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화. 헤어지겠다고……?
“사장님. 일어났어요? 아침이라 간단하게 차렸는데, 괜찮죠?”
“……”
식탁으로 다가 온 독현이 쾌활하게 말을 잇는 은돈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그녀가 콧노래를 흥얼이며 프라이팬 위의 달걀 프라이를 뒤집었다.
“앗 뜨거!”
일순 은돈이 팬을 놓치며 데인 손가락을 붙잡았다.
“괜찮아?”
독현이 대번에 그녀의 곁으로 다가섰다.
“괜찮아요! 손이 미끄러졌어요. 하하……”
은돈이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정신이 딴 데 가 있는 표정이었다.
독현이 은돈의 부어오른 손가락을 끌어다 싱크대로 가져갔다. 그리곤 쏴아- 쏟아지는 찬물에 그녀의 손을 갖다댔다.
한동안 두 사람 사이에 묘한 침묵이 흘렀다.
“정말 괜찮아?”
“괜찮다니까요.”
“손가락 얘기가 아냐.”
그가 시선을 끌어올려 눈앞의 은돈을 바라보았다.
표정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이미 그녀가 자신과 문소라의 결혼 기사를 읽었다는 걸.
“신경 쓸 거 없어.”
“……네?”
“니가 신경 쓸 가치도 없는 기사야.”
은돈이 마치 속내를 들킨 양 살짝 고개를 수그렸다.
“신경……안 쓰인다면 솔직히 거짓말이죠. 내 애인이 다른 여자랑 결혼한다는데……”
그녀가 독현을 물끄러미 올려다봤다.
“그래도 어쩔 수 없잖아요. 담담한 척, 아무렇지 않은 척 할 수밖에.”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게 그것뿐이니까.
“잠깐만요. 금방 다시 만들어 줄게요.”
그녀가 데인 손으로 다시 프라이팬을 불 위에 올려놓았다.
“부담스럽지 않게 스크램블 에그가 좋겠죠?”
“내가 할게.”
은돈의 억지 미소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럴수록 그녀가 안쓰러웠다.
독현이 프라이팬을 빼앗아 들고 대신 계란을 깨 넣었다.
“……”
은돈이 그 모습을 복잡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
“야 차은돈! 사장님이 문소라 씨랑 결혼한다는 게 진짜냐!?”
주방.
눈치 없이 외치는 부주의 옆구리를 경훈이 쿡 찔렀다.
그리곤 묵묵히 설거지대 앞에서 그릇을 닦고 있는 은돈의 눈치를 힐끔 살폈다.
“차은돈, 아니지? 오늘 아침 그 기사……오보지?”
“당연히 오보지! 사장님이랑 차은돈이랑 공개 연애한지 얼마나 됐다고!”
주방 저편에서 선배 요리사 하나가 은돈의 역성을 들어주었다.
은돈이 자신보다 더 독현의 결혼 기사에 열을 올리는 주방 식구들을 보며 머쓱한 미소를 지었다.
그때, 주방 안으로 들어서던 지세와 그녀의 눈이 정통으로 마주쳤다.
“아,”
그를 향해 무심코 인사를 건네려던 은돈이 자신도 모르게 멈칫, 입을 다물었다.
‘……내가 아직 누나 좋아한다는 거. 알죠.’
‘그냥 이대로 날 모른 척하고, 나도 모른 척하게 해줘요 누날.’
“……”
은돈이 말없이 제 곁을 지나치는 지세를 돌아보았다.
정말 나랑은 눈조차 안 마주칠 생각인가.
“이지세! 기사 봤냐? 사장님이랑 문소라 씨가 글쎄,”
“부주. 어제 들어온 성게 알 상태가 이상한 것 같던데요.”
“뭐? 성게 알이? 왜!?”
부주가 황급히 조리모를 고쳐 쓰며 냉장고를 향해 달려갔다.
남겨진 지세가 능숙한 솜씨로 감자 껍질을 벗겨내기 시작했고, 은돈이 저만치서 그 모습을 잠자코 바라보았다.
그때, 주방 입구에서 총지배인의 샐쭉한 음성이 들려왔다.
“차은돈 씨? 자길 찾아온 사람이 있는데.”
“절요……?”
……삼십분 후. 레스토랑 홀.
조리복 차림의 은돈이 손님들의 시선을 받으며 소라와 마주 앉아 있었다.
