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식
짙은 남색의 정장은 주름 하나 없이 빳빳했다. 편의를 위해 짧게 친 머리를 빈틈없이 넘기자 이마에 붉게 아문 상처가 드러났다. 멀끔한 옷차림을 하고 있었지만, 사내의 얼굴은 초상집에 가는 것처럼 우중충했다.
“아버지, 릴리의 결혼식에 다녀오겠습니다.”
틸리안은 자작의 방 앞에서 서서 말했다.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자작은 결국 그의 아들이 이 사태에 커다란 공헌을 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틸리안, 그가 제 입으로 직접 밝혔으므로. 자작은 틸리안의 덤덤한 고백에 재떨이를 던졌다. 그는 충분히 피할 수 있었지만 피하지 않았다.
자작은 이마에 피를 닦지도 않고 꼿꼿하게 서 있는 제 아들을 보고 뒷목을 잡고 쓰러졌다. 자작은 저와 너무도 닮지 않은 아들에 대한 실망에 침음을 삼키며 그를 내쫓았다. 그 이후로 틸리안은 자작을 볼 수 없었다. 대화를 거부하고 몸져누워 버린 아비에게 아들은 아침저녁으로 문 앞에서 인사를 올렸다.
침묵만이 자리한 문 앞에서 고개를 숙여 인사한 틸리안은 조용히 계단을 내려갔다. 마차 안에서 창밖을 향한 그의 눈에는 아무것도 들어오지 않았다. 저만치서도 눈에 띄는 하얀 저택이 그의 목적지였다. 정원은 만발한 꽃으로 향기로웠다. 신경 써서 가꾼 티가 나는 화려한 정원이었다.
릴리의 취향일까. 실없는 생각을 하며 마차에서 내렸다. 널따란 정원은 야외 예식장으로 꾸며져있었다. 하얀 꽃과 하얀 레이스가 푸른 잎사귀로 감긴 기둥 위에 장식되어있었다. 많지도 않은 하객의 초대석 앞에는 우아한 식탁과 하얀 식탁보가 놓여있고, 그 위에 꽃잎이 흐드러져 풍성한 하얀 꽃이 화병에 꽂혀있었다.
하이드는 검은색의 세련된 정장을 입고 서서 여유로운 얼굴로 하객을 맞이하고 있었다. 틸리안을 발견한 그가 느긋하게 다가왔다. 눈을 휘며 웃는 뻔뻔한 낯짝에 틸리안의 턱에 힘이 들어갔다.
“아, 틸리안 경. 요즘 많이 바쁘실 텐데도 시간 내서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릴리의 결혼식인데 제가 당연히 와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이드의 말대로, 틸리안은 요즘 눈 붙일 시간도 없이 바빴다. 엄청난 벌금을 내기 위해서는 벌여놓았던 일을 모두 처리해야 했다. 수시로 불려가 수사에 협조를 해야 했고 정신없는 와중에도 기사단의 일을 게을리할 수도 없었다. 그가 어떤 일들로 바쁠지 빤히 아는 하이드가 살살 약 올리는 말을 하며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맞잡은 손아귀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누구 하나 먼저 손을 놓지 않은 살벌한 순간, 누군가 옆에서 틸리안을 불렀다.
“어머, 틸리안 경이라면 바르딘 자작가의…….”
“아. 맞습니다. 틸리안 바르딘입니다.”
“말로 들었던 것보다 훨씬 훤칠한 미남이시네요.”
릴리의 어머니는 그를 보고 활짝 웃었다. 틸리안은 그 얼굴에서 릴리를 발견할 수 있었다. 조곤조곤 말을 걸어오는 그녀와 대화를 나누자 마음이 조금 편해지는 것 같았다.
결혼식장은 커다란 규모에 비해 사람이 적었다. 자작의 부재를 알게 된 릴리의 부모들은 씁쓸하게 웃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신문을 자세히 읽지 않더라도 그의 가문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대서특필되어 있으니 모를 수가 없었다.
