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남자 밥해주기-26화 (26/93)

26화. 지독현식 애정표현.

“널 좋아하는 것 같아. 차은돈.”

독현의 말에 은돈이 아무런 표정 없이, 미동 없이 그를 마주보았다.

“지금…… 뭐 하시는 거죠?”

“보면 몰라? 고백중이야.”

“세상에 어떤 남자가…… 반찬통을 들고 고백을 해요?”

그녀의 멍한 질문에 독현이 고개를 내려 자신이 들고 있는 8단 찬합통을 응시했다.

“아! 아니, 지금 반찬통이 중요한 게 아니구요. 하여간 사장님 고백은 못들은 걸로 하겠슴다.”

타다닷!

은돈이 벌의 날개 짓과 같은 재빠른 손놀림으로 엘리베이터 열림 버튼을 눌러 제꼈다.

열려라, 제발 열려.

그녀가 아직 23층을 가리키는 숫자판을 초조한 듯 올려다보았다.

“차은돈.”

“이, 이 손 놔요!”

“……안 잡았어.”

“아, 옙.”

잔뜩 긴장한 은돈이, 머쓱한 표정으로 다시 숫자판을 응시했다.

왜 내가 안절부절 하는 거야?

고백한 건 저쪽인데?

“하여간, 사장님도 참. 어떻게 꽃다발도 아니고 반지 케이스도 아닌 반찬통을 들고 고백을 해요? 하하, 역시 한식레스토랑 오너답네요.”

횡설수설 농담 따먹기를 시전하는 그녀를 보며, 독현이 거침없이 1층 버튼을 눌렀다.

“뭐에요……?”

“사러가.”

“네?

”반지 사달라는 소리 아니었어?”

고개를 갸웃하며 묻는 그를 보며, 은돈이 다시 29층 버튼을 눌렀다.

”당연히 아니죠! 반지는 무슨, 누가 봐도 농담이잖아요!”

“……난 농담 아냐.”

“!”

“널 좋아한다는 말, 애석하게도 농담이 아니라고.”

그의 진지한 눈빛에, 은돈이 저도 모르게 입을 다물었다.

“설마……진심이세요?”

“그래. 네가 좋아.”

“…….”

“누가 그러더군. 뚱뚱하고 못생겼던 차은돈을 가장 상처 준 게 나라고. 그래서…… 넌 날 진저리치게 싫어할 거라고.”

다음 순간, 뜨끔해하는 은돈을 독현이 빤히 응시했다.

“지금 이게 말이 안 된다는 거. 나도 알아. 널 좋아하는 내 감정이, 누구말대로 위선이라는 것도 알아.”

“…….”

“그래도 좋아해 널. 네가 좋아. 이런 내 모습이 어이없을 정도로.”

그 어떤 핑계도, 변명도 없이 곧이곧대로 고백해오는 이 남자.

아니, 이건 고백이라기 보단 자백에 가깝잖아.

나한테 졌다는 듯, 지독현이 시선을 내리 깐 채 자신의 마음을 있는 그대로 털어놓고 있다.

지금 이 남자, 진심이야.

독현을 바라보는 은돈의 눈빛이 가볍게 일렁였다.

그때, 숫자판이 29층을 가리키며 촤라락-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동시에 은돈은 후다닥 문 밖으로 나섰고, 곧 뒤따라 내려서는 독현을 응시했다.

언제까지 되도 않는 농담 따먹기로 상황을 회피할 거야?

차은돈.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봐.

너 지독현이 머잖아 고백해 올 거란 거, 정말 몰랐어?

아니잖아. 그니까 또 유야무야 도망치면 안 돼.

그건 이 남자의 진심에 대한 예의가 아니야.

“사장님.”

그녀가 독현을 향해 돌아섰다.

뒤이어 어느 때보다 단호한 얼굴을 해보였다.

“저는요. 사장님을 감당 할 수 없을 것 같아요.”

“……뭐?”

“잘생기고 멋지고, 돈 많고…… 사장님도 알죠? 본인이 여자들의 로망이라는 거. 그래서 솔직히, 저도 사장님한테 끌려요. 인정하긴 싫지만 사장님을 보면서 설레었던 적도 많구요. 그치만……이건 좋아하는 감정은 아니에요.”

“…….”

“연예인한테 느끼는 일종의 동경 같은 거랄까. 자기가 좋아하는 연예인이 갑작스럽게 기습 키스를 해온다면, 대번에 뿌릴 칠 사람이 몇이나 되겠어요.”

