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남자 밥해주기-17화 (17/93)

17화. 아픈 남자를 유혹하는 아주 쉬운 방법.

“차은돈 씨 어제 왜 내 메시지 씹었어요? 지금 장난해요?”

다음날, 이른 아침부터 다원정 스텝 휴게실에서 총지배인의 날 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그랬죠! 서울 도착하는 대로 곧장 다시 출근하라고. 근데 문잘 씹어요?”

은돈은 제 눈앞에서 따따부따 말을 잇는 지배인을 향해 고개를 수그렸다.

“그게…… 어제 부득이한 사정으로 밧데리가 꺼져 있어서요. 메시지를 확인했을 땐 이미 가게 마감 시간이라…… 죄송합니다.”

“죄송이고 뭐고! 사정이 있었음 나한테 미리 연락 했어야죠!?”

“연락 드렸는데 안 받으시길래, 대신 문자 남겼는데요…….”

“내가 못 봤으면 안 남긴 거나 마찬가지에요!”

이게 대체 무슨 개떡 같은 논리인가.

얼굴을 휙 치켜든 은돈이 지배인을 향해 따지려다 다시 입을 다물었다.

됐다. 아침부터 괜한 분란 일으켜 뭐하랴.

“죄송해요 지배인 님.”

그녀의 사과에, 지배인이 새침한 얼굴로 쾅! 문을 닫고 휴게실을 빠져나갔다.

정적 속에 남겨진 은돈은 그제야 후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지금 그녀가 신경 쓰고 있는 건 총지배인의 텃세가 아니라 독현의 ‘부재’였다.

어제 저녁, 서울에 도착하자마자 자신을 정류장에 내려 준 것을 끝으로, 독현에게선 전혀 연락이 오지 않고 있었다.

‘갑자기 연락은 깜깜 무소식에, 찾아가도 문조차 안 열어주고…… 무슨 일 있나?’

오늘 아침, 그의 현관 문고리에 걸어 두고 온 도시락을 떠올리며 은돈이 고개를 갸웃했다.

“뭐, 이따 지독현이 출근하면 어떻게 된 일인지 알 수 있겠지.”

그러나, 은돈의 예상과 달리 그날 오전 10시 40분경.

여전히 독현은 레스토랑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덕분에 처음으로 동료들과 함께 이른 점심을 먹게 된 은돈이 조심스레 직원 식당에 몸을 앉혔다.

“어머. 여기 자리 있는데.”

식판을 든 은돈을 향해 맞은편의 총지배인이 새초롬한 한마디를 던졌다.

“어? 또 누구 와요?”

그때 옆자리의 눈치 없는 여직원 하나가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고 지배인은 재빨리 그녀의 옆구리를 콕 찔렀다.

그래 알만하구먼. 대놓고 날 소외 시키겠다? 좋아. 좋다구.

“그럼 맛있게들 드세요.”

되려 여유로운 표정으로 말을 이은 은돈이 그녀들에게 등을 돌려 다른 자리에 털썩 몸을 앉혔다.

“애들도 아니고 말이야. 참”

그녀는 쯔쯧 혀를 차며 숟가락을 집어 들었고, 그때 누군가 그녀의눈 앞에 탁- 식판을 내려놓았다.

“어……?”

“맛있게 먹어요, 누나.”

은돈은 제 앞에 물 잔을 놓아주곤 맞은편에 몸을 앉히는 지세를 멀거니 응시했다.

“아, 맛있게 먹어 너도.”

곧 정신을 차린 그녀의 입에서 나온 한마디에 지세가 생긋 웃어보였다.

“아참. 누나 번호 좀 알려줘요.”

갑자기 지세가 은돈을 향해 자신의 핸드폰을 내밀었다.

순간 은돈은 이쪽을 향해있는 뭇 여직원들의 질투어린 시선을 느꼈다.

“지, 지금 알려 달라구?”

“……안돼요?”

“아니. 그게 아니고.”

은돈이 말끝을 흐리며 멋쩍은 얼굴로 핸드폰을 받아들었다.

그리곤 자신의 번호를 찍어 다시 그에게 건넸다.

“근데 번혼 왜 갑자기……?”

그녀의 물음에 살짝 고개를 수그린 지세가 곧 다시 얼굴을 치켜들며 말했다.

