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남자 밥해주기-69화 (69/93)

69화. 쪽팔려 죽을 것 같아유.

“……사장님?”

독현을 발견한 은돈이 깜짝 놀라 외쳤다.

“여길 어떻게 온 거예요?!”

그녀의 질문에 독현이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마치 은돈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처럼, 그의 시선은 오직 소형에게 내리꽂혀 있었다.

평소와 다른 표정, 다른 눈빛. 살벌함을 넘어서 살의가 느껴지는 독현의 시선이 자신을 향하자, 소형이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누나!”

그때였다. 독현의 뒤를 이어 지세가 인력 사무실 안으로 들어섰다.

“이지세?! 너까지 온 거야? 대체 어떻게!? 나한테 뭔 GPS라도 달려있는 거야?!”

“괜찮아요?”

지세가 곧장 은돈에게 다가섰다.

독현과는 정반대로, 지세에겐 오직 은돈의 목소리만 들리고, 은돈의 얼굴만 보였다.

그가 은돈의 팔을 압박하고 있는 줄을 능숙하게 풀었다.

“괜찮아? 괜찮은 거에요? 다친 덴요?”

“없어. 완전 말짱,”

말을 채 잇기도 전에, 지세가 그녀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이, 이지세……”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지?

마치 정지화면처럼 은돈이 딱딱하게 굳은 채 아무런 미동도 하지 않았다.

지세가 그녀를 품에 안은 채 말을 이었다.

“미안해요.”

“니……니가 왜……?”

의아해하는 은돈의 물음에 지세가 짤막한 한숨을 내뱉었다.

“미안해요 정말. 이렇게 될 줄 몰랐어요……”

그가 은돈을 조심스레 품안에서 떼어내며 말했다. 위태롭게 일렁이는 그의 눈빛……

재료 창고의 CCTV 영상을 증거삼아 소형의 목을 조르면, 그녀가 스스로 은돈에게 사과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너무 안일한 생각이었다. 설마 이런 식으로 은돈에게 해코지를 할 줄이야.

지세가 괴로운 표정으로 눈앞의 은돈을 바라봤다.

그즈음, 독현의 고개가 두 사람을 향했다.

지세의 곁에서 억지웃음을 짓고 있는 은돈. 긴장이 한꺼번에 풀린 탓인지 그녀의 어깨가 파들파들 떨리고 있었다.

독현이 다시 시선을 비틀어 소형을 보았다. 그와 동시에 소형이 움찔하며 한 발 뒤로 물러났다.

“다들 옆방에서 뭣들 하는 겨! 여기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게 해달랐잖여!”

“……”

“……”

“다, 다들 뭣들 하는거냐고!”

싸늘한 정적에 당황한 소형이 한 번 더 옆방을 향해 외쳤다.

그때, 옆 방 문이 쾅! 열리며 뱀피 셔츠와 어깨 무리가 후다닥 달아나는 소리가 들려왔다.

“야! 짭새 떴어! X됐다! 째자!”

“뭐여!? 다들 어딜 내빼는겨! 이봐유들! 이봐!”

소형이 바싹 타들어가는 소리를 내질렀다.

그러거나 말거나, 어깨무리가 철제 계단을 한꺼번에 두세 개씩 쿵쾅쿵쾅 내려갔고-

잠시 후. 꽁무니를 빼는 그들의 모습 뒤로 경찰차의 사이렌 소리가 울려 퍼졌다.

“경찰이다! 경찰이야! 브라보!”

팔을 결박당한 닥터 한이 방안으로 쿠당탕! 요란하게 들이닥치며 외쳤다.

그가 바닥에 쓰러진 채 지세와 독현을 올려다봤다.

“지독현 씨! 역시! 당신이 올 줄 알았어요! 당장 그 여잘 잡아요! 그 여자가 사람을 고용해 우릴 납치 감금했습니다!”

닥터 한이 턱 끝으로 소형을 가리켰다.

어깨 무리가 달아나고 졸지에 혼자가 된 소형이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리고 그때.

