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남자 밥해주기-51화 (51/93)

51화. 더 이상 못 먹어. 네 요리.

“사장님……혹시 입에 안 맞으세요? 이, 이게 좀 짠가?”

은돈이 멋쩍은 얼굴로 테이블 위의 계란말이를 집어 들었다. 그때 맞은편에서 독현의 음성이 들려왔다.

“내려 놔.”

“네?”

“그거 내가 좋아하는 거야.”

“네……?”

황당하게 되묻는 은돈을 바라보던 독현이 곧 그녀의 계란말이를 자신의 젓가락으로 낚아챘다. 그리곤 시선을 살짝 내려 깐 채 입에 넣었다.

“괜……찮아요?”

“뭐가?”

“……아니. 아뇨. 아무것도 아니에요.”

내가 괜한 걱정을 한 건가?

되려 의아해하는 독현을 보며 은돈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차은돈. 나가봐야 하는 거 아닌가?”

“네?”

“부주가 널 찾는 것 같던데.”

“절요? 언제요?”

“좀 전에.”

독현이 이번엔 계란말이 대신 소고기 더덕 말이를 집어 들며 말했다.

은돈이 미심쩍은 얼굴로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럼 저 부주한테 좀 다녀올게요. 기다리지 말고 먼저 드세요.”

“그럴게.”

“네……혼자 드실 수 있죠? 물은 여기 있고, 아. 이건 쌈 요리거든요? 전복초랑 여린 잎 샐러드를 쌈에 올려서,”

“완전 어린 애 취급이군.”

독현이 어이없단 듯 웃었다.

“어서 가 봐.”

“네. 식기 전에 드세요, 꼭.”

은돈이 살짝 미소 짓곤 그에게서 돌아섰다.

잠시 후, 문이 여닫히고 그녀의 모습이 사라지자 독현의 표정이 한순간 일그러졌다.

그가 놓치듯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코끝을 찌르는 비릿한 향. 계속해서 치미는 구토 증세.

완전히 똑같았다. 다른 사람이 만든 음식을 먹었을 때와.

“……”

그가 서늘한 시선을 곧추세웠다. 어째서 갑자기 차은돈의 음식에 거부반응을 일으키게 된 걸까. 한가지, 짚이는 구석이 있었다. 그가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

“부주. 무슨 일이에요?”

주방.

은돈이 땀범벅이 된 채 팬을 흔드는 부주의 곁으로 다가섰다.

“왜! 뭐! 나 지금 눈썹 휘날리는 거 안보여!”

“……혹시 부주, 저 찾은 적 없,”

“뻘소리 할 거면 비켜! 나 바뻐!”

부주가 한손으로 팬을 돌리며 다른 손으로 은돈을 픽 밀쳐냈다.

“뭐야, 지독현 이 인간. 왜 되도 않는 뻥을……”

은돈이 짐짓 입을 다물었다. 그녀의 머릿속으로 조금 전 잔상이 스쳐 지나갔다. 굳은 얼굴로 음식 접시를 내려다보던 독현의 모습이.

“별일 아니겠지……? 그래……아니야.”

은돈이 걱정을 떨치려 머리를 흔들었다.

“아 참! 차은돈!”

그때 부주가 그녀를 불러 세웠다.

“너 이지세랑 아직도 연락 안 돼?!”

“네? 아, 그게요……”

“연락 안 해봤지 너!”

“그게 사실……”

은돈이 말끝을 흐렸다. 사실은 몇 번이나 그 애에게 연락하기 위해 핸드폰을 들었다 놓았었다.

“제가 연락하는 게……맞을까요?”

“야, 뜨신 밥 먹고 자꾸 쉰 소리 할려? 당장 이지세한테 연락해서 빠른 시일 내 돌아오라고 해! 이거 명령이야. 명! 령!”

“네……”

은돈이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그로부터 삼십분 후.

다원정 옥상 정원. 벤치에 앉은 은돈이 몇 번을 망설인 끝에 지세의 번호를 꾹 눌렀다.

뚜르르……뚜르르……

곧 몹시 정직한 통화 연결음이 들려왔다.

“안 받을 거야……맞아. 절대 안 받아.”

다른 사람들 연락도 죄 무시했는데 뭐.

은돈이 핸드폰을 귀에 댄 채 초조한 듯 입술을 깨물었다.

그런데 다음 순간- 달칵. 하고 핸드폰 너머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이, 이지세?”

-……누나.

“아 받았……왜 받아?”

-네……?

