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화. 이지세의 이면.
“사장님.”
은돈이 독현을 보며 일순 안도의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그녀를 내려다보는 독현의 표정은 달랐다. 그의 눈빛이 온기 없이 얼어붙어 있었다.
“여기서 뭘 하는 거야 대체.”
그의 서늘한 음성이, 은돈의 가슴을 날카롭게 조각냈다.
그녀가 목발을 다부지게 쥔 채 독현을 향해 말했다.
“여기서 뭘 하는 거냐구요? 당연히 사장님 기다렸죠. 어제, 사장님이 나한테 무슨 짓을 했는 줄 알아요?”
“……”
독현이 한 치의 떨림 없는 시선으로 묵묵히 은돈을 응시했다.
곧이어 은돈의 목소리가 차가운 공기 중에 흩어지며 그의 귓전을 울렸다.
“일방적으로 헤어지고, 일방적으로 연락 끊고, 일방적으로 날 피하는 게, 정말 사장님의 최선이에요? 그게 사장님 진심이냐구요. 정말로 나랑 이렇게 끝낼 거예요?”
우다다 감정을 토해내는 은돈을 쳐다보던 독현이 막 입을 떼려는 찰나, 목덜미 뒤로 인기척이 느껴졌다.
기자들이었다.
내내 독현의 맨션 앞을 지키고 있던 그들이, 때는 이 때다 카메라를 치켜들었다.
예상치 못한 상황 전개에 독현의 눈썹이 치솟았다.
그들의 앵글에 차은돈이 노출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전 국민 앞에서 프러포즈를 감행했던 얼마 전과는 상황이 달라져 있었다……
독현은 차은돈이 가십거리로 전락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잠깐 그대로 있어.”
그가 날렵하게 자켓을 벗어들었다.
곧이어 은돈이 제 머리위로 툭- 덮어씌워지는 자켓을 보며 짧게 호흡을 멈췄다.
“일단 차로 가지.”
독현이 목발에 의지한 은돈의 어깨를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그리곤 기자들의 시야에서 벗어나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은돈이 자신에게 보폭을 맞춰 걷는 그를 말없이 올려다보았다.
이런데도, 헤어질 수 있어?스스로에게 물었다. 독현이 원하는 대로 헤어져 줄 수 있냐고.
아니, 그전에……이 남잔 정말 나랑 헤어지기를 바라고 있는 걸까?
그녀가 흐트러진 시선을 아래로 떨궜다.
몇몇 기자들이 자켓을 뒤집어 쓴 그녀를 찍기 위해 연신 셔터를 눌러댔다.
……그로부터 한 시간 후.
대학 병원 앞.
주차 돼 있는 페라리 안에서 침묵을 지키고 있는 두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사장님.”
꽤 오랜 시간이 흐른 후. 은돈이 먼저 말문을 열었다.
독현이 메탈 시계를 힐끗 응시하며 그녀의 말을 가로막았다.
“늦었군. 들어가 봐. 그리고, 다신 함부로 찾아오지 마.”
그가 은돈을 쳐다보지도 않은 채 차갑게 말했다.
“니 기분에 취해, 니 멋대로 행동하는 거. 이젠 자제해줬으면 좋겠군.”
“……갑자기 왜 그래요?”
은돈이 시선을 끌어내린 채 물었다.
“무슨 일이 있었길래, 사람이 이렇게 갑자기 변해요?”
“변한 게 아냐. 늦게나마 정신을 차린 것뿐이지.”
그의 말에 은돈의 눈동자가 옅게 떨렸다.
“지금 이러는 거, 회장님 때문이면……난 이미 괜찮다고 했잖아요.”
“내가 괜찮지 않아.”
독현이 즉답을 내놓았다.
“이젠, 내가 괜찮지가 않아졌어. 널 내 옆에 두는 게.”
숨 막히게 낮은 어조.
은돈이 여전히 자신을 보지 않는 그를 빤히 응시했다.
“내가 납득할 수 있는 이유를 말해줘요. 그런 핑계 말고, 변명 말고……정말 나랑 헤어지려는 이유가 뭐예요?”
“……이유가 뭐냐고.”
독현이 비로소 시선을 비틀어 은돈을 마주보았다.
“차은돈……넌 날 불안하게 만들어.”
“……”
“처음엔 널 잃을까봐, 그래 그게 불안했어. 하지만 지금은 너 때문에 내가 가진 것들을 전부 잃게 될까봐. 그게 두려워.”
