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 나는 누나로 꽉 찼어요.
AM 9 : 00.
신라 호텔 앞. 잠자코 선 은돈과 독현이 호텔 전경을 응시했다.
“여기서부턴 따로 가.”
독현이 옆에 선 은돈을 시크하게 내려다보며 말했다.
“사장님. 기자들이 뭐라고 하든 신경 쓰지 마요. 알겠죠?”
당연하지. 독현이 우습지도 않다는 듯 짧게 대답하며 호텔을 향해 다가섰다.
“잠깐만요!”
은돈이 덥썩 그의 손을 끌어당겼다. 좀처럼 마음이 놓이지 않는 건 왜일까.
“사장님, 오블리 비아테! 오블리 비아테!”
“……뭐하는 거야?”
“기억을 지워주는 주문이래요. 인터넷에서 봤어요.”
“주문?”
독현이 황당하다는 듯 시선을 가늘게 치떴다.
“이제 조금 있으면 기자들이며 사람들이 사장님을 마구 물어뜯을 텐데, 그 기억들 전부 지워지라구요. 마인드 컨트롤 중이에요.”
“차은돈.”
“가만있어 봐요. 오블리 비아테, 오블리 비아테, 비나이다, 비나이다……”
까치발을 든 은돈이 독현의 정수리를 떡하니 손으로 짚은 후 진지하게 주문을 외웠다.
독현이 그녀의 우스꽝스러운 면상을 지그시 응시했다.
기억을 지워주는 주문?
“지금 이 기억을 지우고 싶군.”
절레절레 고개를 내저으며 그가 호텔을 향해 돌아섰다.
“저 여기 있을게요, 사장님! 기죽지 마요. 알겠죠!”
도무지 안심이 되지 않는 듯, 은돈이 멀어지는 그의 등에 대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리곤 얼마 지나지 않아, 무수한 카메라가 독현을 에워쌌다.
“지독현 씨! 친모 성나희 씨의 죽음에 대해 한마디만 해주시죠! 정말로 자살이 맞습니까?”
“극심한 식이장애로 전담 요리사를 따로 두고 있다는 게 사실입니까?”
“새롭게 불거진 지명준 회장과의 불화설 역시 사실입니까?”
쏟아지는 질문 세례를 가볍게 무시 한 채 독현이 호텔 프론트로 들어섰다.
그러자 안에서 그를 기다리던 카메라들이 다시 앞을 가로막았다.
“왜 그런 자폭성 기사를 낸 겁니까! 의도가 뭡니까?”
“……”
독현이 우뚝 자리에 멈춰 섰다. 그리곤 짜증스럽다는 듯 고개를 돌리자, 먼발치에 선 은돈이 보였다. 지금 이 순간 본인보다 더 본인을 걱정하는 한 사람.
그가 잠시 은돈을 바라보다, 곧 입술을 달싹였다.
……오블리 비아테.
입모양만으로 읊조린 그 한마디를 알아들은 건, 아이러니 하게도 가장 먼 곳에 서있는 은돈 이었다. 그녀를 안심시키려는 의도였을까.
독현이 곧 태연자약한 얼굴을 고고하게 치켜들었다. 그리곤 온갖 원색적인 질문을 쏟아내는 기자들을 향해 되돌아섰다.
“사장님,”
한 발, 은돈이 충동적으로 독현을 향해 걸음을 뗐다.
그 순간. 지세의 낮은 음성이 들려왔다.
“가지 마요.”
“?”
“가지 마.”
등 뒤에서 나타난 지세가 은돈의 손목을 붙들었다. 그리곤 독현과는 정반대방향으로 향했다.
“이지세!?”
당황한 은돈이 자신의 시야를 가린 지세의 등을 바라보았다.
“지금 가봤자, 누나가 할 수 있는 건 없어요.”
“뭐?”
“사장님 혼자 감당해야 할 일이에요. 누나까지 나설 필요 없다구요.”
말을 마친 그가 다시금 은돈의 손을 잡아끌었다.
“잠깐만.”
은돈이 붙잡힌 손을 비틀어 빼냈다. 그리고는 위태로운 지세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나 걱정해주는 건 고마운데, 이러지 않아도 돼. 아니……이러지 마.”
무겁게 떨어진 한마디에, 지세의 눈빛이 출렁였다. 곧이어 그가 기자들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이대로 두면 은돈은 분명 저 카메라 앞으로 뛰어들겠지.
