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지독현 납치사건 Ⅰ
“으…….”
살며시 눈을 뜬 은돈이 자신의 밑에 깔린 그림자남을 바라보았다.
이윽고 아주 익숙한 목소리가 그녀의 귓전을 울렸다.
“비켜. 차은돈.”
“헛! 내, 내, 내 이름을 어떻게……?!”
“오버하지 마. 너 좀 전에 나인 거 알았잖아.”
“……죄송합니다.”
후다닥. 은돈이 재빨리 몸을 일으켰다.
망할, 하필 깔아뭉갠 사람이 지독현이라니.
“그게요. 소화기로 후려 칠 때까지는 진짜 사장님인지 몰랐거든요…….”
은돈이 몸을 일으키는 독현을 향해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말했다.
“너 이거 살인미수야.”
탁! 독현이 보조 등을 키며 쏘아붙였다.
주변이 환해지자, 은돈의 시야에 자신이 휘두른 소화기가 들어왔다.
하마터면 오늘 살인을 저지를 뻔 했군.
“죄송해요. 너무 놀라서 그랬어요. 사장님이 갑자기 뒤에서 덮칠 기세로 달려드니까!”
“니 어깰 짚으려던 것뿐이야.”
윽. 할 말 없음.
“어디 멍들거나 까진 건 아니죠?”
은돈의 물음에 독현이 재킷을 가볍게 털며 말했다.
“대체 이 시간까지 뭘 하고 있었던 거야.”
“……? 뭘 했냐구요?”
하……그녀가 저도 모르게 허탈한 웃음을 터뜨렸다.
“이 시간까지 누구땜에 주방에서 사골 고았는데요.”
“……설마 나 때문인가?”
“‘나 때문? 나 때무운? 사장님, 지금 일부러 그러는 거죠? 나 화병 나 죽으라고?”
“글쎄. 그런 것도 같고.”
“아우 진짜. 말을 말아야지.”
은돈이 지끈거리는 머리를 감싸 쥔 채 다시 독현을 응시했다.
“근데. 그러는 사장님은 이 시간까지 뭐했는데요? 퇴근 안 하고?”
“뭐 이것저것. 그동안 니 생각하느라 밀려있던 일 좀 했어.”
“……제 생각이요?”
예상치 못한 그의 한마디에, 은돈의 귓불이 살짝 붉어졌다.
“이상한 상상하지 마 차은돈.”
“이, 이상한 상상이라뇨!”
“가령 내가 널 좋아할지도 모른다는 상상.”
뭐야 이 인간……?!
“걱정 마세요. 그런 쓸.데.없.는 상상 한 적 없으니까.”
“‘쓸데없는’이 아니라 ‘부질없는’이겠지. 어차피 가능성 제로인 망상에 불과하잖아.”
“하!”
기막혀 하는 은돈을 보며 독현이 입 꼬리를 끌어 올렸다.
난 너 따위. 차은돈 따위 좋아하지 않아.
“비켜.”
그가 오만한 표정으로 은돈을 옆으로 ‘치우며’ 걸음을 옮겼다.
“아우 씨. 나 지금 사장님 따라가는 거 아니에요.”
이 드넓은 레스토랑에 왜 나가는 출구는 하나뿐인 거야.
은돈이 입을 삐죽이며 독현의 뒤를 쫓았다. 그런데 그때.
먼저 출구에 다다른 독현이 은돈을 돌아보며 다급히 외쳤다.
“뒷문으로!”
엥? 밑도 끝도 없이 웬 뒷문……?
은돈은 고개를 갸웃하며 되려 그를 향해 한발 다가섰고, 그 순간-
캡 모자와 마스크 콜라보로 전형적인 범죄자 룩을 완성한 괴한 하나가 독현을 덮쳤다.
“사장님!”
뭐……뭐지? 경찰청 사람들에나 나올법한 이 상황은?
눈 앞에 펼쳐진 괴스러운 광경에, 은돈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그와 동시에 괴한이 고개를 돌려 그녀를 응시했다.
“아……아…….”
지금 이 순간, 은돈은 마른침을 삼키며 재빨리 아래와 같은 멘트를 떠올렸다.
‘전 아무것도 못 봤습니다, 선생님. 하시던 일 마저 하세요. 전 이만 사라겠습니다.”
큼큼, 성대 안쪽에 장전된 그 한마디를 꺼내놓으려 은돈이 목을 가다듬었다.
