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남자 밥해주기-73화 (73/93)

73화. 이지세에 대한 정의.

“차은돈. 일어나. 차은돈.”

“으음……?”

주방.

은돈이 자신의 불덩이같이 뜨거운 이마를 짚어주는 누군가의 차가운 손길에 눈을 떴다.

그리곤 게슴츠레한 시선을 올리자 익숙한 얼굴 하나가 보였다.

“사장님……? 여기가 어디에요……?”

“정신 차려. 혹시 술 취한 거야?”

독현이 그렇게 물으며 은돈을 소파에서 일으켰다.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은돈이 주변을 둘러보자 눈에 익은 락커룸들이 들어왔다.

“직원 휴게실이네요……”

그녀가 자신에게 덮여 있던 담요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어떻게 된 거죠? 제가 왜 여기……”

“그건 내가 묻고 싶은 말이야. 어떻게 된 거야?”

독현의 물음에 은돈이 띵한 머리를 한손으로 받쳐들었다.

“기억이 안 나요……뭐가 어떻게 된 건지……분명 이 시간엔 호텔에 있어야 하는데……”

호텔? 독현의 눈썹이 콰직 치솟았다.

“대체 여기 남아서 혼자 뭘 한 거야? 이 메시진 또 뭐고.”

그가 은돈의 면상에 핸드폰 액정을 디밀었다.

-레스토랑으로 와요.-

“……그걸 내가 보냈다구요? 난 문잘 보낸 적이 없는데……”

은돈이 헤롱헤롱 고개를 젓자, 독현이 맥없이 핸드폰을 든 손을 아래로 내렸다.

더 이상 애기해봤자 소용없을 듯싶었다.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은돈은 이미 제정신이 아니었다.

“일단 가지. 일어날 수 있겠어?”

“……그게……다리에 힘이 안 들어가요……”

그녀가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말했다. 독현이 옅게 숨을 내쉬며 그녀의 발치에 상체를 쭈그렸다.

“업혀.”

“?! 돼, 됐어요! 저 무거워요. 혼자 갈게요!”

은돈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갓 태어난 기린 새끼마냥 두 다리로 위태롭게 땅을 지탱하던 그녀는 머잖아 다시 소파로 나동그라졌다.

“방금 그건 뭐야? 탭댄스라도 춘 줄 알았어.”

“놀리지 마요……”

“거봐. 고집피우지 말고 업혀.”

“……”

은돈이 말없이 독현의 등을 내려다봤다. 에라- 모르겠다.

포오옥. 그녀가 독현의 넓은 어깨에 안기듯 매달렸다.

“아…… 따뜻해……”

그의 등짝에 뺨을 부비대며 은돈이 중얼거렸다.

같은 시각. 평창동 본가.

털썩. 침대에 몸을 뉘인 지세가 헝클어진 눈빛으로 천장을 응시했다.

‘……사랑해요, 사장님……’

자신을 바라보며 읊조리던 은돈의 얼굴이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은돈이 사랑하는 남자를 어떻게 쳐다보는지. 어떤 어조로 사랑한다고 얘기하는지 알게 된 것은 실수였다.

미치도록 그녀가 욕심이 났다. 그래서……죽을 만큼 비참했다.

자신을 다른 남자로 오인하는 여자와의 키스.

그건 키스이기 이전에 자해였다. 스스로 가슴에 아물지 않을 상처를 내고 말았다.

그가 양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이제 다시 예전으로 돌아갈 순 없었다.

억지로 마음을 누르며 동료처럼, 동생처럼 은돈의 곁에 머물 수 없었다. 그런 위선을 떨기엔……자신은 너무나 최저였다.

더 이상 치고 내려갈 바닥이 있을까.

지세가 한 손으로 눈가를 덮었다. 만약 다시 처음으로 되돌아 갈수 있다면, 은돈을 사랑하지 않았을 거다.

진심이었다. 이렇게 아플 줄 알았다면.

이렇게 가슴이 부르트도록 그녀를 원하게 될 줄 알았다면……그래서 해서는 안 될 비겁한 짓까지 하게 될 줄 알았다면……절대로 시작하지 않았을 거다.

‘지금이라도 그 여잘 사랑하지 않는다면.’

