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은 청혼해
하이드가 바르딘 자작가에 찾아온 것이 바로 그날 오후였다. 틸리안이 릴리를 데리고 간 후, 그는 바로 황궁을 향했다. 제르시스에게 문서를 넘겨주고 이후의 계획을 논의하고 곧바로 자작가를 찾아간 것이다. 그는 이 저택을 몇 달간 드나들었으니 아무런 제지도 없이 자작의 서재에 손님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이 집 아들은 제 아비에게 마음의 준비도 시키지 않았나 보군.’
뭐, 자신에게는 좋은 일이었다. 바르딘 자작의 얼굴이 형편없이 구겨지는 것을 직접 볼 수 있을 테니까. 아아. 이 날을 얼마나 기다렸던가.
하이드가 평소처럼 만면에 사교적인 미소를 띠고 자작에게 인사를 올렸다.
“오랜만입니다. 바르딘 자작님.”
“하이드 경. 무슨 일이십니까.”
“제2황자님의 전언을 전해드리고, 또 제안을 하나 드릴까 해서 왔습니다.”
“제르시스 황자 전하의 전언입니까?”
바르딘 자작은 하이드가 황자의 말을 전해줄 것이라고는 생각을 못했는지 놀란 듯 자세를 고쳐 앉았다.
하이드는 손에 들고 있던 서류 뭉치를 그의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최근 몇 달 간 수도에서 일어났던 총기 사고와 무기 밀반입의 정황이 담긴 서류였다. 맨 앞 장의 내용에 자작의 눈썹이 꿈틀했다.
“이게 뭡니까?”
“밑에 내용을 더 보시죠. 자작님은 꽤나 일처리가 꼼꼼하시더군요. 그런데 전하께서는 더 집요하셔서 말입니다. 제가 고생을 좀 했습니다.”
“무슨 개수작인가.”
노련한 사내답게 자작은 명백한 증거 앞에서도 전혀 위축되지 않았다. 오히려 하이드를 추궁하는 목소리엔 노기가 서려있었다.
“개수작은 그쪽에서 하지 않았습니까. 전하께서 제국의 치안이 무너져 무척 상심하셨습니다.”
“하. 이걸 위해 이 집에 들어왔던 게로군. 뻔뻔한 개 같으니.”
“칭찬 감사합니다. 황자 전하께서는 제 개의 배를 불리시는데 아끼지 않으시거든요.”
하이드는 자작의 멸시에도 느긋한 미소를 거두지 않았다. 책상에 올려진 서류에는 바르딘 가를 엄벌하여 제국의 기강에 모범을 삼겠다는 전언, 그리고 죄목이 빼곡히 수놓아져 있었다. 소넬 가에 비할 바가 못됐으나 이대로라면 상당한 재산을 몰수당해 파산 직전까지 몰려 가문의 이름에 위기를 맞이할 것이었다.
“이제부터 황자 전하의 전언입니다. 죄목이 상당합니다만, 직접 보시겠습니까?”
“…시건방지군. 네 놈 혼자 이곳을 찾은 걸 보면, 제안이 꽤나 대단한가보지?”
과연, 자작은 냉정한 장사꾼이하었다. 분명 꽤나 뼈아픈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원수를 앞에 두고서 객관적인 판단을 하고 있었다. 하이드로서는 그것이 나쁘지 않았다.
“어차피 다른 선택은 없지 않습니까?”
하이드는 소파에 느긋하게 다리를 꼬고 앉아 차를 마시며 제안했다. 물귀신처럼 그를 끌고 갈 소넬 가와 함께 이대로 무너질 것인지, 소넬 가와 파혼하고 자작 가의 무기 공장을 넘길지의 선택이었다. 화륜의 화승총을 밀반입한 것은 전적으로 소넬 가의 일이었고 자작은 그 이후의 확산과 자금에 관여했으니 그보다는 처벌이 약했다. 그러나 소넬 가는 분명 끈질기게 자작을 물고 늘어질 것이었다.
