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뚱녀에서 제2의 전지현이 되기까지.
은돈이 돌아본 곳엔, 키가 몹시 훤칠한…… 그러나 몸무게 역시 상당히 나가 보이는 앳된 얼굴의 남자가 서 있었다.
“누구……?”
경계어린 은돈의 물음에 이십대 초반쯤 돼 보이는 남자는 살짝 미소를 띠며 대답했다.
“저도 오늘 입소했어요. 주세요 누나. 무겁죠?”
“아, 괜찮은데…… 고마워. 아니 고마워요.”
은돈은 자신의 캐리어를 번쩍 들어올리는 남자를 빼꼼 응시했다.
남자의 가슴팍엔 이름대신 별명이 적힌 네임택이 달려있었다.
‘순두부’
“순두부……?”
은돈은 휘적휘적 앞서나가는 남자의 등을 보며 조용히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하얗고 통통한 게, 진짜 물에서 막 건진 순두부같이 생겼네 저놈……”
***
“이곳에 들어 온 이상, 여러분의 푸짐한 몸뚱이는 더 이상 여러분의 것이 아닙니다. 자, 다들 제 발로 지옥에 입성한 것을 환영합니다.”
각종 운동기구가 즐비한 체육관.
‘채식주의자’라고 적힌 단체복을 맞춰 입은 은돈과 입소자들은 단상 위에서 공포분위기를 조성하는 트레이너 군단을 보며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앞으로 여러분은 임의로 정해진 조원들과 함께 혹독한 트레이닝을 받게 될 겁니다. 그럼, 앞으로 나와 자신이 속한 조를 확인합니다. 실시!”
마이크를 잡은 트레이너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자리에 앉아있던 비만군자들이 엉거주춤 몸을 일으켰다.
그들에 질세라, 은돈 역시 조원 명단이 붙어 있는 단상 앞으로 튀어나갔고…… 그로부터 약 삼십분 후. 그녀는 동그랗게 모여 앉은 조원들 앞에서 어설픈 자기소개를 나불대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차은…… 아니, 김밥 햄 입니다. 여기선 이름대신 별명을 쓸 수 있어서 참 좋네요. 하하. 뭐, 여튼…… 제가 여기 오게 된 이유는…… 바람 난 전 남친과, 지 씨 성을 가진 웬 성격 파탄자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당한 모욕을 되갚아 줄 그날까지, 열심히 하겠습니다.”
꾸벅! 은돈이 인사를 하며 다시 자리에 몸을 앉혔다.
뒤이어, 빙 둘러앉은 뚱보들이 차례로 입을 열기 시작했다.
“안녕하세요. 치킨 폭식녀입니다. 저도 김밥 햄님과 마찬가지로 전 남친 때문에 왔구요.”
“전 살이 쪘다는 이유로 번번이 면접에 물먹어서…….”
표준 몸무게 80kg을 아우르는 뚱녀들의 소개가 이어질수록…… 화기애애했던 분위기는 어째 점점 암울해져 갔고, 급기야 여기저기서 공감의 눈물을 훌쩍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때, 은돈의 맞은편에 앉아있던 ‘순두부’남이 슥 몸을 일으켰다.
‘아까 가방 들어준 사람이다…….’
은돈은 반짝이는 시선으로 순두부남을 응시했고, 이내 그가 말랑말랑한 음성으로 자기소개를 하기 시작했다.
“저는 요리사가 꿈이라, 어렸을 때부터 먹는 걸 좋아했어요. 사실 살을 빼야겠단 생각은 딱히 없었는데…… 얼마 전 돌아가신 외할머니의 마지막 소원을 들어드리려고 오게 됐어요. 할머니 소원이 제가 날씬해지는 거였…….”
“어어! 나도 요리사가 꿈이에요!”
일순 순두부남을 향해 손을 번쩍 들어 올린 은돈이 소리쳤다.
순두부남은 그런 은돈을 살짝 응시했고 이내 반가운 인사를 건네려는 찰나, 단상 위에서 트레이너의 기합소리가 울려 퍼졌다.
“자! 지금부터 딱 십 분 주겠습니다! 각자 배정된 합숙실에 짐을 풀고 다시 모입니다! 늦을 시, 일 분 당 런닝 십 분씩 추가합니다!”
