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화. 사장님, 혹시 결혼해요?
“당장 이 집에서 나가라.”
소름끼치도록 낮은 한마디가 은돈의 귓가를 울렸다.
“그냥 두고 보자니 끝을 모르고 기어오르는군. 몰염치의 극치야. 기어이 손을 휘둘러 쫓기 전까지는 자신이 날파리인 줄도 모르지. 뭐해? 당장 나가라니까.”
지회장이 경멸의 눈초리로 은돈을 내리훑었다.
“앞으로 두 번 다시, 내 손주 놈 곁에 얼씬할 생각 마라. 경고가 아니라 협박이야.”
그의 말에, 잠자코 있던 은돈이 고개를 들어올렸다.
“죄송합니다 회장님……하지만, 바라시는 대로 해드릴 수 없어요.”
조심스러우면서도 단호하게 내뱉어진 한마디에, 지회장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제 앞에서 당돌하게 입을 놀리는 은돈을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다.
그가 한 번 더 허공으로 손을 휙 치켜들었다.
그리고 은돈의 뺨을 내리치려는 찰나, 누군가의 거센 손길이 지회장의 손목을 낚아챘다. 독현이었다.
“사장님……”
은돈의 음성에 독현이 시선을 비틀었다. 그러자 그녀의 부어오른 뺨이 시야에 들어왔다. 순간 온몸에 피가 차갑게 식는 기분이었다.
“……손대지 마세요. 함부로.”
“뭐야?”
“이 여자한테 손대지 마시라구요.”
지회장이 감히 자신에게 발톱을 세운 독현을 마주봤다.
이제껏 늘 제 기대를 저버리는 행동만 일삼아왔던 독현이지만, 저런 표정은 처음이었다.
고작 여자 하나 때문에 사리분간 못하고 내게 날을 세워?
그가 독현의 손길을 확 뿌리치곤, 은돈에게 소리쳤다.
“뭐하고 있는 거냐? 여기서 나가라니까!”
“원하시는 대로 해드리죠.”
지회장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독현이 은돈의 손목을 거머쥐고 현관을 향해 돌아섰다.
“그 애만 내보내고 넌 남아. 할 얘기가 있다.”
지회장이 독현을 향해 매섭게 쏘아 붙였다. 독현이 몸을 돌려 그를 정면으로 응시했다.
“더 이상……날 건드리지도 방해 하지도 마세요. 그럴수록 난 이 여자한테 더 집착하게 되니까.”
자신의 친조부를 직시하며 말을 마친 독현이 이윽고 은돈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사장님,”
“가자.”
그가 마치 지회장의 눈앞에서 은돈을 잡아끌고 집을 빠져나갔다.
“……멍청한 놈……”
기어이 죽은 지 애비의 전철을 밟는군.
적막한 현관 앞. 홀로 남겨진 지회장이 한참 생각에 잠겨있다 곧 서늘한 낯으로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그리곤 명령조의 한마디를 내뱉었다.
“더 이상 시간 끌 필요가 없겠어. 기사……내보내게.”
***
“괜찮아?”
시동 꺼진 차 안.
독현이 옆자리의 은돈을 옅게 일렁이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전 괜찮아요. 그리고……회장님이 저러시는 것도 이해해요. 사장님을 너무 너무 아껴서 그러는 거니까.”
은돈이 차가운 캔 음료로 부어오른 뺨을 문지르며 말했다.
“봐요. 금방 가라앉죠.”
“……”
독현이 말없이 그녀의 손에서 음료 캔을 빼앗았다.
그리곤 곧 자신의 차가운 양 손으로 은돈의 부은 뺨을 대신 거머쥐었다.
“사장님 손이 찬 게, 도움이 될 때가 다 있네요.”
생글 웃어 보이는 그녀를 보며, 독현이 시선을 끌어내렸다.
은돈을 똑바로 마주볼 자신이 없었다. 아니 면목이 없었다.
“미안.”
“……사장님이 왜요.”
“그런 취급당한 거. 나 때문이니까.”
