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지독현은 어쩌면 좋은 남자.
“자 다들 잠깐만 조용히 해주세요! 지금부터 박 명장님의 마지막 인사 말씀이 있겠습니다!”
그즈음, 술에 취한 부주방장이 와인병에 숟가락을 꼽아 박 할매에게 건넸다.
할매는 온화하게 웃으며 부주가 내미는 와인병을 받아들었고, 곧 입을 열었다.
“마지막이랄 것까지야 없지만…… 왠지 감격스럽군요. 더 늙기 전에 고향에서 손주놈 재롱이나 보며 사는 게 꿈이었는데, 드디어 이룰 수 있게 돼서요. 물론 사장님께는 죄송하지만.”
할매의 말에, 직원들 모두가 재빨리 독현의 눈치를 살폈다.
그때 인간에서 개로 진화한 꽐라 부주가 비틀비틀 자신의 오너에게 다가서며 외쳤다.
“자! 우리 왕 싸가지 사장님! 사장님도 답사 한 말씀!”
“비켜.”
홱. 독현이 자신에게 딸기코를 들이댄 부주를 밀어내며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곤 박 할매에게 곧장 다가와 품안에 든 돈 봉투를 꺼내들었다.
“…….”
“…….”
모두가 침묵하는 가운데, 그가 할매를 향해 봉투를 척 내밀었다.
“받아. 답사 대신이야. 그동안 수고했다는 말은 않겠어. 이런 식으로 무책임하게 날 떠나는 거, 고소하려다 참은 거니까.”
……저, 저놈 미친 거 아냐?
은돈은 빳빳이 고개를 쳐든 독현을 황당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그건 다른 직원들도 마찬가지였다.
제 아무리 안하무인 지독현이라지만, ‘그동안 고마웠다’는 그 한마디가 어려워 돈 봉투를 들이밀 줄이야.
“……고마워요 사장님.”
박 할매는 독현의 행동을 미리 예상이라도 한 듯 잔잔한 미소를 띠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이 돈은 받을 수 없습니다. 뒀다가 직원들 회식비에 보태 쓰세요.”
“지금 내 호의를 거절,”
“얌마 지독현이! 들었지?! 회식비에 보태 쓰라잖냐! 그 돈 이리 내놤 마!”
뒷감당을 어찌하려는지, 고래고래 목청을 돋우는 부주방장 덕분에 독현이 얼굴을 구기며 입을 다물었다.
“자 차은돈 씨! 나랑 같이 열창합시다!”
급작스레 은돈과 어깨동무를 한 부주방장이 공일오비의 이젠 안녕을 부르짖기 시작했다.
“안녕은 영원한 헤어짐은 아니겠지요~다시 만나기 위한 약속일꺼야아아~네버 세굿빠! 박명장! 가지뫄아아!”
“아 부주방장님! 이거 놔요!”
졸지에 부주와 함께 머리 위로 손을 흔들던 은돈이 당황해서 소리쳤다.
그 사이 테라스를 맴도는 공기는 한층 더 싸늘해졌고, 직원들의 머릿속엔 어떻게든 빨리 이 파티를 마무리해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이, 이제 그만 정리 할까요!”
“그래요! 퇴근 합시다, 퇴근!”
그들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허둥지둥 파티의 흔적을 치우기 시작했고, 그로부터 삼십분 뒤.
유니폼을 벗어던진 직원들이 행여 독현에게 발목을 잡힐세라 후다닥 레스토랑을 빠져나갔다.
“누나. 퇴근 안 해요?”
“어? 아…… 어…….”
홀 한가운데 멍하니 서 있던 은돈이 불 켜진 프레지던트 룸을 바라보다 지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먼저 갈래? 난 사장님이랑 할 얘기가 있어서.”
말을 마친 은돈이 지세의 대답도 떨어지기 전에 몸을 돌려세웠다.
“…….”
남겨진 지세는 독현에게 향하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살며시 시선을 끌어내렸다.
***
프레지던트 룸.
똑똑, 노크와 함께 안으로 들어선 은돈이 의자에 기댄 채 한손으로 미간을 덮은 독현을 응시했다.
“사장님. 주무세요?”
“……나가.”
일순 귓전을 울리는 중저음에, 은돈이 망설이다 한발 앞으로 다가섰다.
“오늘 사장님은 평소랑 좀 다른 것 같아요. 다 박 명장님 때문이죠? 그분이 떠나는 게 맘에 걸려서,”
“나가라고 했잖아.”
