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컴백 이지세.
“이지세, 너……”
멍해있던 은돈이 지세를 향해 대뜸 다가섰다.
“너 뭐야! 어디 갔다 이제 와!”
갑작스런 그녀의 고성방가에 지세가 놀란 토끼 눈을 해보였다.
“본가에 다녀왔어요. 얘기. 했었는데……”
“얘기 하면 다야! 다냐구!”
“……누나?”
은돈의 붉으락푸르락해진 얼굴을 보며, 지세가 살짝 곁으로 다가왔다.
“왜 그래요?”
“뭐가?!”
“꼭 울 것 같잖아요.”
그가 은돈이 손에 쥔 캔 맥주를 힐끔 보며 말했다.
“무슨 일 있었어요……?”
“있기는……!”
은돈이 차마 다음 말을 잇지 못했다.
취기 때문인가. 뜨거운 뭔가가 가슴 언저리서부터 북받쳐 오른다.
그녀가 찡하게 달아오르는 코를 재빨리 감싸 쥐며 화제를 돌렸다.
“너 말이야 너! 이렇게 무책임한 캐릭터였어? 무슨 놈의 주방 막내가 열흘도 넘게 잠수를 타? 아무리 내가 야속하고 미워도 그렇지!”
은돈의 외침에 지세가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미워 한 적 없어요. 야속하지도 않고.”
그의 짙은 다갈색 동공이 은돈의 얼굴을 조심스레 쓸어 내렸다.
“하여간. 하여간 너!”
순간 말문이 막힌 은돈이 냅다 맥주를 원샷 했다.
지세가 그녀의 맥주 캔을 빼앗았다.
“나 좀 봐요.”
“싫어. 이리 내놔.”
“잠깐 나 좀 봐줘요.”
“……”
지세의 다정한 음색에, 은돈이 고개를 들어올렸다.
다음 순간 두 사람의 시선이 맞닿았다.
“있었네요. 무슨 일.”
은돈을 빤히 보던 지세가 읊조렸다.
“싸웠어요? 사장님이랑.”
“뭐? 아냐.”
“그럼 레스토랑에서 무슨 일 있었어요? 누가 구박해요?”
“구박이라니, 말도 안돼……”
은돈이 애써 태연한 척 시선을 내렸다.
진짜 다 드러나네. 지세가 피식 웃었다.
“일단 들어가요. 추워요.”
그가 빌라 입구를 향해 먼저 몸을 비틀었다.
“너……다시 돌아온 거 맞아? 내가 아는 이지세로……내가 알던 동료로. 동생으로…… 돌아온 거 맞냐구.”
초조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은돈이 그렇게 물었다.
남자가 아닌 동료로, 다시 동생으로 돌아온 게 맞냐고.
“……”
자리에 멈춰 선 지세가 자조적인 미소를 지었다.
“돌아왔어요. 누나가 알던 그 이지세로.”
“……정말이야?”
“정말이에요.”
“진짜?”
몇 번이고 되묻는 은돈을 향해 지세가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그와 동시에 하아……은돈에게서 깊은 안도의 한숨이 쏟아졌다.
“다행이다……”
“……”
“다시 돌아온 거, 격하게 환영해 이지세. 정말 다행이다. 다시 너랑 한 주방에서 일할 수 있게 돼서. 실은 나 요즘 좀 울적했었는데……내일부턴 다시 화이팅 할 수 있을 것 같아.”
홍조 띤 얼굴로 재잘재잘 말을 잇던 은돈이 문득 자신에게 향한 지세의 멍한 시선을 느끼곤 입을 다물었다.
뭐지. 이 목덜미를 간지럽히는 뻘쭘한 기운은.
“그럼 저……나 먼저 들어갈게. 아! 이따가 미자랑 셋이 옥상에서 치맥 파티 할래? 너 다시 컴백 홈 한 기념으루……”
“네.”
지세가 쌩긋 웃으며 대답했다.
