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화. 정직 처분을 내린 이유.
“뭐하는 거야?”
왠지 비웃음이 서린 음성으로 독현이 물어왔다.
질투와 분노로 뒤엉킨 그의 눈빛이 나란히 서 있는 은돈과 지세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사장님……언제 왔어요……?”
은돈의 벙 찐 물음에 독현이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금방이라도 터질 듯 위태로운 분위기. 은돈이 제 곁에 선 지세를 올려다봤다.
“저기, 먼저 들어가 지세야. 오늘……고마웠어.”
“……”
지세가 대답 없이 독현을 응시했다.
독현의 차가운 시선 역시 자신에게 내리꽂혀 있었다.
잠시 세 사람 사이에 서늘한 침묵이 감돌았다. 결국 한 발 물러서기로 결심한 듯, 지세가 먼저 입을 열었다.
“저 먼저 들어가 볼게요. 잘 자요.”
은돈을 향해 다정한 굿나잇 인사를 뱉는 그를, 독현이 온기 없는 눈빛으로 지켜봤다.
‘제대로 지키지도 못할 거면서 그 여잘 힘들게 하지마세요. 자꾸……주제넘게 상관하고 싶어지니까.’
언젠가 지세에게 들었던 한마디가 귓전을 울렸다.
“정말 주제넘은 짓을 하는군.”
갑작스레 귀에 꽂히는 날 선 음성에, 입구로 들어서던 지세가 우뚝 자리에 멈춰 섰다.
“자꾸만 차은돈 옆에서 질척대는 이유가 뭐야.”
독현이 지세를 향해 물었다. 얼음장처럼 차가운 목소리였다.
질척댄다라.
지세가 고개를 돌려 독현을 똑바로 마주했다.
“이런 식으로 계속 차은돈의 관심을 구걸하는 이유가 뭐냐고 지금 묻고 있잖아.”
무섭게 가라앉은 음성으로 독현이 재차 물어왔다.
지세가 그런 그를 향해 운을 떼려는데, 순간 은돈이 앞으로 나섰다.
“질척이는 것도, 관심을 구걸하는 것도 아니에요 사장님. 오해하지 마요. 내가 먼저 지세한테 부탁 한 거에요. 기분 전환도 할 겸, 오늘 같이 있어 달라구요.”
“기분 전환?”
기가 막히는군. 독현이 한손으로 가볍게 미간을 문질렀다.
그의 헝클어진 눈빛을 바라보던 은돈의 표정이 도리어 차분해졌다.
“지세는 동료일 뿐이에요. 잘 알잖아요.”
“동료……그래. 잘 알지.”
독현이 우습다는 듯 여리여리한 원피스 차림의 은돈을 직시했다.
그의 눈빛이 너무나 매몰차서, 은돈이 뭔가를 말하려다 다시 입을 다물었다.
“친한 동료로, 이웃사촌으로, 좋은 동생으로……이지세를 네 옆에 둘 수 있는 핑계가 생각보다 많군.”
“핑계라뇨?”
은돈이 되묻자 독현의 입 꼬리가 차갑게 치솟았다.
“저 자식이 정말로 너에 대한 감정을 지웠을 것 같아?”
“사장님,”
“너 둔한 거야 아니면 둔한 척 하는 고단수인거야.”
“……”
“도저히 갈피를 못 잡겠단 말이지.”
눈빛을 굳힌 독현이 어느 때보다 싸늘한 어조로 읊조렸다.
그리고는 곧, 그의 입에서 은돈의 가슴을 가르는 한마디가 떨어졌다.
“똑바로 행동해. 중간에서 어설프게 왔다 갔다 하지 말고. 지금 네 모습, 아주 헤퍼 보이거든.”
순간 은돈의 동공이 옅게 떨렸다. 그 모습을 무감정한 표정으로 바라보던 독현이 거침없이 자신의 할 말을 이어 갔다.
“네가 낸 사직서. 수리하지 않기로 했어.”
“……”
“네 잘못에 대한 처분은 내가 직접 결정해.”
“……어떻게 결정했는데요? 자르지도 않겠다, 제 발로 나가는 것도 안 된다. 그럼 대체 날 어쩌려구요?”
은돈이 마른 눈빛으로 독현을 보며 물었다.
그녀가 조금 전 자신의 말에 상처 입었다는 사실을 아는 걸까.
독현이 한동안 아무런 말도, 아무런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곧 그가 지세를 바라보며 다시 냉정하게 운을 뗐다.