헙. 십 분?
순간 당황한 은돈과 입소자들이 출구를 향해 일제히 내달리기 시작했다.
트레이너들은 뒤똥뒤똥 움직이는 그들을 향해 악다구니를 쳐댔고, 그렇게…… 정신을 차릴 새도 없이 지옥 같은 다이어트 캠프의 서막이 오르고 있었다.
***
다원정 프레지던트 룸.
한손으로 비스듬히 턱을 괸 독현이 제 앞에 선 총지배인을 응시했다.
“차은돈은. 여전히 못 찾은 건가.”
“그게…….”
지배인은 독현에게 잘 보이기 위해 덧바른 레드 립을 잘근 깨물며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차은돈 씨를 찾기 위해 일대 원룸부터 고시원, 찜질방까지 뒤졌지만 사장님한테 모욕을 당하고 이 레스토랑을 나간 이후로, 행방이 묘연한 상탭니다.”
“……행방이 묘연해?”
기가 막히다는 듯 독현이 차갑게 되묻자, 지배인이 조심스레 뒷말을 덧붙였다.
“아무래도, 사장님이 그날 너무 심하게 꼽을 주셔서…… 상처받고 잠적해 버린 게 아닐까요?”
……잠적.
몹시 귀에 거슬리는 그 두 음절에, 독현이 노골적으로 미간을 굳혔다.
“당신이 해야 할 일은 사라진 그 여잘 다시 내 앞에 데려오는 거야. 위치추적을 하든, 광고를 내든, 사람을 사든, 어떻게 해서든 차은돈을 찾아. 짤리고 싶지 않으면.”
“물론 시도는 해보겠지만…… 쉽지 않,”
“말 끝났어. 나가봐.”
“네? 아……네.”
총지배인은 자신에게 꽂힌 독현의 날선 시선을 피해 황급히 문고리를 붙들었다.
그녀가 방을 나간 이후, 남겨진 독현은 협탁 위의 크리스탈 잔을 말없이 집어 들었고.
순간 그의 눈앞으로 울먹이던 은돈의 얼굴이 스쳐지나갔다.
‘뚱뚱하면 사람도 아냐? 두구 봐. 박현우나 너처럼 겉모습으로 사람 판단하고 무시하는 것들…… 날 똑바로 쳐다보지도 못할 만큼 예뻐질 거야.’
“…….”
잔뜩 상처받은 얼굴로 소리치던 은돈을 기억에서 지우려는 듯, 독현은 냉정한 표정을 유지하며 물 한 모금을 들이켰다.
동시에 그의 목울대가 위태롭게 일렁였다.
그는 지금 자신의 마음이 이토록 혼란스럽고 복잡한 이유가 은돈에 대한 일말의 죄책감 때문이라는 것을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상처 받았다고. 그 여자가.”
탁! 신경질적으로 물 잔을 내려놓은 독현이 곧 독단적이고 아집 어린 혼잣말을 튕겨냈다.
“그럼 돈으로 보상해주면 되잖아. 니가 상처받은 만큼. 아니, 그 이상의 대가를 지불 할 테니까……. 전화나 피하지 말고 받아 차은돈.”
***
“저기, 순두부님. 우리 여기 들어온지 얼마나 됐죠?”
체육관. 장장 1시간 30분 째 런닝 위에서 흐느적대던 은돈이 가까스로 고갤 돌려 순두부남에게 물었다.
“오늘로 정확히 이주 째요. 누나, 힘들죠? 목말라요? 물 갖다 줄까요?”
은돈은 순두부남의 호의에 대꾸할 기력도 없다는 듯 손사래를 쳐보였다.
제기랄. 고작 2주라니. 이젠…… 이젠 정말이지 지쳐버렸다.
매일 아침 눈을 뜨자마자 이어지는 혹독한 강도의 운동들, 마치 절밥을 연상케 하는 풀떼기 식단들, 거기에 뚱녀들을 런닝 위로 몰아 부치며 희열을 느끼는 저 뭣 같은 트레이너들…….
“하지만…….”
하지만, 그 중에서도 무엇보다 은돈을 힘들게 하는 건 바로 매일 아침 불시에 이뤄지는 퇴소자 발표의 시간이었으니.
“다들 런닝 위에서 내려오세요!”
아니나 다를까.