말없이 서 있던 독현이 기다란 손을 뻗어 테이블 위의 초오 액 병을 집어 들었다.

그의 머릿속으로 약 사십 분 전- 닥터 한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하여간! 나랑 은돈 씨가 여길 나가는 순간, 댁들을 고용한 그 여잔 바로 새 되는 거야! 듣자하니 무슨 독초 액을 가지고 와서 은돈 씨한테 억지로 먹이려는 모양인데……그거 범죄야 범죄!’

독현이 얼어붙은 시선으로 손에 든 초오 액 병을 응시했다.

“……이걸 마시면 어떻게 되는 거지?”

그의 서늘한 물음에, 소형이 입을 뻐끔거렸다. 흡사 절벽 끝에 내몰린 생쥐처럼 그녀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있었다.

“지는 사장님을 위해서 그런거에유. 은돈 언니가 자꾸 주제넘게 사장님을 욕심내니까, 두고 볼 수만 없어서……”

“이걸 마시면 어떻게 되는 거냐고 물었잖아.”

살기가 느껴지는 독현의 물음. 소형의 눈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그러나, 이내 체념한 듯 그녀가 얼굴을 떨구며 솔직한 한마디를 튕겨냈다.

“미각을 잃게 돼유.”

“뭐……?”

“그걸 마시면, 두 번 다시 주방에 서지 못하게 된다구유.”

초조한 낯빛의 소형이 빠르게 다음 말을 이었다.

“진짜로 그걸 사용할 마음은 없었슈. 지는 그냥…… 은돈 언니가 사장님 대신 초오 액을 마실 수 있는지, 없는지 시험해 보고 싶었슈. 언니가 사장님 옆에 있을 자격이 되는지 알고 싶었다구유!”

고조된 그녀의 외침에 독현과 지세, 은돈과 닥터한 모두가 입을 다물었다.

“저 말이 사실이에요? 초오 액?”

지세가 기가 막힌 듯 은돈을 향해 물었다.

은돈은 차마 어떤 대답도 할 수 없었고……지세가 곧 한숨을 내쉬며 다시 소형을 향해 고갤 돌렸다.

“다들 내 테스트 결과가 궁금하지 않아유?”

소형이 붉어진 눈으로 쿡 하고 은돈을 비웃었다.

“언닌……죽어도 사장님 대신 그 독초 액을 먹진 못하겠대유. 언니가 마시지 않으면 분명 사장님이 먹게 될 거라고 말했는데도……마시기를 거부했다구유.”

소형이 독현을 향해 확신에 찬 한마디를 덧붙였다.

“언닌 자신을 희생할 정도로 사장님을 사랑하진 않는거예유.”

“……그래.”

이제껏 말없이 소형을 주시하던 독현이 짤막하게 대꾸했다.

그가 들고 있던 초오 액 병에 다시 눈길을 주었다. 그와 동시에 방안에 숨 막히는 침묵이 감돌았다.

“이걸 마시면 내 옆에 있을 자격이 주어진다는 건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

“그런 식으로 차은돈을 테스트했단 말이지.”

시선을 곧추세운 독현이 소형을 향해 다가섰다. 그리곤 놀랄 새도 없이 그녀의 멱살을 거머쥐었다.

“컥……!”

숨이 막힐 정도로 거세게 멱살을 잡힌 소형이 켁켁대며 독현을 올려다봤다.

코앞에 놓인 그의 얼굴. 맞닿은 숨소리가 너무도 차가웠다. 심장이 내려앉을 정도로.

“크,컥……뭐예유……”

간신히 한마디를 쥐어 짠 그녀를 향해, 독현이 가라앉은 음성을 꺼내놓았다.

“나도 네 자격을 시험해보고 싶어서 말이야.”

“?!”

독현이 자그마한 갈색 병을 들어 올려 소형의 면전에 내밀었다.

“마시라고 하면. 마실 건가?”

“사장님……!”

