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화. 거짓말이라도 좋으니까 나랑 같이 있고 싶다고 말해.
독현이 사라진 후. 부주가 멍해있는 은돈의 어깨를 짚으며 말했다.
“얌마 차은돈. 그만 됐다. 어차피 경연은 물 건너갔어. 삼 분 후면 예선 시작이거든.”
“부주……”
“너무 상심 마. 우리도 그 스캔들……안 믿어. 뭔가 오해가 있었겠지. 자자! 다들 가서 짐이나 싸자고! 내일 서울 올라가야지.”
“……”
미안함, 좌절감. 그리고 허무한 감정이 차례로 은돈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그녀의 젖어드는 눈가를, 지세가 안쓰럽게 응시했다.
어떤 말로 은돈을 위로해야 할까. 그가 고개를 젖혀 독현이 사라진 복도 끝을 응시했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지금 은돈을 위로할 수 있는 건 단 한 사람뿐이었다.
그게 자신이 아니라는 사실이 지세를 하염없이 아프게 했다.
***
그날 밤.
셔츠 차림으로 호텔 침대위에 누워있는 독현이 보였다.
"Rrrrrrr♪ Rrrrrr♬……"
계속해서 울려대는 핸드폰 벨소리.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은돈의 전화임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가 오른팔로 자신의 눈가를 덮었다.
"Rrrrrrr---♪"
그때 꺼졌던 벨소리가 다시 요란하게 울리기 시작했다. 눈을 뜬 독현이 신경질적으로 셔츠 타이를 풀어 헤쳤다. 그리곤 핸드폰을 집어 들자, 아니나 다를까. 은돈의 번호가 시야에 들어왔다.
그가 핸드폰 전원을 off한 후, 물컹한 물침대위에 걸터앉았다.
일순, 들려오는 짤막한 노크소리. 그가 딱딱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뒤이어 문 앞으로 다가가 문고리를 잡아 돌렸을 때, 꽤나 익숙한 얼굴이 나타났다.
“사장님. 내 전화 일부러 안 받는 거죠.”
“……알면서 찾아온 이유가 뭐야.”
독현이 냉랭한 눈빛을 고수하며 다시 문을 닫으려 하자, 은돈이 잽싸게 한 발을 안으로 디밀었다.
“지세랑 2인1조로 같은 방 써야하는 거 아니에요? 회장님 허락도 없이 이렇게 맘대로 독방 써도 돼요?”
딴소리를 늘어놓는 은돈을, 독현이 매섭게 주시했다.
“비켜.”
“……경연, 좀 전에 끝났어요.”
일순 담담하게 튕겨난 그녀의 말에 독현이 멈칫했다. 그리곤 뭔가를 대꾸하려다 다시 입을 다물었다.
“우승팀도 나왔고, 아깝게 준우승한 팀도 있었어요. 우린……기권이래요. 난 그만두겠다고 한 적 없는데. 웃기죠.”
“……결국 다 니가 자초한 일이야.”
싸늘하게 대꾸하며 독현이 한 손으로 은돈의 어깨를 붙들었다. 그리고 그녀를 문 밖으로 밀어내려는데, 갑자기 덥썩. 은돈이 제 어깨에 걸쳐진 독현의 손을 붙잡았다.
의외의 상황에 독현의 동공이 살짝 부풀었다.
“사장님은. 나 믿어주면 안돼요? 내 말 믿어주면……정말 안돼요?”
떨리는 그녀의 표정을, 독현이 말없이 지켜보았다. 이윽고 그의 입가가 날렵하게 벌어졌다.
“뭘 믿어달라는 거지? 네가 그 자식이랑 자지 않았다는 거?”
그가 냉랭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넌 널 모욕한 이강민의 뺨을 모두가 보는 앞에서 내리쳤어야 했어.”
“사장님,”
“하지만 그 대신 넌, 사과를 택했지. 그것도 꽤나 굴욕적인.”
그의 한 음절 한 음절이 무겁게 가슴을 짓누른다. 은돈이 잠자코 시선을 떨궜다.