은돈이 독현과의 키스에 칼같이 선을 그으며 말했다.

“욕심난다고 다 가질 순 없잖아요. 사장님은 저 높은 곳에 두둥실 뜬 별과 같은 존재에요. 제가 욕심내기엔 너무 멀어요. 손을 뻗어도 닿지 않는다고요.”

“지금 그거. 무슨 노래 가산가?”

“저 지금 왕진지하니까 초치지 말아주세요.”

“…….”

“…….”

이윽고 그들 사이에 휘몰아친 침묵, 침묵, 침묵…….

묵언 수행하는 해인사 중 마냥 그들은 쉽사리 입을 열지 않았고, 한참 후.

질끈 눈을 감은 은돈이 말문을 뗐다.

“제가 아무리 남자가 궁하다지만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과 사귈 순 없어요. 죄송해요!”

“알겠어.”

“……네?”

“알겠다고.”

은돈이 시니컬하게 대꾸하는 눈앞의 레스토랑 오너를, 벙찐 표정으로 바라봤다.

뭐야, 이거 뭐야?

너무 쉽게 끝나는데?

나 좀 민망해지려고 하는데?

“아……그럼 얘기 끝난 거죠? 가요.”

삐그덕 삐그덕.

로봇 같은 움직임으로 은돈이 대리석 복도를 걷기 시작했다.

독현은 그런 은돈을 다시 엘리베이터 앞으로 잡아끌었다.

“집으로 가.”

“네……? 왜요? 사장님 밥도 차려드려야 하고 가져온 반찬 정리도 해야 하는,”

“날 찬 여자랑 단둘이 밥 먹을 기분 아니야. 가봐.”

다시 촤라락 열리는 엘리베이터 안으로 은돈을 밀어 넣은 독현이 1층 버튼을 눌러주며 말했다.

“잘 가.”

“?! 아니 사장님,”

“아. 내일도 올 필요 없어. 레스토랑으로 바로 출근해.”

“그, 그게 아니라 사장님,”

촤락-

그녀가 말을 잇기도 전에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며 독현의 얼굴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1평이 채 안 되는 내부에 갇힌 은돈은 멍하니 허공을 응시했다.

“뭐지, 이거? 분명히 찬 건 난데, 왜 꼭 내가 차인 것 같지……?”

***

“야 꼭 니가 차인 거 같은, 이 더럽게 찝찝한 기분은 다 뭐냐?”

“그러게 말이다.”

행운빌라.

짠. 하고 맥주캔을 부딪친 은돈과 미자가 곧 크아! 시원한 탄성을 내뱉었다.

“미자야. 이번 일로 설마 지독현이 날 자른다거나 하진 않겠지?”

“와우. 고백을 거절한 데 따른 보복성 해고?”

“인간이 하다 하다, 그렇게 까지 유치하고 치졸할 순 없을 거야? 그치?”

“야! 지독현 사마 정도면 유치하고 치졸해도 낫띵 돈 워리야!”

지독현 사마라니.

욘사마를 추앙하는 니혼진 아줌마와 같은 눈빛으로 미자가 허공을 향해 부르짖었다.

“지독현 싸마! 그 환자복 핏을 다시 한 번만 볼 수 있다면! 니네 레스토랑 일 년 정기 회원권 같은 거 없냐? 있음 나한테 싸게 팔래?”

“무슨 롯데월드냐? 일 년 정기회원권은 무슨.”

은돈의 핀잔에 미자가 안타깝다는 듯 마른 오징어를 잘근잘근 씹었고, 이내 뭔가가 생각 난듯 아! 하며 손뼉을 쳤다.

“야, 건 그렇고 너 어제 입원해 있는 동안 옆집에 누가 이사 왔는지 알아?”

“……? 누구 이사 왔어?”

“아직 이름은 접수 못했는데, 얼굴이 내 스타일이야. 완전 꽃돌이더라구. 어제 짐 들이는데 짜식, 뒷태도 끝내 주대? 나 필러 붓기 좀 가라앉으면 걔한테 들이대볼까?”

젠장. 들이대라 들이대.

지독현 사마한테도 들이대고 옆집 이사남한테도 들이대고.

“난 가끔 부러워 미자야. 너의 그 생각 없음이.”

나도 앞 뒤 생각 않고, 아무것도 재지 않고 지독현의 마음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면 좋았을까?

“……헙? 내가 지금 뭔 생각을 하는 거여! 정신 차려 차은돈!”

고개를 치켜든 은돈이 찰싹! 양손으로 셀프 싸대기를 후려쳤다.