일순, 등 뒤에서 그를 제지하기 위한 은돈의 외침이 들려왔다.

그러나 독현은 아랑곳 않고 눈앞의 소형에게 몰두했다.

“……마셔.”

뒤이어 차가운 입술 사이로 그 한마디가 떨어졌다.

완연한 명령조. 그 어떤 변명이나 구실도 통하지 않을 만큼 차가운 표정.

소형이 어떻게든 독현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기 위해 상체를 바둥거렸다.

“이거 놔유! 놓으라구유!”

공포에 질린 그녀가 발버둥 치면 칠수록, 독현은 더욱 세찬 힘으로 그녀를 옭아맸다.

“내 옆에서 차은돈을 떼놓는 게 니 소원이라면 들어줄게.”

“이거 놓으라니께유!”

“대신 니가 바닥까지 추락하는 모습을 보여줘. 그럼 그때 원하는 보답을 해 줄 테니까.”

“사……살려줘유! 사람 살려!”

자신을 향한 독현의 환멸어린 눈빛에 소형이 악을 쓰며 부르짖었다.

그때, 보다 못한 은돈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두 사람 곁으로 다가갔다.

“사장님 이러지 마요! 진정하라구요!”

“비켜.”

“!?”

독현을 뜯어말리던 은돈이 일순 멈칫했다.

이성이 아닌 감정에 지배당하는 그의 모습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단순히 겁을 주려는 심산으로 소형에게 초오 액 병을 들이민 게 아니었다.

독현은 정말로 소형에게 독초 액을 먹일 작정이었다.

한 번도 본 적 없던 그의 야멸찬 눈빛에……은돈은 왠지 머리가 멍해지는 느낌이었다.

“아악! 저리 치워!”

일촉즉발의 순간. 소형이 제 얼굴에 드리워진 초오 액 병을 보며 비명을 내질렀다.

그런데 그때, 별안간 지세가 독현의 팔을 강하게 붙들었다.

“그만해요.”

독현이 자신을 제지하는 손길에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은돈의 옆에 붙어 선 지세가 보였다. 순간 묘한 분노가 가슴에 차올랐다.

“떨어져. 차은돈 옆에서.”

너도. 황소형도.

독현이 지세에게 돌아섰다. 그리곤 당장이라도 주먹을 내리꽂을 듯 싸늘한 시선을 빛내는 순간.

“자 다들 스탑. 잠시 검문 있겠습니다~”

방 안으로 배불뚝이 순경 두 사람이 들어섰다.

“사! 살려줘유! 지발 이 사람 좀 말려줘유!”

소형이 기다렸다는 듯 순경들을 향해 외쳤다.

하, 경찰이다……

소형의 요란한 외침을 들으며, 은돈이 곧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

“그러니까, 내 스마트 워치덕분에 우리가 무사히 납치 현장을 빠져나올 수 있었던 겁니다! 하하!”

강북 경찰서.

형사 맞은편에 앉은 닥터 한이 장장 몇 시간째 자신의 영.웅.담을 늘어놓고 있었다.

새벽까지 이어지는 심문과 취조에도 지치지 않은 것은 오직 그 뿐.

닥터 한의 옆으로 나란히 앉은 지세와 은돈, 소형의 모습이 보였다.

“야 임마. 이게 애들 장난도 아니고! 너 진짜 끝까지 잡아뗄래?!”

까치머리 형사 하나가 소형을 향해 언성을 높였다.

“일반인 납치 감금에 폭행. 거기다 스펙타클하게 독초 액까지 등장해주시고. 하하……너 못해도 5년은 감옥에서 썩어야 돼 임마! 근데도 이게 다 너 혼자 벌인 짓이야?”

“몇 번을 말해유. 지 혼자 벌인 짓이라니께. 아, 그리구 5년은 심했네유. 요즘 벌금형 때려도 칠백이면 나올 수 있다던디?”

