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너 내꺼 해라가 아닌, 너 내 밥 좀 해라
“둘이…… 어떻게 같이 와?”
맞은편에 다정히 몸을 앉힌 현우와 소진을 보며, 은돈이 가까스로 말문을 열었다.
“어, 그게…….”
현우는 말끝을 흐리며 멘붕에 빠진 은돈을 빼꼼 응시했다.
젠장. 일이 이렇게 될 줄 몰랐는데…….
그는 오늘 소진에게 비밀로 하고 몰래 은돈을 만날 생각이었다.
당장 은돈이라는 이름의 ‘지갑’이 필요했기 때문에…….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파스타집 앞에 미리 대기 중이던 소진에게 덜미를 붙잡히고 말았다.
“은돈아.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됐다. 미안…….”
현우가 고개를 푹 숙인 채 말했다.
“미안하다니…… 나한테 왜 사과하는 건데……? 니들 뭔데?”
흡사 '사랑과 전쟁'을 방불케 하는 눈앞의 광경에…… 은돈은 떨리는 소리로 물었고, 이번엔 현우 대신 소진이 입을 열었다.
“갑작스럽겠지만…… 저희 만난 지 벌써 이백 일 정도 됐어요. 그동안 언니한테 몇 번이나 말하려고 했는데 입이 떨어지질 않아서. 미안해요.”
“야, 임소진…… 무슨 그런…… 너 미친 거 아니니? 왜 이렇게 당당해?”
은돈은 너무도 태연한 소진의 태도에 경악을 금치 못하며 쏘아 붙였고, 동시에 현우의 눈썹이 꿈틀대며 위로 치솟았다.
“야. 미친 거 아니냐니. 상황이 이렇더라도 말은 가려서 하자.”
이 판국에 소진을 감싸며 눈을 부라리는 현우를, 은돈은 멍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오빠. 잠깐 자리 좀 비켜줄래요? 내가 은돈 언니 설득해 볼게.”
설득……? 도대체가 뭘 설득한단 말인가.
내 뒤통수를 후려치고 둘이 붙어먹은 걸 여차저차 어기영차, 정당화시켜 보겠다고?
은돈은 떨리는 손으로 물컵을 집어 단숨에 들이켰다.
그 사이, 현우는 소진의 부탁대로 몸을 일으켜 가게 밖으로 나갔고 여자 둘만 남은 테이블 위로는 곧 숨 막히는 정적이 찾아들었다.
“대체…… 언제부터 둘이 그렇고 그런 사이가 된 거야?”
한참만에 먼저 침묵을 깬 건 은돈이었다.
“죄송해요 언니. 죄송하다구요.”
소진이 다리를 꼰 채 화장을 고치며 진심 없는 사과를 건네 왔다.
그제야 은돈은 소진의 입술에 자신과 똑같은 핫핑크 립스틱이 발라져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빌어먹을……. 오늘 아침 이년한테 립스틱을 빌려 쓰는 게 아니었는데.
소진은 비참한 표정의 은돈을 보며 살짝 우월감에 젖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언니. 이 립스틱 좋죠? 일부러 체리 향 나는 걸루 샀어요. 현우오빠가 이 향을 좋아해요. 자기가 먹었을 때 제일 맛이 좋다나.”
“…….”
정신 차려 차은돈. 이년은 예삿년이 아니야. 대학 다닐 때도 저 청순한 얼굴로 예비역들을 숱하게 꼬여내지 않았던가.
침착하자. 그래…… 침착해.
“박현우랑…… 입술도 부비 댔나봐?”
“입술만 부비 댔게요? 에휴. 언니 너무 순진한 거 아니에요? 좀 더 세상을 영악하게 살 필요가 있지 않…….”
촤르륵-!
순간, 이성을 잃은 은돈이 앞에 놓인 빈 물 잔을 소진에게 끼얹었다.
동시에 잔 안에 남아있던 얼음조각들이 후두둑, 소진의 면상 위로 날아갔다.
“꺄! 뭐하는 짓이야?!”
“뭐하는 짓!? 그러는 너야말로 뭐하는 짓이냐?! 뭐 둘이 이백 일을 만나? 오냐 그래, 너 오늘 박현우랑 이백 일 기념으로 나한테 이백 원 받고 이백 대 처 맞아봐, 이 도우너 뺑코 같은 년아--!”
은돈은 격앙된 톤으로 소진을 향해 외쳤고, 그즈음 창밖의 현우가 물고 있던 담배를 퉤 뱉으며 가게 안으로 뛰어들었다.
