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남자 밥해주기-21화 (21/93)

21화. 독현의 심술

“정말이라니까요 선생님. 대시 해오는 남자는커녕, 길 물어보는 남자도 없다구요!”

다음날 아침.

정류장 의자에 앉은 은돈이 닥터 한과의 화상통화 삼매경에 빠져있었다.

-아니 차은돈 씨 이렇게나 예뻐졌는데 정말 밥 사주겠단 남자 하나가 없어?

밥 사주겠다는 남자? 픽. 은돈이 자조적인 웃음을 터뜨렸다.

“곧 죽어도 나랑 같이 밥 먹겠다는 남자는 하나 있네요. 지독현이라고.”

-오 그래? 그 남자 도니 씨한테 관심 있나본데? 뭐하는 친구야?

“그냥……밥집해요. 밥집 주인. 근데 생각할수록 열 받네!? 그 인간이 나한테 그러더라구요. 웃지 말라고. 자기 앞에서. 그리고 다른 사람 앞에서.”

-흠. 그거 도니 씨 좋아해서 그런 거 아냐?

좋……뭐?

“풉. 푸학학학학-!”

은돈이 닥터 한의 얼굴이 뜬 액정화면을 보며 박장대소하기 시작했다.

“선생님! 제가 최근 들은 말 중에 젤 웃기네요. 지독현이 날 좋아해요? 훕! 후하하! 하늘이 갈라져도 그럴 일은 절대, 네버 없을 걸요!”

-하. 차은돈 씨. 자신감을 가져요. 당신은 더 이상 옛날의 차은돈이 아냐. 충분히 매력이 넘친다고. 그러니까,

“아뇨. 알아들었어요, 선생님. 지금 나한테 영업하시는 거죠? 알겠어요. 언제 한번 복부 고주파 받으러 갈게요!”

-이 답답한 인간아! 내 말이 틀린 것 같으면 당장 뒤부터 돌아봐! 아까부터 니 뒤에 남자가 너한테 노골적인 추파를 던지고 있으니까!

“추……파?”

닥터 한의 외침에 은돈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자신의 또래로 보이는 웬 남자와 떡하니 눈이 마주쳤다.

“흠흠!”

민망했는지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리는 그 남자를 보며, 은돈이 뭐에 홀린 듯 몸을 일으켰다.

-은돈 씨, 거봐 내 말이 맞지? 은돈 씨?

띠로롱. 닥터한과의 화상통화를 종료시키며, 은돈이 자신을 쳐다보던 남자를 향해 다가섰다.

“저기요.”

“네, 네?”

“혹시……아까부터 저 보신 거?”

“아뇨. 일부러 보려던 게 아니라……."

은돈은 적잖이 당황해 얼굴을 붉히는 남자를 보며, 한걸음 더 앞으로 내딛었다.

“저, 초면에 이런 말하긴 좀 그렇지만……번호 드릴까요?”

“네……?!”

황당하게 되묻는 남자를 향해, 그녀가 한발 더 다가섰다.

“저 정신 나간 여자 아니거든요. 그냥 제 인생에 이런 적이 처음이라, 꼭 기념해두고 싶어서요. 자, 핸드폰 좀 줘보세요. 번호 찍어드릴게.”

“아, 아뇨. 됐어요.”

“왜요. 받아보시죠. 제 번호 외우기도 쉬운데. 공일공의,”

“됐다니까요!”

은돈을 ‘이 구역의 미친년’으로 판단내린 남자가 슬슬 뒷걸음질 치다, 후다닥 달아나기 시작했다.

“저, 저기요! 저기요!”

은돈은 안타까이 남자를 향해 부르짖었고, 그 즈음 그녀의 앞으로 끼익! 소리를 내며 버스가 멈춰 섰다.

***

“아니 진짜로! 눈을 요렇게 뜨고 나만 쳐다보고 있더라니까요? 그 정류장에 여자가 나만 있었던 것도 아닌데!”

