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남자 밥해주기-29화 (29/93)

29화. 사랑을 글로 배운 남자.

“사장님……? 왜 나와요?”

소라와 함께 바 라운지로 향하던 은돈이 지금 막 라운지를 벗어난 독현과 떡하니 마주쳤다.

“차은돈.”

독현이 시기 적절하게 눈앞에 나타난 은돈을 응시했다.

질투와 이유모를 불안감, 그리고 초조함이 엿보이는 복잡한 시선.

은돈은 의아한 얼굴로 그 시선을 마주했고 다음 순간, 독현이 그녀의 손목을 거머쥔 채 출구로 향했다.

“지독현, 너 지금 나보는 앞에서 뭐하는 짓이야!”

소라의 날카로운 외침에도 아랑곳 않은 채, 그가 강한 힘으로 은돈의 팔을 잡아끌었다.

“뭐야!? 이거 놔요 아 또 왜 이런대 갑자기! 술 취했어요? 문소라 씨가 보잖아요!”

은돈이 점차 멀어지는 소라를 돌아다보았다.

“대체 날 얼마나 더 낙동강 오리알 신세로 만들려 그래요! 사장님 때문에 사방이 다 적이라고요, 적!”

“알았으니까 따라와.”

독현이 이번엔 은돈의 팔뚝이 아닌 손을 거머쥐었다.

“소, 손! 이 손 놔요 좀! 놓으라고오오……!”

……밤거리.

발렛 요원이 건네는 차키를 낚아챈 독현이 은돈을 조수석에 밀어 넣고 부서져라 문을 닫았다.

“아, 이 양반이 미쳤나!”

은돈이 운전석에 올라타는 독현을 붉으락푸르락 해진 얼굴로 노려보다, 재빨리 차문을 열었다.

그러나 그녀 쪽으로 상체를 기울인 독현에 의해 다시금 조수석 문이 닫혔다.

“진짜 왜이래요!”

“벨트 매.”

“왜 맨날 이유도 안 알려주고 훅 치고 들어오는 건데요!”

“내가 매줘?”

독현이 급박한 상황과 어울리지 않는 조심스런 손길로 은돈의 어깨를 감쌌다.

이윽고 찰칵- 벨트가 채워지고 은돈이 제게서 떨어져나가는 독현을 황당하게 응시했다.

그 시각, 바 라운지.

털썩.

울 것 같은 표정의 소라가 지세의 맞은편에 몸을 앉혔다.

“…….”

힐끗 그녀를 바라본 지세가 알만하다는 듯 다시 시선을 내렸다.

그리곤 생각에 잠긴 듯 손에 든 칵테일 잔을 천천히 돌렸다.

그러자 푸른 빛깔의 액체가 당장이라도 넘칠 듯 위태롭게 넘실댔다.

……따라가지 않길 바랬는데.

지세가 무표정한 얼굴을 살짝 치켜들었다.

은돈 스스로 독현의 손길을 뿌리치길, 내심 기대했었다.

하지만.

한편으론 이런 결과를 예상하고 있었다.

지금쯤 은돈은 독현의 차에 함께 올랐을 것이다.

그리고 두 사람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타악-!

그가 술잔을 내려놓곤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

도로 위를 미친 스피드로 내달리는 페라리 안에서 은돈의 우악스런 비명소리가 터져 나왔다.

“으아아악! 제발 차 뚜껑 좀 닫을 수 없어요! 콧구멍 시려죽겠다고요 악! 쫌!”

면상 위로 불어 닥치는 칼바람에 눈도 제대로 못 뜬 채, 은돈이 소리쳤다.

그러나 독현은 청개구리처럼 점점 더 속도를 올릴 뿐.

순간 겁에 질린 은돈의 목소리가 협박조에서 애원조로 바뀌었다.

“주, 죽으려면 혼자 죽어요, 사장님! 내가 갓 지은 밥으로 제사는 지내드릴게!”

“꽉 잡아.”

“으으! 제바아아아알!”

단호한 독현을 바라보며 은돈이 절망 어린 비명을 다시 내질렀다.

그 요란한 비명소리가 까만 밤, 도로 위로 가파르게 울려 퍼졌고…….

