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남자 밥해주기-28화 (28/93)

28화. 걔 것 인듯, 걔 것 아닌, 걔 것 같은 너.

“문소라 씨. 나한테 자꾸 까칠하게 구는 이유가 뭐에요?”

은돈의 날 선 물음에 소라가 적대적인 미소를 머금었다.

“이유는 본인이 더 잘 알지 않나?”

“아뇨. 모르겠는데요.”

“양심에 손을 얹고 생각해봐요. 정말 모르는 건지, 여우처럼 모르는 척 하는 건지.”

“글세, 진짜 모르겠다니까요?”

은돈이 꽥 언성을 높이자 소라가 가소롭다는 듯 시선을 치떴다.

“차은돈 씨. 지독현한테 고백 받았죠?”

“……!”

“진짠가 보네? 떠본 것뿐이었는데.”

“저기요. 고백이고 자시고, 나랑 사장님은 정말 아무 사이도 아니에요. 대체 몇 번을 얘기해야 알아듣겠어요?”

“조심해요.”

“?!”

“나뿐만이 아니라 당신 지켜보는 사람이 많아. 여기 직원들도 그렇고, 지명준 회장도 그렇고. 모두 당신을 눈엣가시처럼 여기고 있다고.”

“그 눈엣가시는 지금 너어무 억울해 돌아가실 것 같으니까, 잘 들어요. 애초에! 나랑 사장님! 아!무!관!계! 아니라구요.”

은돈의 말에 소라가 야릇한 미소로 스토브를 쓸어내렸다.

“그럼 나대지마.”

“뭐라고요?”

“까불지도 마. 언제까지 네가 식이장애를 볼모로 그 남잘 붙잡아 둘 수 있을 거 같아? 착각하지 마.”

착각?

“문소라 씨? 착각은 지금 그쪽이 하고 있는 거 같은데. 오늘부로 문소라씬 내 조수에요. 조. 수! 따까리!”

“뭐?”

“그니깐 앞으로 꼬박꼬박 존칭 써주세요. 차은돈 씨가 아니라 조리사님이라고. 아, 그리고 반지도 빼세요. 주방에선 악세사리 착용 금집니다.”

엄격한 그녀의 태도에 훗, 소라의 입가에 비웃음이 걸렸다.

“약혼반지도 안돼요?”

“……?”

“안 되나요. 조리사님?”

미묘하게 굳어진 은돈의 얼굴을 응시하며 소라가 이죽대듯 물었다.

“약혼반지건, 결혼반지건……주방에선 빼세요. 나 따라와요.”

은돈이 재빨리 표정을 가다듬으며 쉐프 테이블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저게 무슨 반지든. 누가 줬든…… 나랑은 상관없는 일이다.

암 당연하지.

그녀가 단호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

“……”

“……”

그날 오후.

침묵이 감도는 프레지던트 룸.

소파 협탁 위로 음식을 세팅한 은돈이 마지막으로 독현의 앞에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독현은 잠자코 크리스털 컵을 입가로 가져갔다.

그와 동시에, 지세와 한 우산을 쓰고 사라지던 은돈의 모습이 두둥실 눈앞에 떠올랐다.

“……어젠, 잘 들어갔나.”

“네. 약혼반지요.”

“? 뭐……?”

“제, 제가 지금 뭐라 그런 거죠?”

서로 다른 생각에 잠겨있던 두 사람이 비로소 얼굴을 마주보았다.

망할 차은돈.

뜬금없이 약혼반지라니.

드디어 니가 맛이 갔구나.

“하하……잠깐 딴 생각 좀 하느라.”

은돈이 억지웃음과 함께 털썩 독현의 맞은편에 몸을 앉혔다.

“밥 먹어요 우리…….”

그녀가 태연함을 가장한 채 밥 한술을 떠 입으로 가져갔다.

그리곤 꾸역꾸역 씹어 막 삼키려는 찰나.

“문소라는 좀 어때. 적응중인가?”

“……아. 문소라 씨요.”

은돈이 살짝 구겨진 얼굴을 치켜들었다.

“근데……문소라씰 왜 하필 내 보조로 채용한 거예요?”

“그냥.”

“그냥?”