“할 말 있어서 날 부른 거 아니었어요?”
은돈의 물음에 소라가 앞에 놓인 연어 구이를 잘게 조각내 입에 넣었다.
“나 밥 먹으러 온 거예요. 물론 차은돈 씨 얼굴도 볼 겸.”
밥 먹으러 온 거라구? 은돈이 황당한 듯 소라를 응시했다.
“식사 맛있게 하고 가세요. 전 일이 바빠서요.”
스윽. 그녀가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와 동시에 탁! 소라가 나이프를 내려놓았다.
“앉아.”
“……”
“사람들 눈도 있는데, 굳이 오늘 같은 날 큰 소리 내고 싶지 않아요. 앉아요, 차은돈 씨.”
은돈이 일렁이는 눈으로 소라를 바라보다 다시 맞은편 자리에 몸을 앉혔다.
소라가 그녀를 보며 피식 웃었다.
“오늘은 나한테 아주 뜻깊은 의미가 있는 날이에요. 기사 봤죠?”
“봤어요. 결혼하신다구요.”
은돈이 소라를 똑바로 마주보며 말을 이었다.
“문소라 씨가 왜 이렇게까지 하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근데……이제 그만 해요. 진심으로 문소라 씨를 위해서 하는 소리에요. 그만해요. 사장님한테 구차하게 매달리는 거.”
“구차하게?”
소라가 그 어느 때보다도 냉랭한 시선으로 은돈을 내리훑었다.
“정말로 구차하게 매달리고 있는 게 누군지 모르겠어?”
“나라는 소린가요?”
은돈이 기가 막히다는 듯 되물었다.
“난 사장님이랑 정식으로 만나고 있어요. 잘 들어요 문소라 씨. 사장님이랑 난 서로,”
“서로 사랑하고 있다고 말하고 싶은 거야 설마?”
소라가 은돈의 말을 자르며 비릿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렇게 사랑해 마지않는 지독현한테……넌 대체 뭘 해줄 수 있지?”
“……”
은돈은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사실은 대답할 수 없었다가 맞는 표현이었다.
소라가 알만하다는 듯 입 꼬리를 치켜 올렸다.
“지독현과 내 결혼은 기업과 기업간의 비즈니스야. 니가 그 잘난 사랑만으로 방해 할 수도 없고, 해서도 안 되는 거지.”
“……그렇다고 해서 사랑 없이 하는 결혼이 행복할 순 없어요.”
은돈의 말에 소라의 얼굴이 짐짓 굳어졌다. 그러나 곧 표정을 바꾼 그녀가 여유로운 한마디를 내뱉었다.
“내가 아니라 널 택하는 순간. 지독현은 모든 걸 잃게 될 거야. 그 남자가 가진 부, 명예. 그리고 유일한 가족인 회장님까지.”
순간, 은돈의 눈빛이 흔들렸다. 소라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지독현이 모든 걸 포기하고 네 곁에 남아 줄 것 같아? 천만에. 그 남잔 바보가 아냐. 지금까지는 너한테 어떤 식으로든 맞춰 줬을지 모르지만, 사람의 본질은 결국 바뀌지 않아. 지독현은 무서울 정도로 이성적인 남자야. 이제껏 당연한 듯이 손에 쥐고 있던 모든 걸 버리고 고작 널 택할 정도로 어리석은 순정파가 아니라구.”
“나에 대해 그렇게 잘 알면서, 정작 가장 중요한 사실은 왜 깨닫질 못하는 거지?”
“!?”
“내가 너랑 결혼하지 않을 거란 거.”
차가운 눈빛의 독현이……두 여자의 테이블로 서슴없이 다가섰다.
그의 옆에는 총지배인이 안절부절한 얼굴로 함께 서 있었다. 소라의 방문을 자신의 오너에게 알려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적잖이 고민한 모양이었다.
“왔어?”
소라는 갑작스레 나타난 독현을 보고도 전혀 동요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그녀가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너랑 와인이나 한잔하며 자축하려고 왔어. 오늘……우리 결혼을 세상 사람들에게 공식적으로 알린 날이잖아.”
독현이 질린다는 듯 그녀를 내려다 봤다.
“말했을 텐데. 이제 그만하자고.”
“그만해? 난 너랑 아무것도 시작한 게 없는데?”
소라가 노골적인 비웃음을 터뜨렸다.
