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1화 (21/28)

결혼 준비

“아가씨, 저택은 마음에 드십니까?”

“정말 멋진 저택이라고 생각해요. 언제부터 저택을 수리하셨던 거예요?”

“저택이 규모가 크고 가격대가 상당해 그동안 사는 사람이 없었는지 이 저택을 매입했을 당시에 관리가 안 되어있더군요. 사고 거의 바로 수리에 들어간 것 같습니다.”

거짓말이다. 외관도 멀쩡하고 내부도 조금 칙칙했을 뿐, 먼지만 닦아내면 수리가 필요하지 않은 집이었다. 그래서 하이드도 얼마간은 그대로 살다가 황자와의 계획을 변경하고 소넬가를 몰락시키기 위한 작업에 착수할 때 쯤 수리를 시작했다. 그는 그저 낡았으니 새단장하는것뿐이라고 합리화했지만, 그의 취향도 아닌 화사한 내부 장식이 누구를 의식한 결과인지는 빤했다.

“그럼 신방만 마음에 안 드시는 걸까요.”

“그런 게 아니라는 거 아시잖아요.”

하이드가 짐짓 슬픈 얼굴로 물었지만 릴리는 다가오는 그를 팔을 뻗어 저지했다. 하이드는 바쁘게 황궁을 드나들며 남은 일처리를 하느라 바빴고, 릴리는 드레스를 새로 맞추고 저택을 살피느라 여념이 없었다. 저녁이 되면 하이드가 출궁하고 릴리의 옆을 한시도 떨어지지 않으려 했으나 그녀는 지금처럼 살살 그를 피했다.

“선생님. 말씀드렸잖아요. 아직 결혼한 것도 아니니까 같은 방을 쓸 수는 없어요…….”

하이드의 눈살이 좁아졌다. 그의 잘생긴 눈썹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한쪽만 구겨졌다. 릴리의 태도는 무를지언정 의지는 완강했다. 그녀는 하이드가 예상치 못한 곳에서 보수적이고 전통적인 가치관을 내세우며 한방 쓰기를 거부하고 있었다.

내일이면 그녀의 가족이 오기로 했으니 오늘 밤만 버티면 결혼 전까지는 그도 아무 말 못 하리라. 물론 하이드는 그녀의 얄팍한 계획을 전부 짐작하고 있었다. 이미 끈적한 정사를 나눈 두 사람이 한 지붕 아래에서 따로 잔다는 게 그로서는 전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물론 이해가 간다고 해서 마음에 들 것도 아니었다.

“낮에는 바빠 얼굴도 제대로 보지 못하는데 밤에도 떨어져 있고 싶으신가요?”

결혼식도 올리기 전에 사랑이 식어버리신 것은 아닌지, 저는 걱정됩니다. 하이드가 시무룩한 얼굴로 작게 덧붙였다.

사람이 변해도 너무 변한 거 아닌가? 그렇게 무심하게 굴던 사내가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그녀의 사랑을 갈구하니 릴리는 적응하기가 힘들었다. 저 처연한 표정이 반쯤은 연기라고 생각하면서도 마음이 약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녀는 그런 사람이었으니까. 그는 그녀의 여리고 물러빠진 성격을 영악하게 이용해 먹었다.

“아니에요, 자기 직전까지 붙어있잖아요…….”

“붙어있다니요. 이게 어딜 봐서 붙어있는 겁니까? 저는 며칠 전부터 아가씨 손가락 하나 만지지 못했는데 말입니다.”

“바로 옆에 있잖아요.”

릴리가 그의 눈을 피하며 대답했다. 그녀라고 그와 닿고 싶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나, 그간 그가 해왔던 것을 떠올리면 결코 닿는 것 정도로 끝나지 않을 것임을 알기에 아예 접촉을 차단하는 것이었다.

릴리는 그가 좋아서 죽겠다는 얼굴로 웃으면서도 이 문제는 양보할 생각이 없는 듯 보였다. 그날 저녁, 릴리는 별이 총총할 때까지 하이드와 건전하게 대화만 나누다 슬금슬금 제 방으로 돌아갔다. 하이드가 그녀를 내버려 둘 리 없었으나, 릴리가 도망치는 것을 쫓아가자 꺄아악 비명을 지르며 달려가는 통에 심하게 어이없어진 하이드가 멈칫한 순간, 그녀가 약삭빠르게 문을 잠근 것이다.

