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라버니는 심란해
“후우우…….”
틸리안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심란했다. 그의 앞에는 바르딘 자작의 서류가 놓여있었다. 무도회 이후로 그는 잠을 줄여가며 가문의 사업을 조사했다. 그는 바르딘 자작의 하나뿐인 후계자였으니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그가 잘한다면 릴리의 결혼으로 소넬가와 맺어질 필요 없이…….
자작은 제 아들이 사업에 손을 대는 것에 아무런 의심도 하지 않았다. 두 팔을 벌리고 환영하며 드디어 철이 들었다고 말하는 아비에게 틸리안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는 여전히 사업에는 전혀 관심도 없었기에.
바르딘 자작은 아내의 죽음 이후 사업을 공격적으로 확장했다. 아내의 희귀병에 댈 약값이 터무니없이 비싸고 귀해 아내를 죽음으로 내몰았다는 생각이 그를 지배하고 있었다. 원래부터 다정함이라곤 몰랐던 남자는 아내의 죽음 이후 텅 빈 마음에 욕망을 채워 겨우 살았다. 냉혹하고 엄한 아비였다. 그의 아내가 살아있었을 당시만 해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는 집사의 말을 들으면, 틸리안이 제 아비를 이해하지 못할 것도 아니었다.
자작가의 주력사업은 면제품과 화륜의 도자기 수입이다. 바르딘 자작이 무리해가며 방적기와 직조기를 구입했던 것이 몇 년 전의 일이었다. 값싸고 튼튼한 면은 서민층에게 불티나게 팔렸고, 그는 면제품으로 얻은 수익으로 화륜의 도자기를 수입하기 시작했다. 제국의 귀족들은 동양적인 멋스러움이 담긴 도자기에 막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집안이 나날이 부유해지고 살림이 화려해지는 것도, 좋은 일이었지 문제가 될 일이 아니었다. 솔직히, 틸리안은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쪽에 가까웠다.
그렇기에 틸리안은 가문의 번성이 방직공장에서 오는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서류의 구매 내역은 다른 것을 말하고 있었다. 이건 아무리 봐도 방직공장에서 구입할만한 물품이 아니었다. 제 아비가 반역이라도 꾀하는 것인가? 무기나 만들법한 주석, 철, 화약……. 재료가 심상치 않았다. 그래서 틸리안이 한숨을 쉬고 있는 것이었다.
겉으로 드러나는 장부는 문제가 없었으나 자세히 들여다보니 허점이 있었다. 결국 그가 찾아낸 것은 이중장부였다. 이것을 발견했을 때의 충격을 떠올리면, 지금도 머리가 지끈거릴 지경이었다.
그가 본격적으로 조사에 착수하자 그간 자신이 몰랐던 것이 이해가지 않을 정도로 정황이 착착 맞아떨어졌다. 최근 화륜의 도자기를 수입해오면서 바르딘 자작이 그 나라의 대상과 긴밀한 연을 맺게 되었고, 이를 통해 소넬 가가 은밀히 제국에 총을 들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었다. 돈 될 사업이라는 것을 기가 막히게 알아챈 자작은 그 뒤로 소넬 백작과 손을 잡기로 했다.
틸리안은 제 아비가 어째서 수양딸까지 들이며 소넬 가와 연결되려고 애쓰는지 깨달았다. 틸리안은 기사를 목표로 살았지만, 바르딘 자작은 자신의 사업을 물려주기 위해 틸리안이 어렸을 때부터 강도 높은 경영 교육을 받게 했다. 그리고 틸리안은 책상 위의 서류가 무엇을 뜻하는지 충분히 알아챌 정도로 명석했다.
톡, 톡, 톡.
그의 검지가 책상을 규칙적으로 두드렸다. 파헤칠수록 참담했다. 황궁 기사단으로 몇 번 조사하기도 했던 총기 살인 사건과 불량 총기 폭발이 자신의 가문과 연결되어있을 줄이야.