이윽고, 그가 빌라 안으로 사라지는 은돈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너……다시 돌아온 거 맞아? 내가 아는 이지세로……내가 알던 동료로. 동생으로…… 돌아온 거 맞냐구.’
귓가를 아른대는 은돈의 목소리.
“……미안해요. 거짓말해서.”
날 동료로 대하는 게 편하다면, 누난 그렇게 해요.
동생 취급 해도 되고, 애 취급해도 돼요. 다 받아들일게요.
지금은 이렇게라도 옆에 있고 싶으니까.
가로등 앞에 선 지세가 차가운 한숨과 함께 시선을 끌어내렸다.
그 무렵, 은돈과 멀어지는 것이 두려웠던 이지세는 자신의 마음 속 깊은 곳까지 들여다 볼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아무에게도 꺼내 보이지 않은, 본인 스스로도 자각하지 못하는 심연 깊은 곳.
그곳은 이미 독현에 대한 원망과 질투심, 은돈을 향한 강한 집착으로 얼룩져 있었다.
다만 지세 스스로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을 뿐.
***
“이지세! 네가 감히 내 메세지를 씹어!? 이거 봐! 아직도 1자가 고대로네! 임마! 너 쿨몽둥이로 맞고 싶지?!”
이른 아침.
부주가 지세의 목덜미를 끌어안고 격한 환영 인사를 건넸다.
“너 계속 잠수 타면 오늘쯤 아주 잘라버리려고 했어 내가!”
말과는 다르게, 지세의 양 뺨을 두드리며 부주가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우하핫! 어쨌거나 잘 돌아왔다 이지세! 그래 다친 덴 괜찮고?”
“네.”
“오 좋아좋아. 오늘부턴 숨통이 좀 트이겠구만. 주방에 막내가 둘이나 되니.”
“……둘요?”
지세가 의아한 듯 묻자 부주가 처덕, 설거지대를 가리켰다.
“저기 봐라. 뭔가 커다란 게 하나 보이지? 인사해. 황덩치라고, 우리 주방 임시 막……”
“어헉!”
부주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와장창 접시를 깨먹으며 소형이 비명을 내질렀다.
그와 동시에 막 조리 복을 갖춰 입고 주방으로 들어선 은돈이 냅다 설거지대 앞으로 달려갔다.
“괜찮아?!”
“괜찮여! 언닌 언니 일 봐! 내가 할게!”
소형이 반사적으로 유리 잔해를 줍는 은돈을 밀어냈다.
“아냐 내가,”
“저리 가라니께!”
꽥 목소리를 높인 소형이 곧 정신이 든 듯 은돈을 바라봤다.
“어, 언성 높여서 미안혀……그치만 이건 내 일이잖여.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할게.”
소형의 말에 은돈이 잠시 침묵하다 응, 하고 대답했다.
그런 두 사람의 모습을 말없이 지켜보던 지세가 곧 입술을 꾹 깨무는 소형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과거의 은돈을 닮아있는 통통한 몸집.
아니, 닮은 것은 비단 몸집만이 아니었다. 은돈을 흉내 낸 헤어스타일과 화장술.
지세가 그녀의 얼굴을 찬찬히 내리 훑었다.
그때 주방 시계 앞에 서 있던 경훈이 머리를 움켜잡고 소리쳤다.
“드디어 공포의 모닝 타임이 왔구나! 과연 누가 겁 대가리 없이 사장님 방에 아침밥을 들일 것인가! 진정한 용자는 과연 누규!?”
호들갑스럽게 외치는 경훈을 보며 뭇 조리사들이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그들의 귓가에 독현의 살벌한 음성이 몇 번이고 리플레이 되고 있었다.
‘앞으로 차은돈이 만든 요리가 아니면 나한테 들고 올 필요 없어. 가져오는 그 즉시, 옷 벗고 이 주방에서 나가게 될 거야.”
