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김밥 햄 같은 여자
“사장님, 다음 요리는 얇게 저민 도미 살과 송로버섯으로 만든 궁중음식 가마보관입니다.”
탁. 둔탁한 소리를 내며 가마보관이 담긴 자기 접시가 독현의 앞에 놓였다.
척 보기에도 엄청난 공을 들인 것이 분명한 이 레스토랑의 메인 요리를, 독현은 특유의 서늘한 시선으로 내려다보았다.
이윽고, 그의 입에서 어이없다는 듯 실소가 새어나왔다.
“이딴 걸…….”
“네?”
“지금 이 따위 걸 나더러 먹으란 소린가?”
“이, 이 따위라뇨. 사장님. 대체 아까부터 뭐가 맘에 안 드셔서 자꾸 딴지를 거시는지…….”
“딴지?”
순간 독현이 살기어린 표정으로 나이프를 탁, 내려놓았다.
동시에 부주방장을 비롯한 스텝 전원이 움찔하며 고개를 움츠렸다.
겁에 질린 그들을 차례대로 훑으며, 독현은 시크하게 말을 이었다.
“분명 몇 번이나 얘기했던 것 같은데. 적어도 사람이 먹을 수 있는 음식을 가져 오라고. 그런데…… 계속해서 이렇게 질 떨어지는 요리를 내 앞에 내오는 저의가 뭐지?”
말을 마친 독현이 테이블 위로 펼쳐진 갖가지 요리들을 냉정하게 응시했다.
민어 살을 다져만든 어만두, 소고기와 생새우, 날 채소를 끓여 만든 궁중 신선로, 거기에 탕평채와 전복 찜, 자연산 송이 구이까지.
테이블 위에 세팅된 고가의 한식요리들은 왕의 수라상을 연상케 할 만큼 화려하면서도 품위가 넘쳤다.
그러나 독현은 손이 닿지 않을 만큼 먼 곳까지 펼쳐진 접시의 향연을 질린다는 듯 노려 볼 뿐이었다.
“하나같이 진부하고 저급하잖아. 안 그래 부주?”
독현의 날이 선 말에 부주방장은 용기를 내 볼멘소리를 뱉어냈다.
“솔직히…… 사장님의 까탈스런 입맛을 맞추는 게 여간 힘든 일이 아닙니다. 지난 몇 달간 사장님이 놀부 심보로 깨 던진 접시가 몇 갠 줄이나 아십니까?”
“모르겠는데? 계속해봐.”
“마…… 막말로다, 사장님이 식이장애 때문에 음식 섭취가 자유롭지 않은 게 저희 직원들 탓은 아니지 않습…….”
순간, 부주방장은 말을 잇다말고 독현의 눈치를 힐끔 살폈다.
‘식이장애’라는 말은 까칠한 독현이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는 말 중 하나였다.
해리포터의 금기어가 볼드모트라면, 독현의 소유인 이 한식 퓨전 레스토랑 다원정에서 절대 입 밖에 내지 말아야할 단어는 바로 ‘식이장애‘였다.
“방금, 뭐라고 지껄인 거지?”
아니나 다를까.
부주방장의 경솔한 언행에, 지금껏 와인 잔 위를 손가락으로 빙- 돌리며 지루함을 표시하던 독현의 얼굴이 굳어졌다.
살얼음판 같은 분위기 속에서 부주방장은 침을 꼴깍 삼키며 입을 열었다.
“시, 식이 장애 때문이 아니라면, 그만 땡깡 부리시고 제가 만든 요리를 드십시오. 전부 전국 각지에서 공수해온 최고급 식재료로 만든…….”
“좋아.”
부주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독현은 거만한 손짓으로 눈앞의 음식 접시를 끌어당겼다.
순간 레스토랑은 정적에 휩싸였고, 직원들은 긴장한 얼굴로 독현이 어만두를 집어 드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리곤 정확히 1초, 2초, 3초…….
“욱!”
음식을 삼킨 독현이 구토증세를 보이며 재빨리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다.