지세가 상처로 얼룩진 눈을 질끈 감았다. 몸을 뉘인 침대가 한 없이 땅으로, 바닥으로 꺼져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

“구……굿모닝……입니다……”

다음날 아침.

어찌나 요란하게 잔건지, 미스코리아 뺨치는 산발머리를 한 은돈이 독현에게 조심스런 모닝 인사를 건넸다.

대리석 식탁에 앉은 독현이 커피 잔을 집어 들며 힐끗 그녀를 응시했다.

“정신은. 좀 들어?”

“네……북엇국이네요.”

은돈이 식탁에 차려진 아침 해장국을 바라보다 다시 독현의 눈치를 살폈다.

“사장님이 만든 거예요?”

“그래.”

“아……하하……북엇국이 왜 초록색인진 모르겠지만……하여간 잘 먹을게요.”

후다닥. 자리에 착석한 은돈이 냉큼 숟가락을 집어 들었다. 그리곤 앞에 놓인 정체불명의 북엇국을 열심히 떠먹었다.

으. 달다. 그래, 대체 뭘 넣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북엇국이 솜사탕마냥 달디 달아.

가뜩이나 뒤집어진 속이 더 울렁거리는 느낌이야.

그러나 차은돈, 버텨야한다. 최대한 맛있게 먹어치우자, 그게 사장님에 대한 마지막 예의야.

“하하……맛있네요……”

“그래.”

독현이 앞에 놓인 신문을 집어 들며 유유히 대꾸했다.

“아! 저 어제……사장님한테 업혔던 거 생각나요……다른 건 전혀 기억이 안 나는데……이상하게 그건 생각나요.”

“그래?”

“네……근데 화 많이 났나 봐요……”

은돈의 말에, 신문을 읽던 독현이 비로소 고개를 치켜들었다

“내가?”

“아까부터 계속 그래라는 말 밖에 안하고 있잖아요……”

“……그래?”

“이, 이거 봐 또!”

그녀가 얼른 다음 말을 덧붙였다.

“근데 저 사장님 심정 이해해요! 나 같아도 화났을 거예요. 어제…… 호텔에서 나 많이 기다렸죠? 실은 그게 어떻게 된 거냐면요, 미자한테 혼미주라는 술을 받았는데……”

“술?”

독현이 테이블에 신문을 내려놓으며 조소를 머금었다.

“됐어. 더 이상은 안 들어도 될 것 같군.”

“윽……미안해요……진짜 호텔로 갈려구 했는데……술이 너무 취해서……”

은돈의 혼잣말에 독현이 시니컬한 한마디를 내뱉었다.

“괜찮아. 정말로.”

정말로……? 은돈이 독현을 응시했다. 그는 정말 진짜 완전 괜찮은 표정이었다.

호텔에서 뜨거운 상상을 하며 애인을 기다리다 바람맞은 것치고는 너무도 태연하달까.

“사장님……진짜 괜찮아요?”

“괜찮아.”

“……리얼?”

“리얼.”

독현이 쿨하게 대답했다. 그는 더 이상 은돈에게 애가 타 보이지도 않았고, 오늘 밤에라도 다시 한 번 야릇한 분위기를 조성하리라는 열의도 없어보였다.

“그, 그나저나 이건 뭐죠?”

은돈이 화제를 돌리려, 북엇국의 정체불명 건더기를 가리켰다.

“아, 매생이야.”

“매……생이?”

“넣으면 괜찮을 것 같아서.”

“아아……그래요……그래서 초록빛을 띠었구나 얘가……”

이런 매생이 같은.

은돈이 어색하게 웃어보였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독현은 정말로 아무렇지 않은 걸까.

혹시 나한테 너무 실망해서 감정이 식어버린 건가?

그래. 결정적인 19금의 순간마다 어이없이 물을 먹이니. 감정이 식을 만도 하지.

헛?! 어쩌면 나에 대한 복수심에 이 해괴망측한 매생이를 국에 집어넣은 것은 아닐까?

흡사 그것이 알고싶다의 상중오빠에게 빙의한 양, 은돈이 날카로운 시선을 빛내며 턱을 문질렀다.

“그래……가능성 있어……”

“뭐?”

“네? 아무것도 아니에요.”

