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화 (19/28)

아가씨는 대가족

당혹스러울 정도로 정신없이 여행이 결정되었다. 하이드는 바르딘 자작가에서 릴리를 빼내온 후 그의 저택을 소개해 주었고 두 사람은 그다음 날 바로 릴리의 고향으로 향했다.

“너무 갑작스러워서 놀라실 텐데요.”

“그만큼 반가워하시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미리 편지도 보냈으니 그리 놀라지 않으실 겁니다.”

릴리는 하이드의 대답에 그런가요, 작게 웅얼거렸으나 완전히 수긍하지는 못했다. 바로 어제 보낸 편지가 그들보다 빨리 도착할지도 의문이었고 이 충격적인 사태를 자신의 부모가 어떻게 받아들일지가 걱정이었다.

하이드는 그녀의 옆에서 머리카락을 매만지며 태연하다는 듯 굴었지만, 실상 그도 걱정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평소보다 더 각 잡힌 정장과 빈틈없는 머리 모양이 그의 심경을 드러냈다. 마부는 쉴 새 없이 채찍질하며 길을 재촉했다. 하루가 꼬박 걸려 다음날에나 도착할 거리였으나 두 사람은 그날 저녁에 릴리의 고향 집에 도착했다.

릴리의 가족이 그녀의 편지를 받은지 채 한 시간이 지나지 않아 두 사람이 도착한 것이다.

“릴리!”

“언니! 언니!”

흙먼지를 일으키는 거대한 마차가 멈춰 서자마자 릴리가 튕기듯 마차에서 뛰어내렸다. 하이드가 그녀를 내려줄 겨를도 없이 그녀가 서두른 통에 하이드는 그녀가 가족들 품에 안겨 울먹이는 것을 뒤에서 머쓱하게 지켜봐야만 했다.

릴리는 부모를 양팔 벌려 껴안고 울먹이다 금세 웃는 얼굴로 여동생들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그리도 반가울까. 하이드로서는 이해가 가지 않는 광경이었지만 그는 입가를 끌어올리고서 그 훈훈한 광경이 끝나기를 얌전히 기다리고 있었다.

릴리를 닮은 꼬마들은 그녀의 치맛자락에 매달려 서로 안아달라 보채고 릴리의 부모는 뒤늦게 민망해하며 하이드에게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그는 선하고 순박한 인상의 중년 부부의 얼굴에서 릴리의 이목구비를 찾을 수 있었다.

“손님을 맞이할 준비가 제대로 안 되어 있는데 미안해서 어쩌죠? 누추하지만 편하게 있다 가세요.”

“급하게 온 제 잘못인걸요.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전혀 누추하지 않아요. 사랑스럽고 깨끗한 집입니다.”

릴리는 막내를 품에 안아 어르면서 사람 좋아 보이는 얼굴로 그녀의 부모를 대하는 하이드를 경악스러운 심정으로 쳐다보았다. 저 사람이 내가 아는 그 남자가 맞는 걸까? 선생님의 껍질을 뒤집어쓴 저 예의 바른 청년은 대체 누구지? 라는 얼굴이었다. 반면 딸의 얼굴을 보지 못한 부부는 훤칠하고 잘생긴 예비 사위를 흐뭇한 얼굴로 맞이하며 집으로 안내했다.

오랜만에 만나는 큰 언니에게 금세 흥미가 식은 여동생들은 부부를 따라 집으로 들어가는 하이드의 뒤에서 릴리의 치마를 잡아당기며 질문세례를 퍼부어댔다.

“릴리 언니, 저 사람이 언니 남편이야? 진짜 잘생겼다. 둘이 뽀뽀했어?”

“큰 언니, 큰 언니! 수도에 가면 다 저렇게 잘생겼어? 근데 저 사람 부자야?”

“마차 진짜 커. 집도 엄청 커?”