이윽고 맥주 캔을 들어 벌컥 벌컥 들이키는 그녀의 귓가로, 미자의 서슬 퍼런 잔소리가 따라 붙었다.

“야 작작 마셔 이년아! 그러다 또 살찔라! 이 예.비 뚱땡아……!”

***

“손님은 왕이다!”

“언제나 내 가족에게 대접한다는 생각으로!”

전 직원이 모여선 다원정 홀.

아침 구호를 외치는 직원들 틈에 선 은돈이 초조한 낯으로 곧 독현이 들어설 출구를 응시했다.

“손님은. 왕이다. 언제나 내 가족에게…….”

지세는 그런 은돈의 맞은편에 선채 무표정한 얼굴로 구호를 읊조렸고, 그때였다.

여직원 하나를 대동한 총지배인이 은돈의 앞을 떡하니 막아섰다.

“차은돈 씨. 이 기사 봤어요?”

“네?”

은돈이 말없이 지배인이 건네는 신문을 받아들었다.

그리곤 자신을 독현의 숨겨진 애인 ‘차모 씨’ 로 묘사한 기사를 내려다보았다.

허어?

“이…… 이건 제가 아닌데요.”

일단 잡아떼고 보잔 심보로 그녀가 둘러대자, 총지배인이 미심쩍다는 듯 눈썹을 치켜 올렸다.

“뉴스에 모자이크 되서 나온 여자. 차은돈 씨 정말 아니에요?”

“에이 맞잖아요. 뉴스에 나온 여자랑 차은돈 씨랑 실루엣이 똑같던데! 게다가 차모 씨! 차은돈! 성도 같잖아요!”

옆에 섰던 젊은 여직원이 확신에 차 소리침과 동시에, 하! 총지배인의 입에서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차은돈 씨. 내가 처음에 경고했죠. 우리 사장님한테 사적으로 들이대지 말라고. 가뜩이나 낙하산으로 들어왔으면서, 다른 직원들 보기 창피하지 않아요?”

“지배인님 그거 저 아니라니까요. 정말 아니에요!”

절박한 얼굴로 자신을 대변하던 은돈이 순간 맞은편의 지세와 시선이 마주쳤다.

아오 민망해.

쟨 다 알고 있잖아.

지독현이랑 같이 납치 된 차모 씨가 나란 거.

‘비밀로 해주라.’

자신을 향해 살짝 눈짓 해 보이는 은돈을, 지세가 말없이 바라보다 아래로 시선을 떨궜다.

그즈음 총지배인이 다시 은돈을 들볶기 시작했다.

“차은돈 씨. 우리 솔직해지자구요. 기사 사진 정말 차은돈 씨 아니에요?”

“아니라,”

“맞아. 차은돈이야.”

일순 들려오는 날 선 음성에 은돈을 포함한 직원들의 고개가 출구를 향했다.

“사장님…….”

당혹스러운 얼굴의 총지배인을 힐끗 노려보며, 독현이 뚜벅뚜벅 직원들 곁으로 다가섰다.

뒤이어 그가 은돈의 손에 들린 신문을 고갯짓으로 가리켰다.

“거기 실린 차모 씨. 그래 차은돈이야. 그래서. 뭐 문제 있나?”

“…….”

“…….”

행여 눈 밖에 날까 모두가 숨을 죽인 가운데, 은돈이 입을 뻐끔대며 뒷목을 부여잡았다.

지금 그 기사를 인정해버리면 어떻게 해?

가뜩이나 다들 날 지독현의 숨겨진 애인쯤으로 생각하는데?!

“그럼 차은돈이랑 사장님이랑 새벽까지 밀회를 즐기다 납치됐다는 기사가 사실이야?”

“둘이 텅 빈 레스토랑에서 그 시간까지 뭘 한 거야? 사귀는 게 맞긴 맞나봐…….”

점점 더 커지는 직원들의 수근거림에 은돈이 눈을 치떴다.

사귀는 사이라니……밀회라니!

그녀가 회까닥 고개를 돌려 독현을 노려봤다.

대체 왜 반박하지 않는 거야?

오히려 즐기는 듯한 그 짓궂은 표정은 다 뭐냐고.

“하이고오~~~! 사장님 몸은 좀 괜찮으십니까!? 세상에 납치극이 웬 말입니까!”

그때, 부주가 독현을 향해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그는 자신의 충직함을 어필할 요량으로 아부 톤을 장착한 채 목소리를 높였다.