황자는 틸리안의 기여와 황실 부기사단장이라는 유능한 인재를 봐서 관대한 처분을 내리기로 했다. 공식적인 죄목에 대한 벌금, 그리고 비공식적으로 그의 공장을 헐값에 매각하는 것, 그리고 릴리의 파혼이었다.
“아, 공장은 너무 아까워하지 마십시오. 그대로 있어봐야 불량품만 만들어냈을 테니까요. 그리고 이건 릴리 아가씨의 지참금이라고 생각하면 소소하지 않습니까.”
아, 물론 아가씨에게 지참금 따위는 필요 없지만 말입니다. 하이드가 덧붙이며 예비 장인어른을 향해 한쪽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자작은 그의 말에 경악에 가득 차 입을 벌렸다.
“하. 내가 집에 도둑이 든 줄도 모르고 있었구먼. 감히 내 저택을 뒤진 걸로도 모자라 그 계집애와 작당을 해?”
자작의 입에서 릴리가 언급되자 하이드가 표정을 굳혔다. 하이드는 자작의 책상 너머로 그의 멱살을 잡았다.
“아가씨 덕에 이정도로 끝나는 줄 아십시오. 예비 장인의 가문이 망해버리면 모양이 좋지 않아 봐주는 것 뿐이니까.”
하이드가 자작의 멱살을 놓고 똑똑하게 굴라는 듯, 차가운 얼굴로 그의 볼을 검지로 두드렸다. 자작의 얼굴이 처음으로 형편없이 구겨졌다.
* * *
하이드는 자작의 서재에 폭탄을 던져 초토화시키고 아무렇지도 않게 응접실로 내려왔다. 하녀가 릴리를 부르러 갔으니 금방 얼굴을 볼 수 있을 것이었다. 서재에서 바르딘 자작의 분노에 찬 고함과 함께 묵직한 책상이 무너지는 소리가 얼핏 들리는 것도 같았다.
우습게도 손에 땀이 났다. 릴리는 아침에 헤어진 지 몇 시간이 지나지 않아 그를 보게 되어 놀란 눈치였다. 반가운 미소를 띠고 인사하는 그녀 앞에 하이드가 한쪽 무릎을 꿇었다.
미리 통째로 빌려놓은 레스토랑도, 양초를 가득 채워 한밤에도 번쩍인다는 실내정원도 그녀의 시궁창 고백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어제 성급한 아가씨의 고백을 받았으니 대답을 하루 이상 미루는 것은 신사의 도리가 아니다. 하이드는 성대한 계획을 포기하고 결국 정석을 택했다. 부모에게 결혼 허락을 받고 응접실에서 무릎을 꿇는, 그림으로 그린 듯한 청혼.
“릴리 아가씨. 저와 결혼해주시겠습니까?”
긴장한 내색도 없는 그가 눈을 껌뻑이고 있는 릴리의 손가락에 다이아몬드가 섬세하게 세공된 반지를 끼워주었다. 반지는 맞춘 것처럼 딱 맞았다.
“대답, 해주셔야지요.”
“결, 결혼이요? 하지만…….”
릴리는 상황 파악을 못하고 말을 더듬었다. 그녀의 얼굴이 금세 달아올라 토마토처럼 빨개졌다.
“방금 자작님께 결혼 허락을 받아왔습니다.”
허락이라기보다는 통보였지만. 진짜 허락을 할 부모는 그가 아니었으니까 최소한의 형식은 갖춘 셈이었다.
“선생님은, 아직 저한테 대답 안 하셨잖아요.”
그녀는 재촉하듯 반지를 낀 손을 당겨 입 맞추는 하이드에게 소심하게 항의했다.
“사랑합니다. 릴리 아가씨.”
대답이 늦어서 죄송하다고, 그래도 청혼은 적어도 제대로 된 곳에서 해야 하지 않겠냐고 하이드가 덧붙이며 웃었다.
“나빠요.”