해맑고 사랑스러운 얼굴로 속물적인 질문만 해대는 동생들에게 릴리는 못 이기겠다는 듯 웃으며 한숨 쉬었다. 이 꼬마 악마들이 얼마나 그리웠던가. 고작 반년 남짓한 시간에도 동생들은 꽤나 자라있었다.

“차린 게 별로 없어……. 손님한테 실례네요.”

“무슨 말씀이십니까. 이 정도면 최고의 만찬이죠.”

“어머, 젊은 사람이 말을 참 예쁘게 하네요. 르시엔 경이라고 했지요?”

“엄마. 그게 있지…….”

“왜 그러니, 릴리.”

가면처럼 단단한 하이드의 미소도 이 순간에는 살짝 금이 가버렸다. 릴리의 얼굴에선 핏기가 가셔 창백해지고 눈동자는 사정없이 떨려왔다. 가족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릴리를 바라보았고, 하이드는 다시 여유롭게 입꼬리의 호선을 되찾고 말했다.

“르시엔 경은 지금 감옥에 있을 겁니다, 부인.”

“천천히 설명하려고 했어요. 그게…….”

폭탄선언을 던지고 아무렇지도 않게 자신의 이름을 밝히는 하이드 덕분에 가족들은 혼란에 휩싸였다. 분명, 릴리는 약혼자와 함께 방문한다고 편지하지 않았던가? 그들은 그녀의 약혼자를 직접 만나본 적은 없었지만, 딸의 약혼자 이름마저 모르지는 않았다. 분명 르시엔 소넬이라는 소넬 백작가의 청년이라고 했는데……. 헷갈렸다는 핑계조차 통하지 않을, 전혀 다른 어감의 이름이었다.

릴리는 부모의 의아한 표정과 동생들의 순진한 눈망울을 차례로 곁눈질하고서 하이드를 돌아보았다. 그는 당혹스러울 게 뻔한 상황을 앞에서도 태연자약했다. 그의 뻔뻔함을 조금이라도 닮았다면 이 상황이 덜 참담했을까? 릴리는 음울한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이 남자의 청혼을 받아들인 순간부터 예정된 상황이지 않았던가. 조금 얄밉기는 해도 식탁 밑으로 손을 꼭 쥐어오는 남자가 릴리는 지독하게 사랑스러웠다. 그녀는 민망함에 얼굴을 붉히면서 가족들에게 상황을 설명했다.

“정식으로 소개할게요. 제 약혼자 하이드 경이에요. 곧 백작 작위를 받으실 예정이고요, 또 지난 몇 달간 제게 피아노를 가르쳐주셨었어요. 그리고, 그리고…….”

더 무엇을 설명한단 말인가?

말을 이어나갈수록 릴리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신중한 부부는 그녀의 말을 차마 끊지는 못하고 표정으로 의문을 잔뜩 드러내며 속으로 자신이 알고 있던 정보가 잘못된 것이었는지 혼란스러워하고 있었다.

“큰 언니, 편지에는 다른 이름이지 않았어?”

넷째가 용감하게 부모가 차마 내뱉지 못한 질문을 던졌다. 어떠한 악의도 없는 천진한 목소리에 릴리의 어깨가 점점 더 움츠러들었다. 어떻게 이야기를 시작해야 할지 몰라 난처해하는 새 신부 대신 하이드가 입을 뗐다. 자신이 황자 전하의 명으로 바르딘 자작가에서 임무를 수행하던 중이었다는 사실을 밝히며 무려 황가와의 연줄과 유능함을 드러내는 것으로부터 이야기는 시작됐다.

하이드는 릴리의 약혼자였던 르시엔의 이전 과거 행적까지 낱낱이 읊어대며 그의 부덕과 악행을 까발렸고 황자의 명을 받들어 그를 뒷조사하는 자신의 일을 영웅적 행동으로 포장하길 서슴지 않았으며, 그 과정에서 릴리와 사랑에 빠진 이야기를 소설처럼 낭만적으로 풀어나갔다. 평소에도 그의 언변은 화려하기 짝이 없었으나 만담꾼의 재주가 있었는지는 미처 몰랐던 릴리는 조금 어색한 표정으로 그의 말에 추임새를 끼얹었다.