“사장님이 납치범한테 선처를 베풀기로 했다는 기사를 보고 제가 목이 메여 혼났습니다. 자 여기 보세요 눈 빨개 진 거!”

“좀 치워.”

자신에게 들이댄 부주의 얼굴을 밀어내며, 독현이 저돌적인 걸음으로 은돈에게 다가섰다.

꿀꺽. 은돈이 마른침을 삼키며 제 앞에 선 그를 올려다보았다.

“뭐, 뭐에요?”

“이거 받아.”

독현이 들고 있던 종이 백을 은돈에게 억지로 쥐어주었다.

“……핸드폰이잖아요. 이걸 왜 절 주세요?”

은돈이 백안에 든 새 핸드폰에서 후다닥 시선을 떼며 물었다.

“가져. 니 거야.”

“네?”

“너 핸드폰 없잖아.”

아…… 은돈은 납치범 발에 밟혀 운명을 다한 자신의 핸드폰을 떠올렸다.

이윽고 그녀가 고개를 내저으며 다시 종이 백을 독현에게 건넸다.

“이걸 제가 왜 받아요. 도로 가져가세요.”

주변을 의식한 듯 한층 카랑카랑해진 톤.

독현이 그런 은돈을 태연하게 마주보며 딴 소리를 내놓았다.

“아침엔 좀 잤나?”

“……?”

“내일부터 맨션에 들를 필요 없이, 레스토랑으로 곧장 출근해.”

“그게 무슨…….”

“괜히 번거롭게 왔다 갔다 할 필요 없단 소리야. 아침은 따로 챙겨먹을게. 어제 니가 주고 간 반찬. 오늘도 나 혼자 꺼내 먹었어.”

마치 칭찬을 바라듯 으쓱한 표정의 독현을 보며……은돈이 빠르게 눈을 깜박였다.

이어서 그녀는 충격에 휩싸인 직원일동을 흘끔 돌아보았다.

그들 모두는 이미 독현과 은돈이 그렇고 그런 사이라고 확신하는 듯 했다.

“사장님. 잠깐 저 좀 보시죠.”

화악-! 은돈이 박력 있게 독현의 팔을 잡아끌었다.

***

프레지던트 룸.

업무 책상 앞에 선 은돈이 회전의자에 다리를 꼬고 앉은 독현을 한참 노려보았다.

“사장님. 아까 그 행동은 다 뭐에요? 사람들 눈빛 봤어요? 다들 우리가 사귀는 줄 알아요.”

“그게 어때서.”

독현의 오만한 태도에 은돈이 질렸다는 듯 한손으로 머리를 거머쥐었다.

“우리 어제 얘기 끝난 거 아니었나요? 분명히 전달했잖아요. 난 사장님 맘 받아줄 생각 없다고.”

“그래서?”

“그래서라니…… 사장님도 알겠다고 했잖아요.”

“알겠다고 했지. 널 더 이상 좋아하지 않겠다곤 말 안했어.”

“그게 대체 뭔 망발, 아니 막말이에요!?”

“넌 나 좋아 하지 마. 난 이대로 쭉 너.만 좋아할 테니까.”

헉. 은돈이 호흡을 멈추며 눈앞의 뻔뻔 갑, 재벌 3세를 응시했다.

“나 지금 팔에 닭살 돋은 거 보이죠? 사장님이 무슨 순정만화 비련의 여주인공이에요? 안 어울리게 웬 해바라기 사랑?”

“난 원래 한 우물만 파.”

“그게 뭔!? 문소라 씨도 알아요? 사장님 이러는 거?”

은돈의 말에 독현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문소라를 이용해서 날 떠볼 생각하지 마. 그 여자랑 내가 아무 사이 아니란 거 잘 알잖아?”

“그치만,”

“내가 원하는 건 너야 차은돈. 문소라가 뭐라고 하든. 내 관심사는 너라고.”

맹목적인 눈빛으로 말을 잇는 그를 보며, 은돈은 일전에 들었던 박 할매의 말을 떠올렸다.

‘겉으로는 차가워 보여도, 알고 보면 참 단순하고 바보 같은 분입니다. 한번 사람한테 마음을 주면 절대로 변하지 않죠.’

그래. 지독현은 한번 사람한테 마음을 주면 절대로 변치 않는다.

그래서 박 명장님을 20년이나 오도 가도 못하게 자신의 옆에 묶어 두었다.

젠장. 왠지 온몸에 오한이 이는구만.