“차은돈 넌 삼 개월간 정직이야.”
“정직요?”
“그래.”
독현이 짧게 대답하며 지세에게서 시선을 거뒀다. 그리곤 은돈을 똑바로 응시했다.
“삼 개월 후에 다시 출근할지 말지는 네가 직접 결정해.”
마치 다시 돌아오지 않아도 상관없다는 듯 한 태도.
이윽고 독현이 자신의 페라리를 향해 돌아섰다. 그때, 지세가 단번에 그의 곁으로 다가가 낚아채듯 팔을 붙잡았다.
“굳이 여기까지 찾아와서, 할 말이 그것뿐입니까? 차은돈 씨한테 해줄 말이 그것밖에 없냐구요.”
독현이 자신에게 쏴붙이는 지세를 직시했다.
일렁이는 지세의 연갈색 눈동자. 자신의 팔을 붙잡은 그의 오른 팔.
일순, 같잖다는 생각이 들었다.
차은돈을 대신해서 자신에게 화를 내는 이지세가, 한없이 같잖게 또 하찮게 느껴졌다.
……정말로?
독현이 스스로에게 반문하듯 얼굴을 굳혔다.
정말로 같잖게 느꼈다면 어째서 이렇게 열이 받는 거지?
차은돈과 함께 있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 왜 이렇게 초조한 생각이 드는 거지?
그가 뒤엉킨 감정의 답을 찾지 못한 채 다시 시선을 치켜 올렸다.
이성보다는 감정이 앞선 눈초리였다.
“내 앞에서만 차은돈을 다르게 부를 거 없어.”
그가 조소를 걸친 채 지세를 향해 낮게 지껄였다.
“그냥 평소처럼 누나라고 하지 그래. 그 편이 훨씬 잘 어울리거든. 너한텐.”
말을 마친 독현이 지세의 팔을 냉정하게 떨쳐 내곤 돌아섰다.
잠시 후, 낡은 연립 빌라와는 어울리지 않는 페라리가 골목길을 빠져나갔다.
가로등 아래 남겨진 지세와 은돈이 한동안 멀어지는 페라리를 말없이 바라보았다.
“……괜찮아요?”
한참 만에 지세가 그렇게 물었다.
“야 당연 괜춘하지. 걱정 마. 사장님 원래 한 까칠 하잖아. 나한테 화나서 저래. 내가 멋대로 사직서 내고 도망쳤잖아.”
은돈이 멋쩍은 듯 목을 쓸어내리며 웃어보였다.
“……감싸주지 마요.”
억지로 웃지도 마.
지세가 입을 다문 채 은돈을 바라보았다.
“춥다, 들어갈까.”
곧이어 그녀가 빌라를 향해 몸을 돌렸다.
“당분간 직장동료가 아니라 이웃사촌으로 만족해야겠다 그치. 잘 자, 이지세.”
지세가 뭔가 대꾸하기도 전에, 은돈이 서둘러 빌라 안으로 들어섰다.
머잖아 그녀가 사라진 곳을 바라보며, 지세가 차가운 입김과 함께 한숨을 내뱉었다.
***
“부주. 오늘따라 왜 이렇게 허전하죠?”
주방.
경훈의 물음에 부주가 심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너도 그래? 나도 아침부터 영 의욕이 안 생기네.”
“이거 설마……차은돈이 없어서 그런 거……에이, 아니겠죠?”
“얌마. 차 씨 얘긴 왜 꺼내. 아까 홀 지배인 얘기 들어보니까 걔 삼 개월 정직이라더만.”
“헐. 삼 개월!? 그건 그냥 나가란 소리 아닌가? 와우……우리 사장님, 피도 눈물도 없는 줄은 알았지만 어떻게 자기 애인한테까지……”
“피랑 눈물만 없냐? 싸가지도 없지. 지독현이가 가진 거라곤 요, 얼굴과 돈뿐이야.”
“에구머니…… 부주랑은 정반대네요? 부주는 피랑 눈물만 있고,”
“오케이 거기까지.”
부주가 경훈이 주둥이를 기다란 대젓가락으로 꽉 집으며 말했다.
그때, 와장창! 그릇이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앗 뜨, 뜨! 하는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후우……우리 막내. 왜 또? 이번엔 뭐 쏟았니? 손 데였니?”
부주가 한숨 섞인 물음을 던짐과 동시에 또 한 번, 뭔가가 부서지고 깨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부주! 전 괜찮아유! 살아 있구먼유!”
