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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남자 밥해주기-10화 (10/93)

10화. 뉴 페이스 이지세

코앞에 확 들이닥친 독현의 얼굴을 보며, 은돈이 놀란 토끼 눈으로 훕! 호흡을 멈췄다.

“…….”

독현은 그런 은돈의 목덜미를 거머쥔 채 가까이서 찬찬히 얼굴을 관찰했다.

그동안 자신에게 부단히도 맞서던 깡과 패기는 어디로 간 걸까.

독현은 붉어진 얼굴로 어쩔 줄 몰라 하는 그녀의 모습에 픽 웃음을 머금었다.

“립스틱 번졌어.”

그가 자신의 엄지로 은돈의 아랫입술을 쓸어 누르며 말했다.

“아……모, 몰랐어요.”

벙찐 은돈이 재빨리 손등으로 입술을 훔쳤다.

이런, 독현의 엄지가 닿았던 아랫입술이 불에 덴 듯 뜨겁다.

그녀는 당혹스런 표정으로 동기들의 눈치를 살폈고, 그 사이 벌칙 주를 끌어당긴 독현이 소진을 향해 마른 음성을 내뱉었다.

“난 보여주기 위한 키스는 안 해. 상대에 대한 예의가 아니잖아?”

“…….”

날카롭게 뇌까리는 그를 보며, 소진이 말문이 막힌 듯 입을 다물었다.

그런 그녀의 귀로 여자 동기들의 수근거림이 들려왔다.

“야 방금 립스틱 닦아주는 거 봤어? 그 표정 봤어? 진짜 남친 맞나 봐.”

“차은돈 살 빼고 용되더니 제대로 로또 맞았네. 저런 남잘 어디서 구했대?”

소진은 속닥이는 동기들을 휙 노려보다, 곧 시선을 돌려 은돈을 응시했다.

“아우, 갑자기 왜 이렇게 덥지? 후하, 후하. 여기 맥주 오백 하나요!”

독현이 제게 키스할 ‘뻔’한 것에 대한 충격에서 아직 헤어 나오지 못한 은돈은 여전히 얼굴 만면에 홍조를 띤 채 어설픈 손부채질을 하고 있었다.

소진은 그런 은돈과, 은돈 옆에서 태연하게 벌칙 주를 한 모금 들이키는 독현을 응시하며 바득, 이를 갈았다.

***

대학로 밤거리.

주점 앞에서 동기들과 왁자지껄 작별인사를 주고받은 은돈이 머잖아 독현의 곁으로 포다닥 다가섰다.

“사장님, 많이 기다렸죠. 애들이랑 번호 교환 좀 하느라, 죄송해요.”

“……이제 끝난 건가.”

“네 끝났어요.”

은돈이 저 멀리, 소진의 어깨에 기댄 채 비틀대는 박현우를 돌아보며 말했다.

“야 차은돈 니가 나한테 이럴 수 있냐!? 딸꾹-! 나 좋다고 헤벌쭉 대던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딴 남자로 갈아타기 있냐고! 너! 그 자식이랑 당장 깨! 헤어져 샹!”

“아 오빠 진짜 쪽팔리게 왜 이래!?”

소진의 부축을 받으며 택시에 구겨 넣어지는 전 남친의 마지막 모습을 보며, 은돈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남자 보는 눈이 형편없군.”

그녀의 얼굴을 힐끗 내려다본 독현의 입에서 무심한 한마디가 튕겨 나왔다.

이에 은돈은 살짝 웃으며 운을 뗐다.

“사장님. 오늘……고마워요. 진심이에요.”

“…….”

독현은 후련한 듯 하면서도 씁쓸해 보이는 은돈을 지그시 응시했다.

은돈 역시 그런 독현을 올려다보았고, 찰나였지만 두 사람이 주고받는 눈빛 속에 왠지 묘한 기류가 흘렀다.

“사장님. 저 오늘 하루 종일 궁금했던 게 있는데요. 만약에 내가…… 예전처럼 뚱뚱했다면, 사장님이 오늘 이 자리에 나왔을까요?”

헉. 내가 지금 무슨 소릴 한 거야…….

은돈은 저도 모르게 내뱉은 속엣 말에 스스로 어쩔 줄 몰라하며 머리를 쓸어 넘겼다.

독현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그런 그녀를 직시했다.

“니가 뚱뚱하건 말랐건,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지? 난 단지 너와의 딜을 지키기 위해 이 자리에 서 있는 것뿐이야. 결국 니가 어떻게 생겼든 그건 내 알바 아니란 소리지.”

