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자리
“릴리.”
“아, 오셨어요!”
릴리가 아기를 유모에게 안겨 주고 틸리안을 향해 다가갔다. 틸리안은 자신이 저 환한 웃음을 보기 위해 머나먼 델모누아까지 찾아왔다는 것을 새삼 느꼈다. 그를 반겨 주는 사람은 그녀 하나뿐이었으나 그것만으로 보람은 차고 넘쳤다.
하이드는 승자의 도취감과 불만 어린 경계 사이의 애매한 태도로 릴리 앞에서만 점잖게 손님을 환영하는 척했다. 더글라스는 짧은 시간이나마 함께 일했던 경험이 있어 그나마 어색하지 않은 정도였다.
“와 주셔서 얼마나 기쁜지 몰라요. 그동안 잘 지내셨어요?”
“걱정해 준 덕분에 잘 지냈다.”
“브라이트예요. 한번 안아보시겠어요?”
“너를 정말 많이 닮았군.”
“그런 말은 처음 들어 봐요. 다들 저보다는 하이드를 쏙 빼닮았다고 하는걸요.”
틸리안은 조심스럽게 브라이트를 받아들었다. 아기는 객관적으로 릴리보다는 하이드를 많이 닮았지만, 그의 눈은 브라이트에게서 릴리만을 찾았다. 사랑스러운 아기였다. 낯선 이의 품에서 얌전하게 꼬물거리며 방긋방긋 웃는 모습이 순했다. 바빠서 이제야 찾아왔지만, 진작 봤으면 좋았을 것을 싶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아기에게 손가락을 내어 주고 있었다. 릴리는 그런 틸리안을 흐뭇하게 보고 있었다.
“이제 이리 주시죠.”
“…….”
하이드가 틸리안에게서 아기를 받아와 유모에게 넘겼다. 유들유들한 미소를 짓고 있지만 눈빛에 담긴 적의는 숨겨지지 않았다. 아마 숨길 생각도 없겠지만. 틸리안은 씁쓸하게 웃으며 다정한 부부를 피해 자리에 앉았다. 하이드는 보란 듯이 릴리의 어깨를 감싸며 자신에게 부부 사이를 과시했다. 전혀 쓸데없는 경계심이다. 자신은 남의 가정을 파탄 내는 데 일조할 만큼 대단한 악한은 못 되니까.
“오라버니, 잘 지내셨어요? 이제 기사단장이 되셨으니 더 바쁘실 텐데 와 주셔서 정말 고마워요.”
“당연히 보러 와야지. 사업체도 많이 정리했고, 부기사단장으로서 했던 일과 그다지 다르지도 않아. 이젠 여유 있어.”
“정말이에요? 이제 시간 좀 나시는 거예요?”
“그래.”
시간이 난다는 말에 릴리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읽을 수 있었더라면 틸리안은 대답을 바꿨을 테지만, 그는 릴리의 집념을 얕보고 있었다.
“그럼 에밀리 양과 만나실 수 있겠네요! 저번에 그렇게 거절하셔서 에밀리 양이 얼마나 무안했겠어요?”
“그래요, 틸리안 경. 에밀리 양이 경과의 만남을 무척 고대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신사로서 숙녀를 실망시키는 일은 없어야겠지요.”
하이드가 얄밉게 맞장구치며 쐐기를 박았다. 예상치 못한 난제에 틸리안만 곤란함에 턱을 쓸었다. 에밀리 양이 싫은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명문가의 영애로 몸가짐이 바르고 성격이 발랄해 사교계를 주름잡는 화사한 아가씨였고, 자신이 마음에 든다 들지 않다 평가할 입장도 아니었다. 몇 번의 무도회에서 마주칠 때마다 수줍게 볼을 붉히면서도 당돌하게 먼저 춤을 청하는 아가씨를 보고서도 아무런 감흥이 없는 자신이 문제였을 뿐이다.
“릴리. 나는 당분간 결혼할 생각이 없다고 분명히 생각을 밝혔다.”
“아이, 오라버니. 제가 당장 결혼하라고 말씀드리는 게 아니잖아요. 그냥 소개만 받아 보시라는 거예요. 네?”
릴리가 제 손을 붙잡고 올려다보며 애교를 부리는 통에 그는 단호하게 거절할 수 없었다. 뻣뻣한 얼굴 근육 덕에 당황한 티가 나지 않아 다행이었다. 틸리안은 릴리에게 약했고 그의 난처함을 이해하는 더글라스가 그 모습을 보고 낄낄대다 하이드에게 눈총을 받았다.
하이드가 매섭게 쳐다보는 것쯤이야 이제는 매끼 식사처럼 당연했으니 무서울 것도 없었다. 더글라스에게는 하이드와 릴리, 틸리안 이 셋이서 모였을 때 구경하는 것만큼 즐거운 일이 없었다. 기사도로 똘똘 뭉친 모범생 같은 틸리안이 릴리 앞에서 쩔쩔매는 것도, 아무것도 모르고 참한 아가씨를 소개해 주겠다며 나서는 릴리도, 다정한 오누이 같은 모습에 하이드의 심기가 불편해지는 것도 남 일이니 강 건너 불구경에 그렇게 신이 날 수 없었다. 브라이트도 즐거운지 까르륵 침을 흘리며 웃었다.