젠장. 또 시작이다. 벌써 두 달째, 뭔가를 먹으면 자동으로 올라오는 헛구역질…….
“저거 봐, 거식증 맞다니까…….”
독현은 스텝 몇몇이 자신을 가리켜 수근 대는 것을 듣고 확, 미간을 좁혔다.
사실 독현은 살이 찌는 것이 두려워 스스로 음식을 게워내는 거식증 환자들과는 전혀 다른 케이스였다.
보다시피 그는 억지로 음식물 섭취를 제한하며 몸매에 집착하지 않아도 될 만큼 호리호리한 체격에, 태생적으로 여자보다 더 관능적인 외모를 갖추고 있었다.
한마디로 그가 음식물을 게워내는 건, 전혀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는 소리였다.
“사장님. 아, 안 드실 겁니까?”
“지긋지긋해…….”
“예……?”
“지긋지긋하다고.”
그동안 수많은 닥터를 만났지만 모두 독현이 앓고 있는 식이장애의 원인조차 찾지 못하고 있었다.
과거의 어떤 트라우마나 심인성 쇼크로 인해 생겨난 것이라고 어설픈 추측만 해댈 뿐.
“…….”
독현은 자신을 조롱하듯 먹음직스럽게 세팅된 음식 접시들을 응시했다. 일순 머리끝까지 화가 치밀었다.
쨍강!
요란한 소리와 함께 테이블 위의 접시들이 바닥으로 쏟아졌다.
그럼에도 독현은 성에 차지 않는 듯 스스로 박살낸 접시의 잔해를 노려보며 거친 숨을 내쉬었다.
“그래. 이제 내가 깨먹은 접시가 몇 개지?”
그의 살기어린 물음에 부주를 비롯한 전 스텝들은 행여 자신에게 불똥이 튈까 숨을 죽인 채 멀찍이 물러섰다.
독현은 그들을 냉소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다, 목을 죄어오는 타이를 신경질적으로 끌러 음식접시 위로 처박아 버렸다.
***
쏴아-
엔틱 풍 인테리어가 돋보이는 다원정의 화장실.
독현은 세면대에 넘치는 물을 끌 생각도 하지 않고 거울 속에 비친 제 모습을 빤히 응시했다.
두 달간 제대로 된 식사를 하지 못한 탓일까.
매끄럽던 그의 턱 선은 이제 손만 갖다 대도 베일 듯 날카로워져 있었다.
독현은 당장이라도 눈앞의 거울을 주먹으로 깨부수고 고성을 내질러야 직성이 풀릴 것 같았다.
“쯔쯧…… 비싼 접시를 서른 개는 족히 깨쳐먹고…… 아직도 분이 안 풀립니까 그려?”
그때였다.
입구에서 웬 노친네의 혀 차는 소리가 들려왔다.
독현은 목소리의 주인공이 박 할매라는 사실을 단번에 알아챘다.
70세의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이 레스토랑의 엄연한 명장 쉐프인 박 할매는 오래전 식이장애로 말라 죽어가던 독현에게 손수 밥을 지어 먹인, 이를테면 생명의 은인이나 다름없는 존재였다.
독현은 신기하게도 그녀의 음식만큼은 아무런 거부반응 없이 삼킬 수 있었다.
그런데 두 달 전.
박 할매가 건강상의 이유로 사직서를 제출하며 모든 것이 꼬이기 시작했다.
“당신 대타는 대체 어딜 가면 구할 수 있지?”
독현이 화장실 입구에 모습을 드러내며 차가운 한마딜 내뱉었다.
187센티의 모델 기럭지를 자랑하는 그가 자신의 가슴팍에도 못 미치는 꼬부랑 노친네를 마주하고 선 광경은 어딘가 굉장히 언밸런스 해보였다.
“제대로 찾아보면 분명 이 늙은이 손맛을 대신할 사람이 있을 겝니다. 같은 값이면 다홍치마라고, 사장님도 늙고 꼬부라진 나보다는 젊고 섹시한 아가씨가 해주는 밥이 더 좋을 거 아니유?”
