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화. 수상한 아군
“사장님 왜 이래요……하하……”
한 발 두 발 독현에게서 물러나던 은돈이 곧 털썩, 소파 위로 떨어졌다.
“차은돈.”
독현이 은돈이 앉은 소파를 양손으로 짓누르며 상체를 구부렸다.
그의 벌어진 팔 사이에 꼼짝 없이 갇힌 은돈이 자연스레 시선을 회피하며 말했다.
“저기요. 이런 식으로 예뻐해 달란 말이 아니었거든요?”
그녀의 말을 무시한 채 독현이 얼굴을 좀 더 가까이 했다. 당장이라도 입을 맞출 기세였다.
“아뇨! 사장님! 있죠! 제 말은 그냥 못들은 걸로 해주세요……”
연애 약자, 연애 쭈구리, 스킨십 등신답게, 어깨를 한껏 움츠린 은돈이 다급하게 외쳤다.
어느새 독현과 자신의 콧날이 맞닿을 듯 가까워져 있었다.
어쩌지? 이대로 진짜 뽀뽀라도 해? 누가 문이라도 열고 들어오면?
멘붕에 빠진 그녀가 질끈 눈을 감았다. 그 후, 몇 초의 정적이 흘렀다.
“……”
말없이 입을 다문 독현이 약 2센티 앞의 은돈을 바라보았다.
온몸으로 ‘나 연애 초짜요’ 하고 부르짖는 그녀를.
스윽- 그가 은돈에게서 상체를 일으켰다.
마치 절벽 끝에 내몰린 어린 양을 사냥하는 늑대가 된 기분이랄까.
이내 단념한 듯, 그가 입맞춤 대신 은돈의 뺨을 양 손으로 주우욱 잡아 늘렸다.
“므에여?”
볼을 잡힌 은돈이 엉성한 발음으로 말했다.
“스장임. 이거 나여.”(사장님, 이거 놔요.)
“왜. 니가 원하는 대로 예뻐해 주고 있잖아.”
“증난하세여?”(장난하세요?)
“응.”
독현이 그녀의 볼을 붙잡은 채 사악한 미소를 머금었다.
하지 마요, 거참! 은돈이 그의 손길을 훅 뿌리쳤다.
“누가 뭐 이런 식으로 예뻐해 달랬나?”
“그럼 어떻게 해주길 바라는데.”
독현이 재미있다는 듯 물었다. 은돈이 웃는 낯의 그를 보며 볼멘소리를 내뱉었다.
“놀리니까 재미있죠? 네, 저 연애 쭈구리에요. 그래서 사장님이 그렇게 훅 치고 들어오면 사고회로가 정지돼서 뭘 어째야 할 지 모르겠다구요.”
“나도야.”
그가 은돈의 동공을 똑바로 들여다보았다.
“나도 네가 그런 표정을 하고 있으면 사고회로가 정지 돼.”
그렇게 어쩔 줄 몰라 하는 표정 지을 때마다, 함부로 손대기가 무서워.
독현이 입 꼬리가 씽긋 말려 올라갔다.
“나도 연애 쭈구리야.”
이윽고 그의 입술 새로 짓궂은 한마디가 떨어졌다. 그가 은돈의 머리를 가볍게 한번 쓰다듬곤 다시 책상으로 돌아섰다.
아 진짜. 이 남자가 머릴 쓰다듬는 손길이 싫지 않아.
새로 들어온 주방 막내를 대신해서 한 방 시원하게 먹여주고 싶었는데.
전국의 뚱녀들을 무시하지 말라, 이 외모지상주의자야! 하고……큰소리로 혼내주려고 했는데.
“내 눈에 뭐가 제대로 씌였어요. 사장님은 분명 나빴는데……내 눈엔 하나도 나빠 보이지가않아요.”
“뭐?”
“사랑에 눈 먼 까막눈이라구요, 나.”
은돈이 주먹을 말아쥐곤 자책하듯 머리를 퉁퉁 쳐댔다. 독현이 그 모습을 응시했다.
“하지 마. 안 그래도 나쁜 머리 더 나빠지잖아.”
우 씨. 이런 남자가 뭐가 좋다고. 은돈이 홱 얼굴을 쳐들었다.
“하여간! 새로 들어온 주방막내한테 외모 비하적인 발언은 삼가주세요. 두 번 다시 우리 뚱녀들을 무시했다간 큰 코 다칠 겁니다. 아시겠어요?”