틸리안의 단단한 입매에서 침음이 새어 나왔다. 여태까지 제 가문을 나 몰라라 했던 벌인가? 릴리가 아니었다면 언제까지 비밀이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아버지는 어떻게 자신에게까지 비밀로 했던 걸까.
자신이 순진했던 걸까. 가문의 급작스러운 부 아래에 썩은 물이 고여있었을 줄이야. 틸리안은 저 혼자 고결하다고 맥 빠지는 착각을 하고 살았던 것이다.
그는 속이 답답해 방 밖으로 나왔다. 릴리의 얼굴을 보면 기분이 나아질까 그녀의 방을 찾아갔는데 방은 비어있었다. 하녀는 릴리가 뒤뜰에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뒤뜰은 저택의 뒤편이라 그다지 볼거리가 많지도 않았다. 뒤뜰에서 뭘 하는 걸까, 정원의 파고라가 낫지 않나.
틸리안은 저택의 뒤편으로 걸어갔다. 릴리는 나무 아래 쭈그리고 앉아 뿌리를 살피고 있었다.
“릴리.”
“오, 오라버니?”
릴리가 화들짝 놀라 엉덩방아를 찧었다. 땅에다 보물이라도 묻고 있던 것처럼 놀란 반응에 오히려 틸리안이 당황할 정도였다. 릴리가 머쓱해하며 일어나 엉덩이를 털었다.
“여기서 뭐 하고 있었느냐.”
“어, 아무것도 안 했어요. 그냥 가만히 있었어요. 왜, 왜요?”
그녀는 더글라스가 쪽지를 남기지 않았는지 확인하고 있었다. 나무뿌리 아래를 더듬느라 손바닥에 흙이 묻었지만, 릴리는 손을 등 뒤로 숨기고 흙을 털었다. 차라리 고양이를 보고 있었다고 할 걸 그랬나? 그랬다간 오라버니가 고양이를 쫓아낼지도 모르는걸. 거짓말을 못 하는 그녀로서는 무조건 잡아떼고 자리를 피해는 것이 최선이었다.
릴리의 얼굴이 숨기지 못한 당황으로 물들었다. 틸리안은 미심쩍어하면서도 추궁하지 않았다.
“그냥, 이야기를 나누려고 불렀다. 요즘 내가 바빴으니까.”
“좋아요. 안으로 들어가요.”
그녀는 누가 봐도 어색해 보이는 웃음을 지으며 틸리안의 옷자락을 잡아끌어 저택으로 향했다. 틸리안은 기사답게 그녀의 호흡이 흐트러진 것을 느끼며 물었다.
“내게 숨기는 게 있느냐.”
“그럴 리가요.”
틸리안은 그녀에게 등을 떠밀려가며 저택으로 들어갔다.
두 사람은 처음에는 아무 얘기나 나누었다. 그다지 별다를 게 없는 근황과 시시껄렁한 주변 사람들 이야기, 틸리안의 상사 얘기 등. 그러다 릴리가 짐짓 아무렇지 않은 듯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뜬금없지만……, 바르딘 자작가에도 숨겨진 방이나 비밀 통로 같은 게 있나요?”
“숨겨진 방?”
“바르딘 자작가도 꽤 유서 깊은 가문이니까요. 저택도 성대하잖아요? 보통 커다란 귀족가에는 하나씩 있대요. 저희 집은 작아서 숨겨진 공간 같은 게 있을 리가 없었지만요.”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손가락을 꼼지락거리고 있었다. 틸리안은 그녀의 가느다란 손가락이 초조하게 움직이는 모습을 보며 대답했다.
“꼭 그렇지만도 않다. 예전에 지어진 저택들은 그런 곳도 있지. 릴리, 이곳에 숨겨진 방이 궁금한 게냐?”
“음……, 맞아요. 제가 원하면 가르쳐주실 건가요?”
“그래.”
“네?”
릴리가 그의 간단한 대답에 놀란 듯 되물었다.
