보며 옆에 놓인 잔을 집어 들었다.

쨍- 곧 잔을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왔고, 세 사람이 능숙하게 와인을 음미했다.

“그래 회장님께선 좀 어떠신가? 거동이 불편하긴 해도 의식은 온전하다던데?”

“……네.”

독현이 짤막하게 대답했다. 그리곤 앞에 놓인 나이프를 들어 스테이크 위로 가져갔다.

“다원정이라고 했던가? 이제 그런 애들 장난 같은 짓은 그만두고 회사로 들어오는 게 어떻겠나.”

문 회장의 말에 칼질을 하던 독현의 손길이 멈칫했다.

“생각해 보죠.”

그가 경직된 미간을 풀고 순순히 말했다.

자신의 앞에서 한결 고분고분해진 독현의 모습에 문 회장이 냉소를 머금었다.

“그건 그렇고, 너희 둘. 결혼 발푠 언제 할 생각이야? 이미 기자들은 냄새를 맡은 것 같던데.”

“아빠도 참. 굳이 시끄럽게 알릴 필요 있어요?”

소라가 살짝 독현의 눈치를 살폈다.

“지금 때가 때인 만큼, 조용히……”

“왜. 저 놈이 우리 집에 팔려 오는 것처럼 보일까봐서 무섭니?”

문회장이 정확히 독현을 주시하며 말했다. 독현 역시 그를 마주봤다.

“팔려 왔다, 라는 표현이 기분 나빴다면 미안하네.”

“아뇨. 어차피 사실이니까요.”

독현의 시니컬하게 대답했다. 소라가 그를 빤히 보았다.

왤까 지독현.

그토록 원하던 널 이제야 갖게 됐는데……왜 난 별로 행복하지 않은 거야?

그녀가 앞에 놓인 와인 잔을 치켜 올렸다.

“우리끼리 따로 건배할까?”

쨍. 독현의 잔에 자신의 잔을 부딪친 소라가 싱긋 웃었다.

난 이대로 괜찮아 지독현. 처음부터 행복하길 바란 적 없었으니까.

난 그냥……너만 있으면 돼.

“생각해봤는데……약혼식을 올리면 어떨까 싶어요.”

불쑥 소라가 튕겨 낸 한마디에 독현이 살짝 미간을 좁혔다.

“약혼식?”

“네 아빠. 결혼은 아무래도 좀 미루는 게 좋겠어요. 이 사람 이미지도 있고……사실 저도 의욕 없이 ‘팔려오는’ 남자랑은 결혼하고 싶지 않거든요,”

소라의 가시 돋친 말에 독현이 크리스탈 물컵을 기울여 입가에 갖다댔다.

“결혼을 미루는 대신, 약혼식을 간소하게 올리고 싶어요. 기자들 부르지 말구요. 우리끼리 조용하게. 어때요?”

“니 생각이 그렇다면 그렇게 해야지. 자넨 어떤가?”

“……좋을 대로 하시죠.”

독현이 짧게 대답하며 이내 탁- 크리스탈 잔을 내려놓았다.

***

“누난……좀 어때요?”

행운빌라 2층 복도.

지세가 죽 냄비를 미자에게 건네며 물었다.

“쯧쯧. 걔 완전 정신이 달나라에 가 있어. 밥도 안 먹고, 말도 안 하고 하루 종일 그냥 눈물만 뚝뚝뚝.”

“……”

“지세야. 내가 진짜 안타까워서 그래. 니가 날마다 정성껏 죽을 쒀다 바치면 뭐하니. 걔 미각을 완전히 잃었다니까. 아예 입도 안 대.”

“오늘은 좀 먹을지도 모르잖아요.”

“쯧쯧. 너도 참 어쩌다가 그 둔탱이한테 꽂혀서……”

미자가 혀를 차며 지세를 바라보다 곧 현관 앞으로 돌아섰다. 그런데 그때,

촤라락!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며 양 손 가득 짐 보따리를 든 중년부부가 내려섰다.

“인간아! 꼴랑 2층인데 엘리베이터를 왜 타! 전기세 아깝게!”

“아 여기 전기세를 우리가 내나!?”

“우리 딸내미가 내잖아, 이 러시아 양아치야!”

꽥 소리 지르는 여자의 기세에 눌린 듯한 남자가 화제를 돌리기 위해 지세와 미자를 가리켰다.

