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남자 밥해주기-12화 (12/93)

12화. 옆에 있어. 아니 있어줘.

“대체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선생님? 제 폭식 욕구를 잠재우는데 왜 처방전 대신 남자가 필요한 거죠?”

행운빌라 201호.

주방에서 독현의 저녁 도시락을 싸고 있던 은돈이 핸드폰을 귀에 댄 채 기함했다.

그와 동시에 수화기에서 닥터 한의 확고한 음성이 들려왔다.

-글쎄 내 말 들어요. 새로운 남자! 새로운 연애! 그것만큼 폭식증 완화에 도움이 되는 건 없습니다! 은돈 씨처럼 충동적으로 음식에 손이 가는 사람들은 주변을 환기시켜 관심을 다른데 쏟는 것만으로도 얼마든지 상태가 좋아질 수 있어요.

“그렇다고 갑자기 남자를 만나라고 하심 곤란하죠. 제가 남자가 어디 있어요?”

-거야 만들면 되죠! 차은돈 씨! 뚱뚱했던 과거는 이제 저 멀리 던져버려요! 지금의 은돈 씬 누가 봐도, 아니 내가 봐도 예쁘고 아름답습니다!

하. 새로운 연애라니…… 은돈이 암담한 얼굴로 살짝 언성을 높였다.

“전 남잘 만날래도 시간이 없다구요! 당장 오늘만 해도 제 상전한테 갖다 바칠 음식 준비에 하루를 몽땅 허비 했어요! 선생님은 이런 제가 가엾지도 않으세요!?”

-차은돈 씨?…… 너 지금 뭐 먹고 있죠?

헉……

순간 프라이팬의 비엔나 볶음을 쉴 새 없이 집어먹던 은돈이 핸드폰을 귀에서 떼 내던졌다.

“이 귀신같은 양반.”

은돈은 끊어진 핸드폰을 보며 혀를 내둘렀고, 이어서 바닥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새로운 연애. 그게 말처럼 쉽냐고.

“물론…… 어떤 사람들한텐 연애가 누워서 껌 씹기보다 쉬울지 모르지만.”

꽤나 잘 어울리던 소라와 독현의 모습을 떠올리며 은돈이 멍한 혼잣말을 되 뇌였다.

“젠장. 다들 짝이 있는데, 도대체 내 짝은 어디 있는 거야? 하다못해 젓가락도 두 짝! 양말도 두 짝인데……!”

***

청담, ## 클럽.

일반 클러버들은 출입이 불가능한 VVIP룸에서 아까부터 남녀가 뒤섞인 웃음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님들, 이 정지훈이의 귀국파티에 오신 걸 지대로 환영 합니다.”

“새끼~ 도피 유학도 유학이라고 오자마자 허세 쩌네.”

이른 시간임에도 불구, 다섯 명의 부잣집 도련님들은 이미 혀가 꼬일 대로 꼬여 부어라 마쎠라 중이었다.

“……”

독현은 친구들의 저급한 농담 따먹기에 관심 없다는 듯, 10분 전부터 자신의 핸드폰만을 뚫어져라 응시하고 있었다.

“야 아까부터 뭐하는데. 소라 연락 기다리냐?”

한눈에도 껄렁 해 보이는 지훈이 독현의 옆자리에 털썩 몸을 앉혔다.

“응? 김밥햄?”

독현의 핸드폰 액정을 들여다보며, 그가 고개를 갸웃했다.

“김밥 햄이 누구야?”

“……”

대꾸조차 않은 채, 독현은 오직 핸드폰 액정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이윽고, 그는 결심한 듯 연락처에 저장된 ‘김밥햄’ 세 글자를 지우고 새로운 이름을 적어 넣기 시작했다.

-계란말이 잘 만드는 여ㅈ……-

한참 키패드를 터치하던 독현이 일순 멈칫하며 적다 만 ‘ㅈ’을 빤히 노려보았다.

