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화. 블라인드 경연
서울. 다원정 한식 레스토랑.
홀에 모인 직원들이 오픈준비도 잊은 채 입을 모아 수근 대고 있었다.
“그니까, 우리 사장이 식이장애에 걸린 이유가……딴 게 아니라 직접 목격한 친모의 자살 때문이라는 거?”
“그보단 어릴 때 친모한테 학대당해서 그런 거 아냐? 목까지 졸렸다던데.”
수다 삼매경에 빠진 그녀들 손에 들린 것은 오늘자 신문 일면.
“다들 오픈 준비 안합니까?! 사장님 안 계실 때 더 잘해야 하는 거 몰라요!?”
갑작스런 총지배인의 고함에 여직원들이 후다닥 흩어졌다.
순식간에 한산해진 홀 중앙에 남겨진 지배인이 그제야 쥐고 있던 독현의 기사를 펼쳐들었다.
“가엾은 우리 사장님……”
오버스럽게 코를 훌쩍대며, 그녀가 기사 속 독현의 사진에 뺨을 부비 댔다.
같은 시각, in 제주. 한식 박람회 세미나 실.
“기사 당장 내리라고 연락 했나!? 윤 비서!”
지회장의 호통에 윤 비서가 진땀을 빼며 분주히 자료를 넘겼다.
“곧 도련님에 대한 정정기사가 나갈 겁니다. 너무 걱정 마십시오, 회장님.”
“어떻게 걱정을 안 하나! 그 녀석이 제 병은 물론이고 지 애미가 어떻게 죽었는지까지 낱낱이 고해 바쳤는데!”
“성나희 씨는 저희 쪽 보도 자료를 통해 자살이 아닌 사고사로 정정 기사를 내보낼 겁니다 회장님. 다만 도련님의 식이장애, 아니, 병에 대한 건……”
윤 비서가 말끝을 흐리며 안경을 치켜 올렸다.
“도련님 스스로 자폭성 인터뷰를 자처했기 때문에, 저희 쪽에서 아니라고 부인한들 과연 신빙성이 있을지……”
일순 지회장의 입에서 불호령이 떨어졌다.
“집안 망신이 따로 없구만! 대체 이 자식 지금 어디 있나! 당장 데리고 와!”
“사라졌어요.”
그때였다. 기다란 책상 맨 끝자리에 앉아있던 소라가 멍하니 입을 열었다.
“공항 탑승자 명단에 없는 걸로 봐선 서울에 간 것 같지는 않은데……어디에도 없어요. 핸드폰도 꺼놨구요.”
그녀의 말에 지회장이 쾅! 집무책상을 내리쳤다.
“윤비서, 당장 이 자식 끌어다 내 앞에 데려다 놔!”
“예, 회장님”
좀처럼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 하는 지명준 회장과 안절부절 하는 윤 비서를 보며,
소라가 표독스런 시선을 내리깔았다.
지독현……일을 이 지경으로 만들어 놓고 대체 어디서 뭘 하고 있어 너?
까득, 그녀가 불안한 눈빛으로 자신의 손톱을 깨물었다.
***
신라호텔. 프론트 데스크 앞에 선 은돈이 초조한 얼굴로 외쳤다.
“정말 방에 없다구요? 정말?”
“몇 번을 말씀드리지만, 오전에 이미 체크아웃 하셨습니다.”
“다시 한 번만 확인해주심 안될까요? 703호 손님인데요, 이름은 지!”
“후, 손님. 자꾸 이러시면 곤란 합니다……”
프론트 매니저의 냉랭한 태도에 은돈이 다시 뭔가를 물으려다, 입을 다물었다.
그래. 여기서 이러고 있어 봤자야. 부질없다구.
“내가 직접 찾을 거야.”
지독현 이 인간. 멀리 못 갔을 거야. 분명 제주도 어딘가에……
“으르렁 으르렁 대~♫ 으르렁 으르렁~♬”
급작스런 핸드폰 벨소리에, 호텔 로비를 벗어나던 은돈이 우뚝 멈춰 섰다.