“괜찮아요. 나 주눅 들지 않을 거예요. 이제 시작일 뿐인데요 뭐.”
이제 시작일 뿐이라고.
도리어 아무렇잖게 말을 잇는 그녀를 보며, 독현이 스산한 시선으로 차창 정면을 응시했다.
“사장님.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에요. 우리 지각인 거 알아요?! 나 부주한테 완전 깨지겠어요. 더 늦기 전에 얼른 가요.”
“오늘은 아무도 너한테 뭐라고 못할 거야.”
“네?”
독현이 은돈의 부은 뺨을 엄지손가락으로 살짝 쓸어내렸다.
“데이트해줘. 나랑.”
“……”
어쩐지 독현의 표정이 뺨을 맞은 자신보다도 더 애달프게 느껴져서……은돈이 그를 만류하려다 다시 입을 닫았다.
끼익---!
잠시 후, 두 사람을 태운 페라리가 다원정이 아닌 어디론가로 향하기 시작했고.
……같은 시각.
“차은돈 요놈 자식 이거. 사장 안 나왔다고 자기도 덩달아 출근 안 해도 돼?”
부주가 팬을 뒤집다 말고 투덜거리자, 옆에 서 있던 경훈이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엄밀히 따지면 차은돈은 우리 보조가 아니고 사장님 전담 요리사니까……동선을 사장님한테 맞추는 게 맞긴 하죠……”
“얌마 넌 누구편이냐! 가뜩이나 일도 많아 죽겠는데!”
부주가 경훈의 코를 잡아당기며 이번엔 지세를 응시했다.
“이지세! 차은돈의 이 무단결근에 대해 어떻게 생각 하냐!”
“글쎄요.”
해물 박스를 냉장고에 밀어 넣으며 지세가 무심하게 대답했다.
“웬일이야? 니가 차은돈 쉴드를 다 마다하고! 얌마, 그러지 말고 얼른 차은돈한테 연락해봐.”
“네?”
“니가 걔랑 젤 친하잖아. 빨리 연락해서 당장 튀어오라고 전해!”
“……”
부주의 호령에 지세가 대꾸 없이 냉장고 문을 탁- 닫았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감정의 동요 없이 잔잔한 얼굴로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경훈 선배.”
“엉?”
“부탁 좀 할게요. 차은돈 씨한테 대신 연락 좀 해주세요.”
“어……? 어. 그러지 뭐.”
경훈이 의아한 듯 스토브로 돌아서는 지세의 등을 바라봤다.
“부주. 쟤 지금 ‘차은돈 씨’라고 한 거 맞아요? 이상하네. 맨날 누나누나 하다가 왜 저런대? 싸웠나?”
“난 싸웠다에 오천 원.”
“부주도 차암~ 싸운 사람들 두고 돈 내기가 하고 싶어요?”
“너 얼마 걸래?”
“전 만 원.”
의기투합한 부주와 경훈이 곧 손을 맞잡고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이 자신을 두고 알량한 내기를 벌였음을 알면서도, 지세는 그저 묵묵히 제 할일에 몰두 할 뿐이었다.
은돈에 대한 감정을 한 순간 전부 지워버리는 데 성공한 사람처럼, 그렇게.
***
“사장님. 여자랑 데이트 한 번도 안 해본 건 아니죠……?”
“? 무슨 뜻이지?”
백화점 명품관 VIP룸.
마치 제 방처럼 편안한 자태로 소파에 걸터앉은 독현이 멀뚱히 서 있는 은돈을 응시했다.
“왜 그렇게 서 있는 거야?”
“그야……!”
익숙치 않으니까 그렇지. 이런 데이트(?)는.
은돈이 말끝을 흐린 채 눈앞에 줄지어 선 행거를 바라보았다. 행거에는 손대기도 조심스러운 명품 신상들이 브랜드 별로 가득 걸려 있었다.
“샤넬의 클래식 라인 원피스들입니다. 가방은 에르메스, 구두는 마놀로 블라닉의 신상 라인으로 준비해봤습니다.”