“……젊고 섹시한 아가씨?”
할매의 말에 독현은 간신히 화를 눌러 참는 듯 또박, 또박 입을 뗐다.
“당신 눈엔, 내가 지금 룸에서 한가하게 여자나 고르고 있는 것처럼 보여?”
“푸훗. 내가 또 여자라곤 스머프 반바지만큼도 관심 없는 분 앞에서 주접을 떨었구만.”
짓궂게 말을 잇는 박 할매를 노려보던 독현이 그대로 몸을 돌려세웠다. 더 상대해 봤자다. 노망난 노친네 같으니.
“참, 그보다 사장님. 오늘 4시 행사 잊지 않았죠, 그려? 지 회장님의 '사랑의 밥차' 개회식.”
등 뒤로 들려오는 할매의 외침에, 독현이 멈칫하며 기억을 더듬었다.
그러고 보니 지난주쯤이던가. 친조부인 지 회장이 기업의 이미지 쇄신을 위한 행사를 열겠다며 일장 연설을 펼친 기억이 나는 것도 같고.
“하.”
사랑의 밥차라니…….
내 밥도 못 찾아먹는 와중에 길거리 부랑자들이나 걷어 먹이는 엿 같은 행사에 참석하라고?
독현은 지끈거리는 이마를 한손으로 감싸 쥐었다.
왠지 벌써부터 속이 메슥거리는 게, 예감이 좋지 않았다.
***
“어흑, 나쁜 새끼. 개 같은 새끼…… 개만도 못한 새끼…… 니가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어…….”
같은 시각. '사랑의 밥차' 개회식장.
배식 봉사대 뱃지를 가슴에 단 은돈은 장장 40분 째, 검은 마스카라 눈물을 흘리며 구남친을 향한 저주를 읊조리고 있었다.
“박현우…… 이 노홍철 한라봉코 같은 자식…… 정준하 요요현상 같은 자식…… 어떻게 니가 먼저 나한테 헤어지자고 할 수 있냐고ㅡ!”
콩나물 해장국을 국자로 휘저으며 울부짖는 은돈의 모습에 배식을 기다리던 노숙자들이 입을 모아 쑥덕대기 시작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은돈의 머릿속엔 정확히 2시간 30분 전 상황이 새드 무비의 한 장면처럼 생생히 떠오를 뿐이었다.
“현우야. 이건 진짜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너 지금 나한테 헤어지잔 얘길 돌려서 하구 있는 거…… 맞니?”
2시간 30분 전.
뚱뚱한 파카차림으로 까페 구석자리에 앉은 은돈은 곧 자신의 ‘구’ 남친이 될 현우를 멍청히 응시하고 있었다.
“미안하다. 차은돈.”
은돈은 다짜고짜 사과를 건네 오는 맞은편의 쓰레…… 아니, 현우를 잠자코 바라보았다.
순간 슬픔보다 분노가 먼저 치밀었다.
박현우…… 내가 그간 너한테 갖다 쓴 돈이 얼만데?
너한테 바친 겜방비며, 당구비며, 스타벅스 샷 추가 아메리카노가 몇 갠줄이나 아냐?
은돈은 달아오른 얼굴을 부채질하며, 애써 침착하게 앞에 놓인 쉐이크 잔을 집어 들었다.
“갑자기 헤어지잔 이유가 뭔데?”
“…….”
그녀의 물음에 현우는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
이 와중에도 그의 시선은 처참히 바닥을 드러낸 은돈의 쉐이크 잔을 향해있었다.
“너랑 다니는 거. 나 솔직히 좀 창피해.”
"……뭐?”
예상치 못한 한마디에 은돈은 입술을 파르르 떨며 되물었고 현우는 차가운 낯으로 재차 말을 이었다.
“까놓고 말해서, 차은돈 넌 여자 몸무게 77키로가 말이 된다고 생각 하냐?”
“박현우. 갑자기 무슨 소릴…….”