“어이 거기 선남선녀! 즈드랏스부이쩨!(안녕하세요)”

“……뭐시여? 어느 나라 말이당가?”

미자가 심드렁히 남자를 바라보았다.

“예쁜 아가씨. 여기 혹시 차은돈이라고……몇 호 사는지 아십니까?”

“차은돈이요?”

은돈의 이름에, 미자와 지세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그로부터 삼십 분 후.

201호 거실 내부.

초췌하다 못해 파리해진 몰골의 은돈이……믿기지 않는 듯 눈앞의 부모님을 번갈아 바라봤다.

“그러니까……아부지가 러시아에서 푸드 트럭 사업을 했는데……그게 대박이 났다고? 그래서 엄마랑 날 데리러 들어온 거라구?”

“하하! 몇 번을 물어보니 우리 딸!”

은돈의 친부, 태만이 호쾌하게 웃으며 딸을 끌어안았다.

“보고 싶었다 딸아! 자 이건 선물!”

그가 짐보따리 안에서 러시아 민속인형 세트를 꺼내 은돈의 품에 안겼다.

“……아니……대체 난,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인지……”

은돈이 혼란스러운 듯 부모님을 응시했다.

명절 때나 간신히 볼까 말까한 엄마.

거기에 빚만 잔뜩 안기고 달아났다, 몇 년 만에 처음으로 급 상봉한 아빠.

이거 혹시……꿈인가? 은돈이 자신의 볼을 쭈욱 잡아당겼다.

“이제 빚도 싹 갚았겠다! 러시아에 아빠 명의로 된 가게도 있겠다! 핫핫핫! 우리 세 식구, 비행기 타고 건너가서 행복하게 사는 일만 남았다!”

“가게라니……? 러시아에서 대체 뭘 파는데?”

은돈이 미심쩍은 듯 묻자, 태만이 자부심에 찬 한마디를 또박또박 던졌다.

“양.념.치.킨.”

“……양념치킨?”

“러시아 사람들이 한국식 양념치킨에 아주 환장을 한다니까! 거기가 좀 추워?! 얼마나 집 밖에 나오기 싫겠냐! 근데 어? 양념치킨을 똭! 집 앞까지 배달을 똭! 아주 그냥 없어서 못 판다야!”

“어이, 이봐. 러시아 양아치. 당신 말 믿어도 되겠어?”

은돈의 친모인 희숙이 남편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아 이 사람이 속고만 살았나! 우린 그냥 세 식구 걱정 없이 떠나기만 하면 된다니까!”

떠나기만 하면 된다구……?

은돈이 얼떨떨한 얼굴로 티격 대는 부모님을 바라봤다.

“이것 좀 드시고 싸우세요~”

그즈음 미자가 과일을 얹은 쟁반을 내왔고……

“오 과일! 스바 시바~! (고마워요)”

“야 차은돈……니네 아부지가 방금 나한테 욕한 거 같아.”

미자가 은돈의 귀에 대고 속닥였다. 그 순간, 픽-하고 은돈이 미자의 품으로 떨어졌다.

“으, 은돈아! 쟤가 왜 저래?”

놀란 희숙이 딸을 향해 다가섰다.

“아. 놔두세요. 얘가 지금 기력이 쇠해서 그래요. 아주 옴팡지게 실연 중이거든요.”

“실연? 설마 그놈 땜에……헛.”

무심코 말을 잇던 태만이, 희숙의 꼬집기 기술에 냉큼 입을 다물었다.

“하아……쌩뚱 맞게 나타나선……다 같이 떠나자구……?”

태만의 말실수를 듣지 못한 은돈이, 홀로 중얼거렸다.

그래……러시아든 방글라데시든 아마존이든……떠나면 떠나는 거지 뭐.

어차피 어디에 있든 지독현을 볼 수 없는 건 똑같은데.

그녀가 더 이상 고민하기도 싫다는 듯 미자의 품에서 눈을 감았다.

***

“아이구 본의 아니게 하룻밤 신세까지 지고, 미안해요 예쁜 아가씨.”

“호호홋! 아니에요 어머니, 편히 주무세요!”

그날 밤.

방에 틀어박힌 은돈이 거실에서 들려오는 미자와 희숙의 대화소리에 눈을 떴다.

현재 시각 아홉 시 오십일 분.

