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화. LOVE, LOVE, LOVE.
“바, 박봉곤! 찾으시는 박봉곤이가 바로 접니다! 여기 있습니다!”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은돈이 번쩍 손을 들고 단상 위로 향했다.
“너……?!”
그제야 그녀를 발견한 지명준 회장이 깜짝 놀라 상체를 곧추세웠다.
“네가 어떻게?!”
“수상을 축하드립니다, 박봉곤님! 일단 트로피와 상금 수여식이 있겠습니다! 저쪽 카메라 보시고 포즈 좀 취해주세요!”
사회자가 은돈의 품에 꽃다발과 트로피, 그리고 상금을 한꺼번에 안기며 외쳤다.
“도……돈……!”
은돈이 손에 쥔 상금 봉투를 보며 저도 모르게 감격에 찬 탄성을 내질렀다.
“박봉곤 씨! 이쪽 보고 브이 한번만!”
찰칵! 찰칵! 찰칵! 연속으로 터지는 플래시 세례에 은돈이 얼떨떨한 표정으로 엄지를 번쩍 치켜들었다. 그리곤 따봉, 하고 포즈를 취했다.
“브이라니까……”
인파 속에서 그녀를 지켜보던 지세가 핏 웃었다.
“지세야! 이지세! 나 상 탔어!”
잠시 후, 단상 아래로 내려선 은돈이 지세의 양 어깨를 붙잡고 팔짝팔짝 뛰었다.
마치 발에 스프링이라도 달린 것처럼.
“축하해요. 진심으로.”
그가 어느 때보다 환한 웃음으로 은돈을 맞아주었다.
그때, 기쁨을 만끽하는 두 사람 앞으로 윤 비서가 다가왔다.
“차은돈 씨. 회장님께서 찾으십니다.”
일순 감동으로 벅차오르던 은돈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저를요?”
고개를 돌리자, 자신을 주시하는 지명준 회장이 보였다.
“알겠어요. 어디로 가면 되죠?”
“절 따라오시면 됩니다.”
윤 비서가 앞장서 걷기 시작했다. 은돈이 경직된 얼굴로 지세를 돌아보았다.
“나 잠깐 좀 다녀올게.”
“……겁먹지 마요.”
“응?”
“그 상, 누나 스스로 노력해서 얻어낸 거니까……누가 뭐래도 기죽지마요.”
“……응!”
“파이팅, 박봉곤.”
“으쌰!”
은돈이 힘찬 기합을 내지른 뒤 윤 비서의 뒤를 따랐다.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지세가 이윽고 반대편 인파속을 파고들었다.
그때, 단상위에서 사회자의 경쾌한 음성이 들려왔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자! 드디어 블라인드 경연, 대망의 일등 발표만을 앞두고 있는데요! 영광의 수상자는, 두구 두구 두구!……if only님!”
박람회장 내부를 쩌렁 쩌렁 울리는 외침에 지세가 힐끗 고개를 돌렸다.
“이프 온리 님! 안계신가요!?”
나타나지 않는 일등 수상자를 연신 호명하는 사회자와, 웅성거리는 사람들……
자리에 멈춰 선 지세가 말없이 입을 다물었다.
“뭐야? 일등이 없는 거야?”
“상 탈 줄 모르고 그냥 가버린 거 아냐?”
모두의 예측이 보기 좋게 빗나가는 순간이었다. 일등을 거머쥔 이프 온리는 분명 지금 이 자리에 있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을 드러내며 저 단상위로 올라갈 생각은 끝내 없어보였다.
처음부터 그의 목적은 일등이 아니었기에.
단지 좋아하는 여자와 함께 경연에 서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 여자와 같이 요리를 해보고 싶었다. 그게 다였다.
“……”
지세가 말없이 웃었다. 지금 중요한 것은 자신의 일등이 아니라 은돈의 이등이었다.
그녀에겐 크나큰 의미가 있는 상이었다. 자신은 그녀보다 간절하지도, 절박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누구보다 기뻐하는 그녀를 김새게 하고 싶지 않았다.
“이프 온리 님! 자리에 안계신가요!?”
지세가 애타게 자신을 찾는 사회자를 뒤로한 채 박람회장을 빠져나갔다.
***
박람회 세미나 실.
2등 트로피를 손에 쥔 은돈이 자신의 참가자격 ‘박탈’을 두고 의견이 분분한 임원진들을 향해 소리쳤다.
