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남자 밥해주기-88화 (88/93)

88화. 보고싶어.

가로등 불이 켜진 빌라 앞.

은돈이 건물 안으로 들어서려다 말고, 등 뒤의 지세를 돌아봤다.

“오늘……미안해. 나 땜에 파티에서 제대로 놀지도 못 했네……이렇게 예쁜 옷까지 선물 해줬는데.”

입고 있는 미니 드레스를 내려다보며 은돈이 말했다.

그녀의 어깨 위엔 지세의 수트 자켓이 걸쳐져 있었다.

“……아까 말인데.”

지세가 고개를 치켜 올려 은돈을 보았다.

“엘리베이터에서……혹시 사장님이랑 무슨 얘기했어?”

뭘 확인하고 싶은 걸까.

은돈의 대답을 기다리는 그의 눈빛이 가늘게 일렁였다.

“별 얘기 안했어.”

은돈이 그를 마주보며 미소를 지어보였다.

“헤어지고 나서 처음 맞닥뜨린 것 치곤……사장님도 나도. 생각보단 되게 덤덤했어.”

덤덤했다고?

지세의 눈앞으로 한 시간 전 잔상이 밀려들었다.

촤라락-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을 때, 은돈과 독현 사이엔 분명 묘한 기류가 흐르고 있었다.

그 안에서 두 사람이 무슨 얘기를 주고받았을까.

여기까지 오는 동안 지세의 머릿속엔 내내 그 생각뿐이었다.

“누나가 다시 사장님한테 돌아가겠다고 말할 줄 알았어.”

“뭐?”

“두 사람, 화해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거든.”

“……무슨 소리야. 그럴 리가 없잖아.”

은돈이 말도 안 된다는 듯 허탈한 미소를 머금었고, 지세가 그녀의 얼굴을 천천히 내리훑었다.

“응. 그럴 리가 없다는 거, 나도 알아.”

아는데 불안해.

거짓말처럼 고장 난 엘리베이터. 그 안에 갇힌 은돈과 독현.

그 말도 안 되는 우연을, 은돈이 인연이라고 믿어버릴까 봐.

두 사람은 분명 끝난 사인데, 어째서 완전히 헤어졌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 걸까.

지세는 생각했다. 아주 작은 불씨만 당겨져도, 언제든지 은돈은 자신을 떠나 독현에게 갈 것이라고.

“춥겠다. 들어가자.”

은돈이 지세에게 자켓을 돌려주며 말했다.

응. 지세가 나직이 대답하며 자신의 자켓을 받아들었다.

***

“환영합니다 꼬마 친구!”

키즈 레스토랑.

서빙복 차림의 은돈이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정신없이 테이블 사이를 뛰어다니고 있었다.

“저기 은돈 씨.”

“넵 매니저님!”

“되게 예쁜 손님이 찾아오셨는데……”

노총각 매니저가 수줍은 미소로 레스토랑 입구를 가리켰다.

그의 손가락을 주욱 따라간 은돈이 곧 소라를 발견하곤 표정을 굳혔다.

……삼십 분 후.

깔깔대는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쉴 새 없이 들려오는 레스토랑 안.

테이블에 앉은 소라가 도통 적응이 되지 않는다는 듯 인상을 찡그렸다.

“나가서 얘기하는 게 어때 우리?”

그녀의 말에, 은돈이 까칠한 한마디를 내뱉었다.

“퇴근하려면 아직 삼십 분 남았으니까 그냥 여기서 얘기하시죠. 아, 최대한 용건만 간단히 해주세요. 손님 나간 테이블 치우고 세팅해야 해서요.”

테이블 세팅? 소라가 저도 모르게 픽 웃었다.

“서빙에 재능이 있는지 몰랐어 차은돈. 이 참에 아예 눌러앉는 게 어때?”

“나 놀리려고 물어물어 여기까지 찾아오신 거면. 그만 가주시죠. 바빠 죽겠거든요.”

은돈이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한 달 만에 다시 지독현 앞에 나타난 저의가 뭐야?”

갑작스레 귀를 푹 찌르는 소라의 한마디.

은돈이 한숨을 내쉬며 다시 털썩, 몸을 앉혔다.

“어제 내가 사장님이랑 맞닥뜨린 건 ……고의가 아닌 우연이었어요.”

“우연?”

소라가 기가 막히다는 듯 웃었다.