퍼스널 쇼퍼의 설명을 듣는 둥 마는 둥, 은돈이 힐끗 독현을 돌아보았다.
“사장님. 여자랑 데이트 한 번도 안 해본 건……”
“그 질문만 벌써 여섯 번째야. 귀에 딱지 앉겠군.”
독현이 자리에서 몸을 일으켜 은돈의 곁으로 다가왔다. 그리곤 행거에 걸린 샤넬의 클래식 라인을 예리한 시선으로 훑다가 몇 개의 원피스를 차례로 가리켰다.
“이거랑 이거. 그리고 이거.”
“사장님! 저 이런 거 입고 갈 데도 없거든요?”
“앞으론 있을 거야.”
“아뇨 앞으로도, 뒤로도 없을 거예요.”
그 와중에 틈새 개그를 치며 은돈이 재빨리 독현을 가로막았다.
“사장님이 무슨 꽃보다 남자 구준표에요? 산타클로스에요? 왜 매번 뭘 사주지 못해 안달입니까 안달이? 내가 생각한 데이트는 이런 게 아니란 말이에요.”
물론 옷이며 가방이며 갖고 싶지 않다면 거짓말이지만……그녀가 살짝 마놀로 블라닉의 신상 하이힐을 내려다봤다. 저건 좀 예쁘긴 하네……아니. 아니지!
그녀가 꿀꺽 마른침을 삼키곤 다시 말을 이었다.
“매번 받기만 하는 데이트. 부담스러워요, 난.”
“……?”
독현이 의아한 듯 고개를 옆으로 젖혔다.
옷도, 가방도, 구두도 싫다니. 그가 정말 모르겠다는 얼굴로 되물었다.
“……주얼리가 빠져서 그런 건가?”
주얼리 박정아 베비 원모 타임 추는 소리하네.
은돈이 결심한 듯 독현의 팔목을 잡아 쥐었다.
“좋아요. 오늘 날이 날이니만큼. 내가 원하는 데이트가 뭔지, 확실하게 보여줄게요.”
***
“꺄아아아악”
“으아아아아악!”
에버랜드.
“와 디스코 팡팡이다! 우리 저거 타요 사장님!”
“……”
“사장님 뭐해요! 얼른 와요!”
“……”
바닥에 뿌리라도 내린 듯 굳어 버린 독현이 노란 모자를 쓴 유치원생 틈바구니에서 손을 휘젓는 은돈을 응시했다.
“에버랜드……”
이곳이 놀이동산이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 듯, 독현이 스스로 밟고 선 폭신폭신한 우레탄 재질의 지면을 내려다 봤다.
“사장님. 그렇게 있는다고 시간이 더 빨리 가진 않아요. 순간 이동해서 다시 집으로 뿅 사라질 수 있는 것도 아니구요.”
“!”
마치 속내를 들킨 사람처럼 독현이 고개를 치켜들었다.
포다닥, 은돈이 다시 그의 곁으로 다가왔다.
“저 실은 남자친구가 생기면 꼭 해보고 싶은 데이트가 있었어요.”
“말 안 해도 알 것 같군.”
여긴 온통 차은돈이 좋아하는 것들로 넘쳐나니까.
귀여운 캐릭터 인형들과, 분수대, 신데렐라의 성, 퍼레이드, 그리고……
“사장님 저기 봐요! 대왕 츄러스에요! 내가 이 맛에 놀이동산을 온다니까!”
은돈이 성난 코뿔소마냥 츄러스 가게로 돌진했다.
귀여운 인형들과, 분수대, 신데렐라의 성은 이미 안중에도 없다는 듯한 태도……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독현이 곧 반쯤 체념한 상태로 걸음을 떼놓기 시작했고,
그로부터 정확히 삼십분 후.
“끄아아악! 끄아아악!”
디스코 팡팡 위.
허술하기 짝이 없는 손잡이를 아슬아슬 붙든 은돈이 결코 스테이지 중앙으로 떨궈지지 않으리라 다짐하며 우악스런 비명을 내지르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곧 힘없이 손잡이를 놓친 그녀가 두다다닥! 스테이지를 달려 반대편에 앉아있던 이름 모를 남정네 무릎위로 떡하니 몸을 앉혔다.
