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화. 지독현, 쓰러지다
조리대 앞.
은돈이 스테이크용 소고기를 랩핑하며, 옆에 선 소라에게 일장연설을 펼치고 있었다.
“일단 코셔 솔트로 고기 핏물을 뺀 후에요, 이렇게 랩핑 해서 냉동고에 살짝 얼리는 거에요. 굳이 이 좋은 투뿔 한우를 왜 얼리느냐. 그래야 육질이 훨씬 부드러워지거든요. 말인즉……”
설명에 열을 올리던 은돈이 문득 입을 닫고 소라의 얼굴을 살폈다.
뭐야. 전혀 듣고 있질 않잖아.
“문소라 씨.”
“……”
“문소라 씨!”
“……얘기해요. 귀 안 먹었으니까.”
“왜 그래요? 꼭 넋 나간 사람처럼. 무슨 일 있어요?”
“아뇨. 계속하시죠. 이제부터 잘 들어 줄 테니까.”
“후……겨우 둘째 날부터 지각에, 복장불량에, 아이구야? 매니큐어까지? 문소라 씨 주방에서 일할 맘 없죠?”
“당연하죠.”
“당연하죠? 지금 당연하다고 했어요?
기가 차 되묻는 은돈을 향해, 소라가 눈을 치떴다.
“대충 좀 하죠. 차.은.돈.조리사님? 딱 보면 몰라요? 내가 여기 일하러왔겠어?”
“허?”
“어차피 이거 다 쇼라구. 곧 이 레스토랑과, 대성명가의 안주인이 될 사람으로서, 당신 같은 일개 직원들한테 좋은 인상을 심어주기 위한 쇼. 이렇게 밑바닥부터 시작해야 누구처럼 낙하산으로 들어왔다고 욕먹지 않을 테니까.“
낙하산? 저게 지금 날 디스했겠다.
“낙하산인지 아닌진. 일단 이거부터 맛보고 판단 하시죠. 내가 만든 육수에요.”
은돈이 냉장고에서 꺼낸 초계탕 육수를 탕! 조리대위에 내려놓았다. 순간 소라의 눈빛이 일렁였다.
“치우죠? 비린내 나니까.”
“?! 비린내라뇨? 하나도 안나는구만!”
당황한 은돈이 스푼을 들고 육수를 맛보려는 찰나.
그래, 그때였다.
깔끔한 수트 차림의 독현이 총지배인을 대동한 채 주방 안으로 들어섰다.
“워, 사장이 웬일로 시찰을 다 나왔대.”
“웬일은. 지 애인이랑 세컨드가 한 주방에 있으니 신경 쓰이나 보지.”
키가 껑충한 조리사의 말에 나머지들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문소라 씨. 일찍 나왔네요? 주방 일은 어렵지 않나요?”
소라의 곁으로 다가온 총지배인이 살갑게 운을 뗐다.
“차은돈 조리사님이 아주 특별히 신경써주신 덕분에 꽤 할 만 한데요?”
소라가 은돈을 가리키며 새침하게 말했다. 순간 맞은편의 독현과 소라의 눈이 마주쳤다.
그가 뭔 갈 말하려는 찰나 소라가 먼저 생긋 웃어보였다.
어젯밤 일은 잊어줘.
미소의 의미를 눈치 챈 것일까. 독현이 입을 다문 채 한동안 소라를 응시했다.
그때 은돈의 목소리가 그의 귓전을 울렸다.
“사장님이 주방엔 어쩐 일로……?”
“보면 몰라. 공적인 업무 중이야.”
독현이 코앞의 은돈을 내려다보며 딱딱하게 말했다.
“공적인 업무……?”
그때부터였다. 독현이 고고한 시선으로 주방 이곳저곳을 가리키며 갑질을 시작한 것은.
“부주. 저건 뭐지. 굉장히 사적인 물건 같은데.”
그가 주방 구석 콘센트에 꽂혀있는 휴대폰 충전기를 가리키며 말했다.
“아 네 당장 치우겠습니다!”