“차은돈, 너 미쳤어?! 아 진짜 왜 그러냐!?”
테이블로 다가온 현우가 다짜고짜 은돈을 향해 소리쳤다.
그 모습에 기세가 등등해진 소진은 옆 테이블의 오렌지 주스잔을 집어 은돈의 면상 위로 흩뿌렸다.
촤악……! 싯누런 액체가 은돈의 얼굴을 타고 후두둑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너도 맞아보니까 어때? 기분 드럽지? 하여간 그 덩치에 성질머리까지 더러워요. 니가 그러니까 남자한테 까이는 거야. 알아?”
은돈은 자신을 저격하는 소진의 모습을 젖은 머리칼 새로 바라보았다.
순간 삐-하고 귀가 먹먹해지는가 싶더니 마치 음소거 버튼을 누른 듯 가게안의 모든 소음이 한꺼번에 사라졌다.
젠장……. 이 수모를 당할 줄도 모르고 등신처럼 박현우와의 재회를 꿈꾸다니…….
‘죽구 싶다, 차라리…….’
눈앞에서 거들먹거리는 현우와 소진을 보며, 은돈은 가만히 시선을 떨궜다.
ㅡ딸랑~
그때, 종소리와 함께 가게 입구로 한 남자가 들어섰다.
잠시 주변을 휘 둘러보는가 싶더니 곧 자신을 발견하고 뚜벅뚜벅 다가오는 그 남자를,
아니 독현을…… 은돈은 말없이 바라보았다.
……이상하다.
물속에 잠긴 듯 사방이 고요한데, 독현이 다가오는 구둣발 소리만큼은 또렷하게 귓전을 울리고 있었다.
그리고 머잖아 그가 테이블 앞에 멈춰 서자, 거짓말처럼 귀가 트이며 가게 안의 소음이 한 번에 밀려들기 시작했다.
“야 차은돈! 너 내 말 듣고 있어? 일단 나가자고! 여기서 쪽팔리게 기집애들끼리 머리채 붙들 거 아니면!”
퍼뜩 정신이 든 은돈은 자신의 팔을 마구잡이로 당기는 현우를 바라보았다.
아니, 사실 그녀의 시선은 현우의 등 뒤에 잠자코 서있는 독현을 향해 있었다.
“당신한테 할 말이 있어서 왔어.”
박현우 따윈 안중에도 없다는 듯, 독현은 오직 초라하게 젖은 은돈을 보며 입을 열었다.
은돈은 그를 보며 살짝 당혹감을 느꼈다.
“저…… 할 말이 뭔지 대충 짐작은 가는데요……. 보다시피 지금 상황이 이래서요. 죄송하지만, 얘긴 다음에…….”
“다음?”
순간 독현의 눈썹이 위를 향해 치솟았다.
“다음은 없어.”
그는 냉정히 말을 이으며 현우에게 붙잡힌 은돈의 팔을 낚아챘다.
덕분에 한발 뒤로 밀려난 현우가 고개를 돌렸고, 독현은 눈이 마주친 그를 향해 건조한 한마디를 내뱉었다.
“니가 다음에 해.”
“뭐……? 뭐야 이 새낀?”
“지독현?”
당연한 걸 왜 묻느냐는 듯 독현은 고고한 자태로 제 이름을 튕겨냈다.
미치도록 뻔뻔한 그의 태도에 현우는 황당하다는 듯 두 눈을 꿈뻑였다.
“누, 누가 이름 물어봤냐!? 야, 차은돈! 뭐하는 새끼냐 이거?”
안되겠다 싶었는지, 현우가 은근슬쩍 타깃을 바꿔 은돈에게 언성을 높였다.
“…….”
은돈은 그런 현우를 노려보다, 시선을 올려 독현을 응시했다.
가게 안, 뭇 여성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고 있는 그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범접할 수 없는 묘한 아우라를 내뿜고 있는 그를.
……내가 미친 걸까.
왠지, 이 거지같은 타이밍에 나타나준 저 남자가 든든한 지원군처럼 느껴진다.
고작 박현우 따위와 편을 먹고 기세등등해 하는 임소진 앞에서, 나도 내 편이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다.
물론 지독현 이 남자가 진짜 아군은 아니지만……그래도…….
“지독현 씨. 나한테 할 말 있어서 왔다 그랬죠? 그럼 우리 자리부터 옮기죠. 여기서 굳이 이런 것들이랑 섞일 필요 없잖아요?”
