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화. 일탈.
“그게 무슨 소리야? 일을 그만 두겠다니?!”
주방.
조리사들 틈을 비집고 나타난 부주가 은돈을 향해 외쳤다.
“차은돈! 너 뜬금없이 관두겠다는 이유가 뭐야! 설마……캐비어 때문에 나한테 한소리 들었다고 반항하는 거냐?!”
“아뇨, 그런 거 아니에요.”
부주의 말에 은돈이 얼른 손사래를 쳤다.
“사실……캐비어도 캐비어지만, 사장님의 전담 요리사로서 지금 저 자격 미달이잖아요.”
“그렇다고 관둬? 얌마, 책임은 이런 식으로 지는 게 아니야!”
“죄송해요 부주. 그치만 저, 충동적으로 내린 결정 아니에요.”
은돈이 고개를 숙였다. 사실이었다. 충동적으로 사직서를 던진 게 아니었다.
이미 오래전부터, 그만둬야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정확히는 독현이 자신의 음식을 먹지 못하게 된 그 시점부터.
“앞으로도 사장님이 지금과 같은 상태라면, 전……어차피 주방에서 나가야 하는 거니까……”
은돈이 애써 담담히 말을 잇다 모두를 둘러보았다.
서운해 하는 몇몇과, 황당해하는 몇몇이 보였다. 그 와중에 소형은 홀로 싸늘한 표정을 유지 중이었다.
은돈이 다시 부주를 향해 몸을 돌렸다.
“죄송해요 부주. 정말 죄……헙?!”
은돈의 입에서 갑작스런 단말마가 터져 나왔다. 그녀가 자신의 손목을 거머쥔 누군가를 돌아보았다. 지세였다.
지금 막 주방 안으로 들어선 그가 꼿꼿한 시선으로 은돈을 쳐다봤다.
“사관 충분히 한 것 같은데요.”
“뭐?”
“고개. 그만 숙여도 돼요.”
화가 난 듯, 일렁이는 눈으로 은돈을 바라보던 지세가 곧 몸을 돌려 다시 출구로 향했다.
소형이 미간을 찌푸리며, 지세의 손에 끌려 나가는 은돈을 바라보았다.
그때, 드륵 출구가 열리고……
소형을 포함해 주방 식구들의 눈이 커다래졌다.
그들의 시선이 문 밖에 서 있던 독현에게 향했다.
“……”
출구를 가로막은 호리호리한 독현의 실루엣에, 지세가 짐짓 입을 다물었다.
독현 역시 말없이 시선을 끌어내렸다. 그러자 지세에게 붙들린 은돈의 갸날픈 손목이 보였다.
“……비켜 주시죠.”
지세가 먼저 독현을 향해 운을 뗐다.
“그것부터 놓으면.”
독현이 은돈의 손목을 눈짓하며 서늘하게 대꾸했다.
지세가 그의 말에 불복하듯 은돈을 잡은 손에 더욱 꽉, 힘을 주었다.
“아뇨……저기……”
당황한 은돈이 손목을 비틀어 빼내려는데, 지세가 휙 그녀를 이끌고 독현의 곁을 지나쳤다.
이건, 꿈에도 예기치 못했던 상황.
“지세야! 이, 이지세, 왜 이래!”
은돈이 그대로 끌려가며 등 뒤의 독현을 돌아보았다.
경직된 시선으로 자신과 지세를 주시하는 그를.
이게 아닌데. 어째 전개가 이상하게 흘러가는데?!
“지세야. 잠깐만! 잠깐만!”
은돈이 울상이 된 채 지세의 등을 보며 소리쳤다.
그러나 들리지 않는 건지, 아니면 못들은 척 하는 건지. 지세는 더욱 완강히 그녀를 이끌 뿐이었다.
***
“세상에……내가 미쳐……”
다원정과 약 4km떨어진 2차선 도로 위.
렉서스 조수석에 앉은 은돈이 운전대를 잡은 지세를 믿기지 않는다는 듯 바라봤다.
사직서까지 낸 마당에 내가 대체 여기서 뭘 하는 거지?은돈이 푸- 한숨을 내쉬며 지끈대는 머리를 감싸 쥐었다.
“저기. 나 지금 드라이브 할 기분 아니거든……? 그보다. 너 차 샀어? 이 차는 또 뭐야? 혹시 아부지 차 훔쳤어?”
