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남자 밥해주기-52화 (52/93)

52화. 차은돈 대신 황소형.

“차은돈 네 요리. 못 먹어 이젠.”

지금……이 남자가 뭐라는 거야?

은돈이 벙 찐 얼굴로 손에 든 접시를 탁, 내려놓았다.

“내가 만든 음식을……왜요? 왜 못 먹는데요? 체했어요?”

“……”

그녀의 순진한 물음에 독현이 뭐라고 대답해야할지 몰라 입을 다물었다. 난감했다.

자신이 어떻게 하면 차은돈이 상처받지 않고 이 상황을 넘길 수 있을까.

“……차은돈.”

쨍그랑-!

그때 문 밖에서 날카로운 소리가 들려왔다.

“지, 지송해유!”

반쯤 열린 문틈 사이로 소형의 펑퍼짐한 엉덩이가 보였다. 그녀가 바닥의 유리잔해를 재빨리 쓸어 모았다.

“지가 일부러 엿들으려고 한 게 아니라……! 하여간! 지송해유!”

당황한 기색의 소형이 황급히 몸을 돌려 뒤뚱뒤뚱 달아났다.

그와 동시에 숨 막히는 정적이 룸 내부를 감돌았다.

“……사장님.”

한참 만에 은돈이 말문을 열었다. 그녀의 시선이 식어버린 음식을 향했다.

“저 솔직히 지금 좀 혼란스럽거든요……? 갑자기 내 요릴 못 먹는다는 게 무슨 의민지도 잘 모르겠고……생각을 좀 정리할 시간이 필요해요. 혼자서요……”

“……그렇게 해.”

독현이 몸을 일으켰다.

“아뇨, 제가 나갈게요.”

은돈이 표정을 가다듬곤 한 발, 문으로 다가섰다.

이내 사라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독현이 경직된 미간을 문질렀다.

“……”

말하지 말았어야 했나.

차은돈의 놀란 얼굴이 눈앞을 아른거렸다.

하지만……당장 상황을 모면한다고 해도 어차피 들통 날 일이었다. 음식에 대한 거부반응은 그의 의지만으로 어쩔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미 눈치 채고 물어오는 은돈을 계속 속일 수는 없었다.

그가 시선을 낮추고 테이블 위의 음식들을 둘러보았다.

역시나 보는 것만으로 거부감이 밀려들었다. 인정해야 했다. 차은돈의 음식은 역했고, 거북스러웠고, 그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한심하긴.”

독현이 약해빠진 스스로를 힐난하며 테이블에서 시선을 거두었다.

***

“다들 수고 많았다! 내일 봅세!”

그날 밤.

후문에서 뿔뿔이 흩어지는 직원들 사이에, 우두커니 넋을 놓고 선 은돈이 보였다.

“수고 하셨습니다아……”

모두가 가버리고 난 뒤에야, 그녀가 어벙한 한마디를 튕겨 냈다.

그리곤 흐느적 흐느적 걸음을 내딛는데, 일순 통로 앞에 세워진 페라리가 시야에 들어왔다.

“……안가고 여기서 뭐해요?”

그녀가 차에서 내려 선 채 자신을 바라보는 독현에게 물었다.

그는 대답 없이 은돈의 푸석해진 얼굴을 그저 들여다 볼 뿐이었다.

“……데려다줄게.”

곧 그의 벌어진 입술 사이로 나직한 한마디가 떨어졌다.

……그로부터 삼십분 뒤.

도로 위를 가파르게 달리는 차 안.

“그러니까, 온몸으로 내 요리를 거부하는 이유가……사장님이 최면에 걸렸기 때문이라구요? TV에 가끔 나오는 레드 썬! 그거?”

“일종의 자기 암시라고 하지.”

독현이 핸들을 꺾으며 말했다.

“자기 암시요? 차은돈이 만든 음식을 절대 먹지마라 뭐 그런 건가? 그래서 내가 만든 건 삼키지도 못하고, 쳐다보는 것만으로 구역질이 난다 이거죠……?”