“앞으로 저런 공적이지 못한 물건은 절대 이 주방에 들이지 말도록. 그리고 거기 너희 둘.”
“네,넵?”
독현이 귓속말을 주고받던 주방 조리사 두 명을 삐딱하게 응시했다.
“공적인 업무 시간에 사적인 잡담은 금지해.”
“넵!”
“그리고 당신. 그래, 거기 불 앞의 너. 얼굴이 왜 그 모양이지?”
“예?”
“너무 사적으로 생겼잖아.”
“……?”
“맘에 안 들어. 나 보지 마. 딴 데 봐.”
“아……예.”
간지 나는 콧수염을 보유한 불앞의 조리사가 어안이 벙벙한 채 벽 쪽으로 돌아섰다.
모두가 침묵하는 가운데 독현이 거만한 눈빛을 빛냈다.
“다들 표정이 왜 그래? 앞으로도 주방에선 공과 사를 철저히 구분하도록.”
힐끗. 그가 은돈을 돌아보며 마치 들으라는 듯 말했다.
아아……그랬군. 그거였어.
은돈이 비로소 알겠다는 듯 오늘 아침 독현과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렸다.
‘……너 나한테 화난 거 아니었어?’
‘화났어요. 그래도 공과 사는 구분해야죠. 그래야 봉급이 나올 거 아닙니까.’
‘기다려. 데려다줄 테니까.’
‘워.워. 사장님. 우리 공과 사는 구분하자니까요.’
하여간. 지독현 저 인간 유치한 걸로 치면 세계 일등이여.
요 앞 상설유치원 기린 반 막내에 버금갈 유치함이 아닌가.
은돈이 쯔쯧 가볍게 혀를 차며 심통난 독현의 얼굴을 올려다봤다.
“사장님? 공적인 업무 보느라 수고 하시는 건 알겠는데요. 잠깐 길 좀 비켜주시죠.”
그녀가 홱 독현을 옆으로 치우며 곁을 지나쳤다.
그때 그녀를 아니꼬운 시선으로 지켜 보던 총지배인이 은근 슬쩍 발을 걸었고.
“어어?”
중심을 잃은 은돈의 가는 몸뚱이가 슬로우 모션으로 바닥에 내리 꽂히려는 그 순간.
“누나!”
“차은돈!”
동시에 손을 뻗은 독현과 지세가 각각 사이좋게 은돈의 양팔을 붙들었다.
“……놓지 그 손.”
“……먼저 놓으시죠.”
은돈을 사이에 둔 두남자의 시선이 날카롭게 맞붙었다.
“저기요. 둘 다 놓으세요.”
탁! 은돈이 그들의 손길을 뿌리쳤다.
“그럼 전 이만. 부주, 재료 창고 좀 다녀올게요.”
그녀가 절레 절레 고갤 흔들며 주방을 벗어난 직후……
약간 뻘쭘해진 독현이 짐짓 포커 페이스를 유지하며 총지배인을 향해 말했다.
“가지.”
“네 사장님!”
머잖아 총지배인의 유난스런 에스코트와 함께 독현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기다렸다는 듯 부주가 조리모를 벗어던지며 볼멘소리를 튕겨냈다.
“아니 뭐 여기가 지독현이 사랑터야? 쟤 우결 찍어? 지금 대체 이게 몇 각 관계야?! 누군 연애 할 줄 몰라서 안하나! 나도 맘만 먹으면!”
“저, 부주!”
곁에 서있던 조리사가 곁눈질로 소라를 가리켰다.
허걱 하며 자신의 눈치를 살피는 그들을 보며, 소라가 픽 웃어보였다.
“하던 욕 마저 하세요. 내 속이 다 후련해지는 것 같으니까.”
***
옥상 정원.
모종삽을 든 은돈이 능숙한 손길로 화분 분갈이에 열중하고 있었다.
그때, 등 뒤에서 불쑥 나타난 손 하나가 테이크아웃 커피 잔을 내밀었다.
“스토커에요?”
은돈이 독현을 돌아다 보지도 않고 물었다.
“뭐?”