“본가 갔을 때, 키 돌려받았어요.”
지세가 핸들을 돌리며 짧게 대답했다.
“으르렁 으르렁대~으르렁~”
그때, 은돈의 핸드폰이 울리며 액정에 독현의 이름을 대신한 ‘♥’가 빠밤 나타났다.
지세가 유치한 하트 이모티콘에 힐끗, 눈길을 주었다.
은돈이 재빨리 통화버튼을 누르며 핸드폰을 받아들었다.
“여보세,”
-들어 와, 당장.
귓전에 내리꽂히는 독현의 거센 한마디.
그 냉기어린 음성에 은돈이 재빨리 말문을 떼려는데……그때였다.
지세가 손을 뻗어 그녀의 핸드폰을 빼앗아 들고 곧장 전원을 꺼버렸다.
“뭐, 뭐야?”
깜짝 놀란 은돈의 물음에 그가 아랑곳 않고 차창 밖으로 시선을 비틀었다.
“이지세. 왜 이래? 핸드폰 이리 줘.”
“이따 줄게요.”
“아니, 너 왜 이러는데?”
“누나야 말로 왜 이래요.”
“내가 뭘?”
그녀가 되물음과 동시에 끼익-! 지세가 갓길에 차를 세웠다.
그리곤 똑바로 은돈을 응시했다.
“……사직서 냈다면서요.”
아아, 그거로군.
“그것 때문에 이렇게 화가 난 거야? 뭐야. 너답지 않게.”
아무렇지 않은 척, 대수롭잖게 말을 잇는 은돈을 보며, 지세의 시선이 차게 가라앉았다.
“무슨 생각으로 이러는 거예요.”
“……”
“왜 그만두겠다는 거예요.”
지세의 물음에 은돈이 고개를 치켜들었다.
“너도 알잖아. 나 때문에 천만 원도 넘는 캐비어가 전부 쓰레기통으로 직행했다는 거.”
“……”
은돈의 말에 지세가 입을 다물었다. 그리곤 약간의 텀이 이어진 후. 그가 다시 운을 뗐다.
“사장님 때문에 의기소침해 할 필요 없어요. 다시 먹을 수 있게 될 거에요. 누나가 만든 음식.”
은돈이 레스토랑을 떠나려는 이유가 캐비어 때문이 아님을 잘 아는 지세의 입에서 담담한 위로가 떨어졌다.
자신의 속내를 정확하게 꿰뚫는 그를 보며 은돈이 찔끔했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난 괜찮다고, 까짓 거 열심히 노력해서 다시 돌아오겠다고 장난처럼 얘기하고 싶은데……이상하게 입이 안 떨어져.
지세 앞에선 어차피 다 들통나 버리니까. 힘든 데 힘들지 않은 척, 태연한 척 하고 싶지 않아.
“아직 안 늦었어요. 다시 돌아가서 그만두고 싶지 않다고 솔직하게 말해요.”
지세가 핸들에서 손을 떼며 말했다.
“그럼 가벼운 해프닝으로 끝날 거예요. 사장님은……절대로 누날 먼저 해고하진 못해요. 누나가 없으면 안 되니까.”
낮은 어조로 이어진 그의 말에 은돈이 고개를 수그렸다.
“사장님이 날 먼저 내쫓지 못 할 테니까, 내 발로 스스로 나가겠다는 거야.”
“누나.”
“사장님이랑 각별한 사이라고 해서 특별대우 받고 싶지 않아. 너도 알거야. 지금 내 위치가 주방에서 어떤지. 얼마나 애매한지. 나, 더는 폐 끼치기 싫어. 조금 쉬면서 다시 내 자릴 되찾을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할래.”
“……”
지세가 옅게 흔들리는 눈으로 은돈을 응시했다.
잠시 후, 조금은 충동적으로 그의 입술이 벌어졌다.
“날 위해서……그냥 옆에 있어주면 안돼요?”
“……뭐?”
“사장님만큼 나도 누나가 필요해요.”
아니, 어쩌면 사장님보다 더.
“……”
은돈이 눈빛이 가늘게 떨렸다.
분위기가 어색해지려는 찰나, 지세가 누르고 있던 뒷말을 덧붙였다.