“초, 초면에 죄송합니다아아아악!”
사과를 채 끝내기도 전에 다시 자리에서 튀어 오른 그녀가 또 다시 스테이지를 가로질러 반대편 남고딩 무릎에 털썩 엉덩이를 앉혔다.
“와우! 누님 화끈한데!?”
젠장. 은돈이 자신을 타겟 삼아 즐겁게 멘트를 날리는 디스코 팡팡 디제이를 홱 노려봤다.
그나저나 사장님은? 사장님은 어떻게 된 거지?
사색이 된 은돈이 가까스로 손잡이에 매달린 채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리고 머잖아 그녀의 커다래진 동공 위로 익숙한 실루엣이 담겼다.
“하……사장니임……”
무자비하게 위아래로 튕겨 오르는 디스코 팡팡 기계 위.
혼자만 튀는 수트 차림의 독현이 손잡이 봉을 양 손으로 굳건하게 붙든 채 한 치의 미동 없이 포커페이스를 유지하고 있었다.
시멘이나 콘크리트로 엉덩이를 자리에 고정시킨 게 아닐까?
디제이의 현란한 튕기기 스킬에도 전혀 흔들리지 않는 독현을 보며 은돈이 혀를 내둘렀다.
참으로 경이롭기 짝이 없구나……절대 손잡이를 놓치지 않겠다는 저 미친 승부욕이여……
“사장님 제가 그쪽으로 갈게요오오옥!”
말을 잇던 은돈이 손잡이를 놓치며 다시 스테이지 정중앙으로 보기 좋게 나가 떨어졌다. 그리곤 마치 갓 잡아 올린 도다리 마냥 바닥에서 펄쩍펄쩍 튀어 오르기 시작했다.
피식. 그 모습을 보며 독현은 승리의 미소를 머금었고, 곧 은돈의 외마디 비명의 모두의 귓전을 때렸다.
“이건 이기고 지는 게임이 아니라고 이 인간아아아아-!”
***
“사장님. 나……아까 비명을 너무 질렀더니 목이 쉰 것 같아요……”
후룸라이드 대기 줄 앞.
십년은 늙어 보이는 은돈이 큼큼 목을 매만지며 말했다. 반면 여전히 쌩쌩한 독현이 태연하게 그녀를 바라봤다.
“잠깐 쉬는 게 어때.”
“안돼요. 후룸라이드는 갈수록 대기 줄이 길어진단 말이에요. 사람 없을 때 얼른 치고 빠져야 돼요.”
치고 빠져? 독현이 황당하다는 듯 고개를 들어 후룸라이드 안내문을 읽어 내렸다.
“이거……물에 젖는 거 아닌가?”
“아, 아뇨! 요즘은 기술이 좋아져서 한 방울도, 반 방울도 안 젖어요!”
대충 둘러대곤 은돈이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디스코 팡팡에서 날 붙잡아 주지 않고 방관한 죄로, 지독현 당신을 후룸라이드 맨 앞자리에 태워주겠어.
물벼락을 맞고 비에 젖은 생쥐 꼴이 될 독현을 떠올리며, 은돈이 흐흐흐 음산한 악당의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나 십여 분 후.
“……정말 기술이 좋아졌나보군.”
독현이 보송보송한 자신의 수트 자락을 보며 신기한 듯 중얼거렸다.
“푸엣취!”
그의 옆에 서 있던 비에 젖은 생쥐가……아니, 은돈이 재채기를 하며 젖은 머리칼을 꾹 짰다.
“이건 뭔가 잘못된 거에요……분명 가장 안전한 가운데 자리에 탑승했건만……어떻게 나만 젖죠? 왜 나만……”
차마 말을 잇지 못한 채로, 그녀가 분한 듯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때, 등 뒤에서 어린아이의 음성이 들려왔다.
“엄마 저기 좀 봐! 저기 귀신 찍혔어!”