“사장님 오전 내내 내 꽁무니만 따라 다니고 있잖아요. 아까 주방에서부터 재료창고, 직원 휴게실, 다시주방. 그리고 지금 옥상까지.”
은돈의 말에 독현이 고집스레 고개를 치켜들었다.
“어쩌다 너랑 동선이 겹친 것 뿐이야.”
“아 그래요. 그럼 여긴 뭐 하러 올라왔어요?”
“……자외선이나 쬘까하고. 왜. 불만 있나.”
자외선이란다.
은돈이 푸쉬쉬 바람빠지는 소리로 한숨을 내쉬며 다시 분갈이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독현이 그녀를 말없이 바라보다 옆에 놓인 간이 의자위에 달큰한 카라멜 마끼야또를 내려놓았다.
“마셔.”
“사장님 드세요. 저 단거 끊은지 오래에요.”
“여자들은 이런 거 좋아한다던데.”
“글쎄 전 단 거 싫어해요.”
“……내가 줘서 싫은 게 아니고?”
은돈이 멈칫하며 독현을 올려다보았다.
나한테 미움 받고 있음을 너무도 잘 아는 이 남자.
그럼에도 고고한 자존심까지 버린 채 내게 직접 사온 커피를 들이미는 이 남자.
어째서지. 저 표정, 묘하게 안쓰럽다.
그녀가 살짝 누그러진 목소리로 독현을 향해 말했다.
“사장님 때문이 아니라……단 거 먹음 살찌잖아요. 요즘 안 그래도 일점 오키로나 불었단 말이에요.”
일점 오키로? 독현이 어이 없다는 듯 여리 여리 날씬한 몸집의 그녀를 훑었다.
“고작 일키로에 유난 떨 필요 없잖아 이젠.”
“유난이요? 내가 얼마나 힘들게 살을 뺐는데요. 좋다고 이것저것 받아먹다가 다시 찌면 사장님이 책임질래요?”
“그래.”
“……”
“내가 책임진다고 너.”
“하이고. 됐네요.”
약간 머쓱해진 은돈이 다시 화분을 향해 몸을 돌렸다.
바닥에 쭈그린 채 열정적인 분갈이중인 그녀를, 우뚝 선 독현이 물끄러미 응시했다.
일순 흙투성이가 된 그녀의 손에 시선이 머물렀다.
"뭐야. 너 요리사라며."
"? 그게 왜요."
"요리하는 여자 손이 그게 뭐야. 흙이나 묻히고.“
”흙이 뭐 더러운가. 사장님 나 지금 바쁘거든요? 지배인님이 여기 있는 화분 전부 점심시간까지 분갈이 해두랬어요 그니까 하실 얘기 없으면,“
“비켜.”
“아!”
독현에게 홱 밀쳐져 엉덩방아를 찧은 은돈의 입에서 단말마의 신음이 터져 나왔다.
“아 왜 사람을 밀고 그래요!”
“내가 할테니까 저리가. 흙 묻어.”
이건 뭐시여……원빈의 오지마 피묻어 패러디냐?
은돈이 서툴게 모종삽을 쥔 독현을 미덥잖은 시선으로 응시했다.
“분갈이 해보셨어요?”
“그게 뭐지?”
“ ? 지금 사장님이 하고 계신거요……”
쑤우욱.
은돈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독현이 와일드한 손놀림으로 화분에 심어진 장미허브를 우두둑 뽑아들었다.
“악! 그렇게 마구잡이로 잡아 뜯으면 어떻게 해요! 봐 이거! 뿌리 다 나갔잖아! 사장님, 은근 허당인 거 알아요? 도대체가 돈 자랑, 얼굴자랑 빼곤 잘 하는게 없어 씨.”
궁시렁대는 은돈을 보며 꿈틀, 독현의 눈썹이 치솟았다.
“이 화분들. 어차피 내. 개인재산 아닌가? 그러니까 뿌리를 뽑든, 꽃을 꺾든, 갖다 버리든 내 맘이야.”
“와우……너무 유치해서 순간 저도 모르게 할 말을 잃었네요. 사장님 거니까 더 소중히 다뤄야죠. 불면 날아갈까, 건들면 부서질까! 어떻게 자기 거 아낄 줄을 몰라?”