“누난……내 하나뿐인 주방 동기니까. 이렇게 관둬버리면, 남은 사람은 너무 쓸쓸하잖아요.”
주방 동기라니. 구차하긴.
그가 자조적인 시선을 끌어내렸다.
은돈이 그런 지세를 지그시 바라봤다. 자신을 정말로 걱정해주는 단 한 사람이 있다면……그건 지세일까, 독현일까.
‘두 번 다시, 내가 널 내 요리사로 고용하는 일은 없을 거야. 지금 그대로 나가면.’
‘날 위해서……그냥 옆에 있어주면 안돼요?’
그녀의 머릿속으로 두 남자의 음성이 울려 퍼졌다.
표현하는 방식은 극명하게 다르지만, 독현과 지세 모두 자신을 염려하고 있는 것만은 분명했다.
“이런 말, 이상하게 들리겠지만……나 그 주방에서 오랫동안 일하고 싶어서, 그래서 그만두는 거야. 이 보 전진을 위한 일 보 후퇴랄까? 꼭 노력해서……어떻게든 방법을 찾아서 다시 돌아올게. 약속해.”
은돈이 지세를 향해 새끼손가락을 치켜 올렸다.
지세가 한숨을 내쉬며 그녀의 얼굴을 빤히 보았다. 그리곤 더 이상 설득할 방법이 없다고 생각했는지, 말없이 그 손가락에 자신의 손가락을 걸었다.
따뜻한 은돈의 체온이 곧 손끝으로 전해졌다.
“좋아. 그럼 얼른 돌아가자. 지금쯤 우리 땜에 주방 난리 났을 거야. 으……부주가 무지 뭐라고 할 텐데 큰일 났다. 사장님 얼굴은 또 어떻게 보지?”
은돈이 불안 초조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지세가 그녀를 바라보다, 곧 다원정과 정반대 방향으로 차를 몰기 시작했다.
“뭐하는 거야? 어디 가?”
지세가 액셀을 밟으며 대답했다.
“우리 일탈하러 가요. 딱 하루만요.”
“일탈?……이, 이러고?”
은돈이 황당한 듯 지세와 자신의 조리 복을 내리 훑었다.
한편……같은 시각.
“전원이 꺼져있어, 음성사서함으로 연결되오니……”
독현이 귓가에서 핸드폰을 떼어내며 미간을 확 찡그렸다.
지세에게 끌려 나가던 은돈의 모습이 눈앞을 자꾸만 아른거렸다.
그 손을 뿌리치긴커녕, 핸드폰까지 끄고 잠수를 탄 그녀가 용납되지 않았다.
“저어……사장님.”
그때 프레지던트 룸 안으로 부주가 들어섰다.
그가 발끝을 세운 채 조심스런 몸짓으로 독현에게 다가갔다.
“사장님. 드릴 말씀이,”
“당신. 늘 타이밍이 안 좋군.”
“헙?! 그런가요?”
화들짝 놀란 부주가 행여 한 대 맞을세라 은근슬쩍 얼굴 위로 가드를 올렸다.
미치도록 비굴한 모습이었다.
“사, 상당히 저기압이신 거 같은데……전 다음 이 시간에 다시 찾아 뵙겠,”
“그냥 얘기해. 용건이 뭐야.”
“아……그게……차은돈 말인데요……사표 수리 하실 겁니까?”
부주가 서슬 퍼런 독현의 눈치를 살피며 말을 이었다.
“무……물론 그 둔탱이가 레스토랑에 금전적인 손해를 끼치긴 했지만, 그래도 그만 두는 건 좀……애가 워낙 평소에 열심이어서……”
“부주.”
“네, 넵?!”
독현이 천천히 책상을 지나쳐 부주의 코앞으로 다가섰다.
섹시하지만 동시에 위협적인 아우라가 그에게서 확 풍겨왔다.
부주가 당황한 듯 살짝 뒷걸음질 쳤다.
“하필 지금 내 앞에서, 차은돈 얘기를 꺼내는 저의가 뭐야?”
“저, 저의라뇨 전 단지……”
“사직서까지 내던지고 나가겠다는 여잘, 내가 왜 붙잡아야 하지? 구차하게?”
“그거야……차은돈이 사장님의……이거니까요……?”
부주가 상콤한 어금니 미소와 함께 자신의 새끼손가락을 팔랑~ 흔들어보였다.
