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화. 한밤의 납치 소동.
프레지던트 룸.
털썩, 소파위에 몸을 앉힌 독현이 자신의 앞에 서서 씩씩 대는 소형을 응시했다.
“앉지 그래.”
“좀 전에 밖에서 한 소리가 진짜에유?”
그녀가 좀처럼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한 채 물어왔다.
“사장님, 이제 드실 수 있는 거예유? 지가 만든 음식이 아니라도……정말 먹을 수 있는 거냐구유.”
“그래.”
독현이 짧게 대답했다. 그와 동시에 소형의 동공이 크게 출렁였다.
마치 사랑하는 연인에게 배신이라도 당한 듯, 그녀가 떨리는 음성을 꺼내놓았다.
“그래서……좀 전에 직원들 앞에서 날 망신 준 거였슈? 내 요리 대신 부주의 요리를 먹겠다고? 하!”
그녀가 한 음절, 한 음절 곱씹어가며 서늘하게 말했다.
“필요할 땐 실컷 이용해 놓고선……이젠 지긋지긋한 식이장애에서 벗어나게 됐으니 날 자르겠단 거지유?”
붉게 충혈 된 소형의 눈. 한 손으로 턱을 괸 채 그녀를 지켜보던 독현이 비로소 입을 뗐다.
“난 널 해고하겠다고 한 적 없어. 앞으로도 계속 내 주방에서 일해도 좋아.”
“……”
“물론, 지금 그 자리에선 내려와야겠지.”
날카롭게 덧붙여진 말에 소형의 눈썹이 솟구쳤다.
“나더러 다시 주방막내로 돌아가라구유?”
“넌 처음부터 정식으로 고용된 전담 요리산 아니었잖아.”
독현이 냉담하지만 솔직하게, 그리고 군더더기 없이 말했다.
“차은돈을 대신해서 네가 노력했다는 거 알아. 원래 자리도 되돌아가도 그 노력에 대한 보상은 제대로 해줄 테니 걱정 마.”
보상……? 난 돈 때문에 당신 옆에 있었던 게 아니여.
소형이 형형한 눈빛을 빛냈다.
“지금 제 자리……다시 은돈 언니께 되는 건가유? 아무런 노력 없이, 그저 사장님의 애인이란 이유만으로 돌아오는 건가유?”
가시 돋친 물음에 독현이 잠시 침묵하다 곧 시니컬하게 대꾸했다.
“차은돈 덕분에 지난 이십 년간의 트라우마에서 벗어날 수 있었어. 다른 사람들처럼 평범하게 먹고 마실 수 있게 됐지. 이 정도면 그 여자한테 내린 정직 처분을 철회할 사유론 충분하지 않나?”
그니까 지금, 군소리 말고 차은돈에게 바톤 터치 하란 소리지?
난 처음부터 임시였고, 차은돈 대타였을 뿐이니께?
소형이 분노와 배신감으로 뒤엉킨 시선을 치켜세웠다.
“새로 사람을 뽑는 거믄 몰라도, 은돈 언니한테만큼은 지 자리를 넘겨줄 수 없어유.”
소라에게 받은 초오 액 병이, 그녀의 눈앞에 아른댔다. 손끝이 후들거리고 숨이 가빠왔다.
“지한테 최악의 수가 있다면……그 수를 써서라도 그 언니한테만큼은 아무것도 뺏기지 않을 거라구유.”
전담 요리사 자리도, 사장님도. 절대 뺏길 수 없어.
이윽고 몸을 돌린 소형이 비릿한 조소를 머금곤 문고리를 잡아 돌렸다.
그녀의 머릿속으로 은돈을 ‘제거’할 위험한 계획 하나가 스쳐지나갔다.
독현이 곧 시야에서 사라지는 그녀를 굳은 얼굴로 주시했다.
***
-은돈 씨, 내일부터 다시 출근하는 거야?