그러나……그녀가 누구던가. 소화기로 지독현도 때려잡는 무대포 깡다구 아니던가.
은돈은 괴한을 향해 생각해둔 멘트 대신 패기 돋는 한마디를 내던졌다.
“어이! 다, 당신 뭐야! 당장 내 고용주한테서 손 안 떼!?”
젠장. 내 남자도 아니고, 내 애인도 아닌 내 고용주.
다소 없어 보이는 그 외침을 내지르며 은돈이 부르르 어깨를 떨었다.
그런데 그때, 등 뒤에서 기습적으로 나타난 또 다른 괴한 하나가 그녀의 입을 수건으로 틀어막았다.
“우읍!”
짧은 신음과 함께 발버둥 치던 은돈은 얼마 지나지 않아 온몸이 나른해지는 것을 느꼈다.
수건에서 풍겨오는 옅은 약물 냄새.
잠시 후, 그녀는 희미해지는 정신을 추스르며 저만치에 있는 독현을 응시했다.
그 역시 약물에 취한 듯, 바닥에 한쪽 무릎을 댄 채 힘겨워하고 있었다.
“하여간…….”
정신을 잃고 괴한의 품으로 떨어지기 직전, 은돈의 입에서 완성되지 못한 한마디가 튕겨 나왔다.
하여간, 지독현 저 자식이랑 엮이면 뭐 하나 되는 일이 없다니까……!
***
“……돈. 차은돈. 일어나.”
“아으. 윽.”
경기도 평택 인근의 냉동 창고.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은돈이 곧 뜨악한 시선으로 자신의 몸을 칭칭 휘감은 밧줄을 응시했다.
“사장님! 사장님 어디 있어요?!”
“니 뒤에 있잖아.”
“네?”
은돈은 그제야 독현이 자신과 등을 맞대고 묶여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안 돼……이럴 수는 없어.
이런 곳에서 영문도 모른 채 지독현이랑 단둘이…….
“악! 아악! 살려주세요! 사람 살려! 아아악!”
그녀가 바닥에 앉은 채 동동 발을 구르기 시작했다.
“차은돈. 그런다고 와 줄 사람 없어.”
“혹시 모르잖아요! 아악! 거기 누구 없어요!?”
“정신 차려. 니 목만 아플 뿐이야.”
“사장님이나 정신 차려요! 이 판국에 왜 그렇게 태연해요? 태연 팬이에요!?”
“그게 무슨 헛소리야?”
극도로 불안정한 상태에서 은돈은 자신이 무슨 뻘소리를 지껄이는 지도 몰랐다.
독현은 자신과 등을 맞대고 앉은 은돈을 돌아보며 마른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를 진정시키려면, 일단 자신부터 그녀의 ‘수준’에 맞춰야 했다.
“차은돈. 너 영화에서 이런 장면 많이 봤지.”
“뜬금없이 뭔 소리에요!? 악! 사람 살려! 여기 사람 있다!"
"보면. 꼭 너처럼 설레발치는 인간들이 제일 먼저 죽잖아.”
“……헙?”
순간, 은돈의 눈이 왕방울 만하게 커졌다.
“주, 죽긴 내가 왜…….”
“그래, 안 죽어. 우린 무사히 여길 빠져나갈 거야. 그러니까 소리 지를 필요 없어.”
“우리요……?”
“응?”
“아니. 방금 사장님이 분명 우리라고…….”
“그래. 우리.”
독현이 반대편의 은돈을 향해 힘주어 말했다.
어쩐지 평소보다 살가운 그의 태도에, 가빴던 은돈의 호흡이 차차 본래의 템포를 되찾기 시작 했다.
“사장님. 나만 버리고 가면 안 돼요.”
“안 그래. 걱정 마.”
심지어 다정하기까지 한 독현의 보이스에, 은돈이 안심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몇 분쯤 지났을까.
“저기. 저한테 좋은 생각이 있는데요.”
마침내 평정심을 되찾은 그녀가 등 뒤의 독현을 향해 말을 건넸다.
“어쩌면 지금이 우리가 도망칠 최적의 타이밍인지도 몰라요. 납치범들이 다시 돌아오기 전에 우린 여길 떠야 돼요. 그니까 지금부터 내가 셋을 세면, 사장님이랑 내가 동시에 히푸를 들어 올리는 거예요.”
