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화 (16/28)

아가씨는 발칙해

“오셨습니까, 릴리.”

“오랜만이에요, 르시엔 경.”

“정말로 오랜만에 만나게 되어 기쁘지만, 서글프네요. 더 일찍 볼 수도 있지 않았습니까?”

릴리가 어색한 얼굴로 웃으며 대답을 얼버무렸다. 이 부분에 대해서 그에게 더 이상 변명할 거리가 남아 있지 않았다. 그간 만나 뵙고 싶다고 간청하는 편지가 올 때마다 머리를 쥐어짜 거절의 핑계를 대왔던 일은 정말로 고역이었다. 막판에 이르러서는 창의력과 함께 성의마저 고갈되어버려 답장이 다소 차갑고 무례해졌음에도 르시엔은 개의치 않는 듯, 아니 오히려 더 타오르는 듯 보였다. 메리는 릴리의 어깨너머로 그의 편지를 훔쳐보며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아가씨, 제가 보기에 약혼자분은 짓밟히고 거절당하는 걸 좋아하시는 체질이신지도 몰라요. 도도한 여왕의 발치에 깔려 있는 게 적성인, 그런 남자들 있잖아요.’

릴리는 그 말에 소름이 오소소 돋는 것을 느끼고 도리질 치며 강하게 부정했다.

‘그럴리가 있겠어? 이 사람은 여자를 장신구처럼 바꾸는 사람인걸.’

‘여태까지 쉽게 살아왔으니까 더 그렇죠. 그저 웃기만 하면 여자들이 다 넘어오는데 얼마나 시시했겠어요? 그러니 아가씨께서는 다소 차갑게 내치셔도 저 양반은 상처받거나 하지 않을 테니 마음 쓰지 마세요.’

릴리는 메리의 말이 터무니없다 여겨 흘려들었었다. 릴리는 머릿속으로 회상하던 것을 그만두고 르시엔의 손을 잡고 마차에서 내렸다. 오늘은 그의 호의를 얻을 필요가 있었으니, 그에게 잘해주어야지.

“제가 선물한 옷이로군요. 잘 어울릴 거라고 생각했는데, 제 상상 이상입니다. 오늘 그대는 동화 속 요정처럼 아름답군요.”

“과찬이세요. 르시엔 경의 안목이 뛰어나 좋은 옷을 골라주셔서 예뻐 보이는 것뿐이랍니다.”

“이 옷은 마음에 드셨던 걸까요?”

“어……, 네.”

이 옷은? 마치 그녀가 그의 선물은 확인하자마자 다시 상자에 넣고 구석에 처박아 두리라 짐작이라도 한 말에 순간 릴리의 대답이 늦어졌다. 그녀는 파들거리는 뺨을 진정시키기 위해 볼 안쪽 살을 깨물며 간신히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릴리는 르시엔의 환심을 사야 하는 입장이라 그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그가 선물한 옷을 입었을 뿐이었지만 그의 질문에는 긍정했다. 옷만 보면 마음에 드는 게 사실이기도 하고 말이다. 릴리는 주저하다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그런데, 어떻게 이렇게 딱 맞는 옷을 선물하신 건가요?”

“그건 제가 그대를 매일 그리기 때문이죠. 당신의 모습을 매 순간 떠올리기 때문에 옷 치수 정도는 쉽게 알아맞힐 수 있답니다. 제 부인될 분이신걸요.”

어떤 사람이 다른 누군가를 주의 깊게 살펴본다고 치수를 알 수 있다면, 그 사람은 재봉사가 아닐까? 릴리는 새삼스럽게 이 남자에게 감탄했다. 그는 여자를 유혹하는데 필요한 모든 재능을 갖춘 모양이다. 릴리는 그 유능함을 고작 밤의 유희로 낭비하는데 통탄하며 씁쓸하게 웃었다.

“정말 대단한 능력이에요.”

“그대를 즐겁게 해드릴 능력은 이것뿐만이 아니랍니다. 기대되시나요?”

“으음, 저택을 구경할 생각에 기대되네요.”

릴리는 웃으며 르시엔에게서 고개를 돌려 으리으리한 소넬가를 쳐다보았다. 이 커다란 저택이 내가 살게 될 뻔한 집이란 말이지. 기가 질릴 정도로 화려한 저택이었다. 이런 저택이라면 정말 숨겨진 공간 한둘쯤 있겠는걸?

릴리는 르시엔의 만남 요청을 줄기차게 거부하다 드디어 오늘 그에게 선심 쓰듯 그의 저택에 방문을 제안했고, 르시엔은 주저할 것도 없이 대환영하며 그녀를 초대했다. 바깥나들이라도 나가는 게 좋지 않겠냐고 갸웃하였으나 앞으로 살게 될 집이 궁금하다고 하니 금방 납득하며 히죽 웃었다. 그리하여 릴리의 야심 찬 계획이 시작되었다.

틸리안의 합류와 하이드와 더글라스의 노력으로 모든 일은 마무리에 들어갔다. 가장 중요하고 결정적인 증거 하나만 확보하면 끝이었다. 그것은 바로 화륜에서 총을 밀반입한 내용이 담긴 거래 서류였다. 소넬 가가 화륜에서 대량으로 화승총을 들일 때까지만 해도 바르딘 자작이 이 일에 합류하기 전이어서 자작가를 아무리 뒤져도 서류를 찾을 수 없던 것이었다. 자작가의 죄질이 그나마 옅어진 까닭에, 이 이야기를 듣고 릴리는 한시름 놓았었다.

“후후, 릴리, 그대가 이곳에 머물 날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 기쁘군요. 본디 신부는 신랑보다 결혼을 앞두고 준비할 것이 많다고 하니, 그간 소홀했던 것은 이해해드리겠습니다.”

“넓은 이해심에 감사드려요.”

실상 릴리는 결혼 준비에 일말의 관심도 없었다. 선택을 미루고 미루다가 더는 보류할 수 없을 때, 눈 딱 감고 손에 잡히는 것을 고르는 정도였다. 결혼이 진행될수록, 쓸데없는 데 돈을 낭비한다는 죄책감도 강해졌기에 릴리는 하루라도 빨리 파혼을 앞당기고 싶었다.

릴리와 르시엔은 겉보기엔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저택으로 들어갔다. 릴리는 잔뜩 긴장한 상태로 딱딱하게 미소 짓고 있었지만, 르시엔은 그녀가 드디어 마음을 풀어줬다고 생각하며 희희낙락했다.

“저택이 정말 멋져요.”

“그대 마음에 든다니 다행입니다.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이 있다면 바꾸어도 좋습니다. 이제 이곳은 당신의 집이니까요.”

“아하하…….”

릴리는 순수하게 감탄했다. 정원을 지나면서도 느꼈지만, 이 집안사람들은 정말로 화려한 것을 좋아하는 것 같았다. 가구들은 전부 다 오래된 것이지만 관리가 잘 되어있어 멋스러운 광택이 돌았다. 이웃의 집을 방문한 적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으나 소넬가의 저택 구경은 정말로 흥미로웠다. 순간순간 이곳에 온 목적을 잊고 순수하게 집 구경에 빠져들 정도였다.

“소넬 백작님과 백작부인은 언제 돌아오시나요?”

“두 분은 오늘 외부의 부부 모임에 참석하셔서 아마 밤늦게나 도착하실 겁니다. 덕분에 둘이서 오붓한 시간을 보낼 수 있죠.”

“그렇군요.”

더글라스가 미리 부부의 외출을 알려주긴 했었지만 르시엔의 입으로 직접 확인받으니 안심되었다. 긴장이 풀려 얼굴색이 밝아진 그녀를 르시엔이 주시하고 있었다.

“릴리, 그대가 제 앞에서 편하게 웃은 건 지금이 처음인 것 같네요. 지금 이 얼굴이 좋아요. 앞으로 자주 보여주시면 기쁠 것 같습니다.”

“……제가 그랬나요?”

“네. 늘 이런 표정이셨잖아요.”

르시엔이 릴리의 새침한 얼굴을 따라 했다. 르시엔의 단호한 입매와 매초롬한 눈빛에 릴리가 웃음을 터트렸다. 르시엔이 그녀의 웃는 얼굴을 신기하게 바라보며 그녀의 뺨에 손을 뻗었다.

“아.”

그의 손이 얼굴에 닿자 릴리가 당황한 얼굴로 몸을 뒤로 뺐다. 경계심이 풀리지 않은 모습에 르시엔이 씁쓸한 표정으로 자신의 손을 거뒀다. 릴리는 그 표정 또한 계산된 것일까 생각했다. 이런 얼굴마저 계산된 연기라면 르시엔은 정말 대단한 사람일 것이다. 당장 연극배우로 나서도 최고가 될 게 분명했다. 그녀는 저 상처받은 얼굴에 얼마나 많은 여인이 넘어갔을지 생각하며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으려 애썼다. 정말이지 방심할 수 없는 남자다.

“여기는 놀이방인가 봐요.”

“네. 이곳은 제가 어렸을 때 그대로랍니다.”

두 사람은 저택을 둘러보다 르시엔이 어린 시절 주로 머물렀던 놀이방에 들어갔다. 아기자기한 아이용 가구와 다른 방들에 비해 알록달록한 장식, 장난감들이 널려있었다.

“정말 귀엽네요.”

릴리는 보석이 반짝거리는 장난감을 만지며 고향 집의 동생들을 생각했다. 그 아이들에게는 놀이용 방이 따로 있지 않아 온 집안을 어지르고 다녔는데. 수도의 대귀족은 놀이방조차 어마어마하게 넓었다. 아이들이 갖고 노는 장난감마저도 놀라울 정도로 고급스러웠다.

“아, 그 물건은 어머니께서 특별히 아끼던 물건입니다. 그 오르골은 지금은 없어진 프로큰 왕조의 유물입니다. 예쁘죠? 사실 여기엔 애들에게 들려주기엔 지나치게 귀한 물건들이 많아요. 이 집의 보물창고나 다름없거든요.”

“와아…….”

그렇다면 이 번쩍이는 커다란 것들이 다 진짜 보석이란 말인가? 손에 쥔 물건의 아찔한 몸값에 릴리가 눈가를 파르르 떨며 도로 얌전히 내려놓았다. 범상치 않은 놀이방이라고는 생각했지만, 알고 보니 골동품 아니, 귀중품을 보관하는 방이었나?

“이건 증조할아버지께서 나이간 전쟁에 참전하고 하사받으신 명검입니다, 그리고 이건…….”

르시엔이 놀이방 곳곳에 있던 보물의 유래를 설명해주었다. 릴리는 그걸 흘려들으며 대체 왜 아이들 노는 방에 이런 귀한 물건들을 보관하는 걸까 생각하고 있었다.

“르시엔 경이 어렸을 때도 그 물건들이 이 방에 있었나요? 아이가 있는 방에 두기에 검은 위험하지 않나 싶어서요.”

“제가 어렸을 때도 이 물건들은 여기에 있었어요. 대신 늘 유모가 지켜보고 있던 기억이 나네요.”

