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남자 밥해주기-89화 (89/93)

89화. 한번 어긋난 타이밍은.

“내가 바라는 건, 당신의 불행입니다.”

독현이 지회장을 똑바로 직시했다.

“돌아가신 내 아버지의 기일이 어제였다는 거. 알고 있었습니까?”

“……그래. 알고 있었다.”

지회장이 무겁게 대답하자, 독현이 우습다는 듯 받아쳤다.

“20년 전 사고의 전말을 알게 된 이후, 새삼스레 내 아버지라는 사람이 가여워지더군요. 특히 어제 같은 날은 더더욱……그래서 아버지에 대한 연민이 당신에 대한 복수심으로 바뀌기 전에, 어떻게든 기분을 풀어보려고 예정에 없던 파티에 갔습니다. 거기서……우연히 차은돈을 만났죠.”

“!”

독현의 눈앞으로 파티장의 잔상이 밀려들었다. 지세와 손을 맞잡은 은돈의 모습.

자신이 아닌 다른 남자의 곁에 선 채 당혹스러워하던 그녀의 모습.

“……어제 거길 간 건 내 실수였습니다.”

독현이 날카로운 시선을 치켜들었다.

“대체 나한테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게냐!”

분개한 지회장이 큰소리로 언성을 높였고, 독현이 즉답을 내놓았다.

“나한테서 소중한 사람들을 빼앗아간 대가를 치르세요.”

“뭐야?”

“시간은 충분히 드리죠. 그 안에 당신이 내 친부와 차은돈에게 저지른 짓 전부를 스스로 자백하세요.”

“너, 너 지금……”

지회장이 치미는 분노에 말을 잇지 못했다.

독현이 아랑곳 않으며 다음 말을 이었다.

“아. 그리고 두 번 다시 차은돈을 건드리지 마세요. 더 이상 그 여자 인생을 쥐고 흔들지 말라는, 마지막 경고를 하고 있는 겁니다 난.”

말을 마친 독현이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곤 테이블 위의 만년필 녹음기를 집어 들었다.

“잠깐!”

그때 몸을 일으킨 지회장이 독현의 팔을 붙들었다.

“니가 원하는 대로 자수를 하든, 속죄를 하든, 내 잘못의 대가는 치르마. 그러니까 넌 일단 소라와 결혼부터 해라!”

독현이 질린다는 듯 매몰차게 대답했다.

“아직도 그 얘깁니까?”

“누가 널 더러 그 애를 사랑하라고 했니? 그냥 결혼만 하면 되는 거다. 결혼!”

지회장이 고압적인 외침을 내질렀다.

“넌 무슨 일이 있어도 소라 그 아이를 선택해야만 해! 반드시 그 아이와 결혼해야 해!”

회사가 걸린 일이었기에. 지회장은 절박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사실을 알 리 없는 독현은 친조부의 손길을 냉정히 뿌리칠 뿐이었다.

“거기서!……거기 서라니까!”

곧 회장실을 빠져나가는 독현의 등 뒤로 서슬퍼런 지회장의 외침, 아니 부르짖음이 따라붙었다.

***

주차장.

지친 듯, 페라리 핸들에 고개를 파묻은 독현이 보였다.

만년필 녹음기의 위력은 생각보다 강했다. 약점을 잡힌 지회장은 이제 섣불리 차은돈을 괴롭히지 못할 것이다.

-도착한 음성 메시지가 있습니다-

그때, 보조석에 놓여있던 핸드폰에서 알림 음이 울려 퍼졌다.

독현이 손을 뻗어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액정 위로 시선을 내리 꽂은 순간.

차은돈의 번호로 남겨진 부재중 전화 2통.

그리고 음성 메시지 4건.

그가 커다래진 눈으로 핸드폰을 귓가에 갖다 댔다.

얼마 후, 미리 녹음된 4통의 음성 메시지가 차례대로 그의 귓전을 울렸다.

-나예요 사장님. 나……지금 사장님 맨션 근처 까페에 와 있어요. 기다릴게요. 사장님한테 하고 싶은 말이 있어요.