“그 여자 약올라하는 모습이 보고 싶어서.”

“아아~ 여자라면 누구든 일단 괴롭히고 보는 거에요? 난 또 나한테만 그러는 줄 알았죠.”

“……?”

왠지 날이 서있는 은돈의 모습에, 독현의 눈빛이 가늘어졌다.

대체 영문을 모르겠군.

“넌 왜 나만 보면 화를 내는 거야?”

“사장님도 나만 보면 엿 먹이지 못해 안달이잖아요. 그냥 퉁치자고요, 우리.”

퉁?

독현의 눈썹이 치켜올라갔다.

“이지세와는 무슨 사이지?”

“갑자기 쌩뚱맞게 그건 왜요?”

“갑자기 아니니까 대답해. 어제 밤새도록, 그리고 오늘 아침부터 지금 이 순간까지. 내내 묻고 싶었으니까. 무슨 사이야? 너희 둘.”

“벼. 별 사이 아닌데요.”

“별 사이 아닌데, 왜 별 사이인 것처럼 굴지?”

“뭐가요?”

“왜 그렇게 당황 하냐고.”

독현이 예리한 시선으로 은돈의 붉어진 얼굴을 훑었다.

젠장. 귀신같은 놈.

“대체 뭐가 궁금한 거예요? 아무리 사장님이라지만 직원들 개인사까지 일일이 간섭할 자격 없잖아요.”

“내가 간섭하고 싶은 건 직원들 개인사가 아니라 네 개인사야.”

묘한 질투와 오기가 뒤엉킨 독현의 눈빛.

그 눈빛이 똑바로 자신을 향하자 은돈이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나 좀 그냥 내버려두면 안돼요? 사장님은 약혼녀씩이나 있으면서…….”

“약혼녀? 웃기지마.”

그럼 문소라 씨 손에 반지는 다 뭔데요?

은돈이 그렇게 물으려다 입을 다물었다.

오지랖 떨지 말자. 내입으로 저 인간이랑 아무 사이 아니라고 말했잖아.

“아우 점심시간 다 끝나겠네. 얼른 드세요”

태연한척, 관심 없는 척, 척척척을 하며 그녀가 보란 듯 힘찬 숟가락질을 시작했다.

독현은 팽팽한 시선으로 그런 은돈의 표정을 관찰했다.

그래서,

이지센지 뭔지 하는 피라미랑 대체 무슨 사이라는 거야.

한 번 더 그렇게 묻고 싶었지만 구차해보여 참기로 한다.

독현이 붉은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일이건 사랑이건 한 번도 을의 입장이 되어본 적 없었다.

적어도 이때까진.

차은돈 앞에서 본의 아니게 작아지는 스스로를 꼴사납다고 느끼며, 그가 왼손으로 미간을 거머쥐었다.

***

“문소라 씨, 주방 첫날인데 어때요, 힘들지? 차은돈이가 너무 부려먹는다 싶으면 언제든지 얘기해요!”

마감준비가 한창인 주방 한 켠.

부주의 알량한 음성이 들려왔다.

“에라이, 오늘 새 식구 온 기념으로 주방 환영식 한 번 해?!”

“허? 부주방장님? 저땐 환영식 같은 거 개뿔도 없었잖아요!”

은돈의 볼멘소리에 곁으로 다가온 부주가 수준급 복화술로 입술을 옴짝댔다.

“저 여잔 장차 이레스토랑 싸모가 될지도 모르잖아, 이 빡구야.”

빡구?

제길 뭐라는 거야 이 아부계의 김광규 같은 인간이.

“자자! 다들 마무리하고 요 앞에 노래타운 알지. 거기로 집합! 문소라 씨도 꼭 참석해요.”

“당연하죠? 제 환영식인데.”

생긋 미소 짓는 소라를 보며 주방 안 남자들이 일제히 상기된 얼굴로 술렁였다.

와중에 홀로 그릴청소에 열중한 지세의 어깨를 부주가 가볍게 툭 쳤다.

“어이 막내. 혼자 내빼기 없다.”

“아……네, 부주.”

“차은돈이! 너도 참석!”

“아뇨. 전 좀 피곤해서……일찍 들어가 쉴까하는데요.”

