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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남자 밥해주기-18화 (18/93)

18화. 지독현의 감정 변화

“뭐에요……?”

죽 그릇을 든 은돈이 제 팔목을 붙잡은 독현을 내려다보았다.

“……차은돈. 너 왜 이렇게 미련해.”

“네?”

살짝 잠긴 그의 음성에 은돈이 눈썹을 찡긋하며 되물었다.

뒤이어 독현의 입술이 날렵히 벌어졌다.

“이 시간까지 대체 내 집에서 뭘 한 거야. 누가 옆에 있어 달랬어?”

“그냥 내가 있고 싶어서 그랬어요.”

은돈이 단호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어울리지 않게 앓아누운 독현과 이 야밤에 쓸데없는 시시비비를 가리고 싶지 않았다.

“조금만 기다리세요. 금방 죽 데워 올게요.”

“…….”

“그리구 걱정 마요. 가지 말래도 이제 갈 테…….”

“어차피 이렇게 된 거.”

일순 은돈의 말을 가로챈 독현이 나직한 목소리로 운을 뗐다.

“어차피 이렇게 된 거…… 계속 미련하게 굴어.”

“네?”

“옆에 있으라고. 내 옆에.”

아픈 와중에도 명령조로 말을 잇는 독현을 보며 은돈이 얼굴을 찌푸렸다.

“‘있어줘’라고 해봐요.”

“뭐?”

“‘옆에 있어’가 아니라 ‘있어줘’라고 해보세요. 그럼 같이 있어드릴게요.”

은돈은 독현이 절대 자신에게 굽힐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괜한 오기로 말을 이었다.

이제 곧 있으면 저 인간의 입을 뚫고 비수를 꽂는 냉정한 한마디가 튀어나올 것이다.

분명 나한테 엄한 소리로 쿠사리를 먹일 게 뻔하지.

은돈은 확신에 찬 미소를 띠며 독현을 응시했다. 그런데 그때, 예상치 못한 한마디가 그의 살짝 부르튼 입술 새로 흘러나왔다.

“그럼…… 같이 있어줘. 이 집에.”

“……네?”

“어차피 막차도 끊겼잖아. 자고 가. 아니, 자고 가 줘. 됐어?”

“여기서요?!”

은돈의 목소리가 꽥 높아졌다. 독현은 그녀의 발그레해진 뺨을 보며 말했다.

“제발 이상한 상상 좀 하지 마.”

“내, 내가 뭘 또…….”

“…….”

제 발 저린 은돈의 모습을 바라보던 독현이 피식, 저도 모르게 미소를 머금었다.

은돈은 처음 보는 그의 청량감 넘치는 미소에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사장님. 그렇게 웃을 줄도 알아요?”

“뭐?”

“……아뇨. 그렇게 악의 없이 웃는 거 처음 봐서요. 늘 내 앞에선 눈을 요래 뜨고 있었잖아요. 대부업체에 돈 떼인 사람마냥.”

은돈이 양 손으로 제 눈꼬리를 찍 치켜 올리며 말했다.

침대 프레임에 등을 기대고 앉은 독현은 그런 은돈을 주시한 채 입을 열었다.

“너도 다르게 웃던데.”

“네?”

독현이 지그시 입을 다물었다. 그의 머릿속으로 낮에 봤던 은돈과 지세의 모습이 스쳐지나갔다. 꽤나 반반했던 신입 남직원과 함께 즐거운 듯 웃음을 터뜨리던 은돈의 모습.

자신의 앞에서 보여주던 조소, 냉소, 실소와는 분명 달랐었다.

“차은돈. 웃어봐.”

“네? 왜요?”

“잠깐 웃어봐.”

“? 이렇게요?”

순간 입꼬리 한쪽을 어설프게 말아 올린 은돈이 되물었다.

“그게 웃는 거야? ……화난 게 아니고?”

“뭐, 뭔 말을 그렇게 해요? 누가 봐도 상큼하게 웃고 있는,”

“됐어. 너 앞으로 웃지 마.”

“!?”

“나 너 웃는 거 맘에 안 들어.”

엄한 고집을 부리는 독현을 보며 은돈이 황당한 듯 입을 벌렸다.

이 인간 대체 왜 이래?

“언젠 옆에 있어달라더니 이젠 웃지 말라고 시비네. 사장님 재밌어요? 나랑 맨날 이렇게 입씨름하는 거?”

“재미없진 않은데?”

“아우. 말을 말아야지, 내가. 걍 잠이나 자요!”

은돈이 여자치곤 매.우 강한 힘으로 독현의 양 어깨를 내리 누르며 말했다.

