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남자 밥해주기-2화 (2/93)

2화. 나도 여자란 말이야

“네? 제 통장에서 돈이 빠져나가고 있다고요? 보안카드 끝자리 세 개만 불러 보라고요?”

독현의 구두에 어떤 참사가 벌어졌는지 깨닫지 못한 채, 은돈은 구남친이 아닌 보이스 피싱 조선족과의 통화를 허망하게 이어가는 중이었다.

그 모습을 환멸어린 시선으로 지켜보던 독현이 거칠게 은돈의 핸드폰을 뺏어들었다.

“어라……?”

은돈은 그제야 얼떨떨한 표정으로 독현을 마주보았고…… 약 사초 후.

“헉! 시, 신발이! 죄송합니다!”

자신의 실수를 깨닫기 무섭게 배식대를 돌아나간 은돈이 곧 독현의 발치에 쭈그려 앉았다.

“죄송해요! 제가 티 안 나게 닦아 드릴,”

“안 치워?”

“악-”

독현은 발을 확 잡아 빼며 은돈의 손길을 뿌리쳤고,

덕분에 행주를 손에 쥔 은돈은 굴욕적인 포즈로 바닥에 나동그라지고 말았다.

독현은 그런 그녀에게 세상에서 가장 솔직하고, 가장 잔인한 언사로 꼽을 주기 시작했다.

“감히 너 같은 밥주걱 따위가, 그런 행주 따위를 나한테 들이대? 이딴 곳에서 이따위 일이나 하는 주제에?”

“허…….?”

지금 저 남자가 뱉은 말에 ‘따위’가 몇 번이나 들어간 거지?

바닥에 주저앉은 은돈은 입을 허 벌린 채 독현을 응시했고, 이 와중에도 그는 섹시한 입술 사이로 은돈을 모욕하는 말들을 쉼 없이 쏟아내고 있었다.

“대체 누가 너 같은 걸 고용했지? 너, 당장 그 앞치마부터 벗어.”

“네?”

“못 알아들어? 너 꺼지란 소리야.”

“꺼…… 뭐라구요?”

은돈은 마치 몸에 밴 듯 능숙한 ‘갑질’을 시전 중인 독현을 뻔히 노려보았다.

“저기요. 꺼지라뇨. 지금 말 다했어요?”

“다 했을 것 같아?”

독현은 제 가슴팍 언저리에서 씩씩대는 뚱녀 은돈을 경멸스럽다는 듯 내려다보았다.

그즈음 두 사람 주변으로 구경꾼들이 몰려들었고, 저만치서 김장 행사를 취재하던 기자진도 관심을 내비치기 시작했다.

“…… 후우.”

은돈은 독현의 구두 위에 올라앉은 콩나물 대가리를 응시하며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참자. 참는 자에게 복이 있나니.

“뭐…… 어찌됐든…… 죄송해요. 죄송합니다. 제가 구두 수선비는 드릴게요.”

은돈의 말에, 독현이 기가 막히다는 듯 조소를 머금었다.

“너 이거 얼만지 알아?”

“얼만데요?”

“겨우 이 딴 데서 일용직하는 너 따위는 상상도 못할 금액?”

“하? 저기요. 물론 제가 실수 한 건 맞는데요. 그렇다고 초면에 이렇게 사람 무시하기 있어요? 댁이 행사 주최자면 단가?”

“…… 댁?”

지금 이 커다란 생명체가 감히 뭐라고 지껄이는 거지?

독현은 자신에게 도끼눈을 치켜 뜬 은돈을 믿기지 않는 다는 듯 내려다보았다.

이 와중에도 은돈은 기죽지 않고 따다다 말을 이었다.

“그리구 아까부터 따위, 따위 거리는데, 그쪽이 신은 구두는 뭐 소가죽이 아니라 사람가죽으로 만들었답니까? 그 ‘따위’꺼 얼마나 한다고 허세를 부려요?!”

허세…… 사람가죽……?

독현은 충격에 빠진 채 나직이 은돈의 말을 되뇌었다. 사람가죽이라니…….

이제껏 이런 식으로 ‘경박하게’ 딴지를 걸어 온 여잔 없었다.

그는 모멸감에 찬 시선으로 은돈을 응시하며 입을 떼 열었다.