“너는 충분히 알 권리가 있으니까.”
릴리는 틸리안의 진중한 표정에 죄책감을 느꼈다. 그는 자신을 진심으로 대했지만, 그녀는 그의 진심을 이용해 정보를 캐려 하고 있으니까.
“……왜요? 저는 정말 오라버니의 친동생도 아니잖아요.”
“저번에도 말했듯이, 나는 네가 바르딘가로 들어온 이후부터 가족이 되었다고 생각해.”
틸리안이 웃었다. 무뚝뚝한 그의 얼굴에 웃음이 번지자 소년처럼 보였다. 티 한 점 없는 청량한 미소가 릴리의 가슴에 파문을 남겼다.
“고마워요. 그런데 제게 그렇게까지 마음 주실 필요 없어요. 오라버니, 저는 소넬가와의 연결고리일 뿐이잖아요. 저도 제 분수를 아는데 오라버니는 왜.”
‘저한테 마음을 주세요?’
틸리안이 그녀에게 잘해줄수록 릴리는 괴로워졌다. 다 큰 어른이 서류의 잉크 자국에 불과한 관계에 의미를 두는 게 이해 가지 않았다. 그는 그녀가 저택에 있는 동안 적당히 챙겨주는 척하고, 결혼식 이후에 공식적인 자리에서 마주치면 남들 앞에서 다감한 척 안부를 물으면 끝이었다.
릴리, 자신도 이곳에 의미를 두지 않고 틸리안의 자상함을 위선이라고 믿고 마음의 거리를 두려고 했으니까. 어떻게 되어 먹은 어른이 이다지도 순진하게 구느냔 말이다. 그녀는 틸리안도 가문의 이익을 위해 그녀를 이용하는 데 가담했다고, 적어도 자작과 뜻을 같이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릴리는 바르딘 가의 정보를 캐는데 그를 이용하고, 또 그녀의 행동으로 인해 그가 받을 타격을 모르는 척할 수 있었다.
그러나 틸리안은 무도회에서 그녀가 원한다면 손해를 감수하고 파혼시켜주겠다고 말했다. 그 자신을 희생해서라도 그녀를 위하겠다고. 릴리는 심란한 마음에 날카로운 말을 내뱉었다. 그러나 그 말에 거짓은 없었다. 내내 그에게 하고 싶었던 말이다. 대체 왜? 자신을 향한 싱그러운 미소, 거리낌 없는 호의가 릴리는 껄끄러웠다.
“글쎄. 나도 잘 모르겠다. 그냥, 널 처음 본 순간부터 그랬어. 릴리, 난 그저 네게 잘해주고 싶을 뿐이다.”
“……그럼 가르쳐주실래요?”
“네게 못 가르쳐줄 건 없지만, 이 저택엔 아무런 비밀이 없어. 자작가가 오래 명맥을 유지한 가문 중 하나기는 하지만 비밀 통로가 필요할 만큼 대단한 위세는 없었으니까. 자작가 아니냐, 릴리.”
“그런가요.”
릴리는 실망감을 조용히 갈무리했다. 이렇게 쉽게 얻어낼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정말 실망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니까. 틸리안이 그녀에게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일지도 몰랐지만, 어쩐지 그는 그러지 않을 것 같았다. 결국 스스로 확인하는 수밖에.
틸리안은 예민하게 릴리의 표정을 살폈다. 그는 감이 특출나게 발달한 사내였다. 가문의 이렇다 할 지원도 후광도 없이 황실 부기사단장의 자리에 오른 남자다 보니, 생각의 가지가 뻗어 나가기도 전에 본능으로 알아채곤 했다. 지난번에 대화를 나눴을 때는 이 괴리감을 눈치채지 못했더랬다. 그때는 아는 것이 없었으니까.
그러나 틸리안은 이제 바르딘가와 소넬가 사이의 은밀한 거래를 알고 있었다. 릴리는 이 일에 가장 밀접하게 관련된 사람이었다. 가장 무관하지만, 가장 긴밀하게 연결되어있는 대상. 어쩌면 그녀는 무언가 알아챈 걸지도 모른다. 혹은 르시엔이 무언갈 귀띔해주었는지도.