“어제처럼 연락 안 될 때…… 번호라도 알면 괜히 걱정 안 해도 되잖아요.”

“응? 내 걱정을 굳이 왜……?”

눈치라곤 먹고 죽을래도 없는 은돈의 입에서 튀어나온 물음에, 지세가 다정한 미소로 대답했다.

“그냥. 우리 동료잖아요, 같은 날 들어온…….”

“역시! 챙겨주는 건 동료밖에 없구나.”

“……네. 저도 누나 밖에 없어요.”

묘한 한마디를 뱉은 지세의 눈가가 반달모양으로 접혔다.

지금 그의 눈엔 은돈의 얼굴에 달라붙은 밥풀떼기조차 예뻐 보일 지경이었다.

***

같은 시각.

고급 레스토랑 홀에 앉은 독현이 다리를 꼰 채 거만한 시선을 빛내고 있었다.

맞은편에 앉은 소라는 제 앞에 놓인 스테이크를 썰다 말고 한숨을 쉬며 독현을 응시했다.

“다리 좀 풀지 그래? 우리만 있는 것도 아니잖아.”

“내가 이 상황에, 굳이 그 말까지 들어줘야 돼?”

“지독현. 예의 갖춰. 여기 니가 함부로 굴어도 될 만큼 편한 자리 아니야. 잘 알잖아?”

“그래. 니 말대로 편한 자리가 아니라, 지금 온몸으로 거북함의 의사를 표현하고 있잖아?”

“크흠-!”

순간 소라의 옆에 몸을 앉힌 그녀의 친부 문 회장이 노골적으로 언짢은 기색을 내비쳤다.

그와 동시에 독현의 친조부 지명준 회장 역시 인상을 구겼다.

“계속 그렇게 뻣댈 생각이냐? 못된 녀석, 이 자리가 어떤 자린데…….”

독현이 혀를 차는 자신의 친조부를 서늘한 눈빛으로 응시했다.

이 자리가 어떤 자리냐고?

보다시피 문소라와 내 혼담이 오가는 아주 엿 같은 자리지.

독현은 지 회장의 온갖 회유와 유치한 협박에 못 이겨 이 자리에 몸을 앉힌 것을 심히 후회하고 있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밥맛없잖아 당신들.

그는 형식적인 사업 얘기를 늘어놓으며 서로의 간을 보는 지회장과 문회장을 보며 냉랭한 조소를 머금었다.

“하하. 소라가 우리 집안사람이 되면, 적막하기만 한 저택 공기부터 달라지겠군. 아들 내외 먼저 보내고 내게 남은 핏줄이라곤 독현이 저 녀석뿐인데……. 그래서 그런지 요즘 들어 증손주 욕심이 나는군.”

“증손주요? 저도 낳아드리고야 싶죠.”

소라가 지 회장의 농담을 여유 있게 받아치며 말을 이었다.

“근데 지독현이 절 소 닭 보듯 해서 말이죠. 여자가 이 정도로 들이댔음 예의상 좀 받아줘야 되는 거 아닌가요?”

그녀의 애교 섞인 푸념에, 잠자코 있던 독현의 입술이 벌어졌다.

“난, 예의상 너랑 결혼까지 가고 싶진 않거든.”

“너 아내 될 사람한테 그게 무슨 말버릇이야?”

지 회장의 핀잔에 소라가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놔두세요. 요즘 저 말고 다른 여자가 생겨서 그래요.”

다른 여자?

독현이 무슨 소리냐는 듯 고개를 치켜들자, 소라가 그를 마주보며 또박또박 운을 뗐다.

“일전에 독현 씨가 집에 여자를 데려다 재웠더라구요? 뭐, 자기 밥해줄 사람이라나 뭐라나. 한눈에 보기에도 수준 미달인 여자라, 일단은 신경 끄려구요.”

앞에 놓인 와인잔을 집어든 소라가 이죽대며 말했다.

독현은 자신을 자극 하려는 그녀의 의중을 읽은 듯 날카로운 미소를 지어보였다.

“왜 난 널 보면…… 자꾸 상처를 주고 싶어지지?”

“……?”

의아한 표정을 짓는 소라를 향해 그가 잔인한 언사로 다음 말을 이어갔다.