“당장 경찰 부르겠어. 너 고소할거야.”

뭐, 고소?

“잠깐만요, 물어준다니까요?”

일순 움찔한 은돈이 독현의 팔을 붙들며 목소리를 높였고, 동시에 독현은 병균이라도 닿은 양, 자신과 밀착된 그녀의 손을 매정히 떨궈냈다.

“어디다 손을 대. 김밥 햄 같은 게.”

“…… 뭐?”

오 마이 갓.

김 to the 밥 to the 햄.

독현은 방금 자신이 뱉은 한마디가 잠시 후 어떤 참극을 불러올지 전혀 예감 하지 못하고 있었다.

“지금…… 당신…… 나한테 김밥 햄이라고 했어?”

독현은 스산한 음성으로 물어오는 은돈을 힐끔 내려다보았다.

어느 샌가 온 몸을 부들부들 떨며 극도의 분노를 발산중인 그녀를.

“대체,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은돈은 믿기지 않는다는 듯 천천히 혼잣말을 읊조렸다.

‘김밥 햄 같다’는 해괴망측한 말을 몇 시간 간격으로 서로 다른 두 남자에게 들을 확률이 도대체 몇 프로나 될까.

“그니까…… 김밥 햄 같이 생겼다는 게 뭔데?……어떻게 생겨야 되는데?”

한 발, 은돈이 위협적으로 독현에게 다가서며 물었다.

지금 그녀의 머릿속엔 몇 시간 전 박현우가 뱉은 말이 사이렌처럼 울려 퍼지고 있었다.

‘차은돈, 우리 이쯤에서 쿨하게 쫑 내자. 막말로 난 더 이상 김밥 햄 같은 여자랑 만나긴 싫다.’

‘난 가끔 사람을 음식에 비유하곤 하는데 말야. 에프엑스의 설리가 꼭 싱그러운 복숭아 같은 반면…… 넌 마치 쉬어 터진 김밥 햄같이 생겼거든.’

이어서, 은돈은 조금 전 독현이 자신에게 뱉은 한마딜 떠올렸다.

‘어디다 손을 대. 김밥 햄 같은 게.’

“도대체…… 허구 많은 햄 중에 왜 하필 김밥 햄인 거냐고.”

한 발 더, 은돈이 독현을 향해 다가섰다.

두 사람의 거리는 어느덧 숨소리가 맞닿을 듯 가까워져있었다.

“니들은 뭐가 그렇게 잘났길래…… 사람을 햄에 비유하며 개무시 하는데……? 니들이 나보다 잘난 건…… 잘난 건, 몸매뿐이잖아---!”

은돈이 고무 된 톤으로 빽- 소리를 내질렀다.

뒤이어 그녀는 주변을 에워싸고 있던 구경꾼 무리에게 다가갔다.

그리곤 한 노숙자의 식판에서 국 대접을 집어든 채 다시 독현을 향해 돌아섰다.

“…….?”

여전히 고고한 자세를 유지한 독현은, 의아한 듯 은돈의 행동을 주시했다.

은돈은 그런 그를 어느덧 자신의 구남친과 혼동하고 있었다.

자꾸만 재수 없는 박현우의 면상이 독현의 얼굴과 뒤엉켜 보였다.

이 썩을 것들…… 난 햄이 아냐. 난 햄이 아냐. 난…… 난.

“나도 여자란 말이야-!”

촤르륵!

순간 은돈이 손에 든 국 대접을 번쩍 들어 독현의 머리 위로 쏟아 부었다.

몇 시간 전, 박현우의 정수리 위로 아메리카노를 쏟아 붓지 못하고 도망친 것의 한을 풀기라도 하듯.

“헉……!?”

“어머머……!”

이제껏 독현과 은돈의 기싸움을 흥미진진하게 지켜보던 구경꾼 무리에서 경악스런 비명이 연달아 터져 나왔다.

“…….”

독현은 말없이 제 뺨을 타고 흐르는 해장국 국물에 손끝을 갖다 댔다.

잘게 채 썬 오징어와, 새우살, 콩나물 줄기를 비롯한 국건더기들이 그의 온몸에서 후두둑 떨어지고 있었다.

정말이지…… 이런 굴욕감은 난생 처음이다.

지금 독현의 기분을 온전히 표현할 수 있는 말은 이 세상에 존재치 않았다.