“가엾은 공작 영애는 계단을 뛰어 내려가다 그만…….”

“어머머, 어떡하면 좋아!”

부인은 남편의 손을 꼭 잡고서 감탄사를 연발하며 막장 같은 이야기에 푹 빠져들었고,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저는 릴리 아가씨를 그 인간에게서 구해내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도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으니까요.”

“우와아, 우리 형부가 정의의 용사라니!”

“진짜 멋져!”

어린 동생들은 그의 영웅적 활약과 큰 언니와의 로맨스에 열광하며 눈을 반짝였다. 평소의 냉담한 사내는 어디로 갔는지, 하이드는 릴리의 가족 앞에서 길들여진 집짐승처럼 얌전하게 굴었다. 그리하여 그가 그들의 사위로 인정받는 데는 한나절도 채 걸리지 않았다. 부부는 하이드의 손을 붙잡으며 수고했노라고, 그런 호색한과 딸을 결혼시켰으면 평생 후회하고 살았을 거라며 눈시울을 붉혔다.

하이드는 자신이 반대했던 기억은 까맣게 잊은 것인지 공로를 릴리에게 돌리며 그녀의 용맹과 기개를 칭찬했다. 그 결과 릴리는 부모에게마저 이 사건으로 한 소리를 들어야 했으니 그녀는 이것이 하이드의 지능적이고 고상한 갈굼이 아닌가 진지하게 의심해야 했다.

그러나 2주 뒤라는 결혼식의 날짜는 새 사위가 마음에 쏙 들고 아니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결혼이 너무 이르지 않은가, 자네. 내 딸이 파혼한 지 얼마나 되었다고. 젊은이가 마음이 급한 것은 이해하지만, 시간을 갖는다고 문제 될 일은 없을 테니까 말이야.”

“성급해 보이시겠지만, 저는 이미 오래전부터 아가씨와 함께할 나날을 기다려왔습니다. 부디 이런 제 마음을 고려해주시지 않겠습니까?”

“서로 마음이 맞고 확신이 있다면 약혼을 꼭 거쳐야 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하진 않아요. 엄마, 아빠…….”

“릴리, 하이드 경…….”

“어쩜, 꼭 우리 젊을 때 보는 것 같네요, 여보. 아무렴 두 사람이 좋다면야 나는 찬성이에요.”

“여보, 그래도 2주는 심하지 않소?”

“아이, 얘들도 다 계획이 있겠죠. 늙은이들이 지나치게 간섭하는 건 좋지 않아요.”

지극한 사랑에 빠진 청년들의 절절한 대사와 애틋한 눈빛에 감명받은 부인은 소녀 시절을 떠올리는 듯 몽환적인 눈빛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며 허락의 의사를 내비쳤다. 그렇다면 릴리의 양친을 설득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릴리와 하이드가 가만히 있어도 나머지는 부인이 해결할 모양이었으니까. 릴리의 부친은 여전히 걱정스러운 기색이었지만 금방 한숨을 쉬고 준비에 필요한 것이 있다면 성심껏 돕겠다며 이 놀랍도록 빠른 결혼을 허락했다.

부부의 승낙이 떨어지자 릴리는 한숨을 내쉬며 안심하고는 하이드를 돌아보았다. 그녀에게만 살짝 보이는 뻔뻔한 눈웃음에 릴리가 입술을 삐죽였다. 부모에게는 약혼 과정을 생략하고 싶다고 의견을 밝혔지만 사실 그녀가 생각해도 이 결혼은 지나치게 빠른 감이 있었다. 그녀조차 이 일정에 썩 찬성하는 입장은 아니었으나 막상 부모가 반대하고 보니 그의 편을 들어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것마저 그의 계획일까 의심하는 건 지나친 처사일까?

