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화. 폭풍전야Ⅱ.
호텔 룸 안. 살짝 구김이 진 침대 시트 위.
옆으로 누운 은돈이 잠이 든 독현의 얼굴을 물끄러미 관찰하고 있었다.
감은 눈꺼풀 아래로 뻗어있는 짙은 속눈썹, 저 이지적인 콧대와 날카로운 콧망울, 무표정일 때도 살짝 치켜 올라간 매력적인 입꼬리……
“잘생겼어……암……”
흡족한 듯 독현의 잠든 얼굴을 관찰하던 은돈의 머릿속으로 어젯밤 잔상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사장님, 사랑해요.’
‘사랑해.’
뜨거운 숨결로 주고받은 그 한마디.
자신의 목덜미를 끌어올려 강렬하게 입을 맞추던 독현……
“으악.”
은돈이 소녀처럼 새빨개진 얼굴을 베개 속에 파묻었다.
그때, 부웅-하는 진동소리가 그녀의 귓전을 울렸다.
은돈이 팔을 뻗어 자신의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그리곤 여전히 붉어진 얼굴로 액정을 들여다보는데……
-회장님께서 차은돈 씨를 만나고 싶어 하십니다.-
윤 비서가 보내온 간결한 메시지. 은돈이 굳어진 얼굴을 치켜들었다.
“차은돈.”
그때, 등 뒤에서 나른한 음성이 들려왔다.
침대에 걸터앉은 은돈이 고개를 돌리자, 막 잠에서 깬 듯한 독현이 보였다.
“일어났어요?”
“응.”
살짝 잠긴 그의 음성이 묘하게 섹시하다고 느끼며, 은돈이 얼른 핸드폰을 침대 협탁 위에 올려놓았다.
“저도 좀 전에 막 일어났어요.”
“……깨우지 그랬어.”
“사장님 얼굴 감상 좀 하느라구요.”
은돈의 말에 독현이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잘 잤어?”
“네. 잘 잤어요?”
은돈이 그를 따라 미소 지었다. 그 순간 독현이 상체를 구부려 은돈에게 다가왔다.
그리곤 이내 한 손으로 그녀를 끌어안았다.
“사장님, 아침부터 또 왜……”
은돈이 부끄러움에 살포시 뺨을 감싸 쥐었다. 그런데 그때, 독현이 남은 한 손을 뻗어 침대 협탁 위의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어, 잠깐만요……!”
은돈의 제지에도 불구하고, 독현이 핸드폰 액정에 뜬 메시지를 내리훑었다.
역시나. 자신의 예상대로 지회장의 측근인 윤비서에게서 온 메시지였다.
“……굳이 만날 필요 없잖아.”
잠시 후, 독현이 메시지 삭제버튼을 누르며 말했다.
지회장이 은돈을 만나려는 의도야 뻔했다.
굳이 가지 않아도 될 자리에 가서 은돈이 온갖 멸시와 모멸감에 시달리게 놔둘 순 없었다.
“아뇨. 만날 거예요.”
그때 은돈의 입에서 제법 단호한 한마디가 떨어졌다.
“이제 도망치지 않겠다고 했잖아요. 회장님 만날 거예요. 만나서, 뻔뻔하게 못 박아두고 올 거예요. 사장님을 진심으로 좋아한다고. 사장님 내 거라고.”
내 거?
독현이 은돈의 허리를 한 팔로 감쌌다.
“니가 내 거지.”
그가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그 모습에 은돈의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어, 어쨌거나 난 회장님 만날 거예요.”
독현이 잔잔히 일렁이는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차은돈, 나 지금 너한테 부탁하는 거야. 만나지 마.”
지회장은 무서운 사람이었다. 독현은 그가 기업의 이해관계에 방해가 되는 사람들을 어떤 식으로 처리하는지 알고 있었다. 그래서 더욱 걱정이 앞섰다.