-사장님. 아무리 참으려고 해도 너무 화가 나요! 대체 왜 그렇게 사람이 이기적이에요? 나한테 미리 얘기했어야죠. 20년 전 그 사고에 대해서, 회장님이 저지른 짓에 대해서! 왜 솔직하게 얘기 안했어요? 나한테 헤어지자고 말하는 대신, 힘들다고, 회장님이 두렵다고, 제발 옆에 있어달라고 얘기 했으면 좋았잖아요……!

-난 사장님의 돌아가신 아버지랑 달라요. 어느 날 갑자기 사장님 곁을 떠나거나 하지 않았을 거라구요.

은돈의 음성이 울려 퍼지는 핸드폰을 귓가에 댄 채……독현이 경직된 얼굴을 살짝 치켜들었다.

-……보고 싶어요 사장님.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그냥 달려가서 사장님을 만나고 싶어요. 아무도 없는 곳에서, 아무것도 겁내지 않고, 그냥 사장님을 안아주고 싶어요. 마지막이라도 좋으니까……얼굴보고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어요……

마지막 음성 메시지 속, 잦아드는 은돈의 목소리.

독현이 핸드폰을 든 손을 아래로 내렸다.

누르고 눌렀던 감정들이 더 이상 제어가 되지 않았다.

은돈을 만나지 않는 편이 서로에게 좋다는 것을 안다.

은돈을 이대로 내버려 두는 편이 그녀에게 좋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보고 싶다는 말 한마디에 그냥 달려가고 싶어졌다.

은돈의 말처럼, 마지막이라도 좋으니까……그냥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어졌다.

끼이익-! 이내 바닥과 거친 마찰음을 일으키며, 독현의 페라리가 주차장을 벗어났다.

……한편 같은 시각.

“진짜예요. 서빙복 차림 그대로 뛰쳐나갔다니까요? 난 차은돈 씨 뭐 잘못 먹었는 줄 알았어.”

키즈 레스토랑 내부.

매니저의 말에 지세가 살짝 미간을 좁혔다.

“별다른 말없이, 그냥 나갔어요?”

“누군진 모르겠지만……되게 예쁘게 생긴 여자랑 다투던 중에 훅 뛰쳐나갔어요.”

예쁘게 생긴 여자?

지세가 살짝 생각에 잠겨있다 곧 매니저를 향해 말했다.

“차은돈 씨 옷 주세요. 제가 가져갈게요.”

……몇 분 후. 레스토랑 밖.

옷이 담긴 쇼핑백을 든 지세가 핸드폰을 꺼내 은돈에게 전화를 걸었다.

뚜르르……뚜르르……

몇 번의 신호음 끝에, 드디어 상대편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응. 지세야……

“어떻게 된 거야? 무슨 일 있어? 괜찮은 거야……?”

-나……사장님 만나러 왔어.

“……뭐?”

지세의 동공이 커다랗게 출렁였다.

“지금……어딘데.”

곧 그가 낮은 어조로 물었다. 사실,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자신은 은돈을 옆에 붙잡아 두는 데 성공했을 뿐, 여전히 그녀가 사랑하는 사람은 독현이었다.

한 달 만에 독현과 맞닥뜨린 은돈이 다시 그에게 흔들릴 거라는 것쯤은, 그래. 예상한 일이었다.

-나 지금 까페야. 사장님 기다리고 있어……

하. 지세의 입술을 비집고 가벼운 한숨이 터져 나왔다.

“사장님 안 올 거야. 그 사람, 누나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이기적인 사람이니까.”

-……오지 않아도 돼.

일순. 지세가 시선을 굳혔다.

“뭐……?”

-안와도 돼. 꼭 올 거라고 생각해서 기다리는 거 아냐. 그냥……이렇게라도 알려주고 싶어서 그래. 사장님이 지금 혼자가 아니란 거. 누군가는 사장님을 진심으로 걱정하고 염려하고 있다는 거.

은돈의 말에 지세는 날카로운 유리파편이 온 가슴에 박히는 기분이었다.

그때 핸드폰에서 한 번 더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한테 이런 얘기하면 안 된다는 거 알아. 근데 지세야 나……너무 힘들어.