잔소리를 퍼붓는 은돈을 보며 독현이 듣기 싫다는 듯 인상을 찡그렸다.
그런 그에게 한마디 더 쏴붙이기 위해 고개를 치켜든 순간. 어라? 은돈의 동공이 커다랗게 부풀었다.
“뭐……하세요. 지금?”
그녀가 제 머리 위로 드리워진 독현의 커다란 손을 올려다보았다.
“너 얼굴 타잖아.”
따가운 뙤약볕을 가리고 선 그의 입에서 시니컬한 음성이 뱉어졌다.
“니가 날 잘못 봤어. 난 내 건 소중히 다루거든. 불면 날아갈까. 건들면 부서질까……그렇게.”
우스울 만큼 심각한 얼굴로 독현이 말했다.
그와 동시에 은돈의 두 뺨 위로 퐁! 홍조가 피어올랐다.
“누, 누가 나 잘해주래요? 난 사장님 거 아니에요. 그러니까 화분이나 잘 가꾸세요. 여기 봐요 꽃피었네. 자그마한 게, 너무 귀엽지 않아요?”
붉어진 얼굴을 들킬세라 딴소리를 늘어놓는 은돈을, 독현이 삐딱한 시선으로 응시했다.
“겨우 그걸 귀여워하는 네가 더 귀여운데.”
으윽. 순간 은돈이 벼락이라도 맞은 듯 가슴을 움켜쥐었다.
“저기요. 그런 말하기 전에 미리 예고 좀 때리세요. 오글거려서 죽을 뻔요.”
“? 난 내 감정에 충실할 뿐이야. 다시말해줘? 내가 아껴주고 싶은 건 화분이아니라 너,”
“악! 아악! 안 들린다! 안 들려.”
그의 일방적이고 저돌적인 애정표현엔 진절머리가 난다는 듯 은돈이 귀를 막고 아악.악. 고성을 내질렀다.
진짜로 유치한 게 누군데.
독현이 초딩 은돈을 보며 어이가 없다는듯 한쪽 입가를 끌어올려 피식 웃었다.
그 웃음에 묘하게 두근거리는 마음을 은돈이 애써 다잡으며 다시 삽을 쥐어들었다.
……같은 시각. 주방.
“어이 막내, 쉬는 시간에 누가 불앞에 붙어있으래. 빨리 안 쉬어?”
짓궂게 으름장을 놓는 부주를 보며 지세가 능숙한 손길로 팬을 돌리다 쌩긋 웃었다.
“그나저나 너 뭐 만드는데?”
“바닐라 파나코타요.”
“파나코타? 그거 이태리 푸딩 아냐? 왜 누구 만들어주려고?”
“……차은돈씨요.”
나직이 웃어 보이는 지세를 보며 부주가 알만 하다는듯 쯔쯔 혀를 찼다.
“불쌍한 우리 막내. 그냥 포기해라. 차은돈이 고거, 사장 이거 아냐 이거.”
부주가 본인의 새끼손가락을 짤랑짤랑 흔들어보였다.
“그런 거 아니에요. 두 사람.”
지세가 살짝 미간을 좁히며 즉각 대답했다.
“으유 짜식. 발끈하는 거 보니 너도 남자구나. 힘냄마! 난 널 응원한다! 너한테 오천원 걸께!”
부주가 지세의 어깨를 오버스럽게 두드리곤 돌아섰다.
“아 깜짝아! 어, 언제부터 여기 계셨대?!”
“아까부터요.”
소라가 놀란 부주를 향해 싱긋 웃어보였다. 그리곤 곧장 지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이지세 씨? 차은돈 씨랑 점심 같이 하기로 했어요?”
“……?”
“아 다른게 아니고, 은돈씨가 이 앞 브런치 까페에서 기다리겠다고 전해달래요.”
“브런치 까페요?”
“네. 벌써 내가 편해진 건지 이런 잔심부름을 다 시키네요?”
“……”
“하여간. 난 분명 전달 했어요?”