미간을 덮었던 손을 거두며, 독현이 은돈을 빤히 노려봤다.
이에 은돈은 더욱 단호한 얼굴을 해보이며 말을 이었다.
“사장님. 속상하면 속상하다고 말하면 되잖아요. 박 명장님께 고맙다고, 그동안 미안했다고, 수고했다고. 솔직하게 얘기하면 되잖아요?”
“미안해? 내가? 상대방이 먼저 내 호의를 거절했는데, 왜 내 쪽에서 미안해야 하지?”
“호의요? 사장님이 내민 돈 봉투가요? 그건 호의가 아니라, 돈지랄 아닌가요?”
돈지랄.
은돈의 강도 높은 비난에 독현이 서늘한 눈빛을 빛내며 말했다.
“너 지금 뭐라고 했어.”
“제, 제가 뭐 틀린 말 했나요?”
꿀꺽 마른침을 삼킨 은돈이 후다닥 다음 말을 이었다.
“무튼 간! 저한테 좋은 생각이 있어요. 사장님이 정말로 박 명장님께 성의표시를 하고 싶다면, 내말대로 하는 게 좋을 거예요.”
“……?”
묘한 호기심이 이는 듯, 독현이 살짝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와 동시에 은돈의 입에서 굉장히 야릇한 한마디가 뱉어졌다.
“오늘 밤, 나한테 시간 좀 내줘요. 밤새 우리 둘이 할 일이 있어요.”
***
다원정 주방.
독현이 조리대 위의 음식 재료를 바라보다, 고개를 들어 제 옆의 은돈을 응시했다.
“다짜고짜 사람을 끌고 와선, 뭘 어쩌잔 거지?”
“어쩌긴요. 요리하자는 거죠.”
“나 지금 너랑 장난할 기분 아니야.”
차갑게 뱉어진 그의 말에, 은돈이 웃음기를 싹 뺀 얼굴로 운을 뗐다.
“사장님 그동안 늘 박 명장님이 차려주는 밥만 먹어왔잖아요. 그러니까, 이번엔 반대로 그분께 따뜻한 식사 한 끼 대접해 드리라구요. 그게 돈 봉투보다 백번 나으니까.”
“……정신 나갔군. 난 음식이라면 먹는 것조차 치가 떨리는 사람이야.”
“먹는 건 남들보다 쳐질지 몰라도, 요리엔 천부적인 재능이 있을지 누가 알아요?”
은돈은 밝게 웃으며 그를 향해 목소리를 높였고, 이에 독현은 의외로 수긍하는 듯 생각에 잠겼다.
그리곤 잠시 후. 드디어 그의 입에서 좋아. 하고 짤막한 수락이 떨어졌다.
“자 그럼 어떤 걸 만들까요? 아무래도 명장님 연세를 생각하면 보양식이 낫겠죠?”
“……김밥.”
“에?”
“김밥, 어떻게 싸는 거지?”
몹시 진지한 눈빛으로 물어오는 독현을 보며, 은돈은 순간 풋 터질뻔한 웃음을 간신히 참으며 말했다.
“김밥 그거 되게 손 많이 가는데. 당근 채 썰어 볶아야죠. 시금치 데쳐야죠. 계란 부치고, 우엉 졸이고, 밥은 기름 둘러 간 맞추고…… 하실 수 있어요?”
“내가 하고자 맘먹었을 때 해내지 못한 건 없,”
“됐어요. 잘난 척은 접어 두고 이거나 끼세요.”
은돈이 그의 말을 무 자르듯 뎅강 자르며 투명장갑을 내밀었다.
독현은 왠지 갑 행세를 하는듯한 은돈이 못내 거슬렸지만 이내 잠자코 투명장갑을 받아들었다.
“자, 그럼 시작해 볼까요?”
은돈이 자신감 넘치는 얼굴로 조리대 위의 재료들을 솎아내기 시작했다.
그 무렵, 그녀는 알지 못했던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남자인줄 알았던 지독현의 치명적인 아킬레스건이 바로 요리실력이란 사실을.
약 20분 후. 은돈은 독현을 돕고자 했던 자신의 오지랖을 뼈저리게 후회해야만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요리에 우스울 정도로 재능이 없는 독현은 아까부터 쉴 새 없이 그녀를 호출하고 있었다.
“차은돈. 이거 당근이 이상해. 자꾸 타잖아.”
“사장님이 불을 세게 해놔서 그렇잖아요.”
“차은돈. 계란이 상했어. 흰자에 이건 이물질인가?”