“이건 말도 안 돼요! 이름도 감추고 오직 실력만으로 겨룬 대회였잖아요! 근데 이제 와서 제 참가 자격을 문제 삼는 이유가 뭐죠!?”
“시끄럽다. 네 스캔들을 벌써 잊은 거냐?”
지회장의 질책에, 은돈이 심사위원 이강민과 자신의 치욕적인 섹스 스캔들을 떠올렸다.
“그건 조작된 스캔들일 뿐이에요. 게다가 이번 블라인드 경연과는 상관없잖아요!”
“네가 또 심사위원을 매수했을지 어떻게 알고?”
그의 노골적인 비난에 은돈이 당당히 어깨를 폈다.
지세 말이 맞아. 겁 낼 거 없어. 그 상, 누가 뭐래도 내 힘으로 얻어낸 거니까.
“이번 경연. 회장님도 아시다시피, 박람회장을 찾은 손님들에게 직접 맛을 보게 하고 심사를 진행했어요. 그런데 제가 어떻게 그 많은 사람들을 사전에 매수할 수 있었겠어요?”
“크흠……!”
지회장이 헛기침을 하며 불편한 기색을 내비쳤다. 이에 아랑곳 않고 은돈이 또박또박 말을 이었다.
“제가 받은 상, 물리고 싶으세요? 그럼 그렇게 하세요. 하지만 회장님은 제 요리를 선택한 사람들에게 수상을 번복하는 이유를 납득 시키셔야 할 거에요. 제 요리를 무시하는 건, 그 사람들의 선택을 무시하는 것과 같으니까요.”
“뭐야?”
지회장이 언성을 높이려다 짐짓 입을 다물었다. 인정하고 싶진 않지만, 그녀의 말은 사실이었다. 이미 정해진 결과를 주최 측 마음대로 번복할 수는 없었다. 자칫하면 갑의 횡포로 비춰질 수 도 있었다.
그때, 임원진 한명이 조심스레 운을 뗐다.
“회장님, 이미 시상까지 끝난 마당에 굳이 차은돈 씨의 상을 회수하는 게 더 모양새가 이상하지 않을까요? 오히려 긁어 부스럼 만드는 꼴,”
“좋네.”
지회장이 살벌한 얼굴로 임원의 말을 잘랐다.
“내가 보기보다 상황판단이 빠르다네. 그래. 축하하네.”
그의 날카로운 시선이 은돈에게 내리꽂혔다. 맘에 들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지금은 한 발 물러서야 할 때였다.
“약속대로 3등 안에 들었으니까……계속 사장님 옆에 있어도 되는 건가요, 저?”
은돈이 애써 담담한 척, 그렇게 물었다.
“허허. 생각보다 당돌하시구만. 그만 나가보게.”
“……네. 그럼.”
은돈이 구십 도로 허리를 굽혀 지회장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리곤 막 돌아서려는 찰나,
“회장님!”
벌컥 문이 열리며 윤 비서가 안으로 들어섰다.
“도련님을 찾았습니다!”
“그 자식 지금 어디,”
“지금 어디 있대요 그 사람!?”
은돈이 저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였다. 그녀의 동공이 커다랗게 부풀어 올랐다.
……몇 분 후.
대리석 복도 위를 정신없이 내달리는 은돈의 모습이 보였다.
“하여간! 제주도까지 와서 굳이 또 섬에 들어간 이유가 뭐야!?”
그녀가 기쁜 마음을 감추기 위해 괜한 소리를 내뱉으며 걸음을 재촉했다.
그때, 누군가의 싸늘한 음성이 귓전을 울렸다.
“어딜 그렇게 정신없이 가요?”
“……!”
거대한 통 유리창 앞에 선 소라를, 은돈이 마주보았다.
“……뭐해요 여기서? 혹시 나 기다린 거에요?”
“회장님과의 면담이 끝나기만을 기다렸죠. 축하해요 차은돈 씨. 그 와중에 혼자 경연에 나갈 생각을 하다니.”
“나 지금 바쁘거든요. 할 말 있으면 나중에 따로 하죠.”
은돈이 차갑게 돌아섰다.
“하하, 뻔뻔한 줄은 알았지만……당신 때문에 경연엔 나가보지도 못한 팀원들한테 미안하지 않던가요?”
“……그건 내가 할 말 아닌가?”
