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화. 엘리베이터에서 생긴 일.
BAR 입구.
독현과 맞닥뜨린 은돈이 가까스로 정신을 추스르며 바닥의 스머프 탈을 집어 들었다.
“감사히 잘 썼습니다……”
그녀가 알바생 머리 위로 스머프 탈을 푹 덮어 씌웠다.
“그, 그럼 전 이만!”
자신에게 내리꽂힌 시선들을 회피한 채, 은돈이 재빨리 몸을 돌렸다.
“어디 가.”
그때였다. 달아나려는 은돈의 팔을 지세가 거머쥐었다.
“여기까지 왔는데. 그냥 들어가자.”
이전보다 훨씬 편하게 은돈을 대하는 그의 태도에, 잠깐이지만 독현의 미간이 좁아졌다.
미묘한 공기 속……이번엔 소라가 말문을 열었다.
“오랜만이네?”
그녀의 서늘한 시선이 은돈의 얼굴에 가 박혔다.
“……네. 오랜만이네요.”
은돈이 고개를 치켜들며 대답했다. 그녀의 시야에, 나란히 선 소라와 독현의 모습이 들어왔다.
그래……더 이상 피하지 말자. 어차피 우린 헤어진 사이잖아.
“지세 니 말이 맞아. 여기까지 왔는데……들어는 가야지.”
은돈이 주먹을 불끈 쥔 채 비장하게 말했다.
잠시 후. 그녀가 지세와 함께 시끄러운 BAR안으로 자취를 감췄고.
“우리도 들어갈까?”
지훈이 독현과 소라를 향해 경쾌하게 말했다.
“그나저나 너희 진짜로 같이 온 거냐? 이번엔 정말 결혼 하는 거야? 증권가 찌라시처럼?”
“앞에서 우연히 만난 것뿐이야.”
독현이 제게 어깨동무를 해오는 지훈의 팔을 휙 떨구며 말했다.
“뭐야 저 자식 오늘따라 한층 더 까칠한데?”
지훈이 BAR 안으로 사라지는 독현의 뒷모습을 보며 투덜거렸다.
소라 역시 독현이 사라진 곳을 응시하며 입술을 깨물었다.
***
BAR 안.
바텐더들의 화려한 칵테일 쇼가 펼쳐지는 가운데, 사람들 틈바구니 속에 섞인 은돈의 모습이 보였다.
그녀가 멀찍이 선 독현의 눈에 최대한 띄지 않으려 어깨를 움츠렸다.
“……그렇게 신경 쓰여?”
“어, 어?”
갑작스런 지세의 물음에 은돈이 놀라서 되물었다.
미세한 파동이 이는 그녀의 동공.
지세는 알고 있었다. 은돈이 지금 뭘 의식하고 있는지, 누구를 신경 쓰고 있는지.
“설마 여기서 사장님을 만나게 될 줄은 몰랐어.”
“아……응.”
“미리 알았으면, 같이 오잔 말 안 했을 거야. 미안해.”
“아냐, 괜찮아!”
은돈이 지세를 향해 손사래를 쳐보였다.
“저기, 그보다 나 잠깐……술 좀 가져올게.”
그녀가 휙, 바 테이블을 향해 돌아섰다.
남겨진 지세가 인파 속에 섞이는 은돈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얌마 이지세!”
그때였다.
“어……형.”
지세가 다가오는 남자에게 아는 척을 해보였다.
“너 내가 저기서 다 봤어! 이지세 이거, 샌님인 줄 알았더니, 언제 애인까지 만들었냐?”
남자는 내내 지세의 곁을 지키던 은돈을 그의 애인으로 착각한 모양이었다.
“아니에요. 애인.”
지세가 자조적인 시선을 빛내며 대답했다.
“뭐? 아니었어?”
“……그냥 내가 좋아하는 여자에요.”
“엥? 쯧쯧……너 아직 샌님 맞구나.”
혀를 차던 남자가 갑자기 좋은 생각이 난 듯 지세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그러지 말고 걍 이 형님이 하잔 대로 해. 도와줄 테니까. 나중에 고맙다고 질질 짜지나 말고.”
“……네?”
영문을 몰라 하는 지세의 어깨를 탁탁 다독인 채, 남자가 의미심장하게 BAR라운지로 돌아섰다.
……그로부터 몇 분 후.
“자 지금부터 막간을 이용한 ‘키스타임’이 있겠습니다!”
시끄럽던 음악이 뚝 끊어진 BAR 내부.
라운지 중앙에 선 지세의 지인이 짓궂은 얼굴로 외쳤다.