다음 순간, 액정을 들여다본 그녀가 놀란 토끼 눈으로 핸드폰을 받아들었다.
“여보세요! 사장님!? 뭐에요! 지금 어디에요?! 제주도에 있긴 해요? 대체 호텔은 언제 나갔어요? 오늘 아침 그 기사는 또 뭐구요! 사장님 왜 그렇게 제멋대로에요!”
숨 쉴 틈 없이 이어지는 은돈의 속사포 질문 공세에, 독현이 액정을 들여다보며 픽 웃었다.
-숨넘어가. 차은돈.
“어디냐구요 대체!”
-……글쎄.
돌아오는 시니컬한 대답. 은돈의 목소리가 한층 더 높아졌다.
“나, 사장님이 뭐 때문에 그런 말도 안 되는 기사 내보냈는지 알아요. 다 안다구요! 지금 어디 있어요? 왜 말도 없이 사라지고 그래요!”
그녀의 채근에 독현이 약간의 텀을 두고 다시 입을 뗐다.
-생각을 정리 할 시간이 필요했어.
“네……?”
-요즘 좀 피곤했거든. 예정에 없던 짝사랑에, 경연에, 꽤 바빴으니까.
예정에 없던 짝사랑.
독현의 자조적인 한마디에 은돈이 찔끔하며 고개를 수그렸다.
“그니까……누가 나 같은 거 좋아하래요……”
-그러게. 넌 날 죽도록 싫어하는 데 말이야.
피식, 한 번 더 독현이 웃으며 말했다. 은돈이 다시 고개를 쳐들었다.
그녀의 눈앞으로 어젯밤, 자신에게 함부로 입을 맞추던 독현의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나 어제 일……두고두고 곱씹으면서 사장님 미워하려고 했어요. 진짜 재수 없는 인간이라고 실컷 욕해주려고 했어요. 근데 이게 뭐에요. 왜 나 같은 거 때문에 사장님 치부까지 까발리냐구요. 사람 미안해지게 왜 이래요 진짜……”
-……그렇게 미안하면. 지금이라도 경연에 나가.
순간. 난데없는 그의 말에 은돈의 동공이 일렁였다.
“무슨 소리에요? 경연은 끝났잖아요.”
-끝났지. 단체전은.
“설마……날더러 개인전에 참가하라구요?”
후, 은돈의 입에서 짧은 한숨이 튕겨 나왔다.
“사장님……뜻은 고맙지만 혼자 경연에 나가는 건 저한테 무리,”
-너 내가 질척대는 거 싫잖아.
갑작스런 한마디에 은돈이 멈칫했다.
“네……?”
-경연에서 반드시 삼등 안에 들어. 그래서 니가 얼마다 대단한 여잔지 나한테 증명해. 두 번 다시 내가 널 얕잡아 보지 못하게, 어제처럼……너한테 함부로 굴지 못하게.
“……사장님.”
-니가 삼등 안에 들면, 그땐 확실히 떨어져나가 줄게. 다신 널 곤란하게 하는 일 없을 거야.
담담하게 이어지는 그의 말에 은돈이 잠시 호흡을 멈췄다.
더 이상 질척이지 않겠다고, 그러니까 꼭 경연에 나가 우승하라고, 독현이 그렇게 말했다.
바라던 바였다. 그의 일방적인 짝사랑에, 안하무인 식 애정표현에 번번이 골치를 썩었던 그녀였다.
그런데……대체 이 감정은 뭘까. 목구멍이 꽉 막힌 듯 답답했다.
독현에게 무슨 말이든 하고 싶은데, 숨이 조여서 차마 입을 뗄 수 가 없었다.
-경연, 지금 가면 늦진 않을 거야. 서둘러 차은돈.
독현이 그 말을 끝으로 핸드폰을 귓가에서 떼어냈다.