“솔직히, 난 더 이상 니 몸무게가 감당이 안 된다 은돈아. 이런 말 하긴 좀 그렇지만, 넌 하다못해 목젖에도 살이 쪘잖아. 아까 쉐이크 마실 때 봤어.”
“뭐…… 뭔 젖?”
은돈은 망치로 한대 쥐어 터진 듯 맹-한 얼굴로 현우를 응시했다.
참으로 어이가 아리마셍이지 않은가. 목젖이라니…….
지난 26년간 살 빼라는 잔소리를 늘 달고 살아왔지만 그 중 누구도 은돈의 앙증맞은 목젖을 대놓고 디스 한 적은 없었다.
“하하하…… 하하…… 목젖이라니…….”
다른 젖도 있는데, 왜 하필 목젖이냐.
차라리 다른 젖에 살이 쪘다고 해줬음 차이는 마당에 기분이라도 좋을 뻔 했잖아.
은돈은 반쯤 정신 줄을 놓은 채 허무한 실소를 흘렸고, 그 사이 싸늘한 표정의 현우가 다시 입을 열었다.
“길게 얘기할 거 없이…… 차은돈, 우리 이쯤에서 쿨하게 쫑 내자. 막말로 난 더 이상 김밥 햄 같은 여자랑 만나긴 싫다.”
“기…… 김밥 햄이라니?!”
순간 은돈의 언성이 한톤 높아졌다.
현우는 그런 그녀를 조롱하듯 빠르게 말을 이었다.
“몰랐어? 난 가끔 사람을 음식에 비유하곤 하는데 말야. 에프엑스의 설리가 꼭 싱그러운 복숭아 같은 반면. 넌 마치 쉬어 터진 김밥 햄같이 생겼거든. 그니까 평소에 작작 좀 처먹지 그랬…….”
벌떡!
순간 현우를 벙 찐 얼굴로 바라보던 은돈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뒤이어 그녀는 테이블 위에 놓여있던 아메리카노 잔을 우발적으로 치켜들었다.
“너 설마 그거 나한테 쏟으려는 건 아니지?”
은돈은 뒤로 홱 물러나며 구차하게 물어오는 구남친을 눈알이 시리도록 노려보았다.
손에 쥔 아메리카노 잔을 그대로 박현우의 머리통 위로 처박을 수만 있다면.
하지만…… 왠지 커피를 끼얹기도 전에 눈물이 먼저 터져 나올 것 같았다.
쾅-! 은돈은 잔을 거칠게 내려놓고는 자신의 지갑에서 만원을 꺼내 들었다.
“박현우. 여기 커피 값! 아마 이게…… 내가 너한테 사주는 마지막 샷추가 아메리카노가 될 거다. 이 거지 새끼야.”
최대한 아무렇지 않게. 있어보이게.
은돈은 만 원짜리를 현우의 면상위로 던져버리곤 그대로 몸을 돌렸다.
그것이…… 그 상황에서 그녀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복수였다.
***
“꺼져 줄께, 잘 살아…… 그 말밖엔 난 못해…… 잊어 줄께 잘살아…… 나 없이도 행복해…… 워우어 베이베…….”
“저 아가씨 아까부터 왜 저래? 애인한테 까였나?”
“쯧쯔. 정신 줄을 놨네 놨어. 저 눈탱이에 마스카라 떡진 거 봐요…….”
사랑의 밥차 개회식장.
자신을 두고 다른 배식원들이 쑥덕이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은돈은 그저 혼이 나간채로 암울한 노랫말을 흥얼거릴 뿐이었다.
“어! 지 회장 일가다!”
그때, 행사장 구석에서 대기 중이던 기자진이 한 곳을 향해 일제히 셔터를 터뜨리기 시작했다.
은돈을 비롯한 모든 이들의 시선은 자연히 플래시 세례가 쏟아지는 쪽을 향했고…….
거기엔 아니나 다를까.
지금 막 모습을 드러낸 행사의 주최 측, 지 회장 일가가 있었다.
일가라고 해봤자, 한식 프랜차이즈 ‘대성명가’의 수장인 지 회장과 그의 친손주인 독현이 전부였지만.