가볍게 어깨를 토닥이는 손짓에서 다정함이 묻어났다. 염려가 담긴 부부의 얼굴에 틸리안의 마음에 동요가 일었다. 릴리의 형제자매가 차례로 릴리를 잘 돌봐주어서 감사하다며 말을 걸어왔다. 조그만 여동생 셋이서 앙증맞게 치마를 올려 인사를 했을 때는 무뚝뚝한 그도 미소 짓지 않을 수 없었다.
“릴리가 틸리안 경을 기다리고 있을 거예요. 대기실에 가보시지 않겠어요? 릴리가 틸리안 경이 얼마나 잘해줬는지 한참을 얘기하더라고요. 정말 좋은 분이라고 칭찬 많이 했어요. 후후. 우리 애가 경을 엄청 따랐나 봅니다. 아 참, 제가 주책없이 너무 붙잡았네요. 얼른 가보세요.”
동화 속에나 있을 법한 화목한 가정의 모습에 미소 짓던 틸리안이 릴리의 엄마가 하는 말에 멈칫하다 이내 고개 숙여 인사하고 릴리를 만나러 걸음을 뗐다. 신부 대기실을 향한 짧은 거리를 걷는데도 발걸음이 땅에 들러붙은 것처럼 무거웠다. 뱃속이 울렁거리는 기분에 틸리안은 릴리가 있는 방문 앞에 멈춰서 숨을 들이켰다.
벌컥.
“으앗, 깜짝이야……. 틸리안 도련님……?”
“아.”
그가 문을 열기도 전에 안에서 문이 열렸다. 메리가 놀란 심장을 붙잡고 틸리안을 동그란 눈으로 쳐다보았다. 역시 여기서 일하고 있었나. 릴리가 이 하녀에게 정을 붙이고 아끼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그녀가 이곳에서 일하는 게 다행이라 여겨졌다. 그러나 메리는 전 고용주를 만나서 당황한 듯 눈을 두어 번 깜빡이더니 인사를 올리고는 문을 열어둔 채 빠르게 사라졌다.
“오라버니……?”
릴리가 문 안쪽에서 부케를 들고 앉아있었다. 그를 발견하자 그녀의 얼굴이 꽃처럼 화사하게 피어났다. 섬세하게 반짝이는 베일과 풍성한 치맛자락에 둘러싸인 새 신부는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하얀 웨딩드레스를 입은 그녀는 정말 행복해 보였다. 호박색의 눈동자가 기쁨으로 반짝였다. 생기가 넘치는 밝은 얼굴에 그는 분명 기뻐야 했다. 그는 그녀의 행복을 바라마지 않았으니까.
“오랜만이구나.”
“그러게요. 바쁜 일이 끝나면 자주 뵐 수 있겠지요?”
“……그 고양이 꽤 살이 붙었으니, 다음에 보러오렴.”
“제가 데려갔으면 좋았을 텐데, 오라버니가 고양이를 좋아하시는 줄은 몰랐어요.”
자신이 특별히 고양이를 좋아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러나 돌보던 고양이가 이곳에 있으면 그녀가 종종 보러올 테니까, 하는 얄팍한 기대는 보드라운 털 뭉치를 그의 저택에 들이게 했다.
“릴리. 행복해 보이는구나.”
“행복해야지요. 그리고……, 저는 오라버니도 행복하셨으면 좋겠어요.”
그의 표정이 굳어있었던 탓일까. 릴리가 다가와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의 뺨에 손을 올렸다. 하얀 레이스 장갑이 까슬했다. 그의 깊은 눈동자가 미미하게 떨렸다. 릴리는 피로로 까칠해진 피부를 어루만지며 슬픈 얼굴로 그와 눈을 마주했다.
“나 때문에 그런 표정 지을 거 없다. 그저 조금 피곤할 뿐이야.”
“오라버니는 저한테 소중한 사람인걸요. 걱정하는 게 당연해요.”