오늘도 체육관의 문을 쾅 걷어차며 등장한 이 캠프장의 실세, 박 팀장.
그의 손에 들린 퇴소자 명단을 보며, 은돈을 비롯한 입소자 전원이 후다닥 런닝 위에서 내려섰다.
“대충들 모인 거 같으니 오늘의 퇴소자를 발표하도록 하죠. 흠…… 치킨 폭식녀님?”
박 팀장의 호출에, 맨 구석에 섰던 뚱녀 하나가 겁에 질려 손을 들었다.
“저, 저요?”
“어제 트레이너들 몰래 식당에 포도씨유 반입해서 닭 가슴살 튀겨 드셨죠?”
“아, 아닌데…….”
“거짓말 마! 식당에서 당신이 깜빡 두고 간 복대가 발견됐어! 뭐해? 끌고나가!”
박 팀장의 외침에, 근육쟁이 트레이너들이 치킨 폭식녀를 밖으로 끌어내기 시작했다.
“제, 제발 한 번만 봐주세요! 다신 안 그럴게요! 제발--!”
은돈은 몸부림치며 절규하는 치킨 폭식녀를 공포에 질려 바라보다, 저도 모르게 옆에 섰던 순두부남의 손을 덥석 붙들었다.
“!?”
놀란 순두부남은 그런 은돈을 커다란 토끼 눈으로 바라보았고,
“아! 미, 미안해요.”
은돈은 재빨리 순두부남의 손을 놓으며 겸연쩍게 웃어보였다.
이 와중에도 끌려 나가지 않으려는 치킨 폭식녀와, 끌어내려는 트레이너들의 고성이 들려왔다.
“…….”
한동안 이어지는 소란 속에서, 순두부남은 말없이 은돈의 온기가 묻은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때, 그의 핸드폰으로 메시지 한통이 날아들었다.
-이지세. 너 집안 망신시키려고 작정했니? 학교는 아주 때려 칠 거야? 유학 잘 하다말고 거긴 왜 들어가 고생이야? 엄마가 말했지? 그런 품격 없는 곳에서 격 떨어지는 인간들이랑 어울리다 보면…….
순두부남은…… 아니 지세는, 길고 긴 문자를 눈으로 훑다 단호히 핸드폰을 꺼버렸고, 다시 제 옆에 선 은돈을 응시했다.
“화, 화이팅!”
은돈은 눈이 마주친 그를 향해 다소 수줍은 화이팅을 외쳐보였고…….
동시에 지세는 그런 그녀가 귀엽다는 듯 살짝 미소를 머금었다.
***
보름 후.
‘캠프장’이라 쓰고 ‘지옥’이라 읽는다는 이곳에 뚱보들이 입성한지도 어느덧 한 달째.
식당에 앉은 은돈은 퀭한 눈으로 식판위의 상추와, 상추, 그리고 상추를 내려다보았다.
“염병! 또 풀떼기야!? 더 이상은 못 참아! 스님도 이거보단 잘 먹어!”
그때 멀지않은 곳에서 한 뚱녀의 분노에 찬 괴성이 들려왔다. 그러나 은돈은 아랑곳 않고 천천히 상추를 음미하기 시작했다. 이제 이정도 소란쯤은, 그녀에게 아무것도 아니었다.
“누나.”
그때, 곁으로 다가온 지세가 맞은편에 몸을 앉혔다.
“왔어요? 어라……? 순두부님 살 빠졌죠? 요즘 얼굴이 꽤 갸름해진 것 같은데.”
“네? 아닌데…….”
은돈은 부끄러워하는 지세를 보며 저도 모르게 흐뭇한 아빠 미소를 지었다.
“순두부님은 젖살만 좀 더 빼면 여자들한테 완전 인기 폭발일거에요. 상냥하지, 귀엽지, 키 크지, 거기다 본판은 완전 서강준 판박이…….”
순간, 신나서 조잘대던 은돈이 입을 다물며 지세를 응시했다.
순두부처럼 희여 멀건 했던 그의 두 뺨이…… 어쩐지 홍조로 붉게 물들어 있다.
“저, 여자한테 그런 말 처음 들어요.”
“풉.”
은돈은 남동생처럼 귀여운 그의 모습을 보며 살짝 웃음을 터뜨렸다.