눈엣가시 같은 은돈에게 지회장이 얼마나 가차 없이 굴지……
“사장님. 그냥……나 믿어주면 안 돼요?”
은돈이 생각에 잠겨있던 독현의 양손을 조심스레 붙들었다,
“난 사장님이 걱정하는 것만큼 연약하지 않아요. 드라마에 나오는 비련의 여자주인공도 아니구요.”
“……”
독현이 센치한 시선을 내려 코앞의 은돈을 마주보았다.
“내가 사장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죄는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가서 회장님한테 떳떳하게 맞서고 올게요.”
“그럼 같이 가지.”
“아뇨. 사장님을 방패막이 삼아서 뒤에 서있기만 하는 건 이제 질렸어요.”
당돌하게 말하는 은돈을 보며 독현이 뭔가 대꾸하려는 찰나.
쪽. 앙증맞은 마찰음이 들려왔다.
생각한 것 중 가장 비겁한 방법으로, 은돈은 독현의 입을 틀어막았고, 잠시 후. 자신에게서 떨어져나가는 그녀를 보며 독현은 어이없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나 회장님이랑 담판 짓고 올게요. 믿어줄 거죠?”
“……맘대로 해.”
독현이 시선을 비틀며 짤막하게 대답했다.
이 남자가 내 말에 순순히 응하는 날이 올 줄이야.
은돈이 사랑스러운 눈초리로 독현을 보며 풋, 미소를 머금었다.
***
본사.
접견실에 앉은 은돈이 눈 앞의 지회장을 숨죽인 채 바라보았다.
어깨를 짓누르는 위압감에 어쩐지 표정관리가 잘 되지 않았다.
“일은. 그만둔 건가?”
한참 만에 지회장이 앞에 놓인 찻잔을 집어 들며 말했다.
“일을…… 그만 두다뇨?”
난데없는 그의 질문이 언뜻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때 지회장이 은돈을 똑바로 마주보며 서슬 퍼런 한마디를 내뱉었다.
“어젯밤 전 국민 앞에서 그럴싸한 프러포즈까지 받지 않았나? 이제 원하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으니 일은 그만둔 거냐고 묻는 거네. 굳이 주방에서 궂은일따윈 하지 않아도 이제 언제든지 내 손주놈 옆에 붙어 있을 수 있을 거 아닌가?”
“……전……사장님 옆에 있기 위해 전담 요리사가 된 게 아닙니다.”
“한 가지만 묻지. 자네 같으면 그 말을 믿겠나?”
“적어도 사장님에 대한 제 마음만큼은 의심하지 말아주셨으면 합니다.”
은돈이 지회장을 바라보며 분명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주눅들지 않고 도리어 당당하기까지 한 그녀의 모습이 지회장은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오늘은 제 개인 휴무를 좀 당겨서 쓴 것뿐입니다 회장님. 아무래도 어제 일 때문에……기자들이 레스토랑 앞에 진을 치고 있을 것 같아서요.”
은돈의 말대로였다.
같은 시각, 다원정 레스토랑 앞은 세기의 신데렐라 차은돈을 인터뷰하기 위한 기자 패거리와, 그들에 맞서 입구를 원천봉쇄한 부주 패거리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회장님.”
은돈이 제 앞에 놓인 찻잔을 만작거리다 고개를 치켜 올렸다.
“절 맘에 안 들어 하시는 이유……잘 알아요. 사장님에 비하면 제가 얼마나 부족한 사람인지도, 물론 알고 있구요.”
“안다니 길게 얘기할 필요도 없겠군. 넌 지금 존재만으로 내 손주놈을 힘들게 하고 있어.”
“회장님,”
“더 이상 왈가왈부할 필요 없다. 헤어져라. 깨끗이 정리해.”
지회장이 더는 듣고 싶지 않다는 듯 손사래를 치며 은돈의 말을 갈랐다.