뒤이어 그는 삭제버튼을 연달아 누르기 시작했고, 잠시 후 연락처에 저장된 새로운 이름은.

-계란말이-

쿨해도 너무 쿨한 그 네 글자를 보며, 독현은 흡족한 듯 저장버튼을 눌렀고 지훈은 호기심이 인 듯 캐묻기 시작했다.

“뭔데? 누군데 그런식으루 저장하는데? 여자?”

“……굳이 따지면 여자에 가깝지.”

조소를 머금은 채, 독현이 자신의 핸드폰을 귀에 갖다 댔다.

-여, 여보세요!

곧이어 핸드폰 너머로 다급한 은돈의 음성이 들려왔다.

독현은 서늘하게 웃으며 자신의 시계를 내려다보았다.

“정확히 6시 59분이군. 지금 어디야.”

-그게요! 다 왔어요! 지금 1층 로비에서 엘리베이터 기다리는 중이거든요?

“차은돈. 난 집으로 오라고 한 적 없어.”

-네? 그게 무슨……?

“당장 여기로 와. ##클럽 VVIP룸. 시간은 7시 30분까지.”

-아니 잠깐만요! 말이 돼요? 누가 클럽에서 도시락을 까먹어요!?

“난 먹어.”

세상에서 가장 사악한 얼굴로 독현이 말을 이음과 동시에, 핸드폰 액정에서 울분에 찬 고성이 들려왔다.

-진짜 이런 식으로 사람 물 먹이기 있어요!?

“첫날부터 지각한 벌이야. 억울하면 니가 갑 하던지.”

-사장님! 지금 나랑 장난,

뚝.

은돈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통화종료 버튼을 누른 독현이 살짝 입가를 끌어올렸다.

“야 대체 누군데? 너 진짜 여자 생겼냐?”

술 냄새를 풍기며 물어오는 지훈의 머리를 검지 손가락으로 밀어내며, 독현이 짓궂은 한마디를 내뱉었다.

“기다려. 좋은 구경 시켜 줄 테니까.”

***

“후하! 후하! 후하!”

##클럽 앞. 약 십분 전 이곳에 도착한 은돈이 숨을 몰아쉬며 제 앞에 줄지어선 클러버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제길……오긴 왔는데…… 진짜 들어가 말아?”

대기 줄이 짧아지며 입구와 가까워질수록, 은돈은 초조한 낯으로 품안의 도시락을 꾹 쥐었다. 그래……들어가자. 넌 지독현의 전담 요리사야. 사명감을 가져 차은돈.

“아무리 그래도 지독현 이 자식. 클럽에서 도시락이라니……”

입구에 가까워진 은돈이 열이 채는 듯 혼잣말을 읊조리며 걸음을 옮겼다.

“어? 들어가심 안돼요. 음식물 반입 금집니다.”

갑자기 삐끼 하나가 은돈을 제지하며 앞을 막아섰다.

“죄송한데 잠깐 도시락만 주고 나옴 안 될까요?”

“음식물 반입 금지라구요. 그리고……”

그리고, 하며 말꼬리를 늘린 삐끼가 껄끄러운 시선으로 은돈을 훑어 내렸다.

“본인 자체도 이곳에 반입이 안돼요.”

“뭐, 뭐라구요? 지금 나 뺀찌 놓는 거에요? 왜요!?”

“님 차림새를 보세요. 이런데 오면서 캐릭터 후드티가 다 뭡니까.”

심드렁한 삐끼의 말에, 은돈이 슬쩍 고개를 내려 자신의 매무새를 살폈다.

‘은돈아 우리 뺀찌 먹었어’

이런. 후드 티 속 스펀지 밥 캐릭터가 마치 내게 말을 거는 것 같구나.

“저기요! 저 진짜 민폐 안끼치구 도시락만 주고 나올게요!”

“글쎄 안 된다니까요!”