“…….”

“사장님 생각엔 어때요? 그 남자 나한테 완전 뿅 간 거 같죠?”

“…….”

“네? 사장님 생각은 어떠냐구요. 네? 네?!”

도곡동 맨션.

식탁 위의 은돈이 마주앉은 독현을 향해 아까부터 쉴 새 없이 떠들어 대고 있었다.

“아, 그냥 번호를 주고 올 껄 그랬어요. 내가 생각이 짧았어요. 그 남자가 내 운명의 반쪽일수도 있었,”

“그 운명 타령. 도대체 지금 몇 번을 반복하는 거야?”

드디어 고개를 치켜 든 독현의 입에서 날 선 한마디가 튕겨 나왔다.

그와 동시에 은돈의 입가에 은근한 조소가 걸렸다.

지독현 아주 듣기 싫은 티를 팍팍 내는구나.

그래. 너 시끄러운 거 딱 질색이지?

내가 아주 오늘 여기서 내 장대했던 연애사부터 살아온 인생사 썰을 모조리 풀고 갈란다.

네놈이 어제 내 옷에 흙탕물을 튀기고 간 벌이다.

“어? 사장님 지금 뭐하세요? 왜 밥에 든 콩을 일일이 골라내요?”

일부러 목소리 데시벨을 높인 은돈이 독현을 향해 물었다.

“설마 지금 편식하는 거에요? 하, 애도 아니고 참.”

그녀의 핀잔에도 아랑곳 않고, 독현은 여전히 콩 골라내기에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었다.

“사장님. 콩이 얼마나 몸에 좋은데요. 눈 딱 감고 먹어봐요.”

“싫어.”

“왜요. 맛없어서 그러죠?”

맛없어서? 순간 독현이 매서운 시선을 끌어올렸다.

“이건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야 차은돈.”

“아, 콩을 못 먹는데 무슨 대단히 대단한 이유라도 있나보네요?”

그녀의 비아냥에, 독현의 입술이 다시금 날렵하게 벌어졌다.

“콩은.”

“콩은?”

“……까매서 싫어.”

“네?”

“꼭 탄 것 같잖아. 불결해.”

불결이라니……그게 기껏 만들어 온 사람 앞에서 할 말이여?

이 콩자반 같은 놈아.

은돈은 독현을 뺀초롬이 노려봤고, 얼마 후 그를 골탕 먹일 묘안을 떠올렸다.

“하긴.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이 콩 말이에요. 사장님 말을 듣고 보니 까만 게 꼭, 토끼똥 같애요. 그쵸?”

“뭐?”

일순. 충격을 받은 듯 출렁이는 독현의 눈빛…….

그 눈빛을 발견한 은돈이 다시 입을 열었다.

“앞으로 사장님은 콩을 먹을 때마다 토끼 똥을 떠올리게 될겁니다. 자, 토끼 똥, 토끼 똥, 토끼 똥…….”

“너……지금 뭐하는 거야?”

“사장님 세뇌시키는 중인데요. 토끼 똥, 토끼 똥…….”

“차은돈…….”

찔끔. 은돈이 독현을 보며 입을 다물었다.

내가 너무 짓궂었나? 저 자식 표정 보니 상당히 빡친 것 같은데.

“사장님 화났어요?…….”

은돈이 자신의 눈치를 보건 말건, 독현은 계속해서 칼날 같은 시선을 유지했다.

사실 그는 눈앞의 은돈이 아닌 자기 자신에게 화가 나 있었다.

미친 자식.

차은돈의 저런 엽기적인 뻘짓거리에 가슴이 뛰다니.

아무래도 머릿속 사고회로가 제대로 고장이 난 모양이었다.

지금 그에겐 자신을 조롱하는 은돈의 모습조차 귀엽게만 보였다.

“아냐…….”

그가 이 현실을 어떻게든 부정해 보려는 듯 나직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리곤 이내 벌떡,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응? 벌써 다 드신 거에요?”

