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너한테 반한 남자가 있다는 게 신기해서.
“오늘부터 우리와 함께 일하게 될 차은돈 씨, 이지세 씨입니다.”
레스토랑 홀.
직원들 앞에 선 총지배인이 은돈과 지세를 각각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이지세 씨는 앞으로 부주방장님을 도와 우리 주방의 서브보조로 활약해 주실 거구요. 차은돈 씨는…… 흠. 직접 나와서 본인 소개를 하시겠답니다.”
“네?! 아…… 네.”
자신을 골탕 먹이려는 총지배인을 히뜩 노려본 은돈이 곧 쭈뼛대며 앞으로 나갔다.
이런, 떨린다.
이쪽을 바라보는 스무 명의 스텝들과 박 할매, 부주방장, 거기에 지세까지.
은돈은 긴장한 낯으로 미리 준비해둔 멘트를 읊기 시작했다.
“아…… 안녕하세요. 저는 도니도니 은도니 입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려yo!"
“…….”
“…….”
세상에 마상에. 나 지금 잘 부탁드려‘yo'라고 한 거야? 양손으로 힙합 제스처까지 해보이며?
은돈은 불타는 고구마처럼 빨개진 얼굴로 시선 둘 곳을 찾아 헤맸고, 그때 어디선가 피식. 아주 노골적인 비웃음이 들려왔다.
“차은돈에 대한 소개는 내가 대신하지.”
은돈은 저 멀리 원탁 테이블, 그곳에 거만하게 다리를 꼬고 앉아있는 독현을 바라보았다.
지독현. 안 보인다 싶더니 거기 있었군. 쯧. 지가 무슨 조선시대 왕이야? 아주 상전 중의 상전이 따로 없구만.
그녀는 독현의 앞에 잔뜩 머리를 조아린 직원들을 보며 혀를 찼고, 그즈음,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은 독현이 은돈의 소개를 대신하기 시작했다.
“이름 차은돈. 나이 스물여섯, 전공은 호텔 조리학. 전공 외엔 이렇다 할 요리경력 전무, 수상경력 역시 전무. 딱히 실력은 검증된 바 없지만 적어도 내 입에 맞는 요리를 해다 바칠 줄 알아. 그래서 지금 이 자리에 서게 된 거고. 능력에 비해 운이 좋은 여자지.”
저…… 저 싸가지. 내 너 그렇게 말할 줄 알았다.
은돈은 한껏 자신을 깎아내리는 독현을 보며 강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사장님. 말씀이 좀 과하시네요? 첫날부터 굳이 저랑 얼굴 붉히고 싶으세요?”
“나한테 따지고 들기 전에, 옷부터 똑바로 갖춰 입는 게 어때.”
말을 마친 독현이 턱 끝으로 은돈의 조리복을 가리켰다.
“…….?”
은돈은 살짝 눈썹을 찌푸리며 자신의 상의를 내려다보았고, 빌어먹을. 단추가 처음부터 끝까지 짝짝이로 채워져 있다.
“풉. 차은돈 씨. 안 그런 척 하더니…… 속으론 무지 긴장 했구나?”
총지배인의 비아냥에 은돈은 애써 태연한척 단추를 고쳐 잠그기 시작했고, 그 모습을 바라보던 직원들의 입에서 피식피식 웃음이 새어나왔다.
“…….”
와중에 유일하게 웃지 않는 건 지세뿐이었다.
그는 부드러운 시선으로 은돈을 응시했고 같은 순간, 독현의 칼날 같은 시선 역시 그녀를 향했다.
은돈은 자신에게 향한 두 남자의 시선을 무시한 채 오직 단추 잠그기에 열중했다.
세 사람 중 누구도 눈치 채지 못했지만, 지금 그들 사이엔 분명 말랑말랑 묘한 기류가 흐르고 있었다.
***
“여기가…… 정말 제 자리란 말이죠?”
주방.
박 할매 옆에 선 은돈이 자신이 쓰게 될 조리대를 감격에 젖은 눈으로 응시했다.