그로부터 정확히 삼십분 후.

“진짜 초딩입니까, 사장님?! 지금 내 머리 산발된 거 보이죠! 그니까 차 뚜껑 좀 내리라니까!”

청담대교 아래 자전거길.

야간 라이딩을 즐기는 자전거무리가, 대치하고 선 은돈과 독현을 호기심어린 눈으로 훑으며 곁을 지나쳤다.

“하! 사장님 연애 안 해봤어요? 사랑을 글로 배웠냐구요!”

“무슨 소리야.”

“나 좋아한다면서요. 좋아하는 여자한테 대체 왜이래요?!”

“짝사랑은 처음이야.”

“그, 그게 말이야 방구야! 그보다 짝사랑인 거 알긴 알아요?”

“알아.”

어울리지 않게 다소 수그러진 목소리.

훅. 은돈이 뜨거운 숨을 내쉬었다.

“딱 여기까집니다. 제가 사장님 봐드리는 거.”

자연바람이 탄생시킨 미스코리아표 사자머리를 치켜든 채. 은돈이 독현에게서 돌아섰다.

“왜 싫은데.”

“아 뭐가요!”

“내가 싫은 이유.”

자존심이 상해 미칠 것 같은 얼굴을 한 주제에 다시 자신을 붙잡는 독현을 보며…….

은돈이 설레설레 고갤 저었다.

내가 이 남자 성격을 몰라?

제대로 거절해야 돼.

온 힘을 다해서.

안 그럼 몇 번이고 오늘 같은 일이 벌어진다.

“이런 말까진 진짜 하기 싫었는데. 사장님, 내 뒷조사 한 적 있으니 잘 알죠. 나 아부지 도망가고 엄마랑 둘이 빚 갚으며 살았던 거.”

“갑자기 그 얘길 하는 이유가 뭐지. 돈 필요해?”

원하는 액수를 말해.

스스럼없이 뒷말을 덧붙이는 독현을 보며 은돈이 아까보다 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제길.

사랑을 돈으로 사는 인간은 가을동화의 원빈뿐인 줄 알았는데…….

그녀가 지끈거리는 머리를 받쳐 든 채 말을 이었다.

“우리가 어디서 처음 만났는지 사장님 기억해요? 사랑의 밥차 행사장.”

“…….”

“내가 왜 노숙자들 상대로 하는 행사에 자원봉사를 자처하는 줄은 알아요? 아빠 때문이에요. 빚지고 도망간  우리아빠 찾으려고. 그런 곳에서 일하다보면 아빨 만날지도 모르니까 .”

“내가 찾아줄게.”

“……그렇게 쉽게 말하지 마요. 진짜로 의지하고 싶어지니까”

“의지해.”

흔들림 없는 독현의 음성에, 은돈의 목소리가 살짝 높아졌다.

“아빠도 찾아야하고, 요라사로서 내 커리어도 쌓아야하고! 나 바빠요. 연애할 시간 없다고요 사장님.”

“……자꾸 빙빙 돌리지 말고 진짜 이율 말해.”

윽. 가슴이 뜨끔하다.

진짜이유?

진짜이유라……은돈이 주먹을 꾹 쥐었다.

“나 학교 다닐 때 수학 잘했거든요. 내 분수를 안다구요. 그래서 사장님 같은 남자, 만나고 싶지 않아요. 결말이 어떨지 뻔하니까.”

툭 튀어나온 은돈의 본심에 독현이 기가 막히다는 듯 웃었다.

“어떤데. 그 결말이.”

“사장님이 나한테 흥미를 잃는 순간. 난 무 썰리듯 뎅강 잘려나가겠죠. 무참히 버려질 거라고요.”

“누가 그래. 내가 널 잘라낸다고.”

“뻔해요. 부잣집 남자와 별 볼 일 없는 여자의 연애가 어떤 레파토리로 치닫는지는. 아침드라마에서 자주 봤어요.”

아침드라마?

일순 독현의 눈빛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나랑 지금 장난하자는 건가?”

“장난은 사장님이 하고 있잖아요!”

“뭐?”