다시 멈춰 선 은돈이 소라를 돌아보았다.
“그런 짓을 해놓고……문소라 씬 나나 팀원들에게 조금도 미안하지 않던가요?”
대답대신 소라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난 차은돈 씨한테 미안할 짓 한 적 없는데?”
“좋아요. 계속 잡아떼세요. 그래야 모든 게 밝혀졌을 때 당신 질겁하는 얼굴 보는 맛이 있죠, 나도.”
냉정하게 말을 마친 은돈이 다시 복도 위를 걸었다.
그때 소라의 날카로운 음성이 그녀의 발목을 붙들었다.
“지금 어디 가는 거냐고 묻잖아.”
“……알면서 왜 물어봐요?”
“뭐?”
“맞아요. 나 사장님한테 가는 거에요.”
은돈이 흔들림 없는 표정으로 말했다. 지독현한테 간단 말이야?
잠시 후, 멀어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소라가 달아오른 눈으로 직시했다. 자존심이 상해 미칠 것 같았다.
***
“아가씨! 우도 들어가는 배는 진즉에 끊겼다니까? 아니 저렇게 비바람이 치는데 미쳤다고 운항을 하겠어!”
제주 성산포항 여객 터미널.
매표소 앞에서 직원과 실랑이를 벌이던 은돈이 절망에 찬 얼굴을 치켜들었다. 그녀의 등 뒤로 보이는 바깥 풍경은 이미 몰아치는 비바람에 흠뻑 젖어 있었다.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렸나? 갑자기 비가 퍼붓고 난리래?!”
매표소 직원이 그녀 들으라는 듯 목소릴 높였다.
“안 되는데……꼭 가야 되는데……”
은돈이 무거운 한숨과 함께 매표소를 벗어났다. 그때 턱수염이 덥수룩하게 난 중년 남자가 그녀에게 바싹 다가와 소곤댔다.
“저기, 급한 거면 내가 태워다 드릴까? 나 이런 사람인데……”
암표상처럼 목소리를 낮춘 남자가 ‘통통배 낚시 전문’이라고 적힌 명함을 건넸다. 순간 은돈의 눈이 반짝였다.
“아저씨! 아니 선장님! 저 좀 태워주세요! 차비 드릴게요!”
은돈의 외침에, 선장이 그 말만을 기다렸다는 듯 곧장 딜을 제시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세종대왕 열 장만 줘.”
열장이면……십 만원? 섬까지 거리는 고작 15분 남짓인데?
은돈이 단호한 얼굴로 손가락 다섯 개를 펼쳐들었다.
“다섯 장.”
“받고 두 장 더.”
“두 장은 심했다! 유, 육 만원! 세종대왕 여섯 장! 콜?”
“글쎄……”
턱을 문지르며 고심하는 남자를 향해 은돈이 절박하게 말을 이었다.
“아저씨. 저 거기 꼭 가야 돼요. 오늘이 아니면……정말 용기가 안 날 것 같은데…… 저 그 사람한테 하고 싶은 말이 있거든요.”
“흠……좋아. 봐줬다! 여섯 장 콜!”
선장이 호쾌하게 콜을 외침과 동시에 우르릉 쾅! 창밖으로 천둥이 내리쳤다.
그러거나 말거나, 은돈과 선장이 거국적으로 손을 맞잡고 흔들었다.
***
“나는야 바다의 왕자~! 당신은 해변의 여자~! 훠우 베이베!”
드높게 출렁이는 파도를 헤치고 나아가는 통통배 위.
우비를 뒤집어쓴 은돈이 갑판 위에 늘어진 채 연신 헛구역질을 했다.
“아저씨! 노래 좀 끄면 안 될까요! 가뜩이나 비바람에, 천둥 번개에 정신 산란한데!”
“핫핫핫! 어디 스피드 좀 내보실까!”
조타실에 들어앉은 선장이 몹시 액티비티한 몸짓으로 키를 돌리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은돈의 몸뚱이가 맥아리 없는 미역줄기처럼 이리저리 휘청댔다.
“아악! 아저씨 제발 좀!”
……같은 시각. 우도 민박집.
독현이 벽에 걸린 자켓에서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지금쯤이면 은돈의 경연 결과가 나왔을 것이다. 그가 전원 버튼을 누르자 액정이 환해지며 핸드폰에 쉴 새 없이 부재중 전화가 날아들기 시작했다.