힘들다고……

“그 사람한테 돌아가고 싶어서? 아님 내 옆에 있는 게 버거워서……?”

지세가 상처로 얼룩진 시선을 끌어올렸다. 이윽고 그의 입술이 벌어지며 차가운 한마디가 떨어졌다.

“어차피 기다려도 사장님 안 와. 그래도 기다려야겠다면……마음대로 해.”

말을 마친 그가 냉정히 통화 종료 버튼을 눌렀다.

***

‘지금은 상대가 통화중이오니, 다음에 다시 걸어주시기 바랍니다……’

페라리 안.

블루투스 이어폰을 귀에 꽂은 독현이 핸들을 돌리며 살짝 인상을 굳혔다.

은돈은 계속해서 누군가와 통화중이었다.

독현이 옅은 한숨을 내쉬며 이어폰을 떼어냈다.

그런데 그때였다.

요란하게 핸드폰이 울리기 시작했고, 독현이 다시 이어폰을 귀에 꽂았다.

-사장님……아니, 도련님……!

이어폰 밖까지 울려 퍼지는 윤비서의 급박한 외침.

독현의 시선이 가늘어졌다.

“무슨 일이지?”

다음 순간, 들려오는 윤비서의 말에……끼익-! 페라리가 무단 U턴을 강행하며 방향을 돌렸다.

……그로부터 삼십 분 후.

대학 병원 수술실.

“도련님!”

수술실 앞 대기의자에 앉아 있던 윤 비서가 독현을 발견하고 몸을 일으켰다.

“어떻게 된 거야……”

다소 거칠어진 호흡을 내뱉으며 독현이 물었다.

“그게……갑작스런 뇌출혈로……지금 수술중입니다.”

뇌출혈……?

독현이 고개를 들어 빨간 불이 켜진 수술실을 바라봤다.

저 안에, 저 문 너머에……지명준 회장이 있었다.

‘내가 바라는 건, 당신의 불행입니다.’

고작 몇 시간 전, 지회장에게 악담을 퍼붓던 자신을 떠올리며, 독현이 한손으로 미간을 거머쥐었다. 윤 비서가 그를 보며 초조히 말문을 열었다.

“도련님……지금 회장님께선 대성명가의 주가 조작 혐의와 비자금 조성 비리에 모두 연루되어 계십니다.”

“뭐?”

독현이 흐린 눈빛으로 윤비서를 돌아봤다.

“한 시간 전 이미 경찰 출두 명령이 떨어졌고, 그 때문에 회장님께서 임원진과 언쟁을 벌이시다, 그만……”

윤비서가 목덜미의 식은땀을 손수건으로 문질렀다.

“절대 도련님이 알게 해서는 안 된다는 회장님의 지시 때문에, 그동안 입 다물고 있었습니다만……지금 회사 사정이 좋지가 않습니다. 회장님께선 이미 3개월 전, 대성명가와 별개로 진행해 온 외제차 사업과 와인 사업을 정리하고 가지고 있던 계열사를 전부 매각 하셨습니다. 그중 무려 24개의 계열사가 문회장님의 KM그룹으로 최종 편입이 확정된 상탭니다.”

“문회장?”

문소라의 친부인 문회장. 그가 지명준 회장이 휘청거리는 틈을 타, 절반이 넘는 계열사를 헐값에 사들인 것이었다.

“아무래도 당장 문소라 씨와 얘기를 좀 해보심이……”

조심스럽게 말을 잇던 윤 비서가 독현의 얼어붙은 얼굴을 살폈다.

“오, 오늘은 어떻게든 막아보겠지만, 당장 내일부터 관련 기사가 터지기 시작할겁니다. 우리쪽 임원진도 줄줄이 경찰에 소환될 거구요……”

끊임없이 들려오던 윤비서의 목소리가, 어느 순간 전혀 들리지 않았다.

삐---하는 날카로운 소리가 독현의 귓전을 울린 후, 묘한 침묵이 찾아왔다.

“……”

독현이 말없이 수술실 문 앞으로 다가섰다.