“난요. 난……사장님 장난에 놀아나기 싫어요. 재미삼아 던진 고백에 들떠서 혹하기 싫다구요. 처음부터 아무것도 시작하지 않으면 상처받지도 않을 거에요. 그러니까,”

“그러니까. 내 고백이 너한텐 장난이란거지.”

“…….”

“내가 재미삼아 널 건드렸다는 소리지. 지금.”

“……아닌가요?”

독현이 대꾸 없이 한 발, 은돈에게 다가섰다.

조금 전과는 다른 싸한 분위기.

고압적인 그의 눈빛에 은돈은 애써 태연한 표정을 유지했다.

“……만약 그렇다면 어쩔 건데.”

“네……?”

“내가 재미로 널 가지고 노는 거라 해도. 니가 뭘 어쩔 수 있지?”

“사장님.”

독현이 어이없어하는 은돈의 목덜미를 순식간에 거머쥐었다.

그리곤 숨 조이는 낮은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난 네고 용주고 넌 일개직원이고. 난 가진 게 많고 넌 아무것도 없고. 내 위치에선 언제나 널 내려다 볼 수 있지만……넌 날 올려다 볼 수밖에 없고.”

“……말의 의도가 뭐에요.”

“내가 원하면 얼마든지 널 가질 수 있어. 억지로라도.”

억지로? 내가 니 장난감이냐?

목구멍까지 차오른 한마디를 간신히 삼키며, 은돈이 피식 실소를 터뜨렸다.

“부잣집 왕자님 놀이 재밌죠? 여기서 모기나 뜯기면서 혼자 많~~이 하세요.”

싸늘하게 말을 마친 은돈이 제 목덜미에 닿은 독현의 손을 밀쳐냈다.

그와 동시에 독현이 서늘한 시선을 치켜 올렸다.

“너 그냥 잘래, 나랑?”

“……뭐라구요?”

망치로 얻어맞은 듯.

은돈의 얼굴이 굳어졌다.

독현이 그런 그녀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갈급한 한마디를 던졌다.

“웃어봐.”

“사장님.”

“내 앞에서도 웃어보라고.”

이지세 앞에서 그랬던 것처럼.

양손으로 은돈의 어깨를 파고들듯 짓누르며 그가 말했다.

“어쩌다 키스한번 했다고. 내가 그렇게 쉬워 보여요?”

짙게 내리깔린 은돈의 음성에 독현의 눈빛이 살짝 떨렸다.

“김밥 햄이니 뭐니 하면서 날 모욕했을 때보다, 내 레시피 북을 강제로 빼앗아 갔을 때보다……지금이 더 싫어. 당신 진짜 완전 최악이야. 꼴도 보기 싫어!”

비수가 되어 가슴을 깊이 찌르는 그 외침에 독현이 시선을 내리깔았다.

이윽고 그가 자신의 말실수를 변명하기 위해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보이는 건 이미 씩씩대며 멀어져가는 은돈의 뒷모습이었다.

***

끼이익!

맨션 앞.

차를 세운 독현이 목을 조이는 타이를 거친 손길로 끌러 조수석으로 집어던졌다.

그러자 아까까지만 해도 제 옆자리에 앉아있던 은돈의 잔상의 눈앞에 떠올랐다.

‘내가 재미로 널 가지고 노는 거라 해도. 니가 뭘 어쩔 수 있지?’

‘내가 원하면 얼마든지 널 가질 수 있어. 억지로라도’

‘너 그냥 잘래, 나랑?’

하.

독현의 입에서 메마른 한숨이 터져 나왔다.

차은돈 말처럼 연애를 못해본 것도 아닌데.

이상하게 감정 제어가 안 된다.

그 여자 앞에선.

형편없기는.

그가 룸미러에 비춰 보이는 자신의 얼굴을 응시하며 자조적인 한마디를 읊조렸다.

그런데 그때, 창밖으로 익숙한 여자의 실루엣이 보였다.

“……기다렸어.”

소라가 자신을 발견한 독현을 향해 그렇게 말하며 살짝 웃어보였다.

***

맨션.

“이 야심한 시각에 찾아왔는데 내쫓지 않아줘서, 나 너한테 고마워해야 하는 건가?”