“그래.”

독현의 짤막한 대답에 은돈이 놀란 입을 다물었다.

“그 증상이……얼마나 지속 되는데요? 사라지긴 한데요?”

“글쎄.”

“방법은 없는 거예요? 다시 이전으로 되돌릴 수 있는 방법요.”

“지금으로선 없어.”

너무도 솔직한 답변에, 은돈의 고개가 곤두박질 쳤다.

“회장님이……날 어지간히도 미워하시나 봐요. 이런 방법까지 동원한 걸 보면.”

얼마나 날 당신 손자 곁에서 떼어내고 싶었으면……

그녀가 깊은 한숨과 함께 창에 쿵, 가볍게 머리를 찧었다. 정면을 주시하던 독현이 힐끗. 고개를 돌렸다.

“누가 널 어떻게 생각하든 신경 쓰지 마. 나 외의 인간들한텐 신경 꺼.”

어차피 내가 좋아하는 건 너니까.

직설적이고 다소 오만하기까지 한 독현의 한마디가 은돈의 귓전을 울렸다.

“알아요. 사장님 생각이 제일 중요하다는 거. 사장님만 날 좋아해주면 된다는 거.”

하지만……그녀가 말끝을 흐렸다.

테이블 위의 음식들을 혐오스럽게 바라보던 독현의 눈빛을 잊을 수가 없었다.

“이상해요. 사장님이 내 요리를 거부한다는 게……놀랍기도 하고, 속상하기도 하고…… 왠지 내 존재이유가 송두리째 사라져버린 것 같은……”

끼이익-! 그때였다. 독현이 거칠게 차를 멈춰 세웠다. 그리곤 지쳤다는 듯 핸들에 고개를 파묻었다. 그의 입에서 마른 한숨이 뱉어졌다.

“니가 요리를 잘하건 엉망으로 하건, 상관없어.”

“……”

“내가……이대로 계속 먹지 못하게 된대도 상관없어.”

굶어 죽어도 돼.

독현이 고집스레 뒷말을 덧붙이며 은돈을 빤히 보았다.

“그러니까 그냥 옆에 있어.”

“사장님,”

그녀가 뭔가를 말하려다, 그만두었다.

지금 누구보다 이 상황이 어이없고 혼란스러운 건 아마도 그겠지.

“……네. 옆에 있을게요. 사장님 옆에.”

담담한 듯, 그러나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독현이 잠시 은돈을 응시하다, 핸들을 꺾으며 가속 페달을 밟았다.

이윽고 두 사람을 태운 페라리가 다시 밤 도로 위를 달리기 시작했다.

***

AM 8: 00.

편한 니트 차림의 독현이 대리석 식탁 위에 빼곡히 차려진 음식들을 주시했다.

은돈이 냉장고에 넣어둔 걸 죄다 꺼내 펼쳐 둔 덕분에, 식탁은 팔 하나 걸칠 여유조차 없었다.

털썩. 자리에 앉은 독현이 일체의 망설임 없이 젓가락을 들어 올렸다.

뒤이어 앞에 놓인 전복초를 집어 입으로 가져갔다.

“……”

순간적인 정적이 흐른 후. 그가 전복을 티슈로 감싸 뱉어냈다.

참을 수 없이 비릿한 맛이 입안을 맴돌았다.

다시.

독현이 포기하지 않고 이번엔 다른 반찬을 집어 들었다. 그러나 입에 갖다 대는 순간, 급격한 메스꺼움이 찾아왔다. 치미는 구토증상은 곧 저릿한 통증으로 변해 가슴을 짓눌렀다.

이성이 마비되고 숨이 막혔다. 그가 다급히 물 잔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한참 만에 겨우 진정이 된 듯, 얕은 숨을 터뜨렸다.

어째서 안 되는 거지.

그가 눈앞의 접시를 답답한 듯 바라보다, 다시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그 후, 수 십 가지의 음식을 삼키고 티슈로 감싸 뱉길 몇 번이나 반복했을까.