참으로 저급한 그의 제스쳐에 독현의 얼굴이 얼어붙었다.
“사장님……저 이만 나가야겠죠?”
“잘리고 싶지 않으면 그래야겠지.”
“넵. 그럼 이만!”
부주가 물처럼 흐르는 식은땀을 티슈로 찍어 누르며 문가로 달아났다.
잠시 후, 그가 사라지고 난 뒤. 홀로 남은 독현의 입에서 차가운 한숨이 터져 나왔다.
“……”
그가 책상위에 찢어진 은돈의 사직서를 말없이 내려다보다, 곧 고집스레 시선을 곧추세웠다.
***
“받아요.”
번화가 밤거리.
터틀넥 니트 위에 롱코트를 걸친 지세가 들고 있던 쇼핑백을 은돈에게 건넸다.
“이게 뭐야?”
“옷이에요. 그러고 돌아다닐 순 없잖아요.”
지세의 시선이 은돈의 조리복 가슴팍에 묻은 양념 얼룩에 꽂혔다.
“야 그렇다고 옷을 사주는 사람이 어디 있어?”
“받아도 돼요. 선물이니까.”
“선물?”
“네. 누나 주방에서 잘린 기념으로 주는 거예요.”
“얘가, 얘가! 나 잘린 거 아니거든!? 잘 알면서?”
“글쎄요. 어쨌든 누나가 주방을 나가는 건 마찬가지니까요.”
지세가 센치한 시선을 빛냈다.
“받기 싫으면, 내 옷 입어요. 주방에서 밤샘 작업할 때 갈아입으려고 차에 여분 옷 두고 다니거든요.”
그의 말에 은돈이 잠시 망설이다 할 수 없다는 듯 쇼핑백을 받아들었다.
“아냐. 고마워. 잘 입을게. 대신! 선물 받은 기념으로 내가 지금부터 다 쏜다!”
“? 뭘 다……?”
“뭐긴. 니가 일탈하자며. 에이, 이젠 나도 몰라. 사직서 낸 기념으로 일탈인지 하회탈인지 한번 해보지 뭐. 따라 와.”
망측한 하회탈 개그를 던진 은돈이 화르륵 빨개진 얼굴로 지세의 손을 잡아끌었다.
……그렇게, 두 사람의 데이트 인 듯 데이트 아닌 일탈이 시작됐고.
은돈이 가장 먼저 지세를 데려간 곳은 다름 아닌 신길동 매운 짬뽕 집.
“지세야. 이거 국물까지 완뽕하면 벽에 사진 걸어준대. 우리 꼭 성공하자.”
은돈이 눈앞의 불 짬뽕을 내려다보며 후 하, 후 하 심호흡을 연발했다.
제길. 냄새만 맡아도 코 점막이 헐어 붙는 느낌이야. 신선한데?
지세가 쓸데없이 비장한 그녀를 걱정스러운 듯 바라보았다.
“우리 그냥 다른 거 먹으러 갈까요?”
“왜? 스트레스 푸는 덴 매운 게 최고야. 아, 너 이런 거 못 먹는구나?”
우쭈쭈. 은돈이 지세를 놀리듯 말했다.
“역시 애는 애구만. 자 우유 마셔 우유. 속 버릴라.”
지세가 마지못해 은돈이 건네는 우유를 받아들었다. 그리곤 한 모금 마시다, 어이가 없다는 듯 피식 웃었다.
……그로부터 정확히 삼십분 후.
짬뽕 집 문 앞에 초죽음 상태로 떡 실신해 있는 은돈의 모습이 보였다.
그녀의 등 뒤로 무려 ‘완뽕 왕관’을 쓴 지세의 모습이 보였다.
짬뽕집 주인이 들이미는 카메라를 향해 어색하게 포즈를 취한 지세가 곧 왕관을 벗고 은돈에게 다가왔다.
“괜찮아요? 그러게 다른 거 먹자니까. 일어날 수 있겠어요?”
“응? 어 그래! 왕관 멋지더라! 부럽다야!”
무리하게 완뽕에 도전하다 미각은 물론, 청각에까지 손실이 온 것일까.
은돈이 헛소리를 나불대며 엄지를 처덕 치켜들었다.
그 모습에 지세가 웃음을 참으며 손에 든 우유를 건넸다.