내가 미쳤다고 나만 보면 도끼눈을 해대는 여자 환영식에 가겠냐고.

게다가……지세 보기도 좀 뻘쭘 하고.

“에이! 안 돼! 너 빠지면 문소라 씨가 남자들 틈에서 혼자 얼마나 뻘쭘하겠어? 무조건 참석 해!”

빌어먹을, 고작 그런 이유로 내가 필요한 것이여?

은돈이 눈을 세모꼴로 치켜뜬 채 부주를 칵 노려 보았다.

그때 소라가 손가락을 튕기며 모두를 집중시켰다.

“회식이면 사장님도 가는 거죠?”

순간.

너른 주방내부에 감도는 침묵……조리사들 중 몇은 겁에 질려 고개를 도리도리 저어보이기까지.

“저, 사장님은 박명장님 퇴임식 때 말곤 직원들 회식에 참여 하신 적이 없는데요.”

옆에 선 조리사의 말에 소라가 아랑곳 않고 웃었다.

“제 환영회라면 얘기가 달라지죠.”

그녀의 자신감 돋는 한마디에 주방일동 모두가 마치 눈치 싸움을 하듯 긴장된 시선을 주고받았다.

***

노래방 기기가 구비 되어있는 대형 룸.

직원들이 테이블 위의 맥주를 홀짝대며 아까부터 한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모두의 이목이 집중 된 그 곳엔 아니나 다를까.

소라와 독현이 서로의 반대 방향으로 다리를 꼰 채 앉아있었다.

“같이 오잔 말에 네가 진짜로 응할 줄 몰랐어.”

불쑥 말문을 연 소라를, 독현이 힐끗 응시했다.

“이런 곳, 니 취향 아니잖아.”

“니가 내 취향을 어떻게 알아.”

돌아오는 냉담한 반응에 소라가 우습다는 듯 실소했다.

그녀는 독현의 맹목적인 시선이 아까부터 맞은편 은돈에게 향해있음을 알고 있었다.

결국 니가 여기 온 이유는 내가 아니라 차은돈이였던 거지.

“적어도 니 여자 취향이 몹시 후지다는 건 잘 알겠다.”

소라가 앞에 놓인 병맥주를 집어 입술을 축였다.

그 요염한 자태를 조리사 일동이 넋을 뺀 채 쳐다보았다.

그때, 룸 안의 정적을 견디다 못한 부주가 탬버린 끄트머리로 은돈과 지세를 가리켰다.

“거기! 주방꼬리 두 명! 이 분위기 어쩔 거야, 빨리 좀 살려봐.”

“네? 왜 하필 저희더러…….”

“그럼 막내들 두고 주방선배들이 탬버린 흔들며 재롱떨까?!”

“아뇨, 건 아니지만…….”

은돈이 고개를 돌려 독현 옆자리에 고고하게 몸을 앉힌 소라를 응시했다.

내 꼬리는 저기 폼 재며 앉아있는데 날더러 분위기를 띄우라고?

젠장……좋아.

피할 수 없다면 제대로 즐겨주겠어.

문소라, 내 오늘 너에게 추악한 사회생활의 단면을 보여주마.

“부주, 31525번 ‘내 귀에 캔디’ 부탁합니다.”

스윽, 몸을 일으킨 은돈이 자신의 옆옆 자리에 앉아있던 지세에게 다가갔다.

“지세야 이 노래 알지?”

“누나. 하기 싫으면 하지 마요. 나 혼자 부를게요.”

“아니. 저기 저 부르주아들 보란 듯 망가져 보이겠어.”

요란스런 간주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은돈이 턱짓으로 독현과 소라를 가리켰다.

“내가 옥택연 파트 맡을 테니까, 지세 니가 백지영 해.”

“……보통은 여자가 노래, 남자가 랩 아니에요?”

“내가 노래엔 영 소질이 없거든. 큼! 학! 크음!”

기합이 잔뜩 들어간 얼굴로 목을 푸는 은돈이 너무 귀여워서, 지세의 눈이 반달모양으로 접혔다.

어차피 해야 한다면 같이 망가지는 것도 나쁘지 않지.

슥- 몸을 일으킨 그가 남은 마이크를 집어 들었다.