“알겠으니까……일단 가요.”
그가 단호한 얼굴로 은돈을 끌어당겼다.
먼발치에서 카메라 세례를 받던 독현이 그런 지세의 모습을 날카롭게 주시했다.
***
신라 호텔 내부 .
우거진 비자나무 사이로 탁 트인 바다가 보이는 산책로. 은돈과 지세가 침묵을 지키며 그곳에 서 있었다.
“우리 여기 좀 앉을까?”
한참 만에 먼저 입을 연 은돈이 나무 벤치를 가리켰다. 그러나 지세에게서 예상 밖의 대답이 돌아왔다.
“지금쯤이면 기자들도 돌아갔을 거예요……우리도 그만 들어가죠.”
“지세야. 나, 너한테 할 얘기가 있는데.”
“아뇨.”
은돈의 시선을 살짝 회피하는가 싶더니, 그가 말을 가로챘다.
“다음에 해요, 얘기.”
“……”
“다음에 들을게요.”
“아니……더 이상 미루면 안 될 것 같아.”
일순, 지세가 자리에 붙박인 듯 굳어 섰다. 맥이 탁 풀린 표정이었다.
“안하면 안 돼요……?”
“뭐……?”
“나 누나가 무슨 말 하려는지 알아요. 아는데……”
지금은 제발 하지 마요……
차마 끝까지 말을 내뱉지 못한 채, 그가 시선을 내렸다.
아마도 오늘쯤, 은돈이 자신의 고백을 거절하리라는 건 알고 있었다.
미리 알았다고 해서 덜 아픈 건 아니었다.
자신에게 은돈은 첫사랑이나 마찬가지여서, 알면서도 도저히 포기가 되질 않았다.
오히려 함께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점점 더 바보 같은 희망에 사로잡히곤 했다.
이렇게 한 발 뒤에 서있으면 언젠간 누나가 날 돌아봐주지 않을까.
가끔은 날 보고 웃어주니까. 그래, 어쩌면 누나가 날 좋아해줄지도 몰라.
누나가……아니, 차은돈이 날 선택해줄지도 몰라.
“……”
그가 눈앞의 은돈을 말없이 응시했다. 자신의 어깨에도 못 미치는 아담한 사이즈의 그녀.
처음부터 이 자그마한 여자를 누나라고 부르고 싶지 않았다.
동생으로 느껴지게 하고 싶지 않았다……
처음으로 되돌아간다면, 절대 같은 실수 따윈 반복하지 않을 텐데.
“지세야. 난……니 맘 받아줄 수가 없어.”
그때, 은돈의 입이 열리며 가슴을 짓누르는 한마디가 튕겨져 나왔다.
“대답……너무 늦어서 미안. 나 솔직히 겁났어. 지세 넌 너무 좋은 애라서, 다원정에서 유일하게 맘 터놓고 함께 웃던 친구라서……어색해지고 싶지 않았어. 너랑 멀어지기 싫었어. 그래서 니 마음, 알면서도 모르는 척 했어.”
“……”
“이젠……그러면 안 될 것 같아. 내가 애매하게 굴수록, 니가 상처 받을 테니까.”
지세가 은돈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을 느낀 은돈이 애써 떨리는 음성을 가다듬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자꾸 돌려 말하지 않을게. 난……니 맘에 응해줄 생각이 없어 이지세.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똑같을 거야.”
최대한 냉정해야 한다. 더 이상 모호한 말과 행동으로 이지세를 희망고문하고 싶지 않으니까.
“나 사실은 따로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
“알아요. 누군지.”
지세가 아스라한 눈빛을 곧추세웠다.
“그 사람도 누나가 좋대요?”
“……응.”
“그 사람은, 끝까지 가겠대요? 누가 뭐래도, 무슨 일이 있어도……계속 누나 옆에 있어주겠대요?”
“……안 있어줘도 돼.”
순간 예상 밖의 한마디가 지세를 흔들었다.
그의 눈빛이 옅게 떨렸다. 그리곤 믿기지 않는다는 듯 되물었다.
“뭐라구요?”
“중간에 누가 뭐라고 하면. 혹시 무슨 일이 생기면……내 옆에 있어줄 필요 없이 그 사람은 그냥 이 관계를 끝내면 돼. 원래 자기 자리로 돌아가면 돼.”