몸을 일으킨 은돈이 조심스럽게 독현의 팔짱을 끼며 말했다.
“…….?”
독현은 살짝 미간을 좁힌 채 자신의 팔에 매달린 은돈을 내려다보았다.
평소였다면 이 불쾌한 손길을 당장에 뿌리쳤겠지만, 뭐랄까.
묘한 기분이 들었다.
샛노란 주스를 흠뻑 뒤집어쓴 채 센 척을 해보지만, 사실은 어깨를 가늘게 떨고 있는 이 뚱녀의 존재가.
거슬리는 동시에 신경이 쓰이는 건 왜일까.
이건 일말의 동정심? 연민?
……나한테도 그런 감정이 남아 있었나?
독현은 살짝 시선을 비틀어 은돈과 대치하고 선 현우와 소진을 응시했다.
알만하군. 딱 봐도 저 남자에게 놀아난 게 분명했다.
독현은 다시금 제 옆에 선 은돈을 내려다보았다.
“가…… 가요 우리.”
그녀는 여전히 독현의 팔짱을 낀 채, 후들거리는 목소리로 말을 잇고 있었다.
독현은 짤막한 한숨과 함께 그런 은돈을 제게서 밀어냈다.
그리곤 곧 다시 그녀의 팔목을 고쳐 잡고 거침없이 입구로 향하기 시작했다.
“야. 차은돈. 뭐하자는 거냐 지금?”
“…….”
“차은돈! 어디 가냐고! 그 새끼 뭐냐고!”
독현과 함께 멀어지는 은돈의 등 뒤로 현우의 주제넘은 외침이 들려왔다.
은돈은 가소롭다는 듯 그런 구남친을 쏘아보며 가게를 빠져나갔고, 남겨진 현우와 소진은 왠지 모를 굴욕감에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한 채 자리를 지켜야 했다.
***
페라리 안.
핸들에 양팔을 올려둔 채 생각에 잠겨있던 독현이 아까부터 조수석에 뻘쭘하게 앉아있는 은돈을 힐끗 응시했다.
그녀의 젖은 머리칼에선 여전히 시큼한 주스 향이 풍기고 있었다.
순간 독현은 조수석 콘솔박스 안에 들어있는 손수건을 떠올렸다.
“…….”
‘친히’ 손수건을 꺼내 은돈에게 닦으라고 건네줘야 하는 것일까.
순간적으로 갈등하던 독현은 곧 코웃음을 치며 가볍게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잘 알지도 못하는 여자에게, 심지어 못생기고 뚱뚱한 여자에게 그런 과한 친절을 베풀 필요는 없었다.
“고마워요.”
그때. 뜬금없는 은돈의 한마디가 들려왔다.
독현은 의아한 듯 눈썹을 찌푸렸고, 은돈은 그를 향해 담담히 말을 이었다.
“실은 아까…… 그쪽 덕분에 비참한 순간에서 도망칠 수 있었거든요. 있어보이게 도망치기가 쉽진 않은데 덕분에 살았네요. 이거 받으세요.”
“……?”
독현은 대뜸 지갑에서 꺼낸 삼만 오천 원을 자신에게 건네는 은돈을 바라보았다.
“이게 뭐지?”
“지난번에 제가 망가뜨린 구두랑 옷 수선비에요. 물론 턱없이 모자르지만…… 일단 지금 가진 게 이거뿐이라서…… 나머진 기간을 두고 갚을…….”
“지금…… 장난해?”
“자, 장난으로 느껴질 만큼 이게 그쪽한텐 푼돈인가 본데요. 나한텐 생사가 걸린 금액이거든요. 어제 인터넷에 지독현 씨 수트 가격 검색해봤는데. 워…… 전 첨에 0이 너무 많이 붙었길래 인터넷 오류난줄 알았잖아요…….”
독현은 연신 뻘소리를 지껄이는 은돈을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응시했다.
“누가 너한테 돈 달래?”
“?? 수선비 때문에 날 찾아온 게 아니었어요?”
“……어이가 없군.”
은돈은 허탈해하는 독현을 어벙한 얼굴로 바라보며 물었다.
“그럼 오늘…… 왜 온 건데요? 할 말은 뭐였구요……?”
그녀의 물음에, 독현의 입술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벌어졌다.
“너. 내 밥 좀 해.”
“……네?”
이게 갑자기 뭔 개떡 오방떡 같은 소리여……?