“지독현 그거 알아? 내가 너한테 사랑받기를 죽도록 원했다는 거. 하지만……이젠 아냐.”
니 마음이 누구를 향하던 그건 나한테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아.
“내 인생의 목표가 바뀌었어. 알려줄까? 너랑 결혼하는 거. 그게 내 새로운 목표야.”
“문소라,”
“차은돈이 도저히 포기가 안 되면. 만나. 단, 우리 결혼은 피할 수 없을 거야.”
“……”
너희 두 사람. 누구에게도 인정받지 못하는 부끄러운 사랑을 하게 될 거야. 내가 그렇게 만들겠어.
“지독현. 니가 사랑하는 저 여자……널 만나는 내내 사람들한테 손가락질 당하게 될 텐데 괜찮겠어?”
“나가. 끌어내기 전에.”
칼 같은 독현의 대꾸에 소라가 예상했다는 듯 몸을 일으켰다.
“오늘 밤, 크루즈에서 기업의 밤 행사가 있어. 미리 예정된 것보다 훨씬 큰 규모의 파티가 될 거야. 우리 결혼을 공식화하는 첫 기자회견이 열릴 테니까. 멋지게 하고 와, 지독현.”
말을 마친 소라가 돌처럼 경직된 은돈의 얼굴을 힐끗 내려다본 후 그대로 몸을 돌려 레스토랑 출구로 향했다.
은돈이 또각또각 멀어지는 그녀의 발소리를 들으며 가만히 시선을 끌어내렸다.
***
“퇴근하고 영화 보러 갈까.”
“네?”
프레지던트 룸.
젓가락으로 밥알을 세가며 먹는 둥 마는 둥하던 은돈이 독현의 난데없는 물음에 고개를 들었다.
“영……화요? 오늘요?”
굳어진 그녀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독현이 다시 말했다.
“굳이 영화가 아니어도 돼. 하고 싶은 게 있으면 말해. 뭐든 괜찮아.”
“사장님……선상 파티는요? 오늘 기업의 밤 행사 있다고 했잖아요.”
“굳이 나까지 참석하지 않아도 되는 자리야.”
독현이 은돈의 말을 자르며 물 잔을 그녀의 앞에 밀어줬다.
은돈이 앞에 놓인 물 잔을 선뜻 집어 올리지 못하고 망설였다.
“기자회견은요? 사장님이 말도 없이 펑크 내면, 문소라 씨 혼자 하게 될 텐데.”
“……내가 문소라 옆에서 애인 행세라도 하길 바래?”
은돈이 얼른 고개를 저었다.
“그런 게 아니라……”
그녀가 잠시 망설이다 곧 한숨을 내쉬었다.
“사장님……우리 오늘 영화 봐요.”
그녀가 졌다는 듯 독현을 향해 말했다.
대체 이 기분은 뭐지.
한손으로 턱을 괸 채 자신을 주시하는 독현에게서, 어쩐지 알 수 없는 이질감이 느껴졌다.
나는 두 사람의 결혼 기사에 머리가 다 띵한데, 어째서 사장님은 저렇게 태연할 수 있는 걸까.
나에 대한 감정이 가볍기 때문에?
아니면……나에 대한 마음이 너무나 확고하기 때문에?
“사장님……”
그녀가 뭔가를 말하려다, 독현과 눈이 마주치자 다시 입을 다물었다.
“아니에요……아무것도……”
“……”
독현이 태연한 척 물 잔을 집어 드는 은돈을 응시하며, 살짝 미간을 좁혔다.
***
그날 밤.
“오늘 일찍 끝난 기념으로 다들 회식 콜? 따~악 3차까지만 콜?”
사복차림으로 후문을 빠져나오는 조리사들 가운데서 부주가 목소리를 높였다.
“이 김경훈! 황지성! 니들 시간 많잖아! 한잔 하자! 응? 이지세! 어때? 콜?”
“좋아요, 전.”
지세가 씽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부주.”
“너도 콜?!”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부주가 휙 고개를 돌리며 외쳤다.
“헙……사장님이었네.”
그가 호리호리한 독현의 실루엣을 위아래로 훑어보며 겸연쩍은 표정을 지었다.
“혹시 차은돈. 안에 있나.”
그의 입에서 나온 은돈의 이름에, 지세가 살짝 시선을 비틀었다.
순간 독현과 눈이 마주쳤지만 곧 지세가 먼저 고개를 돌렸다.