그게 날 불안하게 만들어.
독현이 매몰찬 눈빛으로 한동안 은돈의 얼굴을 응시했다.
“이 정도면 원하는 대답이 됐나?”
“……아뇨.”
일순 은돈이 고개를 내저었다.
“난 사장님 말 못 믿겠어요. 갑자기 이럴 순 없어요.”
그녀가 고집스레 말을 이었다.
“피곤한 여자로 생각해도 좋아요. 왜 이렇게 질척이냐고 화내도 돼요. 그래도 나 사장님 붙잡을 거에요. 바짓가랑이에 매달려 가지 말라고 소리칠 거예요. 이대론 억울해서 못 헤어지겠다, 열심히 미련 떨 거라구요.”
사장님도 내가 흔들릴 때 날 붙잡아줬잖아요.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늘어지진 않았지만, 모두가 보는 기자회견장에서 나한테 프러포즈 해줬잖아요. 그러니까 이젠 내 차례예요.
“사장님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난 이대로 .헤어지고 싶지 않아요. 홧김에, 자존심에 헤어지기엔 사장님을 너무 사랑해요.”
은돈이 꾹 깨물었던 입술을 벌려 그렇게 말했다.
그와 동시에 독현의 눈빛이 살짝 출렁였다. 그러나, 머잖아 그의 입에서 냉정한 한마디가 떨어졌다.
“나 때문에 네 마지막 자존심 까지 내려놓진 마. 쓸데없는 죄책감에 시달리고 싶지 않으니까.”
말을 마친 그가 타악-! 문을 여닫으며 차에서 내려섰다.
“……내려.”
보조석으로 돌아 간 그가 차 문을 열곤 은돈을 향해 뇌까렸다.
“사장님……”
은돈이 뭔가를 말하려다 이내 체념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오늘은……아니. 오늘만 시키는 대로 할게요.”
그녀가 절뚝이며 차에서 내려섰다. 그리곤 독현이 건네는 목발을 받아들었다.
“……사장님이 어제 그랬죠. 날 버리려는 거라고. 그래도 난 사장님 절대 안 버릴 거예요. 반지도 안 뺄 거구요.”
그녀가 왼손의 웨딩 링을 향해 고개를 끌어 내렸다.
그 찰나의 순간, 독현의 시선이 은돈의 얼굴로 향했다.
경직된 표정을 느슨하게 푼 채, 그가 하염없이 은돈을 응시했다. 내내 머릿속에, 기억 속에 담아두려는 듯.
“갈게요. 데려다 줘서 고마워요.”
다시 고개를 치켜든 은돈이 그렇게 말함과 동시에 독현이 시선을 비틀었다.
“이젠 찾아오지 마.”
마지막 말을 내뱉고는, 그가 운전석을 향해 몸을 돌렸다.
잠시 후. 페라리에 올라탄 그를 향해 은돈이 씩씩하게 외쳤다.
“사장님 운전 조심해요! 도착하면 연락하구요! 기다릴게요! 진짜 기다릴 거예요!”
평소보다 훨씬 밝은 어조.
마냥 씩씩하게 웃던 그녀가 위태롭게 표정을 굳힌 건……페라리가 완전히 병원을 빠져나간 직후였다.
“……”
홀로 남겨진 은돈의 입에서 울음 섞인 한숨이 터져 나왔다.
바보처럼 우두커니 선 채, 그녀가 독현의 마지막 얼굴을 곱씹고, 또 곱씹었다.
그 모습을……이미 한참 전부터 병원 로비 앞을 지키고 서 있던 또 다른 누군가가 응시했다.
지세였다.
그의 어질러진 눈빛 안에 상처 입은 은돈의 모습이 담겼다.
“그렇게 당해놓고도……도저히 사장님을 못 놓겠어요……?”
지세가 저만치의 은돈을 보며 읊조렸다.
“……그럼 내가 도와줄게요.”
혼자서 못 놓겠다면 내가 도와줄게. 누날 위해서.
그가 바닥으로 끌어내렸던 시선을 다시 곧추세웠다,
***
병실.
“왔어요?”
“어……지세야……”
지금 막 안으로 들어선 은돈이 침대 시트를 정리하던 지세를 멍한 얼굴로 쳐다봤다.
“이 시간까지 병원에 있었던 거야? 혹시 나 기다리느라?”
그녀의 물음에 지세가 씽긋 웃어보였다.