"……그래.”

짤막한 대답과 함께 걸음을 내딛던 독현이 비틀, 하고 몸을 휘청였다.

아무래도 충격이 상당한 모양.

그는 거실 기둥을 붙든 채 호흡을 가다듬었고, 이 모습을 지켜보던 은돈의 입에서 곧 눈치 없이 깨방정한 한마디가 쏟아졌다.

“사장님. 지금 출근하실 거면, 가는 길에 저도 태워주심,”

“안 돼.”

미간을 굳힌 독현이 즉답을 내놓았다.

“내가 굳이 널 내 옆자리에 태울 필요가 있나?”

“네?”

“어젠 그 자식이랑 둘이 잘만 가던데.”

냉정하게 말을 마친 그가 다시 제 방을 향해 돌아섰다.

식탁에 덩그러니 남겨진 은돈은 살짝 어깨를 으쓱했다.

“뭐야. 그 자식이라면……지세?”

***

논현에 위치한 라운지 바.

“올, 지독현! 웬일이야 니가 먼저 날 다 보자고 하고.”

센치하게 앉아있는 독현의 곁으로 다가온 지훈이 장난스레 말했다.

독현은 말없이 지훈의 앞에 온더락 잔을 내려놓았다.

“와우. 대낮부터 술까지? 신선한데? 뭐야 친구. 무슨 일이야?”

조급한 지훈의 물음에, 독현이 양주잔을 입가에 갖다 대며 말했다.

“신경 쓰이는 여자가 있어.”

“여자! 그거 내 전문분야지. 누군데?”

호기심 어린 눈을 빛내는 지훈을 보며 독현이 훅. 잔을 들이켰다.

……그로부터 약 십여 분 후.

대강의 사정을 전해들은 지훈의 입에서 사뭇 진지한 한마디가 흘러나왔다.

“그니까, 차은돈인지 뭔지 하는 여자만 보면 가슴이 뛰고, 웃는 모습만 봐도 좋고, 다른 자식 앞에서 웃을 땐 열이 확 치솟고. 뭐 그렇다는 건데.”

흠. 지훈이 턱을 문지르며 고민에 빠졌다.

그리곤 머잖아 그의 입이 열리며 명쾌한 판결이 떨어졌다.

“내가 볼 때. 넌 차은돈이란 여잘 좋아하는 게 아냐.”

“뭐?”

한줄기 빛과 같은 그의 말에 독현이 살짝 고개를 치켜들었다.

“내가 아는 지독현은 그렇게 쉽게 여자한테 마음을 주는 스타일이 아니거든. 지금 넌, 그 여잘 좋아한다는 착각에 빠진 거야. ‘차은돈을 좋아하는 게 아니냐’는 문소라의 말을 듣고 부터 쓸데없이 그 여잘 의식하게 된 거지.”

“……확실해?”

재차 확인을 받으려는 듯 물어오는 독현을 보며, 지훈이 쯔쯧 혀를 찼다.

“얌마. 사랑이란 건 말이지. 한 여잘 위해 니가 어떤 희생도 감수 할 수 있어야 하는 거야. 근데 너. 그 여자를 위해 희생 할 수 있어?”

”희생?”

독현이 우습지도 않다는 듯 메마른 시선을 곧추세웠다.

“자, 우리 예를 들어 보자. 가스실에 너랑 차은돈이 갇혔어.”

“그만해. 진부해 미칠 것 같으니까.”

“일단 들어 봐. 이 방에 방독면은 하나뿐이고 지금 너한테 있어. 어쩔래?”

“어쩌다니. 뭘.”

“차은돈한테 네 방독면을 양보할 수 있냐고.”

“미쳤어?”

“유후. 답 나왔네.”

지훈이 양손을 번쩍 들어 보이며 말했다.

“그래……정말 좋아하는 게 아니란 말이지.”

온더락 잔을 내려놓은 독현이 어느 정도 확신에 찬 한마디를 읊조렸다.