“……”
허무하게 끊어져 버린 통화. 은돈이 생각에 잠긴 채, 한동안 액정을 들여다보았다.
***
제주 한식 박람회장.
접수처 앞에 결연한 얼굴로 서 있는 은돈이 보였다.
“경연 참가하시게요?”
앞으로 다가온 안내요원이 대뜸 참가신청서를 디밀었다.
“오늘 세 시에 열리는 블라인드 경연 참가신청서입니다~”
“……블라인드 경연이요?”
은돈의 벙 찐 물음에 안내요원이 환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말 그대로 참가자 개인의 수상실적이나 경력 및, 모든 인적사항을 철저히 블라인드 처리하고 오로지 실력으로만 겨루는 경연입니다~ 여기, 신청서에 실명을 대신할 애칭 하나만 적어주세요!”
애칭이라……
잠시 고민하던 은돈이 곧 신청서 이름 란에 자신의 애칭을 휘갈겼다.
그리곤 안내요원을 향해 조심스레 운을 뗐다.
“심사는 어떤 식으로 이뤄지는지 알 수 있나요……?”
“오늘 박람회장을 찾아주신 손님들께서 직접 요리를 맛보고 마음에 드는 요리 판넬에 스티커를 붙이는 방식으로 심사가 진행 됩니다~”
안내요원의 해맑은 대답에 은돈이 꿀꺽 마른 침을 삼켰다.
“그니까 절대 심사위원을 매수했다, 뭐 그런 뒷말이 나올 수가 없겠네요?”
“당연하죠. 불특정 다수의 심사위원을 어떻게 사전에 매수하겠어요?”
“저……신청할게요.”
은돈이 손에 쥔 참가신청서를 안내요원에게 건넸다.
그리곤 곧 비장한 얼굴을 치켜들었다.
……그로부터 몇 시간 후. 경연장 내부.
“이번 경연의 공통 키워드는 vegan(채식주의자), 그리고 Sugar ban(설탕금지)입니다! 즉, 채식 주의자를 위한 무설탕 요리를 만들어 주시면 됩니다!”
각자 배정받은 조리대 앞을 지키고 선 참가자들이 긴장 된 얼굴로 진행자의 멘트를 경청했다. 은돈 역시 떨리는 손으로 자신의 매무새를 가다듬었다.
“그럼, 모두 시작해주십시오. 건투를 빌겠습니다.”
단상 위. 어느덧 진행자로부터 마이크를 건네받은 지명준 회장이 경연의 시작을 알렸다.
행여 그가 자신을 알아보기라도 할까봐, 은돈이 뒤집어쓴 조리 마스크를 좀 더 끌어올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독현의 기사를 막는데 온 신경이 가 있는 지회장은 그녀에게 일말의 눈길도 주지 않았다.
“좋아. 채식 주의자를 위한 무설탕 요리라 이거지……”
조리대 앞에 선 은돈이 고개를 돌려 다른 참가자들을 관찰했다.
그 어디에도 설탕은 보이지 않았다. 새싹 샐러드나 채소 전골, 쌈밥 정식등 대부분이 달지 않고 담백한 요리를 준비하는 듯 했다.
“집중하자 차은돈……”
이번 경연 키워드는 Sugar ban. 말 그대로 설탕 금지. 이걸 역으로 생각해 보는 거야……
그래. 분명 설탕을 쓰지 말라고 했지, 단 맛 자체를 금지한 적은 없잖아.
“오케이. 모 아니면 도다.”
모두가 달지 않은 요리를 외칠 때, 나 차은돈. 홀로 외길을 가련다.
그녀가 굳은 결심을 하며 조리대 위에 메밀가루, 배, 유자, 시나몬 가루를 꺼내놓았다.
뒤이어……쾅! 소리를 내며 조리대 위에 안착한 것은, 보문사 청운 스님에게 하사받은 꿀 단지.
“시작해볼까.”