“그냥. 얼굴 보고 가려구요. 아, 책 몇 권 가져왔어요. 누나가 좋아할만한 걸로.”
그가 서랍장 위에 순정만화 여러 권을 꽂아 넣었다.
“……”
은돈의 눈길이 만화책 옆에 꽂혀있는 두꺼운 영문 서적에 머물렀다.
그녀의 귓가로 독현의 짓궂은 한마디가 울려 퍼졌다.
‘이건 네 슬리퍼야. 이건 이불이랑 휴대폰 충전기. 아 그리고……이건 영문 의학 서적이야.’
‘잠 안 올 때 읽어. 너라면 바로 곯아떨어질 거야.’
피식. 은돈의 입가에 서글픈 미소가 서렸다가 사라졌다.
지세가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다, 침묵을 깨고 운을 뗐다.
“나……깁스 풀었어요.”
“응?”
문득 정신을 차린 은돈이 지세의 오른손을 향해 고개를 내렸다.
“정말이네. 왜 벌써? 좀 더 하고 있어야 하는 거 아냐?”
“답답해서요. 하고 있어봤자 소용도 없구요.”
“무슨 소리야? 왜 소용이 없어?”
은돈이 의아한 듯 되묻자, 지세가 묘한 표정으로 입을 닫았다.
이윽고 그가 서랍위에 놓여 있던 머그컵을 집어 들었다. 독현이 은돈을 위해 갖다 둔 것이었다.
“이거 쓴 거죠? 씻어 올게요.”
“아냐, 괜찮아. 내가……”
쨍강-!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지세의 손에서 미끄러진 머그컵이 바닥에 부딪치며 날카로운 마찰음을 냈다.
“아……미안해요……”
그가 허리를 수그린 채 바닥에 흩어진 유리 잔해로 손을 뻗었다.
그 순간. 움찔!
날카로운 유리 조각을 주워들던 그의 오른손이 미세한 경련을 보였다.
다시 바닥으로 툭 떨어진 유리 조각을, 은돈이 호흡을 멈춘 채 바라보았다.
“너 손……괜찮은 거야?”
가까스로 물어오는 그녀를 보며, 지세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지세야, 니 손……생각보다 많이 다친 거야?”
미동 없는 그를 향해, 한 번 더 은돈이 떨리는 소리로 물었다. 그때, 지세가 마치 자신의 일이 아닌 것처럼 덤덤히 대꾸했다.
“내가 말했었죠. 나한테 중요한건……손 따위가 아니라 누나라고.”
그가 고개를 돌리자, 자연스레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난, 누나만 있으면 괜찮아요.”
“……뭐? 갑자기 무슨,”
“이 손. 못 움직일지도 모른대요. 평생.“
전혀 생각지도 못한 한마디가 지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은돈이 경직된 얼굴로 한참만에 되물었다.
“지금……뭐라고 했어……?
일렁이는 그녀의 동공을 들여다보며, 지세가 다시 입을 열었다.
“나한테 중요한 건 이 손이 아니라, 누나라구요.”
“……”
혼란스러움. 당혹감. 그리고 이유모를 불안감.
어지러운 감정들이 한꺼번에 은돈의 가슴을 짓눌렀다.
지세가 그녀의 마음을 읽은 듯 아무렇지 않게 말을 이었다.
“오른손 신경이 손상됐대요. 영구적인 손상이라 재활도 소용없을 거고, 앞으론 팬도 잡지 못하게 될 거에요.”
“신경이 손상돼……?”
요리를 못 할 수도 있다고?
은돈이 한 발, 저도 모르게 지세에게 다가섰다.
지금 이 순간 그녀의 목을 옥죄어 오는 감정은 다름 아닌 죄책감이었다.
“정말이야? 정말 니 손……나 때문에 잘못 된 거야? 날 구하려다가……그니까 나 때문에……”
“아뇨. 나 때문이에요.”
지세가 은돈을 직시한 채 대답했다.
“누날 다치게 하기 싫어서, 완벽한 내 자의로 그 차 앞에 뛰어든 거였어요.”
“……”
“누나 잘못은 없어요. 절대로 원망 같은 거 안 해요.”
지세가 차가운 날숨을 내쉬었다.
“그 사고로 내가 깨달은 게 뭔 줄 알아요? 굳이 갖은 애를 써가며 누날 포기할 이유가 없었다는 거에요.”