전국의 거구들을 대변하는 그녀의 진지한 모습에, 독현이 참았던 웃음을 피식 터뜨렸다.
“우리 뚱녀들이라고 말하기엔, 넌 이제 너무 빈약한데. 좀 쪄야겠어.”
“나 지금 장난하는 거 아니거든요?”
“나도 장난 하는 거 아냐. 오늘 저녁, 나가서 먹을까. 제대로 살찌게 해줄게. 뭐 좋아해?”
그가 회전의자에 몸을 앉히며 물었다. 그런데 그때, 독현의 핸드폰이 붕- 진동했다.
“……왜요? 누구에요?”
은돈이 굳어진 독현의 얼굴을 응시했다.
“저녁은 다음에 하지.”
“무슨 일 있어요?”
“약속이 좀 생겼어.”
그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꾸했다.
“그만 나가봐.”
“네?”
“가서 개미처럼 일해. 돈 많이 줄 테니까.”
“뭔……별……”
“넌 특별히 나랑 보내는 시간만큼 근무 외 수당도 쳐줄게.”
가벼운 말들로 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리는 독현을 보며, 은돈이 무슨 얘길 하려다 그냥 입을 다물었다.
“그럼, 일하러 가볼게요. 사장님도 화이팅 해요.”
주먹을 들며 파이팅 자세를 취한 은돈이 몸을 돌려 문고리를 잡았다. 이윽고 찰칵, 문이 여닫히는 소리와 함께 그녀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독현이 더없이 싸늘한 눈길로 핸드폰을 내려다보았다.
“……네.”
곧 핸드폰을 귀에 갖다 댄 그의 입에서 건조한 대답이 튕겨 나왔다.
***
쨍그랑-!
주방 언저리에서 요란하게 접시 깨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모두의 이목이 집중된 가운데, 고무장갑을 낀 소형이 바닥에 팍 쭈그려 앉았다. 그리곤 깨진 유리 잔해를 치우기 시작했다.
“지송해유! 아직 쪼께 손이 덜 풀려서……다들 일보세유! 여긴 지가 알아서 할테니께!”
“저기, 소형 씨라고 했나? 괜찮아, 괜찮아! 실수할 수도 있지! 핫핫핫!”
부주가 그녀를 향해 영혼 없는 위로를 던졌다.
그때 옆으로 다가 선 경훈이 목소리를 바싹 낮춰 말했다.
“부주. 황소형인지 젖소형인지, 꼭 차은돈 before 보는 거 같지 않아요? 첨에 면접 보러 왔을 때 은돈이 걔가 딱 저만큼 뚱뚱했잖아요. 꼭 킹콩 같았는……”
말을 잇던 경훈이 등 뒤에서 느껴지는 서늘한 한기에 입을 다물었다.
“지금 제 뒤에 차은돈 서 있죠?”
“알면 저리 좀 가 임마!”
부주가 경훈의 얼굴을 손바닥으로 휙 밀치며 커다란 궁중냄비를 집어 들었다.
“으, 은돈 후배. 방금 내가 한말은……”
“킹콩한테 물리기 싫으면 가세요 선배.”
“엉……가야겠지?”
경훈이 뒤통수를 긁적이며 자신의 자리로 달아났다. 은돈이 그 모습을 바라보다 곧 소형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와장창! 소리를 내며 그녀가 이번엔 찻잔을 깨부수고 있었다.
“괜찮아유! 지는 안다쳤슈!”
후. 은돈이 한숨을 내쉬며 거대한 체구의 소형을 응시했다. 경훈의 말 대로, 자신의 before를 보는 것 같았다.
뭘까 이 묘한 동질감은.
서툴고 어색한 소형의 모습에서 동병상련의 감정을 느끼며, 은돈이 걸음을 옮겼다.
“나랑 같이 해.”
잠시 후, 곁으로 다가 선 은돈이 고무장갑을 끼며 말했다.
“어, 언니……아니, 선배님.”
소형이 제 옆에서 능숙하게 접시를 닦는 ‘인간 식기 세척기’ 은돈을 경이롭게 바라봤다.
“너 오기 전까지 주방 설거지는 나랑 지세 몫이었거든. 앞으로도 둘이 같이 하자.”
“고마워유 언니……아, 아니! 선배님.”
“언니가 편하면 그렇게 불러. 나도 소형이라고 막 불러도 되지?”
은돈이 뚱녀 소형을 향해 살갑게 웃어보였다. 그 웃음에 감격한 듯 소형의 눈빛이 일렁였다.