뒤이어 지훈이 그런 그의 어깨를 스윽 감쌌다.

“이 자식, 이럴 때보면 완전 애야, 애. 하긴 니가 사랑에 대해 뭘 알겠냐. 그 까탈스런 성격 탓에 진정한 사랑 한번 못해본 니가.”

확! 독현이 지훈의 팔을 걷어내며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었다. 그럼 그렇지 싶다.

자신이 차은돈 ‘같은 걸’ 좋아할 리가 없다.

마음의 크나큰 위안을 찾은 듯, 그가 특유의 냉소를 머금었다.

***

다원정 주방.

은돈을 비롯한 조리사들이 부산히 움직이고 있는 가운데, 입구에서 촉새 같은 외침이 들려왔다.

“님들! 지금 밖에 쌈 났어요! 다들 출동!”

응? 웬 싸움?

은돈이 칼질을 하다 말고 고개를 돌렸다.

그와 동시에 호기심이 발동한 부주와 조리사들이 앞 다투어 출구로 몰려갔다.

“안 그래도 좀 쉴까 했는데 잘 됐다. 우리도 나가보자!”

은돈이 옆자리에서 고기를 랩핑 하던 지세의 손을 잡아끌었다.

“누나 저 냉동고에 잠깐 다녀와야 하는데.”

“야 원래 영화보다 재미 진 게 쌈 구경이란 말이야! 빨리 와!”

“네…….”

지세가 어쩔 수 없다는 듯 은돈에게 자신의 손을 내맡겼다.

…… 잠시 후.

“아 다 필요 없고! 여기 사장 나오라 그래!”

대형 홀.

은돈이 레스토랑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허름한 차림의 중년 남자를 응시했다.

남자는 홀 중앙에 선 채 직원들을 향해 계속해서 언성을 높이고 있었다.

“아니 이 비싼 스테끼에서 이물질이 나왔는데 보상을 안 해준다는 게 말이 돼!? 얼른 돈 내놔! 내 정신적 피해보상비!”

“이보세요, 손님! 대체 스테이크에서 돌멩이가 나왔다는 게 말이나 됩니까!?”

총지배인이 손에 든 돌멩이를 내보이며 날카롭게 외쳤다.

“와우……저건 돌멩이가 거의 짱돌 수준인데? 심했다.”

은돈의 혼잣말에, 옆에 섰던 지세가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고 그때 다시금 중년 남자의 험악한 외침이 들려왔다.

“니들! 계속 이따구로 나오면 나 오늘 집에 안 간다! 어디 누가 이기나 한번 해보자!”

“손님! 지금 손님께선 우리 직원들은 물론, 다른 손님들한테까지 피해를 주고 계십니다. 마지막으로 경고하는데 조용히 나가 주,”

“이게 어디서 꼬박꼬박 말대꾸야! 종업원 주제에! 아, 됐고! 여기 사장 나오라 그래! 스테끼 한 조각에 오만 원 넘게 받아 처먹는 그 재수탱이 얼굴 좀 보자!”

남자가 제 앞을 가로막는 총지배인을 밀쳐내며 위풍당당하게 소리쳤다.

그와 동시에. 화악-! 누군가 남자의 어깨를 거칠게 잡아 돌렸다.

“넌 뭐야!”

“내가 여기 재수탱이야.”

“뭐? 니, 니가 여기 사장이냐?”

중년남자가 자신과 마주선 독현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용건이 뭐야.”

출근하자마자 골치 아픈 일에 휘말린 것이 불쾌하다는 듯 독현이 얼음장 같은 한마디를 던졌다.

그러자 남자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이거 봐! 손님은 왕이라는데 태도가 뭐 그래?! 내가 여기서 무려 오만 원이 넘는 식사를 했는데!”

“손님은 왕……?”

한 발, 독현이 남자를 향해 다가섰다.

그리곤 매우 독단적인 음성을 내뱉었다.