두 사람이 그녀의 고향 집에 도착한 것이 저녁이었고, 속전속결로 결혼 허락을 받고 나니 이미 밤이었다. 가족들은 여독이 쌓였을 이들을 배려해 일찍이 자리를 비워주었다. 숨 돌릴 시간이 주어지자 릴리는 하이드에게 지나치게 휩쓸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슬금슬금 올라왔다. 그녀가 자신을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쳐다보자 하이드가 왜 또 그런 얼굴로 보냐는 듯 눈썹을 모았다.

“선생님은 사람을 현혹시키는 데에 탁월한 재능이 있으신 것 같아요.”

“아가씨께서 할 말씀은 아닌 것 같습니다만, 혹 제가 아가씨 부모님의 마음을 얻는 것이 불만이십니까?”

하이드는 속으로 아가씨의 가족이 유독 쉽게 마음을 주는 것 같다고 생각하면서도 웃었다. 사람 잘 믿고 금방 정 붙이는 것은 집안의 내력이었나 보다, 하면서.

“그럴 리가요. 다만, 선생님은 그 능력으로 절 손쉽게 유혹하셨는데, 저는 마음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으니 조금 억울해서요.”

“릴리 아가씨께서는 불과 이틀 전에 저 말고 다른 약혼자를 두고 있지 않았습니까?”

그러고도 그런 말이 나오냐는 눈빛에 릴리가 민망해져서 고개를 숙이며 웅얼거렸다.

“물론 그렇긴 하지만, 선생님은 그런 거 별로 신경도 안 쓰셨잖아요.”

“제가 신경을 안 썼다고요?”

기가 찬다는 듯 눈썹을 추켜세우는 표정에 릴리는 다시금 열 받는다는 듯이 목소리를 높였다. 그녀의 입장에서는 억울한 일이 한둘이 아니었으므로.

“그래요! 저는 선생님 때문에 심란해 죽겠는데! 선생님은 제가 뭐, 약혼자랑 뭐라도 한 듯이 추궁하시고, 또 무도회에서는 사람 마음 흔들어놓고 내팽개치고!”

“후우우…….”

하이드는 대답할 가치도 없다는 듯 대꾸 없이 한심하단 눈빛으로 릴리를 내려다보았다. 그 고압적인 표정에 릴리의 눈초리가 서서히 내려가며 화내던 기세가 사그라들었다.

“그, 그렇게 한숨 쉬면 제가 겁먹을까 봐요?”

“아가씨가 언제 저한테 겁먹었다고 그러십니까? 제발 좀 그러셨으면 좋겠네요. 매번 하고 싶은 대로 다 하시면서 그 표정은 뭡니까?”

“제가 언제…….”

양심의 가책이 릴리의 뺨을 붉게 물들였다. 하이드가 탐스럽게 익은 뺨을 검지로 쓸며 웃었다. 그의 한껏 나른해진 표정과 욕망이 번뜩이는 눈빛에 지레 겁먹은 릴리는 그의 손을 붙잡고 한껏 높아진 목소리로 소리쳤다.

“왜, 왜 또 그렇게 쳐다보세요. 여기서는 안 돼요!”

“이럴 땐 또 왜 그렇게 눈치가 빠르십니까?”

하이드가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시며 눈썹을 찌푸렸다.

* * *

“릴리!”

“큰 오라버니, 작은 오라버니!”

다음날 이른 오후, 이웃 마을에 가 있던 두 형제가 집으로 돌아왔다. 릴리는 어린애처럼 달려가 그들의 품에 안겼다. 그녀의 두 오라비는 그냥 안는 것으로는 부족한지 그녀를 아이처럼 들어 올려 돌리며 요란하게도 환영했다. 그 몹시도 다정하고 화목한 모양새에 하이드의 표정이 슬쩍 구겨졌다.

“말도 없이 언제 온거야.”

“그새 더 예뻐졌네.”

“어제 도착했어요. 편지 보내자마자 수도에서 바로 출발해서 못 보고 가셨나 봐요.”