소라가 의아해 하는 지세를 살짝 밀치며 곁을 지나쳤다.
“니들은 여기 놔두고 왜 남의 가게에서 밥 약속을 잡냐 잡길? 후딱 먹고 들어와, 알겠어?”
등 뒤로 지세를 볶는 부주의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소라가 못들은 척 걸음을 옮겼다.
이윽고 그녀의 입가에 야릇한 미소가 걸렸다.
***
“지세가 어디서 날 기다린다구요?”
“왜 있잖아요? 이 앞 사거리, 브런치 키친.”
휴게실 복도.
소라가 은돈의 앞을 가로막은채 말을 이었다.
“오늘. 차은돈씨랑 점심 약속 있다면서, 올 때까지 기다리겠다고 했어요.”
“아.“
은돈이 난감한 표정으로 옅은 한숨을 내뱉었다. 그녀의 표정을 캐치한 소라가 태연히 입을 열었다.
“지독현, 아니 사장님 때문에 그래요?”
“네?”
“걱정 말아요. 그 사람 점심은 내가 챙길 테니까.”
“문소라씨가 직접요?”
“뭘 그렇게 놀라요? 나 차은돈 씨 보조잖아요. 설마 차리는 것도 못할까봐서? 오늘메뉴 초계탕이죠? 내가 준비해서 내갈게요. 모르는 건 부주한테 물어보구요.”
“……”
“이지세 씨 기다리잖아요. 가봐요 얼른. 나 사장님이랑 단둘이 할 얘기가 있어서 그래요.”
“……그럼. 오늘만 부탁 좀 할게요.”
자신을 기다릴 지세 때문에 마음이 조급해진 탓일까. 은돈이 서둘러 걸음을 돌렸다.
의외네 문소라. 빈둥빈둥 시간만 때우다 갈 줄 알았더니.
짐짓 멈취 선 그녀가 살짝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나 이내 정신이 든 듯 다시 걸음을 재촉했고.
……그로부터 얼마 후.
“헙……헉…… 이지세. 많이 기다렸어?”
아기자기한 소품으로 이루어진 브런치 까페. 은돈이 가쁜 호흡을 내뱉으며 야외 테이블 앞으로 다가섰다.
“누나. 달려온 거에요?”
털썩. 맞은편에 앉는 그녀를 향해 지세가 빠르게 물 잔을 건넸다.
덥썩 받아든 은돈이 벌컥벌컥 잔을 들이 킨 뒤 비로소 살겠다는 듯 하, 숨을 내쉬었다.
“너 기다린대서 달려왔지. 근데 왜 직원식당 놔두고 여기서 보자고한거야?”
“……누나가 보자고 한 거 아니었어요?”
지세의 말에 은돈이 큰 눈을 깜박였다.
“니가 오늘 같이 점심 먹자고……”
“그건. 누나가 곤란해 하는 것 같아서……이따가 이것만 전해주려고 했는데.”
지세가 테이블 위, 예쁘게 포장된 바닐라 파나코타를 가리켰다.
“푸딩이네. 디저트.”
“누나 밥은 사장님이랑 먹어야 하잖아요. 아깐 괜히 고집 부려서 미안해요. 난감했죠?”
“아냐 아냐!”
“이거. 내가 만든 건데 먹어보고 평가 좀 해줄래요?"
"아. 고마워."
은돈이 포장된 파나코타를 받아들었다.
뭐지……? 지세가 여기서 날 기다리겠다고 한 게 아니면. 문소라가 중간에서 말을 잘못 전달했나?
“누나.”
“어? 어!”
잠시 생각에 잠겨있던 은돈이 회까닥 고개를 쳐들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같이 점심 먹을까요?”
살짝 웃으며 물어오는 그를, 은돈 역시 입가에 미소를 띤 채 마주 보았다.
고백 받은 직후라 어색 할 줄 알았는데……이상해. 지세랑 있으면 마음이 편하다.
아무것도 재지 않아도 돼.
지독현, 그 남자랑 있을 땐 가슴에 번개가 쳤다가 비바람이 불었다가 난리도 그런 난리가 없구만.