“……에밀리 양은 너무 어려.”
“오라버니, 에밀리 양이 저랑 동갑인 건 아세요? 아기가 하나 있어도 놀라울 것 없는 나이예요.”
“네가 너무 이른 거지.”
틸리안이 새삼스럽게 릴리를 바라보며 눈살을 좁혔다. 아기 엄마라지만 그의 눈에는 처음 만났을 때의 소녀 그대로였으니까. 그는 무도회에서 릴리가 기혼자임을 모르고 다가갔다가 하이드에게 된통 당한 청년들을 기억하고 있었다.
릴리는 샐쭉해진 얼굴로 그에게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오라버니는 여자 마음을 몰라도 너무 모른다느니 복을 걷어찬다느니 하며 진짜 여동생처럼 굴었다. 쏟아지는 핀잔마저 기꺼웠으니 미칠 노릇이었다. 진짜 오라비가 되기로 결심했건만 쉽지 않았다. 오히려 릴리는 그를 완전히 가족으로 받아들였는데 말이다. 이래서야 하이드가 저를 대놓고 경멸한다 해도 할 말이 없었다.
“아무튼! 오라버니 이번에는 꼭 나가셔야 해요?”
“노력……해 보마.”
노력은 항시 하고 있었다. 릴리의 결혼식에 축하를 전했을 때, 릴리가 임신 소식을 전하며 수줍게 웃었을 때, 태교에 전념하기 위해 영지로 내려갔을 때, 편지로 출산 소식을 들었을 때……. 릴리가 행복해할 때마다 실감했다.
그녀의 행복에 자신이 보탤 몫은 없었다. 저 두 사람은 사교계에 소문난 잉꼬 부부였고, 하이드는 릴리에게만큼은 좋은 남자였다. 싫은 기색을 숨기지 못하지만, 오로지 릴리의 기쁨을 위해 그의 영지에 자신을 초대할 만큼 인내심을 발휘하기도 했으니까. 자신이 나설 기회는 없었다. 잔인할 정도로 분명한 사실이었다.
“피곤하실 텐데 제가 너무 오래 붙잡았네요. 쉬세요, 오라버니. 이따 저녁 만찬 때 뵈어요. 그때 다시 얘기하기로 해요.”
“…….”
릴리는 결혼을 해 자작가를 떠나고 나서 적막했던 바르딘 가가 못내 신경 쓰였던지 틸리안에게 참한 아가씨를 소개하는 데 열성이었다. 사교 모임에 흥미 없는 릴리가 어린 영애들과의 다과회나 모임에 참여하는 유일한 이유가 틸리안에게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틸리안은 현 사교계에서 일등 신랑감으로 통했으니 릴리를 통해 그를 소개받으려 하는 아가씨들이 끊이질 않았다. 먼젓번의 무도회에서는 릴리가 웬 처자에게 춤을 신청하라고 은근한 눈치를 주어서 하는 수 없이 조용히 춤만 추었었다.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영애는 몇 번 말을 걸어왔던 것 같지만 다른 생각에 빠져 무반응인 그에게 화가 나 결국 씩씩대며 치맛자락을 펄럭이며 사라졌더랬다.
현 사교계의 꽃이라 불리는 붉은 머리의 영애도, 대대로 고관대작을 맡았던 명문가의 막내딸도, 긴 목이 사슴처럼 우아하다고 찬양을 받는 아가씨도 어떠한 인상도 남기지 못하고 그를 스쳐 지나갔다. 투명하게 비치는 호감이든 교태 섞인 추파든 모른 척하고 보니 남자를 좋아한다는 소문까지 퍼졌다.
주저주저하며 혹시 소문이 사실이냐고 물어 오는 릴리에게 기함을 하며 부정했지만, 그녀는 한동안 미심쩍어하는 눈치였다. 성적 지향 때문에 소개받는 것을 거절했던 것이라면 자신이 큰 잘못을 저질렀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으리라.
“오라버니, 그동안 저 때문에 곤란하셨죠. 여성분이 취향이 아니신 줄은 몰랐어요. 아, 물론 저에게 말씀해 주실 필요는 없지만…….”
“릴리.”
“네?”
“나는 남자를 좋아하는 것이 아니다. 여자를 좋아해. 그렇다고 해서 모든 여성을 좋아한다거나 아무 여자나 좋아하는 게 아니다. 알겠느냐?”
“오라버니는……, 눈이 엄청 높으신 거군요.”