틸리안 릴리가 무얼 알고 있고, 더 알고자 하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녀가 그에게서 정보를 캐내고자 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릴리는 그 앞에서 덤덤하게 약혼을 받아들이는 것처럼 말했지만, 그렇지 않았던 걸까?
릴리와 틸리안, 두 사람은 심란한 기분과 은밀한 속셈을 숨기며 대화를 이어나갔다.
“요즘 아버지의 사업을 잇기 위해 공부하고 있다. 나는 여러모로 부족한 점이 많더군. 내 가문에 대해 모르는 게 많았어.”
“하지만 틸리안 오라버니는 기사잖아요……. 사업에 손대시기에는 바쁘지 않아요?”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사업은 자신의 길이 아니라고 했던 틸리안의 빠른 변심 발언이었다. 릴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 모습을 보고 웃으며 틸리안이 말했다.
“바쁘지만, 못할 일은 아니다. 보다시피 난 체력이 좋거든.”
릴리는 틸리안의 농담에 웃을 수도 없었다. 세상에. 그녀는 날벼락이라도 맞은 것 같았다. 오라버니가, 틸리안 오라버니마저 이 추잡한 흙탕물에 뛰어들었단 말인가?
“무, 무슨 사업에 손대시려고요? 자작님은 다양한 사업을 하시잖아요. 면제품이나 도자기 수입 쪽이요?”
릴리가 간절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녀는 틸리안을 제 손으로 처단하는 일만큼은 오지 않길 바랐다. 그를 의심하고 있었으면서도, 무의식중에서는 틸리안은 고결하리라고 믿었는지 충격이 상당한 릴리였다.
“……잘 알고 있구나, 릴리.”
틸리안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그녀의 안색을 더듬으며 대답했다.
면 공장은 바르딘 자작가의 대표 사업이나 다름없기에 릴리도 알 수 있었지만, 도자기 수입은, 글쎄. 화륜의 장인은 제 작품들을 대량으로 풀지 않았다. 콧대 높은 장인의 작품을 대상의 입김을 거쳐 자작은 웃돈을 주고 겨우 들여온 것들은, 한 번에 두세 점씩만 암시장에 경매에 붙여 비싸게 팔았다. 고상하고 사치스런 수집에 취미가 있는 고위 귀족들에게서만 알음알음 퍼졌을 이야기를 릴리가 어떻게 알았을까.
“그냥, 어쩌다 보니 들리더라고요. 이 집에는 이국적인 도자기가 많기도 하고…….”
“저번부터 느끼는 거지만, 릴리. 너는 사업에 관심이 많구나. 나는 이제야 우리 가문의 사업에 대해 알게 되었는데 말이야.”
틸리안이 진땀을 빼고 있는 릴리를 보며 씁쓸하게 대답했다.
릴리는 그가 과연 자작이 저질러놓은 일들을 다 알게 되었는지 궁금했다. 알게 되었더라도 바르딘 자작은 그의 아버지니까 감싸겠지? 틸리안이 아무리 정의로운 사람이더라도 팔은 안으로 굽는 법이니까. 절망적인 생각에 빠진 채, 릴리가 창백해진 얼굴로 물었다.
“오라버니는 그럼 자작님이 하시는 일을 다 알고 계신 건가요?”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것까지 알고 있냐고 묻고 싶은 게냐?”
“네?”
릴리는 눈에 띄게 동요했다. 틸리안은 그런 그녀의 반응에 희미하게 웃으며 말을 이어나갔다. 이 나이를 먹고도 지나치게 순진한 아이다. 저렇게 감정이 다 드러나는 표정을 짓기도 쉽지 않을 텐데.
“릴리. 네가 저번에 내가 아버지의 사업에 참여하고 있는지 궁금해했었던가?”