“어차피 경연은 끝났고, 이제와 부질없다는 거 알지만……그 스캔들에 대해 해명하고 싶어서 왔어요. 사장님만큼은 날 오해하지 않았으면 좋겠거든요.”
“……”
“사장님만은 내 편이 돼줬으면 한다구요.”
모든 용기를 쥐어짜 은돈이 그렇게 말했다.
독현은 아무 대꾸도 않은 채 그녀의 눈을 똑바로 들여다볼 뿐이었다.
……자기편이 돼달라고?
그의 입가에 자조적인 미소가 스쳤다. 처음부터 은돈의 편이 아니었던 순간이 없었다.
자신의 직감대로라면, 은돈은 그 추잡한 스캔들의 주인공이 아니라 피해자일 뿐이다. 아마도 문소라가 파둔 덫에 걸려든 거겠지.
그럼에도 이토록 화가 나는 이유는, 은돈을 못 믿어서가 아니었다.
“……어째서 조심하지 않았던 거지.”
그가 나직한 어조로 뇌까렸다.
“경연에 그렇게나 목을 맸으면서. 사방이 적이란 걸 알면서……대체 왜 그렇게 방심한 거야.”
좀 더 긴장했어야 했어 넌.
그의 차가운 시선이 은돈의 핏기 없는 얼굴을 내리훑었다.
지금 이 순간, 무기력하기만 한 그녀의 모습이 실망스러웠다. 그리고 동시에 화가 났다.
은돈의 스캔들을 미리 막지 못한 본인 스스로에게 난 화였다.
은돈이 밉고, 은돈이 안쓰럽고.
은돈에게 화가 나고, 동시에 미안하고.
마구 교차하는 감정들에 머리가 터질 듯 복잡했다.
“가 봐.”
이윽고 그가 은돈을 문밖으로 밀어냈다. 지금은 철저하게 혼자이고 싶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으르렁 으르렁대~♪ 으르렁 으르렁대~!♫”
살벌한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는 경쾌한 벨소리가 들려왔다.
은돈이 멈칫하며 손에 든 핸드폰을 내려다보았고, 독현의 시선도 자연스레 액정을 향했다.
-이지세-
액정에 뜬 그 낯익은 이름에, 독현의 눈빛이 얼어붙었다.
그의 머릿속으로 이지세의 잔상이 스치듯 지나갔다.
비즈니스 룸에서 보란 듯 은돈의 손목을 붙잡고 출구로 향하던 그의 모습이.
“받지 그래.”
이제껏 팽팽하게 부여잡고 있던 이성의 끈이 탁 하고 끊어지는 기분이었다.
독현이 손을 뻗어 은돈의 핸드폰을 빼앗아 들었다. 뒤이어 천천히 귀에 갖다 대자 익숙한 음성이 들려왔다.
-누나. 나에요. 지금 어디에요?
"……"
-괜찮으면 지금 나올래요? 내가 위로주 살게요. 나 지금 호텔 로비에,
지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독현이 핸드폰을 쥔 손을 아래로 내렸다.
그리고 다음 순간- 눈앞에 서 있는 은돈을 그가 거칠게 안으로 끌어당겼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그의 거센 손길에 휘어 잡힌 은돈의 입에서 옅은 신음이 터져 나왔다.
“왜이래요 사장님!”
“나한테 네 편이 돼달라고 했지.”
침대 앞 까지 은돈을 단숨에 끌고 간 독현이 날 선 시선을 곧추세웠다.
“한 번 애원해 봐. 그럼 원하는 대로 해줄게.”
“……애원이라뇨. 무슨 의미에요?”
“알잖아. 무슨 의민지.”
독현이 흘깃 고갯짓으로 침대를 가리켰다.
하, 은돈이 기가 막히다는 듯 눈을 부릅떴다. 이어서 독현의 손에 들린 자신의 핸드폰을 낚아채듯 빼앗았다.
“갈게요. 더 이상 사장님이랑 말 섞고 싶지 않아요. 오늘 일, 어떻게든 사장님한테 해명하려고 했어요. 근데 여길 찾아온 것부터가 실수였어요.”