“딱히 차은돈을 두둔할 생각은 없지만 이건 알아둬. 지금 니가 수준미달이라며 깎아내린 그 여자, 여러모로 너보다 나은 여자야.”

“뭐?”

“적어도 차은돈은 나와의 결혼을 인생의 목표로 두진 않거든. 게다가 오히려 그쪽에서 날 소 닭 보듯 하지. 그 점이…… 의외로 좀 신선하게 느껴지기 시작했어. 그러니까 그 여자에 대해서 함부로 말하지 마.”

“지독현…….”

“차은돈을 우습게 보는 건, 그 여잘 고용한 날 우습게 보는 거나 마찬가지야.”

말을 마친 독현이 망설임 없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순간 그는 미세한 어지럼증을 느끼며 살짝 몸을 비틀댔지만 수치심에 젖은 소라는 독현의 몸 상태를 전혀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애초에 나만 빠지면 되는 자리 같은데. 먼저 가보겠습니다.”

금세 얼음장 같은 표정을 되찾은 독현이 문 회장을 향해 말했다.

“흠! 오늘 이 자린 없던 걸로 합시다. 후일을 다시 기약하죠.”

“…….”

노골적으로 불쾌한 기색을 드러낸 문 회장을 차갑게 내려다보던 독현이 곧 몸을 비틀어 출구를 향해 멀어졌다.

“그래요, 아빠. 그리고 회장님. 우리 후일을 기약하자구요.”

테이블에 남겨진 소라는 곤혹스러워하는 문 회장과 지 회장을 향해 태연자약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하지만 그녀가 손에 쥔 와인잔은 아까부터 걷잡을 수 없는 분노로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

레스토랑 입구.

발렛 요원이 건넨 차 키를 받아든 독현이 곧 페라리에 올라탔다.

그와 동시에 그의 핸드폰이 요란하게 울려댔다.

독현은 액정에 뜬 지 회장의 이름을 날이 선 시선으로 내려다보며 통화버튼을 눌렀다.

“네.”

-너! 지금 거기 어디냐!

“어딘 줄 알면, 따귀라도 한대 올려붙이러 오시게요.”

독현의 냉담한 반응에 핸드폰 너머로 쩌렁쩌렁한 지 회장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까 그 자리가 어떤 자린 줄 몰라!? 꼭 오늘 같은 날 그따위로 행동해야겠어!

“…….”

말없이 핸드폰을 귓가에 댄 독현이 이내 의미심장한 한마디를 내뱉었다.

“그건 내가 묻고 싶은 말입니다. 하필이면 오늘 같은 날…… 굳이 그런 자리를 만들어야 했습니까?”

-뭐야?

영문을 몰라 하는 지 회장의 물음에, 독현이 가차 없이 통화종료버튼을 눌렀다.

뒤이어 핸드폰을 보조석에 던진 그가 한손으로 자신의 뜨거운 이마를 짚었다.

불덩이처럼 열이 나고 온몸이 나른한 게, 이건 틀림없는 몸살 기운.

아무래도 어제 은돈과 함께 비를 맞은 게 화근이 된 듯싶었다.

그는 룸미러에 비친 자신의 안색을 살피며 살짝 미간을 좁혔다.

누구에게도 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자신의 주변엔 이익관계로 얽힌 사람들뿐이니까.

그들에게 약점을 내보여서 득될 게 없으니까.

이윽고 독현이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며 다원정으로 차를 몰기 시작했다.

***

“그럼 지금 친구네 집에서 신세지고 있는 거야?”

“네 당분간요. 사정이 좀 있어서.”

“야! 나두야 나두!”

“네?”

“나두 미자네 집에서, 아니, 친구네서 신세지고 있다구! 우리 왜 이렇게 비슷한 데가 많니?”

다원정 후문.

짬을 버리러 나온 은돈과 지세가 야외 쓰레기 처리장 앞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래도 넌 아직 어리니까 금방 자리 잡을 수 있을 거야. 힘내 이지세! 가난은 죄가 아니잖아?”

“…… 네.”

지세가 살짝 당혹스런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와 가난은 거리가 먼 단어였지만, 굳이 은돈의 앞에서 돈 많은 집 도련님 행세를 하고 싶진 않았다.