그는 다소 몽롱하기까지 한 시선으로 눈앞의 은돈을 응시했다.

그런 독현과 눈이 마주치자 은돈이 저도 모르게 살짝 뒷걸음질을 쳤고, 그때였다.

타악-!

일순 독현이 거센 손길로 그녀의 팔목을 낚아챘다.

“이, 이거 놔! 안 놔!?”

손목을 붙잡힌 은돈의 목소리가 높아지자, 그 사이 몰려든 기자들이 미친듯 카메라 셔터를 눌러대기 시작했다.

“놓으라니까?!”

“…….”

절박한 외침에도 불구하고, 독현은 은돈을 잡은 손에 더욱 꽈악 힘을 주었다.

그토록 의식하던 카메라도 더 이상 그의 안중엔 없어보였다.

살기어린 독현의 시선을 마주한 은돈은 온 몸에 소름이 이는 것을 느꼈다.

내가 정신이 나갔지. 어쩌자고 이런 놈한테 국 대접을 끼얹었단 말인가.

“저…… 저기! 일단 이거 좀 놓고 얘기하죠?"

은돈이 독현에게 붙잡힌 손목을 비틀어가며 힘겹게 말을 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조금의 미동 없이 눈앞의 은돈을 내려다볼 뿐이었다.

“이 국…….”

한참 침묵하던 독현의 입술이 나즈막히 벌어졌다.

“이 국, 니가 만들었어?”

“네……?”

은돈은 자신을 직시하는 독현을 향해 멍한 소리로 되물었고, 그즈음 부리나케 달려온 경호원들이 독현의 몸을 타월로 감싸기 시작했다.

와중에도 그의 머리칼에선 해장국 국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치워”

경호원의 손길을 밀어낸 독현이 자신의 아랫입술을 살짝 베어 물듯 핥았다.

그러자 입술 새로 짭쪼롬한 해장국 국물이 스며들었다.

“이거, 이 국…… 니가 만들었냐고 묻잖아.”

다시 자신에게 시선을 고정한 독현을 보며, 은돈은 당혹감을 감출 수 없었다.

“저기요. 이 판국에 왜 그런 걸 묻는 진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지금 중요한건 국을 누가 만들었냐가 아니라, 내가 왜 그쪽한테 국을 끼얹었느냐 하는 거잖아요. 나요, 비록 뚱뚱하긴 해도 댁한테 김밥 햄이란 소리 들을 정도로 못나지 않았어요. 그니까 사과해요. 그쪽이 사과하면, 나도 정식으로 구두랑 옷값 배상 할게요.”

은돈은 스스로도 감탄스러울 만큼 빠르게 말을 이어나갔다.

그러나 독현은 이미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지 않았다.

“너 아직 내가 묻는 말에 대답 안했어.”

“……?”

“이 국, 누가 만들었냐고.”

……뭐야 이 남자? 왜 갑자기 이상한 데 집착하는 거지? 은돈은 약간의 경계태세를 갖추며 입을 열었다.

“그 국…… 네. 제가 만들었는데요. 뭐 문제 있어요?”

“…….”

일순 독현의 한쪽 눈썹이 꿈틀, 위를 향해 치솟았다.

“저기요. 왜 그러시는,”

“너 번호 뭐야.”

은돈의 말을 칼같이 자르며, 독현이 자켓 안에서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번호 불러봐.”

“버, 번호는 갑자기 왜…….”

은돈은 여전히 독현에게 붙잡힌 손목을 힐끔 내려다보며 순간적으로 짱구를 굴리기 시작했다. 번호를 알려 달라는 건, 국 때문에 망가진 구두랑 자켓 수선비 때문이겠지?

젠장…… 저 자켓, 상당히, 너무나도, 완전히, 비싸 보이는데…….

“거기, 찍지 마시오!”

그때, 저 멀리서 지회장의 외침이 들려왔다. 그는 고무장갑을 낀 손에 김장김치를 받쳐 든 채, 헐레벌떡 독현과 은돈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거기 찍지 말라니까! 기자님들! 차라리 날 찍어요, 날! 자, 봐라? 나 김치 먹는다!”

급작 자리에 멈춰 선 회장이 배추김치를 호기롭게 찢어 입에 넣는 시늉을 해보였다.