“……”
“좋아하니까……그 사람이 나중에 무슨 선택을 하든 존중해 줄 거야, 난.”
“누나가 이런 생각 하는 거, 사장님도 알아요?”
미리 이별을 각오하고 시작한 연애.
미련한 차은돈의 사랑방식에 지세가 한손으로 머리를 감싸 쥔 채 한숨을 터뜨렸다.
가슴 가득 밀려드는 황당함이 곧 숨 조이는 슬픔으로 바뀌었다.
자신이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은돈은 독현을 좋아하는 동시에 염려하고 있었다.
그게 지세를 작아지게 만들었다.
아무것도 한 게 없는데 난.
그가 자조적인 웃음을 띠었다. 지금이라도 손을 뻗으면 만져질 거리에 은돈이 서 있었다.
하지만 손을 뻗는 대신 그의 입에서 야트막한 한마디가 튀어나왔다.
“차은돈.”
그의 시선이 하염없이 은돈을 향했다.
“차은돈……”
“지세야.”
“불러보고 싶었어요 이렇게.”
말을 잇는 지세의 눈앞으로 은돈과 처음 만났던 날의 잔상이 떠올랐다.
강원도, 죽음의 다이어트 캠프장 입구.
라디오가 흘러나오는 이어폰을 꽂은 채 그가 돌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흔히들 운명의 연인을 만나면 귀에서 딸랑딸랑 종소리가 울린다고 하죠? 청취자 여러분들은 그런 경험 있나요? 왠지 잊혀 지지 않는 운명의 첫 만남요.’
디제이의 멘트가 고루하다고 생각했는지, 지세가 피식 웃었다.
‘다들 웃지만 말고 고개를 들어봐요! 새로운 인연이 당신을 기다리고 있을지 모르잖아요! 자 종소리 들을 준비! 딸랑 딸……’
그때였다. 마지막 계단을 막 올라선 지세가 난데없는 여자의 괴성에 고개를 쳐들었다.
‘두고 보자 지독현! 그리고 박현우! 살 빼고 예뻐져서 니들 꼭 후회하게 해줄게---아악!’
주먹을 불끈 쥔 채 비장한 얼굴로 허공에 잽을 날리는 웬 뚱녀.
다이어트 의지에 불타, 아마도 자신을 상처 입혔을 남자들의 이름을 나열하는 그녀의 모습에 지세가 놀란 듯 이어폰을 빼들었다.
그리곤 이윽고 피식, 저도 모르게 미소를 머금었다.
길길이 날뛰는 그녀의 머리위로 팔랑팔랑 내려앉는 민들레 홀씨.
……귀엽네.
그가 저도 모르게 그 한마딜 읊조리며 뚱녀를, 아니 은돈을 향해 한 발 다가섰다.
‘저기요. 가방, 무거워 보이는데 들어드릴게요.’
“……지세야. 무슨 생각해……?”
신라 호텔 산책로.
은돈이 잠자코 회상에 잠겨있던 지세를 향해 물었다. 그제야 정신이 든 듯, 그가 눈앞의 그은돈을 바라봤다.
분명히 그날……종소리 따위는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건 하나도 중요하지 않아. 비록 독현과 은돈이 이 얘기의 주인공일지라도, 자신은 은돈에게 아무것도 아닌 사람일지라도……
“그래도…… 나는 누나로 꽉 찼어요.”
“뭐?”
“그래서 다시 비우려면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아요. 미안해요.”
말을 마친 그가 은돈에게서 돌아섰다.
“지세야. 이지세……!”
남겨진 은돈이 의미 없는 외침을 두어 번 더 내질렀다. 그리곤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한동안 말없이 지켜보았다.
***
PM 5 : 00.
“손님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지금부터 안전을 위해 좌석벨트를 매주시고, 좌석 등받이와 테이블은 제자리로 해주시기 바랍니다.”
기내 멘트가 흘러나오는 비행기 안.
나란히 앉은 부주와 경훈, 그리고 홀로 창가자리에 앉은 은돈의 모습이 보였다.
“아니 근데 우리 사장님이 안보이네?”
아부 왕 부주가 주위를 두리번거리자, 경훈이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에이. 아까 보니까 공항에 기자들 깔렸던데. 우리랑 가겠어요? 지명준 회장이 따로 호출했겠죠.”