“보통 보물은 규방 깊숙이 보관하거나 따로 비밀스러운 금고 같은 데에 보관하는 줄 알았어요.”

“그게 보통이긴 하죠.”

르시엔은 따로 이유를 설명해주지 않고서 이야기를 마무리 지으며 그녀를 다른 방으로 안내했다. 자작가도 집이 좋다고 생각했고, 금전적으로 풍요롭다고 느꼈지만 소넬가는 급이 달랐다. 아무리 돈이 많아도 이 화려함의 극치를 자랑하는 귀중품이 아이의 장난감과 함께 널려있다니, 이상함을 느끼면서도 더 관심을 가지지는 않았다. 그녀가 소넬가에 다시 올 일은 없을 테니까.

릴리와 르시엔은 응접실에 앉아서 쉬었다. 집이 넓어서 구경하는 것도 지치는 일이었다.

“궁금한 게 있어요.”

“뭡니까, 릴리.”

“이렇게 큰 저택이라면 가주들만 아는 비상 통로 같은 게 있겠죠?”

“하하, 벌써부터 이 저택에 관심이 극진하군요, 릴리.”

“……곧 이곳에서 살게 될 거라고 생각하니까 궁금한 게 많아요.”

르시엔이 그녀의 말에 진득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러고는 아주 자연스럽게 그녀의 눈을 쳐다보며 손등에 입 맞추었다. 열정이 가득 담긴 눈빛에 릴리가 움찔했다.

“제게 마음을 열어주셨다고 생각해도 될까요, 릴리?”

“제가 르시엔 경에게 마음을 열든 그렇지 않든 결혼하게 되는 건 마찬가지잖아요.”

릴리가 꿈 깨라는 듯 말하며 그에게서 손을 뺐다. 빼고 나서야 아차 싶었지만, 이제는 르시엔이 습관적으로 수작을 걸면 그녀 또한 반사적으로 앙칼지게 굴게 되는 것이다.

“그대의 마음을 얻기 위해 무던히도 노력했으나 부족했던 걸까요?”

“경은 경의 부족함을 제 탓이라 하시네요. 그 선물 상자와 꽃다발로 제 마음을 살 수 있었다고 생각하셨나요?”

릴리는 이젠 자연스럽게 도도함으로 무장하며 그에게 눈을 흘겼다. 르시엔은 기회만 생겼다 하면 어떻게든 들러붙으려는 기세였기 때문에 틈틈이 차갑게 떨쳐내야 했다. 오늘은 그에게 잘해주어야 하는 게 아닌가 했지만, 이 남자의 진득한 미소는, 그가 짓밟히는 걸 좋아할지도 모른다는 메리의 가설에 신빙성을 더해주었다.

다른 사람에게 모질게 구는 일이 쉬워질 줄이야. 모든 경험은 결과를 낳았다. 르시엔과의 피곤한 대화마저도 릴리에게 도움이 되는 부분이 있었다. 르시엔이 한결같이 짜증나는 남자였기 때문에, 이 남자를 속이는 일에 큰 죄책감이 들지 않았으니 그것만은 정말로 고마운 일이었다.

“그대가 만날 기회조차 주지 않은걸요. 제가 어떡했다면 좋았을까요, 릴리.”

“글쎄요. 집 앞까지 찾아왔더라면 못 이기는 척 만나주지 않았을까요?”

릴리가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하며 그의 눈을 피했다. 그녀가 읽었던 낭만소설의 도도한 귀부인들의 행동을 떠올린 대답이었다.

“그리고 제 질문에 대답하지 않으셨어요, 르시엔 경.”

“하하, 질문이 뭐였죠?”

“비상 통로나 숨겨진 방이요. 그런 걸 실제로 본 적이 없으니까 꼭 한번 보고 싶었거든요.”

“어쩌다 그런 것에 관심을 가지게 되셨습니까?”

“요즘 추리소설에 푹 빠졌거든요.”

릴리는 능숙하게 대답했다. 예상된 질문들이었기 때문에 당황하지 않고 준비된 대답을 할 수 있었다. 그는 그녀에게 간이고 쓸개고 다 빼줄 것처럼 굴었으면서도 대답을 회피하고 있었다. 과연 가문의 비밀이 중하긴 한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더 밀어붙이는 수밖에.

릴리는 이곳에 오기 전의 각오를 되새기며 자기 자신을 세뇌했다. ‘나는 요염하다. 나는 매력적이다.’

“저에게도 비밀인가요? 늘 제가 가족이 되길 고대하셨다고 하셨으면서.”

릴리는 기다란 속눈썹을 내리깔고 깜빡여 팔랑이게 했다. 속상한 듯 애교스러운 목소리에 르시엔이 신음했다. 그녀가 그에게는 처음으로 자발적인 교태를 부렸으니 릴리에게 안달나 있는 르시엔으로서는 넘어가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릴리……. 저를 정녕 괴로움에 빠뜨리고 싶으신 거군요.”

그가 제 이마를 짚고 한숨을 쉬더니 이어서 말했다.

“제가 그대를 이길 수는 없지요. 그대가 궁금해하시니 알려드리는 겁니다. 나의 사랑스러운 피앙세. 결론만 말씀드리면, 피난용 대피로가 있긴 합니다. 부모님과 저, 집사만 그 위치를 알고 있지요.”

“정말로 있나요? 어디에요?”

릴리는 지나치게 궁금해하는 티를 내지 않으려고 했지만 실패했다. 그녀의 고양된 목소리에 르시엔이 얄밉게 눈웃음치며 그녀의 턱을 제 검지로 쓸었다.

“그건 달콤한 신혼이 되면 알려드리지요, 피앙세. 섭섭해 말아요, 피난로의 존재를 알려드린 것만으로도 엄청난 예외를 적용시켜드린 것이니.”

“……저를 못 믿으시는 거예요?”

비밀 통로의 유무를 알게 된 것만으로도 큰 수확이었지만 릴리는 포기하지 않았다. 집요해 보이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그녀가 슬쩍 더 캐물었다.

“그럴 리가요. 당신이 그걸 안다고 해서 무슨 문제가 있겠습니까. 다만 이걸 가르쳐드리는 것은 제 권한이 아니라 그럽니다. 혼인 서약만 하면 소넬 백작님께서 알려드릴 테니 성급해 말아요, 릴리.”

르시엔의 얼굴이 점점 더 가까이 다가왔다. 저 은근한 눈빛이 무엇을 말하는지 알 만큼. 이쪽 방면으로만 눈치가 생긴 릴리가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

“서재! 서재를 구경하고 싶어요. 제 약혼자가 어떤 곳에서 일하는지 보고 싶어요.”

릴리가 어색하게 둘러대는 것을 보며 르시엔이 산뜻하게 웃었다. 약혼녀의 순진한 반응이 그에게는 귀여웠지만 괴롭기도 했다. 두 사람이 약혼한 지가 벌써 두 달이 지났음에도 입술 한 번 맛보지 못했으니 르시엔은 안달이 나 죽을 지경이었다. 이렇게 길게 손대지 못한 상황은 처음이라 욕구불만에 시달리는데도 화가 나기보다 그녀가 깜찍해 죽겠는 것을 보면, 이게 남들이 말하는 사랑인가 싶었다.

저 깜찍하고 도도한 여자를 제 아래 깔고 맛볼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그걸 생각하면 저렇게 티나게 줄행랑치는 것도 귀엽게 봐줄 수 있었다. 그의 인생에 단 한 번도 없었던 인내였다.

“당신이 원하신다면. 서재로 가죠.”

* * *

두 사람은 두꺼운 융단이 깔린 계단을 올랐다. 티 나는 회피에 르시엔이 눈에 띄게 즐거워하며 웃어대자 릴리가 민망해하며 그를 앞서서 성큼성큼 뛰듯이 걸었다.

“웃지 말아요!”

“릴리, 제 서재가 어디 있는지는 알고 가시는 겁니까?”

“…….”

“2층 셋째 방입니다.”

르시엔이 서재의 위치를 알려주고 웃으며 느릿느릿 그녀의 뒤를 따랐다. 딴에는 수줍어하는 릴리를 배려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 배려는 엄청난 행운으로 돌아왔다.

벌컥.

“……릴리?”

그녀가 벌게진 얼굴로 서재의 문을 열어젖히자 그 안에 하이드가 굳은 얼굴로 서 있었다. 평소와 달리 정장 차림이 아니라 온통 검은색인 옷을 입은 그는, 누가 봐도 첩자였다. 릴리는 그 모습에 재빨리 판단했다. 르시엔이 오면 끝장인 상황이 닥쳤음을.

“……곧 르시엔 경이 올라올 거예요. 필요한 건 찾았어요?”

“아가씨가 왜 지금…….”

“시간 없어요! 찾았나고요!”

릴리가 조용히 속삭이며 말했다.

“이곳엔 없습니다.”

“시간을 벌 테니 얼른 빠져나가세요. 아!”

“?”

“저 어디에 있는지 알 것 같아요! 선생님, 삼층 여덟 번째 방이에요!”

릴리는 빠르게 속삭이고는 문을 닫았다. 르시엔이 계단을 막 올라와 그녀를 의아한 얼굴로 보고 있었다.

“……사실 서재보다 더 보고 싶은 곳이 있어요.”

릴리가 르시엔의 앞으로 걸어가며 말했다. 심장이 팔딱대며 마구 뛰는 게 느껴졌다.

“서재는 방금 봤으니까…….”

“아직 안 들어가셨잖습니까?”

르시엔의 물음에 릴리가 그의 가슴팍 위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르시엔 경은 제 생각보다 눈치가 없으시네요. 숙녀의 입으로 부끄러운 말을 꺼내야겠어요?”

릴리가 발갛게 물든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며 투덜거렸다. 일부러 도도하게 말했지만, 부끄러움을 숨기지 못한 홍조와 새침한 말투의 대비가 오히려 그녀를 더 순진해 보이게 만들었다. 그녀는 지금 혀를 깨물고 싶을 만큼 부끄럽고 민망했다. 르시엔에게 속이 빤히 보이는 유혹을 하게 될 줄이야.

릴리는 어설픈 유혹에 그가 넘어오지 않으면 어쩌나 걱정했지만, 그것은 괜한 걱정이었다. 르시엔은 릴리의 수줍은 얼굴과 소심한 접촉에 이미 이성의 끈이 간당간당한 상태였다. 이 분위기는 분명 대담한 유혹이었지만, 저의 얌전한 피앙세가 할 만한 일은 아니었다. 제 기대가 오해를 낳은 것일까, 르시엔이 불끈거리는 욕망을 억누르고 마지막으로 확인했다.

“릴리……?”

“르시엔 경은 바보예요. 제가 정말 저택 구경이 하고 싶어서 이 방,저 방 들어가자고 한 줄 아시나요? 제가 구경하고 싶은 건…….”

릴리를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벌게진 얼굴을 르시엔의 가슴에 기대어 가렸다.

‘제발. 제발.’

“하아…….”