탁-! 그가 던지듯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갖은 애를 써도 상황은 나아지지 않고 있었다. 하긴. 무려 20년간 자신을 집어 삼킨 이 괴물 같은 병이 잠깐의 노력으로 고쳐 질 수 있을 리 만무했다.

하지만……

‘네. 옆에 있을게요. 사장님 옆에.’

그 말을 뱉을 때, 차은돈의 표정은 미묘했다.

자꾸 그 표정이 떠올라서, 도무지 다른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

그가 눈앞의 접시를 서늘하게 노려보았다. 그리곤 다시 제 앞으로 슥 끌어 당겼다.

한편, 같은 시각.

주방 입구에 선 은돈이 왠지 안으로 들어가지 못한 채 후,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평소처럼 하는 거야. 평소처럼.”

이내 그녀가 힘차게 문을 밀어 젖혔다.

“좋은 아침 입!……니다……”

기세 좋게 외치던 은돈이 냉랭한 주방 분위기에 입을 다물었다. 모두가 자신을 향해 걱정스런 눈길을 보내오고 있었다.

“왜, 왜들 그래요? 부담스럽게……제 얼굴에 뭐 묻었어요?”

은돈이 불안한 눈초리로 자신의 매무새를 훑었다. 키스마크 위에 붙인 밴드를 점검하는 일도 잊지 않았다.

“언니! 미안혀!”

그때, 뚱녀 소형이 푸다닥 은돈에게 달려들었다.

“부주방장님이 자꾸만 캐물어서……어쩔 수 없이 말해 부렀어……”

“……뭘?”

은돈이 되묻자, 부주가 대신 목소리를 높였다.

“야! 사실이야? 너 사장한테 퇴짜 맞았다면서! 네 요리! 이젠 아예 삼키지도 못한다며!”

아……그거.

은돈이 제 앞에서 어쩔 줄 몰라 하는 소형을 바라봤다. 그리곤 차분히 대답했다.

“네……뭐. 어쩌다보니 그렇게 됐네요.”

“어쩌다보니? 너 지금 그런 태평한 소리가 나와? 그거 뭐, 고칠 순 있는 거야?”

“글쎄요……”

“무슨 대답이 그래! 이 말미잘 같은 자식아!”

부주가 목에 매단 조리 타이를 신경질적으로 끌러 탁! 바닥에 던졌다.

“차은돈! 넌 몰라 임마! 네가 나타나기 전까지 사장이 얼마나 우리한테 포악질을 부렸는데! 그놈의 식이장애 때문에 접시를 있는 대로 깨부수고! 폭군이 따로 없었다니까! 흡사 히틀러 잘생긴 버전 같았다고!”

부주가 질린다는 듯 몸서리를 쳤다. 그의 눈앞으로 소싯적 까칠했던 독현의 잔상들이 차례로 스쳐 지나갔다.

‘지금 이따위 걸 나더러 먹으란 소린가?’

‘이렇게 질 떨어지는 요릴 내 앞에 내오는 저의가 뭐지?’

‘분명 몇 번이나 얘기했던 것 같은데. 적어도 사람이 먹을 수 있는 음식을 가져 오라고.’

‘하나같이 진부하고 저급하잖아. 안 그래, 부주?’

“안 그래! 안 그래!”

부주가 자신의 흑 역사를 잊으려는 듯 격정적으로 외쳤다.

그의 옆에 선 경훈이 어깨를 파르르 떨며 중얼거렸다.

“사장님 병이 도진 거면. 레스토랑에 다시 한 번 피바람이 불겠네요. WOW……미리 써둔 사표가 드디어 빛을 발할 때가 된 것 같아요, 부주.”

“야 너 몇 장 있냐? 나 한 장만 사자.”

부주가 초조한 기색으로 경훈에게 달라붙었다. 그런데 그때,

“저기……”

웅성거리는 조리사들 틈으로 소형이 한 발 다가섰다.