은돈이 의아해하는 독현을 향해 도리도리 고갤 젓고는, 실내 골프장 인조 잔디 맛이 나는 북엇국을 다시 열심히 떠먹었다.

***

“누구야! 대체 누가 간밤에 신성한 주방에서 술을 나발 분 거야!?”

그날 오후. 주방.

부주의 외침에 저만치서 새우를 손질하던 은돈이 찔끔하며 고개를 휙 돌렸다.

그러자 부주 손에 들린 혼미주 병이 시야에 들어왔다.

내가 어제 주방에서 술을 깠던가? 젠장! 왜 하나도 기억이 안 나는거냐 대체……

“저기 부주……실은 그거……”

은돈이 울며 겨자 먹기로 살짝 손을 들었다.

그때, 옆자리에 서 있던 지세가 그녀의 말을 가로막듯 말했다.

“죄송해요 부주. 제가 치울게요.”

“엉?! 설마 네가 마신 거냐 이지세?! 이게 막내가 되가지고 빠져서는!”

“죄송합니다.”

“됐고! 병이나 치워 임마! 뭐야, 이건 무슨 술인데 죄 한자로 돼 있어!? 비싼 거지?! 그래서 혼자 먹었냐!”

지세가 말없이 부주에게 다가갔다. 그리곤 술병을 받아든 채 다시 은돈의 곁을 지나치려는데,

“지세야. 저기, 그거 내가 그런 건데……굳이 니가 뒤집어 쓸 필요,”

“알아요.”

“응?”

“누나가 그런 거. 안다구요.”

지세의 시선이 은돈을 향해 떨어졌다. 그와 눈이 마주친 순간, 아주 찰나였지만 은돈은 묘한 기분이 들었다.

그녀가 멋쩍은 듯 목덜미를 쓸어내리며 다시 입을 열었다.

“어쨌든 미안……나 땜에 괜히 너만 또 며칠 부주한테 잔소리 듣게 생겼다.”

“괜찮아요.”

“그래도,”

“괜찮다잖아.”

“……”

말을 가로채는 지세를 보며 은돈의 동공이 살짝 커다래졌다.

뭐지? 평소와 달라.

“미안한데……좀 비켜줄래요.”

“아, 응!”

그의 냉정한 눈빛에 적잖이 당황한 은돈이 냉큼 옆으로 비켜섰다.

그러자, 지세가 옅은 한숨과 함께 곁을 지나쳤다.

“……나한테 혹시 화난 거 있나?”

은돈이 의아한 얼굴로 멀어지는 지세를 바라보았다.

한편, 프레지던트 룸.

독현이 차갑게 경직 된 얼굴로 지회장의 하수인인 윤비서에게서 온 메시지를 읽고 있었다.

-오늘 회장님과 저녁 식사 예약해뒀습니다. 문소라 씨와 함께 오십시오. 두 사람, 공식적인 상견례 자리나 마찬가지니 부디……-

메시지를 눈으로 훑다말고, 독현이 핸드폰을 탁, 책상에 내려놓았다.

상견례? 기가 찼다.

소라와 자신의 결혼을 성사시키려는 지회장의 노력은 이전에도 있어왔지만, 지금처럼 서둘러 일을 진행시킨 적은 없었다.

지명준 회장. 대한민국 최고의 식품기업인 대성명가를 이끄는 수장답게, 그는 눈치가 칼같이 빠른 사람이었다.

독현이 은돈에게 진심으로 마음을 빼앗겼다는 걸 그가 모를 리 없었다.

하나뿐인 손자 곁에 달라붙은 차은돈이란 날파리를 떼어내기 위해, 그는 최대한 빨리 이 결혼을 추진하고 있는 것이었다.

소라와 독현의 결혼 발표면, 날파리는 알아서 떨어져 나갈 것이란 계산 하에.

독현이 손깍지를 낀 채 생각에 잠겼다. 그의 귓가에 친조부의 매서운 음성이 아른거렸다.

‘내가 원하는 건 네 행복이다. 여자에 미쳐서 어이없이 저세상 간 니 애비. 애비의 전철을 밟게 하지 않으려고 이러는 게야. 정말 몰라서 묻는 거냐?’

아버지의 전철을 밟게 하고 싶지 않아서라고.