“딱 5분간 음악도 끄고! 조명도 끄고! 머릿속에 든 전원 스위치도 끄고! 다 같이 본능에 몸을 맡긴 채 미쳐 봅시다!”
탁! 그가 짓궂게 손가락을 튕기자, 기다렸다는 듯 BAR 내부의 모든 조명이 꺼졌다.
“뭐, 뭐야?”
“아무나 붙잡고 키스라도 하라는 거야?”
난데없는 상황에 칵테일 잔을 든 사람들이 우왕좌왕하기 시작했다.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암전 상태.
은돈 역시 더듬거리며 바 테이블을 붙잡았다.
“팔자에도 없는 키스타임이라니……”
그녀가 지끈 아파오는 머리를 붙든 채, 행여 누군가에게 뺏길세라 입술을 앙 다물었다.
“얌마 이지세. 니 애인, 바 테이블 왼쪽 끝에 서 있더라. 누가 채가기 전에 얼른 가 봐”
그 무렵, 바 라운지에 서 있던 지세가 지인의 속삭임에 미간을 좁혔다.
“형. 이런 짓 다신 하지 마요.”
“왜? 난 니가 그 여잘 좋아한대서 도와주려고,”
“좋아한다고 했지, 즐기겠다고 한 적 없어요.”
말을 가로채는 지세를 보며, 남자가 서운한 듯 볼멘소리를 했다.
“자식, 괜히 좋으면서 빼는 거 다 알아!”
그가 어둠속에서 지세의 어깨를 툭 건드렸다. 그리곤 보란 듯이 옆자리 여성의 허리를 휘어 감았다.
야릇하고 끈적 한 그 분위기 속에서. 지세가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곤 은돈을 찾기 위해 몸을 돌렸다.
……한편, 바 테이블 앞.
“어, 밀지 마요! 밀지 마!”
본능이 이끄는 대로 움직이는 무리 속에서 이리저리 떠밀리던 은돈이 점점 원치 않는 방향으로 가고 있었다.
“아, 안 돼! 이쪽은 안 돼! 여긴 아니라고!”
아까 분명히 봤어. 이쪽 어딘가쯤 사장님이 서 있었다고.
“아 밀지 마요! 난 저쪽으로 가야 한다니까! 밀지 마 이것들아!”
그녀가 마치 접영 하듯 두 팔을 허우적대며 반대편으로 나아가기 위해 애를 썼다.
그러나 하늘도 무심하시지……
“아악!”
누군가의 발에 걸린 은돈이 휘청,하며 비명을 내질렀고,
곧이어 앞으로 쏠린 그녀의 몸을 누군가 강한 힘으로 낚아챘다.
아아……안 돼……
은돈이 자신의 허리를 휘감은 손길에 망연자실한 표정을 지었다.
보이진 않지만 알 수 있었다.
날 안은 이 손길. 머리칼에 와 닿는 이 숨결. 이 느낌. 전부 독현이라는 걸.
“……”
이건 마치……인형탈 제 2탄 같군.
은돈이 후읍 호흡을 멈춘 채 독현이 제발 자신을 알아보지 못했기를 빌었다.
스르륵……
그녀의 바램이 이뤄진 것일까. 독현이 곧 은돈을 붙잡았던 손을 아래로 떨궜다.
덕분에 자유로워진 은돈이 그에게서 재빨리 돌아섰다.
그런데, 쨍강-!
뭔가가 깨지는 소리가 갑작스레 귓전을 울렸다,
놀란 은돈이 돌처럼 자리에 굳어 섰고, 곧 BAR의 모든 조명이 한꺼번에 들어왔다.
그녀가 경직된 얼굴로 눈앞의 독현을 마주봤다.
“어머 어떻게 해! 앞이 안 보여서 그만……!”
파트너와 꽤나 진한 키스를 주고받았는지, 립스틱이 번진 한 여자가 바닥의 유리잔해를 보며 소리쳤다.
아마도 들고 있던 칵테일 잔을 놓친 모양이었다.
“사장님!”
순간, 은돈이 저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이며 독현에게 달려들었다.
곁에 서 있던 소라의 날카로운 시선도 무시한 채.
“괜찮아요?”
그녀가 곧장 독현의 손을 거머쥐었다. 유리파편이 튄 것인지 손끝에 가벼운 생채기가 나 있었다.
“피나요. 어떻게 해, 피난다구요……”
반사적으로 독현과 몸을 밀착시킨 은돈이 걱정스러운 한마디를 내뱉었다.