“……아뇨. 헤어질 수 없습니다. 헤어지기 싫습니다.”
은돈이 흔들림 없는 음성으로 그렇게 받아쳤다.
“사장님을 사랑합니다. 그래서 약속했어요. 더 이상 피하지도 도망가지도 않겠다고.”
“그래서. 결혼이라도 하겠단 게냐?”
“사장님이 그걸 원한다면요.”
일순 지회장의 머릿속에 독현의 음성이 스쳐지났다.
‘정말 차은돈 그 아이랑 결혼이라도 할 참이야? 그럴 생각이냐?!’
‘그 여자가 원하면요.’
“둘이 같은 대답을 하는군.”
지회장이 부서질 듯 세차게 찻잔을 내려놓았다.
“정확히 니가 바라는 게 뭐냐.”
……바라는 것?
“굳이 내 앞에서까지 위선 떨 것 없다. 네가 원하는 걸 말해 봐. 물론, 액수를 얘기해도 좋다.”
그제야 지회장의 의중을 알아차린 듯 은돈이 시선을 끌어내렸다.
“제가 바라는 건……그러니까……”
그녀가 고개를 쳐들었다.
“사장님이 조금만 덜 싱겁게 먹었으면 좋겠어요.”
“……?!”
툭 튀어나온 그 생뚱맞은 한마디에 지회장의 눈썹이 꿈틀, 했다.
그러나 은돈의 표정은 사뭇 진지했다.
“사장님은 은근 반찬 투정이 심해요. 단거, 짠 거, 매운 거, 전부 질색하거든요. 자기가 좋아하는 반찬만 집요하게 파고드는 게 어쩔 땐 꼭 초등학생 같다니까요. 그런 점은 꼭 고쳐줬음 좋겠어요.”
“대체……그게 무슨,”
“아, 그리구 한 가지 더. 제 바람은…… 날 부를 때 차은돈이 아니라 은돈이라고 불러줬음 좋겠어요.”
지회장이 지끈거리는 머리를 한손으로 받쳐 든 채 은돈을 노려보았다.
“네가 바라는 게 겨우 그런 것들이란 말이지.”
가소롭다는 듯 물어오는 그를 마주하며, 은돈이 입을 열었다.
“회장님이 사장님한테 바라시는 건 뭔가요. 문소라 씨와 결혼하는 것? 아니면 다원정을 처분하고 이 커다란 회사를 물려받는 것? 그것도 아니면……주제도 분수도 모르고 설쳐대는 웬 날파리 같은 여자랑 헤어지는 것?”
“……”
“정말로 지금 사장님을 힘들게 하는 건, 아무래도 제가 아니라 회장님인 것 같네요.”
은돈의 말에 지회장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런데 그때 급한 노크소리와 함께 윤 비서가 안으로 들어섰다.
“회장님, 말씀 중에 죄송하지만……사장님과 차은돈 씨에 대한 기사가 터져서 ……”
“뭐야?”
지회장이 윤 비서의 손에 들려있던 신문을 확 낚아챘다.
그리곤 일면을 펼쳐들자, 호텔 프론트에서 애틋하게 서로를 바라보는 은돈과 독현이 찍힌 파파라치 컷이 보였다.
-식품 재벌 3세 지독현, 범국민 프러포즈 이후, 전격 열애 공개!-
-지독현 씨와 비밀리에 애틋한 만남을 이어온 그의 전담 요리사는 26살의 차은돈 씨로……-두 사람이 함께 호텔로 들어가는 모습이 사진과 같이 찍혀……-
“이게 대체……”
타악! 말을 잇지 못하던 지회장이 소파 테이블 위로 신문을 집어던졌다.
고개를 내린 은돈의 시야에 자신과 독현의 파파라치 컷이 들어 왔다.
“어젯밤……둘이 같이 있었나?”
“네.”
은돈이 아득한 눈빛으로 대답했다. 거짓말을 할 수도, 피해갈 수도 없었다.