칼같이 자신의 입장을 정리하는 독현을 보며, 은돈이 벙찐 얼굴로 뭔가를 말하려다 다시 입을 닫았다.

곧이어 그녀의 귀로 독현의 짤막한 한숨소리가 들려왔다.

“차은돈.”

“네?”

“만일을 대비해 말해두지만 넌 절대 내 취향이 아냐. 그러니까 착각,”

“왜요?”

갑자기 묘한 오기가 발동한 은돈이 눈앞의 그를 향해 되물었다.

“왜 난 사장님 취향이 아닌데요?”

“……?”

그걸 대체 왜 묻느냐는 듯 독현이 삐딱하게 고개를 젖히자, 순간 당황한 은돈이 재빨리 뒷말을 덧붙였다.

“무, 물론! 저도 사장님 취향이고 싶은 맘은 추호도 없어요. 없는데…… 그냥 궁금하잖아요. 사장님은 왜 그렇게 시종일관 날 길거리 돌멩이 보듯 하는지.”

“……난.”

잠시 텀을 둔 독현이 말문을 염과 동시에, 은돈이 긴장한 듯 눈빛을 빛냈다.

뒤이어 그의 입에서 직선적이고 솔직한 한마디가 튕겨 나왔다.

“난 바스트가 큰 여잘 좋아해.”

생각지도 못한 ‘진솔한’ 답변에 은돈이 뜨악 입을 벌렸다.

“그니까. 바스트가 큰 여잘 좋아하기 때문에, 난 죽었다 깨나도 사장님 취향이 될 수 없다는…… 거?”

“넌 삼개월전이나 지금이나 여전히 내 성적취향에 위배되는 몸매를 가졌어. 그땐 뚱뚱했고, 지금은…….”

지금은, 하고 말을 멈춘 독현이 위아래로 은돈의 실루엣을 훑었다.

약간 초조해진 은돈이 그를 재촉했다.

“지금은. 뭐요?”

“……지나치게 빈약하고.”

빈약이라니…….

“사장님이 직접 봤어요?! 내 가슴이 빈약한지 아니면 놀랍도록 기골이 장대한지?!”

“글쎄. 직접 보고 싶을 정도로 흥미가 일질 않아서.”

아아, 제기랄…… 은돈은 아득한 눈빛으로 독현의 고고한 면상을 바라보았다.

다시 돌아와 버렸어. 내가 알던 그 성격파탄자 지독현으로.

불과 한 시간 전- 립스틱이 번진 자신의 입술을 쓸어주던 그를 떠올리며, 은돈이 외쳤다.

“가슴도 없고, 사장님 스타일도 아닌데, 아까 그 불필요하게 찐했던 스킨십은 대체 뭐였어요? 분명 나한테 키스하려고 했잖아요!”

“말했지. 난 단지 너와의 딜을 지키기 위해 이 자리에 서 있는 거라고. 그 스킨십은 딜에 충실하기 위한 내 노력의 일환이었어.”

노력?

묘한 조롱조로 말을 잇는 독현을 보며 은돈이 헛웃음을 지었다.

“됐어요. 걍 말을 말자구요. 안녕히 가세요 사장님! 어쨌거나 오늘 정말 고마웠네요!”

꾸벅 인사를 마친 은돈이 그대로 대기 중이던 택시를 향해 돌아섰다.

그때, 등 뒤로 낮은 저음이 들려왔다.

“차은돈. 난 약속 지켰어. 이제 네가 지킬 차례야.”

“…….”

살짝, 은돈이 그를 향해 다시 몸을 돌려세웠다.

그와 동시에 독현의 입술이 거침없이 벌어졌다.

“내일 아침 집으로 와. 밥해.”

밥해, 밥해, 밥해…….

독현의 말이 마치 메아리처럼 웅웅, 몇 번이고 은돈의 귓전을 때렸다.

그래. 지독현 밥해주기의 서막이 드디어 열리는구나.

“뭐, 사장님이 나와의 딜에 충실하기 위해 스킨십도 마다 않는 노.력.을 하셨으니, 나도 응당 대가를 치러야겠죠. 계약서 조항대로 낼 아침 8시까지 가면 되죠?”

은돈의 물음에 독현이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들어가세요, 사장님! 대리는 꼭 부르시구요!”

은돈이 마침 멈춰선 택시에 올라타며, 독현에게 딱딱한 인사를 건넸다.