기자들에게 걸려온 전화만 수백여 통. 거기에 간간히 더해진 문소라의 메시지들.
그가 건조한 시선으로 메시지 삭제 버튼을 누르려다, 일순 멈칫했다.
-사장님 대체 어디 있어요?-
은돈의 문자였다.
그가 시선을 내리깐 채 메시지를 도착한 순서대로 하나씩 읽어 내렸다.
-나……사장님 말 듣기로 했어요. 경연 나가려구요. 열심히 해서 꼭 삼등 안에 들게요.-
-블라인드 경연 스타트! 여기선 실명대신 가명을 써야 한대요. 내 가명이 뭔 줄 알아요?-
“……박봉곤?”
독현이 혼잣말을 내뱉으며 픽 웃었다.
-드디어 경연 끝! 나 정말 최선을 다했어요. 근데 결과는……장담 못해요.-
-2등! 사장님 나 2등! 와, 해냈다! 믿어져요?!-
“그럴 줄 알았어.”
한 번 더, 독현의 입가에 미소가 스쳤다.
-사장님 지금 어디 있어요? 나 축하 안 해줄래요?-
-저 지금 배타고 들어갑니다. 꼼짝 말고 기다려요.-
일순 마지막 문자를 넘기던 독현의 눈이 커다래졌다.
그가 비바람이 몰아치는 문 밖으로 시선을 비틀었다. 여길 어떻게 오겠다는 거야.
벌떡, 그가 몸을 일으켰다.
***
“헉……허억……”
우도 선착장. 비에 홀딱 젖은 음울한 몰골로 은돈이 멀어지는 통통배를 바라보았다.
“에라이!”
그녀의 입에서 격분에 찬 고성이 튕겨 나왔다.
“무슨 이딴 허접 떼기 우비를 이만 팔천 원씩이나 받냐! 이 망할 놈의 바다의 왕자야!”
후두둑! 순간 은돈이 입고 있던 우비의 단추가 한꺼번에 떨어져나갔다.
“하아……하하하……”
그녀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헛웃음을 터뜨렸다.
“나 여기 왜 왔지? 차은돈 너 여기 왜 왔니?”
그녀가 넋 나간 혼잣말을 주절대며 푸엣취 재채기를 했다. 그런데 순간, 누군가의 팔이 그녀를 확 돌려 세웠다.
“……내가 헛 게 보이나?”
은돈이 양 눈을 깜박였다. 그러자 퍼붓는 빗줄기 속에 우산을 들고 서있는 독현의 모습이 좀 더 또렷이 보였다.
진짜 지독현이잖아. 오늘 하루 종일 나타나지 않아 날 애태웠던 남자.
“……”
은돈이 눈앞의 그를 향해 뭔가를 말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독현 역시 마찬가지였다.
잠시 두 사람 사이에 미묘한 침묵이 흘렀다. 머잖아 그들의 입이 동시에 열렸다.
“너 바보야?!”
“사장님 바보에요?!”
독현이 황당하다는 듯 비에 젖은 은돈을 응시했다.
“뭐?”
“사장님 바보냐구요! 도대체 왜 그런 짓을 했어요? 미친 게 아니고서야 사람들 앞에서 자기 과거사를 왜 까발려요 왜!”
“그러는 너야말로 부르지도 않았는데 여긴 왜 온 거야. 나한테 따지러 온 건가? 그렇게 볼품없이 흠뻑 젖어서?”
“난……!”
은돈이 말을 잇다말고 마치 정지화면처럼 움직임을 멈췄다.
그녀의 시선이 거친 빗줄기에 젖어드는 독현의 셔츠를 향해있었다.
이윽고 고개를 들어 올리자, 자신의 머리 위로 온전히 쏠려 있는 우산 하나가 보였다.
“나……사장님한테 고맙다고 안할 거에요.”
그녀가 우산을 받쳐 든 독현을 향해 고집스럽게 말했다.
“사실 만나면 고맙다는 말, 미안하다는 말 먼저 하려고 했어요. 근데 막상 사장님 얼굴 보니까……화가 나요. 왜 나 때문에 그런 바보 같은 기사를 낸 거에요? 누가 부탁했어요? 사장님이 그러면 내가 좋아할 줄 알았어요!?”
좋아할 줄 알았냐고?
“기대도 안 해, 그런 건.”
하지만 그렇다고 여기까지 찾아와 화를 낼 줄이야.