은돈이 커다래진 눈으로 지세를 응시했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누난 나한테 소중하고, 절실한 사람이에요. 그걸 이제 분명하게 깨달았어요. 그래서……주제넘게 욕심을 내볼까 해요.”
그가 천천히 은돈에게 다가섰다.
그리곤 무감각한 오른손을 그녀에게 뻗었다.
“좋아하니까. 좋아할 수밖에 없어서……이젠 옆에 있고 싶어졌어요.”
그가 손등으로 은돈의 뺨을 아주 조심스럽게 쓸어내렸다.
지켜주고 싶어. 다치지 않게 보호해주고 싶어.
더 이상 그 사람 옆에서 상처받지 않게……내 옆에 세워 두고 싶어.
“나 반말 해도 돼요?”
“뭐……?”
“은돈아 라고, 불러도 돼요?”
일순 당황하는 은돈을 보며 지세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시선을 내린 채 웃었다.
“농담이에요.”
“지세야 난,”
“누나라고 부를 테니까 대신 말은 편하게 할 수 있게 해줘요. 이젠 그럴 때도 됐잖아요.”
“……”
한참을 말없이 굳어있던 은돈이 곧 고개를 끄덕였다.
그와 동시에 지세의 입가에 미소가 스쳤다.
“컵, 다시 사다 놓을게.”
마치 처음부터 그래왔던 양, 그가 지극히 자연스러운 그 한마디를 던졌다.
은돈이 대답 없이 지세의 오른손을 내려다 봤다.
여전히 가늘게 이어지고 있는 손의 경련.
그럼에도 너무나도 태연한 지세의 모습이 놀라웠고, 안쓰러웠고, 동시에 믿어지지 않았다.
은돈이 바닥의 유리 잔해를 치우기 위해 무릎을 굽히고 앉는 지세를 아득한 표정으로 응시했다.
***
다음날.
“사장님! 사장님 기사 보셨습니까!? 오늘 아침 신문 일면이요!”
다원정 홀로 들어서는 독현의 앞을, 부주가 양팔 벌려 떡하니 막아섰다.
수다쟁이처럼 외쳐대던 그가 일순 자신의 오너와 눈이 마주치자 헙 하고 놀랐다.
“아니 근데 사장님……얼굴에 왜 그렇게 상하셨……헛. 혹시 밤에 한잠도 못 주무신 겁니까? 기사 때문에? 하여간! 이 쓔레기 같은 기레기들!”
부주가 무감정한 시선으로 자신을 직시하는 독현을 향해 오버스러운 팔 동작을 해보였다.
“무슨 기사를 말하는 거지.”
이윽고 독현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물었다.
사실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있었다. 어젯밤, 맨션 앞에서 자신을 향해 헤어지지 말자고 애원하던 차은돈은 기자들에게 좋은 먹잇감이나 마찬가지였다.
“사장님, 이거……아무래도 직접 보시는 게……”
독현이 미간을 좁히며 부주가 내미는 신문을 받아들었다. 그리곤 일면에 시선을 고정한 순간……자극적인 헤드라인이 시야에 들어왔다.
“사장님도 기억하실 겁니다. 얼마 전 제주 경연이요! 그때 차은돈이 그……불미스러운 섹스 스캔들에 휘말렸지 않습니까. 근데……”
부주가 말끝을 흐리며 신문 헤드라인을 가리켰다.
‘충격! 대성명가 지독현 씨의 피앙세로 알려졌던 신데렐라 차 모씨의 실체.’
‘차 씨는 자신이 출전했던 제주 한식 경연의 최연소 심사위원이었던 이강민 씨와 부적절한 관계를 가져……’
‘당시 경연 수상자였던 차 씨와 심사위원간의 섹스 스캔들은 기정 사실로 밝혀져……’
‘대성명가 지독현 씨는 이와 같은 사실에 함구의 뜻을 밝히며, 차모 씨 와는 알려진 것처럼 깊은 사이가 아니며, 공개 프러포즈의 주인공 또한 그녀가 아니라는 점을 공고히 해……’
“사……사장님 뭐라고 말 좀……”
숨 조이는 정적 속에 뻘쭘이 서 있던 부주가, 신문을 든 독현을 응시했다.
“괜찮으신 겁니까……?”
독현이 대답 없이 시선을 곧추세웠다. 그의 눈빛이 어느때보다도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때, 부웅- 핸드폰이 진동했고, 독현이 이내 그것을 받아들었다.