차갑게 돌아서는 그녀를, 독현이 질투와 분노가 뒤엉킨 시선으로 응시했다.
“이지세. 그 자식한텐 쉴 새 없이 여지를 주면서, 나와는 거리를 두는 이유가 뭐야.”
“……내가 여지를 줘요? 지세한테?”
“그렇게 순진한 척, 아무것도 모르는 척 잡아떼면서. 사실은 이지세를 가지고 놀고 있잖아, 너.”
“뭐라구요?”
“그 자식이 절대로 먼저 널 뿌리치지 못할 거라는 걸 알면서. 일부러 다정한 척 웃어주지. 끝내 너에 대한 마음을 접지 못하도록.”
“진짜……상대할 가치가 없네.”
은돈이 독현을 노려보다 문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와 동시에 살벌한, 그러나 동시에 애처로운 독현의 음성이 들려왔다.
“나한테도 그렇게 하면 돼.”
“……?”
“내가 맘을 접지 못하게……다정한 척 웃어봐. 진심 아니어도 돼.”
“사장님,”
“거짓말이라도 좋으니까 지금 나랑 같이 있겠다고 말해. 그럼 난 절대로 널 뿌리치지 못 할 테니까.”
나지막이 이어진 그의 말에 은돈의 눈빛이 일렁였다. 그러나 곧 냉정을 되찾은 그녀가 다시 문가로 향했고, 그 순간 독현이 은돈을 거칠게 벽으로 몰아붙였다.
그리곤 강제적으로 시작된 입맞춤.
“뭐에요! 읍……!”
은돈이 온힘을 다해 독현의 어깨를 밀어냈다. 그러나 독현은 아랑곳 않은 채 다시 입을 맞춰왔다. 맹목적인 그의 시선, 달아날 수 없도록 양 어깨를 짓누른 손길, 목덜미에 와 닿는 매몰찬 숨결.
“이거 놔!”
짜악……! 강렬한 마찰음과 함께 은돈이 그의 뺨을 내리쳤다.
“……”
“……”
찬물을 끼얹은 듯 정적이 흐르는 방 안.
독현의 거친 숨소리가 간헐적으로 들려올 뿐 적막에 휩싸인 그곳에서, 은돈이 입을 열었다.
“사장님이 사람을 좋아하는 방식은 완전히 삐뚤어져 있어요. 그래서 상대방을 불쾌하게 만들어요.”
그녀가 자신의 입술을 손등으로 세차게 문질렀다. 마치 더러운 병균이라도 옮은 양. 독현이 그 모습을 빤히 응시했다.
“더 이상 나 좋아하지 마세요. 그거……나한테 민폐에요.”
말을 마친 은돈이 그대로 방을 뛰쳐나갔다. 그녀의 뒷모습을 참담한 시선으로 쫓던 독현이 곧 털썩, 침대위에 걸터앉았다.
“……”
세차게 맞은 왼쪽 뺨이 아직도 얼얼했다.
무엇이 그를 이토록 급하고, 초조하게 만들었을까. 왜 이렇게 화가 나는 걸까.
시도조차 못해보고 끝나버린 경연 때문에?
순간 눈앞을 아른대던 심사위원 이강민과 은돈의 치욕스런 사진 때문에?
아니면 이지세의 도발 아닌 도발 때문에?
이유가 뭐가됐든, 은돈에게 함부로 대한 자신의 행위를 합리화시킬 순 없었다.
그가 위태로운 눈빛으로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아직도 은돈의 떨림이 고스란히 묻어있었다. 분명 자신을 겁내고 있었다.
하. 그의 입에서 나직한 숨이 터져 나왔다. 모든 것이 엉망으로 치닫고 있었다.
경연도, 은돈과의 관계도.
***
“……나쁜 자식.”
호텔 방으로 향하는 엘리베이터 안. 은돈이 가늘게 떨리는 어깨를 양손으로 쓸어내렸다.
“나쁜 놈. 뭐 그런 자식이 다 있어……거지같은 자식. 머저리, 최악……”
멘붕에 빠진 그녀가 생각나는 대로 지껄이며 촤륵, 열리는 엘리베이터에서 내려섰다.