“뭐?”
황당한 듯 되묻는 독현을 돌아보며, 은돈이 심각하게 대꾸했다.
“어쩔 수 없잖아요. 같이 묶인 순간부터 우린 한 배를 탄 거예요. 자, 내가 하나 둘 셋 하면 벌떡 일어나서 저기 출구까지 구령 맞춰 뜁시다.”
“…….”
어이없는 그녀의 제안에 독현이 미간을 좁혔다.
그러나, 은돈의 작전을 대체할 다른 묘안이 떠오르지 않는다.
묶여있는 팔에 비해 그들의 발은 상대적으로 자유로웠다.
결국 독현은 은돈의 말에 따르기로 결심했다.
“사장님. 준비 하세요……하나아, 두울, 세엣!”
벌떡.
다음 순간- 동시에 바닥에서 엉덩이를 뗀 두 사람이 쓰러질 듯 비틀거리다 간신히 중심을 잡았다.
“사장님! 이쪽으로!”
“출구는 저쪽이야.”
“이쪽 아니에요?”
등을 맞대고 선 그들이 우왕좌왕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에라이! 일단 그쪽으로 가 봐요!”
은돈의 외침에, 독현이 출구를 향해 걸음을 내딛기 시작했다.
“발맞춰 가야죠! 자 하나 둘! 하나 둘!”
독현에게 의지한 채 ‘뒤로’ 달리던 은돈이 큰소리로 외쳤다.
“니들……지금 뭣 허냐?”
그때- 마스크를 뒤집어 쓴 괴한이 출구 앞에서 두 사람을 향해 말했다.
후읍. 은돈은 호흡을 멈춘 채 돌처럼 자리에 굳어 섰고.
그로부터 십 분 뒤.
“사장님 이제 어쩌죠……?”
꽁꽁 묶인 손발을 바라보던 은돈이 등 뒤의 독현을 향해 물었다.
그러나 그에게선 아무런 대답도 들려오지 않았다.
독현은 아까부터 말없이 괴한의 움직임을 눈으로 쫓고 있었다.
“니들 핸드폰 있지? 일단 그거부터 압수하자.”
그즈음, 박스 위에 앉아있던 괴한이 몸을 일으켜 두 사람에게 다가왔다.
“아따. 이거 신상폰 아냐? 역시 있는 놈은 뭐가 달라도 달라.”
괴한이 독현의 가슴팍에서 꺼내든 핸드폰을 보며 비아냥거렸다.
그와 동시에 은돈은 꿀꺽 마른침을 삼켰고, 곧 제 앞으로 다가서는 괴한을 향해 입을 열었다.
“저기요. 저는 핸드폰을 두고 와서…….”
“허. 이 아가씨야. 뒤져서 나오면 내 손에 뒤지는 수가 있어.”
“와우. 라, 라임이 끝내주시네요 선생님.”
그녀의 앙증맞은 아부에 독현이 절레절레 고개를 내저었다.
“차은돈. 일 크게 만들지 마. 일단 시키는 대로 해.”
“지, 진짜 두고 왔어요. 아까 퇴근할 때 깜빡하고 주방에…….”
“뭐야? 진짜 없네?”
은돈의 주머니를 뒤적이던 괴한이 빈손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뭐. 이 아가씨만 불쌍하게 됐군. 졸지에 덤으로 여기까지 딸려 와서 말이야.”
“그죠? 전 덤일 뿐이죠? 그럼 걍 보내주심 안될까요? 절대 신고 안할,”
“지금 장난해?!”
까앙-! 남자가 손에 든 쇠파이프를 위협적으로 바닥에 휘둘렀다.
은돈은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어깨를 움츠렸고, 그때 독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금 이 상황. 장난처럼은 안 보이는군. 당신 목적이 뭐야. 원하는 걸 말해.”
놀랍도록 차분한 음성.
괴한이 한쪽 입꼬리를 비릿하게 올리며 독현을 응시했다.
“원하는 게 뭐냐고? 글쎄. 뭐겠어? 뻔하잖아.”
남자의 말에 독현이 냉랭한 얼굴로 즉답을 내놓았다.
“그래서, 얼마를 원해?”
“캬. 역시 지 할애비를 닮아 시원시원하군.”
남자가 오버스럽게 엄지를 척 치켜들었다.
독현은 마스크로 가린 그의 얼굴을 꿰뚫듯 직시했다.