“여기선 내가 왕이야.”

“뭐, 뭐시기?”

“이만 나가주시죠. 난 손님 가려서 받습니다.”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독현이 남자의 멱살을 잡아 출구로 끌어냈다.

“이거 놔! 이거 안 놔!?”

탁! 발버둥 치던 남자가 다음 순간 가까스로 독현의 손아귀를 벗어났다.

뒤이어, 그의 입에서 어쩐지 의심장한 한마디가 흘러나왔다.

“어이, 젊은 사장. 자꾸 이러면 곤란해. 내가 오늘 여기 왜 왔는지 알아?”

“글쎄. 별로 궁금하지 않은데.”

“큭. 크크……지금 그 말, 후회 안할 자신 있어?”

“아마도?”

“지금이라도 당신이 나한테 정식으로 사과하면. 전부 없던 일로 해주지. 어때?”

남자의 말에 독현이 살짝 인상을 찡그리며 입을 다물었다.

그 후 몇 초간 묘한 침묵이 이어졌고.

“끌어내.”

이어진 독현의 고갯짓에 직원 몇이 남자를 제압하기 시작했다.

“야! 임마 너! 너 후회할거야! 후회할 거라고오!”

외마디 비명을 내지르던 남자가 곧 시야에서 사라지자…….

독현이 홀가분한 표정으로 복도를 향해 돌아섰다.

“……아.”

몇 발짝쯤 내딛었을까. 그가 은돈을 향해 시선을 비틀었다.

“차은돈.”

“네, 네?!”

난데없는 소란에 얼어있던 은돈이 놀란 토끼 눈으로 독현을 바라봤다.

이윽고, 시크한 한마디가 그녀의 귓전을 울렸다.

“너, 내방으로 와.”

***

“이, 이게 다 뭐에요?”

프레지던트 룸.

은돈이 경악스런 얼굴로 소파 협탁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이에 독현이 입 꼬리를 끌어올리며 대꾸했다.

“보면 알 거 아냐. 뭔지.”

“……제 눈이 잘못된 게 아니라면, 이건 사골이네요. 소뼈요. 근데 이걸 저더러 어쩌라는,”

“몰라서 물어?”

“하하. 설마……고아달라는 건 아니죠?”

“맞아. 먹고 싶어.”

“사, 사골 국이요?!”

“그래. 먹고 싶어졌어, 갑자기.”

피식. 말을 마친 독현이 조롱기가 섞인 비웃음을 흘렸다.

그와 동시에 은돈이 혼돈스러운 머리를 감싸 쥐었다.

가만 있어봐. 지금 이거, 시어머니들이 갓 헬 게이트에 입성한 며느리 잡을 때 써먹는 방법 아냐?

‘얘, 아가야 내가 뼈마디가 시리다. 사골 좀 고아다 바치렴’하고.

“하. 사장님……꼭 이걸 고아 드셔야겠어요? 제가 기가 막히게 곰국 맛있는 집 아는데 금방 가서 사올게요!”

”잊었어? 난 니가 만든 음식이 아니면 먹지 못해.”

“하하하……그랬죠. 참.”

멘붕에 빠진 은돈이 다시금 눈앞에 놓인 사골을 응시했다.

족히 15키로는 돼 보이는 걸?

이놈이 날 골로 가게 하려고 작정을 했구나.

“사장님. 일 년 열두 달 사골국만 드링킹 할 일 있어요? 왜요, 아주 한 이년 치 끓여드릴까?”

"좋은 생각이야.”

얼씨구? 좋은 생각? 조호오오은 생각?

은돈이 이를 악 문 채 눈앞의 상전을 노려보았다.

하. 모두가 시어머니를 모실 때 나 차은돈, 홀로 ‘지’어머니를 모시다. 제길.

“후. 그럼 전 가서 얘네들 핏물부터 빼야겠어요.”