“아뇨, 이물질이 아니라 알끈이라고 하는 건데요. 단백질이라 먹어도 돼요.”
“차은돈 이거 왜이래. 터졌어.”
“헉! 그거 만지지 말고 가만 냅두세요!”
“흠. 차은돈. 이거,”
“아악. 제발 그만!”
드디어 인내심에 한계를 느낀 은돈이 꽥 언성을 높였다.
“사장님. 내 말 오해하지 말구 들어요. 가끔 보면, 짜파게티 물 하나 못 맞춰 냄비 째 싱크대에 처박는 인간들이 있거든요? 전 그런 인간들을 요리 쭈구리라고 불러요.”
“그래서?”
그래서 지금 내 눈앞에 바로 그 요리 쭈구리가 서 있다구요…….
은돈은 차마 속엣 말을 뱉지 못한 채 훅,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부터 재료 손질은 제가 할 테니까요. 사장님은 저어기~ 저쪽 가서 눈 좀 붙이고 오세요.”
“됐어. 쓸데없는 배려는 필요 없어.”
이런 씨. 당신이 아니라 날 배려한 거야.
차라리 옆에 없는 게 편하겠다고 이 요리 쭈구리야.
“에이, 그러지 말고 벌써 열두 시가 다 되가는데 눈 좀 붙이시죠.”
“……내가 직접 만들 거야.”
“…….”
“내 손으로 직접. 만들어 주고 싶어.”
순간 무심한 듯, 그러나 진심 어린 한마디를 뱉는 독현을 보며…… 은돈이 잠자코 운을 뗐다.
“좋아요. 그럼…… 할 수 없죠. 이 방법을 쓰는 수밖엔.”
저벅저벅 독현의 등 뒤로 다가선 은돈이 갑작스레 그의 양 허리를 껴안았다.
“무슨 짓이야?”
마치 백허그 하듯 자신을 껴안은 은돈을 돌아보며 독현이 당혹감 어린 표정으로 물었다.
그러나 은돈은 아랑곳 않고 그의 양팔을 자신의 손으로 붙잡으며 말했다.
“사랑과 영혼 안 봤어요? 거기 보면 남자가 여자 뒤에서 이렇게 그릇을 빚잖아요.”
“……그래서. 지금 이 자세로 나랑 같이 김밥을 말겠다는 건가?”
“어쩔 수 없죠. 사장님 혼자서 해내길 기다렸다간, 김밥이 쉰밥이 되고 말 것 같거든요.”
“차은돈 너…….”
“자 봐요! 이렇게 말 면 돼요. 김발에 김부터 올리고! 그다음 밥을 이만큼 퍼서 이렇게 고루고루 펼치면…….”
독현은 블라블라 떠들며 자신의 팔을 멋대로 조정하는 은돈을 어이없다는 듯 돌아봤다.
뭐지 이 여자……. 이렇게 진득한 스킨십을 자청해서 해놓고도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는다.
순간 독현의 눈앞으로 며칠 전 은돈의 모습이 스쳐지나갔다.
동문회 자리에서 자신이 키스할 듯 다가갔을 때, 얼굴을 붉히며 부끄러워하던 그녀의 모습이.
“…….”
그때와 지금, 너무도 달라진 은돈의 태도에 독현은 묘하게 자존심이 상했다.
하지만 티를 내고 싶진 않았다.
그는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척 은돈과 협동해 김밥을 말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쯤의 시간이 흘렀을까.
등 뒤에서 속사포 잔소리를 퍼붓던 은돈이 어느 순간 조용해져 있었다.
한참 김밥을 말던 독현은 의아한 듯 눈썹을 찌푸렸고, 그때였다.
툭- 하고 그의 등으로 은돈의 고개가 떨어졌다.
“차은돈. 설마 자는 거야?”
독현의 물음에, 등 뒤에선 아무런 대답도 들려오지 않았다.
신나게 떠들어 대더니 결국 잠들었군.
독현은 새벽 2시 40분을 넘어선 벽시계를 응시하다, 곧 고개를 비틀어 은돈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자신의 등에 머리를 기댄 채 너무도 편안히 쌕쌕대는 그녀.
일정하게 들려오는 그녀의 고른 숨소리에 독현은 뭔가를 말하려다, 곧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
“으음…….”
주방 한 켠. 의자에 몸을 뉘인 은돈이 블라인드 틈새로 스며드는 햇살에 인상을 찌푸렸다.
“아우…… 삭신이야…….”