“이 자식 봐라? 너 뭐 믿는 구석이라도 있냐? 솔직히 불어. 너 뒤에 누구 있지? 누구한테 사주 받고 이런 짓 벌인 거야 엉?!”

까치머리가 살벌하게 외치자, 소형이 뻔뻔스레 얼굴을 쳐들었다.

“다시 말하지만, 지 혼자 벌인 짓이에유.”

이제 와서 자신의 배후에 소라와 지회장이 있었다고 밝힌들, 달라질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 두 사람은 이미 자신들이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어 두었을 것이다.

이제 다 끝난겨. 다 끝났다구.

소형이 헛헛한 시선을 아래로 끌어내렸다. 그때 옆자리에서 은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말 너 혼자 한 짓이야? 아니면 아니라고 사실대로 말 해.”

“……”

“고집부리지 말고 얘기하라구. 이런 엄청난 짓을 저질러 놓고 그렇게 자포자기해서 다 뒤집어쓰지 말고.”

“……언니.”

묵묵히 있던 소형이 입을 열었다.

“착한 척 하지 말어. 꼴 보기 싫으니께.”

“뭐?”

“상대하지 마요. 그럴 가치 없어요.”

그즈음, 은돈 곁에 앉아있던 지세가 서늘한 한마디를 내뱉었다.

소형이 힐끔 그를 보았다. 자신에게는 일말의 시선조차 주지 않고 있는 그였다.

마치 눈조차 마주치기 싫다는 듯한 태도. 어째서 다들 나한테만 매정하게 구는 거여?

“언니는 참 편들어 주는 사람 많아 좋겄어.”

소형이 냉소를 머금은 채 지껄였다.

“나도 내편이 있었더라면. 언니보다 내가 더 낫다고 말해주는 사람이 있었더라면 여기까진 안 왔을텐디.”

“……정말 그래?”

그때였다. 그들의 등 뒤로 독현의 마른 음성이 들려왔다.

“?!”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고개를 돌린 소형의 눈빛이 돌연 굳어졌다.

그녀가 독현과 함께 경찰서 안으로 들어선 박 명장을 바라보았다. 그래, 틀림없는 박 명장이었다.

“……할머니……”

유일한 자신의 편. 은돈보다 자신이 낫다고 말해줄 단 한 사람.

“어떻게 여길……”

소형이 제게 다가오는 박 명장을 동요하는 눈빛으로 쳐다봤다.

이윽고 지팡이를 짚은 박 명장이 그녀의 앞에 멈춰 섰다.

“……많이 야위었다.”

몇 달 만에 본 손녀를 향해 박 명장이 던진 첫마디는 의외로 담담했다.

“사장님 통해서 대충은 들었다. 네가 한 짓에 대해……그래. 나한테 뭐 할 말 없는 거냐?”

“……”

소형이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한 채 독현을 올려다봤다.

“사장님이 연락한 거예유? 그래유?”

“지금 그게 중요하냐?”

박 명장이 단칼에 소형의 말을 잘랐다.

“다시 물으마. 너 정말 이 할미한테 할 말 없는 거야?”

“……없슈.”

크게 갈등하던 소형이 곧 고집스런 한마딜 내뱉었다.

처음으로 자신이 한 짓에 대해 부끄러운 감정이 치솟았지만 절대로 내색하고 싶지 않았다.

나만 잘못한 거 아니잖여. 은돈 언니한테도 분명 문제가 있……

짜악-!

그때였다. 날카로운 마찰음과 함께 소형의 고개가 옆으로 돌아갔다.

눈 깜짝 할 사이 벌어진 일이었다.

지팡이에 몸을 지탱하고 선 박 명장이 있는 힘껏 손녀의 뺨을 내려친 것이었다.

“할머니……?”

아프지 않았다. 연약한 늙은이가 내려친 뺨이 아플 리 없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소형의 눈가에 눈물이 그렁그렁 차올랐다.

뭐지……이제껏 누르고 있던 죄책감이 한꺼번에 밀려들었다. 뭔가에 홀려 있다가, 비로소 정신이 번쩍 든 기분이었다.