잠시 두 사람 사이에 서늘한 침묵이 감돌았다.
지회장이 속내를 알 수 없는 표정으로 한참만에 먼저 운을 뗐다.
“내가 수십 년동안 이 자리를 지키면서 깨우친 세상의 이치가 뭔 줄 아나? 모든 일에는 반드시 대가가 따른다는 거다.”
“……”
“만약. 네가 여기서 모든 걸 정리하고 떠난다면, 그에 대한 마땅한 대가를 지불해 주마. 하지만,”
그가 잠시 텀을 두고 맞은편의 은돈을 직시했다.
“만약 니가 기어코 내 손주놈을 선택한다면……그 대가는 마땅히 너 스스로 치르게 될 거다. 그래도 괜찮겠나?”
“무슨 말씀을 하셔도 저는……아니 저흰 헤어질 생각이 없습니다.”
진심을 다해 은돈의 내던진 말. 지회장의 눈썹이 위로 솟구쳤다.
“그래. 그렇군. 네 선택이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그만 나가 주겠나.”
“……심려 끼쳐 드려서 죄송합니다. 회장님.”
스윽, 은돈이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곤 지회장을 향해 정중히 허리를 굽혀 인사한 후, 접견실을 빠져나왔다.
처음 이곳에 들어왔을 때보다 훨씬 더 발걸음이 무거웠다.
“회장님……괜찮으십니까?”
은돈이 사라진 직후.
쨍강-! 지회장이 테이블 위의 찻잔을 바닥에 내던졌다. 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는 듯, 그가 자신이 아끼던 난 화분을 집어 들어 내동댕이쳤다.
“회장님 진정하십시오!”
윤비서가 극심한 분노로 비틀거리는 지회장을 얼른 부축했다.
잠시 후. 자신의 집무 책상에 앉은 지회장의 눈빛은 여느 때와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윤비서. 지금 상황이 어떻지. 생각보다 안 좋은가.”
그가 물음에 윤비서가 집무 책상 위로 파일을 내려놓았다.
“오스칼 약품과 영우 식품, 그리고 KNH 패션은 이미 매각에 들어간 상태입니다. 더 늦기 전에 나머지 계열사도 처분에 들어갈 예정입니다.”
윤비서의 말에 지회장이 절망한 듯 주먹을 꽉 쥐었다.
그는 대한민국 최고의 식품 회사인 ‘대성명가’의 수장이었다. 그러나 그 타이틀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었기에, 지난 십년 간 수없이 많은 분야의 사업에 도전해왔었다.
의약외품, 외제차, 와인, 심지어는 이태리 의류 브랜드인 KNH를 새롭게 론칭 하는 등……한때는 그의 노력이 빛을 발해 해외에 100여 개의 계열사를 거느리기도 했었다.
그러나 무리한 사업 확장과 막대한 자본투자로 인해 지회장이 떠안은 부채 비율은 어느덧 700%에 달했고, 이제 그로서는 어떻게든 자산 매각을 통해 부채를 줄여 나가는 수밖엔 없었다.
“회장님. 대성명가를 살리기 위해서라도……반드시 문회장님의 KM그룹과 손을 잡아야만 합니다. 그룹 간 M&A를 통해서 어떻게든 지금의 부도 위기에서 벗어나야……”
말을 잇다말고 윤비서가 입을 다물었다.
지회장의 눈빛이 무섭게 번득이고 있었다. 그랬다. 문회장. 대성명가를 살리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와, 그의 회사가 필요했다.
지회장이 문회장의 딸인 소라와 독현의 정략결혼을 급하게 추진한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소라 그 아이와 내 손주놈의 결혼은 예정대로 진행 돼야만 하네. 내 말, 무슨 뜻인지 이해하나 자네?”
그가 고개를 들어 윤비서를 직시했다.