“앞으로 차은돈 씨는 이곳에서 오직 사장님을 위한 요리에 매진하게 될 겁니다. 다른 건 딱히 신경 쓸 것 없고, 그저 도마 소독과 사장님 전용 브로도(*육수)관리, 밑 재료 손질 정도만 부지런히 해주시면 됩니다.”
“넵!”
은돈의 활기찬 대답에 박 할매가 온화한 미소를 띠었다.
“사장님의 식이장애에 대해선 얼마나 알고 있나요?”
“조금요. 박 명장님이나 제가 만든 음식이 아니면 먹지 못한다는 것 정도…….”
그녀의 말에 박 할매가 살짝 시선을 떨궜다.
“사장님이 앓고 있는 병의 정확한 명칭은 심인성 식이장애에요. 과거의 트라우마가 식이장애로 발현된 케이스라고 하더군요.”
“트라우마요……?”
은돈이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되묻자, 박 할매가 절레절레 고개를 내저었다.
“깊이 알려곤 하지 말아요. 사장님은 자신의 병이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걸 몹시 불쾌해 하시니까요.”
“네에…….”
“……차은돈 씨. 내가 떠나고 나면, 사장님이 의지할 사람이라곤 당신 하나뿐입니다. 부디 그분을 넓은 아량으로 잘 품어주세요.”
할매의 말에, 은돈이 짤막한 한숨을 내쉬었다.
“품고 싶어도, 그분이 워낙에 한 성깔 하시잖아요.”
“아뇨……. 겉으로는 차가워 보여도, 알고 보면 참 단순하고 바보 같은 분입니다. 한번 사람한테 마음을 주면 절대로 먼저 변하지 않죠. 날 좀 봐요. 지난 20년간 꼼짝없이 사장님 곁에 붙들려 있었잖습니까.”
“그니까…… 한번 맘에 들면, 십 년이고 이십 년이고 무섭도록 집착하는 성격이군요.”
오히려 적당히 거리를 둬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이를 앙 무는 은돈의 모습에, 박 할매가 살짝 웃음을 참았다.
“지난 몇 달간 내 뒤를 이을 후임을 찾지 못해 걱정이었는데…… 때마침 차은돈 씨가 나타나서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요. 이 늙은이는 이제 내일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은돈은 잔잔한 어조로 말을 잇는 박 할매를 가만히 응시했다.
그녀가 진심으로 독현을 아끼고 염려하는 마음이 은돈에게도 따뜻하게 전해져왔다.
“처음부터 워낙 악연으로 엮인 사이라 시간은 좀 걸리겠지만. 박 명장님 말씀처럼 사장님…… 제가 한번 품어볼게요. 그러니까 너무 걱정 마세요.”
다정하게 뱉어진 은돈의 말에 박 할매가 미소 띤 얼굴로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점심 준비부터 해 볼까요!”
살짝 민망해진 은돈이 재빨리 조리 복을 걷어 부치며 외쳤다.
“내 도움이 필요하면 얼마든지 불러요. 그럼…….”
주방 출구로 돌아 서는 박 할매를 향해 은돈이 꾸벅 고개를 숙였다.
이윽고 홀로 남겨진 그녀가 다른 조리사들을 힐끔대기 시작했다.
냉 요리담당부터 탕 담당, 육부담당, 찬모(*밑반찬)담당, 구이담당까지. 각자 맡은 파트에 따라 일사분란 움직이는 그들의 이마엔 어느덧 굵직한 땀방울이 맺혀있었다.
순간, 은돈은 뽀송뽀송한 자신의 얼굴을 매만지며 초조하게 중얼거렸다.
“이럴 때가 아니여. 나도 뭔가 보여줘야 해.”
마음이 바빠진 그녀는 재빨리 야채 바구니를 조리대 위에 텅! 올려놓았고, 곧 주방 도구를 찾아 헤매기 시작했다.
“보자 칼이 어디…….”
“여기요.”
갑자기, 누군가 그녀를 향해 칼을 손잡이 방향으로 슥 내밀었다.
“응? 증산도…… 아니, 이지세 씨.”
은돈은 제 앞에 선 지세를 올려다보다 곧 칼을 받아들었다.