“뒤에 신사분은……?”

그들은 릴리가 남자였다면 저런 미남일까 싶은 수려한 사내들이었다. 하이드는 먼저 악수를 청하며 릴리의 약혼자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서글서글 인상 좋은 얼굴이 약혼자라는 소리에 딱딱하게 굳었다. 하이드는 두 오라비와 악수를 주고받고 나서 얼얼해진 손을 털어내며 결혼 승낙의 최종 관문이 그들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릴리는 사내들의 기 싸움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해사하게 웃으며 날아갈 듯 가벼운 걸음으로 두 오라비를 응접실로 이끌었다. 하이드만이 그 뒤를 따르며 전쟁의 시작을 예감하고서 조용히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저는 이따가 제인을 만나기로 했어요. 로렌스는 아파서 못 본다고 해서, 문병이라도 가려고요.”

“제인이랑도 오랜만에 만나는 거겠구나.”

“로렌스는, 아플만도 하지.”

릴리에게 정원의 장미꽃을 꺾어다 주며 구애 비슷한 경험을 처음으로 안겨준 것이 제인의 오라비, 로렌스였다. 어린 시절부터 가까이 지내며 그녀를 쭉 짝사랑해왔던 그는 릴리가 수도로 떠나는 날 눈물로 밤을 지새운 전적이 있었다. 로렌스와 친하게 지내는 형제들은 그녀가 약혼자와 돌아왔다는 소식에 아픈 가슴을 부여잡고 있을 그를 안타깝게 여겨 말을 줄였다.

본격적인 취조에 들어가기에 앞서 릴리의 모친은 두 아들을 불러 조용히 릴리의 약혼자가 바뀐 놀라운 사건에 대해 귀띔을 해주었다. 공무 수행 중에 이미 약혼자가 있는 제 누이를 꼬시고, 파혼하자마자 냅다 데리고 와서 결혼을 허락해달라는 꼴이라니.

사람 좋은 제 부모는 속여넘겼을지 몰라도 자신들에게는 턱도 없는 소리다. 저 반반한 얼굴로 순진한 누이를 홀린 모양인데, 되먹지 못한 애송이에게 제 누이를 넘겨줄 순 없다. 두 오빠는 그렇게 결심한 듯 날카로운 눈으로 하이드를 훑었다.

“아까는 인사만 나눴으니, 이제 제 누이와 결혼하실 분이 어떤 사람인지 여쭈어봐도 되겠습니까?”

큰 오빠, 미카엘이 목소리를 낮게 깔며 대놓고 취조를 시작했다. 작은 오빠인 헨리는 미카엘 옆에서 팔짱을 끼고 턱을 치켜든 채 적의가 가득 담긴 얼굴로 하이드를 노려보고 있었다.

“대단한 일은 아니고, 얼마 전부터 작게 사업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하이드는 여유롭게 웃으며 그들의 시험에 응했다.

하이드, 그가 누구인가. 더글라스는 그를 전설 속 사악한 뱀처럼 악랄하다 하였고, 메리는 여우도 아니고 구미호라 칭하며 그의 가증스러움에 치를 떨었다. 자신이 상대해왔던 배배 꼬인 능구렁이들이나 속 시커먼 늙은이들, 그리고 쌓아온 인생 경험치를 생각하면 이들을 상대하는 것은 어려울 것도 없는 일이다, 라고 하이드는 생각했다.

“릴리, 이쪽으로 와. 오랜만에 보는 오라비가 반갑지도 않으냐?”

“작은 오라버니도 참. 제가 꼬마도 아니고. 무릎에 올라갈 나이는 한참 전에 지나갔어요.”

“내 눈에는 너나 막내나 똑같아.”

헨리가 제 무릎을 두드리며 릴리를 불렀다. 그가 정말 릴리가 혼기 꽉 찬 처자라는 것을 의식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아무리 누이래도 다른 사람 앞에서 무릎에 앉히는 것은 보기 좋지도 않았다. 릴리가 타박하면서도 헨리의 옆자리로 옮기자 그는 그녀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하이드를 쏘아보며 입가에 승리자의 미소를 걸쳤다. 명백한 과시였다.