“그래. 살아있겠지……왠지 넌 지구가 멸망해도 무너진 편의점 속에서 원 플러스 원 초코바를 씹으며 살아남을 것 같다 황 덩치.”
“치, 칭찬이시지유?……헤헤.”
뒤통수를 긁적이는 소형을 보며, 부주와 경훈이 동시에 절레절레 고개를 내저었다.
“하하, 내가 아까 밴드를 어디에 뒀더라……”
소형이 불에 데인 손가락을 움켜쥔 채 급히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에휴, 이럴 바엔 차은돈이 낫지……걔가 좀 엉뚱해서 그렇지 일은 참 빠릿빠릿하게 잘했는데.”
“부주, 전담 요리사 자린 다시 면접 봐서 뽑아야 하는 거 아니에요? 아무리 그래도 사장님 전담인데……황덩치같은 극 초보한테 맡겨도 되는 건가?”
소형이 주변에서 들려오는 조리사들의 핀잔을 못들은 척 애써 입가에 미소를 띠웠다.
그러나 그녀의 표정은 마치 살얼음판을 걷는 아이처럼 위태로워 보였고, 그로부터 정확히 삼십 분 후.
직원 화장실 내부.
둘째 칸에 틀어박힌 소형이 변기를 붙잡고 먹은 음식들을 억지로 게워내고 있었다.
여자 화장실 밖으로 웩,웩 거리는 그녀의 헛구역질 소리가 간간히 새어나왔다.
“후우……”
머지않아 콰앙-! 화장실 문을 열어젖히며 소형이 모습을 드러냈다.
한숨을 내쉬는 그녀의 얼굴엔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그래두……좀 핼쑥해지긴 한 거 같은디 확실히……”
은돈 언니처럼 날씬해져야 돼.
아니, 은돈 언니보다……그 언니보다 훨씬 날씬해야 돼. 뭐든지 그 언니보단 나아야 해.
그래야 사장님 곁에 있을 수 있어.
화장실 세면대 앞에 선 소형이 쏟아지는 물을 끌 생각도 않고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홀린 듯 응시했다.
그리곤 몇 분 후. 비로소 기운을 차린 그녀가 화장실 밖으로 걸음을 내딛었다.
“……헙!? 여, 여기서 뭐하세유?”
여자 화장실 앞.
주머니에 손을 꼽고 선 지세를 발견한 소형의 입에서 짧은 비명이 터져 나왔다.
“뭐, 뭐하고 섰냐니께유?”
혹시 내가 폭토(*폭식후 억지로 음식을 토해내는 행위)했다는 걸 눈치 챘나?
소형이 초조한 눈빛으로 지세를 올려다봤다.
물론 지세 역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떤 동요도 없는, 잔잔한 표정으로.
“여기서 황소형 씨 기다렸어요.”
“……나, 나유?”
이 와중에……자신을 황덩치가 아닌 황소형으로 불러준 사람이 있다는 게 눈물 나게 고마운 이유는 뭘까.
소형이 왠지 찡한 얼굴로 다시 입을 열었다. 조금 전보다 훨씬 누그러진 목소리였다.
“지한테 무슨 볼일이라도……할 얘기 있음 하세유. 다 들어줄,”
“차은돈 씨 일 말인데요.”
“?!”
지세의 입에서 바로 튀어나온 그 이름에 소형의 미간이 굳어졌다.
“은돈 언니……왜유? 뭐유?”
“……솔직하게 대답해줘요.”
“그러니께 뭘유.”
언짢다는 듯 되묻는 소형을 보며 지세가 약간의 텀을 두고 다시 말을 이었다.
“차은돈 씨한테……일부러 전달 안 했죠.”
“뭐라구유?”
“냉장고 온도 센서 결함. 일부러 말 안하고 숨긴 거라면……지금이라도 모두한테 사실대로 말해줘요. 이번 일, 차은돈 씨 잘못만은 아니라고, 있는 그대로 밝혀줘요.”
“……왜……대체 내가 왜 그래야 하는디유?”
소형의 목소리가 살짝 높아졌다.
“네! 지가 은돈언니한티 냉장고가 고장 났다는 말을 못 한건 사실이에유. 하지만 어디까지나 깜빡한 거지, 일부러 전달을 안 한 게 아니라구유. 왜 아무 근거 없이 날 나쁜 년으로 모는 건지 모르겠네유. 참말로 황당하구만!”