“누워있어요. 죽 다시 가져 올게요.”

쾅……!

머잖아 방문 닫히는 소리와 함께 은돈이 모습을 감췄다.

침대 위에 몸을 뉘인 독현은 이유모를 편안함, 그리고 안도감을 느끼며 다시 눈을 감았다.

***

……자정을 훨씬 넘긴 시각.

독현이 다시 눈을 떴을 때 보이는 건, 제 침대 맡에 엎드려 잠 든 은돈의 모습이었다.

스윽- 상체를 일으킨 그가 상아색의 스탠드 조명에 비춰 보이는 은돈의 얼굴을 응시했다.

“…….”

차은돈이 내내 곁에 있었기 때문일까. 아까와 달리 악몽도 꾸지 않았다.

그는 침대 협탁 위에 놓인 물 잔과 은돈이 사온 것으로 보이는 약봉지를 응시했다.

남이 챙겨주는 약을 먹어 보는 게 얼마 만이지……?

독현이 가만히 손을 뻗어 약봉지를 집어 들었다. 그리곤 은돈을 향해 짙은 동공을 끌어내렸다.

“차은돈…… 매년 반복되는 오늘이…… 나한테는 가장 견디기 힘든 날이야. 내가 미치도록 사랑을 갈구했던, 그리고 증오했던 여자의 기일이거든.”

마치 뭔가에 홀린 듯, 독현이 저도 모르게 의미심장한 한마딜 끄집어냈다.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가 자의로 친모에 대해 언급한 건.

“…….”

“…….”

정적 속에, 한동안 은돈의 새근거리는 숨소리만이 들려왔다.

딱히 뭔가를 기대한 건 아니었다. 그냥 차은돈에게 말하고 싶었다. 아니 말해주고 싶었다.

누구에게도 드러내지 않았던 자신의 치부에 대해.

독현은 물끄러미 눈앞의 은돈을 내려다보았다. 그때, 잠든 그녀의 입에서 정체모를 한마디가 불쑥 튕겨 나왔다.

“아냐. 난 아냐……. 난 김밥 햄이 아냐…….”

“……?”

기괴한 그녀의 잠꼬대에, 독현이 비스듬히 고개를 젖혔다. 이윽고 그는 은돈과 자신의 첫 만남을 떠올렸다.

‘어디다 손을 대. 김밥 햄 같은 게.’

‘지금 당신…… 나한테 김밥 햄이라고 했어?’

‘니들은 뭐가 그렇게 잘났길래 사람을 햄에 비유하며 개 무시 하는데!?’

‘도대체 허구 많은 햄 중에 왜 하필 김밥 햄인 거냐고!’

……그래. 그때 내가 널 그렇게 불렀었지.

잠든 은돈의 얼굴을 바라보던 독현의 입가에 가벼운 미소가 걸렸다.

“……넌 김밥 햄이 아냐.”

고열로 인해 정상적인 판단을 할 수 없게 된 탓일까.

살짝 나른한 눈빛의 독현이 손을 뻗어 은돈의 흐트러진 머리칼을 귀 뒤로 넘겨주었다.

그는 시간이 갈수록 자신이 은돈에게 관대해지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잘 자, 차은돈.”

그가 의외의 조심스런 손길로 은돈의 어깨 위에 블랭킷을 덮어주었다.

***

“자기들. 오늘 차은돈 씨랑 사장님이랑 같이 출근한 거 알아?”

“헐 진짜?”

“더 특종은 차은돈 씨, 어제랑 옷이 똑같더라구. 말인즉! 집에 안 들어갔다는 건데 과연 밤새도록 누구랑 같이…….”

“거기! 잡담할 시간 있으면 가서 오픈 조나 좀 도와요!”

다원정 별관.

불쑥 나타난 총지배인의 서슬에 여직원 몇이 후다닥 제자리로 돌아갔다.

지배인은 그들을 매서운 눈길로 째려보며 안경을 곧추세웠다.

“아침부터 정신 산란한 루머나 양산하고 말이야. 안 그래요, 이지세 씨?”

“……이거 어디다 두죠?”

사라진 여직원들에게서 시선을 거둔 지세가 총지배인을 향해 화병을 가리켰다.

“아 그거 저쪽에 둬요. 미안해요. 내가 할 일을 자꾸 부탁하게 되네?”

“아뇨, 괜찮습니다.”

말을 마친 지세가 화병을 테이블 뒤로 옮긴 뒤 본관을 향해 돌아섰다.

총지배인은 살짝 굳은 그의 낯을 의아한 듯 바라보았고, 잠시 후…… 본관과 별관을 잇는 대리석 복도. 생각에 잠긴 채 복도로 들어선 지세가 우뚝, 걸음을 멈춰 세웠다.