“취했어, 문소라. 있다 가라.”

독현이 소파에 늘어진 소라를 내려다보다 돌아섰다.

타악, 소라가 그런 그의 손을 붙들었다.

“아까 차은돈이랑 어디 갔었어.”

“굳이 그걸 너한테 말해야 돼?”

“……다시 물을게. 너 그 여자랑 어디까지 갈 셈이야?”

“…….”

독현이 대답 없이 자신을 붙든 소라의 손을 아래로 떨궜다.

“그만 자든지. 가든지 해.”

“지독현. 너 기억나?”

피식.

소라가 묘한 미소를 띠며 말을 이었다.

“옛날에…… 너랑 나랑 지금 같은 사이가 아닐 때. 우리가 친구였을 때. 기억 나냐구.”

“…….”

“넌 잊었는지 모르겠지만, 난 다 기억해. 알다시피 내가 성격이 이 모양이라 친구가 너 밖에 없었거든.”

“문소라.”

“우리 엄마 발인 날. 알지. 식구들 유산 다툼에, 그 모습 찍겠다고 설치는 기자들에, 난리도 그런 난리가 없었잖아. 그 틈에서 말라 죽어가던 날……내내 옆에서 지켜줬던 게 너야. 그날 내 손이 터지도록 세게 붙잡아줬던 게 너라구. 지독현.”

“…….”

“우리 학교 다닐 땐 생각나? 고등학교 이학년 땐가. 애들이 나 싸가지 없다고 체육시간만 되면 교복 훔쳐가고 그랬잖아. 그때 니가 몇 번이나 새로 사줘서……나 교복치마만 열개도 넘었는데.”

“지난 일일뿐이야.”

그녀의 추억을 가로막는 독현의 한마디.

“그렇지. 십 년도 더 된 얘기지. 이젠 다 부질없는 얘기…….”

소라가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뒤이어, 소파에서 몸을 일으킨 그녀가 독현의 목을 양팔로 끌어안듯 감쌌다.

“만약 우리가 계속 친구로 남았다면. 내가 널 욕심내지 않았다면. 지금 우리 이렇게까지 최악은 아니었을까?”

천천히 말을 이으며 그녀가 독현의 셔츠 단추를 위에서부터 차례로 풀기 시작했다.

“너랑 내가 지금보다 더 최악으로 치닫는다 해도……난 후회 안 해. 어떻게든 널 내 옆에 묶어두고 말 거니까. 절대 뺏기지 않을테니까.”

나른한 손길로 독현의 마지막 단추를 풀어 젖힌 소라가 한 치의 망설임 없이 자신의 블라우스를 벗어던졌다.

“제발 내 마지막 자존심까진 짓밟지 마.”

그녀가 자신의 가슴 위로 독현의 손을 끌어당기며 말했다.

그리곤 수그렸던 고개를 천천히 들었을 때, 돌아오는 건 독현의 무감정한 눈빛.

일말의 애정도 관심도 엿 보이지 않는 그 냉혈한 눈빛에 소라가 자리에 붙박힌 듯 굳어 섰다.

아무리 잘난 척 해봤자 지독현 너도 남자니까.

널 위해 옷까지 벗어 던진 여잘 뿌리칠 수 없을 테니까…….

오직 그 생각만으로 여길 찾아왔다.

한순간의 실수라도 좋으니까 날 바라봐주기를.

이성의 끈을 놓고 날 갖고 싶어 몸부림치기를.

“……정신 차려. 문소라.”

소라가 고개를 들어 눈앞의 독현을 응시했다.

순간 자신이 그를 사랑하는 게 아니라 증오하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니 마지막 자존심. 내가 아니라 너 스스로 짓밟은 거야.”

독현이 허리를 숙여 바닥에 떨어진 소라의 블라우스를 주워들었다.

그리곤 툭, 그녀에게 건네고 곁을 지나쳤다.

“…….”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블라우스 자락을 꽉 잡은 소라가 쾅- 문을 닫고 방으로 들어가는 독현을 돌아보았다.

널 위해 난 내 바닥까지 보였어.

그런데,

“그런데 돌아오는 게 고작 이거야……?”