릴리는 그가 단순히 피곤한 것만은 아님을 알고 있었다. 하이드에게 전해 들은 상황은, 틸리안에게 가혹했으니까. 그에겐 죄가 없음에도 그는 아비 몫까지 죗값을 치르고 있었다. 그녀는 모든 일이 끝나 생각할 시간이 생긴 뒤에야 틸리안이 자신을 얼마나 아껴주었는지 뒤늦게 깨달을 수 있었다.
그를 애처롭게 바라보는 릴리의 얼굴에 이상하게 짜릿했다. 그녀가 그를 걱정해서 슬픈 표정을 짓는 것이 기쁜 것이다. 제 저열한 속내에 틸리안이 쓰게 웃었다.
“오늘 정말로 예쁘구나.”
“옷이 날개지요. 꽤나 화려하죠? 수도에 올라오고 내내 호강하는 것 같아요.”
릴리가 제 치맛자락을 손에 쥐고 한 바퀴 빙그르르 돌았다. 사르륵, 겹겹이 쌓인 가볍고 반투명한 천이 그녀의 움직임에 붕 떴다가 나붓하게 가라앉았다. 틸리안은 그 가벼운 몸짓에 시간이 늘어진 것처럼 느리게 흐르는 것 같다고 느꼈다.
아주 많은 시간이 흐른 뒤에도 이 순간의 잔상이 오래 남아있으리라. 틸리안은 직감했다.
“제가, 너무 들떴나요?”
“아니다. 오늘은 기쁜 날 아니냐. 들떠야 정상일 테지.”
비정상적인 것은 오로지 그 하나뿐이었다.
틸리안의 넋 나간 얼굴에 릴리가 분위기도 못 읽고 주책이었나, 싶어 민망하게 웃으며 물었다. 오늘의 그는 평소와 달라 보였다. 조금 멍하고 어쩐지 슬픈 것 같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상황을 생각하면 들뜨는 것이 더 이상했다.
“저는 오늘 오라버니가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요. 워낙 바쁘시니까요. 못 오셨어도 이해했겠지만, 오라버니가 오셔서 기뻐요. 이기적이죠?”
“아니. 그렇지 않다. 당연히 와야지.”
이기적인 것은 자신이다. 틸리안은 단단한 겉껍질 안에서 꿈틀대는 불쾌한 감각의 원인을 알 것 같았다. 여태 그녀의 행복을 바란 줄 알았건만, 자신은 그렇게 훌륭한 인간이 못 되었다. 그는 그저, 자신이 그녀를 행복하게 만들어주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지금 사랑스럽게 미소 짓는 그녀를 보는 게 괴로운 것이리라. 깨달음은 고통스러웠다.
그녀를 처음 본 순간부터 잘해주고 아껴주고 싶었던 마음은 상냥함이나 훌륭한 마음에서 비롯된 것 따위가 아니었구나. 틸리안이 스스로를 비웃었다. 그는 자신의 저열하고 졸렬한 욕망에서 제 눈을 돌리고 못 본 척했던 것뿐이었다.
되돌아간다면, 자신의 추악한 본심에 솔직했더라면 그에게도 기회가 있었을까?
틸리안이 릴리를 앞에 두고 고개를 숙였다. 바닥을 향하는 시야에 그녀의 하얀 치맛자락이 나풀거리며 가까워지는 것이 보였다.
그는 기사다. 기사에게 생각이 많은 것은 좋은 덕목이 아니었다. 후회는 어리석다. 앞으로 정진하고 나아가는 것 외에 다른 길은 없었다. 뼈아픈 깨달음도 쓰라린 후회도 삼켜야 했다. 그가 고개를 들어 릴리를 바라보았다. 조금은 홀가분해진 얼굴이었다.
“릴리.”
“오라버니, 왜…….”
그가 기사 서임식을 치렀을 때처럼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 모습은 청혼하는 사내와도 지극히 닮아있었다. 릴리의 눈이 사정없이 떨렸다. 그녀는 어정쩡하게 서서 그를 바라보며 그가 왜 이러는지 혼란스러워했다. 틸리안이 그녀의 손을 잡고 그녀의 장갑을 내렸고 릴리는 입을 반쯤 벌리고서 그 광경을 보고 있었다. 그가 드러난 맨살에 입 맞추고 말했다.