음악도 없이 침묵에 휘감긴 BAR 안. 모두의 시선이 두 사람에게 쏠렸고……
그제서야 은돈은 자신의 행동이 매우 적합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
독현이 제 손을 꽉 붙든 은돈을 말없이 바라봤다.
“아,”
은돈이 흠칫하며 재빨리 그의 손을 놓았다.
내가 지금 뭘 한 거야.
“제가……그……키스타임인지 뭔지 때문에, 저쪽에서 여기까지 떠밀려왔거든요……”
“……”
“그럼……이만 다시 떠밀려 가보겠습니다……”
독현이 멘붕 상태로 말을 잇는 은돈을 지그시 내려다봤다.
유리에 베인 손끝이 쓰라렸다.
처음으로 아프다고 느꼈다. 다만, 아픈 게 손끝인지, 자신의 마음인지 헷갈렸다.
“……누나.”
그 즈음, 지세의 음성이 들려왔다.
왠지 뜨끔한 은돈이, 그대로 시선을 내리깔았다.
“정말이지, 차은돈씬 변함이 없네. 주제넘고, 덜렁대고, 거기다 미련하기까지.”
곁에 선 소라의 비아냥이 귓가를 파고들었다.
그럼에도 은돈은 어떤 말도 잇지 못한 채 자리를 지킬 뿐이었다.
이 멍청아……어쩌자고 고작 저만한 상처 하나에 세상이 뒤집힌 듯 달려들었는데?
사장님이 넘어지든, 다치든, 내가 아닌 문소라를 사랑하든. 이젠 상관없는 일인데.
“나……화장실 좀.”
은돈이 지세를 향해 말했다.
“누나.”
지세가 무심코 그녀의 어깨를 붙잡았다. 그러나 곧 은돈의 암담한 표정을 보곤 아래로 손을 내렸다.
“따라오지 마. 그냥 내가 창피해서 그래. 부탁이야……”
은돈이 그렇게 읊조린 뒤 BAR 출구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지세, 그리고 독현이……말없이 그녀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
엘리베이터 앞.
‘고장 수리 중’ 이라고 써 붙인 안내장이 위태롭게 팔랑거리다, 이내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잠시 후, 안내장이 사람들 발에 밟혀 멀리멀리 사라지자, 거짓말처럼 은돈이 나타났다.
그녀가 초조한 얼굴로 엘리베이터 열림 버튼을 꾹 눌렀다.
“하아……나가 죽어라 차은돈……”
몇 분 전 상황이 반복 재생 영상처럼 눈앞을 아른댔다.
독현의 다친 손을 자연스레 거머쥐던 자신,
그리고 그런 자신을 내려다보며 흔들리던 독현의 눈빛……
쿵. 쿵! 그녀가 자책하듯 머리를 내려치며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그런데 그때, 닫히려는 문 사이로 누군가의 손이 탁 하고 들어왔다.
“……어……여긴 왜……”
은돈이 벙 찐 얼굴로 엘리베이터에 올라타는 독현을 바라보았다.
그가 대답대신 닫힘 버튼을 눌렀다.
“몇 층.”
“네? 아, 저 일 층……”
은돈의 말에 독현이 꾹, 일 층 버튼을 눌렀다.
이윽고 엘리베이터가 움직이기 시작했고, 묘한 침묵이 두 사람을 에워쌌다.
설마……날 따라 나온 건가……?
앞으론 괜한 오지랖 부리지 말라고 경고라도 하려는 거야?그녀가 독현의 다친 손가락을 보며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언제부터 반말하는 사이가 된 거야.”
그때- 독현의 낮은 저음이 비좁은 공간에 울려 퍼졌다.
“네……?”
은돈이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채 되물었다.
독현이 그녀를 향해 시선을 비틀었고, 비로소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이지세가 널 상당히 편하게 대하던데. 언제부터 둘이 그런 사이가 된 거야?”
어쩐지 집요하게 물어오는 독현을 보며, 은돈의 눈빛이 떨렸다.
사장님이 왜 나한테 이런 걸 묻는 거지.
아니……그보다 내 가슴은 왜 이렇게 쿵쾅대는 거지? 대체 뭘 기대 하길래?
은돈이 제게 내리꽂힌 독현의 시선을 피하며 입을 열었다.
“지세랑 저……예전부터 친했잖아요. 사장님이랑 헤어진 후로, 좀 더 각별한 사이가 됐을 뿐이에요.”
각별한 사이.
태연한 척 말했지만 은돈의 목소리는 분명 떨리고 있었다.