“대체 무슨 짓을 한 겁니까.”
-벌써 기사를 본 모양이군.
핸드폰 너머로 지회장이 서늘한 음성이 들려왔다.
-어젯밤. 차은돈을 만났더구나.
“……”
-내가 이미 경고하지 않았니. 두 번 다시 사적으로 그 아이와 맞닥뜨리는 일은 없어야 할 거라고.
“그래서……보란 듯 터뜨린 겁니까? 이런 저급한 기사를?”
독현이 손에 든 신문을 꽈악- 거머쥐었다.
-약속을 지키지 않은 대가를 치른 것뿐이다. 그러게 내가 후회할 거라고 하지 않았어.
지회장이 쯧쯧 혀를 차는 소리가 독현의 얼어붙은 가슴을 울렸다.
-나는 너에게 몇 번이나 기회를 줬다. 그 아이를 망가뜨리지 않고 헤어질 수 있는 기회를. 하지만 넌 번번이 날 실망시켰지. 나도 더는 말로만 으름장을 놓는 짓은 그만두려고 한다. 아마도 그 기사는……차은돈에게 치명적인 주홍글씨가 되겠……
독현이 더는 듣고 있을 가치가 없다는 듯 핸드폰을 든 아래로 떨궜다.
“사장님……대체 무슨 일입니까? 차은돈 한테 무슨 일 있는 겁니까?”
“……”
걱정스레 물어오는 부주에게서 돌아선 독현이 곧장 다원정을 나섰다.
그리고 몇 분 후……
끼이익-! 아스팔트 도로위로 거친 마찰음이 들려왔다. 페라리에 오른 독현이 병원을 향해 거칠게 차를 몰고 있었다.
보러 가면 안 된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은돈을 만나서는 안 된다는 것.
이제 와서 자신이 그녀를 걱정하는 건, 그저 위선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
머리로는 알고 있었다. 그런데……몸이, 마음이 따라주지 않았다.
그가 악셀을 밟으며 좀 더 속도를 높였다.
***
“차은돈 씨! 쉐프 이강민 씨와의 섹스 스캔들이 사실인가요?”
“차은돈 씨, 안에 있습니까!?”
“지독현 씨한테 의도적으로 접근했다는 말이 사실입니까?”
“……아악.”
대학병원. 3층 여자화장실 내부.
문을 걸어 잠근 은돈이 세면대 앞에 선 채 초조하게 머리를 거머쥐었다.
그녀가 손에 쥐고 있는 핸드폰 액정엔 읽다 만 인터넷 기사가 떠있었다.
‘차모 씨, 신데렐라에서 희대의 꽃뱀으로 불리기까지.’
은돈이 자신의 기사를 내려다보다 입술을 꾹 깨물었다.
이게 뭐야. 대체 뭐냐구.
“섹스 스캔들이라니……”
다 거짓말이야. 이건 문소라가 날 끌어 내리기 위해 조작한 거짓말에 불과하다구.
하지만……저 사람들이 내 말을 믿어줄까?
은돈이 화장실 밖에서 들려오는 기자군단의 질문공세를 듣다못해 귀를 틀어막았다.
어쩌지……? 언제까지 여기 갇혀 있을 순 없잖아.
“그래……나가자. 나가야 돼.”
그녀가 목발을 집어 들었다. 그리곤 두 어 차례 심호흡을 한 후 문을 확 열어젖혔다.
그와 동시에 기다렸다는 듯 수많은 카메라가 그녀에게 쏠렸고,
“차은돈 씨! 경연 수상을 위해 심사위원 이강민 씨에게 몸 로비를 했다는 게 사실인가요!?”
“아뇨……아니에요!”
“차은돈 씨!”
“차은돈 씨!”
“자……잠깐만요……조금만 지나갈게요. 잠깐만요……”
양 팔에 목발을 끼고 선 은돈이 기자들 틈바구니 속에서 이리저리 흔들려댔다.
그런데 그때-
병원 중앙 계단을 뛰어올라온 독현의 모습이 보였다.
그가 거친 호흡을 내뱉으며 기자군단을 응시했다. 그리곤 반사적으로 그 곳을 향해 걸음을 떼놓는 순간.
“그럴 필요 없어요.”
누군가 그의 어깨를 강하게 잡아 세웠다.
“……”
독현이 제 앞에 선 지세를 바라보았다.
지세 역시 그와 시선을 공유하다, 곧 은돈을 향해 돌아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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