“릴리. 그자가 널 울린다면, 주저하지 말고 내게 오거라. 너는 앞으로도 내 가족이니까……. 자작가는 언제나 널 환영할 거다.”
“오늘 결혼하는 새 신부에게 하실 말씀은 아니지 않나요?”
릴리가 웃으며 그의 앞에 쪼그리고 앉아 시선을 맞췄다. 웨딩드레스가 구겨지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는 모습에 틸리안이 하하, 웃었다.
“오라비로서 이 정도는 해도 되는 건가.”
“!”
그가 그녀를 안아 일으키며 이마의 베일을 살짝 들고 가볍게 입 맞추었다. 릴리의 뺨이 분홍빛으로 물들었다. 적어도 남자라고는 의식해주는 걸까. 그 소박하고 하찮은 성과에 그가 미소를 띠었다. 그 웃음에 놀림당했다고 생각한 릴리의 표정이 샐쭉해졌다.
“릴리. 새 신부 표정이 그게 무어냐.”
“오라버니가 놀리시니까 그렇죠.”
“농담 아니다. 울리지 않더라도 싫증 나면 자작가로 찾아와.”
릴리는 입술을 삐죽이면서도 그의 표정이 밝아진 게 기뻐 뾰로통한 얼굴을 유지하지 못하고 입가에 슬며시 웃음이 번졌다.
“아가씨. 이제 슬슬 대기하셔요.”
“아, 알겠어. 오라버니, 이제…….”
“그래. 나는 먼저 나가마.”
그가 나가는 것과 동시의 릴리의 아버지가 들어왔다. 틸리안은 조용히 눈인사를 하고 그의 자리로 향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릴리가 아버지의 손을 잡고 천천히 걸어 나왔다. 꽃송이가 흩뿌려진 새하얀 카펫과 베일 너머의 수줍은 신부는 완벽한 그림이었다.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신부와 손뼉을 치며 기뻐하는 하객들. 축복하듯 화창한 날씨. 릴리가 아버지의 손을 놓고 하이드와 함께 서 있는 모습에서 눈을 떼고 싶어도 뗄 수가 없었다. 그는 이 장면을 오래오래 곱씹어야 했다.
릴리가 기댈 수 있는 오라비가 되기 위해.
그녀가 언제는 돌아올 수 있는 버팀목이 되겠다는 말은 진심이었지만, 그녀가 우는 일은 없는 편이 좋았다. 틸리안은 이번에는 진실로, 그녀의 행복 자체를 바라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래야 했다. 식이 끝날 때는 아까 전하지 못한 축하 인사를 전해야 하니까.
“틸리안 경. 그대에겐 이 결혼이 쓰리게 다가올지도 모르겠군.”
“……제르시스 황자 전하. 그간 안녕하셨습니까.”
“나야 그대 덕에 안녕했지. 그대는 그렇지 못한 듯 보여.”
요즘 마주치는 사람마다 지나치게 그의 안색을 살피며 걱정 어린 말을 건네곤 했다. 무뚝뚝한 틸리안은 늘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을 하곤 했고, 그것은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걱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러나 저는 괜찮습니다.”
“그대는 처음 보았을 때나 지금이나 한결같군. 반응도 한결같이 재미없어. 그러나 나는 그다지 경의 튼튼한 몸을 걱정한 게 아니었어. 지금 신부를 보고 있는 얼굴을 말한 거였다.”
제르시스의 눈빛은 그의 속내를 완전히 간파한 것처럼 날카로웠다.
‘이미 표정으로 다 드러났던가.’
틸리안은 구태여 숨기려 하지 않고 덤덤하게 말했다.
“그다지 즐겁지 않은 것은 사실입니다.”
“호오? 경은 릴리의 파혼에 찬성했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흥미롭다는 듯, 제르시스의 눈이 반짝였다. 틸리안은 그를 보지도 않고 주례 앞에 서 있는 릴리만을 바라보았다.
“그렇다고 이 결혼에 찬성하는 것은 아니니까요.”