“저기요, 사장님이 날 갑자기 좋아하게 된 배경과 이유나 좀 알죠. 한번 말해 봐요. 왜 못 잡아먹어 안달이던 날 좋.아.하.게 됐는지.”

날카로운 어조로 물어오는 은돈을, 독현이 뚫어져라 응시했다.

왜 좋아하냐고?

사실 모르겠다.

단순히 차은돈이 ‘예뻐졌기 때문‘이라고 그 이유를 지레짐작 할 뿐.

“달라졌으니까.”

“네?”

“네 모습이 예전과는 달라졌으니까. 그 점에 끌렸어.”

“말인 즉슨……내가 살 빼고 달라져서, 겉모습에 혹했다는 거네요?”

“아마도.”

아마도. 라고 대답하는 순간, 독현은 은돈의 표정이 굳어지는 것을 보았다.

이게 아닌데, 싶다.

뭔가 저 여자가 납득할만한 이유를 대야했다.

자신이 차은돈을 좋아하게 된 꽤 그럴싸한 이유.

하지만, 정말 생각이 나지 않는다.

그냥, 아무 이유 없이, 아무것도 재지 않고 저 여자가 좋아진 걸 어떡하라고.

답답한지, 독현의 목울대가 울렁였다.

그와 동시에 은돈이 차갑게 식은 낯을 쳐들었다.

“내가 누구 땜에 기를 쓰고 살을 뺐다고 생각해요?”

“뭐?”

“사장님 때문이에요. 난 날 무시한 사장님한테 복수하고 싶어서 살을 뺀 거지, 사장님이랑 연애질이나 하려고 달라진 게 아니에요.”

“…….”

“어쨌거나 고맙네. 겉모습에 혹 한 것뿐이라고 솔직히 말해줘서. 덕분에 사장님을 멀리해야겠다는 결심이 더 확고해졌어요.”

말을 마친 은돈이 꾸벅 고개를 수그린 뒤 돌아섰다.

쾅-!

이윽고 세찬 소리로 문이 닫힘과 동시에 독현이 책상 위에 올려진 종이 백을 바라보았다.

백 안에 든 건 은돈이 거부한 새 핸드폰.

선물을 하면 틀림없이 좋아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돌아오는 건 실망어린 표정과 짜증뿐.

대체 마음에 드는 여자한테 뭘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독현은 한 번도 학습해본 적이 없었다.

먼저 누군가를 좋아해본 경험도, 거부당해본 경험도 전무했으니까.

그가 메마른 시선으로 훅,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

남자 탈의실.

“오늘 차은돈 봤어? 하루 종일 버젓이 주방 활개치고 다니는 거?”

“다들 사장 빽이다 뭐다 말 많은 거 알면서, 태연히 칼질하는 거 보니까 내 등골이 다 서늘하대? 독종이야 독종.”

“하긴. 그렇게 독해야 사장을 꼬시지.”

퇴근시간에 맞춰 조리복을 갈아입던 두 남자가 저들끼리 은돈을 화두에 올린 채 떠들어대고 있었다.

쾅-!

그때 요란한 소리로 캐비넷 문이 닫히며 지세의 얼굴이 드러났다.

한창 쑥덕이던 두 남자가 놀란 얼굴로 지세를 응시했다.

“아우 깜짝이야. 이지세. 거기 있었어?”

“…….”

남자의 물음에 지금 막 캐비닛을 닫고 돌아선 지세가 대답 없이 눈빛을 굳혔다.

“뭐야 저 자식……지금 내 말 씹은 거야?”

지세의 태도가 영 거슬린다는 듯, 남자가 한소리를 늘어놓으려는 찰나, 다른 동료하나가 그를 잡아끌고 휴게실을 빠져나갔다.

“후…….”

이윽고 혼자 남겨진 지세의 입에서 가느다란 한숨이 새나왔다.

그는 굳어진 표정으로 조리복 단추를 하나 하나 끌러 내리기 시작했다.

***

“다들 조심해서 들어가세요!”

“내일 보자~”

다원정 야외주차장.

직원들이 모두 사라진 후, 홀로 후문 앞에 남겨진 은돈이 우중충한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장마철도 아닌데 비가 이렇게 오냐……우산도 없고만…….”

쏟아지는 빗줄기를 하염없이 바라보며 얼마쯤 서있었을까.

갑자기 누군가 그녀의 어깨를 턱 짚었다.

“……뭐에요?”

이 인간. 진작에 퇴근한 줄 알았더니…….

은돈이 눈앞에 떡하니 버티고 선 독현을 올려다보았다.

“비키세요. 저 퇴근하게.”