그러나 그의 신들린 제스처를 묵살한 채, 기자들은 여전히 독현과 은돈을 향해 플래시를 터뜨려 댔다.

“헤드라인 써! 식품재벌3세 J씨, 내연관계인 뚱녀에게 해장국 세례 맞다!”

일순 기자의 외침이 들리는 곳을 향해 독현이 고개를 비틀었다.

은돈과 자신을 ‘내연 관계’로 엮은 것이 심히 불쾌하다는 듯, 그는 거친 시선으로 기자를 노려보았고, 뒤이어 차가운 한마디를 꺼내놓으려는 순간.

“이거 놔!”

때는 이때다 싶었던 은돈이 재빨리 붙잡힌 팔을 잡아 뺐다.

이어서 그녀는 독현이 들고 있던 핸드폰을 빼앗아 제 번호를 찍기 시작했다.

“자, 여기! 이게 내 번호에요! 수선비 받고 싶음 거기루 연락해요! 대신, 돈 받기 전에 나한테 함부로 말 한 거 사과부터 해야 할 거예요!”

은돈은 핸드폰을 독현에게 넘겨준 뒤, 입고 있던 앞치마를 벗어던졌다.

“볼일 끝난 거죠? 그럼 나…… 난 이만!”

개미 떼처럼 새까맣게 몰려드는 기자들을 보며 덜컥 겁이 난 것일까.

은돈은 죄인처럼 고개를 수그린 채 포다닥 달아나기 시작했고, 독현은 그런 그녀를 붙들기 위해 한 발, 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동시에 무수한 카메라가 그의 앞을 막아서며 질문공세를 퍼부었다.

“두 분 정확히 어떤 사이죠?”

“지독현 씨, 아까 그 뚱땡…… 아니, 여성분과 무슨 사입니까?!”

난리통 속에 갇힌 독현은 기자들의 질문에 대꾸하지 않은 채 허겁지겁 멀어지는 은돈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하필 이런 거지같은 곳에서 찾을 줄은.

기가 막힌 듯, 독현이 메마른 시선을 아래로 끌어내렸다.

하필 저런 여자가 만든 잡탕 따위에 마음이 흔들리다니.

그는 말없이 핸드폰에 찍힌 은돈의 번호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곤, 이내 픽 실소를 흘리며 저장버튼을 눌렀다.

***

이틀 후.

“언니. 오늘도 일 안 가요? 그러다 진짜 죽겠어요……”

밥차 개회식장에서 어느 유명무실한 재벌3세에게 해장국을 투척하고 달아난 이후.

은돈은 집 밖을 나서지 않은 채 폐인 생활을 이어가고 있었다.

“기운 좀 내요. 고작 남자한테 차인 거 갖구 언제까지 쳐져 있을라구요…….”

은돈은 대학 후배이자 자신의 룸메이트인 소진의 충고에도, 그저 바닥에 흐트러진 군것질 거리들을 멍하니 깨작이는데 열중했다.

“소진아. 나 왜 이렇게 허기가 지지? 개현우 그 자식 땜에…… 아무래도 내 스트레스성 폭식증이 도진 거 같아…….”

“휴.”

한숨을 내쉬던 소진이 더 이상 안 되겠다는 듯 바닥의 핸드폰을 집어 전원버튼을 눌렀다.

“아…… 안 돼! 키지 마!”

벌떡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은돈이 소진에게 달려들어 제 핸드폰을 빼앗았다.

그러나 이미 3년 약정 호갱이 폰은 빛을 발하며 부활한 상태.

“……이거 봐. 박현우한테 연락 한 통 없잖아. 내가 키지 말라니까…….”

은돈은 텅 빈 액정을 내려다보며 앓는 소리를 했고, 소진은 그런 그녀가 안타깝다는 듯 다시 입을 열었다.

“힘내요 언니. 솔직히 현우오빠 얼굴 좀 얄쌍한 거 말고 볼 거 있어요? 맨날 언니 돈이나 뜯어 가구. 안 그래요?”

“현우다…….”

“네?”

“현우…… 현우라구! 현우한테 카톡 왔다구!”

“……진짜요?”

은돈은 떨리는 손으로 소진을 향해 핸드폰을 들어보였다.

거기엔 정말로 박현우의 카톡 메시지가 도착해있었다.