자신을 향한 독현의 경멸어린 시선을 떠올리며……그녀가 파르르 입술을 떨었다.

***

다음날.

“사장님! 문 열어요! 설마 이 시간까지 자는 거 아니죠!”

현관 밖에서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에, 독현이 살짝 커다래진 눈으로 왈칵 문을 열었다.

“뭐야……?”

“뭐긴 뭐에요. 아침에 드실 반찬 만들어왔어요.”

“…….”

독현이 찬합 통을 든 채 성큼성큼 집안으로 들어서는 은돈을 어이없이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을 아랑곳 않은 채, 은돈이 대리석 식탁 위에 탕! 찬합 통을 내려놓았다

“저번에 드린 거 다 드셨을 거 같아서 새로 만들어왔어요.”

“…….”

“뭐에요 그 표정은? 아. 혹시라도 나한테 감동받지 마세요. 아침마다 여기 오기 싫어서 미리 사장님 냉장고에 이것저것 쟁여두려는 심보니까.”

“……너 나한테 화난 거 아니었어?”

“화났어요. 그래도 공과 사는 구분해야죠. 그래야 봉급이 나올 거 아닙니까.”

봉급이라니…….

태연하게 얼굴을 치켜든 은돈을 보며, 굳어있던 독현의 표정이 어느새 눈 녹듯 풀어졌다.

“차은돈. 어젠 내가…….”

“오늘 무지 더울 거래요. 이따 시원하게 초계탕 해드릴게요.”

자신의 말을 가로챈 은돈을 보며 독현이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반찬, 아끼지 말고 팍팍 드세요. 그럼 전달했으니까 전 이만 출근합니다.”

정확히 90도로 허리를 꾸벅인 은돈이 다시 현관을 향해 돌아섰다.

“기다려. 데려다줄 테니까.”

잠시 망설이던 독현이 그녀의 뒤에 대고 불쑥 말했다.

“워.워. 사장님. 우리 공과 사는 구분하자니까요.”

그가 채 뭐라 하기도 전에, 쾅!

요란한 소리로 문이 닫히며 은돈의 모습이 사라졌다.

……공과 사를 구분하자고.

“사적으로는 더 이상 날 상대하지 않겠다는 거군.”

전세가 역전되어버린 은돈과 자신의 처지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

그가 굳게 닫힌 현관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

다원정 주방.

스토브 앞에서 열심히 팬을 돌리는 조리사들의 모습너머로, 바쁘게 뛰어다니는 은돈이 보였다.

“차은돈 나 램 좀 꺼내다주라!”

“네!”

“어이! 가는 길에 성게알도!”

“넵!”

“차은돈 여기 면통에 면 떨어졌다!”

“네, 잠시만요!”

젠장.

들어 올 땐 분명 지독현의 '전담 '요리사였는데, 어쩌다 내가 저들의 보조로 전락 해버린 거지.

“참자. 참아라, 차은돈.”

어제 지독현한테 그 모욕을 당하고도 뻔뻔하게 출근한 너야.

이깟 텃세와 고난쯤은 얼마든지 견딜수 있어.

내가 단순한 낙하산이 아니라는 걸 입증 해 보이는 그날까지.

“그래 그날까지……기필코…….”

“저기. 누나.”

“어? 어!”

등 뒤에서 느껴지는 지세의 인기척에, 은돈이 옆으로 비켜서며 재빨리 길을 터주었다.

“지나가!”

“고마워요.”

해산물 박스를 든 지세가 살짝 웃으며 은돈의 곁을 지나쳤다.

“참, 어젠 말도 없이 그냥 가서 미안.”

은돈이 가려는 그의 옷깃을 붙든 채 겸연쩍은 듯 말했다.

“……괜찮아요. 금방 갔어요, 저도.”

지세가 자신의 옷깃에 닿은 은돈의 손끝을 힐끗 내려다봤다가, 다시 고개를 끌어올렸다.

“누나. 이따 점심 같이 먹어요.”

“어? 아, 그러고 싶은데……사장님이,”

“기다릴게요. 같이 먹어요.”

“…….”

“이따 봐요.”

은돈이 돌아서는 지세의 너른 등을 복잡한 시선으로 응시했다.