“참말로 땡큐하구먼유. 아까 사장님 앞에서 날 감싸준 것도 그렇고……언닌 내 은인이나 마찬가지어유! 앞으로 친하게 지내유!”
은돈이 제 앞에 내밀어진 소형의 손을 내려다 보다, 곧 마주잡았다.
“우리 사장님이 하는 말. 맘에 담아두지 마. 좀 인간미가 없어서 그렇지, 알고 보면 나쁜 사람은 아……”
“사장님 욕하지 말아유!”
“어……?”
“나쁜 건 사장님이 아니라 지구먼유! 이렇게 뚱뚱하고 못난 지가 잘못이니께! 그니께 사장님 욕하지 말아유.”
양 뺨에 발그레한 홍조를 띤 채 말을 잇는 소형을 보며, 멋쩍어진 은돈이 화제를 돌렸다.
“어, 뭐……그나저나! 어떻게 여기 면접 볼 생각을 했어? 박 명장님 추천으로?”
“예?”
일순 소형이 입을 다물었다. 그녀의 머릿속으로 문소라와 주고받았던 통화의 일부분이 스쳐 지나갔다.
‘내가 소형 씨를 추천했다는 건 모두한테 비밀로 하는 게 좋겠어요. 순전히 소형 씨 실력으로 치른 면접인데, 내 빽으로 합격했다는 루머라도 돌면, 억울하지 않겠어요?’
“그냥……어떤 고마운 분이 내 요리를 맛보곤, 이 레스토랑에 지원해보지 않겠냐고 제안을 하더라구유. 여기 오면……사장님을 위한 요리를 할 수 있을 거라면서……”
소형이 수줍은 듯 머릴 긁적였다.
“지가 운이 좋았쥬. 요리솜씨가 특출 난 것도 아닌디……기냥 할머니 손맛을 물려받은 것 뿐인디.”
“박 명장님이 제일 좋은 거 물려주셨네. 그 덕분에 사장님 입맛을 맞출 수 있었잖아. 니가 좀만 더 일찍 나타났다면, 아마 난 지금 이 주방에 없었을 거야.”
솔직담백하게 말을 잇는 은돈을 보며 소형이 놀란 토끼 눈을 치떴다.
“지, 지는 절대루 언니 자리를 넘볼 생각이 없거든유?! 안심해유! 언니가 사장님이랑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 건 들었슈!”
그렇고 그런 사이라니? 은돈이 당황한 채 되물었다.
그와 동시에 소형이 슬금슬금 달아나는 부주를 가리켰다.
“부주방장님이 그랬는디……언니랑 사장님이랑 그렇고 그런 사이니께, 살아 남구 싶음 면전에서 부리를 잘 털어야 한다고……”
“아 부주!”
은돈이 꽥 소리침과 동시에, 부주가 후다닥 주방 모퉁이를 돌아 사라졌다.
“저기! 나 사장님이랑 니가 생각하는 그런 사이 아니거든?”
“잉? 아……아녀유? 아쉽구먼. 그런 사이면 좋았을걸.”
“뭐?”
“두 분 참 잘 어울리거든유. 언니 정도면 사장님 짝으로 손색 없잖아유! 언니처럼 마르고, 예쁘고, 청순하기가 어디 쉬운가? 하늘의 별따기지유!”
“마르고, 예쁘고……청순?”
아아……
동지여. 내 평생의 요리 동반자여……왜 이제 왔는가.
칭찬에 약한 은돈이 어서 와 안기라는 듯 두 팔을 펼쳐보였다. 이내 두 여자가 ‘갑빠’를 부딪히며 다소 격한 포옹을 하자, 그 모습을 바라보던 조리사 일동이 절레절레 고개를 내저었다.
***
지명준 회장 자택.
짜악-! 매서운 마찰음과 함께 독현의 고개가 왼편으로 돌아갔다.
손자의 뺨을 내려친 지회장이 털썩-! 서재 소파에 몸을 앉히곤 거친 호흡을 가다듬었다.
“윤비서. 물.”
“여깄습니다 회장님!”
윤 비서가 그의 앞으로 재빨리 물 잔을 내려놓았다.
독현이 그 모습을 우습지도 않다는 듯 바라봤다. 그의 한쪽 뺨이 낙인이라도 찍힌 듯 벌겋게 부어올랐다.
“너! 네 녀석이 대체 뭐가 그렇게 잘났어!”
한대만으론 분이 가시지 않는 듯, 지회장이 독현을 향해 내질렀다.