독현의 눈빛이 굳어졌다.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사랑하는 여자를 택했던 자신의 친부.

그러나 그 대가는 혹독했다. 자신은 어이없는 차사고로 유명을 달리해야만 했고, 남겨진 여자 역시 자살로 짧은 생을 마감했으니.

“그 전철을 밟지 않으려면, 지금이라도 정신 바짝 차려야겠군.”

마치 지회장을 비웃듯 그렇게 뇌까린 뒤, 독현이 날카로운 시선을 끌어올렸다.

***

“사장님. 나한테 화 많이 났어요? 사장님. 미안해요. 어제 바람맞힌 거, 술 취해서 제정신 아니었던 거. 정식으로 사과할게요.”

그날 저녁. 직원 휴게실.

허공을 바라보며 ‘사과 시뮬레이션’을 반복하고 있는 은돈의 모습이 보였다.

“지독현 이 인간……삐졌어. 내가 자길 허무하게 바람맞혀서 완전히 삐진 거라구……”

그녀가 초조한 얼굴로 머리를 부여잡았다.

그도 그럴것이,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3시간 전. 프레지던트 룸.

‘사장님, 저녁 드세요.’

식사가 담긴 이동 트레이를 밀고 안으로 들어선 은돈은 곧 재킷을 걸치며 곁을 지나치는 독현과 마주해야 했다.

‘미안. 미리 얘기해둔다는 걸 깜박했군.’

‘네……?’

‘약속이 있어. 저녁은 내일 같이 먹지.’

‘무, 무슨 약속이……?’

은돈의 벙 찐 물음에 독현은 왠지 멈칫하며 대답을 꺼려하는 듯 보였고.

‘뭐야. 뭐 어디 바람이라도 피러 가요? 문소라 씨랑 저녁이라도 먹기로 했어요?’

‘응.’

‘네?! 아……그렇구나……둘이 같이 저녁을……그, 그럼 잘 다녀와요……’

“내가 미쳤지. 거기서 잘 다녀오란 소리를 왜 해.”

그저 떠본 것뿐이었는데, 너무 쉽게 인정해버리는 사장님 때문에 잠시 멘탈이 나갔었나 봐.

“문소라 씨는 갑자기 왜 만나는 거지? 역시 어제 내가 사장님을 바람맞힌 것에 대한 복수……?”

상상은 더 큰 망상을 부른다는 것을 몸소 보여주며, 은돈이 손톱을 깨물었다.

그래. 사장님이 성격이 좀 모나서 그렇지. 그렇게 쉽게 맘이 변하는 타입은 아닐 거야……

비록 내가 결정적인 19금 순간에 배탈이 나서 화장실 변기를 폭파시킬 뻔하긴 했지만……

호텔로 불러놓고는 보란 듯 바람맞히고, 거기에 술에 취해 업혀 들어가기까지 했지만……

“아악! 생각보다 훨씬 깨잖아 나.”

은돈이 불안함에 머리를 마구 헝클었다.

독현이 소라와의 상견례에 대해 말을 아낀 것은 자신에게 괜한 걱정을 심어주고 싶지 않아서였다는 것을 알리 만무한 그녀는 그로후도 계속 망상의 나래를 펼쳐댔고,

직원 휴게실 밖으로 간간히 아악! 으악! 하는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뭐야? 차은돈, 다들 갔는데 퇴근 안하고 뭐해? 발성 연습 하냐?”

그때, 벌컥 문이 열리며 비에 쫄딱 젖은 경훈이 안으로 들어섰다.

“경훈선배. 헙. 밖에 비……?”

“어. 밖에 비 온다 주룩주룩! 주룩주룩!”

엉성한 힙합자세로 라임을 맞추던 경훈이 곧 휴게실 한켠에 놓인 우산꽂이에서 하나 남은 직원용 우산을 꺼내들었다.

“어, 선배 그거 제가!”

“어 그래! 내일 보자!”

은돈이 막을 새도 없이 경훈이 냉큼 우산을 든 채 문밖으로 사라졌다.

쾅! 곧이어 다시 문이 닫히는 소리가 그녀의 귓전을 울렸다.

“후우……하필 비까지 오고 난리야……뭐 우비 같은 거 없나?”