행운 빌라. 무선 전화기를 들고 닥터 한과 통화 중인 은돈의 모습이 보였다.
-오너의 식이장애를 낫게 하는데 일조한 공이 있는데. 설마 복직되겠지 안 그래?
들뜬 닥터한의 음성에 은돈이 난감한 듯 미간을 살짝 긁었다.
“돌아가곤 싶지만……제가 사고를 친 게 좀 있어서……”
-아. 그 천만 원짜리 식 자재 손실사건?
“네? 네……그리고 저 대신 사장님 요리를 하는 친구도 따로 있구요.”
-황소형씬 그냥 임시일 뿐이잖아?
“……어떻게 걔 이름 까지 알고 계시죠?”
은돈이 멈칫하며 묻자, 닥터 한이 핫핫핫 호탕하게 웃었다.
-오미자씨가 내 VIP잖아. 어제 종아리에 고주파 받으러 왔었거든.
미자 이년. 주둥이만 똑 떼다가 저울에 달면 반의 반근도 안 나올 년.
“선생님. 그 새털주둥이가 또 무슨 얘길 나불대던가요?”
“으르렁 으르렁대~♫으르렁 으르렁♬”
그때였다. 울리는 벨소리에 은돈이 주머니 속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잠시 후, 한 손은 무선 전화기, 한손은 핸드폰을 든 그녀가 입을 열었다.
“여보세요? 사장님?”
-뭐해. 백수.
“다, 다짜고짜 백수라뇨? 백조죠!”
젠장 붕어빵이나 잉어빵이나.
은돈이 푸 한숨을 내쉬었다.
“백수한테 무슨 볼일이라도 있어요?”
-한 시간 후에 갈게. 같이 저녁 먹자.
옅은 웃음소리와 함께 그가 대답했다.
“아, 저녁이면 좀만 늦게 오실래요? 밥도 새로 해야 하구, 집에 찬거리도 없,”
-아니. 나가서 먹잔 소리야.
“네?”
-근사한 데서 같이 밥 먹은 적 없잖아, 너랑 나.
“아……그거야 뭐……상황이 어쩔 수 없었으니까……”
내내 그런 걸 신경 쓰고 있었나 이 남잔?
“알았어요 사장님. 그럼 준비하고 있을……”
-헤이? 나 아직 안 끊었거든?
그즈음, 은돈이 들고 있던 반대편 무선 전화기에서 닥터 한의 음성이 울려 퍼졌다.
-둘이 저녁 약속 잡는 모양인데, 잘됐네! 마침 내가 오늘 저녁 세미나가 취소됐거든.
“선생님, 아직 거기 계셨어요?”
은돈이 수화기를 바싹 귀에 갖다 대자, 눈치라곤 단 0.1그램도 없는 닥터 한의 해맑은 외침이 들려왔다.
-어디서들 만날 거야? 나도 껴도 되지? 핫핫핫……!
***
“사장님……화난 거 아니죠?”
그날 밤. PM 8:40.
독현이 미리 예약해둔 근사한 레스토랑 대신, 행운 빌라 옥상. 그것도 벼룩시장을 잔뜩 깔아둔 평상 위.
동그랗게 둘러앉은 5인방의 모습이 보였다. 독현과 은돈, 미자와 닥터 한, 그리고 지세까지……
“바람이 이쪽에서 불어서 그런가, 고기가 잘 안 익네!”
버너 불판 위의 삼겹살을 2초단위로 뒤 집으며 닥터 한이 천진난만하게 외쳤다.
은돈이 그를 보며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고, 그 와중에 독현은 자신이 깔고 앉은 벼룩시장을 믿기지 않는다는 듯 노려보고 있었다.
어쩌다 이 어색한 조합의 멤버가 다 같이 옥상 평상에 둘러앉아 고기파티를 벌이게 되었는가.
은돈이 지금으로부터 약 한 시간 전을 회상했다.