“세상에…… 역시 돈 많은 집 도련님은 얼굴 때깔부터가 달러. 저 조인성 뺨치는 콧대하며, 색기가 흘러 넘치는 눈매하며, 꼭 탑모델 같네.”
“그러게요. 지독현인지 뭐시긴지, 얼굴에서 번쩍번쩍 빛이 나는 게…… 점심에 밥 대신 형광등을 집어삼켰나보네요…….”
은돈은 옆에 선 배식요원의 말에 수긍하며 저만치의 독현을 응시했다.
180을 훨씬 웃도는 키에, 다부지게 벌어진 양 어깨.
스키니한듯 하면서도 호리호리한 몸매, 거기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휘감은, 족히 몇 천은 돼 보이는 명품 컬렉션들.
“저 자켓…… 저 시계…… 저 신발…… 전부 우리 현우가 갖고 싶어 했던 건데…….”
헙. 이런 젠장. 미쳤나보다. 우리 현우라니.
보기 좋게 까였는데…… 왜 자꾸 그 자식 면상이 눈앞에 아른대는 걸까.
독현에게서 시선을 거둔 은돈이 곧 자신의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동시에 휑한 액정이 시야에 들어왔다. 카톡 메시지 0, 부재중 전화 0.
“박현우. 너 진짜 잔인하구나…….”
“하핫핫-! 우리 친애하는 자원봉사단 여러분! 대낮부터 수고가 많습니다!”
그때, 다분히 가식적인 지 회장의 목소리가 바로 옆에서 들려왔다.
카메라에 둘러싸인 회장은 어느덧 배식대 앞에서 갖은 포즈를 취하고 있었다.
“하.”
지 회장 옆에 선 독현은 아까부터 제 손에 들려있는 식판을 노려보다,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세계적인 브랜드 KITON에서 내놓은 리미티드 수트를 입고 3천 원짜리 스텐리스 식판을 들고 서있는 꼴이란.
독현은 당장이라도 손에 든 식판을 카메라 앵글위로 처박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다.
하지만…… 한 성깔 하는 친조부의 심기를 건드려 봤자 좋을 게 없다는 것을, 그는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결국 독현은 지 회장을 따라 반찬을 배식받기 시작했다.
“아이고, 잘생긴 총각! 많이 들어요!”
독현은 엄마뻘의 배식요원이 자신의 식판위에 올려주는 파래 무침을 힐끔 응시했다.
일순 구토증세가 일었으나 그는 수많은 카메라 앞에서 냉정한 포커페이스를 유지했다.
“이거, 오늘 메뉴가 콩나물 국밥인가? 참 먹음직스럽게도 생겼구만.”
그 즈음, 지 회장이 국을 배식받기 위해 은돈의 앞에 멈춰 섰다.
“아가씨, 오늘 날씨가 춥지도 덥지도 않은 게, 참~ 반찬 푸기 좋은 날이야 안 그런가? 핫핫!“
기자들을 지나치게 의식한 탓일까.
지 회장은 한껏 격앙 된 톤으로 은돈을 향해 입을 열었고, 약 2초 후…….
은돈 역시 퀭한 얼굴을 슥 들어 올리며 회장의 농담을 받았다.
“춥지도 덥지도 않은 게…… 남자한테 차이기 딱 좋은 날씨네요. 그죠?”
“헙…….”
“헉…….”
실연의 아픔으로 마치 촛농처럼 흘러내리는 은돈의 마스카라 눈물…….
그녀를 본 지 회장과 기자 일동의 입에서 동시에 헉 하는 단말마가 튀어나왔다.
“흠흠…… 이게 국에…… 뭐 특별한 레시피 라도 있는 건가?”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지 회장이 재빨리 화제전환용 멘트를 날렸다.
그러나 이미 정수리 위로 영혼이 증발한 은돈은 제 혼잣말 늘어놓기에 여념이 없었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일년이었어요…… 우리의 연애기간요…… 지금 생각해보면 시간낭비, 돈 낭비가 따로 없었네요. 그 망할 놈의 호로 자식.”