“고마워요. 아, 근데 혹시 도마,”
“그것도 여기요.”
은돈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지세가 조리대 위로 커다란 원목 도마를 내려놓았다.
“고, 고마워요.”
이 사람 오늘 첫 출근 한 거 맞아?
은돈은 저와 달리 빠릿빠릿 움직이는 지세를 신기한 듯 바라보았다.
아주 바람직한 젊은이야. 친하게 지내둘 필요가 있겠어.
“이지세 씨라고 했죠? 우리, 같은 날 들어온 것도 인연인데 앞으로 잘 지내봐요!”
불쑥- 그의 앞에 오른손을 내민 은돈이 활기차게 인사를 건넸다.
“아…… 잠깐만요.”
지세는 물기에 젖은 손을 재빨리 마른 수건에 닦은 후, 은돈의 손을 조심스레 맞잡았다.
“근데 이지세 씨……. 서강준 이라고 알아요? 배운데.”
“네?”
“아니, 이지세 씨랑 무지 닮은 거 같아서요.”
“글쎄요. TV 잘 안 봐서.”
지세가 멋쩍은 듯 대답하자, 흥분한 은돈이 한 톤 높아진 목소리를 튕겨냈다.
“에이 진짜 닮았는데! 지세 씨 인기 되게 많죠? 그 외모에 안 넘어갈 여자들이 없겠는데?”
“…….”
은돈의 호들갑에 지세가 말없이 입을 닫았다. 그는 다이어트 캠프에서 그녀가 제게 했던 말을 떠올렸다.
‘순두부님은 젖살만 좀 더 빼면 여자들한테 완전 인기 폭발일거에요.’
‘내가 장담하는데요. 순두부님 살 빠진 모습에 아마 안 넘어갈 여자가 없을 걸요.’
피식. 일순 지세가 미소를 띠며 눈앞의 은돈을 응시했다.
많이 변한 줄 알았는데…… 그대로네.
그는 예나 지금이나 자신을 스스럼없이 대하는 은돈에게 왠지 모를 안도감과 편안함을 느꼈다.
“누나야말로 가만있어도 남자들이 줄줄 따를 거 같은데요. 예쁘니까.”
“예, 예뻐요? 내가? 아니에요. 요즘 다이어트를 해서 그나마 좀 사람다워진 건데…….”
뒤통수를 긁적이는 은돈을 보며, 지세가 불쑥 말을 이었다.
“하기 전에도 예뻤어요, 다이어트.”
“…….”
일순 은돈은 의아한 얼굴로 지세를 응시했고, 그는 재빨리 자신의 말을 정정했다.
“예뻤을 거예요. 분명!”
“뭐야. 빈말이라도 기분 좋네요. 잘생긴 연하남한테 예쁘단 소릴 다 듣고. 아. 나보다 어린 거 맞죠? 스물? 스물하나?”
“스물두 살요.”
“와 그럼 나랑 네 살 차이? 흠. 우리 서로 말 놓을까요? 친하게 편하게?”
거리낌 없이 물어오는 그녀를 보며 지세의 눈이 반달모양으로 접혔다.
“말 편하게 해요 누나. 난 차차 놓을게요.”
“그래 그럼! 우리 앞으루 잘 지내봐요! 아니, 잘 지내보자.”
“네.”
네, 하고 고개를 끄덕이는 지세의 귀가 붉게 물들었다.
그러나 은돈은 자신을 여자로 의식하는 이 연하남의 마음을 전혀 눈치 채지 못한 채 밝게 미소 지을 뿐이었다.
***
다원정 프레지던트 룸.
업무 책상에 앉은 독현이 지난달 매출 실적표를 넘기며 예리한 시선을 빛냈다.
그의 앞에는 자금 운용 계획서를 비롯한 재무제표, 팀원 실적표 등이 산처럼 쌓여있었다.
그때 똑똑, 노크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며 은돈이 안으로 들어섰다.
“사장님. 점심 드세요.”
그녀가 이동식 트레이에 올려진 요리접시를 가리키며 말했다.
“거기 놔둬.”
서류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독현이 딱딱한 한마디를 내뱉었다.