“……자야 돼……그래야 내일 다시 울 힘이라도 있지……”

은돈이 그렇게 중얼거리곤 질끈 눈을 감았다. 그리고……정확히 네 시간 뒤.

AM 1 : 51.

번쩍, 또 다시 저절로 눈이 떠졌다.

또네 또. 은돈이 한숨을 내쉬며 상체를 일으켰다.

“매일같이 이 시간만 되면 깨네……”

며칠 전, 사장님한테 마지막 전화가 걸려왔던 바로 그 시간.

더 이상 연락이 오지 않을 거란 걸 알면서도, 은돈이 물끄러미 핸드폰을 응시했다.

그런데 그때, 살짝 열린 문밖에서 누군가의 통화소리가 들려왔다.

은돈의 친부, 태만의 목소리였다.

“예, 윤비서님. 예예. 우리 딸이랑 잘 만났습니다. 아직 자세한 얘기는 못했는데, 일단은 러시아로 데리고 가서 말하는 편이 나을 것 같아서……”

은돈이 태만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며 살금살금 문을 향해 다가갔다.

“아이고, 아닙니다. 저야말로 감사하죠. 회장님 통해서 이번에 남은 빚도 전부 청산하고.”

휙!

순간……거실로 나온 은돈이 태만의 핸드폰을 날쌔게 낚아챘다.

그리곤 살며시 귀에 갖다 대자,

-저희 쪽에서 성의를 보였으니, 모쪼록 회장님과의 약속은 꼭 지켜주시기 바랍니다. 그냥 차은돈 씨를 데리고 떠나주시기만 하면 됩니다.

귓가를 파고드는 윤비서의 음성. 은돈의 동공이 거세게 흔들렸다.

“으……은돈아……그게 말이지.”

통화종료 버튼을 누르는 은돈을 보며, 태만이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아부지 설마……회장님한테 돈 받았어?”

“은돈아 아빤……”

잠시 망설이던 태만이 이내 자폭의 길을 선택했다.

“미안하다 은돈아! 그치만 내가 달라고 한 게 아니야! 그쪽에서 어떻게 알고 날 먼저 찾아내서는,”

“그걸 받았어!? 진짜 받았냐구!”

은돈이 태만의 양팔을 마구 흔들며 외쳤다.

한밤중의 소란에, 놀란 희숙과 미자가 방에서 후다닥 튕겨 나왔다.

“대체 그 돈을 왜 받아?! 회장님이 어떤 사람인 줄 알고 덥석 받아!”

“으, 은돈아 일단 진정해!”

말리는 희숙을 뿌리치며 은돈이 앙칼지게 소리쳤다.

“이 부부 사기단! 어쩐지 백만 년 만에 생뚱맞게 나타난 게 수상하다 했어!”

“따, 딸아……”

“내놔! 그 돈! 어딨어!”

은돈의 외침에 태만이 도리도리 고개를 저었다.

“나, 나도 본 적 없어. 그냥 윤비서님이 와서는 앞으로 빚 걱정은 하지 말라기에, 확인해보니까 이미 청산이 돼 있더라구.”

“……하!”

풀썩. 바닥에 주저앉은 은돈이 양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었다.

“아부지 대체 왜 받았어!”

“은돈아 미안……”

“아부지가 그 돈이랑 뭘 맞바꾼 건지 알아? 내 자존심이야!”

순간 뜨겁게 달아오른 은돈의 눈에서 눈물이 툭 떨어졌다.

“돈까지 받았는데, 이제 무조건 떠나줘야 하는 거잖아! 우연이라도 좋으니까 사장님과 마주치게 해달라고 기도했는데……이젠 마주쳐도 떳떳하게 쳐다볼 수 없게 됐다고.”

그녀의 뺨 위로 서러운 눈물이 아롱져 떨어졌다.

“은돈아. 정말 미안하다……이즈비니쩨(미안해)……”

“이즈비니쩨 같은 소리 하네! 아부지 지금 불난 데 부채질해!?”

울컥한 은돈이 태만을 가격하기 위해 아무거나 손에 잡히는 대로 집어 들었다.

“은돈아! 기왕이면 비싼 거 말고 안 깨지는 걸루 던져! 거기 두루마기 휴지나 플라스틱 저금통 추천한다!”

미자의 외침에 은돈이 저금통을 집어 들어 태만을 무지막지 하게 가격했다.

“나가! 러시아로 당장 사라져!”