“그런가? 근데 문소라 씨는……”
“부주, 당.연.히. 사장이랑 같이 있겠죠. 애인인데.”
“애인? 야 그럼 차은돈이는?”
“그거야! 은돈이는 사장 세컨,”
말을 잇던 경훈이 슬쩍 은돈의 눈치를 살폈다. 그리곤 한껏 목소리를 낮추었다.
“쟤는 사장 세컨이잖아요. 문소라 씨가 진짜고.”
“이상하네. 내 눈엔 꼭 차은돈이가 진짜처럼 보이던데.”
“쯔쯧. 부주 그렇게 눈치가 없어서 어째요.”
혀를 차는 경훈을 보며 부주가 머쓱한 듯 뒤통수를 긁적였다.
그들이 그러거나 말거나, 창가에 앉은 은돈은 아까부터 핸드폰 화면에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었다.
액정위에 뜬 독현의 기사들.
“그래도 어제보단 확실히 좀 나아졌지…… ? 댓글도 덜 달리고.”
그녀가 안도한 듯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연락……해봐도 될까?
“아니. 안 돼. 때가 어느 땐데. 분명 회장님도 함께 계실 텐데……”
그녀가 얼른 고개를 내저었다. 그런데 그때 부웅, 핸드폰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액정에 뜬 이름은 편식 쭈구리.
“사장님?!”
한껏 목소리를 죽인 채 은돈이 후다닥 핸드폰을 받아들었다.
“사장님 어디에요? 비행기 탔어요?”
-아직. 넌? 가고 있는 거야?
“전 이번 비행기로 가요. 근데 사장님……저 길게 통화 못하거든요.”
은돈이 자신을 힐끔대는 부주와 경훈을 돌아보며 더욱 목소리를 낮췄다.
“할 말이 뭐에요? 저 곧 끊어야 돼요. 비행기 떠요.”
그녀의 말에 핸드폰을 귀에 댄 독현이 살짝 미간을 좁혔다. 할 말?
“네가 좋아.”
“콜록!”
뜬금없는 독현의 한마디에 은돈이 사례가 걸린 듯 켁켁 댔다.
“아니 용건을 말하라니까, 무슨 난데없이 고백을!”
뭐 이런 뜬금포가 다 있어? 은돈이 새빨개진 얼굴로 통화종료 버튼을 연타했다.
“후 하-”
잠시 후. 그녀가 끊어진 핸드폰에 대고 뜨거운 숨을 내뱉었다.
그런데 다음순간, 독현의 번호로 저장된 이름이 눈에 들어왔다.
-편식 쭈구리-
“이거……이제 바꿔도 되겠지?”
그녀가 여전히 화끈거리는 뺨을 쓸어내리며 키패드를 터치했다.
이윽고 편식 쭈구리라는 엄한 다섯 글자가 지워지고 그 자리를 대신 한 건, 새까만 하트 이모티콘.
-♥-
“역시 하트는 까만 하트지. 속이 꽉 찬 거 같고 좋잖아.”
내심 뿌듯한 얼굴로 그녀가 액정을 들여다보았다.
그때, 누군가 옆자리에 털썩- 몸을 앉혔다. 은돈의 코끝으로 차가운 공기와 함께 익숙한 비누 잔향이 풍겨왔다.
“느, 늦었네? 하마터면 너 놓고 출발할 뻔 했어.”
고개를 돌린 은돈이 매우 뻘쭘 어색한 어조로 운을 뗐다. 옆자리에 몸을 앉힌 지세가 그녀를 힐끗 바라봤다.
“왜 이렇게 늘, 뭘 묻히고 다녀요.”
화악, 그녀에게 상체를 기울인 지세가 가느다란 손을 뻗었다.
그리곤 은돈의 어깨에 달라붙은 박람회 스티커를 떼어냈다.
“아, 이거……아까 폐회식 때 붙었나 봐.”
은돈이 가까워진 지세에게서 멀찍이 물러나며 대답했다.
어쩔 줄 몰라 하는 그녀의 표정을 지세가 묘한 갈색 눈동자로 담담히 내리훑었다.
“그런 얼굴 하지 마요.”
“으, 응?”
누나가 그런 얼굴 할수록 난 더 조바심이 나니까.
“누나가 아니라 누구였어도, 난 똑같이 했을 테니까.”