“아가씨는 제가 좋은 사람이 아니라도 상관없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가 야비한 웃음을 흘렸다. 하이드는 잘 울고 잘 웃는 귀여운 아가씨를 또 울리고 말았다. 새빨개진 얼굴을 두 손으로 가리고 훌쩍이며 그에게 무어라 항의하는 것을 하이드가 네에, 네에 요령 좋게 끌어안고 달랬다. 다행스럽게도 남다를 것 없는 고전적인 청혼일지언정 그의 소박한 아가씨의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아직 대답 안 하셨습니다, 아가씨.”
“흐앙, 선생님은 바보예요. 진짜로 미워요. 너무 미워.”
그간의 속앓이가 떠올라 설움에 복받친 그녀는 대답을 미루고 울면서 하이드를 때렸다. 꽤나 힘이 실린 주먹이었다.
“대답 안 하셔도 못 물러요, 릴리. 책임진다고 하셨으니까.”
“그게 뭐예요. 이런 책임인 줄 누가 알아요.”
울망울망한 눈은 갑작스러운 청혼에 기뻐해야 할지 그동안의 맘고생에 억울해야 할지 갈피를 못 잡은 듯 흔들렸다. 그는 눈꼬리에 맺힌 눈물방울을 검지로 훔치며 귀에 대고 계속해서 사랑한다고 속삭였다. 이제 원 이 들려줄 생각이었다. 무차별적으로 쏟아지는 달짝지근한 애정 공세에 릴리는 그리 오래 버티지 못하고 무너졌다. 릴리는 눈물이 채 다 마르지 않은 얼굴로 사랑스럽게 웃으며 하이드의 청혼을 받아들였다.
* * *
릴리는 그의 청혼을 받아들이고 기쁨을 곱씹을 새도 없이 짐을 쌌다. 결혼하기 전에 동거는 그녀에게 있을 수도 없는 일이었으나 워낙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그의 저택으로 가자는 말을 거절할 수가 없었다. 틸리안은 더 머물러도 된다고 하였으나 릴리는 그 정도로 염치가 없지는 않았다. 릴리는 결혼이 준비되는 때까지 고향집으로 내려가겠다고 했지만, 하이드는 결혼은 이 주 안에 이루어질 테니 준비를 기다릴 것도 없다고 대답했다.
눈을 깜빡이며 빠른 상황 전개를 이해해 보려는 그녀에게 하이드는 많은 설명을 해주지 않았다. 어떻게 설명하겠는가? 그녀가 약혼자와 파혼을 결심하기도 전에 하이드는 그 결혼을 깨뜨릴 궁리를 하고 있었다는 것을. 신부도 몰래 신방을 준비하고 있었다는 음침한 얘기는 정신의 안녕을 위해 삼가는 편이 좋았다. 더글라스는 그가 소름끼치고 기분 나쁜 놈이라고 혀를 내둘렀지만, 좋은 게 좋은 거 아니겠는가?
틸리안은 아픈 듯 괴로워 보이는 얼굴로 그녀를 배웅했다. 몇 번이고 붙잡는 말을 삼키느라 입이 달싹였다. 잡힌 것 없이 쥐어진 주먹 안에 손톱자국이 깊게 새겨졌다.
하이드가 응접실에서 릴리와 껴안고 있는 것을 보고 그가 놀랐던 것이나, 틸리안이 그녀의 얼굴에 남아있는 울음기를 보고 하이드에게 주먹을 날리고, 릴리가 창백해져서 그를 만류하며 두 사람의 관계를 설명하며 진땀 뺀 과정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적어도 하이드에겐 별 일 아니었다.
같잖은 오라비 행세를 하는 놈에게 맞은 것은 어처구니가 없었으나, 두 사람의 결혼 소식을 들었을 때의 그 얼굴을 또 볼 수 있다면 한 대쯤 더 맞아줄 의향이 있었다. 사실 하이드는 저놈이 결혼식은 거녕 다시는 릴리 근처에도 얼씬 거리지 못하도록 할 생각이었으나, 자비를 베풀어 결혼식에 초대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창 밖으로 바르딘 자작가를 복잡한 눈으로 보고 있는 릴리가 그의 삐뚤어진 속내를 몰라 다행이었다. 하이드는 왼손으로 제 입을 가리고 비열하기 짝이 없는 얼굴로 웃었다.