-은돈아. 혹시 오늘 시간 돼? 나 생각해봤는데…… 너랑 이런 식으루 끝내는 건 아닌 것 같아서. 오늘 좀 볼 수 있을까?

은돈은 감격에 찬 얼굴로 현우의 메시지를 읽고 또 읽었다.

지난 사흘간의 배신감이 한 방에 씻겨 날아가는 기분이었다.

“소진아. 얘가 오늘 보자는데…… 알겠다고 할까, 응이라구 할까? 응이 낫겠지?”

“언니. 그게 그거죠. 그리구 딱 보면 몰라요? 현우오빠…… 언니가 아니라, 언니 지갑이 아쉬워져서 연락한 거 같은데.”

“야 그건! 그건…… 일단 내가 만나서 확인해 볼게.”

실은 은돈도 알고 있었다. 박현우가 이제와 자신에게 미련을 느꼈을 리 없다는 걸…….

하지만…… 만에 하나라는 게 있잖아.

은돈은 재빨리 산발한 머리를 치켜든 채 화장실로 직행했다.

“일단 머리에 물 좀 주고! 소진아, 너 저번에 산 립스틱, 나 좀 빌려줄래?!”

***

“하-”

도곡동에 위치한 초고층 맨션.

집주인의 까탈스런 성격을 반영한 듯 블랙 모던으로 꾸며진 거실에서 짤막한 한숨소리가 들려왔다. 소파에 등을 기댄 독현은 아까부터 미간을 찌푸린 채 손에 든 서류를 신경질적으로 넘기고 있었다.

타악!

잠시 후 그가 협탁 위로 집어던진 서류엔 은돈의 증명사진과 함께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이 기록되어 있었다.

“…….”

힐끔, 독현의 시선이 증명사진 속 은돈을 향했다.

정말 이 여잘 곁에 둬도 괜찮을까.

사흘째 같은 고민을 해봐도, 쉽사리 답이 나오지 않았다.

독현은 피곤한 듯 두 손으로 가볍게 얼굴을 쓸어내렸다.

“뭐야. 비번 아직도 안 바꿨어?”

그때 현관 도어락이 해제되는 소리와 함께 소라가 모습을 드러냈다.

독현은 시선을 돌려 소라와, 그녀 손에 들린 와인병을 바라보았다.

“…… 웬일이야?”

“웬일은. 짜잔! 샤토르팽 와인! 나 이거 너랑 마시려고 예약까지 해서 구했다?”

자신을 바라보는 독현의 표정이 심상찮음에도, 소라는 기세 좋게 와인병을 흔들며 소파 위로 몸을 앉혔다.

“그렇게 질린다는 듯 보지마. 내가 아무 때나 들락거리는 게 싫으면 비번부터 바꾸라니까, 지독현 씨.”

특유의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그녀는 연신 독현을 향해 말을 이었다.

“아. 근데 너, 며칠 전에 행사장에서 무슨 난동 피웠니? 회장님이 요즘 니 기사 막는다고 골치깨나 썩으시던데? 무슨 일이야?”

은근 자신의 상체를 터치하며 물어오는 소라를, 독현은 매몰차게 밀어냈다.

“참, 이런 노골적인 스킨십은 지독현 씨 스타일이 아니었지? 쏘리”

독현은 능청스레 혀를 쏙 내미는 소라를 바라보다 냉소적인 한마디를 던졌다.

“문소라”

“응?”

“그렇게 발라 제끼다가…… 땀구멍 막혀 죽는 거 아니야 너?”

“뭐?”

독현은 대꾸 없이 자신의 셔츠 자락에 남은 소라의 파우더 자국을 툭툭 털었다.

수치심에 얼굴이 붉어진 소라는 곧 유연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내가 땀구멍이 어딨어? 나 이래 봬도 자체발광 포샵 피부야. 내가 한 달 동안 피부에 쓰는 돈이 몇 백이게 너?”

독현은 장난스레 말을 잇는 소라를 무시한 채, 다시 은돈의 서류를 집어 들었다.

자연히 소라의 시선도 은돈의 증명사진을 향했다.

“뭐야? 여자네? 그것도 꽤나 뚱…… 아니, 글래머러스한 여자.”

“글래머러스하지.”