“미안해! 이즈비니쩨! 아악! 은돈아!”

짤그락! 짤그락! 태만이 가격 당할 때마다 저금통 안의 동전 소리가, 그날 밤이 하얗게 지새도록 온 동네에 울려 퍼졌다.

***

다음날.

퉁퉁 부은 눈을 치뜬 채, 은돈이 운동복 차림으로 현관문을 열었다.

“어……”

문을 열자마자 안절부절 서 있던 지세와 그녀의 눈이 마주쳤다.

“괜찮아?”

지세가 저도 모르게 은돈을 향해 한 발 다가섰다.

“아침부터 여기 서서 뭐해?”

“아……새벽에. 우는 소리가 들려서.”

“그래서 나 기다린 거야? 벨 누르지.”

정신이 딴 데 가 있는 듯 말을 잇는 은돈을 보며, 지세가 걱정스레 물었다.

“괜찮아? 눈……얼음찜질 할래?”

“아냐. 괜찮아. 참, 그보다 내 목걸이 말이야. 그 프러포즈 반지 달려있는.”

“……응.”

“그거, 혹시 아직 가지고 있으면 나 대신 좀 버려 줄래?”

버려 달라구? 지세가 묘한 시선으로 은돈을 응시했다.

“이미 버렸어. 그거.”

“아……그래. 잘했네.”

은돈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곤 돌아섰다. 그때, 현관문이 벌컥 열리며 희숙이 나타났다.

“아침부터 뼈에 바람 들게 무슨 운동이야! 엄마랑 얘기 좀 하자니까!”

“할 얘기 없어.”

은돈이 냉정하게 돌아섰다.

“그래! 물론 니 아빠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는 건 맞어! 그치만 엄마가 보기에도 너 여기서 골골댈 바엔 차라리 러시아 가는 게 낫대도!”

“……러시아?”

지세가 살짝 떨리는 눈으로 은돈이 사라지고 없는 계단참을 응시했다.

……한 시간 후.

“헉……허억! 헉……”

핫핑크 츄리닝을 입고 미친 듯이 동네를 질주하는 은돈의 모습이 보였다.

숨이 턱까지 차오른 그녀의 입에서 쉬지 않고 거친 숨소리가 터져 나왔다.

“아……이대로 달리다 그대로 증발해버렸으면……”

지칠 대로 지친 은돈이 제게 다가오는 페라리를 보며 멍하니 읊조렸다.

빠앙-!

그때, 요란한 크락션 소리와 함께 운전석에서 누가 얼굴을 쏙 내밀었다.

“어이! 거기 핫핑크! 너 그때 걔 맞지? 차은돈?!”

“……지세네 누나?”

은돈이 자경을 알아본 듯 고개를 치켜들었다.

***

“주문하시겠습니까?”

인근 까페. 친절한 알바생의 질문에, 자경과 마주앉은 은돈이 냉큼 운을 뗐다.

“아 전 초코 파르페랑, 초코 파르페, 그리고 초코 파르페 주세요.”

“세……세 개나요?”

“아 실수. 네 개 주세요.”

은돈이 알바생을 향해 스산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혼자 그걸 다 먹어?”

“네. 전 삶을 포기했거든요.”

은돈이 자경을 향해 초연한 미소로 대답했다.

그 모습에, 자경이 긴장한 듯 마른침을 삼켰다.

“너 혹시……지세 때문에 그래?”

“네? 아뇨. 왜요?”

“윽……”

자경이 뭔가를 갈등하는 듯하더니 곧 테이블 위에 탁! 서류봉투를 내려 놨다.

“이게 뭐에요?”

“안 돼! 잠깐! 보지 마!”

은돈의 말을 자르며. 자경이 다시 테이블 위의 봉투를 끌어안았다.

“후……”

이윽고 그녀가 안정을 되찾기 위해 깊은 날숨을 내쉬었다.

“이게 정말 지세를 위한 길인지……너무 헷갈려 미치겠어.”

“뭔데요? 혹시 지세한테 무슨 일 생겼어요?”

“몰라! 니가 직접 눈으로 확인해!”

자경이 결심을 굳힌 듯, 서류봉투를 다시 은돈에게 내밀었다.

“……”

말없이 받아든 은돈이 이내 봉투 안에서 이지세의 이름이 쓰인 병원 진단서와 소견서를 끄집어냈다.

그 애의 오른손을 찍은 MRI 사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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