“자작님이 이 결혼을 허락하셨나요?”
“걱정 마세요, 릴리 아가씨. 자작은 이 결혼을 축복했으니까요.”
하이드는 입에 침도 바르지 않고 숨 쉬듯 거짓을 고했다. 자작이 축복하건 하지 않았건 두 사람의 결혼은 자작에게 축복이었다. 물에 빠져 뒤질 놈을 뭍으로 끌어준 결혼 아닌가? 하이드는 일말의 죄책감도 없었다.
릴리는 들떴던 것도 잠시, 다시 심란해져서 고민에 빠진 상태였다. 그녀는 끝내 열리지 않는 문 앞에서 자작에게 감사의 인사를 올렸다. 자작은 자신의 불행에 릴리가 기여한 바를 몰랐으나, 어쨌건 그의 저택에서 앙큼하게도 그를 속이고 원수 놈과 눈이 맞았다는 것만으로도 배은망덕하고 괘씸한 일이었다. 이 저택에서 그녀가 입고 사용하던 물건들은 대부분이 자작이 준비하거나 틸리안이 사준 거였으니 짐 가방은 그녀가 처음 수도에 왔을 때처럼 단촐했다.
갑작스레 떠난다고 말하는데도 메리는 그다지 놀란 기색이 아니었다. 마치 준비해 두었다는 양 빠르게 짐을 꾸리고 다시 만나뵐 때까지 건강히 지내라고 말했다. 오히려 릴리가 섭섭해질 정도로 간단한 배웅이었다.
너무 순조롭고 간단한 전개에 릴리만이 혼란스러워하고 있었다. 릴리는 하이드의 허벅지를 깔고 앉고서도 이 자세가 망측하다는 생각도 못하고 있었다. 하이드는 그녀가 앙탈을 부리지도 않고 얌전히 무릎 위에 올라가 있는 걸 흐뭇해하며 생각에 잠긴 조그만 뒤통수를 쓰다듬었다.
항상 수심에 잠겨있는 이 작은 머리통의 주인은, 조금 전 그녀에게 청혼한 남자를 곁에 두고도 도통 집중하지 못했다. 다른 사람들을 생각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남 걱정이나 하고 있는 그녀를 어떻게 벌할까 생각하고 있는 중에 릴리가 앙증맞은 입술을 열었다.
“부모님에게……, 약혼자가 바뀌었다고 어떻게 설명하면 좋죠? 어머니가 기절하실지도 몰라요.”
“걱정 마십시오. 어머니께서도 아가씨가 발정 난 개자식보다는 조금 성격 나쁜 남자를 반기시지 않겠습니까.”
“…….”
‘조금?’
릴리는 하이드의 당당하기까지 한 대답에 할 말을 잃었다. 부모님과 오빠동생들은 그녀를 이해해주겠지만 과연 수도의 귀족들은? 얼마 전까지 르시엔의 약혼녀로 그들의 입방아에 오르던 그녀가 파혼을 하자마자 다른 남자와 결혼한다면 어떤 구설수에 오를지, 듣지 않아도 빤했다.
“사랑합니다.”
“끄응.”
하이드는 릴리가 다른 생각에 빠지는 걸 용납하지 않겠다는 듯, 방심하면 꼭 이렇게 사랑을 속삭였다. 그녀를 부끄러움으로 죽이고 싶다는 듯이 사랑한다느니, 좋아한다느니 하는 말을 계속해서 반복했다. 일부러 그러나 싶어 릴리가 입술을 삐죽였지만, 사실 굼실거리는 기분을 숨기지 못하고 있었다. 손끝 발끝이 저릿저릿하고 뱃속이 다 간지러웠다.
하이드가 샐쭉하게 새침한 표정을 지으려고 애쓰는 릴리의 턱 아래 손가락을 넣어 자신에게로 돌려 쪽쪽 입술 도장을 찍었다. 그 특유의 달콤하고 야릇한 미소를 짓는 하이드를 보며, 릴리는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파르르 떨리는 눈꺼풀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