그 깜찍한 행동에 르시엔이 깊게 한숨 쉬고 제 얼굴을 감싸 쥐었다. 이걸 어떤 사내가 참을 수 있을까. 아니, 이건 참을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 르시엔이 단숨에 릴리를 안아 올려 제 침실로 갔다.

‘으아아, 어떡해, 어떡해!’

릴리 자신이 대담한 행동을 벌여놓고도 빠른 상황 전개에 놀라고 있었다. 이래서야 정말로 큰일을 치르게 생기지 않았나. 잘못된 판단이었나? 어떻게든 이 상황을 타개해야 했다. 그러나 제 위에서 거센 콧김을 뿜고 있는 사내를 보면 그것이 쉽지 않아 보였다.

‘릴리! 침착해야 해. 침착.’

르시엔은 제 안의 욕망이 폭주하는 것을 느꼈다. 얼마나 맛보고 싶었던 달콤한 과실인가. 아래는 이미 단단하게 부풀어 답답함을 호소하고 있었다.

풀썩, 릴리가 침대에 눕혀지고 르시엔이 매력적으로 웃으며 그녀의 목덜미에 고개를 묻고 숨을 들이켰다. 체취 또한 그녀를 닮아 달콤하기 짝이 없어 머리가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하아, 릴리, 당신이 저와 같은 마음인 줄 알았다면 시간 끌지 않고 진작에 이곳에 왔을 텐데요.”

“르시엔 경, 잠깐만…….”

르시엔은 릴리의 만류에도 멈추지 않았다. 목덜미에 닿는 말캉한 입술과 뜨거운 숨결에 그녀는 등골이 서늘해졌다. 릴리가 그의 입술을 피하고자 바르작거려도 그는 끄떡도 하지 않았다. 릴리가 그의 가슴을 손으로 밀어내는 게 수줍은 앙탈 정도로 보이는 모양이었다.

“르, 르시엔!”

릴리가 처음으로 그를 이름만으로 불렀다. 그 감격스러운 성과에 르시엔이 고개를 들어 그녀를 마주 보았다. 그의 눈동자에는 이미 욕망이 짙게 깔려있었다. 릴리는 사내가 저런 눈을 하고 있을 때 얼마나 위험한지 알고 있었다. 천사처럼 성스러워 보이는 르시엔조차 사내의 눈을 하고 있으니 맹수처럼 위험해 보였다.

릴리는 그의 이글거리는 눈을 마주하지 못해 질끈 감고 그가 멈춰있는 틈을 타 몸을 일으켰다. 잔뜩 달아올라 있는 사내를 진정시키려면 일단 욕망의 해소가 시급했다. 피할 수 없다면 돌아서라도 가야지. 릴리가 눈을 반짝이며 르시엔을 재빨리 눕히고 그 위에 올라탔다.

“제가, 르시엔 경을 기쁘게 해드리고 싶어요.”

그녀의 대담하고 당돌한 발언에 르시엔이 두 눈을 깜빡이며 입을 벌렸다. 릴리는 그가 당황한 틈을 타 그의 셔츠 단추를 풀어 내렸다. 한 번이 어려웠지 두 번 못할 것도 없다며, 하이드를 유혹했을 때의 기억을 되살리며 제발 르시엔이 얌전히 깔려있어 주기를 바랐다.

“가만히 있어요, 르시엔 경.”

르시엔은 제 입술을 핥는 릴리를 넋을 놓고 쳐다보고 있었다. 가슴 위로 그녀의 손이 닿는 부위마다 전기가 통하는 것처럼 짜릿했다. 단추 풀어지는 소리가 침이 꼴딱 넘어갈 정도로 자극적이었다.

릴리는 그의 셔츠를 벗기고 긴장한 눈으로 그의 상체를 살폈다. 시야가 긴장으로 아득했다. 아, 어쩌면 좋아. 릴리는 르시엔이 생리적인 거부감이 들 정도로 못난 사람이 아님에 그나마 감사했다. 생김새 하나는 하이드 못지않은 미남이었으니 마음가짐에 따라 즐거울 수도 있는 일이었지만, 현재 그녀에게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릴리가 고양이를 쓰다듬듯이 르시엔의 드러난 상체를 쓸었다. 그는 그 가벼운 손길에도 얕게 신음했다. 릴리는 자신이 깔고 앉고 있는 그의 하체가 불룩한 것이 느껴졌다. 힘든 일도 아닌데 극심한 긴장으로 숨이 벅찼다.

릴리는 기묘한 죄책감 비슷한 감정을 느끼며 르시엔의 솟아오른 유두를 어루만졌다. 그녀는 르시엔의 목덜미부터 쇄골, 가슴, 배꼽 아래까지 고양이를 만지듯 슬며시 쓸었다. 르시엔의 하얀 얼굴의 붉게 상기되고 가슴이 들썩였다. 그는 당장이라도 그녀를 깔아 눕히고 싶은 것을 가까스로 참느라 눈이 벌겠다.

릴리는 그의 얼굴을 보지 않아도 지금 그가 제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덮치고 있는 것은 자신인데 수치심으로 얼굴이 타는 것처럼 뜨거워졌다. 릴리는 차라리 빨리 끝내는 게 나을 것 같다는 생각에 그의 아랫도리로 손을 뻗었다. 덜덜 떨리는 손이 두툼하게 솟아오른 바지춤을 풀었다.

릴리가 허리께에 손을 걸치자 르시엔이 자연스럽게 엉덩이를 들어 옷을 벗기는 걸 도왔다. 바지를 벗기자 그의 성기가 속옷 아래서 더욱 불퉁하게 솟아올랐다. 앞부분이 살짝 젖어있는 게 상당히 흥분한 모양이라 릴리는 안심되는 마음에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능숙한 호색한이라 그녀에게 흥분하지 않으면 어쩌나 걱정하던 참이었기 때문이다.

“마음에 드시나요?”

“……!”

르시엔이 혀를 내밀어 제 입술을 핥으며 말했다. 어지간한 여자보다 더 요염한 미소였다. 그는 자신의 강점이 무엇인지 알았다. 그의 잘생긴 물건은 평균을 한참 웃도는 크기였다. 그와 잠자리를 가졌던 여인들은 헤어지고 나서도 이 늠름한 물건을 잊지 못해 그를 다시 불러내곤 했다. 릴리는 그의 발칙한 발언에 제가 대신 민망해하며 토마토처럼 얼굴을 상기시켰다. 귓불까지 물들인 모습에 르시엔이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아아, 순진하고 귀여운 나의 피앙세.

엄청나게 부끄러워하면서도 속옷 위를 더듬는 손은 망설임이 없었다. 르시엔은 그 괴리감에 극심한 흥분을 느끼며 뜨거운 숨을 내뱉었다. 순진한 소녀처럼 수줍은 얼굴은 배덕감 그 자체요, 사내를 침실로 이끈 대담함은 아찔한 반전이었다. 그의 머릿속엔 내내 그를 피하던 릴리의 현재 모순된 행동에 대한 의문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르시엔은 그간 애탔던 욕망을 한꺼번에 보상받는 기분이었다.

속옷 위로만 감질나게 어루만지던 그녀가 드디어 결심한 듯 속옷을 벗기고 맨피부를 손으로 감쌌다. 하이드의 대물만 보았던 그녀라 그의 물건이 큰 줄도 몰랐다. 어렴풋하게 하이드보다는 얇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르시엔의 남근도 그녀의 작은 두 손에는 꽉 찼다. 다만 생김새는 그를 닮아 얌전해 거부감이 덜했다. 울퉁불퉁 핏대가 도드라진 하이드의 것에 비해 밑동이 매끈했다. 릴리는 그가 기분 좋길 바라며 고환부터 기둥까지 살살 쓰다듬었다.

르시엔은 그의 대물을 목구멍까지 사용해 강렬하게 빨아들이는 애무를 좋아했지만, 릴리의 미약하고 서툴기 짝이 없는 손길에 찔끔찔끔 흘리고 있었다. 시각적, 심리적 자극이 물리적 자극을 웃돌았다. 그는 침이 바싹바싹 마르는 것을 느끼며 그녀의 감질 나는 손길에 성기를 꺼덕거렸다.

“하아, 릴리.”

“기분 좋아요……?”

릴리는 다소 의기소침한 얼굴이었다. 그녀는 그의 성기가 당장이라도 사정할 듯 꼿꼿한데도 그녀는 그의 기분을 확신할 수 없는 것처럼 물었다. 르시엔이 침대보를 쥐고 있던 손을 들어 제 눈을 가렸다. 그녀 때문에 미칠 것 같았다. 이게 사랑스럽다는 기분일까? 당장 그녀의 치마를 걷어 올리고 성기를 박고 싶은 욕망과 깃털이 살랑이며 심장을 간지럽히는 기분이 공존했다.

릴리는 그의 반응이 긍정일 것이라 자신을 다독이며 좀 더 적극적으로 손을 놀렸다. 기둥을 힘주어 쥐고 위아래로 움직이자 그의 신음이 짙어졌다.

“으윽, 릴리. 그만…….”

“아, 아파요?”

기분 좋아 보였는데. 릴리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놀라서 되물었다.

르시엔은 가슴 깊이 심호흡하며 건전한 생각에 몰두하려 애썼다. 지금 그가 안달복달 맛보고 싶어 난리를 쳤던 여자가 제 하반신 위에 걸터앉아 있는 사실을 지워보기 위해 머릿속으로 온갖 산수와 보기 싫은 얼굴들을 떠올렸다.

“아픈 게 아니라…….”

르시엔이 벌건 얼굴과 흐릿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한입에 날름 삼키고 싶은 여자지만, 귀하게 여기고 싶은 여자이기도 했으니까. 참아라, 참아야 하느니라…….

르시엔은 가까스로 이성을 붙잡고 이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고 아우성치는 성기를 옷 속으로 집어넣었다. 까짓 금욕, 한 달 정도 더 늘어난다고 해도 상관없다. 후……. 미치게 아쉽지만, 그가 원하는 것은 어쭙잖은 결과물이 아니라 완벽한 승리였다.

릴리는 지금 전혀 흥분한 얼굴이 아니었다. 욕망에 이끌려 그를 탐하고 있는 몸짓이 아니라 그저 사내를 만족시키려는 것뿐이라는 뜻이다. 르시엔은 눈 딱 감고 한 발만 뺄까 심각하게 망설였지만, 신사인 척 옷을 추슬렀다. 그녀의 갑작스러운 적극적 태도는 그에 대한 시험이리라. 르시엔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당황한 그녀의 뺨에 쪽, 가볍게 입을 맞추고 일어났다.

“무리하실 필요 없어요, 나의 릴리.”

“…….”

“그대의 유혹에 기꺼이 넘어가고 싶지만, 그래서야 저에 대한 그대의 생각이 바뀌지 않겠지요. 다음에, 그대가 정말로 원할 때 이어서 하죠.”

르시엔이 그녀의 어벙한 얼굴을 두 손으로 살며시 감쌌다. 릴리는 상황을 잘 모면했다는 사실에 자축해도 모자랐지만, 그의 의외의 행동에 어안이 벙벙했다. 이 남자가 수도에 소문난 호색한, 망나니가 맞는 걸까? 릴리는 멍하게 르시엔이 옷차림을 가다듬는 모습을 보고 있었다.