“차은돈. 그 아이가 제 입으로 그러더군. 자기는 주제도, 분수도 모르고 설쳐대는 날파리라고.”
“회장님……”
“그런 날파리는 말이야. 놔두면 알아서 죽게 마련이라네. 그런데 만약, 계속 거슬리게 눈앞을 얼쩡대면 그 땐. 아주 간단한 방법으로 쫓아버리면 된다네. 영원히 다신 주변을 얼쩡대지 못하도록 날개를 꺾어 놓으면 되는 거야.”
지회장이 소름끼치도록 차분한 얼굴로 언젠가 문회장과 주고받았던 대화를 떠올렸다.
‘회장님. 굳이 시간을 더 들일 필요가 있습니까? 지독현 사장에게 달라붙은 날파리 한 마리 때문에 골치를 썩으시는 모양인데……대체 뭘 망설이시는 겁니까? 다시 옛날처럼 쫓아버리시면 되잖습니까?’
‘……옛날처럼?’
‘지독현 사장의 친모를 처리하려 했던 것처럼……차은돈인가 하는 날파리를 쳐내세요.’
“……윤비서. 나 따뜻한 차 한 잔 내다 주겠나.”
“예, 회장님.”
이윽고 방을 나서는 윤비서를 보며, 지회장이 손깍지를 낀 채 지그시 눈을 감았다.
***
“아아악-!”
화장대 앞에 앉아있던 소라가 줄지어 선 화장품들을 바닥으로 거칠게 밀어 버렸다.
곧이어 쨍그랑! 그녀가 집어던진 향수를 맞고 거울이 산산이 부서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헉……헉……”
조각 난 유리잔해 앞에서 소라가 거친 울음을 삼켰다.
‘문소라 씨와 전 단순한 친구 사이일 뿐입니다. 제가 결혼을 생각하고 있는 여잔 따로 있습니다. ’
‘제게 결혼 할 여자가 있다는 건, 누구보다 문소라 씨가 가장 잘 알겠죠. 늘 날 옆에서 지켜봐 온 십년지기 친구니까. 안 그래?’
“아악!”
소라가 다시금 머리를 부여잡고 날카로운 비명을 내질렀다.
지독현. 증오스러운 그 이름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용서 못 해……모두가 보는 앞에서 날 비웃은 걸 후회하게 만들어 줄 거야. 반드시 그럴 거야……”
그녀가 뺨 위로 흐르는 뜨거운 눈물을 닦으며, 몸을 일으켰다. 그리곤 은돈을 만나기 위해 차키를 집어 들었다.
……같은 시각.
행운 빌라와 인접해 있는 번화가 횡단보도.
“진짜라니까요 사장님? 미자한테 연락 왔었어요. 공사도 끝났고 수도관도 멀쩡하대요. 이제 나 다시 빌라 들어갈 수 있게 됐어요.”
은돈이 핸드폰을 귀에 댄 채 생긋 웃었다. 그녀의 귓가로 기분 좋은 저음이 흘러들었다.
-회장님은. 만난 건가?
왜 안 물어보나 했다. 은돈이 피식 웃었다.
“왜요. 가서 물세례라도 맞았을까 봐?”
-물세례?
사뭇 심각해진 그의 목소리에 은돈이 얼른 도리도리 고개를 저었다.
“실제로 맞았다는 게 아니구요……어쨌든 분위기는 화기애애하니, 나쁘지 않았어요!”
-……
“뭐, 사실 화기애애까진 아니고……생각 했던 것보단 괜찮았어요.”
-……
“실은 나빴어요……최악이었어요.”
사장님의 침묵엔 묘한 힘이 있나보다. 나도 모르게 이실직고 하게 되다니.
-어디야. 지금 데리러 갈게.
“아니에요!”
그녀가 살짝 목소리를 높였다.