심각한 분위기로 고개를 주억거렸던 릴리는 한동안 잠잠하더니 오랜만에 만나서 다시 그 화제를 꺼낸 것이다. 포기를 모르는 릴리의 집요한 성격을 생각하면 에밀리 양을 한 번 정도는 만나 봐야 할 것이다. 일방적으로 바람맞혔던 것은 자신의 잘못이 맞으니 만나서 정중하게 사과를 해야겠지. 틸리안은 방에 늘어져 짧은 머리를 헝클였다.
이 집에 온 것이 잘못이었을까. 미덥지 못한 오라버니로 릴리에게 걱정이나 끼치고, 폐가 될 마음을 죽이지도 못해 불편하게 굴고 있었다.
“오라버니. 주무세요?”
“아니다. 들어와.”
틸리안은 몸을 일으켜 빠르게 옷매무새를 다듬었다. 릴리는 브라이트를 안고 조용히 방으로 들어왔다. 아기를 안는 폼이 제법 능숙했다. 브라이트는 엄지를 입에 물고 새근새근 잠들어 있었다.
“무슨 일인 게냐.”
“부탁드릴 게 있어서요.”
“부탁?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들어주마.”
내가 네게 해줄 수 있는 건 그 정도뿐이니까.
“브라이트의 대부가 되어 주시겠어요?”
“……대부?”
“네. 브라이트의 대부가 되어 주실 분으로는 오라버니밖에 없는걸요. 해 주실 거죠?”
릴리가 브라이트를 그에게 넘겨주며 해사하게 웃었다. 가슴팍에 닿는 갓난아기의 체온이 뜨끈했다.
“그 자……, 하이드 경도 동의한 건가?”
“네. 좋다고 하셨어요. 브라이트의 대부가 되어 주신다면 영광일 거예요.”
틸리안은 하이드를 떠올리며 눈썹을 모았다. 그 자식이 진심으로 동의했을 리가 없었다. 아마 억지로 승낙했겠지. 하이드가 열 받아 할 것을 생각하니 조금 유쾌해졌다. 틸리안은 브라이트의 통통한 뺨을 살며시 쓰다듬었다. 아기가 가물가물한 눈을 뜨며 배시시 웃었다. 릴리를 쏙 빼닮은 무해한 웃음이었다. 세상의 해악 따위는 모르는 순진무구한 얼굴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편해졌다.
“네 아이의 대부가 될 수 있다면, 나에게 영광이겠지.”
그의 대답에 릴리가 기뻐하며 고맙다며 덥석 그의 손을 잡았다. 틸리안은 그 손을 어색하게 바라보다 손을 빼는 대신 그녀의 손을 잡아 끌어 입술에 가져다 댔다.
“릴리. 행복하니?”
“네? 그야……, 행복해요.”
“그럼 되었다.”
릴리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했고, 틸리안은 그녀의 손을 놔주고 몸을 일으켰다.
“저녁 먹기 전에 성을 둘러보고 오겠다.”
“제가 안내해 드릴게요.”
“혼자 바람이나 쐴까 해.”
“그러세요? 그럼 오라버니, 식사 시간 전에 오세요.”
“그래. 아, 릴리. 에밀리 양에겐 내가 직접 편지를 보내 약속을 잡겠다.”
“와아, 정말이에요? 진짜지요?”
“그래. 그러니 이제 뚜쟁이 노릇은 그만 해.”
“네에에. 오라버니가 당장 결혼하길 바란다기보다는, 요즘 일만 하시면서 사람도 안 만나고……, 매사에 너무 무심하셨잖아요.”
“…….”
“그래도 이런 얘기를 할 때만큼은 반응하시기도 하고……, 인기 있는 오라버니를 두니 괜히 제가 으쓱해져서 그랬어요. 오라버니는 이런 데 둔하시잖아요. 다른 아가씨들이 얼마나 애석해하는지 몰라요.”
틸리안은 릴리가 바닥을 쳐다보며 꼼지락대는 모습에 대답하는 대신 눈썹을 치켜 올렸다.
“……죄송해요. 이제 안 그럴게요.”
“그래.”
그는 일부러 표정을 굳혔다. 그리고 그런 자신의 눈치를 보는 릴리를 보고 피식 입꼬리를 올렸다. 릴리에게 화낼 수 있을 리가 없는데도 마치 그가 그럴 수도 있는 것처럼 구는 그녀가 귀여웠다. 릴리라면 얼마든지 멋대로 굴고 저를 휘둘러도 좋았다.
울창한 숲속에 오니 공기가 신선했다. 외로움을 많이 타는 릴리는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틸리안은 혼자 있는 것이 익숙했다. 바르딘 자작가는 그녀가 머물기 전부터 적막했고, 자신은 그 안에서 나름의 고요를 즐겨 왔으니까. 불필요한 소란은 마음속에 묻어 두는 것이 옳았다. 아마 자신은 꽤 오랫동안 독신으로 지내게 될 것이다. 그래서 릴리의 걱정을 사게 될지도 모르지만……, 그 정도는 괜찮겠지. 딱 이 정도로만.
[교육입니다, 아가씨] 외전 마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