은돈은 벙찐 얼굴로 눈앞의 독현을 응시했다.
저토록 섹시한 입술로…… 너 내꺼 해도 아닌, 너 내 밥 좀 해. 라니…….
“저기요. 일단 좀 당황스럽네요. 갑자기 밥을 하라니…… 그게 무슨…….”
은돈은 황당하다는 듯 말을 잇지 못했고, 그 모습을 주시하던 독현이 고갤 돌려 정면을 응시했다.
“그동안 할매를 대신 할 여잘 찾고 있었어. 안타깝지만, 내가 찾는 조건에 가장 부합하는 게 너야. 지난 몇 달간 내가 삼켰을 때 역하지 않았던 유일한 음식은…… 니가 만든 잡탕뿐이었으니까.”
“잡탕? 저기 잠깐만요. 혹시 그 잡탕이라는 게…… 일전에 밥차 행사장에서 그쪽이 뒤집어썼던, 내 콩나물 해장국을 말하는 건가요?”
“그래.”
“아…….”
그래서 그날 해장국의 출처에 대해 집요하게 물었던 건가.
‘이거…… 이 국, 니가 만들었어?’
‘이 국, 누가 만들었냐고 묻잖아.’
행사장에서의 독현을 떠올리며 은돈은 비로소 이해가 간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요. 할매를 대신할 여자를 찾는다느니, 역하지 않은 유일한 음식이라느니…… 나 지금 그쪽이 하는 말 하나도 못 알아듣겠거든요. 그래서,”
“그래서.”
독현은 지지부진하게 이어지는 대화가 맘에 들지 않는다는 듯 고압적인 자세로 은돈의 말을 잘랐다.
“어차피 너한테 선택권은 없어. 널 고용할지 말지, 옆에 둘지 말지는 전적으로 내가 결정해.”
“? 아니 뭐 그런…….”
은돈은 오만하게 턱을 치켜 든 그를 어이없이 바라보았다.
“지독현 씨. 미안한데요. 방금 그 제안은 못들은 걸루 할게요. 그럼 전 이만…….”
독현을 향해 꾸벅, 고개를 숙여 보인 은돈이 그대로 문손잡이를 붙들었다.
독현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도어락 버튼을 눌렀고, 동시에 철컥 소리를 내며 조수석의 문이 잠겼다.
“아나…… 유치하게 이러지 말죠?”
은돈이 잠긴 문손잡이를 찰칵찰칵 흔들며 뾰족하게 말을 이었다.
그럼에도 독현은 차가운 낯으로 여전히 정면을 주시할 뿐이었다.
“대답해. 할 거야 말거야?”
“아니, 갑자기 이러시면 제가 곤…….”
“곤란한 건 나야. 누가 봐도 소세지 성애자 같이 생긴 널 하루 24시간 옆에 달고 살아야 하는 내 심정이 지금 어떤지 알아?”
“소…… 뭐? 소세지 성애자? 아니 뭐 그딴 개코같은 말이 다 있어!?”
사뭇 진지한 얼굴로 자신을 깎아내리는 독현을 향해, 은돈이 빽 소리를 내질렀다.
“당신! 지금 실수하는 거야! 대체 나에 대해 뭘 안다고 아까부터 반말에, 명령조에, 밥을 하라느니 말라느니,”
“이름, 차은돈.”
급작스레 은돈의 말을 가로 챈 독현이 지난 사흘간 외우다시피한 그녀의 신상정보를 읊기 시작했다.
“나이 스물여섯. 키 164센티에 몸무게 77키로. 출생지 충청남도 홍성군. 8월 24일생. 혈액형 A형. 별자리 처녀자리.”
일순, 말을 잇던 독현이 매서운 시선으로 은돈을 응시했다.
“운이 없군. 지금도, 앞으로도 영원히 처녀로 늙어죽게 생겼는데…… 별자리조차 이 모양이란 게.”
“뭐요? 내 별자리가 어디가 어때서? 그리고 내가 아직 처년지, 진즉에 닳고 닳았는지 당신이 어떻게 알아!?”
“글쎄. 모르는 게 바보 아냐?”
“이…… 이…….”
은돈은 굴욕감에 파르르 떨며 말을 잇지 못했고, 그 사이 눈빛을 차분히 가라앉힌 독현이 다시 말을 이었다.