‘자기들. 오늘 차은돈 씨랑 사장님이랑 같이 출근한 거 알아?’

“…….”

여직원의 말을 회상하며 그는 살며시 아랫입술을 깨물었고, 그때-

“좋은 아침!”

누군가 그의 어깨를 덥석 짚으며 인사를 건네 왔다.

“……누나.”

돌아선 지세가 제 앞에 선 은돈을 빤히 응시했다.

“응……? 왜 그렇게 사람을 뚫어져라 봐? 나한테 뭐 할 말 있어?”

그녀의 물음에, 침묵하던 지세가 혼란스러운 듯 시선을 떨궜다.

독현과 정확히 무슨 사이냐고 묻는다면, 은돈이 자신을 이상하게 생각할까.

그는 두 사람의 관계를 의식하고 의심하는 스스로를 주제넘다고 생각하며 다시 고개를 들었다.

“손에 그건 뭐에요?”

“아 이거, 내 레시피 북인데…….”

앙증맞은 캐릭터가 그려진 레시피 북을 들어 보이며 은돈이 말했다.

“아직 사장님 음식 취향을 잘 모르겠어서, 점심은 여기 있는 레시피 중에 골라볼까 하고.”

“새송이 버섯 케일 볶음, 이거 괜찮은 거 같은데요.”

지세가 기다란 손가락으로 레시피 하나를 콕 집자 은돈이 방긋 웃어보였다.

“그치. 나도 이거 괜찮을 거 같아. 그럼 이거랑, 애호박 초나물이랑, 블랙 올리브 순두부…….”

레시피 북에 코를 파묻다시피 한 은돈이 혼잣말을 중얼대며 앞서 걷기 시작했다.

지세는 한발 뒤에서 그녀를 바라보다 걸음을 옮겼고, 그때였다.

책에 정신이 팔린 은돈이 창가에 머리를 박을 기세로 돌진하고 있었다.

“누나, 앞에!”

지세는 반사적으로 손을 뻗어 은돈을 제 쪽으로 끌어당겼고, 이에 가까스로 위기를 모면한 그녀가 멍한 얼굴을 치켜들었다.

“어……? 고마워.”

“조심해야죠. 다칠 뻔 했어요.”

“응.”

응, 하는 짧은 대답과 함께 은돈이 다시 책 속으로 고개를 파묻었다.

지세는 그런 은돈을 위해 재빨리 본관 입구의 문을 열어주었고, 행여 천장 장식물에 머리를 부딪칠세라 그녀의 정수리 위로 매너손을 해주었다.

***

프레지던트 룸.

미간을 좁힌 채 업무에 열중하던 독현이 벽에 걸린 시계를 힐끗 응시했다.

현재 시각 AM 10:50. 직원들이 교대로 이른 점심을 먹는 시간.

독현은 끼니도 거른 채 자신의 식사 준비에 여념이 없을 은돈을 떠올렸다.

설마 지금까지 주방에 틀어박혀 있는 건 아니겠지.

독현은 그녀가 상당히 신경 쓰이는 듯 엄지로 관자놀이를 지그시 눌렀고, 그때였다.

노크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며 지세가 나타났다. 독현은 고개를 치켜든 채 그를 응시했다.

“부주방장님께서 주방 인덕션 매립 문제로 잠깐 보자시는데요.”

“그런 건 본인이 직접 오라고 해.”

“……네.”

짧은 대답을 뱉으며 지세가 다시 문고리를 잡았다.

그런데 그때, 등 뒤에서 메마른 한마디가 들려왔다.

“일은. 할 만한가?”

“……좋은 조건으로 고용해주신 덕분에요.”

지세의 말에 독현이 양 손 깍지를 끼며 말했다.

“난 널 고용한 기억이 없는데. 아마도 부주가 멋대로 사람을 뽑은 모양이군.”

“어쨌거나 제 월급은 사장님한테서 나오는 거니까요. 잘 부탁드립니다.”

부드러운 어조였지만, 분명 지세의 태도엔 어딘가 묘하게 날이 서 있었다.

독현은 살짝 눈썹을 찌푸리며 그를 응시했다.

“이만 나가보겠습니다.”

지세는 자신의 오너를 향해 가볍게 목례를 해보였고, 그와 동시에 날카로운 한마디가 그의 발끝을 붙들었다.

“차은돈은 아직 주방에 있나.”

“……아마 그럴 겁니다.”

“직원들 점심시간은 언제까지지?”

다소 생뚱맞은 독현의 질문. 지세가 시선을 끌어 올렸다.