그리곤 자신의 방을 향해 몇 발짝쯤 걸었을까.
“……누나?”
앞에서 들려오는 음성에, 은돈이 고개를 쳐들었다. 그러자 약간 당황한 듯한 지세의 모습이 보였다.
“어디 다녀와요? 방에 있는 줄 알았는데.”
그가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힐끔, 은돈이 그의 등 뒤로 보이는 자신의 방을 응시했다. 아니, 정확히 그녀의 시선은 문고리에 걸려있는 아이스크림 백을 향해있었다.
“저거 뭐야?”
“아……단 거 먹으면 힘이 좀 나잖아요. 누나 술 마실 기분 아닌 것 같아서.”
지세가 말을 잇다말고 눈물이 그렁그렁한 은돈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근데……그냥 술 마실 걸 그랬죠.”
“……”
“무슨 일 있어요?”
그가 상체를 수그려 은돈에게 얼굴을 가까이 했다. 그리곤 자신의 엄지로 은돈의 젖은 눈가를 다정하게 닦아주었다.
“왜 울어요?”
“아니. 별일 아냐.”
별일 아니라고. 그런 표정을 해서는.
“경연 때문에 그러는 거면……너무 속상해 하지 마요. 부주랑 경훈선배. 누나 원망하지 않아요. 두 사람 지금 어디 갔는 줄 알아요? 한라산 야간 산행 투어요.”
“뭐……?”
“여기까지 왔으니 뭐라도 해야겠다나. 아, 감귤이랑 오미자 원액도 잔뜩 사재기했어요. 웃기죠.”
“……”
은돈이 자신의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 부단히 애쓰는 지세를 보며, 문득 독현의 말을 떠올렸다.
‘그렇게 순진한 척, 아무것도 모르는 척 잡아떼면서. 사실은 이지세를 가지고 놀고 있잖아, 너.’
‘그 자식이 절대로 먼저 널 뿌리치지 못할 거라는 걸 알면서. 일부러 다정한 척 웃어주지. 끝내 너에 대한 마음을 접지 못하도록.’
“……미안해.”
일순 그녀의 입에서 터져 나온 한마디. 지세가 의아한 듯 고개를 치켜들었다.
“뭐가요?”
“그냥……미안해 이지세. 그러니까 나한테 잘해주지 마.”
“……”
“잘해줄 필요 없어.”
은돈의 말에, 지세가 무슨 뜻인지 알겠다는 듯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내 일방통행이 부담스러우면 누나도 나한테 잘해주면 되잖아요.”
“……어떻게 하면 돼? 너한테 잘하려면.”
……사장님이 아니라 날 봐줘요.
지세가 머릿속에 맴도는 그 한마디 대신 다른 말을 내뱉었다.
“나한테 잘하고 싶죠. 그럼 저거 먹고 힘내요.”
그가 등 뒤의 아이스크림을 장난스레 가리켰다.
여전히 웃는 낯의 그를 보며, 은돈이 차마 따라 웃을 수 없어 시선을 내리 깔았다.
***
같은 시각, 독현이 자신의 호텔방 안으로 아무렇지 않게 들어서는 소라를 어이없다는 듯 노려보았다.
“이번엔 너야……?”
“왜. 또 누가 다녀갔어?”
한 치의 어색함도 없는 몸짓으로 그녀가 독현의 침대위에 걸터앉았다.
“피곤하니까 나가.”
독현이 창가로 시선을 비틀었다. 지금은 누구도 상대하고 싶지 않았다.
“나 할 말 있어서 온 거야. 차은돈에 관한 얘긴데……안 들으면 누가 손핼까.”
“……”
농밀하게 입을 놀리는 그녀를 향해 다시 독현의 고개가 돌아갔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소라가 피식 웃었다. 그리곤 여유롭게 다리를 꼬았다.
“내일 재미있는 기사가 하나 나갈 거야. 차은돈에 관한.”
“……뭐?”