현실을 받아들이기로 한 듯, 그녀가 대량의 사골이 담긴 팩을 집어 들었다.

“윽! 생각보다 무겁네.”

“!”

독현이 팩을 들고 낑낑대는 은돈을 돕기 위해 무심코 손을 뻗었다.

그러나……다음 순간 그가 보인 행동은 비매너의 극치.

독현은 협탁에 놓인 사골 팩 하나를 더 집어 은돈의 품에 던지듯 올려놓았다.

“아! 하나씩 나를 게요! 무겁단 말이에요!”

“엄살 부리지마.”

마치 자신은 차은돈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독현이 유치하고 고집스런 한마디를 툭 튕겨냈다.

***

그날 저녁.

“누나 나한테 뭐든 시켜요. 내가 도울 수 있는 건 다 도울게요.”

사골이 팔팔 끓고 있는 전 솥 앞에서, 지세가 은돈을 향해 말을 이었다.

“이거 오늘 밤새 고아야 해서 혼자는 힘들어요. 내가 옆에서 거들어 줄,”

“얌마 이지세! 너 대체 누구 보조야!”

그즈음, 홀연히 나타난 부주가 지세의 등짝을 팔꿈치로 찍어 눌렀다.

“넘 마! 따라와! 오늘 주방 남자들끼리 한잔 하자!”

“아뇨, 전,”

“아니긴 뭐가 아냐! 거절은 거절한다! 따라와!”

“부주 잠시만요! 누나, 미안해요.”

부주에게 억지로 끌려가는 지세의 마지막 모습을 보며, 은돈이 살짝 손을 흔들어 주었다.

잘 가라 풋내기 소년이여.

나는 여기 남아 내 이 한 몸을 불사르리라.

“하아…….”

눈앞에서 팔팔 우러나는 우유 빛깔 국물을 보며 은돈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윽고 그녀는 거대한 솥단지 속 기름기를 한지로 걷어내기 시작했고…….

그 후, 얼마나 오래 그 지루한 작업을 반복 또 반복 했을까.

“드디어……!”

무려 새벽 세시 경.

은돈이 진득하게 우러난 사골 국물을 벅 찬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이 국물 뽀오얀 거 좀 봐……아니, 이럴 때가 아니지. 얼른 콜택시부터 부르고!”

집에 갈 생각에 한껏 들뜬 그녀가 조리모를 벗어던지며 주방을 나섰다.

그리고 정확히 십오 분 후.

“아우. 왜 이렇게 깜깜해……?”

사복 차림의 은돈이 어두운 복도를 더듬더듬 짚어가며 출구로 향하고 있었다.

“아니 보조등 이라도 좀 켜놓지. 하나도 안 보이…….”

순간. 말을 잇다 만 그녀가 훕, 호흡을 멈추며 눈을 치떴다.

방금 무슨 인기척이 들렸는데……뭐지? 잘못 들었나?

은돈은 미심쩍은 표정으로 다시 한발을 내딛었고, 그때 등 뒤에서 자신을 덮치려는 누군가의 기척이 분명하게 느껴졌다!

“으, 으아악……!”

요란한 비명과 함께 은돈이 본능적으로 구석에 놓인 소화기를 집어 들었다.

그리곤 눈앞에 보이는 기다란 그림자를 향해 미친 듯 휘두르기 시작했다.

그랬다. 그녀는 소화기를 분사하는 대신, 몸체로 도둑놈의 머리통을 후려치려 하고 있었다.

참으로 스케일부터가 남다른 대응 방식.

“죽어 이 도둑놈아! 죽어! 죽어!”

“차은돈……! 그거 내려놔! 정신 차려!”

“죽어어어엉!”

은돈이 질끈 눈을 감은 채 자신을 제지하는 검은 그림자에게 달려들었다.

그와 동시에 중심을 잃은 그림자남이 바닥에 쓰러졌고, 자연히 그 위로 은돈이 엎어지며 두 사람이 묘한 자세로 뒤엉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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