잔뜩 기합이 들어간 얼굴로 은돈이 눈빛을 빛냈다.
***
“자기야, 우리 저거 먹어볼까? 저거 되게 맛있어 보이지 않아?”
박람회를 찾은 손님들로 북적이는 경연요리 심사장. 한 커플이 은돈의 요리 테이블 앞에 멈춰 섰다.
“뭐야. 메밀 꿀 만두? 아, 난 단 거 별론데……자기 우리 딴 데 가보자.”
남자가 애인의 팔을 잡아끌며 빙글 돌아섰다. 그때, 손님을 가장 한 채 나타난 은돈이 남자의 앞을 두둥 막아섰다. 그리곤 지레 호들갑을 떨며 본인의 테이블을 가리켰다.
“와, 와우! 이게 뭐야! 메밀 꿀 만두! 뼛속까지 달콤하겠네! 너무 달아서 잇몸이 폭삭 내려앉는 거 아닐까 몰라!”
제길……마지막 말은 빼는 건데……은돈이 애써 표정을 다듬곤 다시 소리쳤다.
“하……하여간 난 이 요리에 한 표!”
그녀가 손에 든 점수 스티커를 보란 듯이 팔랑였다.
그 모습에 마음이 동한 커플이 다시 요리 테이블 앞에 섰다. 그리곤 은돈이 만든 메밀 꿀 만두를 입에 넣고 오물거렸다.
“어? 이거 의외로 바삭바삭 달달하니 맛있네? 근데, 반칙 아닌가? 설탕 쓰면 안 되잖아?”
“설탕 대신 꿀을 넣은 게 아닐까요?”
스토커마냥 커플의 등 뒤에 바짝 붙어 서있던 은돈이 음습한 목소리로 말했다.
당황한 남자가 그녀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누, 누구신데요 아까부터……”
“제가 누군진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보다 이 요리는……아니……이 작품은, 누가 뭐래도 설탕대신 꿀을 사용한 것 같네요. 그러니까 이름도 메밀 꿀 만두라고 지었겠죠?”
“뭐야, 이 여자. 무서워……”
당황해서 뒷걸음질 치는 커플을 향해, 은돈이 집념어린 얼굴로 한발 더 다가섰다.
“만두피는 밀가루 대신 찰지고 쫄깃한 메밀가루를 사용해 만들었네요. 거기에 소량의 시나몬 가루를 첨가 했구요. 보세요. 갓 튀겨진 이 꿀 만두의 자태를. 향이며 색감이 꼭 츄러스 같죠?”
“?!”
“근데 이게 또 식감은 츄러스보다 애플파이랑 비슷해요. 한입 딱 베어 무는 순간, 꿀에 졸인 배와 유자 채가 달큰하게 씹히면서, 완벽한 천상의 하모니를……”
한참 흥에 취해 나불대던 은돈이 문득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보이는 건, 저만치 달아나는 커플의 뒷모습.
“가, 가지 마쎄요! 님들!”
초조하게 부르짖던 그녀가 이윽고 깊은 한숨과 함께 자신의 테이블로 돌아섰다.
그리곤 손에 든 스티커를 점수 판넬에 붙이려다 재차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내거에 붙이긴 좀 그렇잖아?
“자존심 상하게 이러지 말자 차은돈. 너 정말 열심히 만들었잖아. 그래, 쫄지 말자.”
그녀가 곧 당당한 걸음으로 자신의 테이블을 벗어났다. 그리곤 약 삼 초 후.
후다닥! 제자리로 돌아온 그녀가 다시 스티커를 든 손을 치켜들었다.
“지금 자존심이 문제여! 사장님과 내 명예가 달렸는데!”
붙여버리자. 그냥 붙이는 거야!
그녀가 눈을 질끈 감고 자신의 점수 판넬을 향해 스티커를 디밀었다. 그러나 차마 붙이지 못하고 망설이는데, 그때였다.