“내가 장담하는데요. 순두부님 살 빠진 모습에 아마 안 넘어갈 여자가 없을걸요.”
“…….”
은돈의 말에, 잠시 멍해있던 지세가 일순 용기를 내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리곤 뭔가를 말하려는 순간-
식당 안으로 공포의 박 팀장이 들이닥쳤다.
“여기 주목하세요! 어젯밤 누군가 우리의 공용 냉장고를 싹 털어간 모양입니다. 냉장고에 채워둔 자물쇠가…… 무려 뺀찌로 뜯겨 있더군요…….”
“세상에, 뺀찌라니…….”
“감히 어떤 악력 좋은 년이 공용 냉장고에 손을 대?!”
갑작스럽게 날아든 비보에 식당 안은 어느새 술렁거림으로 가득 찼고, 은돈 역시 놀란 눈으로 혀를 내둘렀다.
그런데 그때, 맞은편 대각선 자리에서 쨍강- 젓가락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이구야. 너구나…….’
은돈은 꽃돼지라는 별명을 가슴에 단 중딩 소녀를 응시했다.
누가 봐도 냉장고 털이범으로 보이는 소녀는 박 팀장의 서슬에 눌려 어깨를 파르르 떨고 있었다.
“쯧. 얼마나 배고팠으면…… 저 어린 것이…….”
은돈은 측은지심의 눈길로 중딩 소녀를 바라보았고 그때 박 팀장의 무시무시한 외침이 다시 한 번 식당을 뒤흔들었다.
“지금부터 셋 셀 동안 자수하면, 특별히 냉장고 수리비는 퉁 치고 조용히 퇴소조치 하겠습니다.”
인간미 없는 그의 말에 뭇 뚱녀들의 우- 야유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거나 말거나, 박 팀장은 강단 있게 하나 둘 셋을 외쳤고, 그럼에도 범인이 나타나지 않자 지그시 미간을 좁혔다.
“훗. 순순히 자수할리가 없죠. 여러분, 난 이런 불상사가 생길 줄 진즉 알고 있었어요. 그래서! 지난주 식당에 CC-TV를 설치했죠!”
짜잔, 하며 박 팀장이 CC-TV를 녹화한 공씨디를 들어보였다.
동시에 화들짝 놀란 중딩 소녀가 울먹이며 고개를 떨궜고, 은돈은 애써 그 모습을 무시하기 위해 시선을 돌렸다.
안 돼 차은돈. 제발 어쭙잖게 나서지마.
여기서 니가 정의의 사도인척 해봤자 돌아오는 건 개뿔도 없어.
“자, 이래도 손 안 듭니까? 다시 말하지만 지금 자수하면 아무 책임 묻지 않고 조용히 퇴소조치 하겠습니다.”
재차 이어지는 박 팀장의 엄포에, 눈물을 머금은 중딩 소녀가 천천히 자신의 오른 손을 들어 올렸다. 동시에…… 눈을 질끈 감은 은돈 역시 손을 들며 외쳤다.
“저! 실은 제가 그랬…….”
급작, 말을 잇던 은돈이 움찔하며 입을 다물었다.
이어서 그녀는 자신의 손을 아래로 끌어내리며 앞을 막아선 지세를 바라보았다.
“냉장고…… 제가 그랬는데요.”
모두가 숨죽인 가운데, 지세는 담담한 한마딜 튕겨냈고.
뒤이어 박 팀장의 냉랭한 시선이 그에게 내리꽂혔다.
“순두부님? 의외네요. 매사에 성실한 모습이 맘에 들었었는데. 아쉽지만 퇴소조치 하겠습니다. 짐 싸세요.”
지세는 박 팀장의 말에 살짝 고갤 끄덕였고, 이후…… 모두가 그를 두고 이러쿵 저러쿵 입방아를 찧는 가운데, 오직 은돈만이 벙 찐 얼굴로 입을 다물어야 했다.
***
“저기……! 아까 대체 왜 그런 거에요?”
백 팩을 멘 채 캠프장을 벗어나는 지세의 앞을 막아서며, 은돈이 언성을 높였다.
“그냥 이렇게 가지말구요. 아까 왜 나 대신 뒤집어쓴 거냐구요.”
그녀의 물음에, 자리에 멈춰 선 지세가 씽긋 웃어보였다.