“타고 가.”

“뭘요? 아, 또 사장님 차요?”

“비 오잖아. 타고 가.”

“됐어요. 까짓 비, 맞고 가면 돼요.”

“너야말로, 니가 무슨 순정만화 주인공이야? 청승맞게 비나 맞고 돌아다니게. 타.”

독현이 은돈의 팔을 붙든 채 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몇 발짝 못가서 탁! 은돈이 그의 팔을 뿌리쳤다.

그와 동시에 독현의 귀로 뚜각, 자신의 인내심이 끊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도대체 오늘 하루 종일 나랑 눈 한번 안 마주치는 이유가 뭐야.”

“몰라서 물어요?”

넌 왜 잘해줘도 난리야?

입안을 맴도는 신경질적인 한마디를 간신히 삼키며, 독현이 다시 입을 열었다.

“내가 뭘 잘못 했는진 모르겠지만 일단 사과하지. 그러니까 이거 받아.”

그가 은돈의 손에 처덕, 핸드폰을 쥐어주었다.

“안 가질 거면 버리던가.”

그녀의 표정이 심상찮음을 감지한 독현이 시크하게 뒷말을 덧붙였다.

“받아요. 안 가질래요.”

척, 은돈이 보란 듯 그에게 핸드폰을 건넸다.

독현은 자신에게 내밀어진 빌어먹을 핸드폰을 말없이 내려다보다, 이내 쓰레기통 위로 처박아 버렸다.

“미쳤어요!? 그걸 진짜 버려요?!”

“난 미리 예고했어."

후다닥 쓰레기통을 뒤지는 은돈을 보며, 그가 무심한 소리를 튕겨 냈다.

잠시 후, 맨손으로 폰을 끄집어 든 은돈이 후,하, 화를 참으려는 듯 심호흡을 연발했다.

“좋아요. 어차피 저 주려고 사셨다니까, 감사한 맘으로 쓸게요. 근데 사장님. 이것만큼은 꼭 알아두세요.”

“……?”

“상대방이 불편해하면, 그건 더 이상 호의도, 친절도, 뭣도 아니에요.”

“지금 내 나름의 호의를 깎아내리는 건가?”

“글쎄 호의가 아니라니까요? 하여간 제 월급에서 핸드폰 요금이랑 기계 값, 다달이 제해주세요. 안 그럼 저 이거 못 써요.”

“맘대로 해.”

독현이 퉁명스런 한마디를 내던졌다.

왜 잘해주면 잘해줄수록 더 화를 내는 건지,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누나. 안 갔어요?”

그때였다.

막 후문으로 나온 지세가 은돈을 향해 반달눈을 해보였다.

“어, 딱 가려니까 비가 쏟아지네.”

그녀의 말에 지세가 손에 든 우산을 살짝 들어보였다.

“같이 쓰고 갈래요? 나랑.”

“아. 그럴까? 고마워.”

아 그럴까?

순간 독현이 가늘게 뜬 눈으로 두 사람을 차례로 응시했다.

고맙다니.

겨우 우산 따위에 고맙다는 말이 그렇게 쉽게 나와?

“차은돈 너,”

“사장님. 그럼 조심해서 가세요. 저흰 먼저 가볼게요.”

말을 마친 은돈이 독현에게서 몸을 돌려세웠다.

“하?”

펼쳐진 우산 아래 나란히 선 은돈과 지세의 모습.

그 모습이 눈가에 가시처럼 몹시 거슬린다.

독현은 잠자코 냉랭한 시선을 유지했고, 그때였다.

“어이 차은돈! 너 스토브 정리 제대로 안 했지? 어딜 그냥 내빼려고!”

내부에서 들려오는 부주의 외침에 은돈이 당황해선 머리를 긁적였다.

“이상하다? 분명 깨끗하게 했는데……지세야, 잠시만.”

……그녀가 다시 레스토랑 안으로 튀어 들어간 직후.

우두커니 후문 앞에 남겨진 독현과 지세, 두 남자 사이에 몹시 어색한 정적이 깃들었다.

“……아마도요.”

“……?”

갑작스레 말문을 연 지세를, 독현이 미간을 좁힌 채 바라보았다.

지세는 아랑곳 않고 자신이 받쳐 든 우산을 응시했다.

그리곤 다시 담담한 한마디를 내뱉었다.

“아마도……차은돈 씨가 원하는 호의는 따로 있는 것 같네요.”

독현을 향해 시선을 곧추세운 그가 도전적인 미소로 웃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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