“지가 이해력이 쪼께 딸려서 그란디유……지금 상황이 뭐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더듬더듬 말을 잇는 그녀의 얼굴위로 모두의 시선이 내리꽂혔다.

은돈 역시 고개를 돌려 그녀를 응시했다.

“……그래……그래! 황 덩치! 아니, 황 소형! 니가 있었지!”

부주가 격앙된 외침을 내지르며 소형의 어깨를 덥석 붙들었다.

……그로부터 한 시간 후.

소형을 둘러 싼 조리사들이 아낌없는 격려와 응원의 메시지를 보내고 있었다. 그녀의 손엔 지금 막 오븐에서 꺼내 든 궁중 해산물 리조또가 들려있었다.

“그래 황소형! 우리 임시 막내! 비록 지금은 임시지만, 혹시 아냐? 이참에 너도 차은돈처럼 사장님의 전담 요리사로 레벨 업 하게 될지.”

부주의 말에 소형이 잔뜩 긴장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근디……사장님이 지 요리를 맘에 들어 하실까유……?”

“면접 때 분명 네 요릴 거부감 없이 드셨어. 그게 운이 아니었길 비는 수밖에.”

“부주! 사장님 출근 완료!”

그때 경훈이 주방 안으로 들이닥치며 외쳤다.

“오케이. 황 덩치. 아니, 황 소형. 지금으로선 니가 우리 다원정의 유일한 희망이다. 알아들어? 네가 차은돈 대신이라고.”

“지가 은돈언니 대신이라구유……?”

“그래. 자, 가라 황 덩치! 아니 황 소형!”

“아, 알겄슈!”

결의에 찬 소형이 쿵, 쿵 발을 구르며 주방 출구로 다가갔다. 그리곤 휙! 문을 열어젖힌 순간, 안으로 들어서는 은돈과 맞닥뜨렸다.

“어……언니……”

“응.”

은돈이 그녀 손에 들린 리조또를 내려다보았다.

그와 동시에 소형이 죄진 사람처럼 쭈뼛 대며 머리를 긁적였다.

“저기……미안혀. 나도 갑자기 등 떠밀린 거라…… 임시주제에 시키는 걸 거절할 수도 없고……”

소형이 은돈에 대한 미안함으로 말끝을 흐렸다.

“근디 나, 언니 자리 넘볼 생각 진짜 털끝만치도 없어. 진짜, 진짜여……”

은돈이 가볍게 떨리는 그녀의 동공을 마주보았다.

“……고마워.”

잉……? 의외의 한마디에, 소형이 동그랗게 눈을 치떴다.

“고마워?”

“이럴 때 너까지 없었어봐. 사장님 꼼짝없이 굶었을 텐데.”

“언니……”

“주방에 니가 있어서. 날 대신할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해. 진심이야.”

이……이 언니 완전 날갯죽지 없는 천사 아녀?

소형이 감동한 듯 눈을 깜박였다.

“기둘려 언니! 나 언닐 봐서라도, 꼭 빈 접시 들고 금의환향 할 테니께!”

그녀가 비장한 얼굴로 리조또 접시를 치켜들었다.

잠시 후. 주방을 떠나는 소형의 뒷모습을 보며, 은돈이 살짝 고개를 떨궜다.

***

프레지던트 룸.

“……”

“……”

무거운 정적에 휩싸인 내부. 우두커니 선 소형이 집무 책상 위에 걸터앉은 독현을 응시했다.

“저기……”

어깨를 짓누르는 묘한 압박감 속에서 그녀가 입을 열었다.

“저기. 아, 아침 드세유……”

타악. 소형이 쟁반에 받쳐 든 리조또를 조심스레 책상위에 내려놓았다.

그와 동시에 서류를 넘기던 독현의 손길이 멈칫 했다.

“……뭐야?”

착 가라앉은 물음에, 소형이 마른침을 삼켰다. 아슬아슬 살얼음판 위를 걷는 기분이었다. 독현의 태도는 예상했던 것 보다 훨씬 더 매몰찼다.

어떻게 해야 나에 대한 경계를 풀까.