아니 연애하고 싶어 미치겠을 땐 한 놈도 안 나타나더니.

왜 이제와서들 뒷북이냐고.

“이거 혹시 몰카 아냐……?”

지세가 지독현이랑 짜고 날 엿 먹이기 위해 맘에도 없는 고백을 한 거 아니냐고.

“아니. 아냐. 너무 갔어…… 차은돈. 드디어 니가 정신 줄을 놓는구나.”

그녀가 삐뚤어진 조리모를 고쳐쓰며 혼돈스런 마음을 다잡았다.

“어이 차은돈! 너 이 육수 뭐야? 초계탕 하려고!?”

그때, 냉장고 앞에서 부주의 외침이 들려왔다.

“아 네! 제가 만든 초계탕 육순데요, 이따 사장님 해드리려고…….”

“너 이거 육수 낼 때 견과류 뺐어?”

“물론입니다!”

은돈의 씩씩한 대답에 위로 치솟았던 부주의 눈썹이 다시 본래 자리를 되찾았다.

슬금슬금.

은돈이 그런 부주의 곁으로 다가섰다.

“근데 부주. 견과류, 꼭 빼야하나요?”

“뭐?!”

“아시잖아요, 초계탕 육수낼 때 호박씨나 해바라기 씨를 갈아 넣어야 국물 맛이 훨씬 더 진하고 고소해 지는 거.”

“얌마! 너 제정신이야! 아무리 지독현이가 미워도 그렇지, 이게 아주 사장을 골로 보내려고!”

“그게 무슨……?”

“뭐야, 너 사장님한테 아무 얘기도 못 들었어? 사장님 견과류 알러지 있잖아. 그것도 아주 극심한.”

“알러지요?”

그런 말은 못 들었는데.

은돈이 고개를 갸웃하며 독현과 처음 계약을 맺던 당시를 회상했다.

‘식은 거, 짠 거, 단 거. 전부 내가 질색하는 것들이야. 앞으로 모든 요리는 전적으로 내 입맛에 맞춰야 할 거야. 또 한 가지. 견과류는 넣지 마.’

“분명히 견과류는 넣지 말라고……딱 그렇게만 얘기했었는데…….”

은돈의 벙찐 소리에 부주가 쯔쯧 혀를 찼다.

“아니 사장은 뭐 목숨이 두 세 개 쯤 된대? 그렇게 설렁설렁하다 쇼크라도 오면 어쩌려고 그래?”

“쇼크요?”

“아나필락시스 쇼크. 너 견과류 알러지가 왜 무서운 줄 알아? 잘못 먹었다간 쇼크사로 곧장 저 세상 갈 수도 있거든.”

“그, 그런 얘길 사장님은 왜 나한테 제대로 안 한 거죠?”

“그 인간은 원래 자기 약점을 남들 앞에 들추는 걸 싫어하거든. 참~~ 몇 년을 봐도 적응 안 되는 스타일이야.”

부주가 진저리치며 자신의 스토브 쪽으로 돌아섰다.

은돈은 말없이 조리대 위에 올려진 자신의 육수 통을 응시했다.

“해바라기씨 넣었음 큰일 날 뻔 했네…….”

아무리 그 인간이 밉고 싫대도 감히 먹는 걸로 장난을 칠 순 없지.

“아참! 면 통 채워야 되는데.”

육수 통을 바라보고 섰던 그녀가 급하게 주방 뒤편으로 사라졌다.

그즈음, 또각, 또각. 또각. 주방 안으로 들어서는 꼿꼿한 발소리가 들렸다.

“어? 문소라 씨. 조, 좋은아침! 쬐끔 늦었네요? 아주 쬐~~끔!”

“얌마 이 정돈 늦을 수도 있지 뭘 그래! 하하. 얼른 옷 갈아입고 오세요!”

어떻게든 자신에게 말을 붙여 보려는 남자 조리사들을 지나치며, 소라가 유유히 걸음을 옮겼다.

잠시 후. 그녀의 구두소리가 멈춘 곳은 은돈의 육수 통 앞.

“…….”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오한이 일정도로 차가운 눈빛으로, 소라가 한동안 말없이 그 자리를 지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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