“모~야 차은돈? 애인이랑 단 둘이 밥 먹으러 나가는 고야~? 딸꾹! 나 오늘 남친한테 차였는데, 위로주도 같이 한잔 안 해주고 말이야! 말이야, 말이야!”
빌라 입구. 독현의 페라리에 막 올라 탄 은돈이 본 네트 위에 털퍽! 쓰러지는 고주망태 오미자를 벙 찐 눈으로 바라보았다.
“오, 오미자?”
“내려! 내리라구! 어헝! 나만 두고 어딜 가! 못가! 아무데도 못가! 딸꾹!”
심히 취해 보닛 위에 얼굴을 부비 대는 미자를 보며, 은돈이 막 차에서 내려서려던 순간.
이번엔 맞은편 골목길에서 빵빵! 하는 클랙슨 소리가 들려왔다.
“친구들! 나 늦은 거 아니지? 난 온다면 진짜로 오는 놈이거든!”
창밖으로 고개를 쑥 내민 채 경쾌하게 외치는 닥터 한.
이미 1차, 2차로 멘붕이 온 은돈이 독현과 살짝 시선을 공유했다.
“사장님 아무래도 우리 저녁 약속은 무리……”
“벨트 매.”
독현이 결연한 얼굴로 그렇게 중얼거린 후. 후진 기어를 넣고 악셀을 밟았다.
차은돈과의 데이트를 방해하려는 저 난봉꾼들로부터 어떻게든 멀찍이 떨어져야 했다.
그러나…… 빠져나가려던 독현의 페라리 뒤로 곧 익숙한 렉서스 차량 한대가 나타났다.
“지, 지세네요.”
“……이지세?”
은돈의 말에 독현이 눈썹을 확 찡그리며 룸미러에 시선을 고정했다.
그러자 렉서스 차량의 운전석, 한 손으로 핸들을 돌리는 이지세의 모습이 보였다.
“오우! 이런 우연이! 내 사랑 꽃돌이들이 한자리에 다 모였네! 다들 나랑 이별주 마셔주러 온 거죠? 그쵸 맞……죠워어어억!”
신나게 말을 잇던 미자가 짐승 같은 포효와 함께 전봇대 아래 오바이트를 하기 시작했다.
“사장님, 미안해요!”
은돈이 결국 차에서 뛰어내려 미자에게 달려갔다.
페라리 안에 덩그러니 남겨진 독현이 차창 밖으로 보이는 꽐라 오미자, 진상 닥터 한, 불청객 이지세를 차례로 노려보다, 지끈거리는 미간을 한 손으로 뒤덮었다.
……그리하여 한 시간 후. 다시 행운 빌라 옥상 위.
“미자야. 응? 미자야……굳이 이 상황에, 이 멤버로 고기 파티를 열어야 했니?”
은돈의 말에 미자가 딸기코를 티슈로 팽! 풀며 울먹였다.
“넌 친구도 아냐! 어쩜, 내가 실연당했다는데 이별주 한 잔을 같이 못 마셔줘?”
“야! 너 지금 그 이별주 타령만 몇 번짼 줄 알아?!”
“알아 이 호랑말코 년아! 예순 마흔 두 번째 아냐!”
후……도저히 가망이 없구만. 은돈이 쯧쯧 혀를 차며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콧노래를 흥얼이며 고기를 굽는 초긍정주의자 닥터 한이 보였다.
그래 닥터 한이야 그렇다 치고……어째서 지세까지 붙잡아 앉힌 거냐고.
은돈이 싸늘한 냉기류가 흐르는 맞은편 독현과 지세를 바라보았다.
하필이면 둘이 나란히 앉을 건 뭐람. 제발 두 사람 무슨 말이라도 좀 하라고.
그녀가 서로의 반대편으로 시선을 비튼 두 남자를 보며 식은땀을 훔쳤다.
어서 이 침묵의 벽을 깨부숴야 해, 어서!