‘정신 놓고 있을 때가 아니지. 생각보다 좋은 사람이었던 걸까?’

* * *

릴리는 자신이 시간을 벌어준 동안 하이드가 무사히 물건을 찾았기를 바라며 르시엔에게 작별을 고했다. 아까 전의 일로 두 사람 사이에는 어색함이 몽글몽글 솟아났다. 르시엔은 그녀의 민망함을 이해하며 그녀의 이른 귀가를 배웅했다. 릴리는 그의 앞에서 살랑살랑 손을 흔들며 마차에 타고 그의 시야를 벗어나자마자 마부를 불러 마차를 세웠다.

“아, 물건을 놓고 왔네. 저쪽에서 잠깐 기다리다가 내가 안 오면 먼저 저택으로 돌아가도록 해.”

릴리는 마차에서 내려 소넬가의 뒷문으로 향했다. 사람을 마주치지 않을수록 좋았지만, 마주치더라도 적당히 핑계만 대면 아무도 의심하지 않을 것이었다. 그녀는 이곳의 귀한 손님이었으니까. 제발 르시엔만 마주치지 않길 바라며 그녀는 사용인 전용 통로로 들어갔다. 오늘온종일 저택을 돌아다니며 구조를 익혔기 때문에 혼자서도 충분히 돌아다닐 수 있었다.

안주인이 될 몸이니 사용인들의 통로나 그들의 일과에 대해서 묻는 것도 이상할 일은 아니었다. 르시엔도 그저 훌륭한 안주인이 되어주시겠다며 웃었으니까. 그녀가 저녁이 되기 전에 나왔으니 사용인들은 한창 식사 준비를 하고 있을 것이었다.

릴리는 조심스럽게 주위를 살피고 계단을 올랐다. 이것도 몇 번 했다고 제법 익숙해진 기분이었다. 릴리는 바짝 긴장한 상태로 귀를 열고 살금살금 걸었다. 신발을 벗고 있다가 다른 사람을 만나면 모양이 이상해지니 걸음을 뗄 때마다 신중해질 수밖에 없었다. 르시엔과 방에 있었던 시간은 그다지 길지 않았으니 하이드는 여전히 방 안에 있을 것이었다. 저택의 사용인이 보이면 잽싸게 모퉁이로 몸을 숨기며 겨우 아무도 마주치지 않고 삼층까지 도달했다.

릴리는 간이 꽤 커진 것 같다고 생각하며 혼자 미소 지었다.

“선생님, 저예요.”

릴리가 문 틈새로 속삭이고 재빠르게 방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의 예상대로 하이드는 그곳에 있었다.

“릴리! 대체 왜 여기에 있습니까!”

“그건 제가 할 소리예요! 제가 아까 서재에서 선생님을 보고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요?”

릴리가 푸우, 깊게 숨을 내쉬고 팔짱을 낀 채 하이드에게 물었다.

“찾았어요?”

“……서재에도 없던 서류가 놀이방에 있을 리가 없지요.”

“여기일 거예요. 이 저택에서 가장 귀한 것들만 모아두는 곳이거든요. 보세요, 저 보물들.”

“하지만, 그걸 왜 애들 놀이방에 둡니까? 이제 이 집 망나니 이 방에서 놀지도 않습니다.”

터벅, 터벅, 터벅.

“……!”

남자의 무거운 발소리가 들렸다. 릴리와 하이드는 동시에 입을 다물고 눈을 마주쳤다. 이 상황이 들킨다면, 하이드는 물론이고 릴리마저도 추궁을 피하기 힘들 것이었다.

“아가씨……!”

“절 믿어요!”

릴리는 재빨리 벽을 더듬었다. 하이드는 당장이라도 그녀를 안고 창문 밖으로 뛰어내릴 기세였지만, 이대로 아무런 성과 없이 나갈 수는 없었다. 들킬지도 모른다는 위험의 불안감이 부풀어 그녀의 폐를 가득 채웠지만 릴리는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통통.

역시 벽의 소리가 달랐다. 삼층의 넓이에 비해 방의 수가 조금 모자라다 싶었더니, 역시 이곳에 숨겨진 공간이 있는 것이었다. 릴리는 벽을 자세히 살피며 더듬어댔다. 발걸음 소리가 시시각각 커지며 그녀의 심장 소리도 따라 커졌다.

릴리는 벽 앞의 장식장을 빠르게 훑었다. 당장 찾지 못한다면 창문에 매달려서라도 눈을 피해야 했다. 하이드 혼자라면 무리가 없었겠지만, 그녀까지 매달고는 힘들 것이다. 그녀는 장식장 위의 촛대를 들어봤으나 촛대는 장식장 위에 딱 붙어서 떨어지지 않았다.

‘이거다……!’

그녀가 촛대를 꺾자 장식장 뒤편에서 자물쇠가 달칵이며 톱니바퀴가 맞물려 돌아가는 소리가 났다.

“선생님, 이거 미는 것 좀 도와주세요……!”

하이드는 그녀의 행동을 초조한 얼굴로 지켜보고 있다가 장식장을 힘껏 밀었다. 바닥이 쓸리며 끼익거리는 소리에 온몸에 전율이 통했다. 장식장을 옆으로 치우자 성인이 몸을 한껏 구겨야 겨우 들어갈 수 있는 작은 입구가 있었다.

이게 바로 외부로 통한 숨겨진 통로이리라. 릴리와 하이드는 잴 겨를도 없이 몸을 잔뜩 움츠려 입구를 통과했다. 짧은 입구를 지나고 다니 다행히 넓은 통로와 함께 입구를 닫는 조종간이 있었다. 하이드가 조종간을 잡고 돌리자 장식장이 제 자리로 돌아가고 자물쇠가 달칵였다.

“하아아…….”

심장이 아플 정도로 펄떡였다. 온몸의 맥박이 비명을 지르는 것 같았다. 릴리는 다시는 이런 일을 못 할 것 같다고 생각하며 튀어나올 것 같은 심장을 움켜쥐며 주저앉았다.

“헤헤.”

“지금 웃음이 나옵니까?”

릴리가 해맑게 웃는 것을 보며 하이드가 제 옷깃을 거칠게 풀어헤쳤다.

“그럼요. 무사히 안 들켰잖아요. 하하. 이런 비밀 통로도 찾았고요.”

“쉿.”

방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하이드가 뒤에서 그녀를 끌어안고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정말 조금만 늦었더라도 이렇게 웃지 못했을 것이다.

“흐음, 집사. 이거 포장해서 바르딘 자작가로 보내.”

“네? 도련님, 이건 마님께서 애지중지하시는 것 아닙니까?”

“어머니는 이미 넘치도록 갖고 계신걸. 내 피앙세가 은근히 화려한 걸 좋아하는 것 같더라고.”

릴리가 벽 너머로 르시엔의 말을 듣고 눈썹을 찌푸리며 억울함을 표출했으나 르시엔이 알 턱이 없었다.

“하지만 도련님, 그분께서는 곧 소넬가의 일원이 되실 테니까요, 그때 드리면 되지 않겠습니까?”

집사가 철부지 꼬마를 달래듯 르시엔의 옆에 붙어서 그를 살살 달래듯 말했다. 일리가 있는 말이라 르시엔이 제 턱을 쓸며 고민했다.

“하긴, 지금 선물로 보내봐야 결혼하고 다시 갖고 와야 하니까.”

“현명하십니다. 도련님. 릴리 아가씨를 마음 깊이 아끼시는군요.”

“집사, 나도 결혼할 때가 되니 철이 드나 봐.”

릴리의 정수리 위에서 하이드는 기가 찬 듯 콧바람을 내뿜었다. 릴리는 보지 않아도 그가 인상을 찌푸리고 있는 얼굴이 연상되었다. 다행히 르시엔은 방에서 이상함을 느끼지 못한 모양이었지만, 방을 벗어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사방이 막힌 좁은 통로는 빛 한 줄기 들지 않아 깜깜했다. 하이드가 품에서 성냥을 꺼내 불을 붙였다. 다행히도 바닥 구석에 양초가 있었다.

“릴리 아가씨, 제가 분명 집에 가만히 계시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하이드는 그녀가 숨을 돌리자마자 험악한 얼굴로 조용히 화를 내기 시작했다. 릴리는 이제 무서울 게 없었다. 이런 어마어마한 일을 겪고 나니 하이드의 찌푸린 표정도 전처럼 무섭지가 않았다.

“제가 오지 않았다면 어쩌려고 그렇게 말씀하세요?”

“저는 혼자서도 빠져나올 수 있었습니다.”

“그럼 이런 곳은 못 찾으셨겠지요.”

릴리가 그의 품에서 벗어나 허리께에 손을 짚고 그를 마주 보았다. 촛불이 일렁이며 그의 얼굴을 밝혔다. 지난 병문안 이후로 처음 보는 것인데도 웃음기 하나 없는 미운 표정이라 릴리가 눈초리를 한껏 치켜 올렸다.

‘저렇게 못된 말만 하는 입이라니. 내가 선생님을 위해 무슨 일까지 했는데!’

릴리는 조금 전 르시엔과 방 안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리고 얼굴이 빨개져서 휙 몸을 돌려 주위를 살폈다. 그녀의 예상대로라면 이 안 어딘가에 중요한 것들을 보관하고 있을 것이었다.

“대체 이런 공간이 있다는 건 어떻게 아셨습니까? 그 자식이 알려준 건가요?”

“아뇨. 르시엔 경은 존재 여부만 알려주셨어요. 사실 확신은 없었고 짐작만 했을 뿐인데, 운이 좋았죠.”

“확실하지도 않고서 무모하게 행동하신 겁니까?”

하이드가 사방을 두리번거리고 있는 릴리의 뒤에서 벽에 삐딱하게 몸을 기댄 채 음산할 정도로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릴리는 불편한 심기를 온몸으로 드러내고 있는 그에게 흘끗 눈을 흘겼다.

“서재를 뒤지다 저한테 들키신 분이 할 소리인가요? 선생님은 저한테 그렇게 말할 자격이 없어요.”

“그건 인정하죠. 그렇다고 아가씨께서 잘하셨다는 말은 아닙니다. 대체 어떻게 아신 겁니까?”

“조금 이상했어요. 어린아이의 놀이방에 어울리지 않는 귀중한 보물들, 방의 개수, 얼버무리는 태도, 그런 게요. 이 집의 가장 귀한 후계자라서 보물들과 함께 두는 걸까? 그렇게 생각하니까 이유를 알겠는 거 있죠.”

릴리가 조금 들떠서 말했다. 그녀의 일생에 다시는 하고 싶지 않은 엄청난 도박이었다. 한 치가 급한 긴박한 순간이었지만 어쩐지 행운의 여신이 제 곁에 있어 주는 것 같았다.