이후, 은돈 VS 삐끼와의 지지부진한 실랑이가 몇 분쯤 이어졌을까……

갑자기 클럽 매니저로 보이는 한 남자가 불쑥 은돈에게 다가섰다.

“혹시. 차은돈 씨?”

“네? 맞는데요.”

“아, 따라오세요. 안으로 모시겠습니다.”

“헛. 네!”

정중한 태도로 자신을 에스코트하는 매니저를 따라, 은돈은 재빨리 클럽 내부로 걸음을 떼놓았다.

덩그러니 남겨진 삐끼는 은돈을 물갈이 하지 못한 것에 자존심이 상한 듯, 그녀가 사라진 입구를 투덜대며 노려보았다.

-♬-♪-♪-♪-♫-♬-♩!

클럽내부.

귀청이 떨어져 나갈듯 음악이 쿵쾅대는 스테이지를 지나, 은돈이 매니저와 함께 2층으로 올라섰다.

“와우……”

어두운 계단에서 술에 취해 키스를 주고받는 남녀를 보며, 그녀는 저도 모르게 감탄사를 내뱉었다.

“이쪽으로 오시죠.”

“네.”

그녀는 매니저를 따라 구불구불한 미로형의 복도로 들어섰고, 얼마 후…… 비로소 독현이 말했던 VVIP룸 앞에 다다를 수 있었다.

“들어가 보세요. 기다리고 계십니다.”

젠틀하게 말을 잇는 매니저에게 고개를 꾸벅 수그린 은돈이 눈앞의 VVIP 룸을 응시했다.

방안에선 남자들의 고성과 함께 여자들의 야릇한 웃음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여기 지독현이가 있다 이거지. 좋아. 차은돈. 쫄지 말자.

뭐 VVIP들이라고 다를 거 있겠어. 이 방에 있는 놈들도 세 끼 먹고 한번 똥 싸는 건 나랑 똑같아.

활짝- 도시락 통을 앞세운 은돈이 기세 좋게 문을 열어젖혔다.

“뭐야?”

“……누구?”

은돈은 자신의 등장과 함께 인상을 찌푸린 부잣집 자제들과, 그들의 껌 딱지로 보이는 여자 넷을 차례로 바라보았다. 그리곤 시선을 돌려 정중앙의 독현을 응시했다.

“사장님? 도시락 가져왔는데요?”

양주병이 즐비한 테이블 위로 도시락 통을 쾅! 내려놓으며 은돈이 말했다.

“어서 와.”

살짝 입 꼬리를 올리며 독현이 조롱조의 한마딜 뱉어냈다.

동시에 옆에 앉은 지훈이 알만하다는 듯 킥킥 쪼개며 은돈을 향해 외쳤다.

“와우, 스펀지 밥~! 일루 와서 앉아요!”

앉으라면 못 앉을 줄 알고?

휙 턱을 치켜든 스펀지밥, 아니, 은돈이 자신을 노려보는 여자들을 무시한 채 소파에 털썩 몸을 앉혔다. 스트레이트 잔을 입가로 가져가던 독현이 그런 은돈을 보며 피식 미소를 지었다.

“옆으로……”

“?”

“내 옆으로 와.”

일순 모두를 숨죽이게 한 그의 한마디에, 은돈은 살며시 미간을 좁혔다. 저 자식, 대체 무슨 속셈이야?

“저 진짜 옆으루 가요? 갑니다?”

은돈이 미심쩍은 시선으로 독현을 향해 물었다.

“오라니까.”

독현은 여전히 웃음기가 서린 얼굴로 그녀를 주시하고 있었다.

잠시 망설이던 은돈은 테이블 위의 도시락 통을 챙겨든 채 룸 중앙을 향해 다가갔다.

“자. 왔어요. 옆에 앉아드려요?”

당돌한 물음에, 독현이 대답대신 확 손을 뻗어 은돈을 소파 위로 내리 끌었다.