그와 동시에 두둥따! 노래가 시작 됐고 은돈이 비장한 얼굴로 모두를 향해 휙 돌아섰다.

“니가 원하는 그 말이 뭐야 내게 말해 뽜!”

뭔가를 갈구하는 듯 한 손동작과 함께 은돈이 현란한 퍼포먼스를 선보이기 시작했다.

“훠우! 예아! 빠세빠세빠세 호!”

부주는 탬버린으로 제 어깨며 히푸를 두드리며 은돈의 랩에 추임새를 넣었고, 그즈음 지세가 마이크를 입가에 갖다 댔다.

“사랑해”

“사랑해!”

“i love you”

“알러뷰!”

지세와 은돈이 한마디씩 노랫말을 주고받는 파트.

독현이 눈썹을 찡그린 채 제 눈앞에서 사랑타령이 한창인 두 사람을 직시했다.

“재밌나. 이게?”

“네, 네?”

“저급해서 못 들어 주겠군.”

독현의 읊조림에 옆에 앉은 직원이 냉큼 리모컨을 집어 들었다.

“노래 끌까요?”

“이리 내 놔.”

그가 직원의 손에 들린 선곡 리모컨을 빼앗아들었다.

그리곤 택연 코스프레에 열중한 은돈을 냉랭히 응시했다.

“아 내 귀에 캔디! 꿀처럼 달콤해 니! 목소리로 부드럽게- 날 녹여쭤!”

귀에서 사탕을 꺼내먹는 망측한 퍼포먼스를 신들린 몸짓으로 소화해내고 있는 그녀.

차은돈.

이윽고 독현이 고개를 돌려 은돈 곁에 선 지세를 내리 훑었다.

뭐가 좋다고 볼 때 마다 기집애 처럼 실실대고 있는 거야.

지세가 은돈과 서로 마주보며 웃는 것.

두 사람의 모습이 막 연애를 시작한 새내기 커플처럼 보인다는 것.

둘 중 자신의 심기를 더 거슬리게 하는 건 어느 쪽일까.

독현이 손에 든 리모컨을 내려다보았다.

뒤이어 그가 고집스런 표정으로 취소버튼을 강타했고, 덕분에 신나게 울려 퍼지던 반주가 뚝하고 끊어졌다.

“뭐야 언놈이야!”

“쉿 부주! 사장님이에요.”

남자 직원의 언질에 넥타이를 머리에 둘러멘 부주가 헙, 입을 다물었다.

“……뭐에요?”

그 즈음.

노래삼매경에 빠져있던 은돈 역시 고개를 치켜들고 독현을 바라봤다.

“아. 잘못 눌렀어.”

독현이 입가에 조소를 걸친 채 뻔뻔하게 뇌까렸다.

그 모습을 응시하던 은돈이 곧 천연덕스럽게 노래방기기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뭐. 다시 예약하면 되죠.”

꾹, 꾹 버튼을 눌러 그녀가 재차 예약한곡은 본인의 애창곡, 주영훈의 ‘우리 사랑 이대로’.

“지세야. 이거 이번에도 내가 남자파트,”

뚝.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반주가 채 시작되기도 전에, 독현이 재차 취소 버튼을 눌렀다.

“제목이 맘에 안 들어. 다른 거 해.”

“하? 그러죠 뭐.”

은돈이 다시 기계 앞에 섰다.

이윽고 예약 된 곡은, 팀의 ‘사랑합니다’.

“그것도 맘에 안 들어. 다른 거.”

푸! 은돈의 콧구멍에서 뜨거운 콧김이 뿜어져 나왔다.

이어서 선곡된 노래는 조권의 ‘우리사랑하게 됐어요’.

“너. 지금 일부러 그러는 건가?”

독현이 다시 취소버튼을 누르며 말했다.

“제가 뭘! 아니, 이젠 노래도 직원들 맘대로 못 고르나?”

은돈의 푸념을 못들은 척, 독현이 매섭게 리모컨을 치켜들었다.

그 후로도, ‘사랑을 할 거야’, ‘사랑했잖아’, ‘사랑해도 될까요’ 등등.

러브러브한 노래제목들이 화면에 뜨기 무섭게 다시 사라지기를 반복.