차마 열쇠로 문을 열수는 없었기에 하이드는 이를 갈며 설욕을 다짐했다. 그렇게 그는 이전보다 더 괴로운 독수공방을 시작했다. 낮에는 그녀의 가족들이 보는 앞에서 고상하고 점잖게 행동하고, 밤이면 냉수로 몸을 식혔다.

그리고 한 지붕 아래서 그녀를 만지지도 못하고 손가락만 빨아야 하는 고문은 하이드의 신혼 계획과 야망을 무럭무럭 키웠다.

* * *

“선생님. 이건 너무 과해요. 저희는 손님도 많지 않잖아요.”

릴리는 예식의 성대한 규모에 기가 질려 말했다. 그녀의 말대로 두 사람의 결혼식에 하객은 소수였다. 릴리는 물론이고 하이드조차 수도에서 초대할 사람이 많지 않았다. 그의 휘하에 병사들은 많았지만, 하이드는 자신의 지인을 초대할 생각이 없었다. 수도에 그의 존재를 드러낸 지 얼마 되지 않아 사람들은 너도나도 그에게 줄을 대려 안달복달하였으나 자신의 신부는 분명 귀족들의 시선을 상당히 의식할 것이었다.

“구경꾼이 많으냐 적으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치만 전 정말 이렇게까지 화려할 필요가 있나 싶어요. 마음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렇다면 이대로 진행하는 데에 동의하시겠네요. 아가씨와 성대한 결혼식을 올리고 싶은 것이 제 마음이니까요.”

“하아아.”

릴리가 그의 앞에서 대놓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고집이 완강했다. 정말, 그녀가 그를 말로 이기기란 쉽지 않았다.

“그래도 이건, 실현 가능성이 너무 떨어지잖아요. 고작 이제 이 주도 안 남았는데 이걸 어떻게 다 준비해요.”

“이미 준비되어있습니다.”

“네……? 언제요?”

“그래, 아가씨. 이 자식은 아가씨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변태같이 계획적인 인간이야. 스테이크 줄 사람은 생각도 않고 있는데 수프부터 마시는 놈이라니까? 그런데 이거, 첫 부부싸움이야? 너무 흥미진진하네. 좀 싸우고 지지고 볶고 그래라.”

릴리와 하이드가 말싸움 하는 것을 흥미롭게 지켜보던 더글라스가 말을 보탰다. 하이드가 단박에 그를 노려보며 눈으로 욕했다. 더 말하면 후환이 두려울 것이라는 경고를 더글라스가 못 알아들을 리 없었으나 그는 신이 나서 릴리의 옆자리로 몸뚱이를 옮겨가며 입을 놀렸다.

“아가씨. 지금이라도 도망가는 게 좋을 걸? 쟤 눈빛 봐, 눈빛. 어디 살벌해서 살겠어?”

“내가 너도 아니고 아가씨를 살벌하게 볼 일은 없겠지. 더글라스, 볼일은 다 끝나지 않았나?”

“아아, 너한테 볼 일이 끝난 거지. 지금은 아가씨 손님이야.”

“맞아요, 선생님. 손님에게 그렇게 눈치 주는 사람이 어디에 있어요?”

릴리의 핀잔에 더글라스가 씨익, 호쾌하게 웃었다. 더글라스는 이 저택에서 릴리를 다시 만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한 가지 깨달음을 얻었다. 바로 하이드가 릴리 앞에서는 맥을 못 춘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이 상냥한 아가씨는 저에게 진 빚이 있어 보통은 더글라스의 편을 들어주었다. 하이드가 열 받은 속을 꾹 눌러 참고 아가씨 앞이라고 점잖은 척하고 있는 게 그렇게 고소하고 짜릿했더랬다. 더글라스는 기쁨을 숨기지 못하고 웃음을 실실 내보이며 한 손으로 성글게 얼굴을 가렸다.

“더글라스. 내일, 같이 영지로 가야 하는 걸 까먹었나 보군.”

“아, 맞다.”

하이드의 말에 더글라스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악 빠졌다. 굳어버린 더글라스를 내버려두고 하이드는 릴리의 어깨를 안아 다른 곳으로 이끌어 자리를 피했다.

“아가씨. 언제까지 남편을 선생님이라고 부르실 겁니까?”