“어머. 그러게 저 여자 정말 심령사진 같네.”
후룸라이드 낙하구간에서 도촬한 관객들의 사진이 전시되는 포토 판매장.
몇몇 사람들이 마치 심령사진마냥 음울하게 나온 은돈의 사진을 가리키며 웅성거리고 있었다.
“보, 보지 마요! 얼른 가요 사장님! 배고프죠! 햄버거라도 먹을 까요!”
은돈이 호기심에 눈을 반짝이며 사진에 다가서는 독현을 극구 잡아 세웠다.
그러나 이미 화면에 뜬 그녀의 심령st 사진을 발견한 독현의 입 꼬리가 피식 위로 치솟았다.
“꿈에 볼까 무섭군.”
“아악! 사지 마요! 사지 말라구!”
은돈이 지갑을 꺼내드는 독현을 보며 괴성을 내질렀다. 그러나 독현은 정당한 대가를 지불한 후 은돈의 엽사를 거머쥐었고. 그것을 내심 뿌듯한 표정으로 지갑에 넣었다.
도대체 이것이 누구를 위한 데이트인가.
디스코 팡팡에서는 한 마리의 도다리로……후룸라이드에선 심령사진녀로……이것이 정녕 내가 꿈꾸던 러브 러브한 데이트가 맞는가……
좌절한 은돈이 자신의 머리를 마구 헝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독현이 귀여운 은돈의 엽사를 보며 한 번 더 미소를 머금었다.
***
“꿈에 나올까 무섭다면서. 남의 사진은 뭐 하러 자꾸 봐요?”
에버랜드 광장에 위치한 테이블 벤치.
지갑 속의 엽사를 들여다보는 독현과, 그를 향해 볼멘소리를 뱉는 은돈이 보였다.
“에라이, 햄버거나 배터지게 먹고 가야겠어요.”
은돈이 투덜대며 앞에 놓인 햄버거를 집어 들었다. 엽사에서 시선을 거둔 독현이 곧 그녀의 햄버거를 자연스럽게 빼앗았다. 그리곤 먹기 좋게 포장을 벗겨준 뒤 다시 그녀에게 건넸다.
역시나 자연스레 받아든 은돈이 오물오물 햄버거를 먹기 시작했다.
“사장님은 놀이동산 언제 오고 안 와봤어요?”
“……여섯 살쯤.”
“여섯 살?!”
화들짝 놀란 은돈이 안타깝다는 듯 독현의 손을 붙잡았다.
“또 뭐 타고 싶어요? 타보고 싶은 거 원없이 다 타 봐요 사장님. 아. 회전목마 한번 때릴까요 우리?”
“애 취급하는군.”
우습다는 듯 독현이 은돈의 얼굴 위로 시선을 고정했다.
정말 애 같은 게 누군데.
그가 손가락으로 은돈의 입가에 묻은 햄버거 부스러기를 닦아주었다.
그때, 은돈의 머릿속에 어떤 생각이 반짝 하고 스쳤다.
“사장님. 나 꼭 해보고 싶은 게 있었는데……”
독현이 사뭇 심각한 얼굴로 되받아쳤다.
“대왕 츄러스 먹기?”
“아, 아뇨……그게 아니라……저거……”
은돈이 우물쭈물하며 독현의 등 뒤를 가리켰고, 곧 고개를 돌린 독현이 거대한 토끼 귀가 달린 커플 머리띠를 발견하곤 돌처럼 얼굴을 굳혔다.
……삼십분 후.
“어머나 여러분! 저기 보세요! 귀여운 두 마리의 토끼 친구들이 있어요!”
에버랜드로 소풍 온 유치원생들을 인솔하던 알바생이, 광장 벤치에 앉아있던 독현과 은돈을 가리키며 말했다.
“자 거기, 댕이댕이~ 귀염댕이 토끼 친구! 우리 단체사진 한 장 찍어줄래요!?”
나풀거리는 토끼 귀가 매달린 머리띠를 쓰고 있던 독현이, 자신을 향해 물어오는 에버랜드 알바생을 보며 콰직 눈썹을 치켜 올렸다.