은돈은 그의 말대로 요리접시를 소파 협탁 위에 차례로 내려놓기 시작했다.
“사장님. 세팅 다 했는데…… 안 드세요?”
“…….”
“저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까요?”
“…….”
일에 몰두한 나머지 대꾸조차 않는 독현을 보며, 은돈이 털썩 소파에 몸을 앉혔다.
그리고 그렇게…… 장장 40여분의 시간이 어이없이 흘러갔다.
‘아우, 다리 저려.’
방안 가득 정적이 감도는 가운데, 코에 침을 바르던 은돈이 갑자기 배를 움켜쥐었다.
억. 안 돼. 여기선 안…….
“꾸르럭-”
순간 그녀의 허기진 배에서 당장 밥을 대령하라는 사이렌이 거창하게 울려 퍼졌다.
젠장. 꼬르륵도 아닌 꾸르럭이었어.
은돈은 빨개진 얼굴로 힐끔 독현의 눈치를 살폈고, 그 즈음 실적표에서 시선을 거둔 독현 이 벽시계를 향해 고개를 쳐들었다. 현재 시각 12 : 42.
“나가봐, 차은돈.”
“네?”
“가서 밥 먹어.”
그의 말에 은돈이 놀란 토끼눈을 하고 껑충 몸을 일으켰다.
“저 진짜 나가요? 갑니다?”
“나가.”
무미건조한 한마디를 뱉은 독현이 다시금 서류 위로 시선을 끌어내렸다.
신이 나서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던 은돈은 멈칫하며 그를 응시했다.
“……아니다. 저 그냥 여기 있을게요.”
“…….?”
다시 자리에 몸을 앉히는 그녀를 보며, 독현이 미간을 좁혔다.
“나가도 괜찮다고 했잖아.”
“됐어요. 밥 혼자 먹으면 맛없잖아요. 여기 앉아서 사장님 먹는 동안 말상대나 해드리죠 뭐.”
박 할매와의 짧았던 대화가 은돈에게 어떤 심경변화를 일게 한 것일까.
그녀는 처음으로 독현을 향해 악의 없는 미소를 지어보였다.
“…….”
독현은 손에 든 서류를 내려놓으며, 자신에게 웃어주는 은돈을 지그시 응시했다.
“혹시 뭐 잘못 먹었어?”
“네? 아뇨. 왜요?”
“…….”
미소를 띤 채 물어오는 은돈을 보며, 찰나였지만 독현의 동공이 가볍게 흔들렸다.
스윽- 이윽고 그가 몸을 일으켜 소파를 향해 다가왔다. 그리곤 은돈의 맞은편에 털썩 몸을 앉혔다.
“어, 드시게요?”
그녀의 물음에 독현이 인상을 찌푸리며 괜한 한마디를 튕겨냈다.
“니가 계속 노려보고 있어서 일에 집중할 수가 없잖아.”
“풋……. 얼른 드세요.”
은돈은 독현의 앞에 가지런히 젓가락을 놓아주었고, 그때였다.
노크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며 지세가 나타났다. 그는 독현을 향해 살짝 고개를 까딱여 인사를 건넨 뒤 은돈에게 돌아섰다.
“누나. 명장님께서 찾으시는데…… 스토브 관리랑 밑 재료 손질하는 법 때문에요.”
누나?
독현이 살짝 고개를 비틀어 지세를 응시했다.
“응 곧 갈게!”
다음으로, 그의 날카로운 시선이 은돈을 향했다.
“참 오지랖도 넓으시군. 벌써 말까지 놓고.”
지세가 방을 나간 직후, 독현이 핀잔하듯 말했다. 은돈은 그를 향해 태연히 대답했다.
“전 누.구.와 달리 아무하고나 쉽게 친해지거든요.”
“난 아무하고나 친해지고 싶은 맘 없어.”
“아, 그래서 나랑도 일부러 거리를 두는 거예요?”
그녀의 물음에, 잠깐 뜸을 들이던 독현이 진지한 어투로 대답했다.
“난 우리가 꽤 친해졌다고 생각했는데.”
“……? 진심이세요?”