“황궁도 아니고 귀족 가에 외부로 통하는 비밀 통로가 있는 건 반역이나 살해 위협을 대비한다기보다는 보통은 화재 같은 재난이나 전쟁 중에 대피를 위한 용도일 테니까요. 급박한 순간에 가장 귀한 것들을 가지고 빨리 도망쳐야 하지 않겠어요? 그러니 아이와 보물이 있는 이 방에 사람들의 눈을 피해 외부로 통하는 길이 있을 것 같았어요.”

그리고 이 생각은 정답이었다. 벽을 두드려보거나 장식장을 뒤져본 것은 정말 그간 읽었던 추리소설이 빛을 발한 것이었지만 그녀는 그 얘기는 하지 않기로 했다. 릴리는 의기양양하게 하이드를 돌아보며 여전히 인상을 구기고 있는 그에게 말했다.

“온 서재를 뒤져도 없는 중요하고 은밀한 서류라면 이곳에 있을 거라고 생각해서 선생님께 이 방으로 가라고 말씀드린 거였어요. 방 안에 없다면……, 여기에 있지 않을까요?”

하이드가 조용히 그녀의 말을 듣고 나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의 행동과 현명함은 감탄 받아 마땅한 것이었지만, 그랬다간 이 엉뚱한 아가씨가 또 이런 일을 저지를지도 몰라 속이 타들어갔다.

하이드는 조용히 가라앉은 눈으로 그녀와 함께 어두컴컴한 공간을 살폈다. 오래지 않아 그녀의 말대로 고풍스러운 상자 하나가 나왔다. 상자에는 자물쇠가 걸려있었지만, 외부인이 이곳까지 들어올 거라고는 생각을 못 했는지 그다지 정교한 물건은 아니었다. 하이드가 어렵지 않게 자물쇠를 풀어내고 그 안에서 서류를 찾았다.

“찾던 거 맞아요?”

“……네.”

“선생님! 성공했네요!”

릴리가 기쁨으로 작게 비명 지르며 하이드의 품으로 뛰어들었다. 그는 반사적으로 그녀의 몸을 받아냈지만,그녀의 머리칼에 머리를 묻으면서도 속은 심란하기 짝이 없었다. 제 자신이 한심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렇게 말리고 화를 냈음에도 이 연약한 여자는 제 고집을 부리고 이곳에 왔고, 그는 그녀의 도움 따위는 필요 없다고 해놓고 도움을 받아버렸다.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이, 이렇게 작은 여자가 벌벌 떨며 좁은 통로를 기게 만든 것이다.

“선생님. 좋지 않아요?”

“아가씨가 이런 어두컴컴한 곳에 있는데 기분이 좋겠습니까?”

“저는 좋아요. 저는 이렇게 깜깜한 곳에 선생님이랑 단둘이 있는 게 좋다고요.”

릴리가 발뒤꿈치를 들고 그의 목덜미에 팔을 감고 매달렸다. 릴리는 지금 그녀가 한 말이 고백이나 다름없다는 자각도 없었다. 이 벅찬 성공의 감동을 그와 나누고 싶었을 뿐이었다.

“하아아…….”

하이드는 긴 숨을 내쉬며 많은 말을 삼켰다. 그녀는 원체 올곧은 사람이라 그의 배배꼬인 비아냥 따위는 통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는 배시시 웃고 있는 릴리의 머릿결을 쓸고 서류를 품에 넣었다.

“일단 이곳을 빠져나가 볼까요, 아가씨.”

두 사람을 살금살금 통로를 따라 걸었다. 분명 삼층에 위치한 곳인데도 창문 하나 없어 깜깜하고 습했다. 어찌 된 구조인지 몰라 두 사람은 마냥 앞으로 걸었다. 릴리는 이 통로가 방의 뒤쪽에 만들어진 게 아닐까 추측했다. 좁은 복도를 걷고 나니 계단이 이어졌다. 계단은 꽤나 한참이나 이어졌는데, 밑으로 내려갈수록 축축한 공기 속에 불쾌한 냄새가 섞여 있었다.

“선생님, 이거 어디로 이어진 걸까요?”

“하수도 같습니다.”

“하, 하수도요?”

계단이 끊기자 그의 예상대로 하수도가 있었다. 저택의 하수와 오물이 통하는 길과 수도의 하수 시설이 연결되어있는 것 같았다. 촛불로 희미하게 밝혀진 하수는 그 깊이가 가늠이 되지 않을 정도로 탁했다. 온갖 오물이 뒤섞여 있는 끔찍한 광경에 릴리는 헛구역질을 겨우 참았다. 하수도에는 사람이 걸어 다닐 길이 없었다. 이곳을 빠져나가기 위해선 더러운 물속에 몸을 담가야만 하는 것이다.

“가요.”

릴리가 결심한 듯 비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 처음 입은 옷은 다시는 못 입게 될 모양인가보다. 침을 꼴깍 삼키고 발을 뻗는 릴리를 하이드가 코웃음 치며 뒤에서 안아 들었다.

“가죠.”

“선생님……! 내려 주세요!”

“버둥대지 마세요, 아가씨. 그러다 떨어집니다.”

“그러니까 내려 주세요.”

하이드는 아무렇지도 않게 악취가 풍기는 물에 발을 담그고 걸었다. 다행히 물은 깊지 않은지 무릎까지만 차올랐다. 무엇이 섞여있는지 모를 하수가 그의 바지 자락에 걸쭉하게 휘감겼으나 하이드는 인상을 찌푸리지도 않았다.

“선생니임……!”

“가만히 있는 게 그렇게 어렵습니까?”

하이드의 나지막한 불평이 통로에서 조용하게 울렸다. 릴리는 그의 말에 발끈해서 더 발을 동동거렸다. 그 움직임에 그녀의 기다란 치맛자락이 흘러내리자 그가 혀를 차며 그녀를 고쳐 안았다.

“무겁잖아요! 내려 주세요. 제가 직접 걸을 거예요.”

“아가씨가 무거우면 남자도 아닙니다.”

“그치만……!”

“기어이 하수도에서 물장구라도 치고 싶으시단 말씀이십니까?”

“선생님도 지금 발 담그고 계시잖아요! 저 혼자만 이렇게 안겨 가고 싶지 않아요.”

하이드는 남는 손이 없어 고개를 숙여 그녀의 이마에 쪽 소리 나게 입 맞추었다. 이 아가씨는 처음 맡아보는 악취에 곧 기절할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으면서도 억지를 부리고 있었다. 그에게는 릴리의 비장함이 어이없는 생떼로 느껴질 뿐이었다.

품 안의 여인은 비록 부유하진 않았으나 살면서 고생 한번 해 보지 않은 귀하디귀한 아가씨였다. 코를 싸쥐고 그의 등에 업혀 우는 소리를 했어도 그는 불평 한마디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이드는 자신이 그녀를 이런 더러운 오물에 닿게 할 거라고 생각하는 것이 진심으로 어처구니가 없었다.

이 여자는 어떻게 돼먹은 건지 늘 그의 예상을 벗어났다. 그는 귀족을 환멸 나는 족속들이라고 생각했다. 릴리는 귀족적인 면모를 낱낱이 갖춘 아가씨면서도 하이드가 가진 모든 편견을 저돌적으로 부쉈다. 차라리 그에게 응석을 부리고 기댔으면 하고 바라지만 릴리에게는 그것이 지나친 바람이었던 걸까.

“아가씨에게 물 한 방울이라도 튀게 놔두라는 것은, 저를 모욕하고 부정하는 것입니다. 저를 모욕하고 싶으신가요, 아가씨?”

그녀는 그의 삶을 통틀어 유일하게 귀하게 여기고 싶은 대상이었다. 그 자신은 진창을 뒹굴고 썩은 물을 퍼마시더라도 말이다. 릴리는 그의 인생에서 가장 달고 보드라운 존재였다. 방 안에 가두고 온갖 비단과 금은보화로 꽁꽁 싸매 놓는 걸로도 모자란 판에 그녀를 시궁창에 내려놓을 리가 없었다. 그가 그녀의 요청을 들어줄 리가 없음에도 릴리는 여전히 무엇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불퉁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릴리 아가씨. 가끔은 제 말을 들어주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의 단호한 목소리가 퀴퀴한 통로 안에 낮게 깔렸다. 릴리는 기가 죽어 몸에 힘을 빼고 얌전히 그의 가슴에 기댔다. 더러운 하수구를 걷는 와중에도 왕자님처럼 멋진 건 반칙 아닌가? 하이드는 언제나 그녀가 귀한 보물이라도 되는 것처럼 굴었다. 이런 끔찍한 곳에서 그라고 유쾌할 리가 없는데도 그녀가 부득불 고집을 피운 것은 그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아무런 불평도 없이 당연하다는 듯 그녀를 안고 성큼성큼 걷는 그에게 또 반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말은 엄청 밉게 하는 주제에 행동은 마카롱처럼 달콤한, 모순적인 남자.

그는 소녀들이 꿈꾸던 왕자님처럼 다정한 말을 건네지도 따듯한 미소를 지어주지도 않았지만, 릴리는 그의 빈정거림과 차가운 표정에 설레서 발버둥 쳤다. 마음이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저만치 달려 나갔다. 릴리는 어쩔 수 없다는 핑계를 대며 그의 턱 아래에 제 얼굴을 비볐다. 어쩌겠는가? 그를 사랑하지 않을 도리가 없는 것을.

“좋아해요.”

“뭘 말입니까? 이 시궁창이요?”

하이드가 비아냥대며 대답했다.

“선생님이요.”

“…….”

“저 선생님 좋아해요. 알고 계셨죠?”

천장에서 추적추적 물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충동적인 고백이었다. 더러운 하수도에서 분위기도 맥락도 없이 할 말은 아니었지만, 릴리는 어쩐지 지금 이 순간 그에게 좋아한다고 말해야 할 것 같다고 느꼈다. 어쩌면 그녀의 약혼 문제가 순조롭게 해결되어서 드디어 말할 수 있겠다고 느꼈는지도 모르겠다. 릴리는 덤덤하게, 그러나 솔직하게 말했다.

“……저, 다 티 났을 거 아녜요. 선생님이 그걸 모르실 리도 없고.”

그건 사실이었다. 하이드는 진작부터 그녀의 마음을 짐작하고 있었으니까. 그런데도 그는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말로만 내뱉지 않았을 뿐 그녀는 마음을 늘 드러내다시피 했는데도, 자신은 왜 놀랐는지 알 수 없었다.

“선생님, 왜 아무 대답도 안 하세요……?”

릴리가 슬며시 분홍빛으로 물든 뺨을 하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하이드의 목에 팔을 감고 입 맞추기 직전처럼 얼굴을 마주하고 있었지만, 그의 마음은 전혀 읽히지 않았다. 두 사람은 자그마한 주홍 불빛의 영역 아래에서 숨결로 서로의 뺨을 간질이고 있었다. 릴리의 속눈썹이 불안으로 파르르 떨렸다.

“책임질 수 있습니까.”

“책임, 이요?”

“책임지십시오.”

이제 무를 수도 없을 테니까. 하이드의 얼굴이 다가와, 그녀는 눈을 감았다.