그녀가 곧 좋은 생각이 난 듯 입을 놀리기 시작했다.

“사, 사장님. 기억나유? 어릴 때……내가 오빠 오빠하며 사장님 뒤만 졸졸 따라다녔던 거.”

“……”

“여름 방학 때마다 우리 시골집에 내려 왔던 거. 기억 안 나유? 울 할무니, 아니 박 명장님 따라서! 그때, 사장님이 할무니 곁에서 안 떨어지겠다고 똥고집 피우던 것만 생각하면……”

풉 웃으며 말을 잇던 소형이 일순 긴장한 듯 고개를 세웠다.

그러자 비스듬히 책상 위에 걸터앉은 채로 자신을 주시하는 독현이 보였다.

“기억……안 나쥬?”

“기억나.”

“나유?”

“그래. 전부 다.”

그가 시니컬하게 대답했다.

“아, 다행이다……나 혼자만 오빠를, 아니 사장님을 기억하는 줄 알고……가슴이 조마조마 혔었는디.”

소형이 독현의 앞에서 본격적으로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실은 지유……사장님 때문에 요리 시작한 거 거든유. 울 할무니가 만든 음식이 아니면 먹지 못하는 사장님 보면서……꼭 돕고 싶었달까. 물론 그땐 내가 진짜로 요리사가 될 줄 몰랐지만! 헤헤……이렇게, 이런 모습으로, 사장님이랑 다시 만난 게 꿈만 같아유. 가슴이 너무 떨리,”

“그래서?”

“네……?”

“그쯤하지. 무슨 사랑 고백 같군.”

한동안 지그시 그녀를 지켜보던 독현이 단번에 말을 잘랐다.

“아……지송해유.”

화르르 얼굴을 붉힌 소형이 재빨리 자신의 리조또를 가리켰다.

“대하 육수로 맛을 낸 궁중 해산물 리조또에유! 시장하실 텐디 얼른 드세유.”

“……”

독현이 책상 위의 음식 접시로 말없이 시선을 내렸다. 꽤 그럴싸한 모양새였다.

잠시 둘 사이에 침묵이 흐르고……소형이 곧 접시를 집어 드는 독현을 떨리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약 십 분 후. 주방.

소형의 무사귀환을 기다리는 조리사들과, 홀로 육수 통을 닦는 은돈의 모습이 보였다.

그때, 입구가 열리고 소형이 들어섰다.

“오! 어떻게 됐어!”

부주의 외침에, 그녀가 풀이 죽어 접시를 내보였다.

“……뭐야. 입도 안 댔네.”

빼꼼 고개를 내민 경훈이 쟁반위의 식어버린 리조또를 보며 말했다.

“그게……이런 기본도 안 돼 있는 요리는……안 드시겠다고……”

소형이 모기만한 소리로 말을 잇자 동시에 주방이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뭐야. 진짜 다시 시작된 거야? 지독현의 지독한 꼬장이?”

“아냐. 아직 속단하긴 일러.”

부주가 애써 모두를 위로했다.

“우리에겐 아직 두 번의 기회가 남아있다. 점심때 승부를 보자고. 황소형. 너무 주눅 들지 말고! 차은돈은 너보다 더한 굴욕도 숱하게 견뎌냈어!”

부주의 말에 소형의 시선이 설거지대를 향했다.

그러나 은돈의 얼굴은 산더미처럼 쌓인 접시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

모두의 시선이 자신을 향해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은돈이 접시를 닦다 말고 후.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은돈과 부주, 그리고 모든 조리사들은 독현이 머잖아 소형의 요리를 받아들일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고 있었다.

그러나………PM 12:05. 또 다시 입조차 대지 않은 요리를 들고 소형이 주방으로 돌아왔을 무렵. 주방 식구들의 눈빛이 극심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사표 사실 분? 삼백 원에 한 장요.”

경훈이 초점 없는 눈으로 봉투를 흔들어 댔다.