“호, 호로?”
“영감님…… 전 그놈의 여자친구가 아니었어요. 그냥 등신이고, 호구고, 물주였던거에요. 지난 1년간 전 그놈의 게임비고, 당구비고, 샷추가 아메리카노 였던 겝니다……!”
“영감님!?”
찰칵,찰칵,찰칵!
벙 찐 지 회장과 오열하는 은돈을 향해 연달아 카메라 셔터가 반짝였다.
주변이 소란스러워지자, 식판 위의 파래무침을 노려보던 독현이 비로소 고개를 쳐들었다.
뒤이어 그는 특유의 날카로운 시선으로 은돈을 직시했다.
“내가 얼마나 사랑했는지 아세요? 그 호로 자식을요…… 걔가 생긴 게 꼭 KFC앞에 할아버지 동상같이 생겼거든요? 그래서 전 앞으로 평생 그 집 햄버거는 못 먹을 것 같네요…….”
“자 기자님들, 우리 저쪽으로 한번 가봅시다. 지금 겉절이 버무리기 행사가 한창이오!”
은돈의 헛소리에 기가 빨린 지 회장이 재빨리 다른 곳으로 기자들을 인솔하기 시작했다.
은돈은 자신에게서 떨어져나가는 회장과 무리들을 보며 추잡하게 콧물을 훌쩍였고, 남겨진 독현은 그런 은돈에게 호기심 어린 시선을 빤히 고정했다.
‘……뭐지. 이 삼시세끼 햄만 먹게 생긴 여잔…….’
일차원적인 의문에 사로잡힌 채, 독현은 계속해서 은돈을 면밀히 관찰했다.
비만과 고도비만의 경계에 아슬아슬 걸쳐있는 그녀의 푸짐한 몸매와, 세기의 축구선수 호날두도 ‘저년 다리는 못 당하겠어’ 라며 울고 갈 그녀의 왕벅지, 덤으로 살에 파묻힌 쇄골 뼈까지…….
……피식.
급작스레 시선을 내린 독현이 노골적인 비웃음을 흘렸다.
조금 전, 그는 제 나름의 기준으로 은돈이란 생물체를 정의내린 것이다.
저건 여자도 뭣도 아니다. 단지 사람들에게 밥을 퍼주는 밥주걱일 뿐이다.
그래, 밥 주 걱.
“뭐해?”
“……네?”
“밥 퍼. 아니……국 퍼.”
바로 앞에서 들려오는 독현의 오만한 음성에, 흐느끼던 은돈이 고개를 쳐들었다.
독현은 퉁퉁 부은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그녀를 향해 다시금 메마른 한마디를 뱉었다.
“국. 푸라고.”
“아…… 네!”
독현의 눈빛에서 묘한 위압감을 느낀 은돈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정신 차리자 차은돈. 난 지금 자원봉사 중이다.
“여기, 전주식 콩나물 해장국입니다.”
잠시 후, 최대한 하이톤으로 목소리를 끌어올린 은돈이 독현의 식판 위로 뜨거운 국 대접을 가져갔다.
그런데 그때, 그녀의 핸드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ㅡ으르렁 으르렁대-♬♪으르렁 으르렁-♪♬♪
“박현우?!”
혹시 구남친일까 싶어 은돈은 후다닥 주머니 속 핸드폰을 꺼내들었고…….
다음 순간-
그녀의 손에서 미끄러진 국 대접이 독현의 식판을 빗겨나가 바닥에 내리 꽂혔다. 퍽……하는 불길한 소리와 함께.
“…….?”
순간적으로 사태파악이 되지 않은 독현이 자신의 구두 위로 정확히 안착한 국 대접을 지그시 노려보았다.
“…….”
이럴수가. 차마…… 그 어떤 말도 나오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이태리제 구두에 앙증맞게 올라앉은 국건더기를 한참 응시하다, 곧 은돈을 향해 얼음장 같은 시선을 천천히 끌어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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