“뭐가 그렇게 대단해서 이제야 얼굴을 비춰! 제주에서 그 사단을 내놓고!”
친조부의 호통에, 독현이 시선을 내려 테이블 위에 흩어진 신문기사들을 응시했다.
자신의 식이장애, 그리고 친모와 관련된 온갖 루머가 아직도 각 일간지의 1,2면을 장식하고 있었다.
“회장님. 염려 마십시오. 여론은 잠잠해지게 마련입니다. 아시잖습니까.”
윤 비서가 다시 벌떡 일어서는 지회장을 부축하며 말했다. 그러나 지회장의 시선은 오직 독현을 향해있었다.
“너.”
그의 손끝이 독현의 면전을 향했다.
“오늘 여기까지 제 발로 찾아온 것도 실은 차은돈 그 아이 때문인 거, 내가 모를 것 같으냐?”
지회장의 말에 독현이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건 암묵적인 인정이었다. 회장의 말이 맞았다. 그가 구태여 먼저 이 곳을 찾은 건 ‘네 녀석이 안오면 내가 가겠다’는 회장의 말 때문이었다.
“내가 레스토랑으로 찾아가겠다니 덜컥 겁이 난 게지. 차은돈 그 아이와 맞닥뜨릴까봐. 만나서 윽박지르기라도 할까봐. 안 그러냐?”
“만나서 윽박지르세요.”
“뭐야?”
독현이 서늘한 시선을 치켜들었다.
“어차피 그 정도로 기죽을 여자가 아니니 하고 싶은 대로 하세요. 윽박을 지르든, 식상하게 돈 봉투를 들이밀든.”
“너……! 그 아이랑 정말 만나는 거냐? 그런 거야?”
“그 여자가 날 만나주고 있죠.”
독현이 짧게, 그러나 분명하게 대답했다.
“흠!”
지회장이 불편한 기색으로 헛기침을 내뱉었다. 그리곤 상기 됐던 표정을 가라앉힌 후 다시 입을 열었다.
“내가 끼어들기 전에……알아서 정리해. 적당히 놀다가 제 자리로 돌아오기만 하면 되는 거다.”
“모르겠네요. 적당히가 될지. 이렇게 누구한테 빠져본 적이 없어서.”
독현이 시니컬한 미소를 띤 채 대답했다.
“쯔쯧. 지 애비랑 똑같아. 고집도, 여자 보는 눈이 형편없는 것도.”
지회장이 혀를 차며 앞에 놓인 물 잔을 집어 들었다. 그제야 독현의 시야에 친조부의 팔목이 들어왔다. 링겔 자국이 선명했다.
“네놈 일로 더 이상 입씨름하고 싶지 않다. 요 며칠 신경을 좀 썼더니 컨디션이 말이 아니야.”
“……”
자신의 기사를 막으려고, 지회장이 얼마나 고군분투 했을지 눈에 빤히 보였다.
남보다도 못한 가족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친조부에게 죄스런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이번 일. 어떤 식으로든 제가 책임지죠.”
한참 만에 독현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지회장이 가소롭다는 듯 그를 바라봤다.
“책임? 기자들을 모아놓고 정정 인터뷰라도 하려는 거냐? 시키는 대로, 써주는 대로 앵무새처럼 읽기라도 할 참이야?”
독현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못할 것도 없었다. 그러나……지회장이 그에게 바라는 건 따로 있었다.
“어차피 네놈 뒤치다꺼리는 윤 비서가 알아서 하고 있으니 신경 쓸 것 없다. 그보다 말이다.”
드디어 회장의 입에서 본론이 튀어나왔다.
“최면 치료를 받아보는 게 어떻겠냐?”
“……?”
독현이 의아한 듯 고개를 쳐들자 지회장이 얼른 다음 말을 이었다.
“네 병에 대해 세간에서 이러쿵저러쿵 떠들어대는 통에 기업 이미지가 말이 아니야. 명색이 대한민국 최고의 한식 프랜차이즈를 이끌어가야 할 사람이 식이장애?”
지회장이 말을 잇다말고 기가 막힌 듯 미간을 문질렀다.
“이참에 고치는 거다. 무슨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그래서 생각한 게 최면 치룝니까? 안 될 거라는 거. 아시잖아요.”
“안 되는 게 어디 있어! 해보지도 않고!”
지회장이 역정을 내자 윤 비서가 찔끔하며 출구로 다가갔다.
“회장님. 안으로 들일까요.”