“오늘 우리 기사 난 거 봤죠? 사장님이 날 만나러 오면, 내일 신문 1면도 아마 우리가 장식하게 될 거에요. 그러니까 오늘은 각자 집에서……”
말을 잇던 은돈이 횡단보도 맞은편을 바라보며 멈칫했다.
지금 막, 사람들 틈바구니에 섞인 익숙한 얼굴 하나.
“……사장님. 이만 끊을게요.”
이윽고, 그녀가 통화 종료 버튼을 누르며 핸드폰을 귓가에서 떼어냈다.
그 즈음, 맞은편에 서 있던 지세 역시 은돈을 발견하곤 얼굴을 굳혔다.
“……”
“……”
때마침 신호가 바뀌고, 사람들이 횡단보도를 건너기 시작했다. 그래서일까.
인파 사이에 멍청히 서서 서로를 바라보는 은돈과 지세의 모습은 유난히 더 튀어 보였다.
***
인근 까페.
지세와 마주앉은 은돈이 테이블 위의 귀여운 도자기 주전자를 괜히 번쩍 치켜들었다.
“이거 정말 귀엽다. 그치? 우리 레스토랑에도 이런 장식품 하나씩 놔두면……좋……겠……다……”
지세의 시선이 자신의 네 번째 손가락에 머무른 것을 보며, 은돈의 목소리가 차차 꺼져 들어갔다.
그녀가 멋쩍은 미소로 자신의 웨딩 링을 응시했다.
“아, 이거……”
“알아요.”
“응?”
“봤거든요. 사장님 기자회견.”
“아……응. 나 프러포즈 받았어.”
“……”
민망한 듯 웃는 은돈을 향해 지세가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물었다.
“결혼 할 거예요?”
“어? 아냐……당장은 현실적으로 어려워. 그래서 그 프러포즌 일단 킵 해뒀어.”
말을 마친 은돈이 지세의 얼굴을 빤히 응시했다.
무슨 말부터 꺼내야 자연스러울까.
“근데 지세 너……오늘 퇴근이 좀 이르다? 혹시 땡땡이?!”
윽. 이게 아닌데.
“참 그나저나 빌라 수도관 말인데, 제대로 고쳐진 거 맞대? 그 수도관 KS마크 인증은 받은 건가?”
이런 빌어먹을.
“……글쎄요. 아직 보질 못해서.”
지세의 짤막한 대답에 은돈이 동조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미안. 집에 가려는 앨 붙잡아다 여기 앉혀뒀으니……”
“누나.”
“어? 어!”
“하고 싶은 얘기가 뭐예요? 할 얘기 있다면서요.”
“……응.”
더는 피할 구멍이 없구만.
잠시 망설이던 은돈이 이내 결심한 듯 지세를 바라보았다.
“너랑 이렇게 우연히 마주쳐서 다행이라고 생각했어. 왜냐면, 내내 묻고 싶었던 게 있었거든.”
“뭔데요.”
“……그날 말이야.”
은돈이 어렵사리 본론을 끄집어냈다. 그날……내가 빌어먹을 혼미주에 취해 엄마 아빠도 못 알아볼 정도로 인사불성이 돼 있던 날.
“그날……지세 너 분명히 주방에 왔었어. 니가 취해서 소란 피우는 나를 직원 휴게실에 데려다 놓은 거지? 그 후에 사장님을 부른 것도 너지?”
“네.”
지세가 담담히 대답했다.
그래. 너란 말이지.
“그럼……말해 줄 수 있어? 그날 너랑 내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순간. 지세의 눈빛이 출렁였고, 그 모습을 본 은돈의 표정도 미묘하게 굳어졌다.
“대체 무슨 일이길래, 그 후로 너랑 내 사이가 이렇게 돼버린 거야? 왜 의도적으로 날 피하는 거야?”
“……”
지세가 선뜻 입을 열지 않자, 은돈의 불안감은 더욱 커져갔고. 결국 그녀가 먼저 운을 뗐다.