“내가 절대 알아서는 안 된다고……?”

그의 입가에 허탈한 웃음이 스쳤다.

“결국 끝까지 날 무기력하게 만드는군……”

굳게 닫힌 수술실 문고리를 한손으로 붙든 채, 독현이 고개를 떨궜다.

***

“저기……손님. 저희 영업 끝났거든요?”

그날 밤. 오밀 조밀 예쁜 소품들로 채워진 까페 안.

“아. 네! 죄송해요.”

자리에 멍하니 앉아있던 은돈이 팟 정신을 차리며 몸을 일으켰다.

딸랑~ 그때 출구에서 들려오는 종소리.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린 은돈이……곧 자신에게 다가오는 지세를 바라보았다.

“여긴 어떻게……”

지세가 대답 없이 서빙복 차림의 은돈을 내리훑었다.

그녀의 형편없는 몰골이, 테이블 위에 놓인 수많은 커피 잔들이, 지세를 머리끝까지 화나게 했다.

대체 이렇게까지 해서 차은돈이….

“갈아입어.”

탁. 지세가 테이블 위에 그녀의 옷이 든 쇼핑백을 내려놓았다.

은돈이 그를 바라보다 말없이 쇼핑백을 집어 들었고……그로부터 한참 후.

행운빌라 입구에 선 두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어느덧 옷을 갈아입은 은돈이 지세를 향해 불쑥 속 얘기를 꺼냈다.

“지세 너만 좋다면……니 손이 다 나을 때까지, 니 마음이 다 회복될 때까지 내가 옆에 있을게.”

“새삼스럽게 무슨 소리야.”

“……너도 알잖아.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딱 거기까지라는 거.”

단지……옆에 있어주는 것.

“난 지금 다른 누구를 사랑할 여력이 없어 지세야. 한 번에 두 사람을 마음에 담을 순 없는 거잖아.”

그녀의 말에 지세가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런데……순간 은돈의 목걸이로 시선이 갔다. 줄 끝에 매달린 팬던트가 반짝거리고 있었다.

“……”

아니, 목걸이 끝에 매달린 그건 팬던트가 아니었다.

독현이 은돈에게 선물한 프러포즈 링.

그래, 그 결혼반지가 팬던트를 대신해 매달려있었다.

버린 게 아니었어……?

지세의 눈빛이 혼란과 질투로 뒤엉켰다.

“……한 번에 두 사람을 마음에 담을 순 없다고 했지.”

곧이어. 그가 은돈을 향해 다가섰다.

“그 말에 대한 내 대답은 이거야.”

파앗! 지세가 목걸이 끝에 걸린 팬던트를 거칠게 잡아 뺐다.

“!?”

놀란 은돈이 어느덧 지세의 손에 들린 목걸이를 응시했다.

목걸이 끝에 매달린 반지가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었다.

“한 번에 한 사람밖에 담을 수 없다면,”

그럼 내가 아니라 그쪽을 버려.

지세가 날카로운 눈빛으로 은돈을 응시했다.

처음 손을 핑계로 은돈을 옆에 붙잡아 뒀을 땐……그저 그녀가 행복하길 빌었다.

독현과 지회장 곁에서 떨어뜨려 놓으면, 은돈이 이내 행복해지리라 믿었다.

하지만 이젠 달랐다. 이젠 은돈의 빈껍데기라도 갖고 싶어졌다.

빈껍데기라도 좋으니까, 그녀의 곁에서 이제는 자신이 행복해지고 싶었다.

한번이라도 은돈에게 사랑받아 보고 싶다고 생각하며……지세가 이내 시선을 비틀었다.

***

“야 차은돈! 일어나 봐! 어?! 일어나 보라니까!?”

다음날.

미자가 어깨를 마구 흔들자 은돈이 번쩍 눈을 떴다.

“목걸이……!”

반사적으로 목을 더듬던 은돈이 곧 어젯밤 지세를 떠올리며 힘없이 손을 내렸다.

“야 지금 목걸이가 중요한 게 아냐! 이거 봐!”