본심과 다른 말을 내뱉으며 지세가 손가락에 붙은 스티커를 살짝 내보였다.
“……응. 고마워.”
곧 이어폰을 귀에 꽂아 넣는 그를, 은돈이 지그시 바라보았다.
어째서 지세가 태연한 척 할수록, 더 마음이 무거워지는 걸까.
하. 은돈이 복잡한 시선을 창가로 비틀었다.
……같은 시각.
공항으로 향하는 벤츠 안.
윤 비서와 함께 뒷자리에 앉은 독현이 아까부터 심각하다 못해 심오한 얼굴로 핸드폰을 주시했다. 액정위엔 은돈에게 보내려다 만 메시지가 떠있었다.
-벌써 출발 한 건가?-
-차은돈. 뭐해?-
“……”
전송 버튼에 엄지를 갖다 댄 채 망설이던 독현이 곧 고집스레 취소 버튼을 눌렀다.
“됐어. 너무 매달리는 것 같잖아.”
불쑥 튕겨 난 그의 혼잣말에, 옆자리의 윤 비서가 놀란 듯 눈을 치떴다.
“도련님. 이번 일, 너무 신경 쓰지 마십시오. 기사도 거의 내려갔고 또……”
말을 잇던 윤 비서가 그만 입을 다물었다. 독현의 핸드폰 화면에 떠 있는 건 기사 따위가 아니었다. 단지 ‘계란말이’라고 저장 돼 있는 누군가의 연락처였다.
한참 생각에 잠겨있던 독현이 윤 비서의 시선도 아랑곳 않은 채 곧 은돈의 연락처를 수정하기 시작했다.
-차은ㄷ……-
‘계란말이’대신 은돈의 이름을 적어 넣던 그가 일순 멈칫하며 적다 만 ‘ㄷ’을 노려보았다.
애인 치고 이건 너무 평범했다. 영 성에 차지 않았다.
뒤이어 그가 삭제버튼을 연달아 터치했고, 잠시 후 주소록에 저장된 새로운 이름은.
-은돈-
“……아니야.”
그가 다시 한 번 삭제버튼을 연타했다.
그 후…… 이름을 썼다 고치길 대체 몇 번이나 반복했을까.
차은돈에서 은돈으로, 은돈에서 심지어 ‘도니도니’로 애칭을 쉴 새 없이 변경하던 독현이 곧
신경질적으로 핸드폰을 휙 내던졌다.
“도련님 괜찮으십니까?”
그를 신기한 듯 관찰하던 윤 비서가 곧장 운을 뗐다.
독현이 대답 대신 양 손으로 피곤한 얼굴을 쓸어내렸다.
“혹시 이모티콘 쓸 줄 알면.”
“예?”
“……하트 좀.”
독현이 다소 뻔뻔하게 자신의 폰을 내밀었다.
‘하트 좀’ 이라니. 당황한 윤 비서가 안경을 밀어 올리며 핸드폰을 받아들었다.
침착하자. 그래, 내 나이 마흔 아홉……그러나 할 수 있다. 보자, 하트가 어디 있더라.
“어, 여기! 여기 있다!”
폰을 붙들고 한참을 헤맨 끝에 윤 비서가 드디어 뿌듯한 외침을 내질렀다.
“해냈습니다! 도련님!”
그가 은돈의 연락처에 저장된 까만 하트를 내보였다.
-♥-
“이건 너무 새까맣잖아.”
“네?”
“꼭 탄 것 같군. 다른 거 없나?”
“아. 잠시만……”
-♡-
“됐습니까?”
그가 다시 수정된 희여멀건한 왕 하트를 독현에게 내보였다.
“뭐, 일단은 그걸로 하지.”
창가로 시선을 비튼 독현의 입가에 곧 흡족한 미소가 스쳤다.
처음 보는 그의 낯 선 모습에 윤 비서가 어안이 벙벙한 얼굴을 해보였다.
늘 뾰족하게 모가 나있던 표정과 가시 돋친 말투.
독현의 전매특허였던 그 두 가지가 오늘은 말끔히 사라져 있었다.
오히려 갓 사랑에 빠진 소년처럼, 저렇게나 들떠 있다.
‘너무 깊이 빠지진 마세요 도련님. 회장님이 절대 가만 계시지 않을 겁니다.’
그가 옆자리의 독현을 안쓰럽게 응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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