“우연을 가장해 나타나 지독현을 흔들 생각이었나?”

“흔들어요? 그런 맘먹은 적 없어요.”

은돈의 대답에 소라가 날 선 시선을 치켜세웠다.

“난 차은돈 널 잘 알아. 니가 보기보다 욕심이 아주 많은 여자라는 걸.”

“무슨 뜻이에요.”

“한 사람으로 만족하란 뜻이야. 네가 아무리 기를 써도 두 남자를 동시에 손에 쥘 수는 없으니까.”

두 남자? 은돈이 살짝 미간을 좁혔다.

“대체 무슨 소릴 하는 건지,”

“지독현 옆에서 떨어져. 우연이든 악연이든 두 번 다시 마주치는 일 없게 하란 말이야.”

“이봐요 문소라 씨,”

“이제 너한텐 이지세가 있잖아?”

일순. 은돈이 저도 모르게 입을 다물었다.

동요하는 그녀를 보며 소라가 재미있다는 듯 눈빛을 번득였다.

“어제 보니 이지세와 네 사이. 상당히 깊어 보이던데. 사귀기라도 하는 거야?”

이지세의 손이 생각보다 멀쩡하다는 사실을 알면……차은돈 너, 어떤 표정을 지을까.

소라의 입가에 잔인한 미소가 걸렸다.

“잘 해봐. 이번 네 사랑은……나도 응원해 줄 용의가 있으니까.”

소라의 말에 은돈이 시린 눈빛을 곧추세웠다.

“사장님을 다시 나한테 뺏길까봐 불안해요?”

“뭐?”

소라가 경직된 얼굴로 되물었다. 은돈이 그녀를 보며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걱정 말아요. 이젠 우연이라도 마주칠 일 없을 테니까.”

“……”

소라가 말없이 입술을 깨물었다. 차은돈의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녀가 가증스러웠다.

정말 마주치지 않을 생각이었다면, 어젯밤도 내 남자 눈에 띄지 않게 조용히 사라졌어야지.

“……차은돈. 지독현이 왜 널 버렸는 줄 알아?”

가슴을 뒤흔드는 불안감에, 결국 참지 못하고 소라가 말문을 열었다.

“지명준 회장 때문이야. 너희 두 사람, 그 분 때문에 헤어진 거라고.”

“……알고 있어요.”

은돈이 놀라는 기색 없이 대답했다.

“내가 당한 뺑소니 사고……그 배후가 회장님이었다는 걸 안 이후로……날 대하는 사장님의 태도가 눈에 띄게 달라졌어요. 갑자기 헤어지고 싶어 안달이 난 사람처럼 모진 말만 골라서 해댔죠. 아마……바보가 아닌 이상 누구라도 알 거에요. 그 사람이 맘에 없는 이별을 했다는 거. 날, 회장님으로부터 지켜주려고 했다는 거.”

은돈이 시선을 내리깔았다.

“어쨌든……이제 와서 문소라 씨가 걱정하는 그런 일은 없을,”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해?”

소라가 가소롭다는 듯 은돈의 말을 잘랐다.

“정말 지독현이 널 회장님한테서 지키기 위해 이별을 선택했다고 생각해? 천만에.”

그녀가 표독스러운 미소를 머금었다.

“지독현은 과거의 상처가 다시 되풀이 되는 게 두려워서, 그냥 널 내팽개치고 혼자 달아난 거야.”

“……과거의 상처?”

“20년 전, 지독현의 친부가 차 사고로 죽었어. 그날 그 차량의 브레이크를 고의로 건드린 게 바로 지명준 회장이야.”

소라의 말에 은돈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회장님이 설마 친아들을 사고로 위장해 죽이려고 했겠어? 처음부터 그 분의 타깃은 아들 옆에 벌레처럼 달라 붙어있던 여자였어. 바로 지독현의 친모.”

“!?”

놀라는 은돈을 향해 소라가 싸늘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지독현에겐 받아들일 수 없는 충격이었겠지. 유일한 가족인 회장님이 과거엔 친모를 죽이려 했고, 이제는 자신이 }사랑해 마지않은 차은돈의 목숨까지 위협하고 있으니. 그것도 20년전 그 사고와 몹시 유사한 방법으로 말이야.”

“……”

은돈이 떨리는 눈으로 소라를 바라봤다. 그녀의 이야기를 믿어도 되는 걸까.