“으음, 제가 그랬었나요?”
릴리가 오리발을 내밀며 틸리안의 눈을 피했다. 안타깝게도, 발뺌이 그녀가 가진 최선의 수였다.
“그랬었다. 이건 기억하느냐, 내가 네가 원한다면 이 결혼을 막아보겠다던 말 말이야.”
“……네. 정 안 되면 절 데리고 도망쳐 주시겠다고 하셨잖아요.”
제 오라비가 느릿한 왈츠에 맞춰 발을 옮기며 했던 말, 그 다정한 거짓말을 떠올리며 릴리는 살며시 웃었다.
“너는 믿지 않았던 것 같지만 진심이었다. 그리고 지금도 유효해.”
검을 잡아 수십 번 찢어지고 벗겨졌던 거친 손이 밀가루 반죽처럼 보드라운 손 위에 겹쳐졌다. 맞닿은 피부에서 낯선 체온을 느끼며, 릴리는 방 안의 분위기가 미묘하게 달라진 것 같다고 생각했다. 틸리안의 태도는 한없이 다정하지만, 조금 무거웠다.
손등을 가볍게 쥐는 힘과 살짝 찌푸린 눈썹이 무언가 호소하고 있었다. 틸리안의 눈동자는 올곧고 정직했다. 그는 그녀가 그에게 무슨 말이라도 해주길 바라는 듯했지만, 릴리는 불안한 표정으로 눈을 깜빡일 뿐이었다. 그녀는 틸리안의 생각을 읽을 수 없었고, 그것은 틸리안도 마찬가지였다.
‘오라버니가 지금 농담을 하고 계신 건가? 진심인 걸까?’
“자작님은 오라버니가 저를 데리고 도망치시면 안 좋아하실 텐데…….”
“아버지는 원래 내가 하는 모든 일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으셨다.”
* * *
틸리안은 릴리가 제 방으로 돌아가고 나서 곧바로 검을 들고 수련장을 찾았다. 검이 공기를 가르는 소리, 절제된 호흡, 몸을 달구는 익숙한 열기가 틸리안에게 평화를 가져다주었다. 머리가 복잡할 때 자주 했던 대로 그는 검을 처음 시작했을 때처럼 기초부터 천천히 되짚었다. 머리로 떠올리지 않아도 몸에 새겨져 있는 단계를 다시 밟다 보면, 어지럽던 생각이 정리되곤 했다.
릴리는 아마 그를 믿지 않고 있을 것이다. 자신조차 그녀를 향한 맹목적인 호의가 설명되지 않았으니까. 아버지의 호통을 들으며 실이 될 게 뻔한 파혼을 주장한 것이나 그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위해 내내 회피했던 사업에 손을 댄 것은, 릴리를 만나기 이전의 틸리안이라면 상상도 하지 못했을 것이었다. 그는 아버지의 뜻을 이어받지는 못했으나 일절 반항이라곤 하지 않는 아들이었으므로.
외동으로 외롭게 자라며 동생을 바라오긴 했었다. 그래서였을까,
눈에 파묻혀 벌벌 떨고 있던 작은 여인을 처음 보았던 순간부터 그는 마음 한구석에 그녀를 위한 자리를 마련했다. 나의 사랑스러운…….
틸리안은 그녀의 이상한 기색을 모른 척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었다. 그들이 오래 안 사이는 아니지만, 릴리의 변화는 그토록 뚜렷했다. 생각해 보면, 비극적인 결혼을 그렇게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것도 이상했으니까. 틸리안은 이렇다 할, 말로 설명할 수 있는 근거는 없었지만 릴리에게서 수상한 낌새를 느꼈다.
먼저 대화의 자리를 마련하거나 다가오는 일이 없던 릴리가 적극적으로 그에게 질문을 하고 궁금해하던 주제들이 하나같이 바르딘 자작의 사업과 관련되어있었다든가, 혼자서 조용히 외출을 다녀오고 그러면서도 돈 한 푼 타 가지 않았다든가, 내내 바르딘 자작가를 남의 집 정도로 여기던 그녀가 민감할 수도 있는 저택의 비밀 통로를 가르쳐달라고 하지 않나.