털썩! 쓰러지듯 몸을 앉힌 은돈은 더더욱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똥 씹은 얼굴을 해보였고

지훈을 비롯한 재벌 집 망나니들은 두 사람을 흥미롭다는 듯 응시했다.

그때, 독현의 입술이 재차 벌어지며 짓궂은 한마디가 흘러나왔다.

“배고픈데, 도시락 세팅 좀 해봐.”

“네?”

“도시락 세.팅.”

“……”

은돈은 또박또박 말을 잇는 그를 노려보다, 곧 하는 수 없다는 듯 테이블 위에 반찬통을 꺼내놓기 시작했다.

“아우. 김치 냄새……”

그즈음 가슴이 파인 튜브 탑 원피스를 입고 있던 여자 하나가 코를 감싸 쥐며 불만을 터뜨렸고, 동시에 은돈은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옆자리의 독현은 한손으로 턱을 괸 채 그런 은돈을 강 건너 불구경하듯 방관하고 있었다.

지독현. 이런 식으로 날 꼽 주시겠다? 이게 니가 말한 지각의 대가냐?

“사장님? 세.팅 끝났는데 드시죠? 클럽에서 도시락 까먹는 게 취미 신 거 같은데.”

은돈은 비꼬듯 말을 이으며 양주 테이블 위로 젓가락을 탕! 내려놓았다.

동시에 독현은 검지 손가락으로 제 앞의 콩자반 통을 툭, 튕겨냈다.

“다음부터 이런 거 해오지마. 난 콩 안 먹어.”

어쭈? 그 와중에 편식까지?

“네, 치우죠 뭐.”

은돈이 떨떠름한 얼굴로 콩자반 통을 집어 들자, 독현은 기다렸다는 듯 테이블위의 반찬통을 하나하나 튕겨내며 지적질 해대기 시작했다.

“이것도 치워. 나 생선 싫어해. 이건 식었잖아. 버려. 아, 이것도.”

“……”

은돈은 치미는 분노를 애써 삭히며 독현의 지시대로 반찬통을 수거했고, 잠시 후. 그들 앞에 남은 건 달랑 잔 멸치볶음뿐이었다.

“이제 만족하세요? 사장님? 드시죠 좀?”

은돈의 가시 돋친 채근에, 시선을 치켜 올린 독현이 거만하게 입을 열었다.

“갑자기 입맛이 없어졌어.”

“그래……서요?”

“치워. 이따 먹을 테니까.”

치워? 이따 먹을 테니까? 순간 은돈의 눈썹이 위를 향해 치솟았다.

“설마……이거 다 먹을 때까지 날더러 여기 죽치고 있으란 소린 아니죠?”

그녀의 물음에, 독현이 가소롭다는 듯 시크한 한마딜 내뱉었다.

“내가 식사를 마칠 때까지 꼼짝 말고 곁에 죽치고 있는 게, 네 의무이자 임무야. 계약서에 명시 돼 있잖아? 대체 몇 번을 인지시켜야 하는 거지?”

“후우……”

은돈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눈앞의 독현을 노려봤고 그때 저만치서 지훈의 눈치 없는 고성이 들려왔다.

“와, 두 사람! 뭔 진 몰라도 완전 골 때리네. 둘이 사귀어요!?”

일순 은돈과 독현의 서슬 퍼런 시선이 동시에 지훈을 향했다.

찔끔한 지훈은 재빨리 두 손을 내저었다.

“워,워 진정들 하시고! 거기 예쁜 도시락녀, 온 김에 같이 놀죠. 한잔할래요?”

“아뇨. 술 잘 못해요.”

은돈이 단호한 얼굴로 고개를 내젓자, 이내 옆자리에서 직접적인 비웃음이 들려왔다.

“잘 마시잖아 너.”

은돈은 자신을 향해 뇌까리는 독현을 빤히 째려보았다.

“사장님이 내 주량에 대해 뭘 안다고,”

“오바이트 하고 싶으면 미리 말해. 최대한 너한테서 멀리 떨어져야 하니까.”