“그러는 선생님도 계속 아가씨라고 부르시잖아요.”

“이젠 아니지요, 부인.”

“얄미워요.”

“부인은 저한테 사랑한다는 말보다 밉다, 나쁘다는 말을 더 자주 하시는 거 압니까?”

그의 말을 반박할 수가 없어 릴리가 눈동자를 굴렸다.

“애정 표현에 게으르면 혼낼 겁니다, 부인.”

“이제 선생님도 아닌데 혼내시려고요?”

“부인이 아직도 선생님이라고 부르시지 않습니까.”

그의 말에 릴리가 머뭇거리다 그의 뺨에 쪽, 소리 나게 입 맞추고 뽀르르 도망쳤다.

‘시발. 죽겠군.’

답지 않은 금욕에 피말라가는 사내에게는 너무 가혹한 처사였다. 하이드가 릴리를 쫓지도 못하고 욕실로 향했다. 적어도 한 시간은 냉수를 들이부어야겠구먼.

* * *

오늘은 릴리가 웨딩드레스를 시착하는 날이었다. 릴리는 아침부터 들뜬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어린 시절, 누구나 한 번쯤 자신이 웨딩드레스 입은 모습을 상상하곤 한다. 그녀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좋아하는 남자와 혼인할 수 있다는 행운으로도 충분했지만, 자꾸 자꾸 좋은 일들이 생겼다.

급하게 치르는 결혼식이라 웨딩드레스를 제작하기에는 기간이 빠듯했다. 기성품을 몸에 맞게 고치는 데에도 모자란 시간이었다. 그러나 놀랍게도―더글라스 말로는 소름 끼치게도―하이드는 그녀의 웨딩드레스마저 미리 준비해놓았다. 릴리가 옷을 맞췄던 고급 의상실에 그녀의 옷본이 남아있었으니 그녀 몰래 드레스를 맞추기가 그다지 어려운 일은 아니었지만, 하이드는 그녀의 추궁에 입을 다물고 웃을 뿐이었다.

셋 다 너무 마음에 들어서 고르기가 힘들어 릴리는 행복한 고민을 했더랬다. 우아하고 성숙하게 몸 선이 드러나는 드레스, 은은하게 비치는 소재가 겹쳐져 치마가 풍성하고 청순한 드레스, 목깃에는 섬세한 레이스가 올라오고 가슴 부분은 트여있는 다소 요염한 드레스…….

전부 다 값비싼 재료를 아끼지 않고 심혈을 기울여 만들어진 것들이었다. 다 너무 예뻐서 괴로울 지경이라 릴리의 눈이 난처하단 빛을 띠었다. 하이드는 정 고르기 어려우면 중간중간 갈아입으라고 말했지만, 이는 여성이 옷 입는 번잡하고 피곤한 과정을 고려하지 않는 것이었다.

하물며 인생에 한 번뿐인 결혼식을 위한 드레스를 입는 것은 얼마나 힘들겠는가? 릴리가 눈을 홉뜨자 하이드가 어깨를 으쓱이며 자신은 그녀가 뭘 입어도 좋다고 말했다. 릴리는 고민하다 결국 평소 그녀의 취향대로 청순한 디자인을 골랐다. 그렇게 그날은 드레스를 겨우 골라 가봉을 하고 드디어 오늘, 완성품을 입게 되었다.

“오늘은 황궁에 안 가셔도 되시나요?”

“오늘 같은 날은 부인과 함께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애초에 저는 충분히 제 할 일을 끝냈는데도 눈치 없이 자꾸 부르는 황자 쪽이 무능한 겁니다.”

“무능하시다니요. 그런 불경한 말씀 하시면 큰일 나요. 게다가 제르시스 전하는 이 일로 지금 가장 바쁘신 분 중 한 분이시잖아요. 당연히 선, 아니 하이드가 도와주셔야지요.”

“정말 어질고 현명한 말씀입니다, 릴리. 그런데, 부인께서는 남편이 불철주야 집을 비우는 게 마음에 드시나 봅니다?”

“아이, 또 이러신다. 자꾸 서운한 척하면서 더듬지 말아요.”

“들켰습니까?”

“네에!”

릴리가 슬금슬금 옆자리로 건너와 엉덩이를 더듬기 시작한 손을 맵게 때리고 건너편으로 자리를 옮겼다.