미자가 은돈의 면상위로 핸드폰을 디밀었다.

“아침에 기사 뜬 거 봤냐? 지명준 회장 쓰러졌단다! 그리고 대성명가도 KM그룹에 넘어갈지 모른대!”

“뭐?!”

은돈이 재빨리 핸드폰을 빼앗아들고 기사를 읽기 시작했다.

“이게 대체……”

미자의 말은 모두 사실이었다. 모든 포털 사이트의 검색 순위에는 지명준 회장과 대성명가,그리고 독현이 있었다.

“근데 KM그룹이면……그 문소라인지 뭔지 하는 여우 년 네 회사 아냐? 헛! 그럼 지금 문소라 그년이 지독현 사마의 재산을 꿀꺽하고 내빼겠다는……!?”

“아니, 그 여자라면 이걸 빌미로 다시 사장님한테 결혼을 강요하겠지.”

사랑보다도 결혼이 먼저인 여자니까.

은돈이 눈빛을 굳혔다.

“야……근데……니가 비록 지독현 사마랑 깨지긴 했지만……이런 상황에선 괜찮냐는 전화 한통정도는 넣어야 되는 거 아냐?”

미자의 말에 은돈이 한동안 침묵을 지켰다.

“이젠……연락 못해.”

“엉? 왜?”

의아해하는 그녀를 보며 은돈이 뜨겁게 차오르는 감정을 속으로 삼켰다.

……같은 시각.

병원 VIP 중환자실.

호흡기에 의지한 지회장이 침대에 자는 듯이 누워있었다.

독현과 소라가 그 모습을 말없이 내려다보았다.

“수술도 잘 끝났고, 너무 걱정 하지 마. 곧 일어나실 거야.”

“……”

“참. 오늘 기사 봤니? 우리 얘기로 난리도 아니던데.”

“……”

아무 대꾸도 하지 않는 독현을 노려보던 소라가 재차 입을 열었다.

“너한테 우리 아버지 계획을 전달하려고 왔어.”

“……말해.”

그때, 비로소 독현의 입이 떨어졌다. 소라가 거만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너도 알 거야. 지금 대성명가를 제외한 지명준 회장의 거의 모든 계열사가 우리 KM그룹으로 편입됐다는 거.”

“그래. 그렇더군.”

“아버진 마지막으로 대성명가를 인수할 생각이셔.”

“!”

“대성명가에 대한 1200억 원의 유상증자를 실시해 지분을 확보하고 나면. 임시 주총을 통해 지명준 회장을 자리에서 끌어낼 작정이신가 봐.”

소라가 잠시 텀을 두며 독현의 표정을 살폈다.

“다른 사업체면 몰라도……대성명가만큼은 지켜야 하지 않아? 지명준 회장이 평생을 바쳐 일궈낸 회산데.”

“내가 뭘 하면 되지?”

독현이 소라를 똑바로 쳐다보며 물었다.

“지독현. 빙빙 돌리지 않아서 좋아.”

소라가 피식 웃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지명준 회장과 대성명가를 건드리지 않는다는 조건 하에……넌 내 작은 소원 하나만 들어주면 돼. 아주 간단한 거야.”

그녀의 말에 독현이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한꺼번에 폭풍처럼 밀려든 이 모든 상황에 그는 지친 듯 보였다.

순간, 막 입을 떼려던 소라의 귓가에 은돈의 목소리가 스치고 지나갔다.

‘단 한 번이라도 사장님을 안쓰럽다고 생각한 적 있어요?’

움찔한 소라가 저도 모르게 입을 다물었다.

그녀가 하룻밤 사이 파죽음이 된 독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니가 원하는 게 뭐야.”

다시 한 번, 독현이 낮게 잠긴 음성으로 물어온다.

소라가 한동안 그를 응시하다, 곧 천천히 말했다.

“너랑 결혼하는 거. 내가 원하는 건……여전히 그거 하나야.”

“그래.”

독현이 너무도 쉽게 대답했다.

“뭐?”

소라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되물었다. 어쩐지 가슴이 쿵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체념한 거니? 지독현. 너 다 포기한 거야? 이렇게 쉽게 나랑 결혼을 해주겠다고?”