부스스 눈을 뜬 그녀가 푹 꺼진 음성을 뱉으며 몸을 일으켰다.
그와 동시에, 덮고 있던 누군가의 자켓이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
은돈은 의아한 시선으로 자켓을 내려다봤고, 그때였다.
“여기 보세요, 치-즈!”
간드러지는 효과음과 함께 찰칵, 소리가 울려 퍼졌다.
뭐지? 그녀는 소리가 들려오는 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고, 거기엔 셔츠 소매를 팔까지 걷어 부친 독현이 서있었다.
그는 누구보다 심오한 표정으로 제 앞에 쌓인 30여 줄의 김밥을 폰 카메라에 담고 있었다.
“사장님. 지금……인증샷 남기신 거예요? 와우…… 마치 SNS에 음식사진 올리고 뿌듯해하는 새내기 여대생을 보는 거 같네요.”
갑자기 들려오는 은돈의 목소리에, 그가 탁-! 신경질적으로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언제 깼어.”
“지금요. 죄송해요. 그런 모습 들키고 싶지 않았을 텐데.”
어금니 사이로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비웃음을 애써 삼키며 은돈이 말했다.
독현은 어느새 포커페이스를 유지한 채 아무렇지 않은 척 손목시계를 응시했다.
“6시 18분이군. 이제 마무리하지.”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어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난 은돈이 독현에게 다가가 재킷을 내밀었다.
“이거요……. 고마워요.”
독현은 말없이 은돈이 건네는 자신의 자켓을 받아들었다.
그 순간 뭔가 미묘한 공기가 두 사람 사이를 가로질렀고, 뻘쭘해진 은돈이 재빨리 조리모를 벗어들며 말했다.
“저 일단 옷부터 갈아입어야겠어요. 사장님 먼저 들어가세요. 뒷정린 제가 할게요.”
푸다닥. 말을 마친 그녀가 부리나케 주방을 벗어났다.
남겨진 독현은 다시금 뿌듯한 시선으로 자신이 탄생시킨 지독현표 김밥을 내려다 보았다.
이내, 찰칵하는 셔터음이 다시금 주방에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삼십분 뒤.
환복 후 주방 뒷정리까지 마친 은돈이 막 레스토랑을 벗어나 계단을 내려섰다.
“아으…… 몸이, 몸이 아주 그냥 안 쑤시는 데가 없네.”
좌우로 목운동을 하며 그녀는 인근 정류장을 향하기 시작했고, 그때 그녀의 앞으로 낯익은 차 한대가 멈춰 섰다.
“사장님? 아직 출발 안하셨네요? 명장님 뵈러 가신 줄 알았는데.”
은돈의 물음에 운전석의 독현이 고갤 돌리며 대답했다.
“지금 가는 길이야.”
“아하. 그럼 다녀오세요. 두 분이서 오손도손 김밥도 나눠 드시구.”
꾸벅. 인사를 마친 은돈이 곧 몸을 돌려세웠다.
“……싶으면.”
일순 독현의 입술을 뚫고 나온 한마디에 그녀가 우뚝 걸음을 멈춰 섰다.
“네?”
“나랑 같이 가고 싶으면. 그렇게 해도 돼.”
“…….”
이게 뭔 그지 깽깽이, 부지깽이 같은 소리여.
“아뇨. 전 그닥…… 밤새 잠자리가 바뀌어서 그런지, 뼈마디가 쑤시네요. 일단 집에 가서 씻고 좀 쉬었다가 다시 출근하려구요.”
“좋아. 같이 가지.”
“?? 아뇨. 같이 가고 싶지 않다니까요?”
“내 귀엔 다르게 들렸어. 타.”
“저기요. 아무리 사장님이 갑이라지만 너무하신 거 아니에요? 타란다고 내가 넙죽 탈 것 같아요?!”
은돈이 패기 넘치는 눈빛을 번득이며 독현을 향해 외쳤다.
그리고 약 3분 후.
페라리 조수석에 ‘보란 듯’ 몸을 앉힌 그녀가 댓 발 나온 입으로 투덜댔다.
“왜 늘 이런 식이냐구요! 내가 밤새 김밥 마는 것까지 도와 줬구만! 그 대가가 겨우 이거에요? 왜 굳이 싫다는 사람 억지로 엄한 데까지 끌고 가는 건데요!”
옆자리에서 연신 짹짹대는 은돈을 보며 독현이 짓궂은 미소를 지었다.
곧이어 끼이익-! 거친 소리를 내며 그의 차가 도로 위를 내달리기 시작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