“내일. 늦지 마.”

독현 역시 은돈을 향해 작별 인사‘스러운’ 한마디를 내뱉었다.

뒤이어 그는 자신의 애마를 향해 몸을 돌렸고, 그대로 몇 발짝쯤 걸었을까…….

우뚝. 자리에 멈춰 선 그가 조금 전 은돈의 말을 회상했다.

‘가슴도 없고, 사장님 스타일도 아닌데 아까 그 불필요하게 찐했던 스킨십은 대체 뭐였어요? 분명 나한테 키스하려고 했잖아요!’

“……”

글쎄. 왜 그랬을까.

독현은 스스로도 의아한 듯 미간을 좁혔고, 곧 특유의 냉랭한 눈빛을 되찾은 채 다시 페라리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

“상처를 치료해줄 사람 어디 없나! 가만히 놔두다간 끊임없이 덧나~ 사랑도 사람도 너무나도 겁나! 혼자 인 게 무써월! 난 잊혀 질 까 두려웟!”

이른 아침.

비좁은 가스레인지 앞에 선 은돈이 프라이팬을 마구 흔들어 제끼며 노래를 부르짖었다.

그녀의 등 뒤로 보이는 6단 찬합 안엔 보기에도 먹음직스런 집 반찬들이 그럴싸하게 세팅 돼 있었다.

“이 정도면 지독현이도 만족하겠지?”

지금 막 볶아낸 해물 잡채를 찬합통 안에 옮겨 담으며 그녀가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이 윤기 봐라 윤기…… 내가 만들었지만 진짜 맛있겠…….”

꿀꺽.

말을 잇다말고 저도 모르게 군침을 삼킨 은돈이 뭐에 홀린 듯 젓가락을 들었다.

“살짝 맛만 볼까?”

지난 몇 달간 절밥보다 못한 친환경 다이어트식을 고집해 왔던 탓일까.

일순 그녀가 정신없이 해물잡채를 흡입하기 시작했다.

그리곤 몇 분 후.

“차은돈. 너 뭐하는 거야……?”

얼굴에 흡착형 아이스 팩을 붙인 미자가 주방 안으로 들어서며 말했다.

지금 그녀의 시선은 6단 찬합을 품에 안고 꾸역꾸역 폭식중인 은돈을 향해있었다.

“아우, 이년아 정신 차려! 지난 몇 달간의 노고를 헛되이 할 셈이야!?”

“……헙?”

미자의 외침에 퍼뜩 정신을 차린 은돈이, 그제야 안고 있던 찬합통을 내려다보았다.

거기엔 이미 바닥을 드러낸 갈비찜과 삼색 나물, 그리고 각종 전들의 잔해만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이거…… 설마 내가 다 먹은 거야? 오, 오미자! 너 나 안 말리고 뭐 했어!?”

사색이 돼 소리치는 은돈을 보며, 미자가 황당하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년 이거, 길거리에서 똥 지리면 나한테 왜 화장실 안 내놓느냐고 따질 년 일세. 그러게 누가 그렇게 정신 놓고 쳐드시래!?”

“……미자야. 어떻게 해. 나 요요 오려나 봐. 허기가 아프리카 누 떼처럼 몰려든다…….”

“너 지금, 그 말하는 와중에도 호박전에 간장 찍고 있는 거냐? 정신 차려 이년아!”

미자의 호통에 은돈이 무심코 들어 올린 호박전을 화들짝 내려놓았다.

이어서 그녀는 극도의 패닉 상태로 머리를 감싸 쥐었다.

“안 되겠어. 나 지대로 폭식 터지기 전에, 닥터 한……그래. 닥터 한을 만나야겠어.”

***

한샘 비만&식이장애 클리닉.

이른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클리닉 내부는 타인의 시선을 피해 오전진료를 예약 한 뚱녀들로 가득 차 있었다.

간호사들은 뭇 뚱녀들의 차트를 뒤적이는 척 하며 아까부터 진료 대기실에 앉은 꽃미남 청년 하나를 훔쳐보는 중이었다.

“저 사람, 약간 송중기나 서강준 삘 나지 않아?”

“무슨 남자가 저렇게 보송보송 산뜻하게 생겼지?”

뚱녀들 틈에서 홀로 이어폰을 꼽은 채 음악을 흥얼거리는 청년을 보며, 간호사들의 숙덕임이 점점 더 커져갔다.