그건 그의 담백한 성격 때문이기도 했지만, 사실 자신을 ‘빈곤동지’ 쯤으로 생각하는 은돈과 가까워진 이 느낌이 싫지 않아서이기도 했다.

“아. 그거 이리 줘요. 누나 손 더러워져요."

지세가 음식물 쓰레기통을 들어 올리는 은돈을 제지하며 말했다.

“야, 내가 해도 돼.”

“이런 거 안 해도 되요, 여잔.”

여자? 풋.

은돈은 제법 남자다운 지세를 보며 저도 모르게 미소를 머금었고, 그때였다.

후문 야외 주차장으로 페라리가 들어섰다.

“……?”

운전석의 독현은 저 멀리, 차창 밖의 은돈과 지세를 보며 의아한 듯 눈썹을 치켜 올렸다.

뭐지. 차은돈이 웃고 있다.

그것도 웬 피라미 녀석과 함께.

“…….”

독현은 스스로도 이해 못할 묘한 기분에 휩싸였다.

그의 눈앞에 선 차은돈은 평소의 차은돈과는 달랐다.

자신에겐 한 번도 보여준 적 없는 환한 미소로 꺄르르 웃기도 하고 지세의 팔을 붙잡은 채 열심히 조잘조잘 수다를 떨기도 했다.

독현은 그녀의 낯선 모습에 왠지 모를 거부감을 느꼈다.

“……좋아 보이네. 차은돈.”

머잖아 그의 입에서 냉랭한 한마디가 튕겨 나왔다.

그와 동시에 다시 주차장을 벗어난 페라리가 거친 속도로 도로를 내달리기 시작했다.

***

그날 저녁.

쾅쾅쾅-! 쾅쾅!

부서져라 현관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소파에 쓰러져있던 독현이 얼핏 눈을 떴다.

“사장님! 안에 있는 거 다 알아요! 내가 주차장까지 내려가서 사장님 차 주차 된 거 확인 했거든요? 그니까 문 좀 열어봐요! 저녁 드시라구요!”

“…….”

이 괄괄한 목소린 분명 차은돈이다.

독현은 센치한 시선으로 현관을 바라보다 스윽 몸을 일으켰다.

자신이 집에 있는 것을 안 이상, 저 쾅쾅대는 소음은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그는 곧 걸음을 옮겨 현관으로 나섰고, 잠시 후 벌컥!

문이 열림과 동시에 도시락 통을 껴안은 은돈의 모습이 나타났다.

“아니 왜 이렇게 연락이 안돼요?! 걱정 했잖아요!”

불쑥 안으로 들어서며, 은돈이 다짜고짜 언성을 높였다.

“걱정? 니가 내 걱정을 왜 해.”

“왜긴요!”

독현의 냉랭한 태도에 은돈이 말을 잇다 말고 순간 입을 다물었다.

그러게. 내가 이 인간 걱정을 왜 했을까.

“뭐, 사장님이 맘 변해서 나 자른 줄 알고 걱정 했다구요.”

대충 둘러댄 은돈이 재빨리 손에 든 도시락 통을 들어보였다.

“배고프죠? 얼른 차려드릴게요. 오늘은 특별히 사장님이 좋아하는 김 계란말이, 아니, 김말이! 잔뜩 만들어 왔어요.”

은돈의 말에 독현이 살짝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얼굴엔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됐으니까…… 거기 놓고 가.”

“네? 아니에요. 드시는 거 보고 가야죠.”

“그냥 가라고.”

“……?”

은돈은 평소보다 더 차가운 어조로 말을 잇는 독현을 의아한 듯 응시했다.

오늘은 또 무슨 변덕이 일어서 이렇게 빼딱하게 군데?

“사장님.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요…… 어디 아파요?”

“……뭐?”

“아니, 실은 아까부터 안색이 안 좋아보여서.”

한 발, 독현에게 다가선 은돈이 까치발을 든 채 거침없이 그의 이마를 짚었다.

이에 독현은 당황한 듯 살짝 일렁이는 눈빛으로 그녀를 내려다 봤다.

“뭐하는 짓이야? 손 안 치워?”

“봐요. 열나네. 완전 펄펄 끓는데요?”