드디어, 인내심이 한계에 다다른 은돈이 마이크를 내팽개치며 외쳤다.

“좋아요! 좋다구요! 이왕 이래 된 거 제가 사장님을 위한 노래를 한곡 띄워드리죠.”

파바밧 재빠른 속도로 그녀가 예약한곡은 크러쉬의, ‘밥맛이야’…….

“밥맛?”

“왜요. 세상에 밥 맛처럼 좋은 게 어딨어요?”

파지직.

맞부딪친 은돈과 독현의 눈에서 불길이 타올랐다.

부주를 비롯한 다른 직원들은 그 모습을 숨죽인 채 바라봤고 은돈의 옆에 선 지세의 입에서도 옅은 한숨이 뱉어졌다.

“누나. 괜히 언성 높일 필요 없잖아요. 기분 풀어요.”

지세가 한 손으로 은돈의 어깨를 가볍게 도닥였다.

그 순간이 눈에 가시처럼 거슬렸던 것일까.

독현의 서늘한 음성이 모두의 귓전을 울렸다.

“손 떼.”

“……?”

“내 직원한테 손 떼라고.”

내 직원?

은돈이 황당함에 입을 허 벌렸다.

“제가 사장님한테 속박된 사람입니까? 제가 사장님 소유냐고요 무슨 말을 그렇게.”

“맞아, 내 소유야.”

독현이 강한 어조로 은돈의 말을 가로막았다.

“내 레스토랑에서. 내가 주는 돈 받아 가며. 내 일용할 양식을 만드는 동안은. 너 내 꺼 맞다고.”

고집스레 뱉어진 그 말에, 지세가 고개를 수그리며 피식 웃음을 머금었다.

“후……분위기 왜 이래? 다들 건배 하죠?”

그때 잔을 치켜든 소라가 말문을 열자 직원 일동이 너도나도 앞 다투어 잔을 내밀었다.

“그, 그래요 건배 합시다! 자 사장님을 위하여!”

“됐어, 치워.”

독현이 자신에게 잔을 내미는 부주를 밀어내며 몸을 일으켰다.

이윽고 쾅- 거세게 문이 닫히며 그의 모습이 사라지자, 기다렸다는 듯 부주가 언성을 높였다.

“봤어? 다들 봤어? 저렇게 유치하다 인간이! 야 막내. 너 사장님한테 뭐 밉보인 거 있냐? 왜 너한테 뜬금없이 화살이 돌아가?”

“……밉보였죠. 그것도 제대로.”

독현이 사라지고 없는 문가를 직시하며 지세가 짧게 대답했다.

***

“다들 조심히 들어가세요…….”

“네……오늘 즐거웠습니다…….”

밤거리 복판.

독현이 자신의 눈치를 보며 허둥지둥 사라지는 직원들을 고까운 시선으로 바라보다 고개를 틀었다.

“어우 너무 재밌어가지고, 저안에서 시간이 어떻게 갔는 줄도 모르겠네. 그, 그럼 내일 뵙죠, 사장님!”

마지막까지 비굴모드로 일관한 부주가 사라지고 난 직후.

은돈과 소라, 지세와 독현, 각각 마주선 네 사람 사이에 묘한 시선이 오갔다.

“우리 이럴 게 아니라, 남은 사람들끼리 간단하게 한 잔 더 할까요? 내가 살게요.”

무슨 생각에서일까.

소라가 세 사람을 향해 눈웃음을 치며 제안했다.

“갈래요?”

지세가 고개를 숙여 은돈의 얼굴을 살피며 물었다.

“글쎄……시간도 늦었고 난 좀…….”

자신의 면상 위로 가까이 드리워진 지세의 얼굴을 의식한 듯, 은돈이 슬쩍 한발 뒤로 물러섰다.

그때.

파악!

누군가 거칠게 그녀의 팔뚝을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사장님!? 팔 빠질 뻔 했잖아요!”

“같이 가지 그래? 산다는데. 너 공짜 좋아 하잖아.”

“후우……사장님이 봤어요? 내가 공짜 좋아하는 거?”

은돈의 앙칼진 물음에 독현이 고개를 돌려 지세를 응시했다.

그리곤 버젓이 들으라는 듯 입을 놀렸다.