극도로 당황한 은돈이 자신의 이마를 내리치며 소리 없는 아우성을 내질렀다.

“갑자기 받아서 놀랐어. 잘……지내?”

그녀가 애써 태연하게 물었다. 그러나 핸드폰을 쥔 오른손은 이미 식은땀에 흥건히 젖어있었다.

-누난. 잘 지내요?

“나야 늘 똑같지. 근데……너 어디야? 요즘 집에 없는 것 같던데.”

-본가에 있어요. 부모님 집에.

“아 그랬구나. 어쩐지……”

일순, 은돈이 굳은 고개를 치켜들었다.

“너 혹시, 집에 붙들려 간 거야? 맞지? 너 요리하는 거……반대하고 계신거지?”

-……네.

공부. 끝까지 마치길 바라시니까.

담담하게 이어지는 지세의 말에 은돈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의대 때려 치고 선택한 게 주방 막내라니, 부모님은 반대하실 만도…….”

헙. 이게 아니지. 퍼뜩 정신이 든 은돈이 도리도리, 고개를 내저었다.

“하지만! 역시 인생은 모로 가야 제 맛이지! 그, 그래서 말인데……너 언제 돌아올 거야?”

-……

조심스런 물음에, 한동안 핸드폰 너머에선 대답이 들려오지 않았다.

은돈이 답답한 듯 먼저 말문을 열었다.

“부주가 너 되게 찾는 거 알아? 니 빈자리가 지금 얼마나 큰데. 다들 막내 없다고 우왕좌왕 난리도 아냐. 경훈 선배도 너만 기다리,”

-누난요?

“응?”

-내가 궁금한 건……한 사람뿐이에요.

“아……난. 나는……”

은돈이 주춤하며 입을 다물었다. 다시 돌아오라고, 같은 주방에 있어달라고 말해도 될까? 나 좋자고 지세를 더 힘들게 하는 건 아닐까.

-누나.

망설이는 은돈을 대신해, 지세가 먼저 입을 열었다. 감정의 동요 없이 평온한 음성이었다.

-누나가 날 불편해하는 거 알아요. 그러니까, 원하는 대로 해요.

“뭐?”

-돌아오지 말라고 하면……안가요. 나, 누나 말 잘 들으니까요.

“지세야……”

-여기 있는 동안 끊임없이 계속 생각했어요. 내가 누날 좋아하는 건지……아니면 괴롭히고 있는 건지.

“……”

-근데……둘 다 인 것 같아요……그래서 답을 내릴 수가 없어요.

“……”

-누나가 대신 정해줄래요?……내가 돌아가도 괜찮은지.

지세의 그 한마디를 끝으로, 길고 어색한 침묵이 이어졌다.

안 돼. 무슨 말이든 해야 하는데……하고 싶은 말이 많아서, 오히려 아무 말도 못 꺼내겠어.

“……부주가.”

약간은 충동적으로 그녀가 운을 뗐다.

“부주가……널 많이 보고 싶어 해. 그러니까 빨리 와.”

허무하게 상황을 끝내버린 한마디. 지세가 살짝 웃었다. 기분이 나아진 건지, 반대로 상처를 받은 건지, 속내를 알 수 없는 웃음이었다.

-나 아직 병가중이잖아요.

“응……?”

-오랜만에 푹 자고, 푹 쉬는 중이에요. 다 자고 다 쉬면. 그때 연락할게요.

“응……꼭 연락 줘. 꼭 와. 알겠지.”

지세가 대답대신 한 번 더 웃었다.

-끊어야겠어요. 아, 그리고 부주한테 영상통화……제발 멈춰 달라고 전해줘요 누나.

“이, 이 인간이 영통도 걸었어? 알겠어! 내가 절대 못하게 할게. 그러니까 푹 쉬어!”

은돈의 호언장담을 끝으로 통화가 툭- 끊어졌다. 그녀가 자신의 핸드폰을 멀거니 내려다보았다.

“하아……”

정작 하고 싶은 말은 하나도 못했어.

미안하다는 말. 나 때문에 힘들어 하지 말라는 말. 돌아오기만 하면 원 없이 날 미워하고 무시해도 좋다는 말.

“아무것도 못 했네 진짜……”

은돈이 허무한 얼굴로 핸드폰을 주머니에 밀어 넣었다.

……같은 시각. 평창동에 위치한 전원주택.

지세가 끊어진 핸드폰을 보며 침대 위에 걸터앉았다. 그때, 문이 쾅 열리며 사나운 인상의 여자가 파자마 차림으로 들어섰다.