“자.”
“때, 땡큐.”
벌컥벌컥, 은돈이 단숨에 우유를 들이켰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지세가 곧 품에서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그리곤 은돈에게 내밀었다.
“받아요. 돌려줄게요.”
“응?”
“사장님……누나 걱정 하고 있을 거예요. 전화해 봐요.”
“아. 응.”
은돈이 우유를 내려놓곤 짐짓 태연하게 핸드폰을 받아들었다.
그러나, 몇 분 후.
“전원이 꺼져 있어 음성사서함으로……”
자동으로 넘어가는 안내 음에 은돈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안 받네. 사장님 전원 나갔나 봐.”
폰을 주머니에 밀어 넣으며 그녀가 어설프게 웃어보였다.
“어……밥도 먹었겠다, 우리 그만 돌아갈까?”
소심하게 이어진 그녀의 말에 지세가 슥- 몸을 일으켰다.
조금만 더 함께 있고 싶다는. 그런 이기적인 마음이 들었다.
주방이 뒤집어지든 말든. 독현이 질투에 눈이 멀어 자신을 해고 하건 말건.
그런 거 하나도 신경 쓰지 않고 그저 은돈과 같이 있고 싶다고, 그렇게 생각했다.
지세가 곧 은돈을 향해 아무렇지 않은 척 입을 뗐다.
“여기보다 더 괜찮은 곳 아는데.”
“응……?”
“스트레스 풀기에 적당한 곳.”
그가 의아해하는 은돈을 보며 씽긋 웃었다.
***
야구 배팅 연습장.
깡-! 소리와 함께 날아오는 공을 능숙하게 내려친 지세가 곧 옆에 선 은돈에게 배트를 건넸다.
“해봐요. 되게 쉬,”
“와 쉽구만! 딱 날 위해 존재하는 게임이네 이거! 우리 점수 내기 할까? 오천 원 빵 어때?!”
“네. 누나 근데.”
“응!”
“……저기 보고 하는 거에요.”
지세가 설레발치는 은돈의 양 어깨를 감싸 쥐고 방향을 바꿔주었다.
그와 동시에 삐,삐,삑! 하고 카운트 다운 소리가 들려왔다.
“자, 잠깐. 나 아직 준비가 덜 됐는데……이거 이렇게 치면 되나?”
“아뇨. 이렇게.”
은돈의 등 뒤에 선 지세가 커다란 두 팔로 그녀의 팔을 거머쥐었다. 그리곤 자세를 고쳐주는데, 그때였다. 휙 날아오는 공을 보며 은돈이 얼결에 배트를 휘둘렀고, 곧 까앙-! 청량한 소리가 귓전을 울렸다.
“나……지금 친 거야? 친 거지?!”
은돈이 감격에 겨워 지세를 돌아보았다.
“잠깐만. 제대로 해볼게.”
은돈이 푸, 호흡을 가다듬고는 배트를 고쳐 잡았다.
지세가 살짝 웃으며 그녀에게서 한발 떨어져 나갔다.
“공을 보고 싫어하는 사람을 떠올려요. 그럼 더 잘 쳐지거든요.”
“그래? 오케이.”
은돈이 비장한 얼굴로 마른침을 삼켰다. 그때, 퉁! 소리와 함께 피칭머신에서 공이 날아들었다.
“죽어라 문소라!”
공위로 소라의 오만한 얼굴이 떠오름과 동시에, 은돈이 격정적으로 배트를 휘둘렀다.
까앙-!
“와우, 빠세 호!”
청명한 소리와 함께 하늘로 치솟는 공을 보고, 은돈이 지세와 기쁨의 하이 파이브를 주고받았다.
그 후……날아오는 공마다 소라, 지명준 회장, 그리고 소형의 얼굴을 대입한 은돈은 연달아 신기록을 경신했고, 그 모습을 지세가 놀란 토끼 눈으로 멀거니 응시했다.
좋아. 마지막 공은 지독현이다.
은돈이 이글거리는 눈으로 달달 거리는 피칭머신을 응시했다.
지독현. 내 음식을 대놓고 거부하는 그대여.
“이거나 먹어라!”
그녀가 악을 내지르며 다시금 배트를 휘둘렀다. 그러나……곧 들려오는 소리는 종전의 ‘까앙’이 아닌 ‘퍼억’이었다.