하이드는 겨우 낮 시간을 빼 그녀와 함께 의상실을 방문했다. 오늘따라 기분이 좋은 릴리는 마차에 오를 때부터 종알거리며 방글방글 잘도 웃었다. 하이드는 그녀를 따라 기분이 좋았다. 릴리가 좋으면 그도 좋았다. 늘 입는 옷과 그다지 다를 바 없어 보이는데도 그녀는 드레스가 온통 새하얗다는 것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 같았다. 그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감성이었지만, 릴리만 좋아한다면야 그는 그녀의 옷장을 하얀 드레스로 가득 채워줄 의향도 있었다.

릴리가 직원과 함께 탈의실로 들어가 옷을 갈아입는 동안 하이드는 소파에 느긋하게 앉아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옷만 갈아입는 게 아니라 안에서 머리도 다시 매만지고 화장도 덧바르느라 릴리는 생각보다 늦게 나왔다. 신문을 들추며 소넬가가 처참히 무너지고 있다는 즐거운 소식을 음미하던 하이드는 신부의 준비가 끝났다는 말에 신문을 내려놓고 자세를 고쳤다. 커튼이 열리고 릴리가 사뿐사뿐 걸어 나왔다. 한껏 치장을 해서 들뜬 릴리가 하이드의 눈치를 살폈다. 눈동자가 유난히 반짝거리고 앙다문 입꼬리가 슬금슬금 올라가는 것이, 기대하는 바가 명확해 보였다.

하이드는 릴리의 발긋한 뺨을 보고 웃음을 참으며 말했다.

“웨딩드레스답게 화려하군요. 한 바퀴 돌아주시겠습니까, 부인?”

“그냥 보셔도 되잖아요.”

그렇게 말하면서도 싫지는 않은지 릴리가 가볍게 한 바퀴 돌았다. 핑그르르, 풍성한 치맛단이 샹들리에의 빛을 반사하며 영롱하게 빛났다.

“부인의 취향이군요. 마음에 드시나 봅니다.”

“네에. 저어……, 하이드는 마음에 들지 않나요?”

“그럴 리가요. 마음에 듭니다.”

유심히 옷을 뜯어보고는 하는 말이 겨우 저것뿐이라 릴리는 실망한 내색이었다. 평소에는 예쁘다느니,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부인이더니 잘만 떠들면서 이럴 때 별말 없는 게 서운했다.

어쩌면 정말로 그의 눈에 별로여서 그럴지도 몰라. 모처럼 그녀의 맘에 쏙 드는 드레스였지만, 하이드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아무런 보람이 없었다. 어쩌면 그녀의 취향은 유치하고 촌스러워 그처럼 세련되고 고상한 안목을 만족시키기엔 무리일지도 모른다.

그녀가 풀이 죽어서 탈의실로 돌아가 옷을 갈아입으려 하자 하이드가 급하게 그녀를 붙잡았다. 하이드는 릴리의 팔을 잡아당겨 품에 안고 웃음을 터트리며 그녀의 정수리에 계속 입 맞추었다.

“아가씨, 아니 내 부인. 정말, 정말 귀여운 거 아십니까?”

“뭐가요?”

릴리는 이미 기분이 상해서 불퉁하게 물었다.

“당연히 예쁩니다. 정말 세상에서 제일 예뻐요, 릴리. 응? 당신 이마, 눈, 코, 입, 손, 발, 팔다리 다 예뻐서 죽을 것 같아.”

“옷, 옷을 보라고요!”

하이드가 말하는 도중에도 계속 쪽쪽댔다. 그는 눈, 코, 입 등 차례대로 입에 담은 부위에 입술을 부볐다. 그녀의 시야에 고개를 돌려 그들을 보지 않으려 노력하고 있는 의상실 직원들이 보였다. 릴리는 새빨개진 얼굴을 그의 품에 묻어 가렸다.

“그깟 드레스는 꽃받침에 불과합니다. 꽃이 어디 꽃받침 덕에 아름답던가요?”

그래도, 그대가 옷이 마음에 들어서 웃으면 더 예쁘기는 합니다. 하이드가 웃으며 덧붙였다

부끄러움에 의상실에 더 머무를 수 없었던 릴리는 시착을 끝내고서 얼른 저택으로 돌아가자고 하이드를 재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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