“꼭 눈으로 직접 확인해야만 아는 건 아니잖아. 니가 공짤 얼마나 좋아하는지, 누가 누굴, 얼마나 구질구질하게 쫓아다니는지.”

구질구질.

지세가 자신을 도발하는 독현을 똑바로 마주보았다.

유치한건 딱 질색인데…… 왠지 오기가 치솟는다.

"가죠. 술 먹으러."

그가 독현을 향해 시니컬한 한마디를 던졌다.

"오케이. 내가 잘 아는 데로 가요."

소라가 싱긋 웃으며 앞장서 걷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가는 한숨을 내쉰 은돈이 곧 내키지 않는 걸음을 한 발짝 떼놓았다.

***

재즈 바 라운지.

자리에 마주앉은 네 남녀 사이에 싸늘한 침묵이 감돌았다.

“뭐야 다들. 이렇게 말도 없이 시간만 때우려면 왜 따라온 거야?”

소라가 어이없다는 듯 머리를 쓸어 넘겼다.

“은돈 씨? 그러지 말고 나랑 좀 놀아줘요. 오늘 이거 내환영식인데.”

“아……네.”

“마셔 봐요. 애플 마티니.”

그녀가 은돈의 앞으로 칵테일 잔을 스윽 밀어놓았다.

“진토닉이나 준벅보다 좀 세지만 맛있을 거에요.”

“네.”

은돈이 자신에게 건네진 마티니 잔을 들어 올렸다.

그때 소라가 마치 폭탄을 투하하듯 거침없이 입을 열었다.

“참. 근데 이지세 씨랑 차은돈 씨, 혹시 연애중이에요?”

“!? 그게 무슨.”

“보니까 두 사람 사이가 심상찮아서. 저번에 내 앞에서 이지세 씨가 은돈 씨 편든 것도 그렇고. 왜, 은돈 씨 부려먹지 말라고 나한테 까칠하게 굴었던 거, 기억나죠?”

“……아니에요 저희. 그런 사이.”

은돈이 입도 대지 않은 마티니 잔을 다시 내려놓으며 말했다.

지세는 그녀가 내려놓은 잔을 향해 말없이 시선을 떨궜고, 그때였다.

인내심이 바닥난 듯, 독현이 소라를 향해 가라앉은 음성을 꺼냈다.

“그만해라.”

“응? 뭘?”

“무슨 사이가 될래야 될 수 없는 조합인데. 재미삼아 엮지 말라고.”

그가 눈앞에 나란히 앉은 지세와 은돈을 차례로 바라보며 말했다.

“아. 혹시 내가 멋대로 엮어서 기분 나빴어요? 그럼 사과할게요.”

“아뇨, 그러실 필요 없어요.”

지세 역시 눈앞의 독현과 소라를 응시하며 말을 이었다.

“기분, 전혀 나쁘지 않으니까요.”

“…….”

“…….”

“…….”

지세의 한마디를 끝으로 모두의 입이 동시에 닫혔다.

뭐야. 이 연속 되는 침묵은…….

나 지금 묵언수행중인 스님들이랑 회식하니.

젠장. 너무 긴장했더니 쉬가 다 마렵네.

“저 화장실 좀.”

은돈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도 같이 가요. 갑자기 취기가 좀 도네.”

소라가 자신의 뒤를 따라 일어나는 것을 보고 은돈이 불안한 시선으로 남겨질 두 남자를 응시했다.

지독현, 저 까탈에 괜히 엄한 애 잡는 거 아니야?

“설마…….”

그녀가 고개를 가로 저으며 화장실을 향해 발길을 돌렸다.

소라는 피식 웃으며 그런 은돈의 뒤를 쫓았고…….

잠시 후.

볼일을 마치고 나온 은돈이 세면대 앞에서 매무새를 가다듬는 소라와 다시 맞닥뜨렸다.

“……어때요? 두 남자에게 대쉬 받는 기분이?”

화장실을 나서려던 은돈의 발목을 잡아 세우는 한마디.

“지금. 무슨 소리에요?”

“내가보기엔 이지세 씨도 당신한테 푹 빠진 것 같던데. 좋겠어요?”

“문소라 씨 눈엔 내가 좋아 보여요?”