“장난해? 해본 말이야.”
제기랄. 그럼 그렇지. 은돈은 입을 삐죽이며 홀로 궁시렁댔고, 턱을 괸 채 그런 그녀를 바라보던 독현이 이내 입을 열었다.
“저녁은 따로 준비할 필요 없어.”
“엥? 왜요?”
“이따 보면 알 거야.”
뭐지……?
은돈은 고개를 갸웃했고, 그러거나 말거나 독현은 잠자코 스푼을 들어올렸다.
***
그날 저녁.
-박 명장님의 영예로운 퇴임을 축하합니다!-
앙증맞은 미니 플래카드가 걸려있는 야외 테라스. 박 할매가 스텝들 한명 한명과 눈을 맞추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지독현이 저녁을 캔슬한 이유가 박 명장님 퇴임식 때문이었구나…….
은돈은 고개를 돌려 저 멀리 독현을 바라보았다. 그는 홀로 텅 빈 테이블에 앉아 왁자지껄 파티를 즐기는 직원들을 고고히 응시하고 있었다.
“사장님~ 우리 와인 몇 개 더 땁시다! 오늘 같은 날은 마쎠 줘야죠!”
은돈은 와인병을 든 채 아까부터 독현에게 치대는 꽐라 부주방장을 불안한 듯 응시했다. 그러나, 불같이 화를 낼 것이란 예상과 달리, 독현은 그저 센치한 얼굴로 조용히 뇌까릴 뿐이었다.
“마시고 싶은 만큼 갖다 꺼내 마셔. 나한테 일일이 묻지 말고.”
“올레! 맘껏 꺼내 마시란다! 만세! 우리 개 싸가지 사장님 만쉐이-!”
“부, 부주방장님. 제발 이리오세요…….”
몇몇 직원들이 술에 취해 비틀대는 부주방장을 향해 초조한 손짓을 해보였다.
그들은 독현의 심기가 언제 뒤틀릴지 몰라 연신 불안에 떨고 있었다.
은돈은 스스로 아웃사이더를 자청하는 이 레스토랑의 오너를 보며 푸쉭 한숨을 내쉬었다.
이어서 그녀는 터벅터벅 걸음을 옮겨 독현의 테이블로 다가갔다.
“사장님. 같이 마셔요.”
탕-! 테이블 위로 맥주 두 캔을 내려놓으며 은돈이 말을 이었다.
“저쪽에 술이 종류별로 많더라구요. 그중에 젤 만만한 놈으로 가져왔어요.”
“…….”
독현은 시크한 얼굴로 은돈이 내미는 맥주 캔을 받아들었다.
그런데, 어디선가 묘한 시선이 느껴졌다. 독현은 고개를 치켜들었고 그와 동시에 저만치에 서있는 지세와 눈이 마주쳤다.
“이지세 씨. 우리랑 같이 마셔요~”
“네? 네…….”
지세는 자신의 팔에 매달린 여직원 둘을 본체만체하며 독현의 테이블을 응시했다.
“…….”
독현은 이내 지세가 바라보는 사람이 자신이 아닌 은돈임을 눈치 채고 픽, 실소를 머금었다.
“차은돈.”
“네?”
“우리 건배 할까?”
“거, 건배요?”
은돈은 자신을 향해 맥주잔을 치켜드는 독현을 믿기지 않는 다는 듯 바라봤다.
갑자기 왜 친한 척이야?
그녀는 미심쩍은 눈길로 독현을 보다 곧 짠! 하고 그와 잔을 부딪쳤다.
그 순간 독현이 살짝 시선을 틀어 저만치의 지세를 직시했다. 지세는 여전히 소년같이 순수한 눈빛으로 은돈을 응시하고 있었다.
“사장님. 아까부터 어딜 그렇게 봐요? 뭐 재밌는 거라도 있어요?”
은돈의 물음에, 독현이 한참 침묵하다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재미있기보다 신기해서 말야.”
……너한테 첫눈에 반한 남자가 있다는 게.
독현은 뒷말을 삼킨 채 치익-! 맥주 캔을 따 냉랭한 웃음이 서린 입가로 가져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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