“헙!”
단말마의 비명과 함께, 은돈이 바닥에 털퍽- 고꾸라졌다.
“내……내 궁둥이……내 히푸……내 대퇴골……”
그녀가 날아오는 공에 타격당한 엉덩이를 부여잡은 채 장렬하게 신음했다.
“괜찮아요?!”
지세가 커다래진 눈으로 은돈의 곁에 주저앉았다.
“어디 맞았어요?”
“여, 여기……”
“좀 봐요.”
그가 무심결에 은돈이 가리키는 엉덩이로 손을 뻗었다. 그러나, 이내 멈칫하며 다시 손을 거뒀다.
그의 귀가 살짝 붉어졌다.
“아 지독현……지독혀어어어언……”
은돈이 제 엉덩이를 후려갈기고 바닥에 떨어진 공을 노려보았다.
‘넌 나한테 안 돼.’
공 위에 아른대는 독현의 얼굴이 자신을 비웃으며 그렇게 말하는 듯 했다.
“으으……”
은돈이 엉덩이를 움켜쥔 채 통한의 아픔을 터뜨렸다.
그때, 고장 난 피칭 머신에서 야구공이 마구 날아들었고, 당황한 지세가 은돈을 재빨리 부축해 일으켰다. 내상을 입은 그녀의 엉덩이엔 여전히 눈길조차 주지 못한 채.
“지세야 저기 공 또 온다! 피해! 엎드려!”
다소 우스꽝스러운 두 사람의 모습위로 은돈의 급박한 외침이 마치 메아리처럼 반복해서 울려 펴졌다.
***
“정말 병원 안 가 봐도 돼요?”
행운 빌라와 인접해 있는 골목 어귀.
핸들을 잡은 지세가 걱정스레 은돈을 응시했다.
“나 정말 괜찮다니까? 아프면 내가 노래방에 갔겠어?”
은돈의 말에 지세가 경이로운 시선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상황에 병원 대신 노래방에 간 건, 진짜 대단했어요. 아무리 누나라도……”
“우리 오늘 제대로 일탈하기로 했잖아.”
일탈……그랬다.
지금으로부터 사십분 전. 노래방 의자에 엎드린 채 바나나 걸의 ‘엉덩이’를 열창하던 은돈의 모습을 떠올리며, 지세가 작게 하하 웃었다.
“다행이에요. 생각보다 누나 괜찮아 보여서.”
“응. 오늘……고마워. 앞일, 뒷일 아무것도 생각 않고 나랑 같이 있어줘서.”
은돈이 잠시 망설이다 어렵게 말문을 열었다.
“요즘 나……정말 힘들었거든. 너한테 전부 다 털어놓을 순 없지만. 하여간 진짜 고마워. 덕분에 스트레스가 싹 풀렸어.”
그녀의 말에 지세가 살짝 미소 지으며 핸들을 돌렸다.
머잖아 행운빌라 앞.
멈춰선 차에서 두 사람이 나란히 내려섰다.
“아. 춥다. 얼른 들어가자.”
원피스 차림의 은돈이 지세에게서 등을 돌리며 먼저 빌라 입구로 향했다.
그때, 잠자코 그녀를 바라보던 지세가 입을 열었다.
“……누나.”
“응?”
“……”
지세가 차마 하려던 말을 뱉지 못한 채 시선을 내렸다.
잘 어울린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
자신이 선물한 원피스를 입은 그녀에게 눈이 부시게 예쁘다는 말이 하고 싶었다.
아주 찰나였지만, 은돈에게 입을 맞추고 싶어졌다.
얼마 남지 않은 오늘 하루, 마지막으로 일탈을 꿈꾸고 싶어졌다.
“뭐야. 왜 불러 놓고 말을 안 해?”
은돈이 피식 웃으며 지세를 올려다봤다.
다음 순간, 지세의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그리곤 뭔가를 말하려는데-
갑작스런 라이트 불빛이 두 사람의 얼굴을 비췄다.
“뭐야?”
은돈이 불빛이 비추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그곳에 세워진 페라리가 보였다.
“사장님……”
깜짝 놀란 은돈이 멍한 소리로 되뇌었다. 그와 동시에, 탁-! 문을 여닫는 소리가 들려왔고 독현이 차에서 내려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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