“……”

“대답해. 정말 나랑 결혼 할 거야?”

소라의 채근에 독현이 시선을 끌어올렸다.

“결혼해. 니가 원한다면.”

독현의 말을 끝으로, 두 사람 사이에 적막이 흘렀다.

삑, 삑 하고 간헐적인 심박기 소리만이 들려올 뿐, 누구도 먼저 입을 열지 않았다.

나랑 결혼을 하겠다구……? 그런 표정으로……?

“좋아……결혼하자 지독현. 드디어 널 가지게 될 날이 머지않았네.”

소라가 비꼬는 듯한 한마딜 던진 후 문을 향해 돌아섰다.

이윽고 콰앙! 거센 문소리가 중환자실 내부에 울려 퍼졌다.

***

그날 새벽녘.

하루 종일 지명준 회장과 독현의 기사를 검색한 탓인지……선잠이 든 은돈에 손에는 여전히 핸드폰이 쥐어져 있었다.

지잉-!

갑작스레 울리는 핸드폰 진동에, 번쩍! 그녀가 눈을 떴다.

그리곤 반자동적으로 핸드폰을 귓가에 갖다 대면……

-나야. 자고 있었나?

“……”

들려오는 익숙한 음성. 은돈의 눈가에 참았던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안 잤어요……그냥……있었어요……”

가까스로 그녀가 대답하자, 수화기 저편에서 살짝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자고 있었던 거 다 알아. 너 잠순이잖아.

“알면서 왜 물어봐요? 그리고 잠순이가 뭡니까. 헤어진 여자친구한테.”

-그런가.

잠시 두 사람 사이에 침묵이 맴돌았다.

이대로 전화가 끊어질까 초조해진 은돈이 얼른 운을 뗐다.

“어제, 아무리 기다려도 안 오길래……그냥 집에 와서 발 닦고 잤어요 저.”

-어차피……기다려도 안 나갔을 거야.

그의 말에, 은돈이 시린 눈빛으로 대답했다.

“안 나온 게 아니라……못 나온 거 알아요.”

-……

“기사 봤어요. 힘들죠……?”

그녀의 물음에. 수화기 너머에선 한동안 아무런 대답도 들려오지 않았다.

-……나 때문에 쓰러진 거야.

일순 독현이 위태로운 한마디를 내뱉었다.

-날 위한답시고 회사가 이 지경인데도 혼자 모든 걸 떠안고 있었어. 그런데도……난 그 사람 목을 졸랐어. 녹음파일을 들이밀곤 그 사람이 괴로워하는 걸 지켜봤고, 불행하길 바란다고 면전에서 비웃어줬어.

“사장님……”

은돈이 뺨에 흐르는 눈물을 조용히 닦았다.

그녀는 독현이 지명준 회장을 버릴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에게 자신과 지회장 중 하나를 선택해야만 하는 고통을 안겨주고 싶지 않았다.

누굴 선택하든 독현은 괴로워할 게 뻔하니까.

“나……실은 아직도 사장님한테 가고 싶어요. 가서 안아주고 싶고, 옆에 있어주고 싶어요. 그치만……오늘부론 그렇게 하면 안 되는 거잖아요.”

-……

“어젯밤에 우리가 만났다면, 뭔가 달라졌을 수도 있었겠지만……결국, 우린 번번이 타이밍을 놓치네요.”

-……

“잘……지내요. 사장님.”

은돈은 이것이 독현과의 마지막 통화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독현 역시 마찬가지였다.

-차은돈.

“네.”

-……미안해.

“네.”

-네가 행복하길 빌어. 진심이야.

“네……”

-그리고……

그가 한참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은돈이 핸드폰을 든 채 젖은 눈으로 웃었다.

“말 안 해도 알아요. 벌써 들은 거나 마찬가지에요. 그럼, 이만 끊을게요.”

나도 사랑해요. 사장님. 너무 너무 사랑해요.

은돈이 가슴속으로 그 한마디를 몇 번이고 되뇌며……이내 핸드폰을 귀에서 떼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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