독현이 픽 웃으며 소라의 말을 받아쳤다. 그는 자신이 어떤 식으로 말해야 소라가 가장 상처받을지 잘 알고 있었다.

“누군데 이 여자가?”

“요즘 관심 있는 여자.”

“…… 뭐?”

“내 밥해줄 여자야.”

“밥해줄 여자……?”

소라는 독현의 의중을 못 읽겠다는 듯 살짝 굳어진 얼굴로 되물었고, 독현은 그녀를 향해 한 번 더 마른 음성을 내뱉었다.

“앞으로 쭉, 내 옆에 둘 여자야.”

뭐, 틀린 말은 아니었다. 지난 이틀간 고뇌하고, 분노하고, 갈등하긴 했지만 은돈은 확실히 독현이 찾아 헤맨 여자가 맞았다.

은퇴할 박 할매를 대신해 자신에게 역겹지 않은 요리를 해줄 여자.

“나 나갈 건데, 계속 여기 있을 거면 잔 갖다 줘?”

“……주인 없는 집에 혼자 남아 뭐하게. 와인은 담에 먹자.”

철저히 계산된 웃음을 짓는 소라를 보며, 독현은 주저 없이 차키를 집어 들었다.

곧이어 그가 현관으로 사라지자, 남겨진 소라가 나직한 혼잣말을 내뱉었다.

“지독현. 계속 그렇게 못되게 굴어. 어차피 막판에 웃는 건 니가 아니라 나야. 두고 봐. 넌 결국 나한테 처절히 매달리게 돼 있어…….”

***

20대 연인들로 붐비는 파스타 집.

자신의 일터기도 한 이곳에서 은돈은 벌써 한 시간째 현우를 기다리고 있었다.

ㅡ딸랑~

“박현우?!”

입구에 달린 종이 울릴 때마다 그녀는 긴장이 역력한 얼굴을 왈칵 치켜들었다.

그러나…… 오매불망 기다리는 구 남친은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ㅡ으르렁 으르렁대~ 으르렁 으르렁♬

“현운가?!”

은돈은 요란히 울리는 핸드폰의 발신자를 확인할 새도 없이 후다닥 통화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나야.

“……? 누구시죠?”

-지독현.

지독현?

생소한 저음 보이스와, 낯선 이름 석자에…… 은돈은 고개를 갸웃하다 곧 아! 하고 가벼운 탄성을 내질렀다.

“혹시…… 그 밥차 개회식 때…… 그분 맞죠? 대성명가 자제분. 재벌3세?”

-…….

“대답이 없는 걸 보니 맞군요…….”

은돈은 절망한 듯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진짜로 전화하신 거에요? 기어이…… 저한테 수선비를 받으시려구…….”

-……수선비?

독현은 주차 돼 있던 페라리에 올라타며 의아한 얼굴로 되물었고, 이에 은돈은 재빨리 말을 이었다.

“아니에요. 저 땜에 국 대접까지 뒤집어 쓰셨는데, 당연히 물어드려야죠……. 근데 오늘은 제가 좀 만날 사람이 있어서…….”

-지금 어디야 당신.

핸드폰을 귀에 갖다 댄 채, 독현이 페라리의 핸들을 잡으며 물었다.

“여, 여기요? 저 일하는 곳이요. 왜요? 설마 지금 받으러 오시…….”

-기다려. 갈 테니까.

말을 마친 독현이 비어있는 옆 좌석에 핸드폰을 툭 던지며 가속페달을 밟았다.

그즈음, 은돈은 끊어진 자신의 핸드폰을 황당한 얼굴로 응시했다.

“뭐야 이 사람…… 여기가 어딘 줄 알구 온다는 거야……?”

ㅡ딸랑~

그때, 입구의 종이 울리며 은돈의 구남친…… 일명 개현우가 멀쑥한 모습을 드러냈다.

“헙. 바, 박현우! 여기!”

순간 은돈은 잔뜩 긴장한 얼굴로 몸을 일으켰고…… 뒤이어, 돌처럼 얼굴을 굳혔다.

“언니. 저희가 좀 늦었죠?”

뭐지……? 뭐야 지금 이 상황……?

은돈은 자신의 앞으로 다가와 선 현우와 소진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아니,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녀의 시선은 두 사람의 손에 보란 듯 끼워져 있는 커플링을 향해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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