“잉? 차은돈이요? 걔는 벌써 진작에 퇴근했는데……”
“……”
부주의 말에 독현이 마치 이런 상황을 예상하기라도 한 듯 곧장 몸을 돌렸다.
잠시 후, 페라리에 올라타는 그를 보며 조리사들이 웅성대기 시작했다.
“차은돈이랑 무슨 문제라도 있는 건가? 헐. 그럼 아침의 그 결혼발표 기사도 오보가 아닌 리얼 트루?”
“부주! 목소리 좀 죽여요!”
경훈의 채근에 부주가 민망한 듯 입을 합! 다물었다.
“……”
지세가 말없이 자신들의 곁을 지나치는 페라리를 응시했다.
문소라와 지독현의 결혼 기사.
그리고 오늘따라 도망치듯 서둘러 퇴근해버린 은돈.
그가 위험하게 헝클어진 시선을 잠자코 끌어내렸다.
……한편, 독현의 맨션.
은돈이 미자와 통화를 하며 캐리어 안에 옷가지를 쑤셔 넣고 있었다.
-아니 갑자기 그 집에서 나오겠단 이유가 뭐야! 그 결혼 기사 땜에 그러지 너?
스피커폰 버튼이 눌린 핸드폰에서 미자의 고성이 끊임없이 울려 퍼졌다.
-미친년! 정작 지독현은 그 결혼 안 하겠다고 했다며! 근데 왜 그러냐? 왜 도망 치냐고!
“무서우니까! 너무너무 무서우니까!”
은돈이 짐을 싸다말고 침대위의 핸드폰을 확 집어 들었다.
“그래, 나 도망치는 거 맞아. 비겁하게 뒷걸음질 치는 거 맞다구.”
-그니까 왜! 대체 왜!
“……”
핸드폰을 붙잡은 은돈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
“미자야. 나 실은 그동안 사장님 앞에서 무지 허세 부렸거든. 회장님이 뭐라시든 겁 안 난다구, 문소라가 뒤에서 무슨 짓을 해도. 사장님만 내 옆에 있으면 다 이겨낼 각오 돼 있다구.”
-근데. 막상 현실이 코앞에 닥치니까 무섭든?
“그래 무서워. 난 가진 게 아무 것도 없는데. 내세울 게 없는데……자꾸 사장님이 좋아지고, 사장님이랑 함께 있는 시간이 당연해져 가는 게 너무 겁이나.”
-야……
“내 존재가 사장님한테 독이 될까봐……나 때문에 사장님이 정말로 모든 걸 잃게 될까봐……하나뿐인 가족을 등지게 될까봐……너무 무서워 미자야.
아니, 사실 정말로 내가 무서운 건……
언젠가 사장님 손을 놔야 할 순간이 왔을 때, 내가 그걸 감당할 수 없게 될까봐.
-그래서 더 크게 상처받기 전에 혼자 내빼시겠다? 비겁한 년. 지독현이 알면 얼마나 허무할까? 너 때문에 벌써 회장님인지 마나님인지도 등졌는데!
“……알아. 나도 안다구.”
은돈이 싸다 만 캐리어를 내려다 봤다. 이윽고 그녀의 시선이 방 한구석에 놓인 구두 상자로 향했다. 독현이 선물한 비싸고 예쁜 명품 구두.
아마도 저걸 신는 순간 뒤꿈치가 너덜너덜하게 까지겠지. 내 분수에 맞지 않는 신발이니까.
-그래서. 너 지독현이랑 설마 이대로 헤어질 건 아니지? 야 잘 생각해! 솔직히 지독현 사마만 잡으면 인생역전 제대로 하는 거야 너!
핸드폰에서 흘러나오는 미자의 말에 은돈이 입술을 살짝 물었다 뗐다.
“사장님이 원하면……헤어져 줄 거야. 그게 맞는 거라면 난,”
“헤어져?”
일순.
등 뒤에서 들려오는 차가운 음성에 은돈이 핸드폰을 든 손을 아래로 내렸다.
“……사장님.”
그녀가 방 문 앞에 선 독현을 멍하니 응시했다.
“헤어지겠다고……?”
“……”
독현이 온기 없는 눈빛으로 천천히 은돈에게 다가섰다.
단순히 화가 났다는 말로는 그의 기분을 다 표현할 수 없었다.
곧이어 은돈의 긴장한 얼굴 위로, 독현의 서늘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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