독현이 모를 리가 없었다. 자신을 떠보기 위해 은돈이 지금 일말의 모험을 하고 있다는 걸.
“……”
그녀의 속내가 빤히 들여다보인다는 듯. 독현이 잠시 침묵을 유지했다. 그리곤 다시 말을 이으려는 순간, 쿠웅-! 갑작스런 굉음과 함께 엘리베이터가 멈춰 섰다.
“헉……? 이, 이거 지금……멈춘 거죠?”
은돈이 마치 전단지마냥 벽에 찰싹 달라붙은 채 물었다.
“그런 것 같군.”
독현이 꺼진 숫자판을 눌러보며 읊조렸다.
“비상 버튼……”
“비상 버튼!”
일순, 두 사람이 동시에 내뱉으며 비상버튼에 손을 가져갔다.
“헛……”
독현과 스치듯 손길이 닿은 은돈이 움찔, 버튼에서 물러났다.
“미안해요. 본의 아니게 자꾸 터치를……”
“……일일이 사과할 필요 없어.”
독현이 살짝 굳어진 눈빛으로 말했다.
……그로부터 삼십 분 후.
“대체 왜 핸드폰이 안 터지는 거죠? 지하도 아닌데! 대체 왜!”
은돈이 먹통인 핸드폰을 손에 쥔 채 외치다, 바닥에 홱 주저앉았다.
말없이 서 있던 독현의 손끝에 살짝, 그녀의 머리칼이 닿았다.
“……머리. 잘랐나보군.”
독현이 시선을 내리 깐 채 던진 한마디. 은돈이 짧아진 머리칼을 자연스레 쓸어 넘겼다.
“이별 후에 여자들이 반드시 거쳐야 할 통과 의례 같은 거죠 뭐.”
“……”
독현이 대꾸 없이 은돈을 바라보다, 이내 시선을 그녀의 왼손으로 옮겼다.
가느다란 네 번째 손가락에 더 이상 프러포즈 반지는 끼워져 있지 않았다.
“이지세랑 너……같은 주방에서 일하고 있는 건가?”
독현이 시린 눈빛으로 그녀에게 물었다.
“……아뇨. 실은 지세가 손을 좀 다쳐서요.”
은돈이 애써 아무렇지 않게 말을 이었다.
“큰 부상은 아니지만, 당분간 주방엔 서지 못할 것 같아요. 지세도, 저도.”
그녀의 대답에 독현이 살짝 미간을 좁혔다.
“주방이 아니면. 지금 어디서 일하고 있지?”
“……레스토랑에서 파트타임으로 서빙 알바 중이에요.”
“서빙?”
“네. 생각보다 일도 편하고 재미 있,”
“고작 그런 일이나 하자고 내 면전에 사직서를 내던진 건가?”
독현이 은돈의 말을 자르며 날카로운 시선을 빛냈다.
바닥에 주저앉아있던 은돈이 다시 스윽, 몸을 일으켰다.
“헤어졌는데 계속 사장님 밑에서 일할 순 없잖아요.”
그녀가 가느다란 한숨을 내뱉었다.
“나도 할 수 만 있다면 홀 대신 다시 주방에 서고 싶지만, 그게 말처럼 쉽지가 않아요. 사장님도 알다시피 문제의 그 스캔들 때문에……다들 날 고용하지 않으려고 하거든요.”
담담하게 이어진 은돈의 말에, 독현의 입술이 차갑게 벌어졌다.
“너만 괜찮다면. 내가 자리를 알아봐 줄 수도 있어.”
뭐……? 은돈이 저도 모르게 눈썹을 치켜 올렸다.
“일자리를 대신 알아봐 주겠다구요?”
“니가 원하면.”
“하……”
은돈이 딱딱한 눈빛으로 독현을 쳐다봤다.
“날 버렸다고 해서, 이상한 책임감 같은 거 느낄 필요 없어요.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일자리는 스스로 구할게요.”
“……이대로 니 꿈 접게 될 수도 있어.”
“뭐라구요?”
“내 도움 없인 너, 두 번 다시 주방에 못 설 거라고.”
독현이 냉정하게 말했다. 은돈이 제발 현실을 직시하길 바라면서.
그러나 돌아오는 것은 울컥한 그녀의 한마디였다.
“차라리 안 서고 말죠. 전남친 도움 받아가며 구질구질하게 밥줄 지키느니, 다른 일 알아보는 게 훨씬 낫겠네요!”
“쓸 데 없는데 자존심 부리지 마.”