“지, 지세 넌 웬일로 일찍 퇴근했네?”
은돈이 삑사리 까지 내가며 쥐어짜낸 한마디.
지세가 자신의 어깨에 부담스럽게 기대오는 꽐라 미자를 어쩌지 못한 채, 난감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오늘 비번이어서요.”
“아, 응……그나저나 미안. 괜히 너까지 붙잡혀서 고생이네. 미자 쟤가 원래 술 취하면……”
“알아요. 괜찮아요.”
지세가 이해한다는 듯 스스럼없이 맥주 캔을 집어 들었다.
그리곤 치익- 따서 은돈에게 먼저 건넸다.
습관처럼 몸에 베인, 너무나 익숙한 그의 배려에 독현의 눈썹이 치솟았다.
그가 삐딱한 시선으로 지세가 내민 맥주 캔을 중간에서 낚아챘다.
그리곤 고집스레 캔을 자신의 입가에 갖다 댔다.
지세가 그 모습을 보며 고개를 수그린 채 픽 웃었다.
“정말 드실 수 있네요 이젠.”
“뭐 남들처럼은.”
“잘됐네요.”
“그래.”
……? 뭐야. 그게 다야? 대화 끝이야?
미치도록 형식적인 몇 마디를 주고받는 두 사람을, 은돈이 황당한 듯 바라보았다.
에라이 나도 모르겠다. 그냥 배나 채우자.
곧이어 젓가락을 집어든 은돈이 불판 위의 삼겹살 한 점을 상추 위에 안착시켰다. 그리곤 살짝 쌈장을 올려 그대로 입으로 가져가려다, 멈칫했다.
“사장님……드실래요?”
“뭐?”
독현이 자신에게 내밀어진 상추쌈을 마치 경계하듯 낯선 눈초리로 내려다보았다.
여럿이서 이렇게 평상에 앉아 고기파티를 하는 것도 처음이었지만, 무엇보다 삼겹살은 그에게 너무 이질적인 음식이었다.
어렸을 적, 박명장이 지회장 몰래 집안에서 구워준 삼겹살을 먹고 크게 탈이 난 뒤론 두 번 다시 입도 대지 않았던 것이다.
“자, 아~해봐요. 이게 완전 끝내주는 서민의 맛이거든요.”
은돈의 채근에, 독현이 잠시 갈등하다 결국 체념한 듯 쌈을 받아들었다.
그리곤 조심스레 입에 넣었다.
“어때요? 맛있죠?”
“……”
그녀의 물음에 독현이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치켜들었다.
신선한 충격에 그의 짙은 동공이 놀란 토끼 눈처럼 커다래졌다.
몇 분 후.
“자, 상추는 부드러운 부분이 밖으로 가게 싸는 겁니다. 그래야 입에 처음 들어갔을 때 식감이 훨씬 좋겠죠? 그리고 쌈장은 이만큼, 기름장은 요렇게……”
진지하게 상추쌈 싸는 법에 대해 열변을 토하는 닥터 한과, 초 집중 모드로 팔짱을 낀 채 그 말을 경청하는 독현의 모습이 보였다.
최고급 이태리 산 수트를 입고, 벼룩시장을 깔고 앉은 채 하는 일이 고작 삼겹살 싸는 법 숙지라니……은돈이 어이없는 웃음을 터뜨렸다.
“저기요. 얼른 드시기나 하세요.”
은돈이 젓가락으로 집어든 고기 한 점을 독현의 붉은 입술 안으로 밀어 넣었다.
살짝 미간을 좁힌 독현이 그럼에도 못 이기는 척 고기를 삼켰고, 은돈이 감회가 새로운 듯 그 모습을 한참 바라보았다.
꼭 근사한 레스토랑이 아니라도 좋아. 그냥……이 남자가 이렇게 평범하게 먹을 수 있게 됐다는 사실이 기뻐.
은돈이 푸, 하고 웃었다.