등 뒤에서 누군가가 그녀의 손을 붙잡고 대신 판넬 위로 스티커를 가져갔다.
“이지세……?”
판넬 위에 대신 스티커를 붙여주는 지세를 은돈이 어버버, 올려다보았다.
“너, 너 여기 왜……”
벙 찐 물음에, 지세가 들고 있던 자신의 스티커 역시 은돈의 판넬 위에 붙이며 대답했다.
“아까 누나 참가 신청서 내는 거 우연히 봤어요. 경연……나올 줄 알았어요.”
씽긋 웃는 그를 보며, 은돈의 얼굴이 홍당무처럼 달아올랐다.
“나 되게 뻔뻔하지. 팀 경연은 나가지도 못하게 망쳐놓고……혼자 살아보겠다고……”
“아무도 그렇게 생각 안 해요. 애초에 누나가 망친 게 아니니까.”
지세가 은돈의 테이블로 고개를 내렸다.
“하, 한번 먹어볼래?”
“맛있던데요.”
“어……너 먹어봤어?”
지세가 대답 대신 점수 판넬에 붙은 자신의 스티커를 가리켰다.
“저거 나름 냉정한 평가 후에 붙인 거에요. 내가 누나 좋아해서 붙인 게 아니라.”
“아…… 그, 그래……”
지세의 돌직구에 은돈이 멋쩍게 목덜미를 쓸어내렸다.
“그나저나 스티커가 너무 안 모여서 큰일이야. 다른 참가자 테이블엔 저렇게 사람이 많은데……”
“심사 끝나려면 아직 한참 남았잖아요. 주눅들 필요 없어요.”
그가 장난스레 한손을 치켜들고 파이팅 자세를 취했다.
“힘내요.”
“응. 화이팅!”
은돈이 그를 향해 애써 웃어보였다.
그 시각, 제주시 우도에 위치한 민박집.
마당 평상 위에 앉은 독현이 말없이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의 옆에 놓인 건 꺼진 핸드폰. 전원을 키는 순간 기자들의 부재중 전화가 빗발칠 것이다.
그가 공허한 시선을 끌어내렸다.
그때, 부엌에서 밥상을 들고 나온 민박집 할매가 그를 향해 외쳤다.
“혼저 왕 먹읍서!” (어서와서 먹어요!)
낯선 제주도 방언에 독현의 눈썹이 꿈틀, 올라갔다. 애써 마인드 컨트롤 중이었건만, 내면의 평온이 깨진 기분이었다.
“몽케지 마랑 혼저 오라게!” (꾸물대지 말고 빨리 오라니까!)
다시금 들려오는 할매의 외침. 이건 마치 외국에 나와 있는 기분이랄까.
“……못 먹어.”
독현이 필살의 때려 맞추기로 밥상을 응시하며 대꾸했다.
그 후, 도저히 이어지지 않는 그들만의 무질서한 대화가 이어졌다.
“맨도롱 또똣할 때 후루룩 들이쌉서” (미지근하고 따뜻할 때 후루룩 들이켜요.)
“내가 먹을 수 있는 음식은 따로 있어. 그런데, 앞으로는 먹지 못하게 될 지도 모르겠군.”
“혼저 왕 드셩갑서!” (아 얼른 와서 드시라니까!)
“그 여자……나한테 완전히 질려버렸거든.”
“쟈이 지금 머랑 고람시냐?” (쟤 지금 뭐래는 거니?)
“실수를 했어. 차은돈한테.”
독현이 은돈에게 억지로 입을 맞추던 순간을 떠올렸다. 곧 그가 양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누굴 좋아한다는 게 이렇게 힘든 건줄 몰랐어. 그래서……이제 그만 둘까 생각 중이야. 내 감정이 그 여자한테 폐가 된다는 걸 알았거든.”
말조차 통하지 않는 낯선 사람 앞이라서 였을까. 오히려 솔직하게, 가감 없이, 그가 자신의 속내를 드러내고 있었다. 민박집 할매가 그런 독현을 보며 자신의 머리 옆으로 빙글빙글 손가락을 돌렸다.