“……미안해요. 기분 나빴다면 사과할게요.”
“……”
지세의 말에 소형이 화가 난 듯 입을 다물었다.
아니……사실은 화가 난 게 아니었다. 자신에게 향해 있는 지세의 눈빛을 도저히 똑바로 마주할 용기가 안 나서, 그저 시선을 회피하고 있을 뿐이었다.
지세의 흔들림 없는 눈빛은, 소형이 온도센서 결함을 은돈에게 고의로 숨긴 것뿐만이 아니라, 그 후 그녀가 저지른 비겁한 짓까지도 전부 꿰뚫고 있는 것만 같았다.
“왜유. 냉장고 전원도 내가 몰래 내린 게 아니냐고 물어보시지? 그 정도는 해줘야 진정한 나쁜 년 아니겄슈?”
“……미안해요.”
한 번 더 사과를 건넨 지세가 소형의 얼굴을, 그녀의 찔끔한 표정을, 담담히 내리 훑었다.
속내를 알 수 없는 그의 시선을 견디지 못한 채, 소형이 달아나듯 몸을 돌려 복도를 걷기 시작했다.
“……저기요.”
“아 또 뭐가유!”
찔끔한 그녀가 등 뒤에서 들려오는 부름에 언성을 높이며 돌아 섰다.
그때 곁으로 한 발 다가온 지세가 말없이 손수건을 내밀었다.
소형이 멍하니 자신에게 건네진 손수건을 집어 들었다.
“이건 왜……?”
“닦아요. 얼굴……”
“……?”
소형이 곧 곁을 지나쳐 멀어지는 지세의 등을 의아한 듯 바라보았다.
머잖아, 그녀가 토사물 잔해가 달라붙은 목덜미를 손수건으로 쓸어내렸다.
지세가 자신의 폭토를 눈치 챘다는 사실을 애써 모른 척 하며, 그녀가 킁킁 손수건의 냄새를 맡았다.
“……비누냄새 나.”
은돈 언니. 여기 사람들은 하나같이 따뜻하고 유쾌해. 그리고 다정해.
그래서 더 욕심이 나는 구먼. 미안혀.
“나 꼭 주방에서 필요한 사람이 되고 말겨. 그러니까……다신 돌아오지 마 언니.”
소형이 손수건을 꽉 쥔 채 작게 중얼거렸다. 그리곤 지세의 반대편으로 걸음을 옮겼다.
몇 발짝 걷다 말고 자리에 멈춰 선 지세가, 그런 소형을 묘한 시선으로 지켜보았다.
***
“와우 차은돈……잘린 것도 모자라, 아침 댓바람부터 폭식 대잔치라니……존경한다 친구야.”
in 행운 빌라.
미자가 지글지글 끓고 있는 불판 위 삼겹살을 보며 혀를 내둘렀다.
“아침부터 삼겹살은 좀 오버인가?”
“오바 육바지! 그걸 몰라서 물,”
“미자야. 냉장고에 오겹살 있는데 그걸로 다시 갖다 주겠니?”
“이런 정신 나간 년! 삼겹살이나 오겹살이나! 게다가 그 소름끼치는 말투는 다 뭐야!”
“내가 뭐? 난 멀쩡하단다.”
‘안’ 멀쩡하다고 시위중인 은돈을, 미자가 쯔쯔 혀를 차며 바라보았다.
“아 쫌! 굽지 말라니까 이년아! 아침부터 너 때문에 옷에 고기 냄새 배잖아!?”
“냄새 좀 배면 어때 친구야. 이래야 내 몸에서 나는 백수의 냄새가 좀 중화될 거 아니니!”
“하아. 또라이……그러게 누가 앞뒤 안 재고 사표 던지래?”
“내버려둬. 나 같이 헤픈 여자에게는 방구석이 가장 어울리니까……”
“헤픈 여자? 그게 또 뭔 홍석천 샴푸 광고 찍는 소리야?”
“그냥……그런 게 있어.”
후우……미자의 입에서 깊은 한숨이 터져 나왔다. 그녀가 넋이 나간 채 삼겹살을 케찹에 찍고 있는 은돈을 주시했다.
“아우! 도저히 못 봐주겠다! 야 일어나, 기분 전환 하러 가게! 언니가 널 위해 아낌없이 쏜다!”
휙! 미자가 내던진 성형외과 이벤트 쿠폰이 곧 은돈의 머리위로 팔랑팔랑 내려앉았다.