“……”
지세의 다갈색 동공이 어느덧 은돈의 웃는 얼굴을 향해 있었다.
그가 살짝 시선을 끌어내렸다.
“……차은돈. 당장 내일부터 다시 출근해.”
그 즈음, 독현이 은돈을 향해 내내 머릿속을 맴돌던 말을 뱉었다.
“출근이요?”
독현의 예상과는 달리, 은돈의 표정이 미묘하게 어두워졌다.
“저……실은 다시 출근할 용기가 안나요. 면목 없잖아요. 내 실수로 천만 원도 넘는 식자재가 전부 못쓰게 돼버렸는데.”
“누나 탓 아니에요, 그거.”
갑작스레 지세가 은돈의 말을 잘랐다.
“그 일 때문에 죄책감 가질 필요 없어요. 그러니까 다시 출근해요.”
“무슨 소리야……내 탓이 아니라니?”
되묻는 은돈을 향해 지세가 뭔가를 말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자신의 무릎에 누워 잠이든 미자와, 여전히 상추쌈 강의에 열을 내는 닥터 한.
소형의 얘기를 꺼내기에 적절한 타이밍이 아니었다.
“자세한 건 황소형 씨가 직접 얘기 할 거에요.”
“뭐? 갑자기 그 애 이름이 왜 나와……?”
은돈이 의아한 얼굴로 지세를 들여다보았다.
독현 역시 묘하게 굳어진 눈빛으로 그를 응시했다.
그런데 그때, 잠에서 화들짝 깨어난 미자가 큰소리로 고성방가를 시작했다.
“술! 술을 내와라 이 아랫것들아! 술을 내와 술!”
“오미자씨 왜이래! 진정해요 좀!”
당황한 닥터 한이 미자의 어깨를 붙들었다.
은돈이 이미 예상했다는 듯 얼른 몸을 일으켰다.
“물리지 않게 꽉 붙들고 계세요 선생님. 저 후딱 가서 술 사올게요.”
“뭐? 더 먹이려고? 미쳤어 은돈 씨?”
“더 먹여서 재워야 돼요! 안 그럼 우린 아침 해가 뜰 때까지 이 평상 위를 떠나지 못할 겁니다.”
은돈의 경고성 멘트에 닥터 한이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다녀올게요!”
“같이 가지.”
“같이 가요.”
독현과 지세가 동시에 운을 떼며 몸을 일으켰다.
그 순간 미자가 우욱! 헛구역질을 시전하며 두 남자 사이로 털퍼덕 엎어졌다.
“여, 여러분……나 죽을지도 몰라요……등 좀 두드려줘요……우욱!”
미자의 격한 오바이트 소리가 다시금 모두의 귓전을 울렸다.
그와 동시에 은돈이 워, 워하며 두 손을 앞으로 뻗었다.
“사장님, 지세야. 그냥 거기 그대로 계세요. 저 혼자 냅다 뛰어갔다 올게요!”
말을 마친 그녀가 후다닥 빠르게 옥상을 벗어났다.
독현과 지세가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다시금 몸부림치는 미자를 동시에 부축했다.
***
빌라 입구.
밖으로 튕겨 나온 은돈이 옥상을 올려다보며 푸 한숨을 내쉬었다.
오밤중에 이게 웬 난리부르스 윌리스란 말인가.
“하여간에 오미자……음주단속 순찰차를 콜택시마냥 타고 댕길 때 내 알아봤어야 했는데……”
그녀가 설레설레 고갤 내저으며 인근 슈퍼마켓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때, 낡디 낡은 베스타 봉고차 한대가 그녀의 앞에 소리 없이 다가와 멈춰 섰다.
“저기요. 아가씨, 길 좀 물읍시다.”
“네……?”
은돈이 차문을 열고 우르르 내려서는 사내 셋을 주춤하며 바라보았다.
세상에. 저 험상궂은 생김새하며. 뱀피 무늬의 현란한 셔츠하며……
‘이들은 깍두기다.’