“너도 이미 예상했겠지만……그 섹스스캔들 말이야. 정말이지 언론의 좋은 먹잇감 아니니? 지명준 회장의 이름을 내건 대회에서 벌어진 일개 요리사의 몸 로비라……”
“하고 싶은 말이 뭐야.”
독현의 건조한 물음에 소라의 눈빛이 번득였다.
“만약 기사가 나가면 차은돈은 두 번 다시 주방에 설 수 없을 거야. 그 여자가 잘하는 거라곤 오직 요리뿐인데……불쌍하게 됐네.”
“하고 싶은 말이 뭐냐고 물었어.”
“차은돈의 기사를 막을 수 있는 방법이 하나 있어. 그것보다 더 큰 가십을 기자에게 제공하고 딜을 하는 거야. 너도 알지. 회장님이 자주 쓰시는 방법이잖아.”
소라가 반대편 다리를 꼬며 느슨했던 자세를 바로 했다.
“우리가 결혼 발표를 하면……차은돈의 스캔들 정돈 가볍게 묻을 수 있어.”
결혼? 소라의 입에서 튕겨 나온 그 말에 독현이 실소했다.
“비웃지마. 어차피 해야 할 결혼이야. 조금 앞당기는 것뿐이고. 회장님은 이미 이 딜을 수락하셨어. 근데 난…… 네 생각이 궁금해. 어때? 우리 결혼, 이대로 발표해?”
어차피 독현에겐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소라가 잔인한 미소를 머금었다.
지독현. 도망칠 생각 마. 네가 차은돈을 지킬 수 있는 다른 방법은 없어.
“이거, 자기 전에 읽어둬. 내일 결혼 발표 후에 인터뷰가 빗발칠 거야. 그전에 너랑 나, 말 좀 맞춰놔야 할 것 같아서.”
소라가 침대 맡에 서류파일을 내려놓았다.
“그럼 쉬어. 내일 해야 할 일이 많아.”
자리에서 일어난 그녀가 곧 독현의 방을 빠져나갔다. 탁,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독현의 입에서 짤막한 한숨이 뱉어졌다.
“……”
그가 말없이 소라가 두고 간 서류를 집어 들었다.
두 사람이 자주 찾은 데이트 명소라던가, 독현이 소라에게 한 프로포즈에 관한 내용이 마치 사실처럼 그럴듯하게 쓰여 있었다.
꽤 오랫동안, 독현이 그 거짓말들을 읽어 내렸다. 그리곤 머지않아 결심이 선 듯 탁-! 서류를 덮었다.
***
다음날.
“헐!? 헐헐! 대박! 야 이지세! 너 이거 봤냐!? 이……이 기사!”
지세의 호텔 방 안으로 들이닥친 경훈이 손에 쥔 기사를 펼쳐 보이며 호들갑을 떨었다.
“선배, 짐 안 싸요? 나가야죠 우리.”
“얌마 지금 그게 중요하냐! 이거 봐, 이 기사! 사장님이 아무래도 미친것 같아!”
숨이 넘어갈듯 소리치며, 그가 지세에게 기사를 건넸다.
“……”
이내, 기사의 헤드라인을 본 지세의 얼굴이 굳어졌다.
-대성명가 지독현 씨의 충격 식이장애 고백!-
-그는 유년 시절 친모의 자살을 목격한 트라우마가 식이장애로 발현된 케이스로……-
-지씨의 친모이자 재벌가의 트러블 메이커, 여배우 성나희 씨는 누구인가?-
-지씨는 본지를 통해 자신의 식이장애와 얽힌 과거사를 가감 없이 공개하겠다고 밝혀,-
“……이 기사, 또 누가 봤어요?”
고개를 치켜 든 지세가 차분한 어조로 물었다. 이에 경훈이 모르겠다는 듯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한편, 그 시각.
쾅쾅! 요란한 노크소리에 은돈이 문밖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그러자 기사를 손에 쥔 소라의 모습이 나타났다.
“당신이 여길 왜,”
은돈이 채 말을 잇기도 전에 소라가 그녀의 얼굴위로 기사를 내던졌다.