“쿡. 말만해요. 이지세 씨랑 엮이고 싶으면. 도와 줄 테니까.”

“그러지 마세요.”

“하긴. 지금 누구 하날 선택하긴 좀 아쉽죠?”

“……?”

“두 남자 다 어항 속에 집어넣고 맘대로 휘젓고 싶겠지. 잔뜩 들떠서는 겉으론 아닌척하며, 밖의 두 사람에게 동시에 관심 받고 싶은 거야. 맞죠?”

“……저기요. 난 어장관리 할 생각 추호도 없어요. 두 남잘 한 번에 휘저을 주변머리도 안 되구요.”

말을 마친 은돈이 엔틱 풍의 화장실 문고리를 붙들었다.

“지독현이 갑자기 너한테 맹목적으로 달려드니까, 스스로 뭐나 된 듯 착각하는 모양인데, 정신 차려. 너 그 남자 변덕이 얼마나 심한 줄 모르지?”

“…….”

“혹시라도 니가 예전 뚱뚱했던 때로 돌아가게 되면, 그 남자 너한테 반했던 스스로를 경멸할 거야.”

“충고 고마워요.”

차갑게 대꾸하며 은돈이 소라에게서 돌아섰다.

지독현을 좋아하지도, 지독현의 고백을 받아 줄 생각도 없는데.

어째서 저 여자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심장이 따끔거리는 걸까.

“태연한척하느라 혼났네.”

화장실을 벗어난 은돈이 경직된 안면근육을 마른세수하듯 양손으로 쓸어내렸다.

……같은 시각.

바 라운지에 남은 독현과 지세가 폭풍 전야 같은 분위기 속에서 서로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사장님이 노골적으로 날 경계하는 이유. 차은돈 씨 때문이죠.”

지세의 물음에 칵테일 잔을 거머쥔 독현이 차갑게 웃었다.

“알면서도 나 보란 듯 차은돈한테 접근한 건가?”

일순, 담담했던 지세의 눈빛이 살짝 일렁였다.

“사장님보다 먼저. 레스토랑에 들어가기 훨씬 전부터……차은돈 씨를 좋아했습니다.”

군더더기 없이 솔직하고 담백한 고백.

한 치의 흔들림 없는 그의 모습이 독현을 자극했다.

“니가 언제부터 차은돈한테 끌렸는지, 두 사람이 레스토랑에 들어오기 전에 어떤 사이였는지 그런 건 관심 없어. 그냥 이 시간부로 차은돈 주변에 얼쩡대지마. 너, 몹시 거슬리니까.”

“……거슬리는 건 저 역시 마찬가집니다.”

지세의 응수에 독현이 미간을 좁혔다.

“차은돈 씨한테 함부로 행동하지마세요. 듣기에 모욕 적인 언사도 삼가주시구요.”

“내가 그 여잘 어떻게 대하든. 네가 상관할 바 아니잖아.”

“……앞으로도 지금처럼 함부로, 멋대로…… 상처 주실 건가요.”

대답대신 독현이 서늘한 시선으로 잔을 들어 올렸다.

“이제야 알겠네요. 차은돈 씨가 줄곧 사장님한테 흔들리면서도, 사장님을 부정하는 이유.”

말을 마친 지세가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때 독현이 낮은 어조로 그의 발끝을 잡아 세웠다.

“니가 그랬지. 차은돈이 원하는 호의는 따로 있다고.”

“…….”

“차은돈이 원하는 남자 역시 따로 있을 거란 생각, 안 해봤나.”

“무슨 뜻입니까.”

“……차은돈한테  단둘이 여길 빠져 나가자고 제안할거야.”

“…….”

“나랑 그 여자가 다시 안돌아오면 그걸로 대답이 되겠지. 정말 차은돈이 원하는 남자가 누군지.”

독현이 흔들리는 지세의 눈빛을 캐치하고 조소를 머금었다.

그리곤 덧붙여진 한마디.

“이 야심한 시각에 술에 취한 남녀가 들를만한 곳이 어딘지는……말 안 해도 잘 알겠지.”

스윽. 자리에서 몸을 일으킨 독현이 거침없이 바 라운지를 벗어났다.

“…….”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지세의 시선이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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