“윽……!”

독현은 순간 말문이 막힌 은돈을 바라보다 곧 앞에 놓인 샷 잔을 집어 들었다.

그리곤 능숙한 손길로 로얄살루트 38년산을 잔 위에 따라 부었다.

“마셔.”

은돈은 제 앞에 놓인 잔을 잠자코 내려다보았다. 그래, 놀아 달라 이거지?

휙! 잔을 치켜 든 그녀가 그대로 목을 젖혀 양주를 쭙 들이켰다.

“컥! 사장님도 받아요!”

식도가 타는 듯한 통증을 무식하게 눌러 참으며, 은돈이 독현을 향해 잔을 내밀었다.

“어차피 계속 여기 붙들려 있을 바에, 공짜 술이나 실컷 얻어먹죠 뭐. 뭐해요? 사장님도 한 잔 받으시라니까?”

“……”

독현은 호기롭게 외치는 은돈을 보며, 말없이 잔을 받아들었다.

그리곤 넘칠 듯 찰랑이는 술을 그대로 입안에 털어 넣었다.

“……차은돈. 다시 니 차례야.”

“좋아요. 딱 먹고 죽을 만큼만 따라주세요.”

애먼 승부욕에 눈이 먼 은돈이 독현이 내미는 잔을 다시 덥썩 받아들었다.

이후 두 사람은 기계적으로 잔을 주거니 받거니 하기 시작했고, 나머지 일동은 급작스레 벌어진 술 대작을 경악의 눈초리로 바라보며 숨을 죽였다.

“하여간! 사장님 새디스트에요? 날 괴롭히면서 무슨 변태적인 희열이라도 느끼냐구요.”

은돈이 독현의 잔 위로 콸콸 양주를 들이 부으며 볼멘소리를 뱉어냈다.

독현 역시 그런 은돈의 잔을 채우며 차갑게 응수했다.

“그건 내가 할 소리지. 아직도 내 머리 위로 잡탕을 끼얹던 니 코뿔소 같은 모습이 생생하게 떠올라. 너야말로 새디스트 아냐? 날 괴롭히면서 변태적인 희열이라도 느끼는 건가?”

“뭐, 뭐요?”

독현의 비아냥에, 은돈이 파르르 눈을 치켜떴다.

“에라이 마셔요! 원 샷! 알죠?”

다시금 양주병을 집어 든 은돈이 카랑카랑하게 외쳤다. 독현은 대꾸조차 않은 채 스트레이트로 술을 들이켰고…… 그렇게 얼마쯤 시간이 지났을까.

숨 막히는 분위기를 견디지 못한 독현의 친구들이 하나 둘 룸을 벗어나기 시작했다.

“나도 여자나 건지러 가야겠다.”

파티의 주인공이던 지훈 마저 술병을 집어든 채 문을 벗어난 지금 이 순간……

룸 안에 남겨진 것은 독현과 은돈, 단 두 사람뿐이었다.

“……헛!”

제 의지와 상관없이 뒤로 젖혀지는 고개를 바로하며 은돈이 번쩍! 눈을 부릅떴다.

이어서 그녀는 찰싹 자신의 양 뺨을 내리쳤다.

“정신 차려 차은돈! 작년 이맘때, 알콜 중독 수준의 외삼촌과 펼쳤던 뱀술 대작에서 다섯 시간 만에 기어코 승리를 거머쥐었던 너야. 그래, 차은돈. 고작 지독현 따위한테 지지마. 이런 술 쭈구리 따위 보란 듯 이겨줘!”

은돈은 생애 가장 진지한 얼굴로 제 뺨을 후려치며 악을 내질렀고, 그때였다.

핑그르르- 독현의 손에서 양주잔이 굴러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오케이!’

은돈은 반짝 눈을 빛내며 옆자리의 독현을 응시했다.

소파에 비스듬히 머리를 기댄 채 잠이 든 그를.