“그러는 누난, 왜 그 중학생 대신 뒤집어쓰려고 했는데요.”
“그건! 그건…… 그냥.”
“저도 그냥요. 이유 같은 거 없이, 그냥.”
순간 은돈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붕어처럼 입을 뻐끔댔고, 그녀가 자신에게 몹시 미안해하고 있음을 눈치 챈 지세가 먼저 말을 이었다.
“어차피 여기서 나가려고 했어요, 저. 운동이야 어디서든 맘만 먹으면 할 수 있는 거니까. 실은 학교도 마쳐야 하고. 집에서도 난리에요. 얼른 들어오라고.”
“그, 그래요? 그렇구나…….”
은돈은 자신을 향해 웃어주는 지세를 보며 한참 만에 다시 운을 뗐다.
“그럼…… 잘 가요 순두부님. 나가서도 열심히 해요. 아니. 열심히 해. 으, 응원할게.”
“응. 잘 있어요.”
지세는 자신에게 멋쩍게 손을 흔들어주는 은돈을 보며 발길을 돌렸고, 곧 뭔가가 떠오른 듯 아, 하며 자리에 멈춰 섰다.
“누나. 내가 날씬해지면 여자들이 좋아할 거라는 말. 진짜에요?”
“응? 아, 응. 당연하지!”
“그럼 그 말…… 누나한테도 유효해요?”
“어……?”
“내가 날씬해지면…… 누나도 나한테 관심 가져줘요?”
순간 한 치의 흔들림 없이 순수한 눈빛으로 물어오는 지세를 보며, 은돈은 멍하니 입을 벌렸다. 동시에 지세는 그녀를 향해 살짝 웃어보였다.
“그럼…… 또 봐요, 누나.”
의미심장한 한마디를 뱉은 후, 그가 눈앞의 돌계단을 내려섰다.
“……잘 가.”
은돈은 시야에서 사라지는 지세를 향해 나직한 인사를 중얼거렸고, 이어서 뭔가를 결심한 듯 불끈 주먹을 거머쥐었다.
“나, 이제 진짜 열심히 할 거야. 열심히 해야만 해.”
그게, 날 대신해 캠프장을 퇴소한 저 아이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니까…….
어느 때보다 진지한 다짐을 하며, 은돈은 다시 캠프장을 향해 돌아섰다.
그리고…… 확실히 그날을 기점으로 그녀의 생활 패턴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은돈은 남들보다 덜 먹고, 덜 자며, 두 시간씩 일찍 기상해 런닝머신에 올랐고 행여라도 폭식을 한 날엔 새벽까지 광란의 에어로빅을 추며 칼로리를 불태웠다.
덕분에, 얼마 지나지 않아 푸짐했던 그녀의 몸매는 눈에 띄게 슬림해지기 시작했다.
“아냐. 이 정도론 부족해.”
은돈은 거울에 비친 자신의 실루엣을 보며 만족할 수 없다는 듯 부르튼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는 힘이 들 때마다 박현우와 독현의 말을 회상하며 운동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차은돈 넌 여자 몸무게 77키로가 말이 된다고 생각 하냐?’
‘차은돈. 당신도 생각이 있다면 알거 아냐. 여자로서 자신의 위치와 지위가 어느 정도로 형편없는 지를.’
‘못생기고 뚱뚱한 널 원하는 레스토랑을 찾기가 쉽진 않을 거야. 난 너 같은 여잘 고용할 생각이 없어. 그러니까…… 분수를 좀 알아.’
‘분수를 좀 알아’
‘분수를 좀 알아’
“으아아악---!”
귓가에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는 독현의 음성에, 은돈이 괴성을 지르며 미친 듯이 사이클 속도를 올렸다.
기다려 지독현. 여길 벗어나자마자…… 젤 먼저 당신부터 쓱싹쓱싹 갈아 마셔 줄게!
***
두 달 후.
다원정의 룸 테이블.
자신의 전담 요리사를 뽑기 위한 ‘열두 번째’ 면접을 앞둔 독현이 무료한 낯으로 벽시계를 응시하고 있었다.
“사장님 오늘따라 멍해 보이십니다?”
박 할매의 말에 그는 대꾸조차 않은 채 심드렁히 시선을 내리 깔았다.