“이게 뭐……”
“잔말 말고 일어나라니까!”
곧 미자가 바닥에 녹은 치즈처럼 눌어붙은 은돈을 사정없이 일으켰다.
그리고……정확히 한 시간 사십 분 후.
“자, 릴렉스 하시고 시술이 끝날 때까지 한숨 푹 주무시면 됩니다. 전 공짜 쿠폰으로 시술한다고 해서 대충하는 노 양심 의사가 아닙니다.”
강남의 뷰티 클리닉.
‘야매’ 냄새가 풍기는 시술실 침대에 누운 은돈이 얼굴 위로 쏟아지는 조명에 눈을 깜박거렸다.
여긴 어디인가……나는 누구인가……
“미자야. 나 지금이라도 그냥 집에,”
“쉿! 너 우리 노영심 샘 실력을 무시하는 거야? 시술 한번 받아보라니까? 기분이 훨 나아질 거다.”
“저 샘 이름이……노영심? 거참……공짜라고 노 양심으로 대충 시술해 줄 것만 같은 이름이다……”
“입 다물어 입. 너 아예 입이 없다고 생각해.”
미자가 다시 곁으로 다가오는 여의사를 보며 황급히 은돈의 입을 틀어막았다.
“자 오늘 받을 시술은 아주 간단한 피부 레이저 토닝입니다. 요즘 연예인 토닝이라고 많이 들어봤죠? 이게 비타민을 직접 얼굴에 침투시켜서 진피 층의 기미를 없애는……”
블라 블라 이어지는 여의사의 설명에 은돈이 멍하니 되물었다.
“저같이 헤픈 사람이 받아도 되는 시술인가요?”
“네? 헤픈……?”
“아뇨! 선생님! 그냥 시작해주세요!”
미자가 냉큼 은돈의 말을 자르며 여의사의 손을 붙잡았다.
“샘 저 여기 VIP인거 아시죠? 제 친구 제대로, 성심성의껏, 꼼꼼하게 부탁드려요……!”
……한편, 같은 시각.
다원정 프레지던트 룸.
소파에 앉은 독현이 협탁 위에 가지런히 놓인 자신의 핸드폰을 벌써 한참이나 노려보고 있었다.
그의 눈앞으로 어젯밤 은돈을 상처 입히던 스스로의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친한 동료로, 이웃사촌으로, 좋은 동생으로……이지세를 네 옆에 둘 수 있는 핑계가 생각보다 많군.’
‘저 자식이 정말로 너에 대한 감정을 지웠을 것 같아?’
‘너 둔한 거야 아니면 둔한 척 하는 고단수인거야.’
‘똑바로 행동해. 중간에서 어설프게 왔다 갔다 하지 말고. 지금 네 모습, 아주 헤퍼 보이거든.’
하. 그의 입에서 메마른 숨이 옅게 터져 나왔다.
금방이라도 울 것 같았던 차은돈의 얼굴이, 그 표정이 끊임없이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
전화를 해야 할까. 직접 찾아가야 할까. 용서를 구해야 할까. 아니면 이지세와의 관계를 구차하게 물고 늘어지며 그녀에게 더욱 날을 세워야 할까.
갈등 끝에 독현이 번쩍,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그러나 충동적으로 은돈의 번호를 누르려던 손가락은 곧 허공에서 멈칫했고, 그가 핸드폰을 다시 내팽개치듯 내려놓았다.
“사장님……뭐하십니까? 아까부터……”
그때 등 뒤로 들려오는 음성에 독현이 움찔하며 시선을 비틀었다.
그러자 난감해하는 총지배인의 얼굴이 보였다.
“언제부터 거기 있었지?”
“조금 전부터……노크를 해도 대답이 없으시기에……”
“그래. 무슨 일이야.”
자세를 바로 한 독현이 태연을 가장한 채 물었다. 그때 또각거리는 힐 소리와 함께 소라가 안으로 들어섰다.
안 본 사이 더욱 짙어진 그녀의 향수 냄새에, 독현이 살짝 미간을 찡그렸다.
“오랜만이야?”
“……웬일이야. 굳이 여기까지.”
“놀라든지 반가워하든지. 둘 중 하난 해주지 좀?”
소라의 말에 독현이 어떤 제스쳐도 없이 무표정한 얼굴을 유지했다.
눈치를 살피던 지배인이 얼른 문고리를 붙들었다.
“그럼, 이만 나가보겠습니다.”