“왜요? 난 자존심 좀 부리면 안 돼요? 사장님도 결국 그 잘난 자존심 지키려고 날 버린 거면서!”
은돈의 입에서 불쑥 튕겨 나온 그 한마디.
독현의 표정이 살벌하게 얼어붙었다.
“함부로 단정 짓지 마. 웃기지도 않은 자존심 때문에 널 버린 게 아니니까.”
“그럼 뭔데요? 날 버린 이유가.”
은돈이 흔들림 없는 시선으로 물었다.
그러나 독현은 대답하지 않았고……둘 사이에 숨 조이는 침묵이 이어졌다.
“난 사장님이 대체 무슨 생각인 건지 모르겠어요. 뭐 때문에 날 버린 건지……대체 왜 날 따라서 이 엘리베이터에 오른 건지. 하나도 모르겠다구요.”
가늘게 떨리는 은돈의 목소리.
그 목소리에 독현의 포커페이스가 무너졌다. 찰나였지만, 분명 그의 눈빛이 떨렸다.
“나도 몰라.”
“……”
내가 왜 널 버렸는지.
왜 정신없이 이 엘리베이터에 오른 건지……하나도 모르겠다고.
“오늘이……돌아가신 친부의 기일이야.”
갑작스런 한마디가, 이내 독현의 입술을 뚫고 나왔다.
은돈이 커다래진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차은돈. 그리고 내가 너랑 헤어진 이유는.”
독현이 눈앞의 은돈을 내려다보며 짧게 숨을 골랐다.
“아뇨. 말하지 마요.”
순간,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고개 숙인 은돈이 독현의 말을 가로 막은 것이었다.
그녀가 갑작스레 심경변화를 일으킨 이유는 단 하나였다.
이지세.
그 세 글자가 어느덧 은돈의 가슴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다.
“우리가 무슨 이유로 헤어졌든 이제 와서 다 무슨 소용이에요. 어차피 달라 질 건 아무것도 없는데……”
잠잠히 말을 잇는 은돈을, 독현이 묘한 표정으로 응시했다.
은돈 역시 그를 마주보다 곧 시선을 떨궜다.
‘우린 재혼가정이고. 지세는 내 새엄마가 데려온 자식이었어.’
그녀의 귓가로……지세의 친누나인 자경의 음성이 어지럽게 울려 퍼졌다.
‘지세가 강아지를 계단에서 던져서 일부러 다리를 부러뜨렸어.’
‘그렇게 하면 다시는 자기한테서 도망가지 못 할 거라고 생각 한 거야.’
귓가를 맴도는 그녀의 음성……
뒤이어 은돈의 눈앞으로 지세의 서글픈 얼굴이 스쳐지나갔다.
‘단 한번만이라도……사장님이 아닌 날 봐줘.’
‘오래 붙잡아 두진 않을게. 그냥, 당분간만이라도 좋으니까……내 옆에 있어줘.’
“……”
은돈은 도저히 지세를 져버릴 수 없었다.
지금 이 엘리베이터 안엔 분명 아슬아슬한 기류가 흐르고 있었다.
만약 독현이 조금이라도 먼저 선을 넘는다면……은돈은 다시 그에게 되돌아가고 싶어질 것이다.
지세의 오른손을 무시한 채.
“이제 와서 사장님이 날 버린 이유, 알고 싶지 않아요. 우린 어차피 끝났으니까요.”
“……그래. 그런 것 같군.”
독현이 시선을 끌어내리며 대답했다.
쾅쾅! 그때였다. 밖에서 누군가 엘리베이터 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안에 누구 있어요!?”
“헙……네! 있어요! 여기요!”
은돈이 밖을 향해 큰 소리로 외쳤다.
그리고……얼마쯤 시간이 지났을까.
촤라락-! 안전요원에 의해 드디어 문이 열렸을 때.
“……지세야……?”
모여 선 사람들 틈에서 은돈이 제일 처음 발견한 건 다름 아닌 지세였다.
“괜찮아?”
그가 단번에 은돈의 곁으로 다가섰다.
“나 여기 있는 거 어떻게 알았어……?”
“누나 전매특허잖아. 갇히는 거.”
무사한 은돈을 보며 안도한 듯, 지세의 입가에 허탈한 미소가 걸렸다.
“가자.”
이내 그가 은돈의 오른손을 끌어당겼다.
그리곤, 자연스럽게 손깍지를 꼈다.
“……”
그의 행동이 자신을 의식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잘 아는 독현이, 고개를 내리곤 픽 웃었다.
곧이어 그가 지세와 은돈의 곁을 싸늘하게 지나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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