……적어도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나한테……이런 걸 말해주는 이유가 뭐예요?”

한참 후, 은돈이 말문을 열었다.

피식- 소라가 입가에 차가운 미소가 스쳐지나갔다.

“일종의 확인사살이랄까. 너한테 지명준 회장이 얼마나 무서운 인간인지 일깨워 주려는 거야. 아마 예정대로였다면……지독현의 친모는 20년 전 조작된 차사고로 사망했겠지.”

무슨 말인 줄 알아? 소라가 음산하게 지껄였다.

“겁 없이 지독현을 욕심내는 순간, 회장님의 다음 타깃은 네가 될 거란 소리야.”

“……”

은돈이 멍하니 입을 다물었다. 어떤 말도 머릿속에 떠오르지 않았다.

이윽고, 소라가 그녀를 조롱하듯 말했다.

“멋쩍어 할 필요 없어. 니가 지레 겁먹고 지독현 곁에서 멀리 도망친다고 해도 비난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테니까. 아마 내가 너였어도 같은 선택을 했을거야.”

“……같은 선택?”

은돈이 천천히 시선을 끌어올렸다.

그리곤 묘한 오기로 얼룩져있는 소라의 눈빛을 마주봤다.

“문소라 씨……바보 아니에요?”

일순, 예상치 못한 한마디에 소라가 미간을 좁혔다.

“뭐……?”

“사랑하는 사람이 절벽 끝에 매달려있는데, 날더러 멀리멀리 도망가라구요? 내가 떨어지지 않게 붙잡아 줘야 하는 거잖아. 힘들어 하는데……옆에 있어줘야 되는 거잖아.”

은돈의 입술을 비집고 긴 한숨이 쏟아졌다.

“문소라 씨. 한번이라도 생각해본 적 있어요? 사장님이 모든 사실을 알았을 때……얼마나 아팠을지, 지금은 혼자서 얼마나 아플지.”

“……”

“단 한번이라도 사장님을 안쓰럽다고 생각한 적 있어요?”

“……”

소라가 뭔가를 말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순간적으로 말문이 막힌 것이었다.

은돈이 그녀를 똑바로 응시했다.

“당신은 사장님을 사랑하는 게 아니라, 그냥 가지고 싶은 거예요.”

슥, 자리에서 일어난 은돈이 앞치마를 벗어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오늘 날 찾아온 거……문소라 씬 두고두고 후회 하게 될 거예요.”

잠시 후. 소라가 레스토랑을 벗어나는 은돈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독현에게 가는 것일 터였다.

‘단 한번이라도 사장님을 안쓰럽다고 생각한 적 있어요?’

귓가를 파고드는 은돈의 한마디.

분노와 묘한 수치심으로 소라가 파르르- 어깨를 떨었다.

***

“택시! 택시!”

도로변에 선 은돈이 큰소리로 택시를 외치며 팔을 흔들어 댔다.

그녀의 눈앞으로 독현의 얼굴이 스쳐지나갔다.

‘오늘이……돌아가신 친부의 기일이야.’

그래. 어젯밤 엘리베이터에 갇혔을 때. 분명히 나한테 그렇게 말했어.

어쩌면 사장님은 내가 알아주길 바랬는지도 몰라.

자신이 얼마나 힘든지. 왜 나를 놔 버릴 수밖에 없었는지.

“나한테 말하려고 했어……”

은돈이 핑 도는 눈물을 참으며 읊조렸다.

‘……차은돈. 내가 너랑 헤어진 이유는.’

‘아뇨. 말하지 마요.’‘이제 와서 사장님이 날 버린 이유, 알고 싶지 않아요. 우린 어차피 끝났으니까요.’

‘……그래. 그런 것 같군.’

그때 내가 냉정하게 말을 자르지 않았다면, 사장님이 스스로 얘기 했을 거야.

20년 전 사고에 대해서.

회장님이 얼마나 무서운 사람인지에 대해서.

돌아가신 친부처럼 나 역시 잃게 될까봐 겁이 났다고, 솔직하게 털어놨을 거야.

날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사실은 너무 사랑해서 손을 놔 버릴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을 거야.

“……지세야. 미안……”

은돈이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정말 미안해. 근데 나……사장님을 못 본 척 내버려 둘 수가 없어.

지금 얼마나 아프고 괴로울지 아니까……버려두고 멀리멀리 도망칠 수가 없어.