“무슨 짓이야!?”
화가 난 은돈이 목소리를 높이자, 소라가 온몸을 부들부들 떨며 바닥에 떨어진 기사를 가리켰다.
“니가 막아 달라 그랬니?”
“무슨 소리야!?”
“니 스캔들 하나 막자고, 이런 기살 터뜨려? 이제 어쩔 거야? 너 때문에 지독현의 치부가 전 국민 입에 오르내리게 됐는데!”
“무슨 소리냐고 묻잖아!”
은돈이 높은 소리로 되묻자 소라가 발끝으로 툭, 기사 1면을 건드렸다.
“읽어봐.”
“……”
살짝 미간을 좁힌 은돈이 허리를 수그려 신문을 집어 들었다. 그리곤 독현의 기사를 읽기 시작했다.
-지독현 씨는 본지를 통해 친모와 얽힌 자신의 과거사를 빠짐없이 공개 하겠다고 답했다. 앞서 그는 오랫동안 증권가에 떠돌던 찌라시가 전부 사실임을 밝히며 자신이 음식물 섭취에 제한이 있는 식이장애 환자라고 말했다.-
“이게 무슨……?”
은돈이 멍한 소리로 읊조리며 다시 기사에 시선을 고정했다.
-지씨는 유년 시절, 미모의 여배우였던 어머니로부터 끊임없는 죽음의 공포를 느꼈다고 한다. 실제로 그는 인터뷰 도중, 친모에게 목을 졸렸던 기억을 상기하기도 했다.
어린 시절에 겪은 친부의 사고사, 그 후 이어진 친모의 자살은 그에게 치명적인 트라우마로 남았다. 특히 친모의 죽음을 직접 목격한 것이 아직까지도 그의 발목을 잡아……-
“말도 안 돼.”
은돈이 기사를 읽다말고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그녀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있었다.
“설마……내 스캔들을 막으려고 대신 이 기사를 낸 거야?”
은돈의 물음에 소라가 붉게 충혈된 눈을 치떴다. 지금 누구보다 괴로운 건 바로 그녀 자신이었다.
“내가 바란 건 이런 게 아냐……절대 지독현을 궁지로 몰아넣고 싶지 않았어.”
난 단지 차은돈 널, 내 눈앞에서 치워버리고 싶었어.
“꺼져버려 너.”
소라가 격앙된 한마디를 뱉었다. 그리곤 은돈에게서 홱 돌아섰다.
독현에게 가야만 했다. 가서, 그를 위로해야 했다. 아무도 그를 두고 수근 대지 못하게 자신이 지켜야 했다.
“……”
잠시 후. 소라가 사라진 복도 끝을 말없이 응시하던 은돈이 다시 기사를 향해 고개를 내렸다.
-당대 최고의 여배우에서, 돌연 은퇴를 선언하고 재벌가의 신데렐라로 발돋움했던 지씨의 친모 성나희 씨는 남편의 사고사 이후 극심한 우울증세를 호소했고 가학적일만큼 외모에 집착했다고 한다.
지독현 씨는 당시 친모에게 학대당한 기억을 완전히 지우지는 못했다고 고백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치명적인 과거사를 드러낸 이유가 뭐냐는 기자의 질문에, 그는 밝힐 때가 되었을 뿐 다른 이유는 없다고 답했다.-
……밝힐 때가 되었을 뿐 다른 이유는 없다.
은돈이 기사 말미에 적힌 그 말을 몇 번이고 반복해 읽었다.
“나 때문이야……나 때문에 밝힌 거야.”
그녀가 당장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로 입술을 깨물었다.
그 와중에, 자신이 독현을 상처 입혔던 말들이 자꾸만 귓전을 울렸다.
‘사장님이 사람을 좋아하는 방식은 완전히 삐뚤어져 있어요. 그래서 상대방을 불쾌하게 만들어요.’
‘더 이상 나 좋아하지 마세요. 그거……나한테 민폐에요.’
“……하.”
은돈이 잦아드는 숨을 터뜨리며 양손에 얼굴을 파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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