“차은돈 씨 때문에 물어보시는 겁니까?”

“뭐?”

“만약 그런 거라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혹시라도 점심 거르지 않도록, 제가 옆에서 잘 챙길 테니까요.”

제법 남자답게 응수하는 지세를, 독현이 서늘한 낯으로 직시했다.

지세는 이에 아랑곳 않고 더욱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점심시간은 11시 20분까집니다. 그전에 차은돈 씨랑 같이. 식사 마치겠습니다.”

같이?

일순 독현이 뭔가를 말하려다 짐짓 입을 다물었고, 그렇게 두 남자 사이에 미묘한 침묵이 흘렀다.

“그만 나가 봐.”

한참 만에 독현이 다시 말문을 열었다.

“그럼.”

살짝 고개를 꾸벅인 지세가 문을 열고 방을 빠져나갔다. 남겨진 독현은 의자 등받이에 허리를 기댄 채 한손으로 구겨진 미간을 문질렀다.

지세가 다녀간 순간부터 시작 된 이 찝찝한 두통은 뭘까.

고작 신입 직원 따위와 벌인 쓸데없는 기싸움에 그는 자조적인 미소를 머금었고, 곧 창가로 싸늘한 시선을 비틀었다.

***

“사장님. 왜 이렇게 안 드세요? 짜요? 싱거워요? 달아요?”

다원정 야외테라스.

살랑살랑 불어오는 바람에 은돈이 머리를 쓸어 넘기며 물었다.

맞은편에 앉아있던 독현은 그제야 퍼뜩 정신을 차리며 은돈을 응시했다.

“?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세요?”

“……별 거 아냐. “

어쩐지 그녀의 얼굴을 빤히 보며 독현이 대답했다.

“그럼 빨랑 드세요. 차린 사람 성의를 봐서라도.”

“그러지.”

시니컬한 대답과 함께 독현이 젓가락을 집어 들었다. 그와 동시에 만화의 한 장면처럼 은돈의 뱃가죽에서 꼬로록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효과음은 때마다 어김없이 등장하는군. 혹시 나한테 시위하는 거야?”

“시위라니. 이, 이게 뭐 내 맘대로 낼 수 있는 소린 줄 알아요?”

은돈이 붉어진 얼굴로 데시벨을 높였다.

“이게 다 사장님 때문이에요. 식사 시간 내내 옆에서 지켜만 보라니, 고문도 이런 고문이 어디 있어요? 덕분에 직원들이랑 밥 먹을 시간도 엇갈려서 매일 나 홀로 쫄쫄 굶게 생겼,”

“있잖아 너.”

“뭐가요?”

“같이 밥 먹을 사람.”

“허?”

독현의 말에 은돈이 힐끔 손목시계를 내려다 봤다.

점심시간이 끝나기까지 약 십여 분 남짓 남은 시간.

“누가 이 시간까지 기다렸다가 나랑 같이 밥 먹어주는데요? 택도 없는 소리 마세요.”

“……맞아. 택도 없는 소리지.”

왼손으로 턱을 괸 채 은돈을 빤히 지켜보던 독현이 삐딱하게 말했다.

“갑자기 생각난 건데 말야.”

“?”

“조항을 바꿔야겠어.”

“무슨 조항이요?”

“계약서 1조 8항. 을은 갑과 동식(*함께 식사함)하지 않는다.”

“……그걸 바꾸겠다구요? 어떻게요?”

고개를 갸웃하는 은돈을 향해 독현이 일순 거침없는 한마디를 내뱉었다.

“을은, 아니, 차은돈은. 이 시간부로 반드시 갑과 함께 식사한다.”

엥……? 예상치 못한 그의 말에 은돈이 입을 허 벌렸다.

“제가 사장님이랑 같이 밥을요……? 왜, 왜요?”

당황해서 물어오는 그녀를 보며 독현이 건조한 시선을 빛냈다.

“같이 밥 먹는데 굳이 이유가 필요해?”

“아뇨, 뭐……알겠어요. 같이 먹어요. 근데 좀 의외긴 하네요.”

은돈은 뒤통수를 긁적이며 말을 이었고, 독현은 그런 그녀에게서 시선을 거둔 채 물 잔을 집어 들었다.

‘점심시간은 11시 20분까집니다. 그전에 차은돈 씨랑 같이. 식사 마치겠습니다.’

지금 순간- 그의 귓가엔 지세의 한마디가 아른대고 있었다.

독현은 꽤나 거슬렸던 그 한마디를 지우려는 듯 가볍게 고개를 젖히며 고고한 표정을 유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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