“아니니까, 손 치워.”

“아닌 게 아닌데요. 평소였다면 당장 내 손부터 뿌리쳤을 텐데, 지금은 그러지도 못하잖아요.”

“…….”

독현은 말문이 막힌 듯 잠자코 눈앞의 은돈을 노려보았다.

약한 모습 따위, 아픈 모습 따위 누구에게도 보이고 싶지 않았다. 보이기 싫었다.

왜냐면, 아프다고 말해도 위로해 줄 사람이 없으니까.

“차은돈.”

“네? 많이 아파요?”

“……괜찮아. 그러니까 내 집에서 나가.”

“…….”

은돈은 당장 쓰러질 것 같은 얼굴을 하고서도 자존심을 부리는 독현을 잠자코 응시했다.

“사장님. 일단 밥부터 먹어요. 아니다. 죽 끓여 드릴까요?”

“필요 없어. 그냥 가라잖아.”

“……자꾸 그렇게 고집 피우심, 저 진짜 가요?”

“제발 좀 가.”

제 이마를 짚은 은돈의 손을 아래로 끌어내리며 독현이 짤막하게 말을 이었다.

은돈은 어쩔 수 없다는 듯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알겠어요. 그럼 저 갈게요. 혹시 나중에 필요하면 불,”

“부를 일 없어.”

말을 마친 독현이 그대로 몸을 돌려 제 방으로 향했다.

이윽고 쾅! 세차게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려왔고, 남겨진 은돈은 황당한 시선으로 헛웃음을 지었다.

……그로부터 몇 시간 후.

식은땀으로 흠뻑 젖은 독현이 침대에 몸을 뉘인 채 악몽에 시달리고 있었다.

꿈속에서 그는 9살 어린 소년의 모습으로 2층 저택의 계단을 뛰어올라가고 있었다.

‘어……?’

드레스룸 앞에 멈춰 선 꼬마 독현이 고개를 갸웃했다.

이내 그는 풍겨오는 지독한 장미향에 홀린 듯 룸 안으로 들어섰고 잠시 후 화려한 명품 옷가지들 사이로 쓰러져 있는 향수병을 집어 들었다.

그런데 그때 그의 귓가로 자지러지는 여자의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아악-! 악! 당신 때문이야! 당신이 날 이렇게 망가뜨렸어!’

어린 독현은 재빨리 귀를 막고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때 그의 등 뒤로 훅- 하고 차가운 여자의 숨결이 느껴졌다.

‘독현아. 니 눈엔 내가 어때 보이니? 여전히 아름답니……?’

번쩍.

그 순간, 악몽의 말미에서 깨어난 독현이 눈을 치켜뜨며 정신을 차렸다.

또 그 꿈이다. 여지없이 매년 이 날만 되면 반복되는 악몽…….

무채색의 천장을 올려다보며 그가 한손으로 미간을 감싸 쥐었다.

왠지 엄습해오는 정적이 온몸을 짓누르는 것만 같았다.

그런데 그때,

“사장님. 정신이 좀 들어요?”

따뜻한 누군가의 손길이 이마 위를 감쌌다.

미간을 가린 손을 거둔 독현은 곧 자신을 내려다보는 은돈과 눈이 마주쳤다.

“……차은돈?”

“아, 저 진짜 가려고 했어요. 했는데…… 왠지 발길이 안 떨어지더라구요.”

“…….”

“사장님이 이해하세요. 저 원래 오지랖이 태평양만큼 넓거든요.”

“…….”

스윽- 말없이 상체를 일으킨 독현이 침대 프레임에 등을 기댔다.

이윽고 그는 제 옆에 놓인 죽 그릇을 바라봤다.

얼마나 오랜 시간이 지난건지, 죽은 이미 차갑게 굳어있었다.

“지금이 몇 시지……?”

“글쎄요. 한 열두 시쯤 됐으려나?”

막차를 놓친 사람치곤 꽤 태연하게 말을 잇는 은돈을 보며, 독현이 묘한 시선을 빛냈다.

“에이, 죽 다 식었네. 조금만 기다리세요. 금방 다시 만들어 올,”

순간, 몸을 일으키는 은돈의 팔목을 독현이 강한 힘으로 끌어당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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