“나이가 꽤 있어 보이는데. 청승 떨지 말고 원하는 액수나 말해.”
“달라는 대로 줄 건가?”
남자의 물음에 독현의 입술이 가파르게 벌어졌다.
“돈은 원하는 만큼 주지. 단, 돈과 별개로 당신은 곧 쫓기게 될 거야.”
“왜, 경찰에 신고라도 하시게?”
“경찰?”
고개를 수그린 독현이 우습다는 듯 조소를 머금었다.
“당신이 두려워해야 할 사람은 지명준 회장이야. 그 늙은이가 돈보다 우선시하는 게 바로 나거든.”
독현은 살짝 동요하는 괴한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어릴 때 날 유괴하려던 남자가 있었지. 멍청한 놈이었어. 나를 미끼로 지명준 회장에게 돈을 요구했거든.”
“…….”
“생각해 봐. 어떻게 됐을 것 같아? 그 남자.”
“거, 걸 내가 어떻게 알아 이 새꺄!”
“그래. 나도 몰라. 아무도 모르지. 어느 날 갑자기 사라져 버렸거든. 원래부터 없었던 사람처럼. 대한민국에서 완전히 자취를 감춰버렸지.”
“이 개자식이 날 협박해……?”
험악하게 읊조리는 남자를 보며, 독현이 환멸어린 한마디를 내뱉었다.
“이 자리에서 얼마를 부르든, 당신은 부른 액수의 몇 배에 달하는 대가를 치르게 될 거야.”
“이……이…….”
“왜. 설마 그만한 각오도 없이 날 건드린 건가?”
일말의 감정도 묻어나지 않는 시선으로 독현이 괴한을 내리훑었다.
“저기요. 우리 사장님 한다면 하는 분이에요. 남 괴롭히는 데 놀부보다 더한 소질을 보인다구요. 그니까 이쯤에서 다 내려놓고 저흴 풀어주시면,”
“내가 널 왜 납치한 줄 알아?”
순간 괴한이 은돈의 말을 자르며 번득이는 시선을 쳐들었다.
“바로 지명준 회장 때문이다. 그 피도 눈물도 없는 인간 때문에, 지금 니들이 이 자리에 있는 거라고. 빌어먹을. 나 돈 안 받아도 돼. 넌 오늘 여기서 죽는다. 니 뒤의 여자랑 같이.”
스윽. 남자가 쇠파이프를 치켜들며 한발 앞으로 다가섰다.
“사, 사람 살려! 하나님! 부처님! 어디 계세요, 민중의 지팡이님!”
잔뜩 겁을 집어먹은 은돈은 다시금 악을 지르기 시작했고, 그때였다.
이제껏 침착한 페이스를 고수하던 독현이 처음으로 서늘한 시선을 치켜들며 말했다.
“손대지마 이 여자한테.”
“하! 새끼. 이 와중에 똥 폼 잡네? 너 이 여자랑 뭐 되냐?”
이죽대며 물어오는 괴한을 향해, 독현이 날선 어조로 대꾸했다.
“내가 결벽증이 좀 있어서 말이야. 누군가 내꺼에 함부로 손대는 걸 싫어하거든.”
“이 여자가 니꺼여?”
괴한이 은돈을 쇠파이프로 쿡 찌르며 말했다.
그와 동시에 독현의 입이 열렸다.
“내꺼야. 우리 레스토랑 직원이거든.”
‘레스토랑 직원 = 전부 다 내 소유’ 라는 다분히 뻔뻔한 논리를 내세우는 독현을, 은돈과 괴한이 황당하다는 듯 응시했다.
“사장님 지금 장난해요?”
“너 지금 나랑 장난해?”
그러거나 말거나, 독현은 시니컬한 눈빛으로 괴한을 훑으며 다시 말을 이었다.
“마지막 경고야. 이 여자한테 함부로 손대지마.”
“새꺄. 손대면 어쩔 건데? 왜. 뭐. 죽이기라도 하시게?”
“궁금하면 건드려 봐. 차라리 지명준 회장 손에 넘겨달라고 빌게 만들어 줄 테니까.”
“이 새끼가 진짜!”
차갑게 응수하는 독현을 향해 괴한이 쇠파이프를 치켜들었다.
그때. 끼기익-!
등골이 서늘한 소리와 함께 굳게 닫혀있던 출구가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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