독현이 까칠한 눈빛으로 은돈을 내려다보았다.
“내가 뭘 해도 싫잖아 넌.”
“네, 싫어요! 나 때문에 사람들 가십거리로 전락한 사장님도 싫고, 그런 사장님이 너무 보고 싶어서, 이 빗속을 뚫고 찾아온 내 자신도 싫어요……!”
순간, 독현의 동공이 일렁였다.
빗속에 선 두 사람 사이에 또 한 번 정적이 맴돌았다.
“……너 지금 뭐라고,”
“사장님을 안 좋아하려고 했어요.”
독현의 앞에서 고해성사라도 하듯 은돈이 운을 뗐다.
“처음 본 날부터 나한테 못되게 굴었잖아요. 그래서 절대 좋아하지 않겠다고 다짐했어요. 어차피 나완 다른 세상 사람이니까. 우린 어울리지 않으니까……좋아하면 안 돼. 좋아하지 말자. 무슨 공식이라도 되는 양 외우고 또 외웠어요. 근데……”
은돈이 말끝을 흐리며 고개를 떨궜다.
“이제 너무 힘들어요. 좋은데 아닌 척 하는 거.”
밀어내고, 차내고, 가슴 할퀴는 말만 골라하는 거. 이제 못하겠어요.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빗물에 젖은 독현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나 사장님이 좋아요.”
요란한 빗소리에 파묻힌 고백. 독현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다소 멍한 얼굴로 되물었다.
“뭐……?”
“사장님이 좋다구요.”
재차 마음을 전한 은돈이 소라와 지회장, 마지막으로 지세의 얼굴을 떠올렸다.
“사장님을 좋아하면 안 되는데, 분명 나 때문에 누군가는 상처받을 텐데……알면서도 멈춰지지가 않아요. 오늘 사장님이 날 포기한다고 하니까 덜컥 겁이 났어요.”
“……”
“진짜 못됐죠, 나. 사장님한테 미움받고 싶지 않아요. 이대로 나한테서 멀어지는 거……싫어요.”
드디어 모든 감정을 토해낸 은돈이 눈앞의 독현을 올려다보았다.
그가 꽤나 복잡 미묘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내 갑작스런 고백에 화가 난 건가? 아니면 놀란 건가? 그것도 아니면……
“그동안 너 날 실컷 본체만체 했잖아. 그런데 이제 와서 좋아졌다고……”
독현이 기가 막히다는 듯 읊조렸다. 이윽고 그가 젖은 머리칼 사이로 손가락을 넣어 가볍게 쓸어 넘겼다.
“너처럼 제멋대로인 여잔 처음 봤어.”
“……”
아……화났나 봐. 어쩌지? 지금이라도 농담이었다고 말해? 아니면 미안하다고?
사장님, 그녀가 독현을 불러 세웠다. 그리고 이어진 한마디.
“키스해도 돼요?”
헙. 본인이 말해놓고도 충격이었는지, 은돈이 주춤 뒤로 물러났다.
“아뇨, 말이 헛 나왔어요! 방금 못들은 걸로 해주세요! 제가 뭐 변태 이런 건 아니거든요. 그냥 아까부터 사장님이 비에 젖은 모습이 좀 섹시해 보이길래……아니, 섹시한 게 아니구요! 그……퇴폐미가 있다고 해야 할까요?”
빌어먹을. 말을 하면 할수록 더 미궁 속으로 빠져드는 기분이야.
난 망했어. 옛날에 태어났음 고관대작 앞에서 함부로 입방정 떨다 삼대가 멸했을 거여.
“죄송해요……”
은돈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사과를 건넸다. 독현이 우산을 든 채 그런 그녀에게 한 발 다가섰다.
“그런 걸 대체 왜 물어 보는데.”
“……네?”
“그냥 하면 되잖아.”
다음 순간- 독현이 고개를 비스듬히 꺾으며 그녀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포갰다.
어젯밤, 자신의 호텔방에서 행해졌던 과격한 키스완 달리 매우 조심스럽고 다정한 입맞춤이었다.
깜짝 놀란 은돈이 곧 천천히 눈을 감았다.
독현이 그런 은돈에게 입을 맞추다 말고 씽긋 웃었다. 그의 살짝 벌어진 입술 새로 들려오는 나직한 웃음소리가 곧 빗소리에 파묻혀 들리지 않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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