손아귀에 잡힌 머리칼이 너무 부드러워서 릴리는 그것을 더 강하게 움켜쥐었다. 사랑 고백에 대한 대답 같지 않은 협박이었다. 그러나 그걸로도 충분했다. 그녀의 몸을 단단하게 감싸는 팔 힘이, 맞닿은 상체에서 느껴지는 거센 박동이 대답했으니까.

낭만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보이지 않는 더러운 시궁창에서 양초 하나에 의지해, 두 사람은 한참을 입 맞추고 멈춰서 웃고 다시 입 맞추었다.

“아가씨……. 그런데 왜 하필 여기였습니까.”

“선생님이 꼬질꼬질해지고 냄새나니까 자신감이 생겼나 보죠.”

릴리가 눈을 예쁘게 휘고 웃음을 터트리는 바람에 하이드는 어처구니가 없어 실소를 흘렸다.

“하, 참…….”

“그런데, 아직 대답 안 해주셨어요. 하이드 경.”

“무슨 대답 말씀이십니까.”

“숙녀가 신사께 마음을 고백했잖아요. 대답을 입술로 때우시면 안돼요. 그렇죠?”

릴리가 대답에 확신이 없는 학생처럼 소심하게 말했다.

“저는 이런 장소에서는 대답하고 싶지 않습니다.”

사랑스러운 나의 아가씨.

하이드의 머릿속에 청혼 계획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그녀가 꿈꿨을 법한 낭만적인 분위기에서 더없이 달콤하게 사랑을 속삭여주며 바로 결혼을 밀어붙이려고 했는데…….

편지에도 조만간 정식으로 찾아가겠다고 예고까지 했었건만, 눈치 없는 릴리에게는 의미가 없는 짓이었나 보다. 어떻게 단 한 번을 예상대로 되어주지 않는 걸까. 예측불허인 점은 처음부터 한결같았다.

릴리가 얄밉게 웃는 하이드의 뺨을 꼬집었다.

‘자는 동안에 몰래 말씀해 놓고서.’

* * *

“선생님, 정말 무겁지 않으세요?”

“괜한 걱정이십니다. 언제 밖으로 나갈 수 있을지나 걱정하십시오.”

“역시 무거우신 거죠?”

릴리가 눈을 가늘게 뜨고 추궁하듯이 물었다. 하이드는 그녀의 터무니 없는 의심을 코웃음 치며 무시하고 걸음을 재촉했다.

릴리는 불빛이 닿지 않는 곳에서 쥐가 찍찍대는 소리를 낼 때마다 하이드의 옷자락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천장의 관을 통해 벌레라도 지나다니는지 머리 위에서 샤샤샥 소리가 들릴 때마다 목 뒤로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그녀는 애써 의연한 척하고 있었다. 말하면 더 의식될 것 같아 일부러 이 음침한 장소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꺼내지 않았다. 다른 화제를 꺼내 말하고 있었지만, 목젖 아래까지 비명이 차올랐다. 소넬가의 비상 통로를 빠져나올 때까지만 해도 의기양양했었건만, 지금은 울고 싶은 기분이었다.

이래서야 하이드가 그녀에게 이런 일은 어울리지 않는다고 했던 말이 맞지 않냐고 우쭐대도 할 말이 없지 않나. 릴리는 지기 싫은 기분에 일부러 아무렇지 않은 척 으스댔다.

“선생님, 제가 같이 있어서 다행이죠?”

“?”

“혼자 있었으면 무서우셨을 거 아녜요. 아프셨을 때도, 혼자 있는 거 싫어하시는 것 같던데.”

릴리가 그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칭찬을 기대하는 표정에 하이드의 입가가 씰룩거렸다. 벌벌 떨고 있으면서 허세는. 그가 반쯤 내리깐 눈을 야살스럽게 휘며 달콤하게 말했다.

“아아, 맞습니다. 무서워 죽겠어요, 릴리 아가씨. 아가씨가 더 꼭 끌어안아 주시면 좋겠습니다. 저는 아가씨와 달리 겁쟁이거든요.”

익살스럽게 겁먹은 흉내를 내며 하이드는 릴리의 등을 받치고 있던 손을 내려 그녀의 엉덩이를 꽉 쥐었다.

“선생님!”

“정말 위안이 됩니다. 아가씨. 아가씨가 그렇게 겁먹은 얼굴로 저한테 꼭 붙어 있으면, 얼른 나가야겠다는 의욕이 생기거든요.”

그녀를 바라보는 눈빛은 그 의욕이 어떤 방향으로 뻗어나갈지 분명해 보이도록 야릇했다. 그 눈빛에 고개를 돌리며 릴리가 말을 더듬었다.

“누, 누가 겁먹었다고 그래요? 저는 괜찮아요.”

“네에, 그러시겠죠. 나의 용-감한 아가씨.”

하이드가 그의 엉덩이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말꼬리를 늘이며 비아냥대는 목소리에 그녀가 발끈해 무어라 말하려는 찰나 두 사람의 머리 위를 스치며 무언가가 날아갔다.

“꺄악!”

“아가씨, 진정하세요.”

“쥐, 쥐가, 선생님, 흐앙, 머리 위에……!”

“쥐가 날아다닐 리 없잖습니까, 아가씨. 그냥 날벌레가 지나간 것뿐이에요.”

릴리는 완전히 겁에 질려서 하이드의 얼굴을 껴안고 앞을 가리며 훌쩍였다. 하이드는 그녀의 가슴팍에 코를 박은 채 그녀의 엉덩이를 한 팔로 받치고 그녀를 달랬다. 숨이 막히고 앞도 보이지 않는 행복한 지옥이었다.

“훌쩍, 훌쩍…….”

“이제 진정되셨습니까, 겁먹지 않은 릴리 아가씨?”

“…….”

“이 자세도 좋지만, 앞이 하나도 안 보여서요.”

릴리는 놀랐던 것이 진정되고 나니 민망함이 몰려왔다. 괜한 허세를 부려 더 꼴사나워졌다. 게다가 아까의 난동으로 그녀의 치맛자락까지 축축해져버렸다. 르시엔이 선물한 옷 따위 어찌되는 상관없었지만, 릴리는 추태부린 것이 민망해 적반하장으로 새침하게 말했다.

“이제 제 옷도 젖었으니까 내려 주세요!”

“아가씨는 정말로 제 말은 하나도 듣지 않으시는군요. 또 체벌이 받고 싶으신 걸로 해석하면 되겠습니까?”

“선생님은 지금 이 상황에서도 농담이 나오세요?”

“농담 같습니까?”

릴리는 하이드의 진지한 표정에 고개를 흔들었다. 그는 엉큼한 말을 건넬 때 늘 진심이었으니까. 릴리는 결국 제 발로 걷기를 포기하고 화제를 전환했다.

“여길 나가면 소넬가는 어떻게 되나요?”

“재산을 몰수당하고 감옥에서 제2의 인생을 살게 되겠죠.”

“역시, 그렇겠죠?”

“설마 약혼자가 걱정되십니까?”

“그런 건 아니에요.”

“뭐가 아닙니까? 그자는 그럴 가치도 없는 자입니다. 소넬 백작 부부도 마찬가지고요.”

하이드가 죄책감에 젖어있는 릴리의 얼굴을 흘끗 보고 악의를 숨기지 않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 표정 지을 게 빤하니까 빠지라고 했던 겁니다. 릴리 아가씨는 개미 한 마리 못 죽이는 심약한 분 아니십니까. 분명 그자를 속여서 미안해하고 계시겠지요.”

릴리는 입을 꾹 다물고 불만스런 얼굴로 그의 목에 감은 팔에 힘을 주었다. 하나도 미안하지 않다고 단언할 수가 없었으니까. 벌 받아 마땅한 사람이라고 생각은 하면서도 그녀가 그를 속인 사실이 용서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이드는 릴리의 풀 죽은 얼굴에 한숨을 삼켰다. 그는 그녀에게 공감하기는커녕 이해조차 가지 않았다. 그는 그 놈팡이가 릴리의 미안한 감정을 가지는 것조차 아깝고 배알이 꼴릴 지경이었다. 손만 자유로웠어도 이 순둥이의 엉덩이를 때려주었을 것이다.

천장에서 이따금 물 떨어지는 소리를 배경으로 두 사람은 두런두런 대화를 나눴다. 무작정 물길을 따라 직진하다 보니 드디어 갈림길이 보였다. 두 사람은 바람소리가 들리는 곳을 향해 걸었다. 물길이 점점 얕아지더니 이제는 발 아래 찰박거리는 수준이었다.

“선생님……. 이제 물도 없어졌는데 저 내려 주세요.”

“안 들립니다.”

“…….”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은 사다리를 발견할 수 있었다.

“사다리에요! 이제 나갈 수 있어요.”

릴리가 들뜬 목소리로 웃으며 말했다. 나간다면 당장 몸부터 씻고 싶었다. 오물의 끔찍한 악취가 몸 곳곳에 배어 있는 것 같았다.

하이드는 사다리 앞에 도착하고 나서야 그녀를 내려 주었다. 하이드가 먼저 올라가 입구를 막고 있는 뚜껑을 밀어서 열고 그녀는 부족한 근육으로 부들대며 겨우 겨우 한 칸씩 올라오고 있는 것을 잡아서 끌어 올렸다.

맑은 공기의 소중함을 온몸으로 느끼며 릴리가 탈출에 전율했다. 상쾌하고 쾌적한 밤공기를 욕심껏 들이마시고 나서야 그들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하수도에서 꽤 오래 걸었기 때문에 이곳이 어딘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귀족가들이 위치한 로즈벨트 구는 아닌 게 분명했다.

두 사람은 나왔던 출구를 덮고 다시 걷기 시작했다. 아담하고 주택들이 듬성듬성 있었다. 번화가에서 벗어난 외곽 같았다. 저녁때가 지난 시간이라 인적이 드물어서 다행이었다. 사람들이 그들을 봤다면 분명 코를 싸쥐고 인상을 쓰며 욕을 해댔을 테니까.

“선생님, 여기가 어딘지 아세요?”

“저기서 물어보죠. 마침 여관이 있네요.”

“그치만…….”

‘우리를 보고 쫓아내지나 않으면 다행일 텐데요…….’

릴리가 하이드의 검은-검은색이라서 천만다행이었다-바지가 악취를 풍기는 썩은 물로 흥건히 젖어있는 것을 보며 말했다. 그녀도 상대적으로 멀쩡하다 뿐이지 냄새가 나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예상대로 두 사람이 여관의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1층 식당의 몇 안 되는 손님들이 쌍욕을 하며 그들을 돌아보았다. 릴리의 얼굴이 수치심으로 활활 타올랐다. 여관 주인이 험한 말을 하며 그들에게 비렁뱅이는 꺼지라고 욕을 했지만, 하이드는 아랑곳하지 않고 성큼성큼 더러운 발자국을 남기며 주인장에게 다가갔다. 인상을 잔뜩 구긴 주인장이 얼마를 주든 그쪽에게는 스튜 한 그릇 못 판다고 험악하게 언성을 높였다.