“토끼 친구?”
“워~ 토끼 친구가 어쩐지 화가 많이 났네요!”
눈치 없는 알바생이 손에 든 요술봉을 휘두르며 독현을 향해 외쳤다.
“자 기분 풀어요, 토끼 친구! 날 따라해 봐요! 환상의 나라~ 에버랜드로오~!”
“……에버랜드가 아니라 난 그쪽을 지옥으로 보내줄 수도 있어.”
독현의 진심어린 협박에, 비로소 알바생이 움찔했다. 그가 서둘러 유치원생들을 향해 돌아섰다.
“자, 우리 사파리 월드로 이동해볼까요?”
“잠깐.”
독현이 슥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곤 알바생에게 다가가 디카를 빼앗았다.
뭐야……진짜 사진 찍어주려는 거야?
“완전 츤데레 토끼가 따로 없구만……”
은돈이 유치원생들의 단체 사진을 찍고 있는 자신의 커플토끼를 황당한 듯 바라보다 이내 푸- 웃음을 터뜨렸다.
“웃지 마.”
독현이 언짢다는 듯 머리를, 아니 토끼 귀를 쓸어 넘기며 은돈에게 말했다.
그 모습이 사랑스러워서, 은돈이 참았던 웃음을 다시 한 번 터뜨렸다.
“사장님! 우리 이번엔 뭐 타러 갈까요!? 범퍼카 어때요 범퍼카!?”
……그날 밤.
돌아오는 길. 핸들을 잡은 독현이 곯아떨어진 옆자리의 은돈을 힐끗 응시했다.
지회장에게 맞아 부어올랐던 그녀의 뺨은 어느새 말끔히 가라앉아 있었다.
끼익-
자신의 맨션 앞에 차를 세운 독현이 은돈을 깨우려다, 다시 자리에 등을 기댔다.
“이걸 아직도 하고 있군.”
나직이 읊조린 그가 은돈의 토끼머리띠를 살짝 빼들었다.
그리곤 한참동안 그녀의 감은 눈을 바라보았다.
어쩐지 안쓰러운, 아니 애처로운 마음이 들었다.
“……오늘 고마웠어요, 사장님.”
그때, 자는 줄 알았던 은돈이 눈을 지그시 감은 채 입을 열었다.
“잠든 거 아니었나.”
“아뇨.”
은돈이 눈을 뜨고 독현을 응시했다.
“놀이동산에서 커플 머리띠까지 쓰고 나랑 데이트해준 거. 고마워요. 신경 안 쓰는 척 하면서도, 사실은 사장님이 하루 종일 나한테 맞추려고 노력했다는 거 알아요.”
말을 잇던 은돈이 잠시 숨을 골랐다.
“나한테 회장님을 대신해서 미안해할 필요 없어요. 내 눈치 볼 필요도 없고 날 안쓰러워하지도 마요. 그냥 우리……할 수 있는 데까지 열심히 연애해요. 아까처럼 데이트도 많이 하구요……”
“……할 수 있는 데까지?”
독현이 살짝 굳어진 얼굴로 묻자, 은돈이 시선을 내린 채 차분히 말했다.
“갑자기 회장님이 집까지 찾아오신 것도 그렇고……어제 갑자기 사장님이 문소라 씨를 만나러 간 것도 그렇고……무슨 일 있는 거 다 알아요. 혹시……”
사장님 혹시, 결혼해요?
스스로 생각해도 너무나 바보 같은 질문. 은돈이 내내 입가를 맴돌던 그 한마딜 다시 삼키며 허무한 미소를 띠었다.
독현이 한동안 그녀를 바라보다, 화제를 돌리려는 듯 뒤편에 놓여있던 쇼핑백을 집어 들었다.
“받아. 타이밍이 좋진 않지만.”
“……이게 뭐에요?”
은돈이 의아한 표정으로 쇼핑백 안의 상자를 꺼내 열었다.
“……이건 아까, 백화점에서……”
그녀가 상자 안의 마놀로 블라닉 구두를 집어 들었다.