순간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은돈이 후읍 긴장된 숨을 들이 마시며 말했다.
“왜, 왜 그러시는데요?”
“혹시……차은돈이란 여자 어디 사는지 아십니까?”
“네?!”
깍두기남에게 심쿵을 당한 은돈이 마치 벌새의 날갯짓 마냥 눈을 빠르게 깜박였다.
“아니 골목이 복잡해서 알 수가 없네. 여기 차은돈이라는 여자 집이 어디요?”
“아……그게……”
정신 차려, 차은돈. 이들은 서프라이즈에서 조폭1,2,3 역을 맡은 재연배우가 아니야.
실제 깍두기라고. 초리얼 깍두기!
다음순간, 은돈이 뻔뻔한 얼굴을 홱 치켜들었다.
“아 은돈이요. 차은돈이~ 걔 이제 여기 안 사는데……”
“안 산다구?”
“저희 윗집 살던 앤데……이사 갔어요. 되게 머나먼 곳으로……”
“아닌데. 분명 여기 어디라고 했습니다 형님.”
형님?
은돈이 저들끼리 낮게 대화를 주고받는 사내 셋을 공포에 질린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럼 전 이만.”
그녀가 태연한척 뒤돌아 걷기 시작했다.
그런데……그때였다.
등 뒤에서 닥터한의 대재앙과도 같은 외침이 들려 왔다.
“은.돈 씨! 왜 전화 안 받아! 오미자 씨가 소맥 말아야겠다고 이슬이 몇 병 사오라는데?”
“헙……”
은돈이 급격히 쪼그라든 심장을 부여잡았다.
그녀가 좀 더 걸음을 빨리하며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기 시작했다.
나는 차은돈이 아니다……나는 저 인간을 모른다……
저 인간이 해맑게 불러제끼는 은돈 씨는 내가 아니다……진짜 아니……
“야! 저 년이 차은돈이다! 저년 잡아!”
“으아악---!”
똥꼬에 화약이라도 단 듯 은돈이 재빨리 내달렸다.
그러나 머잖아 건장한 사내 둘에게 어깨를 붙들린 그녀가 봉고차 안으로 보기 좋게 던져졌고……그 뒤를 이어 닥터 한 역시 은돈의 옆자리로 털썩 떨어졌다.
“이 새끼도 같이 태워야겠죠?”
“아 몰라! 샹, 일단 출발해!”
끼이익----!
잠시 후. 요란한 타이어 마찰음을 내며 은돈과 닥터 한을 실은 베스타 봉고차가 골목길을 내려섰다.
“은돈 씨 얘네 뭐야!? 이것들 뭐야! 당신들 내가 누군 줄 알아! 이 상실할게 없어 겁 대가릴 상실한 친구들! 나 닥터 한이야 닥터 ㅎ……”
“아그야, 반반한 얼굴에 칼집 나고 싶지 않으면 주둥이 오므려라.”
사내중 하나가 닥터 한과 은돈의 주머니를 뒤져 핸드폰을 압수하며 말했다.
그와 동시에 은돈이 폭풍 데시벨을 뽐내며 악을 내질렀다.
“이거 놔! 이거 안 놔! 사장님! 사장님 살려줘요! 아아악!”
“이거 풀어! 이거 못 풀어! 내가 누군데! 나 닥터 한인데! 끄아악!”
목청 좋기로는 어디 가서 빠지지 않는 두 사람의 비명소리가 연신 봉고차안을 윙-윙 울려댔다.
“아 쓰벌. 고막 떨어지겄네. 하필이면 이런 것들을 데려오라고……”
사내 중 하나가 귀를 틀어막은 채 투덜거렸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은돈의 두 눈이 불안하게 일렁였다.
대체 누가 이 인간들을 고용한 거지?
……누가 이런 치졸한 방법을 동원해 날 만나려는 거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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