“스튜? 저깟 쓰레기가 아니라 제대로 된 걸 내놓아야 할 거야. 당장 씻을 욕조와 물을 올려. 갈아입을 옷도 사 오고.”

주인장은 그가 내민 금화를 넋 빠진 얼굴로 바라보며 멍하니 고개만 끄덕였다. 당장 저 손님들을 쫓아내 주길 기대하던 손님들이 여전히 인상을 쓰고, 두 사람을 의아하다는 듯 쳐다보고 있었다.

손님들의 원성에 그제야 정신을 차린 주인장이 검은 옷을 입은 사내 뒤에 우물쭈물하고 있는 아가씨를 보았다. 마찬가지로 끔찍한 냄새를 풍기고 있었지만, 차림새는 모자람 없는 귀한 신분 같아 보였다. 주인장은 빠르게 상황을 판단하고 손님들을 내보낸 뒤 두 사람을 가장 좋은 방으로 안내했다.

“방은 어떻게……, 제일 좋은 방은 아가씨께서 묵으십니까?”

“같이 쓸 거니까 빨리 물이나 준비하지. 씻고 나면 먹을 음식도 준비하고.”

명령이 자연스러운 사내를 보고 주인장을 부리나케 물을 올려 보냈다. 덕분에 빠르게 씻을 수 있게 되어 릴리가 화색을 띄던 것도 잠시였다.

“벗겨드릴까요?”

“머, 먼저 씻으세요.”

제일 좋은 방에 딸린 욕실답게 욕조는 두 사람이 쓸 만큼 넉넉했다. 하이드는 바로 쓰레기통에 옷을 벗어 던지고 몸에 물을 뿌린 채 멀뚱히 서 있는 릴리를 쳐다봤다.

“참, 제가 아가씨가 응석받이인 것을 까먹었군요.”

하이드가 웃으며 벌거벗은 몸으로 릴리에게 다가갔다. 그가 걸을 때마다 날렵한 근육이 꿈틀거렸다. 그보다는 아래에 달린 물건이 덜렁이며 그녀의 시선을 강탈했다. 커지기 전에도 크구나, 그런데 왜 점점 커지지?

점점 커지는 물건에 의아해진 릴리가 고개를 들자 하이드가 달콤한 미소를 띠고 그녀의 앞에 서 있었다.

“선생님 먼저 씻으시라니까요……?”

“그러면 가여운 일꾼들이 일을 두 번이나 해야 하지 않습니까.”

릴리는 좀 전에 그가 사람을 부리던 태도를 떠올리며 얼굴을 찡그렸지만, 하이드는 빠르게 그녀의 옷을 벗겼다.

“이렇게 냄새나는 옷을 계속 입고 싶으십니까?”

“그건 아니지만…….”

결국, 릴리는 하이드의 손에 벗겨져 알몸으로 달랑 들려 욕조에 담가졌다.

“이러면 좁잖아요…….”

“아가씨가 좁게 있는 거 아니고요?”

두 사람이 몸을 담그자 욕조에서 물이 출렁이며 물이 넘쳐흘렀다. 릴리는 욕조에 바짝 붙어 무릎을 껴안고 쪼그렸다. 뜨거운 김이 풀풀 올라오는 투명한 물은 릴리의 벗은 몸을 전혀 가려주지 않았다. 하이드는 여유롭게 몸을 쭉 펴고 팔을 욕조에 걸친 채 릴리를 바라보고 있었고 그녀는 고집스럽게 고개를 돌리고 그에게서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목욕을 느긋하게 즐기고 싶은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하이드의 눈길이 너무 노골적이었다. 게다가 방만하게 늘어진 자세와 대조적으로 중심에 달린 물건이 빳빳하게 서 있어 그를 쳐다보는 것조차 여의치 않았다. 릴리는 억울함에 그를 향해 물을 튀겼지만, 그의 얼굴에 웃음기만 진해질 뿐이었다.

“흐음, 불편하지 않으십니까.”

“그걸 아는 사람이 그러세요?”

“제가 뭘 했다고 그러십니까? 저도 이 욕조에 몸 담굴 자격 정도는 있지 않습니까? 아가씨를 안고 그 길을 걸었는데요.”

“제가 내려달라고 했잖아요…….”

“그러지 말고 여기 기대세요. 아까는 잘 붙어있으셔 놓고 지금은 왜 부끄러워하십니까?”

하이드는 웃으며 발로 릴리의 허벅지를 살살 쓰다듬었다. 릴리의 뺨이 달아오르는 광경은 언제나 그에게 짜릿한 쾌감을 안겨줬다. 하이드는 한 손으로 제 아랫도리를 쓸어 올리며 무릎을 껴안고 있는 릴리를 감상했다.

“서, 선생님은 왜 안 부끄러워하세요?”

하이드는 대답은 하지 않고 욕정이 선명한 눈으로 그녀를 훑었다. 그의 눈길만으로도 온몸을 추행당하는 기분이었다. 그는 릴리에게 눈을 떼지 않고 아랫입술에 맺힌 물방울을 핥았다. 그는 보란 듯이 물속에서 제 물건을 흔들며 신음했다. 찰박찰박 물소리가 릴리의 귀를 간지럽혔다. 그의 나른한 움직임에 릴리의 등줄기를 타고 오싹한 전율이 흘렀다.

“하아, 아가씨…….”

“꼭, 제가 보는 앞에서 그러셔야겠어요?”

“제가 정력을 낭비하는 게 마음에 안 드시나 봅니다. 하지만, 어떡하겠습니까? 정력은 남아도는데 영 쓸 기회가 없는걸요.”

하이드는 젖은 머리칼을 뒤로 넘겼다. 노골적인 유혹이었지만 릴리는 그와 눈도 마주치지 못했다. 어떻게 아직도 저렇게 순진하게 굴까? 하이드는 그녀를 놀리는 것을 그만두고 몸을 일으켜 그녀를 끌어당겼다.

“편하게 앉으세요.”

“하아.”

하이드는 릴리를 끌어안고 자신의 가슴에 기대게 했다. 그가 자신을 씻겨준 적은 전에도 있었지만, 같이 욕조에 들어온 것은 처음이었다. 그녀의 몸은 긴장으로 빳빡하게 굳어있었다. 하이드는 그녀의 긴장을 풀어주기 위해 어깨를 부드럽게 주물렀다.

어깨를 주무르던 손은 어느새 가슴으로 내려왔다. 릴리는 그가 제 옷을 벗긴 순간부터 이렇게 될 것을 예상하고 있었다. 아니, 기대하고 있었나?

“하응, 앗.”

그가 뒤에서 가슴을 주무르며 릴리의 귀를 깨물었다. 그녀의 다리 사이로 그의 굵은 성기가 비죽 솟아있었다. 귀의 여린 살을 입으로 물고 젖꼭지를 꼬집으며 자극하자 그의 기둥이 물기 아닌 다른 것으로 미끈거리기 시작했다.

“소리, 참지 마십시오.”

하이드가 슬금슬금 뒤에서 허리를 움직였다. 그에 따라 그녀의 신음이 커졌다. 수증기가 가득해서 숨이 모자랐다. 뜨거운 물로 데워진 몸이 연분홍빛으로 보기 좋게 달아올랐다. 하이드가 그녀의 어깨에 머리를 걸치고 통통한 가슴이 그의 손에 뭉개지는 모습을 즐겁게 감상했다. 붉고 뜨거운 혀가 하얀 몸뚱이에 맺힌 물방울을 핥았다.

“목욕은…….”

“하고 나서.”

그가 릴리를 돌려세웠다. 마주 본 상태에서 릴리가 무릎을 세우고 내려다보는 자세였다. 그녀의 가슴이 하이드의 얼굴 정면을 향한 상태라서 그녀가 벌건 얼굴로 몸을 뒤로 빼는 것을 하이드가 팔뚝으로 끌어안았다.

“아까 이렇게 하셨잖아요. 기억 안 나십니까?”

하이드가 그녀의 가슴골 사이를 야하게 핥으며 말했다.

“그건 놀라서……!”

“나는 아까부터 이러고 싶었는데.”

으으, 릴리가 두 손으로 제 얼굴을 가렸다. 저런 야한 표정을 짓고 있는 하이드에게는 도저히 저항할 수가 없었다. 결국 그녀는 그에게 얌전히 가슴을 내준 채 뜨거운 혀에 농락당했다. 이미 빳빳해진 정점을 방치당한 채 피부를 부드럽게 핥고 빨아들이는 감각은 잔인할 정도로 감질났다. 밀가루처럼 부드러운 피부가 그의 입속으로 사라졌다.

“앗…….”

아릿할 정도로 세게 빨아들이는 통에 릴리가 아프게 신음했다. 하이드는 그녀가 칭얼거리기 전에 붉게 남은 자국을 고양이처럼 핥으며 만족스럽게 미소 지었다. 계속해서 정점의 언저리만을 애무하자 릴리가 안타까움에 작게 우는 소리를 냈다.

그녀는 알까? 릴리는 그가 애태우고 괴롭히면 저도 모르게 몸을 바짝 붙이며 더 만져달라는 듯 애교스럽게 칭얼댔다. 적극적으로 달라붙는 모습이 좋아서 그로서는 릴리를 괴롭히지 않을 수가 없었다. 뾰족하게 서 있는 앙큼한 돌기를 빨고 싶어 입에 침이 고이는 데도 하이드는 인내심 있게 릴리를 자극하며 기다렸다. 곧 참지 못한 그녀가 수치심에 훌쩍이며 빨아달라고 가슴을 내밀 테니까.

“흐응, 선생니임.”

“네, 아가씨.”

“해주세요…….”

뭘요? 다 알면서도 꼭 짓궂게 되물었다. 평소에는 그녀의 응석을 잘도 받아주면서 그는 이럴 때만 확실했다.

“여기, 빨아주세요.”

릴리가 물방울이 뚝뚝 흘러내리는 가슴을 제 손으로 받치며 여린 목소리로 말했다. 수치심을 이기지 못해 붉게 물든 뺨과 열기로 흐려진 눈망울이 못 견디게 야했다. 그가 안겨준 쾌락에 지배당해 흥분한 몸을 어쩔 줄 몰라 울먹이는 게 예뻐서 하이드는 기꺼이 릴리에게 벼락같은 쾌락을 선사했다.

“아……! 아앗, 아!”

작은 돌기가 정신없이 빨리고 깨물렸다. 혀로 굴려지는 감각이 선명하고 위아래로 멋대로 튕기는 장난질에 아찔했다. 하이드는 입으로 그녀의 가슴을 희롱하면서 손으로는 부지런히 그녀의 아래를 자극했다. 엉덩이를 힘 있게 주무르다 그사이를 가르고 들어오는 굵은 손가락에 그녀가 왈칵, 미끈거리는 애액을 뱉어냈다.

첨벙.