네 살 터울의 친누나, 이자경이었다.

그녀가 지세의 침대 위로 차 키를 내던졌다.

“아버지가 돌려주시더라.”

“……”

지세가 자신의 차키를 집어 들었다.

“하여간 너. 되도 않는 요리 하겠다는 거. 아버진 허락했을지 몰라도 나랑 엄만 아냐. 너 이 집에서 나가는 순간. 우린 남남이니까 그런 줄 알아.”

“……누나.”

“왜! 뭐 또! 아 짱나네!”

다혈질계의 사담 후세인이라는 별명답게, 자경이 빽 소리쳤다. 그녀를 바라보던 지세가 어이없단 듯 웃었다.

“같은 누난데, 다르다 참.”

“헛소리야! 너한테 누나가 나 말고 또 있냐?! 얘가 공부 때려 치고 장금이 흉내나 내고 다니더니 맛탱이가 갔네! 너! 꼼짝 말고 방에 있어! 다원정인지 뭔지, 거기 발 들였다간 다시 외국으로 쫓아버릴 거야!”

“……그렇게까지 안 해도 돼.”

“어쭈? 이제야 백기를 드는 건가? 그럼 확실히 말해. 너 거기 안돌아 가는 거다? 응? 응?!”

자경의 채근에 지세가 대꾸 없이 차 키를 매만졌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도통 본심을 드러내지 않는 동생의 포커페이스에, 자경이 갑갑한 듯 머리를 벅벅 긁어댔다.

***

“네가 찾아올 줄 알고 있었다.”

지명준 회장 자택.

응접실 소파에 몸을 앉힌 지회장이 옆에 선 독현을 힐끗 응시했다.

“무슨 짓을 한 겁니까. 나한테.”

“버릇없이 굴지 말고 앉아.”

친조부의 말에 독현이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자리에 앉아 여유롭게 차나 마실 기분이 아니었다.

“하하. 왜, 차은돈 그 아이 음식이 역해서 넘어가질 않더냐?”

지회장이 알만하다는 듯 뇌까렸다.

“여간해선 풀기 어려울 게야. 네가 걸린 자기 암시 말이다. 아마, 두 번 다시 그 계집애의 음식을 먹을 수 없겠지.”

“……”

“암시를 건 최면 술사를 찾아봐야 소용없을 거다. 절대 널 만나려 하지 않을 테니까.”

“그렇겠죠.”

이미 자신과 접촉하지 않는 대가로 지회장에게 상당금액을 제시 받았을 테니까.

“누구 짓입니까.”

지회장 혼자서 이런 장난을 칠 리 없었다. 그가 날 선 시선을 친조부의 얼굴위로 내리꽂았다.

“네 녀석을 제자리로 돌려놓기 위해 벌인 짓이야. 차은돈 그 날파리 같은 아이를 너한테서 떼어낼 수만 있다면. 난 이보다 더한 짓도 한다.”

지회장의 의미심장한 한마디가 독현의 귀를 거세게 파고들었다.

“이제 어쩔 거냐? 그 애를 네 옆에 묶어 둘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명분이 사라졌는데.”

“……”

조롱조로 이어진 말에 독현이 고개를 수그렸다. 머지않아 그의 입가에 차가운 조소가 걸렸다.

웃어? 지회장이 눈썹을 찌푸렸다.

“그 여자를 옆에 묶어둘 명분 같은 거……얼마든지 다시 만들면 되는 거 아닌가?”

“뭐야?”

지회장이 매섭게 눈을 치떴다.

“회장님 마음대로 일을 벌이셨으니, 나도 내 식대로 대응해도 괜찮은 겁니까?”

“……그래. 그렇게 하자. 네 객기는 얼마든지 받아주마.”

지회장이 싸늘하게 응수했다.

더 이상의 대화는 무의미하다고 판단한 독현이 그런 친조부에게서 돌아섰다.

잠시 후, 쾅-! 요란한 문소리가 들려왔다.

“윤 비서! 윤 비서 어디 있나! 앞으로 저 녀석, 내 허락 없이는 절대 이 집에 들이지 마!”

지회장이 노기 띤 얼굴로 마구 외쳐댔다.

***

“사장님, 어디 다녀오는 길이세요~?”

총지배인이 제 곁을 지나치는 독현을 향해 가식적인 미소로 물었다.

“아. 먹었어.”

정신이 다른 데 가 있는 사람처럼, 독현이 엉뚱한 대답을 내놓았다.

뭐야? 지배인이 멀어지는 자신의 오너를 황당한 눈초리로 응시했다.