“후우……지송해유. 지가 괜히 사장님한테 대드는 바람에……다들 이게 뭔 고생이래.”
“그나저나. 아침을 누가 가져가지? 누가 가져가야 해고를 면할 수 있을까, 응?”
고심하는 부주를 보며 소형이 냉큼 손을 들었다.
“지가 갈까유?”
“어딜 가려고? 옷 벗고 집에 가려고?”
부주의 비아냥에 소형이 멋쩍게 입을 다물었다.
“가만있어 봐. 우리 중에 그나마 사장이랑 친한 사람이 누구지……?”
순간 부주가 포켓몬을 고르는 지우에 빙의 된 양 큰소리로 외쳤다.
“그래 너다! 오늘은 너로 정했다!”
그의 외침에 모든 시선이 한 사람에게 꽂혔다.
***
“……또 너야?”
집무 책상에 앉은 독현이 팔짱을 낀 채 삐딱한 시선으로 은돈을 응시했다.
그녀가 소형이 만든 음식들을 소파 테이블 위에 정성껏 세팅하고 있었다.
“오늘도 안 드실 거죠?”
곧 허리를 피고 선 은돈이 독현을 돌아보며 물었다.
“잊었어? 아무것도 가져오지 말라고 했잖아.”
“먹기 싫음 먹지 말아요.”
은돈이 털썩 소파에 몸을 앉혔다. 그리곤 이어폰을 꼽고 보란 듯 눈을 감았다.
“뭐하는 거야?”
“음악 감상요.”
독현이 헛웃음을 내뱉었다.
“그걸 왜 내 방, 내 소파 위에서 하고 있는데.”
“제가 생각해봤는데요. 부부는 일심동체라잖아요, 우리가 부부는 아니지만 사귀는 사이니까 저도 이제 사장님의 단식투쟁에 동참하려구요.”
“뭐?”
“굶겠다구요. 사장님 따라서.”
“그게 지금,”
말을 잇던 독현이 기가 막힌 지 미간을 거머쥐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은돈은 태연하게 이어폰에서 울려 퍼지는 노래를 흥얼댈 뿐이었다.
“깐풍기, 탕수육, 팔보채, 난자완스, 양장피 맛있다, 맛있다, 맛있다……”
“그거……노랜가 설마?”
“네. 뚱스의 고칼로리요. 제 18번인데요.”
천연덕스러운 그녀의 대답에 독현이 할 말을 잃은 듯 입을 다물었다.
“좋아. 네 맘대로 해.”
이윽고 그에게서 고집스런 한마디가 튕겨 나왔고, 은돈 역시 당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누구 고집이 더 센지 두고 보자고.
그녀가 굳은 결심과 함께 자신의 18번곡을 음산히 읊조렸다.
“치킨, 제육볶음, 맛있다, 맛있다, 맛있다. 아무리 아파도 입맛은 떨어지질 않아, 아무리 힘없어도 먹을 것을 놓진 않아……”
……그로부터 삼십 분 후.
째각, 째각, 째각.
일정한 초침 소리가 들려올 뿐, 적막한 프레지던트 룸 안.
은돈이 지루한 표정을 숨기지 못한 채 집무책상을 바라보았다.
“사장님. 심심한데 우리 끝말잇기나 할까요?”
그녀의 말에 독현이 들여다보고 있던 노트북에서 시선을 거두었다.
“차은돈. 제발 나가.”
“가? 가요톱텐!”
멋대로 끝말잇기를 시작해버린 그녀를 독현이 황당한 듯 직시했다.
이 여자 머릿속을 가끔 해부해 보고 싶다. 게다가 언제적 가요 톱텐인가.
“사장님 텐이요 텐. 없죠?”
“……tension.”
“뭐야. 영어 반칙이에요. 그리고 션으로 끝나는 게 어디 있어요 비겁하게!”
텐은 괜찮고?
절레 절레 고갤 저으며 그가 다시 노트북으로 시선을 옮겼다.