꾸벅 고개를 수그린 지배인이 사라짐과 동시에, 소라가 소파에 털썩 몸을 앉혔다. 그리곤 요염하게 다리를 꼬며 말했다.
“같이 점심이나 할까하고 들렀어. 요즘 우리, 얼굴 안 본지 꽤 됐잖아.”
“굳이 봐야 할 사인 아니잖아. 우리가.”
독현이 일말의 배려도 없이 그렇게 뇌까린 뒤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나랑은 잠시도 마주앉아 있기 싫다는 건가? 소라가 알 만하다는 듯 소리 없이 웃었다.
그때, 노크 소리와 함께 소형이 이동 트레이를 밀고 안으로 들어섰다.
“나이스 타이밍이네.”
소라가 힐끗 독현을 응시했다.
“나랑 밥 먹는 게 싫으면, 너 먹는 것만이라도 보고 갈게. 듣자하니……네 전담 요리사가 바뀐 모양이던데.”
그녀가 소형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반가워요? 문소라라고 해요. 이 레스토랑 오너의 아주 오랜……친구죠.”
“예? 아……예.”
“흠. 요리 잘 하죠? 전에 있던 요리사보다 훨씬 실력파처럼 보이는데?”
소라가 거대한 소형의 몸뚱이를 훑으며 말했다.
뭐지? 왜 날 모르는 척 하는 거여? 사장님 앞에서 아는 척 하지 말자는 건가……?
‘내가 소형 씨한테 이 레스토랑을 추천했다는 건 모두한테 비밀로 하는 게 좋겠어요.’
언젠가 소라가 했던 말을 떠올린 소형이 곧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리곤 마치 소라를 처음 보는 양 어설프게 인사를 건넸다.
“처, 처음 뵙겄습니다. 지는 황소형이라구……”
“식기 전에 얼른 세팅해요. 그쪽이 만든 음식.”
소라가 소형의 말을 자르며 생긋 웃어보였다. 잠시 벙 쪄 있던 소형이 머뭇거리며 트레이에 담긴 접시들을 소파 협탁 위로 내려놓았다.
그 사이, 소라가 재잘거리며 독현에게 말을 건넸다.
“차은돈이 만든 요리, 입도 못 대게 됐다며? 회장님께 들었어.”
“……”
“네가 걸렸다는 자기 암시, 여간해선 풀기 힘들 거야. 결국 이대로 차은돈은 네 주방에서 영원히 바이바인가?”
“너, 왜 이렇게 말이 많아?”
“뭐?”
“안 본 새 더 최악이 됐군.”
흥, 소라가 코웃음을 쳤다.
“그래서, 차은돈에 대한 처분은? 그 여자 어떻게 됐니?”
“저, 정직 삼개월이유.”
잠자코 곁에 서 있던 소형이 냉큼 대답했다.
마치 칭찬 받길 기대하는 어린애 같은 표정이었다.
소라가 그녀를 슥 올려다본 후, 다시 무심히 시선을 돌렸다.
“삼 개월 정직이라……그건 제 발로 나가라는 소리나 다름없잖아? 웬일이야 지독현. 너답지 않게. 그 여자 일이라면 뭐든 싸고돌 줄 알았더니.”
“아, 은돈 언니가 먼저 보란 듯이 사표를 던졌거든유!”
이번에도 소형이 뿌듯한 얼굴로 독현을 대신해 소리쳤다.
아아, 그래서 그런거였군. 소라가 알겠다는 듯 냉소를 머금었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여길 나가겠다는 차은돈한테 화는 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붙잡고는 싶고. 꽤 심경이 복잡했겠어?”
삼 개월 정직이라니. 소라가 한 번 더 피식 웃었다.
“자존심 지켜가며 그 여잘 붙잡을 수 있는 최후의 보루였구나, 너한텐? 후……구차하네 지독현. 대체 차은돈이 뭐라고.”
일순, 잠자코 듣던 독현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어느덧 그의 입가에도 차가운 조소가 걸려있었다.
“……네 말이 맞아.”
“뭐?”
“자존심 지켜가며 붙잡을 필요 없겠어.”
“……”
“자존심 따윈 진작 버렸어야 했는데. 내가 멍청했어.”
독현이 서늘한 시선으로 소라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곧이어 입구로 다가선 그가 문고리를 비틀어 잡고 방을 빠져나갔다.
얼결에 남겨진 소라와 소형이 할 말 을 잃은 듯 그가 사라진 곳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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