‘릴리의 남편감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것이로군.’
그 대답에 제르시스가 알만하다는 듯 한쪽 눈썹만 치켜 올렸다. 틸리안이 바르딘 자작이 데려온 수양딸을 굉장히 아낀다, 피가 이어지지 않았음에도 우애가 좋은 남매다, 라는 말을 들었던 것도 같았다. 흐응. 그래. 각별한 사이가 아니고서야 그가 그런 희생을 치르지도 않았을 것이다.
“경이 새 부대 창설에 반대하는 것도 같은 이유인가?”
제르시느는 틸리안이 총기병을 황실 군에 편입하기를 반대했던 것을 입에 올렸다. 그 병사들이 제르시스의 명으로 하이드가 제 영지에서 몰래 키우고 있던 사병이었다는 사실이 알음알음 퍼지고 있었다. 제르시스로서는 틸리안에게 유감을 표하기 충분한 일이었다.
“그 일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제 개인적인 신념의 문제이니까요.”
“나쁠 거 없잖아. 제국은 오랜 평화와 강대국이란 칭호에 멈춰있었어. 멈춰있으면 녹이 슬지. 새로운 문물을 거부하면 도태될 뿐이야.”
“…….”
“뭐, 난 그대의 착실한 면도 좋아해. 그대가 보직을 유지할 수 있었던 건, 내가 그런 그대를 어여삐 여겨서니까.”
“황자 전하께 밉보일 생각은 없었습니다.”
“알고 있다. 그대처럼 충직한 이들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경이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게 저놈이라는 건 세 살짜리 애가 봐도 알겠어.”
“……릴리는 저놈에게 과분합니다.”
“우리가 아는 귀족 중에서 사랑으로 맺어진 이들이 있던가? 나도 이 결혼을 찬성하는 입장은 아니었어. 하이드 경에게 날개를 달아줄, 권세가의 여식과 맺어지는 편이 훨씬 나으니까. 그렇지만, 저놈은 내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더군. 아주 불경한 놈이야.”
아, 그런 표정으로 보지 말게나. 릴리 영애에게 개인적인 감정은 없으니. 오히려 그녀의 영민함과 기개를 높게 평가하고 있어. 틸리안이 반박하려는 듯 입을 열자 제르시스가 황급히 덧붙였다. 그러고는 과거를 떠올리는 듯 흐릿한 눈으로 말했다.
“난 저놈에게 더운 피가 흐르기는 하는지 궁금했었다. 누구에게도 정을 주지 않는, 냉정하고 출세밖에 모르는 놈이었으니까. 그렇게 계산적인 놈이 사랑에 빠져 어리석을지도 모르는 감정적인 선택을 한 거야. 그래서 지켜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더군. 사랑으로 맺어진 부부가 얼마나 행복하게 사는지.”
“그러셨습니까.”
“이왕 이렇게 된 거 저놈 너무 미워하지 말라고. 저 두 사람, 누가 봐도 행복해 보이지 않는가. 이 속 시커먼 사교계에 하나쯤은, 서로 사랑하는 부부가 있는 것도 좋지 않겠어?”
“……예.”
제르시스는 그의 어깨를 두어 번 두드려주곤 식이 끝나 인사를 돌고 있는 부부에게 다가갔다.
틸리안은 멀리서 화사하게 웃고 있는 릴리를 지켜보았다. 그녀는 당장 하늘로 날아간다 해도 놀라지 않을 만큼 천사 같았다. 확실히, 그녀는 지금 행복해 보였다. 그가 그녀를 본 이래로 가장.
아무래도 이번 생에서 릴리를 행복하게 해주는 것은 자신의 몫이 아닌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자신은 지금처럼 그녀의 가족으로, 오라비로 남아 그녀의 행복을 빌어주어야겠지.
릴리가 멀찍이 서 있는 틸리안을 발견하고 활짝 웃었다. 틸리안은 그녀의 미소에 마주 웃으며 그녀에게로 천천히 걸어갔다. 아까 전하지 못했던 축하 인사를 전해야겠다.
‘결혼, 축하한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