“이지세 씨. 진료실로 들어오세요.”

그즈음 자신의 이름이 호명되자 청년이…… 아니, 지세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순간 호리호리하게 뻗은 그의 뒷모습에, 뭇 뚱녀들과 간호사들의 시선이 집중됐다.

이러한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지세는 그저 브라운 톤의 머리칼을 살짝 헝클이며 진료실 안으로 들어섰다.

“이지세 씨? 와우, 미남이네. 이쪽으로 앉아요.”

훤칠한 지세를 보며 닥터 한이 다소 오바스럽게 차트를 넘기기 시작했다.

“보자. 이름 이지세, 나이 스물 둘. 우리 클리닉은 처음이시군. 하하. 여긴 왜 왔어요? 이런 곳과는 영 거리가 멀어 보이는데?”

안경너머로 예리하게 자신을 관찰하는 닥터 한을 마주보며, 지세가 입을 열었다.

“진료 받으러 온 건 아니고, 찾을 사람이 있어서요.”

“찾을 사람?”

“그 사람이…… 여길 통해서 캠프에 참가했다고 말했거든요.”

“캠프라면…… 아아~! 강원도 태백! 지옥의 다이어트 캠프!”

“죽음의 다이어트 캠프요.”

살짝 입가에 미소를 띤 지세가 닥터한의 말을 정정하며 바로잡아주었다.

닥터 한은 그런 지세를 향해 은밀히 상체를 수그리며 물었다.

“그래서, 찾을 사람이라는 게 누구……?”

“그게,”

“선생니임---!”

그때였다. 문밖에서 들려오는 엄청난 괴성에, 말을 잇던 지세가 멈칫 입을 다물었다.

“차은돈 씨! 일단 진정하세요! 여기서 이러심 안 된다니까요!”

“저기요! 제가 이따 꼭 늦지 않게 가봐야 할 데가 있어서요! 지금 시간이 얼마 없거든요! 그전에 꼭 진료 봐야 하거든요!”

닥터 한은 문밖에서 들려오는 왠지 낯익은 음성에 의아한 듯 한쪽 눈썹을 끌어올렸고, 머잖아 벌컥! 문이 열리며 목소리만큼 익숙한 은돈의 얼굴이 나타났다.

“선생님! 제가 너무 급해서 그런데 상담 좀 해주세요! 아무래도 저 요요가 온 것 같아요!”

거대한 찬합통을 바리바리 싸든 채 소리치는 은돈의 얼굴 위로, 닥터 한과 지세의 시선이 동시에 내리 꽂혔다.

“야~ 차은돈 씨! 입으로만 나불대는 아가리 다이어턴줄 알았더니. 웬일이야, 예뻐졌네!”

닥터 한의 말에, 은돈이 초조한 낯으로 급박히 대꾸했다.

“선생님! 제가 오늘 아침 댓바람부터 호박전을 몇 개나 흡입 했는지 아세요!? 무려 사십 개요! 네 개도 아니고 열 네 개도 아닌 사십 개! 저 지금 상태가 심각해요!”

“알았으니 일단 나가 있어. 차례대로 상담 합시다~”

“아뇨, 시간이 없어요! 첫날부터 늦으면 지독현이가 날 가만두지 않을,”

그때였다. 후다닥 들어선 간호사 둘이 은돈을 진료실 밖으로 끌어내기 시작했다.

“선생님! 선생니이이임--!”

간호사에게 양팔을 붙들린 은돈이 다시 쾅! 닫힌 문밖으로 사라짐과 동시에, 닥터 한이 지끈거리는 미간을 주무르며 입을 열었다.

“놀랐죠. 차은돈 씨라고 우리 클리닉 우대고객, 아니 환자인데……”

“알아요.”

순간, 반짝반짝 눈을 빛내며 지세가 대꾸했다.

“응? 알아? 차은돈이를?”

“……알아요. 아주 잘.”

다시 한 번, 확신에 찬 소리로 지세가 말을 이었다.

닥터 한은 그런 그를 응시하다 곧 자세를 바꾸며 진지하게 손깍지를 꼈다.

“좋아요. 아까 했던 얘기나 이어서 해보죠. 여기 누굴 찾으러 왔다구?”

“이제 괜찮아요.”

지세가 은돈이 사라진 곳을 향해 고개를 돌리며 대답했다.

순간 씽긋 웃는 그의 눈가에 개구 진 인디언 보조개가 잡혔다.

“벌써 찾았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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