“쯔쯧. 서른 아기야, 지랄하고 자빠졌다.”
“……그 말은 들리는군.”
독현이 팔짱을 낀 채 빼딱한 시선으로 할매를 응시했다. 이윽고 픽. 그가 자조적인 미소를 띠며, 돌담 밖에 펼쳐진 새파란 바다로 눈길을 돌렸다.
***
“저기, 나 상 못타면 되게 창피 할 것 같은데……옆에 안 있어줘도 되는데……”
한식 박람회장. 수상자 발표를 앞두고 분주한 단상 위를 바라보며 은돈이 떨리는 소리로 말했다. 곁에 선 지세가 그녀의 정수리를 힐끔 내려다보았다.
“아마 좀 창피하겠죠. 상 못타면.”
“응?”
홱, 은돈이 고개를 돌려 지세를 바라보았다.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이었다.
장난치면 안 되겠네.
긴장을 풀어주려 한 게 되려 은돈에겐 역효과였나 보다. 지세가 난감한 듯 살짝 웃었다.
“걱정하지 마요. 절대 상 탈거에요.”
“절대?”
“네. 절대.”
나 촉 좋거든요, 하고 뒷말을 붙이며 그가 단상을 올려다보았다. 잠시 후, 수상자 명단을 든 사회자가 마이크를 붙잡았다. 그 뒤로 박람회 운영진과 지명준 회장의 모습이 보였다.
은돈이 긴장으로 파르르 떨리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오래 기다리게 해드려 죄송합니다. 자 그럼, 지금부터 수상자 발표가 있겠습니다. 실명 비공개로 치러진 경연이니만큼, 이름대신 애칭으로 호명하겠습니다. 자 먼저 대망의 3위! 두구,두구,두구!”
입으로 자체 효과음을 내며, 사회자가 으레 그러하듯 질질 시간을 끌기 시작했다.
우-우! 여기저기서 참가자들의 야유가 터져 나왔다.
“핫하하! 자 발표하겠습니다! 영광의 3위는……!”
“제발, 제발, 제발……!”
은돈이 양손을 기도하듯 맞잡은 채 눈을 질끈 감았다.
“와우 이럴 수가! 두 분입니다! 먼저, 서울 은평구에서 오신 요리왕 비룡님! 그리고,”
“제발 제발 제발!”
“다음은 여성분인 것 같은데요, 축하합니다! 다음 생엔 원빈 코 점막으로 태어날래님!”
사회자의 우렁찬 외침에 우승자 두 명이 꺅꺅대며 단상위로 올라섰다.
“안 돼……”
영혼이 탈탈 털린 얼굴로 은돈이 그들을 응시했다. 마지막이 이토록 허무할 줄이야.
쫑났어. 다 쫑났다구……
“가자, 지세야……”
“아직 발표 끝난 거 아니잖아요, 누나.”
“아냐, 끝난 거나 다름없지 뭐……가자. 우리 가서 소주나……”
“이어서 2등 수상자를 발표하겠습니다. 역시 두 명인데요, 부산에서 오신 행님아님, 그리고 박봉곤 님!”
순간.
지세를 잡아끌던 손을 툭 떨구며, 은돈이 자리에 멈춰 섰다. 그리곤 슬로우로 천천히 돌아섰다.
“지세야. 지금 저 사람……박봉곤이라고 하지 않았니?”
“혹시 그거. 누나 애칭이에요?”
“그게……실명대신 뭘 적긴 해야겠는데, 마땅히 생각나는 건 없고, 그래서……”
횡설수설하는 은돈을 바라보던 지세의 눈이 반달모양으로 가늘게 접혔다.
“올라가요. 누나 차례에요.”
그가 단상을 가리켰다.
은돈이 쿵쾅거리는 심장을 양손으로 부여잡은 채 그를 마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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