‘아. 성질 긁을 줄 아는 양반이로군.’

하이드는 가식적으로 미소 짓고 있었지만, 그의 턱에는 단단히 힘이 들어가 있었다. 벌써 평정을 잃어선 안 됐다. 그는 릴리의 어깨에 감히 손을 올린 사람이 그녀의 혈육이라는 것을 계속해서 상기하려 애썼다.

미카엘은 장남답게 제법 근엄하게 무게를 잡았지만, 차남은 달랐다. 헨리는 유치해 보이든 말든 상대를 열 받게만 하면 목적 달성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하이드의 반반한 낯짝과 고급스러운 옷차림부터 그의 퍽 예의 바른 태도와 세련된 말투까지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뒤가 구려 보인달까. 기실 하이드가 아닌 다른 누가 와도 그랬을 터였다.

‘흥, 그래도 쫄지는 않는군.’

배짱 없는 놈은 딱 질색이니까. 헨리는 지극히 개인적인 견해로 하이드를 가늠했다.

“미카엘. 헨리. 그렇게 도끼눈 뜰 거 없어. 얼마나 반듯한 청년이라고. 게다가 릴리에게도 얼마나 잘하는지 몰라. 너희들 우리 사위 괴롭힐 생각 마렴.”

“어머니!”

“걱정 마십시오. 릴리 아가씨가 이리도 예쁘니 제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것도 당연합니다.”

헨리가 억울한 목소리로 모친을 불렀지만, 부인은 하이드의 갸륵한 대답이 마음에 쏙 들었는지 한 번 더 헨리에게 경고를 하고서 부엌으로 향했다. 마음에 쏙 드는 만찬을 준비하려면 그녀가 직접 내려가 지시할 필요가 있었기에.

“사업하는 남자 중에 제대로 된 놈이 하나 없다지만, 내 누이가 선택한 남자는 다를 거라 믿습니다.”

“하하, 물론입니다.”

“오라버니이.”

릴리가 미카엘을 만류하듯 그의 소매를 붙잡으며 눈치를 주었건만 헨리는 한술 더 떠서 누이 자랑을 늘어놓았다.

“우리 릴리가 얼마나 예쁜지는 뭐, 눈 있으면 아시겠죠. 릴리는 어렸을 때부터 온 동네에 영특하고 예의 바른 애라고 소문이 났었습니다. 조금 크고 나니 너도나도 이 애를 구경하겠다고 이 작은 마을로 와서는 누이를 탐냈다, 이 말입니다.”

“호오, 그런 일이 있었습니까?”

“우리 릴리는 제일가는 일등 신붓감이죠. 이 근처의 귀족 영식들은 죄다 들이대는데도 누이만 몰랐지.”

“작은 오라버니, 그만 해요…….”

헨리의 팔불출 발언에 릴리가 달아오른 얼굴을 두 손으로 가리며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그를 만류했다. 원래부터 누이를 어화둥둥 싸고도는 오라비였다. 헨리는 하이드의 표정이 변하는 것을 보고 이거다 싶었는지 릴리를 짝사랑했던 이들을 하나하나 언급했다. 릴리의 인기를 통해 하이드의 코를 납작하게 해줄 생각이었으나, 의도와는 다르게 이 상황에서 괴로워질 것은 그의 누이였다.

릴리는 금시초문이었는지 말도 안 되는 소리 말라고 헨리를 타박했으나 이미 가련한 사내들의 신상이 하이드의 귀에 들어갔다. 하이드는 대화에 집중함과 동시에 그의 저택으로 돌아가 릴리를 추궁할 계획을 세웠다. 그녀는 남자들의 대화에 지치는 것을 느끼며 시계를 쳐다보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벌써 약속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이들만 남겨두고 나가는 것은 불안했지만, 그녀의 오라비들은 짓궂은 구석은 있어도 좋은 사람이었다. 릴리는 혹시나 싶어 가볍게 주의를 시켰다.