“너 뭐 먹고 싶어? 내가 쏠게.”
“아뇨. 내가 살게요.”
글씨가 잘 보이도록 메뉴판의 위치를 뒤집어 자신에게 건네는 지세를 보며, 은돈이 풋 웃었다.
“그럼 볼까. 뭐가 맛있나……”
그녀가 매의 눈으로 메뉴판을 차근차근 훑어 내렸다.
그런데 그때, 총지배인과 홀 직원 몇이 야외 테라스로 들이닥쳤다.
“차은돈씨! 대체 여기서 뭐해요?!”
“네? 지배인님이야말로 여긴 어쩐 일이세요?”
“당신 지금 뭐하냐구요 여기서!”
“저야 당연히 점심시간이라 밥먹으러,”
“지금 그런 태평한 소리가 나옵니까?! 사장님이 쓰러지셨는데!?”
“네?”
일순 은돈의 얼굴에 웃음기가 사라졌다.
“쓰러지다뇨? 왜, 왜요?”
“그거야 당신이 더 잘 알겠지!”
지배인의 날카로운 외침에 은돈의 동공이 출렁였다.
그때, 한발 늦게 브런치 까페로 들어선 부주가 굳은 얼굴로 소리 쳤다.
“차은돈 너 대체 정신이 있는 놈이야!”
“부주?”
“초계탕 육수! 네가 견과류 갈아 넣었지!”
“ ?! 아뇨, 뺐는데. 분명히 견과류는 하나도 남김없이 뺐어요! 근데 왜……”
“니 육수 망에 달라붙은 견과류 찌꺼기까지 내가 확인하고 오는 길인데 계속 발뺌 할래?! 내가 말했지! 아나필락시스 쇼크! 사장님한텐 치명적이라고!”
“그게 무슨, 대체 무슨 일인데요 부주!”
“사장님 쓰러지셨다, 네 그 무성의한 요리 때문에!”
“……뭐라구요?”
“너 여기서 노닥거리는 동안에, 문소라 씨가 빠르게 병원으로 후송조치 했어. 너 임마 네가 요리사야? 책임감 이라곤 쥐뿔도 없는,”
벌떡.
부주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은돈이 자리에서 튀어 올랐다.
“사장님이 나 때문에 쓰러졌단 말이에요?”
내가 만든 요리 때문에……?!
하얗게 질린 은돈이 더듬대며 테이블을 짚었다.
그 순간 쨍강! 소리와 함께 그녀가 건드린 물 잔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아……”
산산 조각난 발밑의 유리 잔해를 보며, 은돈이 반사적으로 몸을 수그렸다.
그리곤 허둥대며 맨손으로 유리파편을 집어들다 곧 짤막한 신음을 터뜨렸다.
“헐……피난다.”
부주 옆에 섰던 홀 직원 하나가 피가 선명한 은돈의 오른손을 보며 으, 인상을 찡그렸다.
지세역시 얼굴을 굳히며 은돈에게 다가섰다.
“누나 손 이리 줘 봐요.”
“지세야. 미안한데 밥은 다음에 먹자. 나 사장님한테 가봐야겠어.”
“알겠으니까 일단 손 내놔 봐요.”
“아니……”
“다쳤잖아요!”
지세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누나도 다쳤다구요. 지금.”
그가 은돈의 손을 거머쥐었다.
“임시로 지혈부터 해야겠어요.”
목에 두른 조리 타이를 거친 손길로 끌러내며 지세가 말했다.
이윽고 그가 은돈의 다친 손을 자신의 타이로 능숙히 감싸 매기 시작했다.
“……나 사장님한테 가봐야 돼.”
은돈이 다친 제 손을 지그시 내려다보다 말했다.
“누나.”
“미안.”
지세가 붙잡을 틈도 없이 그녀가 몸을 일으켰다.
그리곤 자신을 노려보는 직원들의 곁을 뭐에 홀린 사람처럼 빠르게 지나쳤다.
“우리 사장님한테 무슨 일 있기만 해 봐! 차은돈 당신 내손으로 쫓아낼 거야!”