예민한 가슴과 아래를 동시에 자극당하자 무릎에 힘이 빠진 릴리가 주저앉았다. 탱탱할 정도로 부풀어있는 물건이 그녀의 다리 사이에 자리 잡았다. 흥분으로 흐느적거리는 그녀를 하이드가 끌어안고 입술을 비볐다. 그의 혀가 말캉한 입술을 가르고 들어가 그녀의 입 안을 훑었다. 릴리가 그의 머리카락을 손가락에 감고 뜨겁게 매달렸다.

젖은 소리 사이에 간간히 릴리의 가냘픈 신음이 섞였다. 그녀가 안달하며 그의 물건에 미끈거리는 아래를 문질러댔다.

“하아, 엉덩이 들어.”

“으응, 얼른…….”

하이드가 흉흉한 물건을 잡고 릴리의 아래에 문질렀다. 성기의 두툼한 끄트머리가 여린 점막을 사정없이 짓뭉개자 릴리는 인내심 없이 엉덩이를 흔들며 그의 것을 졸랐다. 그 선정적인 몸짓에 그가 인내심을 잃고 단박에 그녀를 꿰뚫었다. 좁은 곳을 묵직하게 채우는 압박감에 릴리가 고양이처럼 날카롭게 신음하며 그의 것을 바짝 조였다.

욕조의 물이 출렁거리며 마구 넘쳤다. 젖은 살이 부딪히고 물이 찰박이는 소리가 요란하게 귀를 어지럽혔다. 그녀는 흥분하면 곧잘 울었다. 절정이 가까워지면 눈물이 고여 젖은 속눈썹이 반짝이고 아득한 쾌락에 눈을 감으면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하이드가 그 얼굴을 노려보며 달콤한 눈물을 집요하게 핥아 마셨다.

* * *

하이드는 릴리의 체력을 고려하지 않고 울먹이는 그녀를 몰아붙였다. 그녀가 발정 난 고양이처럼 교태를 부리며 날카롭게 울어댔으니 그의 탓만은 아니었다.

두 사람의 거센 몸짓은 욕조의 물을 거의 반이나 흘려보냈다. 하이드는 눅진하게 풀어진 릴리의 몸에 맨손으로 비누를 문질러 거품을 내어 씻겼다. 미끄러운 거품은 금세 끈적하게 녹아내렸다.

“닦아드리겠습니다.”

커다란 수건을 들고 슬금슬금 다가오는 그를 릴리가 무뢰한 보듯 흘겨보았다.

“이쯤 되면 아가씨가 저를 그렇게 볼 때마다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기억하실 법도 한데…….”

그녀가 새침 떨면 흥분된다고 했던가. 그의 아랫도리는 지친 기색 없이 다시 씩씩한 모습을 되찾았다. 그 광경을 질린 얼굴로 보던 릴리가 재빨리 대충 물기만 닦고 침대로 도망쳤다.

릴리는 이불을 목까지 끌어올리고 하이드가 아랫도리에 수건만을 걸친 채로 그녀에게 다가오는 걸 쳐다보고 있었다. 하이드는 그녀가 첫날밤을 기다리는 새신부처럼 얌전히 침대에 누워있는 게 마냥 어여뻤다. 호박색의 투명한 눈동자에 어른거리는 것은 긴장과 의심이었지만, 그것도 나름대로 귀여웠으니까.

하이드는 릴리의 이마에 입 맞춘 뒤 가운을 걸치고 하인을 불렀다. 고생 끝에 얻어낸 문서는 내일 황자에게 직접 전해줄 것이지만, 틸리안에게는 간단히 소식을 전할 필요가 있었다. 르시엔의 저택에 간 걸 아는데 돌아오지 않는다면 그놈이 그 집을 뒤집어 놓을지도 모르니까.

그녀는 눈만 빼꼼히 내밀고 하이드가 지시하는 걸 보고 있었다. 하이드는 음식 몇 가지를 내오라 이르고 그녀의 옆에 누웠다.

“아가씨 흥분하면 여기까지 분홍색으로 달아오르는 게, 진짜 맛있어 보여요.”

그러니까 내 탓하면 안 돼. 하이드가 기진맥진한 그녀의 목덜미를 가볍게 쓸며 말했다.

“선생님 진짜 얄미운 거 아세요?”

“아가씨는 본인이 귀여운 거 알고 일부러 그러십니까?”

눈을 가늘게 뜨고 웃는 매혹적인 미소에 릴리가 할 말을 잃고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그의 말에 기뻐하고 마는 나약한 마음에 자존심이 상했다. 진짜 영악해…….

“좋아해요. 선생님.”

릴리가 중얼거리며 눈을 끔뻑였다. 연약한 그녀의 성정과 육체로는 버티기 힘들 정도로 험난한 하루였다. 수마가 그녀를 붙잡고 늘어졌다.

“아가씨, 설마 그런 말만 하고 주무시는 겁니까?”

하이드가 릴리의 어깨를 가볍게 흔들었지만, 릴리는 이미 반쯤 혼이 나가 잠들어있었다. 그는 자신이 한 짓이 있어 곤한 그녀를 깨우지는 못하고 이를 갈며 조용히 이불을 덮어주었다.

* * *

아침 햇살이 커튼을 투과해 부드럽게 일렁이며 그녀의 잠을 깨웠다. 까슬하지만 보송한 이불이 맨몸에 감기는 촉감과 따끈한 몸을 맞대는 기분 좋은 감각에 릴리가 눈을 뜨지 않고 하이드의 품을 파고들었다. 탄탄하고 뜨뜻한 가슴팍의 체온에 수마가 떨어지지 않고 들러붙었다.

‘……가슴팍?’

겨우 떠진 시야에 살색이 가득했다. 느리게 끔뻑이는 눈 앞에 하이드가 무방비한 얼굴로 잠들어 있었다. 햇빛이 거슬리는지 찌푸린 미간과 흐트러진 머리카락이 기가 막히게 퇴폐적이라서 릴리는 제 얼굴을 손으로 감싸고 소리 없이 비명을 질렀다.

그녀가 조심스럽게 몸을 빼려고 하자 하이드는 눈도 뜨지 않은 상태로 그녀의 몸에 팔을 휘감고 끌어당겼다. 방금 전보다도 그에게 밀착하게 되어 릴리가 곤란한 기분에 신음했다. 그가 일어나기 전에 미리 옷을 입으려는 앙큼한 생각은 시도하기도 전에 실패할 모양이었다.

“하이드.”

릴리가 그의 품에서 팔꿈치를 세워 하이드의 얼굴을 감상했다. 몰래 짝사랑하는 대상의 이름을 읊조리는 소녀처럼, 릴리가 작게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가 듣지 못하는 것을 아는데도 뺨이 슬쩍 달아올랐다.

“네에, 릴리 아가씨.”

하이드가 눈을 뜨고 웃었다.

“깨어있었어요……?”

배신당한 것처럼 비극적인 목소리에 하이드가 그녀의 허리를 더 세게 감싸며 말했다.

“흐응, 아가씨가 그렇게 뜨거운 눈으로 쳐다보시니 민망해서 눈을 뜰 수가 있어야지요.”

잠에서 깨자마자 놀려대는 게 얄미워 릴리가 솜방망이 같은 주먹으로 그의 가슴을 토닥거렸다. 놀림당하고도 배시시 웃게 되는, 공기마저 달콤한 아침이었다.

* * *

“릴리! 너는 도대체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아느냐?”

“오라버니…….”

평민촌의 허름한 여관 앞에 아침 댓바람부터 번쩍이는 고급 마차가 세워졌다. 릴리는 여관 직원이 사온 밋밋한 드레스를 걸치고 서서 틸리안의 호통을 들으며 어색하게 웃었다.

틸리안은 그녀의 어깨를 붙잡고 짧게 혼낸 후 와락 끌어안았다. 릴리는 널찍한 품에 안겨서 떨리는 그의 팔을 느끼며 감히 숨이 막힌다고 불평할 수 없었다. 그녀는 아침에 눈을 뜨고 나서야 틸리안을 떠올렸지만, 그는 내내 그녀를 걱정했을 것이었다. 릴리가 미안한 마음에 팔을 들어 그를 마주 안는 모습을, 하이드가 뒤에서 인상을 잔뜩 구긴 채 바라보고 있었다.

“너 이 자식.”

“좋은 아침입니다. 틸리안 경.”

틸리안은 릴리를 놓아준 뒤 곧바로 하이드에게 다가가 그의 멱살을 잡았다. 하이드는 셔츠가 쥐어 잡히고도 안면에 여유가 가득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험악하게 인상을 찌푸리고 있던 주제에 틸리안의 살벌한 눈빛을 받고 있는 지금은 사람을 자극하는 얄미운 미소를 띤 채였다.

“릴리를 잘도……! 너 같은 놈은 애초에 믿지도 않았다.”

“저도 경의 신뢰는 받아들인 적 없습니다.”

“오라버니!”

릴리가 틸리안의 옷을 잡아당기고서야 손을 풀었다. 그는 하이드가 보이지 않는 사람인 양 릴리만을 챙겼다. 하이드는 명백한 무시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틸리안의 뒤통수에 소리쳤다.

“곧 정식으로 찾아뵙겠습니다, 틸리안 경!”

경쾌한 목소리에 틸리안이 그를 뒤돌아보자 하이드가 정중하게 고개를 까딱하며 두 사람을 배웅했다. 릴리가 혼자 틸리안이 타고 온 마차에 올라타며 미안한 표정으로 하이드를 계속 돌아보았지만, 하이드는 여유로운 미소로 손을 흔들었다.

“어제 소넬 가에 간다고 나가서는 연락도 없이 돌아오지 않는다니, 얼마나 걱정했는지 아느냐?”

“연락했어야 했는데, 죄송해요……. 여긴 어떻게 알고 오신 거예요?”

“밤에 그자가 보낸 심부름꾼이 편지를 전해주더군.”

어디에 묵는지 적어놓았더라면 당장 찾으러 갈 수도 있었을 텐데, 릴리는 자신과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고만 전했다. 심부름꾼은 여관의 직원이 아니어서 정확한 위치는 모른다고 진땀을 뺐고, 틸리안은 해가 어스름한 새벽부터 이 동네의 여관이라는 여관은 전부 이 잡듯이 뒤져 겨우 그들을 찾은 것이었다.

“소넬 가의 비밀통로를 찾아 빠져나왔다지.”

“그게………, 네.”

릴리는 조금쯤 대단하다는 칭찬을 들을 것이라 기대하고 있었는데 틸리안의 표정은 냉담하기 짝이 없었다. 역시 그는 전혀 기쁘지 않은 걸까? 릴리는 자신이 틸리안의 기분을 전혀 생각해주지 않은 것 같아 양심이 따끔거렸다.

틸리안은 조용히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탓에 릴리도 자연스럽게 입을 다물고 생각에 빠졌다. 앞으로 자신은 어떻게 되는 걸까. 과연 파혼이 순조롭게 이루어질지 걱정하는 동안 이제는 익숙해져 버린 바르딘 자작가에 도착했다.

“쉬어라.”

“저, 오라버니.”

“?”

“데리러 와주셔서 고마워요.”

“그래.”

틸리안은 제 방으로 올라가는 릴리의 뒷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지켜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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