“저는 제인을 만나러 갈 건데……, 싸우시면 안 돼요.”

“싸움이라니, 우리가 코흘리개도 아니고.”

“그래, 걱정 말고 다녀와. 로렌스에게 안부 전해주고.”

“이따 이야기 나누죠, 릴리 아가씨.”

하이드의 다정한 목소리에 어쩐지 소름이 돋아 릴리는 팔뚝을 문지르며 밖으로 나섰다.

그녀가 나가자 작고 아늑한 응접실의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본격적인 심사는 지금부터였다. 미카엘은 하이드에게 무례함의 선을 아슬아슬하게 넘나들며 질문을 던졌다. 몇 가지 질문만으로도 하이드가 잘난 사내라는 것이 드러났다. 그 유명한 학센 아카데미 출신에 가문을 떠나 황자의 인정을 받고 자수성가한, 나무랄 데 없는 조건에 미카엘은 잠시 멈칫하였으나 그렇다고 하이드를 인정할 수는 없었다.

“이거, 저희가 대단하신 분을 몰라뵙는군요. 젊은 나이에 본인 능력으로 작위까지 받으시는 분께서 어찌 우리 누이에게 청혼을 하셨는지?”

“제가 과분한 욕심을 품었습니다. 지금은 대단치 못한 지위이나 누이분을 평생 호강시켜드리리라고 약속할 수 있습니다.”

“아, 제 질문을 오해하셨나 보군요. 보시다시피 허울만 남은 남작가 아닙니까. 사랑만으로 결혼을 결심할 정도로 순진하신 분은 아니겠지요. 그쪽은 상당한 야망가이신 듯 한데.”

순진함, 그것은 하이드와 가장 거리가 먼 말이기도 했다. 그가 어렸을 때조차 들어보지 못한 말이었으니. 그러나 놀랍게도 모종의 꿍꿍이가 있을 것이라는 미카엘의 추측과는 달리 이 수완 좋고 영악한 사내, 하이드가 릴리와의 결혼을 결심한 이유를 꼽는다면 사랑이 가장 적합하지 않은가, 그럼에도 하이드는 미카엘의 발언이 영 허황된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바르딘 자작은 이들에게 먼 친척이라는 허울 좋은 친분을 내세워 이들의 경계를 풀었었다. 그래도 생판 남은 아니니까, 릴리의 부모는 안일하고 순진하게 바르딘 자작의 호의를 믿은 것이다. 지참금을 대신 내주고 이 집의 셋째딸을 수도 명문가의 후계자와 짝지어주겠다는 파격적인 제안에 흔들리지 않을 수 없었다. 릴리의 가족에게는 달리 좋은 선택권도 없었거니와 명문가와 연을 맺게 해줄 딸이 없는, 아들 하나뿐인 바르딘 자작의 처지가 설득력 있게 다가왔다.

그러나 바르딘 자작의 제안은 사랑해 마지않는 누이를 불행의 구렁텅이로 던져넣을 속셈이었으니 이들이 이처럼 하이드를 경계하는 것도 당연했다. 게다가 결혼은 가문 간의 거래다. 계산이 포함된 것은 당연했다. 객관적인 조건은 하이드가 압도적 우위이니 저런 우려 또한 당연하리라. 하이드는 손으로 턱을 쓸며 대답을 아꼈다. 미카엘의 표정은 그가 사랑을 말한다고 해서 납득할 것 같지가 않았으므로.

“무엇을 우려하고 계시는지 이해합니다. 다만, 저는 보석상자를 두고 투박한 진주알을 얻자고 조개의 아귀를 벌리는 사람은 아닙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제 야망을 실현하는데 저 외의 다른 이의 도움은 필요 없고요.”