그녀가 붉은 손자국이 선명한 자신의 뺨을 쓸어내렸다.

“할머니……맞아유, 사실은 내내 하고 싶은 말이 있었어유.”

그녀가 충동적으로 입을 열었다. 그래. 사실은 꼭 하고 싶었던 말이 있었다.

“……지유……지 정말 쪽팔려 죽을 거 같아유……”

툭- 소형의 눈에서 참고 참았던 눈물이 떨어졌다.

“지는 다를 줄 알았어유……초오 액이 아니라 그 어떤 독약을 들이대도……지는 사장님을 위해서 보란 듯이 먹을 수 있다고……그렇게 믿었어유………그런데……”

소형의 눈앞으로 몇 시간 전 상황이 스쳐지나갔다.

독현에게 멱살을 거머잡힌 채 온몸으로 초오 액을 거부하던 자신의 추한 모습이.

“죽고싶을 만큼 창피해유 할머니……사장님 옆에 있을 수 있는 사람은 나뿐이라고 생각혔는디……아깐 정말 내가 그걸 마시게 될까봐 겁이 났슈……그런 무서운 걸 은돈언니한테 먹이려고 했던 지 자신이……정말 무서웠슈……”

그녀의 뺨 위로 눈물이 계속해서 아롱져 떨어졌다.

은돈이 할 말을 잃은 듯 빤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독현 역시 소형의 얼굴에 시선을 고정했다.

“은돈 언니처럼 되고 싶어서 굶기도 해보고, 화장도 따라 해보고, 머리 스타일도 바꿨는디……아무리 노력해두 언니 자리가 제게 되질 않아유……”

무슨 짓을 해도……사장님을 뺏어 올 수가 없어유……

소형이 울며 그렇게 말하자, 박 명장의 입에서 무거운 한숨이 쏟아졌다.

“은돈 씨.”

곧이어 은돈을 향해 돌아선 박 명장이 천천히 허리를 숙였다.

“미안해요. 내가 대신 사과할게요. 미안합니다.”

“!”

의외의 상황에 은돈이 커다랗게 눈을 떴다.

“미안해요. 날 봐서라도 마음 풀어요. 용서하라고는 안할게요. 하지만……이 아이를, 이 아이가 처했던 상황을 조금만 이해해 줘요.”

“……”

박 명장의 말에 은돈이 뭔가를 말하려다 다시 입을 다물었다.

모두가 침묵하는 사이, 경찰서 안을 메우는 건 소형의 울음소리와, 째각거리는 시계초침 소리뿐이었다.

***

한 시간 후.

“저……이제 그쪽은 가보셔도 됩니다.”

노트북을 두드리며 조서를 작성하던 까치머리 형사가 은돈을 보며 말했다.

“아, 그럼.”

은돈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옆자리에 앉은 소형은 아무런 미동 없이 그저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가지.”

출구에 선 독현이 문을 밀어 열곤 은돈을 돌아봤다.

그를 향해 고개를 끄덕인 후, 은돈이 몸을 돌려 박 명장을 응시했다.

“……명장님.”

어느덧 박 명장에게 다가 선 은돈이 자리에 쭈그린 채 그녀의 주름진 손을 맞잡았다.

“오랜만에 뵙는데……얼굴이 많이 안 좋아지셨어요. 건강……잘 챙기세요.”

“그래요……잘 지내요. 정말 미안해요……”

깊은 수심에 잠긴 박명장이 은돈을 향해 애써 웃었다.

그런 두 사람의 모습을, 저만치에 앉은 소형이 말없이 지켜보았다.

“……”

박 명장의 손을 따뜻하게 거머쥔 은돈의 손.

소형이 시선을 지그시 내렸다.

“……언니.”

다시 몸을 일으킨 은돈이 경찰서를 나가려던 찰나. 등 뒤에서 소형의 음성이 들려왔다.

“……냉장고 전원. 내가 끈 거여.”

“뭐?”