“사실은……그냥 사장님이 보고 싶어.”

너무너무 보고 싶어.

끼이익-! 그즈음 은돈의 앞으로 택시 한 대가 가파른 속도로 멈춰 섰다.

은돈이 재빨리 뒷좌석에 올라타며 탁! 문을 닫았다.

***

“그래. 무슨 일이냐?”

대성식품 본사. 회장실.

정중앙 소파에 앉은 지회장이 매서운 눈빛으로 독현을 응시했다.

“……어째서 차은돈이 홀 서빙을 전전하고 있는 겁니까.”

“흐흠!”

당장 본론부터 끄집어내는 독현을 보며 지회장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어째서 그 애를 받아주는 주방이 하나도 없는 건지 묻는 거라면. 그래. 대답해주마. 너 때문이다.”

그가 차갑게 뇌까렸다.

“차은돈이 다시 주방에 서는 모습을 보고 싶다면, 네놈부터 처신을 똑바로 해야 할 거다. 더 이상 미련 떨지 말고 소라와 결혼해. 그렇지 않으면 차은돈 그 아이, 다음번엔 주방이 아니라 홀에서도 쫓겨나게 될 거다.“

지회장의 말에 독현의 얼굴이 얼어붙었다.

은돈과 헤어지는 대가로 그가 원한 건 단 한 가지였다.

자신을 떠난 그녀가 다시 평범한 일상으로 되돌아가는 것……

좋아하는 요리를 마음껏 하고, 좋아하는 사람들 틈에서 행복하게 지내길 바랬다. 단지 그뿐이었다.

“소라와 식부터 올려라. 그래야 모두가 편해질 거다.”

“……아뇨.”

독현이 날카로운 시선을 빛내며 몸을 일으켰다.

지회장이 은돈의 인생을 손에 쥐고 이리저리 흔들어 대는 것을 더는 두고 볼 수 없었다.

곧 소파 테이블 위로 의문의 서류 봉투가 탁, 하고 떨어졌다.

“뭐냐.”

지회장이 눈을 가늘게 뜨며 봉투안의 사진을 꺼내들었다.

“……!?”

사진속의 남자를 대번에 알아 본 듯, 그의 동공이 살짝 부풀었다.

독현이 놀란 친조부의 모습을 보며 서늘하게 운을 뗐다.

“이십 년 전……당신의 교만 때문에 벌어진 사고. 그 사고에 대한 전말을 유일하게 알고 있는 사람 아닙니까?”

독현이 테이블 위에 놓인 사진을 흘깃 보며 물었다.

그와 동시에 지회장의 입에서 낮고 묵직한 신음이 터져 나왔다.

세월이 많이 흘렀건만.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사진 속 남자는 20년 전 당시 자신의 뒤를 봐주던 개인 비서였다.

“늦었지만 그 사람은 자기 잘못을 뉘우치고 있더군요.”

독현이 자켓 안에서 만년필 모양의 녹음기를 꺼내들었다.

그리고는 탁. ON 버튼을 누르자, 비서의 것으로 추정되는 굵직한 음성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제 잘못을……전부 인정……아니, 자백하겠습니다……저는 이십년 전, 지명준 회장의 지시를 받고 사람으로서 해서는 안 될 짓을 저질렀습니다. 그날……제 손으로 직접 사고 차량의 브레이크 라인을 끊었고……’

“너……너……”

지회장이 만년필에서 들려오는 비서의 떨리는 음성에 말을 잇지 못했다.

독현이 그런 친조부의 면상 위로 차가운 시선을 내리꽂았다.

그 와중에도 여전히 만년필에서는 비서의 음성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지명준 회장은 브레이크 결함으로 인한 사고사로 사건을 조작해 성나희씨를 살해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그날 사고차량을 몰고 나간 것은……’

타악.

독현이 만년필의 스위치 버튼을 끄자, 비서의 목소리가 사라졌다.

“굳이 더 들을 필요는 없을 것 같군요.”

독현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넓은 회장실 내부에 숨 막히는 정적이 감돌았다.

“……나한테 바라는 게 뭐냐.”

지회장이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이십 년도 더 지난 일로 내 발목을 잡겠다 이거냐?”

그의 소름끼치도록 낮은 음성. 독현이 고개를 똑바로 곧추세웠다.

“내가 바라는 건……”

곧이어 독현의 낮은 음성이 지회장의 귓전을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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