“에잇. 저부터 다시 시작할게요.”
은돈이 목을 큼큼 가다듬곤 이내 입을 열었다.
“사장님. 제발 노트북 그만 보고 밥부터 좀 먹어요. 다 식었잖아‘요’.”
“……”
“뭐해요. 요라니까요. 요.”
독현이 한손으로 턱을 괸 채 은돈의 발랄한 표정을 눈으로 쫓았다.
“요구하지‘마’.”
이내 그가 체념한 듯 운을 뗐다.
“마? 마싰게 좀 먹어주면 어디가 덧나‘나’?”
“나 좀 내버려두‘지’.”
“지?”
지랄하소서라고 하면 무지 화내겠지?
은돈이 미간을 찡그린 채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그때 독현이 옅은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만하지.”
“왜요, 재밌는데?”
“난 재미없어. 너랑 이런 식으로 시간 낭비 하는 거.”
독현이 거침없이 은돈의 곁으로 다가왔다.
이내 맞은편 소파에 몸을 앉힌 그가 앞에 놓인 젓가락을 집어 들었다.
그리곤 은돈에게 건넸다.
“먹어.”
“……명령하지 말,”
“나도 먹을게.”
“……정말이에요?”
독현이 대답대신 앞에 놓인 유부조림을 집어 들었다. 그리곤 입으로 가져갔다.
“어……때요?”
“먹을 만 해.”
그의 간결한 대답에 은돈의 고개가 자신의 발끝을 향했다.
먹을 수 있구나. 내가 만든 음식이 아닌데도.
“소형이가……무지 좋아할 거에요. 얼른 가서 알려줘야 겠어요.”
독현이 애써 밝게 웃는 은돈을 한참 응시했다.
“……이지세. 돌아 왔더군.”
“네.”
일부러 화제를 돌린 독현을 향해 은돈이 이번엔 정말로 밝게 웃어보였다.
“다친 데도 다 나았고. 컨디션 최강이래요. 의욕이 막 불끈불끈 넘치나 봐요.”
“……그래?”
역시나다.
차은돈을 웃게 하는 덴 이지세만한 게 없다.
그 사실을 알면서 이용한 건 본인이면서 왜일까. 은근 열이 받는 건.
“내가 궁금한 건 이지세의 컨디션 따위가 아냐.”
독현의 입에서 퉁명스런 한마디가 뱉어졌다.
“만약 이지세가 아직도 너한테 마음이 있다면,”
“아니거든요!”
은돈이 재빨리 그의 말을 가로막았다.
“행여나 지세 괴롭힐 생각 마세요. 걘 더 이상 날 여자로 의식하지 않으니까.”
괴롭혀? 그녀의 엄포에 독현이 픽 웃었다. 심술궂은 웃음이었다.
“네가 그렇게 말하니까 무슨 수를 써서라도 괴롭히고 싶어지는데.”
사악하게 크리스탈 컵을 집어들며, 그가 말했다.
이 인간이 진짜. 일부러 더 삐딱하게 굴고 있어.
은돈이 마음에 안 든다는 듯 독현을 노려보았다. 그리곤 다시 말을 이으려는데.
똑똑, 무거운 노크소리와 함께 총지배인의 얼굴이 나타났다.
“저기……사장님. 손님이 오셨는데……”
손님? 은돈이 의아한 듯 지배인을 바라보았다.
독현 역시 날카로운 시선을 비틀었고, 그때.
“하하. 내가 손님인가?”
엄청난 위압감을 선사하며, 지명준 회장이 프레지던트 룸 안으로 들어섰다.
“흠……”
그가 마주앉은 은돈과 자신의 친 손주를 바라보았다. 뒤이어 나이를 무색케하는 그의 날렵한 시선이 테이블 위에 차려진 황소형 표 음식에 내리꽂혔다.
“두 사람 연애‘질’하는데……내가 방해가 된 모양이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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