예고 없이 이어진 그녀의 고백에, 은돈의 동공이 부풀었다.

“그 날……언니 실수로 캐비어가 죄다 못 쓰게 돼 버린 날……사실은 내가 고의로 냉장고 전원을 내렸어. 그러니께 사실은 내 잘못이여……언니 때문에 캐비어가 그렇게 된 게 아니여.”

그녀의 말에, 은돈과 독현의 표정이 동시에 굳어졌다.

“……지금 그 얘길 왜 하는 거야?”

은돈이 한참 만에 떨리는 소리로 묻자, 소형이 자조적인 미소를 지었다.

그녀가 곧 미묘한 시선으로 은돈의 얼굴을 찬찬히 훑었다.

“나……절대 사과 안 할겨. 언니한텐 죽어도 미안하다는 말 안 할거라고. 그니께……맘 놓고 나 미워해도 돼.”

사과 안 할 거라구. 그니까 맘 놓고 널 미워하라구……?

은돈이 가볍게 숨을 들이마셨다.

“사과했어도, 어차피 안 받아줬을 거야.”

“……그려. 그렇겠지.”

소형이 고개를 끄덕였다. 은돈이 그녀를 등진 채 차갑게 출구로 돌아섰다.

그러나 몇 발 짝 못 가, 다시 자리에 우뚝 섰다.

“……억지로 굶지 마.”

그녀가 소형을 향해 마지막 한마디를 던졌다.

“처음 레스토랑에 면접 보러 왔던 날 기억 나? 그때가 훨씬 보기 좋았어, 너.”

지금보다 훨씬 뚱뚱했지만, 적어도 그땐 날 흉내 내려다 스스로 발등을 찍는 바보는 아니었으니까.

“……이제부터라도 날 쫓지 말고 니 꿈을 쫓아.”

은돈의 진심어린 충고에 소형이 입을 다물었다.

그녀의 눈앞으로 처음 은돈과 대화를 주고받던 날이 떠올랐다.

‘언니. 나도 노력하믄 달라질 수 있을까유? 언니처럼 예쁘고, 언니처럼 멋진 사람이 될 수 있을까유?’

‘넌 나보다 더 잘해낼 거야 뭐든지.’

‘이……이제부터 언닌 내 롤 모델이여! 나도 차은돈처럼 꾸미고, 입고, 말할 겨! 열심히 노력해서 언니 같은 사람이 되고 말거여!’

“하하……”

과거를 회상하던 소형의 입에서 비참한 웃음소리가 새어나왔다.

“……언니. 잘 살어. 이젠 두 번 다시 나 볼일 없을 거여.”

그녀의 말에, 은돈이 아무런 대답 없이 출구로 다가섰다.

“가요 사장님.”

그녀가 잠자코 문을 열어주는 독현을 지나쳐 경찰서를 벗어났다. 그리곤 이내 모두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사장님.”

자리에 앉은 소형이 은돈을 따라 나서려던 독현을 불러 세웠다.

“마지막으로 할 말이 있는디. 들어줄래유? 내가 왜 그렇게 은돈언니를 따라하고 싶어 했는지. 왜 언니를 밀어내고 사장님 옆에 있고 싶어 했는지……들어줘유.”

그녀가 흔들리는 눈으로 독현을 마주보았다.

이런 곳에서, 이런 식으로 말하고 싶지는 않았지만……그래도 지금이 아니면 기회가 없을 것 같아서.

그녀가 용기를 내 운을 뗐다.

“사장님. 저 실은 아주 오래전부터 사장님을,”

“말하지 마.”

“……”

독현의 날렵한 시선이 소형을 똑바로 향했다. 그가 한 번 더 낮은 어조로 뇌까렸다.

“말하지 마.”

“……”

소형이 말문이 막힌 채 경찰서를 빠져나가는 독현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마지막으로 고백할 기회조차 주지 않다니……”

은돈과 독현, 두 사람이 사라진 문가를 바라보며 소형이 고개를 떨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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