“자자! 됐어! 괜찮아! 우리에겐 아직 저녁시간이 남아있어! 다들 희망을 잃지 말자고!”

부주의 격려에 몇몇 조리사들이 동조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막상 찾아온 결전의 저녁 시간. 소형의 무사 귀환을 기다리는 이들 사이에서 홀로 불안에 떨고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부주였다.

“누구야! 누구 숨소리가 이렇게 커!?”

스토브 앞에 선 그가 난데없이 꽥 소리쳤다.

“얌마 너! 콧구멍 집에 놓고 왔어!? 왜 입으로 숨 쉬어 자꾸!? 시끄러우니까 지금부터 숨 쉬지 마! 그리고 거기 너! 국 끓는 소리가 왜 그 모양이야! 어째서 보글보글이 아니라 지글지글 이냐고!”

한껏 예민해진 부주가 조리사들을 향해 히스테리를 마구 쏟아냈다. 그런데 그때였다.

“왔다!”

경훈의 외침에, 부주와 은돈의 고개가 나란히 문으로 향했다.

“화, 황소형. 어떻게 됐냐……?”

“……지송해유……”

울상이 된 소형이 절레절레 고개를 내저었다.

“또 빠꾸 먹은 거야……?”

털썩. 부주가 의자위로 쓰러졌다. 다 틀렸어. 하아, 이젠 다 틀렸다고……

“아직 사표 안 쓴 사람……쟤한테 공동구매 해.”

그가 경훈을 가리켰다. 당장 내일부터 피바람이 불거야. 잘리기 전에 알아서들 나가자고.

그의 읊조림에, 조리사들이 동요 한 듯 웅성대기 시작했다.

설거지대 앞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은돈이 무슨 생각에선지 고무장갑을 벗어던졌다.

그리곤 소형을 향해 다가갔다.

“언니. 미안혀. 면목이 없,”

“이리 줘.”

그녀가 소형의 음식을 쟁반 째 빼앗아 들었다.

뒤이어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주방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

탕……! 커다란 소리와 함께 은돈이 독현의 집무책상위에 음식을 내려놓았다.

“먹어요.”

“생각 없어.”

독현이 단칼에 대답했다. 그의 시선이 은돈 대신 재무 보고서를 향해 있었다.

“왜 안 먹어요, 왜? 무슨 단식 투쟁해요? 사장님은 이게 나에 대한 의리를 지키는 거라고 생각하나본데, 지금 하나도 안 멋있으니까 먹죠, 그냥?”

“생각 없다고 말했잖아.”

그가 여전히 서류에 몰두 한 채 말했다. 순간 애써 누르고 있던 감정들이 은돈의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그녀의 눈시울이 울컥, 붉어졌다.

“오늘 하루 종일, 나 혼자 닦은 접시가 몇 갠 줄 알아요?”

울먹이듯 내던진 말에……멈칫, 독현이 고개를 들었다.

“주방 식구들이 날 배려한답시고 아무 말 안하는 게, 더 눈치 보이는 거 아냐구요.”

사장님은 지금 날 도와주는 게 아니에요. 오히려 비참하게 만들고 있어요.

당장이라도 울 것 같은 은돈의 얼굴……독현의 동공이 출렁였다.

그가 반사적으로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이내 머리를 스친 어떤 생각이, 그를 망설이게 만들었다.

“접시. 가지고 나가.”

다시 자리에 몸을 앉힌 독현의 입에서 곧 무거운 한마디가 떨어졌다.

자신이 다른 사람의 음식을 먹을 수 있게 되면. 그리고 그 사실을 지 회장이 알게 되면.

주방에서 차은돈의 위치는 애매해질 것이다. 그녀의 입지가 지금보다 더욱 좁아지는 것을 독현은 원치 않았다.

“좋아요. 계속 그렇게 고집 피워요. 먹기 싫음 먹지 말라구요. 과연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지, 심히 궁금해지네요!”

화가 난 은돈이 문을 향해 돌아섰다.

독현이 그녀를 붙잡아 세우려다, 차갑게 입을 다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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