“들어오라고 해.”
그의 명령이 떨어지자 윤 비서가 벌컥 문을 열었다. 그러자 밖에서 대기 중이던 한 남자가 기다렸다는 듯 안으로 들어섰다.
독현이 알만하다는 듯 웃었다. 노골적인 비웃음이었다.
“이러려고 날 부른 겁니까.”
“한번 받아 봐서 나쁠 것 없잖니. 약물 치료처럼 부작용도 없고 말이야.”
독현을 회유하듯 지회장의 목소리가 한결 누그러졌다.
그러나 하나뿐인 손자는 이미 최면술사의 곁을 지나쳐 문을 나서고 있었다.
“이번 일. 분명히 네 입으로 어떻게든 책임지겠다고 하지 않았냐?”
그즈음. 지회장의 살벌한 음성이 독현의 발목을 잡아 세웠다.
“네가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나도 내 식대로 하는 수밖에. 윤 비서. 차은돈 그 아이에게 내가 좀 보잔다고 전해.”
어깨를 짓누르는 지회장의 한마디에, 곧 독현의 입에서 옅은 한숨이 새어나왔다.
***
한 시간 후. 지명준 회장 자택 2층.
어두운 조명에 의지한 최면술사가 의자에 몸을 앉힌 독현을 향해 나른한 음성을 이어갔다.
“최면 치료란 게 사실은 아주 간단한 원리입니다. 무의식 상태에 빠진 환자에게 자기암시를 걸어서 트라우마나 강박에서 벗어나도록 돕는 거죠.”
그가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독현이 앉은 의자의 높낮이를 조절했다.
곧 비스듬히 누운 자세가 된 독현이 마음에 안 든다는 듯 그를 직시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면술사의 입에서 고루한 설명이 이어졌다.
“최면으로 음식에 대한 강박을 제거하는 일은 아주 쉽습니다. 방송을 통해 보신 적 있을 겁니다. 자기 암시에 걸린 사람이 양파를 사과처럼 베어 먹는다거나, 알러지가 있는데도 부작용 없이 음식을 먹을 수 있게 된다거나……이제, 최면을 통해 당신도 식이장애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될 겁니다.”
“서론이 길군. 시작하기나 해.”
손목에 찬 메탈 시계를 힐끗 내려다 본 독현이 다시 날렵한 시선을 치켜세웠다.
최면술사가 입꼬리를 올리며 펜듈럼(*최면의식에 사용되는 추)을 꺼내 들었다.
“자……눈을 감습니다. 당신은 지금부터 아주 깊은 잠에 빠져들 겁니다……”
……같은 시각.
1층에 위치한 서재. 지회장이 맞은편에 앉은 소라를 힐끗 응시했다.
“효과가 있을지 모르겠다.”
그의 자조적인 말에 소라가 여유롭게 웃었다.
“독현 씰 염려하시는 마음은 잘 알겠지만……걱정 마세요. 그 사람, 원래 자리로 되돌리려는 것뿐이에요.”
제 옆자리로요.
말을 마친 그녀가 싸늘한 미소와 함께 찻잔을 집어 들었다.
그렇게……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눈을 감고 누운 독현의 모습위로 최면술사의 나직한 음성이 들려왔다.
“당신은 지금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에 와있습니다. 당신의 앞으로 끝없이 깊은 낭떠러지가 보이는 군요……”
그의 말에, 독현이 반응하듯 살짝 미간을 좁혔다.
“당신은 곧 중심을 잃고 낭떠러지 아래로 곤두박질 칠겁니다……천천히……아주 천천히……그렇게 무의식 속으로 빠져 듭니다……”
딱! 최면술사가 손가락을 튕기며 상체를 일으켰다.
잠시 후. 독현이 마치 깊은 잠에 빠진 듯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자, 그가 흔들던 펜듈럼을 내려놓았다.
그리곤 소름이 일 정도로 낮게 가라앉은 음성을 내뱉었다.
“당신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는 건 신이 아니라 한 여잡니다. 차은돈이라는 여자. 그 여자가 만든 요리는 언제나 당신을 안심시키죠. 그 여자의 이미지처럼 평범하지만, 따뜻한 맛이 나니까요. 하지만,”
최면술사가 긴장한 듯 잠시 숨을 골랐다.
“이 최면에서 깨어나는 순간……그 여자의 음식은 당신에게 아무런 위안도 주지 못 합니다……당신은, 두 번 다시 그 여자의 음식을 삼킬 수 없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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