……몇 분 후. 주방 입구.

독현이 동그란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은돈의 모습에 시선을 뺏긴 채 서있었다.

“차은돈! 나 스토브에 이거 좀 올려줘!”

“네 부주!”

“차은돈 그거 다하고 내 것도 좀!”

“네네!”

“아이구! 언니 어쩐댜! 이거 다 끓어 넘치는디?”

“뭐?! 그거 사장님 건데!”

여기저기 정신없이 뛰어다니던 은돈이 소형이 가리키는 냄비를 향해 후다닥 달려들었다.

“앗 뜨거!”

급한 맘에 냄비를 맨손으로 집어든 은돈의 입에서 호들갑스런 비명이 터져 나왔다.

언니 내려놔유! 소형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손에 든 냄비를 꾹 쥔 채 테이블 위로 안착 시켰다. 그리곤 발을 동동 구르며 온몸으로 뜨거움을 표현했다.

“……”

문 밖에서 그 소란을 지켜보던 독현이 이내 몸을 비틀어 벽에 등을 기댔다.

머릿속이 엉망진창이다. 그가 말없이 미간을 쓸어내렸다.

***

다원정 룸 테이블.

마주보고 앉은 독현과 은돈의 모습이 보였다.

“얼른 드세요 사장님.”

은돈이 그의 앞으로 음식 접시를 일일이 밀어주며 말했다.

순간 독현의 눈빛에서 당혹스러운 기색이 묻어났다.

“나가서 먹자고 했잖아. 오늘은.”

“뭐 하러 저녁을 밖에서 먹어요? 외식하면 나야 좋지만, 사장님은 쫄쫄 굶어야 하잖아요.”

“괜찮으니까 옷 갈아입어. 뭐든 사줄게.”

“됐어요.”

은돈이 일어서려던 독현을 다시 붙잡았다.

“그냥 드세요 사장님. 차린 성의를 봐서라두요. 네……?”

그녀의 부탁 조에, 독현이 할 말을 잃은 듯 다시 자리에 앉았다.

뒤이어 어쩔 수 없다는 듯, 나이프를 집어 들었다.

“……”

차은돈이 자신의 상태를 알아채지 못하게 상황을 넘겨야했다.

하지만, 언제까지 속일 수 있을까.

당장 눈앞의 음식만 봐도 이렇게 역해서 견딜 수가 없는데.

“차은돈.”

독현이 고심 끝에 그녀를 불렀다. 그와 동시에 은돈이 기다렸다는 듯 대꾸했다.

“왜요. 또 누가 날 갑자기 찾는 거 같고 막 그래요?”

“뭐……?”

은돈이 독현의 두 동공을 똑바로 마주했다. 어느덧 그녀의 얼굴이 딱딱하게 경직 돼 있었다.

“사장님. 솔직히 말해 봐요. 무슨 일 있죠?”

“없어.”

그가 은돈의 말을 단칼에 잘랐다.

“무슨 일 있잖아요. 있으면서. 난 사장님 표정만 봐도 알아요.”

“없다고 했잖아. 자꾸 귀찮게 할 거면 나가지. 식사하는 데 방해 되니까.”

“……”

벌떡, 은돈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잘 생각했어.”

“누가 나가겠대요?”

대뜸, 은돈이 테이블 위 접시 하나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는……독현의 앞으로 접시를 휙 내밀었다.

“먹어 봐요.”

“……”

독현이 미동 없이 그녀를 빤히 응시했다.

“먹어 보라구요.”

한 번 더, 그녀가 단호하게 말했다. 곧 둘 사이에 냉랭한 기류가 흘렀다.

“저게 대체 뭔 상황이여……?”

그즈음, 룸 밖에 서있던 소형이 작게 혼잣말을 내뱉었다.

은돈이 빠뜨리고 간 반찬 접시 하나가 그녀의 쟁반 위에 올라있었다.

“둘이 싸운겨? 아님……요리에 문제가 있는겨?”

그녀가 고개를 갸웃하며 자신이 든 반찬 접시를 내려다보았다.

그때, 살짝 열린 문 틈새로 독현의 가라앉은 음성이 들려왔다.

“못 먹어. 네 음식.”

“……뭐라구요?”

룸 안. 은돈이 커다래진 눈으로 독현을 응시했다.

더 이상 그녀를 속일 수 없다고 판단한 것일까.

이윽고 독현의 입술이 재차 벌어졌다.

“차은돈 네 요리. 못 먹어 이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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