그녀가 락커 룸을 하나하나 열어보다 곧 깊디깊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

다원정 레스토랑 후문.

쏴아아- 쏟아지는 비를 보며 지세가 손에 든 우산을 펼쳐 들려는 순간. 문을 열어젖힌 은돈이 스프링처럼 눈앞으로 튕겨 나왔다.

“……”

“어 이지세!? 아직 안 갔어!? 비 진짜 많이 온다 그치?”

지세가 대답대신 은돈의 얼굴을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또다, 또. 저런 눈빛으로 날 봐. 왜 저러지 오늘따라?

“왜……? 내 얼굴에 뭐 묻었어?”

“……아뇨.”

지세가 시선을 돌렸다.

“우리 당분간 집에 같이 못 가겠다. 수도관은 언제쯤 고쳐지려나?”

은돈이 쏟아지는 빗줄기 속으로 살짝 손을 뻗으며 말했다.

“……사장님이랑 같이 안가요?”

“응?”

“어차피 누나, 사장님 집으로 가야하잖아요”

“아……그게……”

은돈이 머쓱한듯 머리를 긁적였다.

“사장님, 오늘 일찍 퇴근했거든. 그……누구 좀 만나러……”

“……”

“아. 그럼 나도 이만 가볼게. 조심해서 들어가.”

자꾸만 이어지는 침묵이 묘하게 견디기 힘들어서, 은돈이 빗속으로 먼저 발걸음을 떼놓았다.

그때, 그녀의 팔을 낚아채 듯 붙잡은 건 다름 아닌 지세였다.

“누나.”

“어?”

“……내가 아직 누나 좋아한다는 거. 알죠.”

“?! 갑자기 왜……그런 말을 해……?”

은돈이 더듬거리며 그렇게 묻자, 지세가 고개를 내려 그녀를 응시했다.

“이젠 누나 좋아하지 않으려구요.”

“……”

“……누나라고 부르는 것도 지겨워.”

“뭐?”

“어떻게 불러줄까요. 차은돈 씨라고 불러줄까요. 원하는 대로 해줄게요.”

지세의 가라앉은 어조에 은돈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가까스로 말을 이었다.

“이지세. 갑자기 왜 이래?”

갑자기?

지세가 붙잡고 있던 은돈의 손목을 향해 시선을 끌어내렸다.

“어제 일……기억 안 나죠.”

“어제 일?”

일순 은돈의 동공이 일말의 불안감으로 출렁였다.

“혹시……내가 취해서 너한테 실수한 거 있어? 니가 나 직원 휴게실에 데려다 놓은 거지? 사장님한테 내 핸드폰으로 연락한 것도 그럼 너야……?”

지세가 입을 다문 채 한동안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잠시 후. 거세진 빗소리에 파묻힌 지세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아무것도 기억하지 마요 어제 일. 그냥 이대로 날 모른척하고, 나도 모른척하게 해줘요. 누날.”

“뭐……?”

“누나가 어제 일을 기억하면. 그땐 정말 포기가 안 될 것 같거든.”

“……”

지세가 잠자코 은돈의 손에 자신의 우산을 쥐어주었다.

“안 돌려줘도 돼요.”

곧이어 은돈을 남겨둔 채 그가 빗속으로 돌아섰다.

퍼붓는 빗줄기가 너무 세차서, 지세의 모습이 금방 흐려졌다.

“이지세……?”

혼잣말처럼 그 애의 이름을 내뱉고는 은돈이 멀거니 고개를 숙였다.

보이는 건 새까만 우산 하나.

이지세. 그래 이지세.

언제나 내 앞에서 다정하고 웃어주던 이지세.

그 모습에 너무 익숙해져있어서 지세의 웃음 이면에 어떤 감정들이 숨겨져 있는지 알지 못했다.

아니……알려고 하지 않았어.

“……이대로 모른 척 하게 해달라구……”

은돈이 지세가 사라진 곳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착하다. 순수하다. 잘 웃는다. 자상하다. 다정하다.

그녀가 내린 이지세에 대한 정의는 그랬다.

그게 다였고 전부였다. 단 한번도……지세를 자세히 들여다 본 적 없었다.

그래서, 그가 앞으로 불러올 파장에 대해서도 은돈은 가늠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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