“야 차은돈! 얌마 너 어디가! 그 차림으로!”
총지배인과 부주의 서슬 퍼런 외침이 들리지 않는다는 듯, 조리복 차림의 은돈이 테라스를 빠져나갔다.
***
강남 세브란스 병원.
“보자. 구내이상 없고, 발작 없고. 호흡 돌아왔고, 바이탈도 정상이고. 뭐, 걱정 안 해도 되겠네.”
“네?”
“살았다고 이 남자. 일단 위험한 고빈 넘겼어.”
꽤 별종처럼 보이는 중년의 의사가 가운 주머니에 양손을 찔러 넣은 채 소라의 얼굴을 마주보았다.
“살았는데……그런데……왜 일어나질 않는 거죠?”
소라가 자는 듯 침대위에 누워있는 독현을 떨리는 눈으로 훑었다.
핏기라곤 찾아볼 수 없는 얼굴. 아무 표정 없는 그의 얼굴에서 평소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이질감이 느껴졌다.
“지독현. 너 죽은 거 아니지?”
멍하니 묻는 소라를 보며 의사가 쯔쯧 혀를 찼다.
“애인사이야? 쯔. 그렇게 걱정되면 아무거나 주워 먹지 못하게 옆에서 잘 감시했어야지. 이환자 초기에 기도 확보 못했으면 죽을 수도 있었어.”
일순. 소라가 날 선 시선으로 의사를 노려보았다.
“선생님? 그만 나가주시죠.”
그녀의 눈빛에 압도당한 의사가 냉큼 병실 문고리를 잡았다.
“김간, 이따 환자 깨어나면 아미노필린 하나 놔드려.”
“네.”
말을 마친 의사가 병실을 빠져나가자 이내 차트를 뒤적이던 간호사 역시 그 뒤를 따라 나갔다.
“……지독현.”
홀로 남은 소라가 침대 위 독현의 얼굴을 아득한 손길로 쓸어내렸다.
“미안해. 니 목숨 걸고 모험 좀 했어 내가.”
그치만……난 알고 있었어. 겨우 이까짓 일로 잘못될 네가 아니란 거.
마치 입이라도 맞출듯 그녀가 독현을 향해 상체를 수그렸다.
“근데 있잖아…… 한편으론 나, 니가 죽어도 상관없었어.”
묘하게 일그러진 얼굴로 소라가 조소를 머금었다. 그리고 속삭였다.
아무도 손댈 수 없도록 니가 없어져버리는 편이 나아.
……어차피 내 것이 될 수 없다면.
“가끔 삐뚤어진 내 사랑이 나조차도 겁나. 지독현. 그러니까 이제 그만 날 봐줘. 안 그럼 나. 진짜 무슨 짓을 할지 몰라.”
소라가 싱긋 웃으며 독현의 이마위로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그때, 문이 왈칵 열리며 은돈이 안으로 들어섰다.
“사장님!”
“……차은돈 씨? 당신 정말 대단하네. 여기가 어디라고 와요?”
조리복 차림으로 다가서는 은돈을, 소라가 매몰찬 시선으로 제지했다.
“사장님……!”
“내 말 안 들려? 니가 여길 무슨 염치로 왔냐고!”
“사장님은 괜찮아요? 괜찮은 거죠?”
초조한 낯빛의 은돈과 마주 선 소라의 얼굴이 묘한 오기로 빛났다.
화악! 그녀가 거센 손길로 은돈의 양어깨를 붙들었다.
“봐. 똑바로 봐. 네가 오늘 죽일 뻔 한 남자.”
“……정말 내 초계탕 때문이에요? 내 요리에 문제가 있었던 거냐구요.”
순간 소라가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그래, 오늘 그 요리에 장난을 친 건 내가아니라 너야. 너야, 차은돈!
“차은돈 씨? 좀 꺼져줄래요?”
그녀가 은돈의 한쪽 어깨를 거칠게 문밖으로 떠밀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침대위에서 낮은 어조의 한마디가 들려왔다.
“……지금 뭐 하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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