“사장님. 자요? 야…… 자냐?”

독현의 면상위로 손을 휘저으며 은돈이 승리의 미소를 지어보였다.

대체 이 남자 언제부터 이렇게 취해있었던 걸까.

“앞으로 먹을 거, 마실 거로 나한테 덤비지 마 애송이.”

승리감에 도취 된 그녀가 주섬주섬 도시락 통을 챙겨들고 출구를 향해 일어섰다.

그런데 그때 등 뒤에서 익숙한 저음이 들려왔다.

“차은돈. 가지마.”

날카롭게 귓가를 파고드는 한마디에, 은돈이 가만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이제껏 한 번도 보지 못한 묘한 눈빛으로 자신을 직시하는 독현이 보였다.

뭐야, 잠든 거 아니었어?

“……가지마.”

한 번 더, 그의 입술이 벌어지며 뜻 모를 한마디가 뱉어졌다.

“사장님. 취했어요?”

잠시 텀을 두고 뱉어진 은돈의 물음에, 독현이 미간을 찌푸렸다.

“말했잖아……내가 식사를 마치기 전까지 넌 아무데도 못 간다고.”

“……하?”

이 와중에 갑질이 하고 싶었던 거니, 넌?

황당한 시선으로 독현을 노려보던 은돈이 다시 문을 향해 빙글, 돌아섰다.

술 취한 놈이랑 말 섞어 뭐하랴. 난 가련다.

“전 어쨌든 도시락 배달했어요? 안 먹겠다고 땡깡 부린 건 사장님이에요.”

문고리를 잡아 돌리며 은돈은 딱딱하게 말을 이었고, 동시에 독현은 혼란스러운 듯 헝클어진 시선을 아래로 떨궜다.

“옆에 있어.”

무겁게 잠긴 그의 목소리가, 다시금 은돈의 발끝을 잡아 세웠다.

“옆에 있어줘.”

“……”

“……잠깐만 옆에 있어줘.”

“……”

명령조라기보다 오히려 부탁에 가까운 그의 한마디는, 은돈의 혼란을 가중시키기에 이미 충분했다. 은돈은 저만치의 독현을 똑바로 마주보았다. 당장이라도 무너져 내릴 듯 위태로운 그의 모습을.

“……”

말없이 문고리를 놓은 은돈이 발길을 돌려 독현의 곁으로 다가섰다.

그리곤 살며시 그의 발치에 쭈그려 앉았다.

“사장님. 취하신 것 같은데…… 낼 창피해서 어쩌려 구요. 나한테 이런 약한 모습 보이는 거…… 죽을 만큼 후회 할 텐데?”

은돈은 한쪽 손등으로 눈가를 덮은 채 소파에 기대앉은 독현을 빤히 바라보았다.

순간 그의 흐트러진 머리칼에 시선이 가 멎었다.

“……”

왠지 묘한 연민을 느끼며 은돈은 독현의 머리칼을 쓸어주려 손을 뻗었고, 곧 흠칫 정신이 들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내가 지금 뭘 하는 거야.”

상기된 얼굴을 치켜든 채, 은돈이 출구를 향해 재빨리 걸음을 옮겼다.

잠시 후 문이 열리며 룸 안으로 시끄러운 음악이 물밀듯이 밀려들었고, 동시에 은돈은 도망치듯 자취를 감췄다.

“……”

홀로 남겨진 독현은 그제야 미간을 가린 손을 거두고 감겨 있던 눈꺼풀을 치켜 올렸다.

하필이면 저 여자 앞에서 추태를 부리다니. 그는 취기가 도는 듯 가느다란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애초에 술을 마시는 게 아니었다. 취기가 오르면 여지없이 눈앞으로 오래 전 ‘그날’이 재현된다.

독현은 자신의 머릿속에 유리 파편처럼 심어진 그날의 기억을 애써 지우려는 듯 한손으로 머리를 거머쥐었다.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