“S대학교 호텔 조리과에 재학 중이던 4년 전. 유학길에 오르려다 친부의 사업 실패로 날개가 꺾였지. 그 후 간신히 졸업장만 딴 채 사회로 방출됐고, 이어진 친부의 잠적으로 지금은 어머니와 힘겹게 파리 목숨을 부지하고 있는 중이야.”
“……뭐야 당신…… 뭔데 남의 뒤를 밟아?”
독현은 비웃음이 서린 얼굴로 조수석의 은돈을 응시했다.
그는 자신의 한마디 한마디에 얼굴이 붉어졌다 하얗게 질렸다 하는 그녀를 보며 묘한 재미를 느끼고 있었다.
“몇 년을 가난에 치여 찌질하게 살았으면 돈 좋아할 거 아냐. 내가 너 좋아하는 돈. 분에 넘치도록 쓰게 해줄게. 내 옆에서 밥만 해.”
그놈의 밥, 밥, 밥!
은돈의 두 눈에 화르륵 불길이 치솟았다.
“재벌 3세라더니, 이건 뭐 꼭 드라마 보는 것 같네. 당신한텐 나 같은 소시민 뒷조사 따윈 일도 아닌 가봐? 참 쉽네?”
“뒷조사 말고 더한 짓도 쉬운데. 보여줘?”
“됐고! 당신 사람 잘못 봤어. 내가 고작 돈 몇 푼에 존심도 없는 밥순이로 전락할 것 같아? 나 그런 사람 아니야!”
은돈의 당찬 한마디에, 독현은 이해가 안 간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넌 마치…….”
“……?”
“마치, 돈 몇 푼에 영혼도 팔게 생겼는데.”
“뭐, 뭐……!?”
독현의 독설에 마빡이 튄 은돈은, 그러나 받아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사실 말이 나와 말이지, 영혼이 다 뭐당가.
돈 몇 푼만 쥐어주면 각설이 품바 분장을 하고 지하철에서 감자 깎는 칼이나 구두 주걱을 팔 각오도 되어있는 그녀였다.
“하, 진짜 사람을 뭘로 보고! 여하튼 난 갈 테니까 이 문이나 열어……!”
은돈은 정곡을 찔린 민망함에 애꿎은 문손잡이를 격렬히 잡아 흔들었고, 이내 찰칵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동시에 차에서 내려선 은돈의 입에서 푸하, 차가운 공기가 뿜어져 나왔다.
“그럼 살펴가세요 재벌 3세분!”
그녀는 운전석을 향해 비꼬듯 인사를 건넸고 뒤이어 차문을 닫으려는 순간, 독현이 서늘하게 입을 열었다.
“내가 뭔가를 가져야겠다고 결심했을 때…… 거기에 이의를 단 사람은 없었어. 지난 29년간 단 한 명도.”
“뭐, 뭐야? 그래서요?”
“난 가지고 싶은 건 무조건 손에 넣어. 그게 돈이든, 여자든. 뭐가 됐든.”
“와우~대단하시네요? 그래서 이번엔 뭐가 그렇게 손에 넣고 싶으실까?”
비아냥거리며 물어오는 은돈을, 독현은 빤히 바라보았다.
뒤이어 그의 입술이 야트막하게 벌어졌다.
“너.”
“…….”
“니가 갖고 싶어졌어.”
순간…… 꿀 먹은 벙어리가 된 은돈은 재빨리 정신을 추스르며 차문을 쾅! 닫았다.
그녀는 독현의 말이 여자로서 자신을 갖고 싶다는 뜻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저 남자가 지금 필요로 하는 건 여자 차은돈이 아니라, 밥순이 차은돈이다.
그래. 아는데. 그래도…… 순간적으로 가슴이 두근 내려앉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지잉-
그때 조수석의 창문이 열리며 명함 하나가 툭 바닥으로 떨어졌다.
“……뭐에요?”
“어차피 넌 다시 연락하게 돼 있어.”
창문 새로 냉랭한 한마디를 던진 독현이 그대로 핸들을 꺾어 차를 출발시켰다.
우두커니 남겨진 은돈은 살벌한 속도로 멀어지는 그의 페라리를 보며 혀를 내둘렀다.
“저, 저 예의라곤 흑인 코평수만도 없는 놈! 에라이, 잠바 자크 채우다 젖꼭지나 찝혀라!”
……그때까지, 은돈은 전혀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독현의 ‘넌 다시 연락하게 돼 있다’는 말의 정확한 의미를.
그녀가 그 말의 의미를 깨닫게 된 것은 정확히 다음날, 다니던 파스타집에 출근도장을 찍은 직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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