할매는 그런 독현이 안타까워 다시 입을 열었다.
“기운 차리세요. 오늘 면접에선 틀림없이 제 후임을 찾을 수 있을 겁니다.”
“……글쎄.”
글쎄, 하며 허무한 조소를 머금는 독현의 얼굴에선 아무런 기대나 희망도 찾아 볼 수 없었다. 박 할매는 그런 독현에게 은돈을 찾는 것은 그만 둔거냐고 물으려다, 입을 다물었다.
당장 면접을 앞두고 그를 자극하지 않는 편이 좋았다.
어느덧, 이 레스토랑엔 ‘식이장애’에 버금가는 금기어가 하나 더 늘어나 있었다.
그 이름하야 차은돈.
“사장님. 준비 된 음식, 세팅 하겠습니다.”
그때, 총지배인이 룸 안으로 들어서며 말했다. 독현은 무심한 얼굴로 살짝 고개를 끄덕였고, 이윽고 그의 앞으로 두 가지의 다른 요리가 세팅 됐다.
“첫 번째 요리는 A요리사의 도미면입니다. 도미를 삶은 육수에 당면을 넣어 먹는,”
“치워.”
총지배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독현은 음식의 비릿한 냄새에 고개를 비틀었다.
지배인은 서둘러 첫 번째 접시를 치우고 두 번째 요리를 독현의 앞으로 밀어놓았다.
“다음 요리는, B요리사의 꽃게 표고버섯전입니다. 소고기 대신 꽃게 살을 발라 넣은…….”
이번엔 아무도 자신의 말을 자르지 않았지만, 지배인은 저도 모르게 또 다시 입을 다물었다. 이럴 수가. 독현이 버섯 전을 집어 들었다. 아니, 집어 든 데서 그치지 않았다.
무려 직접 입에 넣고, 천천히 씹고, 삼키기 까지 했다……!
“사, 사장님 괜찮으세요? 역하지 않으세요?”
떨리는 지배인의 물음에, 독현이 날카로운 시선을 치켜들며 접시를 가리켰다.
“이 사람…… 내 방으로 데려 와.”
***
십분 후.
똑똑. 노크소리와 함께 프레지던트 룸의 문이 열리며 총지배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사장님. B요리사, 안으로 들일까요.”
“들여보내.”
회전의자에 앉아있던 독현이 짤막한 한마딜 튕겨냄과 동시에,
또각, 또각, 또각.
도도한 하이힐 소리와 함께 한 여자가 룸 안으로 들어섰다.
“…….”
독현은 특유의 드라이 한 눈빛으로 제 앞에 선 여자를 응시했다.
가녀린 어깨 위로 흘러내린 여자의 긴 웨이브 머리.
섹시한 몸매를 가감 없이 드러내는 강렬한 핫레드 원피스.
매끈한 각선미를 더욱 돋보이게 만드는 지미추의 블랙 펌프스 힐까지.
옆에 선 총지배인조차 질투 섞인 시선을 떼지 못할 정도로 그녀는 아름답고 매혹적인 외모를 갖추고 있었다.
“당신은 나가있어.”
일순, 여자를 바라보던 독현이 살짝 고개를 비틀어 총지배인에게 말했다.
“아, 네.”
잠시 후. 탁, 하고 문이 닫히며 지배인이 사라지자 독현이 몸을 일으켜 여자를 향해 다가섰다.
‘오랜만이야…… 지독현.’
방안 가득 묘한 정적이 흐르는 가운데…… 여자가 눈앞의 독현을 똑바로 응시했다.
지금 그녀의 머릿속엔 정확히 석 달 전, 자신이 이 레스토랑에서 받았던 수모들이 아련하게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여자가, 아니, ‘은돈’이…….
그동안 수천 번도 더 연습했던 시건방진 표정으로 독현에게 첫인사를 건넸다.
이윽고 독현 역시 그런 은돈을 향해 냉소적인 첫마딜 던졌다.
“이름이 뭐지.”
“박……봉곤입니다만.”
이런 제기랄. 좀 더 그럴싸한 이름을 대는 건데.
은돈은 형편없는 자신의 작명센스를 저주하며 애써 고고한 표정을 유지했고,
그 순간-
그녀를 뚫어져라 응시하던 독현의 입술이 나직이 벌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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