“말해줬음……좋겠어. 그날 무슨 일이 있었든. 너한테 정식으로 사과하고 싶어.”
사과?
지세가 천천히 시선을 끌어올렸다.
“사과 할 필요 없어요. 그날 난……누나한테 아주 치졸하고 비겁한 짓을 했거든.”
“뭐? 니가 무슨,”
“날 사장님으로 착각하는 누나한테 입을 맞췄어요.”
지세가 가차 없이 은돈의 말을 잘랐다.
뒤이어 두 사람 사이에 아주 길고, 숨 막히게 서늘한 침묵이 깃들었다.
“뭐라구……?”
한참만에 가까스로 은돈이 되물었다.
지세가 서글픈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다 대답했다.
“사과 같은 거, 하지 마요. 내가 좋아서 한 키스니까.”
“……이지세. 그날 일은,”
“제발.”
“……”
“제발 나한테 미안하다고 말하지 마요.”
그날 일은 실수였다고. 그렇게 말하지 마, 제발.
지세가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날 일. 누난 잊어버려요. 잘못한 건 나니까.”
“……”
“얘기 끝난 것 같은데 그만 가볼게요.”
지세가 멍해있는 은돈을 잠시 물끄러미 바라보다, 그대로 돌아섰다.
***
“이지세! 지세야!”
인적 하나 없는 횡단보도 앞.
어둠에 잠긴 그 곳에서 은돈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잠깐만! 응? 잠깐만!”
헐레벌떡 지세의 앞을 막아선 은돈이 가쁜 숨을 골랐다.
“그냥 그렇게 가버리면 어떻게 해. 왜 잘못한 게 너야!”
그녀가 지세의 팔을 붙잡은 채 말했다.
“잘못한 건 나야. 변명의 여지없이 나라구. 상황이 어찌됐든, 내가 널 흔든 거니까.”
“……”
“미안해. 넌 내 사과가 달갑지 않은 모양이지만……그래도 미안해. 나, 사장님을 사랑하면서 내심 너랑도 잘 지내고 싶은 욕심이 있었는지 몰라. 넌 내가 볼품없고 뚱뚱했을 때도 유일하게 친절했던 남자였으니까. 그래서……”
은돈이 잠시 망설이다 지세를 올려다봤다.
“그래서 내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끊임없이 널 흔들고 있었는지도 몰라.”
“……”
“정말 미안해. 꼭 제대로 사과하고 싶었어. 그리고……”
“……”
“앞으론 니 말처럼. 우리가 거리를 두는 게 좋을 것 같아.”
그녀의 말에 지세가 고개를 들었다.
“이지세. 너 알아? 니가 날 보는 눈빛. 내가 사장님을 볼 때의 눈빛이랑 닮아있다는 거.”
그거……사랑이잖아.
은돈이 흔들리는 지세의 동공을 들여다봤다.
“그동안 애매하게 질척여서 미안해. 앞으로는 두 번 다시 널 흔드는 일 없을 거야.”
“……”
“니가 불편하고 힘들면……내가 다원정에서 나갈게.”
마지막 한마디를 던진 은돈이 신호가 바뀐 횡단보도로 돌아섰다.
지세가 자리에 굳어선 채로, 멀어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처음으로 정말 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붙잡지 않으면, 이대로 끝이라는.
빵 ! 빠앙-!
그때였다. 귀를 찌르는 크락션 소리와 함께 아찔한 속도로 질주하던 승용차 한 대가 은돈의 눈앞으로 들이닥쳤다.
누나……
일순간, 지세의 입에서 머릿속 두 음절과는 다른 한마디가 비명처럼 터져 나왔다.
“……차은돈!”
끼이익!
승용차가 급브레이크를 밟는 소리가 지세의 귓전을 울렸다. 그가 반사적으로 은돈의 팔을 끌어 당기며 그녀를 품에 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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