“이걸 왜……”
“계속 그것만 보고 있었잖아.”
“내, 내가 언제……사장님이 어떻게 알아요 내가 이것만 봤는지.”
“알아. 난 너만 보고 있었거든.”
그가 짓궂게 말하며 입꼬리를 유려하게 끌어올렸다.
은돈이 홍조 띤 얼굴로 구두를 내려다봤다.
“고마워요 사장님……근데 여자한테 구두 선물하면 도망간다는 거……알죠?”
“글쎄. 갈 수 있으면 가 봐.”
운전석의 독현이 은돈을 향해 상체를 비틀었다. 그리곤 곧 그녀의 턱을 끌어당겨 깊게 입을 맞추었다.
순간, 이 시간이 끝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은돈이 독현의 입맞춤을 받아들였다. 그리곤 이내 떨리는 눈꺼풀을 감았다.
***
다음날 아침.
요란하게 울리는 벨소리에 은돈이 비몽사몽한 상태로 침대 맡을 더듬거렸다.
“여보세요……”
디스코 팡팡의 여파가 컸던지, 결국 팍 쉬어버린 목소리로 그녀가 핸드폰을 받아들었다.
-야! 차은돈! 너 뭐야! 너 어디야!? 어떻게 된 거야! 살아는 있는 거야!? 한강물에 뛰어들고 그런 건 아니지?!
“……미자?”
은돈이 게슴츠레한 눈으로 휴대폰 액정을 들여다봤다. 미자 맞는데.
“아침부터 웬 난리야? 한 번에 하나씩 질문해봐. 한강물이 뭐?”
-너 아직 한강물에 안 뛰어들었냐고!
“……그게 무슨 소리야?”
은돈이 되묻자, 미자가 갑갑하다는 듯 목소리를 높였다.
-너 아직 기사 못 봤어?!
“기사? 무슨?”
-지독현 말이야! 결혼한다던데!
“……결혼?”
쿵- 가슴이 떨어져 내리는 기분에 은돈이 입을 다물었다.
“너 어디서 봤어? 무슨 기사 말하는 거야?”
-무슨 기사고 자시고! 인터넷에 쫙 깔렸던데!? 티비에도 나오더라! 기업간의 친선을 도모하기 위한 정략결혼의 아주 좋은 표본이라면서!
“……아……”
-아? 너 지금 ‘아~’라 그랬냐? 야 차은돈. 지금 너무 충격 먹어서 맛탱이가 간 모양인데……
“미자야. 미안. 나 일단 좀 끊을게.”
은돈이 통화종료 버튼을 꾹 눌렀다.
그와 동시에 찾아온 정적. 그녀가 새하얀 침대 시트를 멍하니 내려다 보다, 곧 정신이 든 듯 다시 핸드폰을 들어 인터넷 기사를 찾아보기 시작했다.
아니. 사실은 찾을 것도 없이, 이미 독현과 소라의 기사가 포털 일면을 장식하고 있었다.
-식품 재벌 3세간의 21세기형 정략결혼!-
-대성명가 후계자 지독현씨, KM식품의 독녀 문소라씨와 웨딩마치 올리기로!-
-두 사람은 십년 전부터 애틋한 만남을 이어 온 것으로 밝혀져……세간에 떠도는 정략결혼에 대한 루머를 일축……-
“……”
은돈이 핸드폰을 든 손을 아래로 천천히 떨어뜨렸다.
놀이동산에서 독현과 즐거웠던 한때가 떠올랐다. 어울리지 않던 토끼 머리띠를 쓴 채 내내 자신의 표정을 살피던 그.
‘근데 여자한테 구두 선물하면 도망간다는 거……알죠?’
은돈이 침대 맡 협탁에 놓인 상자를 바라봤다. 상자 속에 든 건 반짝반짝 예쁜 하이힐.
자신과 어울리지 않을 것 같아서, 도저히 신어볼 엄두가 나지 않는 구두.
그녀가 울 것 같은 얼굴로 하염없이 구두를 내려다보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