지극히 오만한 발언이었다. 하이드는 높낮이 없는 목소리로 본인의 능력에 대한 자신을 내보였다. 헨리는 입을 헤 벌리며 찻잔을 기울이는 그를 쳐다보았다. 미카엘은 하이드가 제 부모에게 했던 것처럼 열렬한 사랑에 빠진 청년을 연기하리라 생각했던지라 의외의 발언에 미간을 모았다.

제 누이의 앞에서는 퍽 온순한 얼굴로 앉아있던 하이드는 릴리가 사라지자마자 분위기를 달리했다. 단추 하나 풀어두는 법 없이 단정하게 차려입은 사내에게선 사람을 압도하는 위압감이 풍겼다.

“당신 잘난 거 알겠는데, 난 그래도 누이가 훨씬 아까워.”

헨리의 말에 미카엘은 그를 골칫거리 보는 눈으로 보고서 고개를 젓고서 사뭇 진중한 얼굴로 운을 뗐다.

“릴리. 귀엽죠? 순진하고. 착한 애입니다. 다른 사람 미워할 줄도 모르는. 그 애 마음을 얻었다고 방심하거나 변심하지 마십시오. 당신이 아니라 누구에게라도 아까운 애니까.”

“……아가씨의 가족분들은 전부 아가씨를 무척이나 아끼시는군요.”

“가족이니까요. 당연한 거 아닙니까?”

당연하다는 듯 따라오는 미카엘의 대답에 하이드가 턱을 쓸며 입가를 가렸다. 영 기분이 더러워졌다.

“저도 당연히 아가씨를 아끼고 사랑할 겁니다. 릴리는 이제 저의 가족이 될 거니까요.”

하이드의 대답에 기가 찬 듯 헨리가 아직 결혼식도 안 올린 주제에 건방 떨지 말라고 일축하려는 것을 미카엘이 말렸다. 두 형제는 여전히 하이드가 못마땅했지만, 불만스러운 눈으로 봐도 이 자가 잘난 남자라는 것만큼은 명백했다.

게다가 누이는 이 잘 벼려진 칼처럼 날카로운 사내를 무슨 귀여운 강아지처럼 사랑스러워했다. 누이의 애정과 선택을 존중하고 싶었지만, 저 위압적인 사내의 단정한 낯짝을 보고 있으면 영 입맛이 찜찜했다. 얌전한 척하고 있어도 그가 누이를 한입에 잡아먹고 싶어 하는 게 그들의 눈에는 보였으니까.

릴리는 몰랐겠지만, 그녀가 수도에 올라가기 몇 달 전부터 로제리의 노백작이 호시탐탐 그녀를 노리고 있었다. 소박한 밥줄이며 자식들의 장래까지 들먹이는 치사한 짓거리에 부부는 하루가 다르게 피가 말랐다.

그렇기에 노백작의 압박이 나날이 커지고 있을 때 바르딘 자작의 제안은 하늘에서 내려온 구원의 빛줄기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결혼이 잘 진행되고 있다고 생각했던 와중에 돌연 새로운 약혼자가 나타나 그들이 구원이라고 생각했던 똥통을 엎어버린 것이다. 그러니 그들은 도무지 사람을 믿기가 힘들었다.

“난 그쪽 아직 인정 못 하겠습니다.”

“그래도 아가씨는 절 선택했습니다.”

“저, 저, 저……!”

“계속 지켜볼 겁니다.”

하이드의 뻔뻔함에 헨리가 말을 잇지 못하며 검지를 들어 삿대질했고 미카엘은 그 손을 내리며 말했다. 미카엘의 경고조에도 하이드의 얼굴에선 여유가 사라지지 않았다. 사내들의 팽팽한 기 싸움은 부인이 응접실로 들어와 손님 대접은 못 할망정 눈치를 주고 있었냐는 노성으로 끝을 맺었다. 부모가 허락하고 누이가 선택한 남자를 그들이 무슨 수로 반대하겠는가? 부인 뒤에서 야비하게 웃는 하이드를 보고 형제들은 기가 차서 웃음을 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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