따로 떼어보면 그럴 수도 있는 일들이 그녀의 성격을 생각하면, 그리고 정황을 모아서 보면 이상했다. 틸리안은 릴리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뜬구름 같았던 그림의 흐릿한 윤곽이 드러나는 것 같았다.
그가 검을 놓았을 때는 이미 해가 져 있었다. 바람이 땀으로 젖은 등을 서늘하게 스쳤다. 검을 쥐었던 손아귀가 얼얼했다. 틸리안은 지친 몸의 탈력감에도 불구하고 대충 몸에 물만 끼얹어 씻은 채 밖으로 나갔다.
* * *
“형님, 저는 형님만 믿고 따릅니다만, 정말 이래도 되는 겁니까? 그 분은 형님의 여동생 아닙니까? 게다가 그분을 몹시 아끼시지 않았습니까?”
“형님이 아니라 부단장님이라고 부르라고 몇 번을 말해야 제대로 부르겠느냐?”
“입에 안 붙는 걸 어떡합니까. 게다가 부단장님은 너무 딱딱해요. 저와 형님은 피만 나누지 않았지, 마음을 나눈 형제 아닙니까! 저희 동네에서는 그런 사람을 형님이라고 불렀는걸요.”
얄쌍한 청년이 체격과 어울리지 않는 커다란 목청으로 말했다. 청년의 이름은 코발린. 평민의 신분에 뒷골목을 누비던 왈패 같던 아이를 틸리안이 손수 거둬 기사로 키워냈다. 틸리안은 평생을 뒷골목에서 시시껄렁한 일을 하며 잡배로 살 운명이었던 코발린을 정식 기사로 이끌어준 것이다.
코발린은 저 같은 것을 말단에 한직이나마 황실 기사로 만들어준 틸리안에게 온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했다. 언젠가 그와 같은 정예 기사단으로 들어가 그의 오른팔이 되겠다던 그였지만, 현재는 징계로 근신 중이었다. 뒷골목을 놀이터 삼아 휘젓고 다니던 그에게 다른 기사들은 점잖은 척하는 따분하고 고리타분한 놈들이자 세상을 모르는 재수 없는 도련님들이었다. 충돌이 잦을 수밖에 없었다.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주의하도록 해. 괜히 책잡힐 일은 하지 않는 게 좋다. 이번 징계도 주의했다면 일어나지 않을 일이었다.”
“형님, 걱정 마십쇼. 저한테 징계 먹인 놈들은 몰래 응징해줬습니다. 이제 그놈들은 밤길 걸을 때마다 뒤통수에 소름이 끼칠걸요?”
“코발린…….”
틸리안이 뼛속까지 무뢰배인 청년을 어떻게 가르쳐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아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를 훈계하려고 부른 것이 아니라 부탁하기 위해 부른 것이기 때문에 많은 말을 삼켜야 했다. 코발린은 고상한 것과는 거리가 먼 세계에 살아 기사단에서 사고뭉치 취급을 받고 있지만, 이 순간만큼의 그의 배경이 빛을 발하고 있었다.
어린 나이에도 안 해본 일이 없다는 코발린은 은신도 뛰어나고 몸이 민첩했다. 어렸을 때는 좀도둑질, 커서는 이런저런 정보원 일도 해왔던 코발린이다. 틸리안은 그런 이유로 이 일에는 그가 적격이라고 생각했다. 우선, 코발린이 그의 부탁이라면 심장이라도 꺼내줄 기세이기도 했지만 말이다.
“형님의 누이라면 제게도 누이입니다. 경호가 아니라 감시라니 조금 이상하긴 하지만요. 혹시 형님……, 금단의 사랑입니까?”
“코발린.”
“으아, 그런 얼굴 하지 마십쇼. 저는 무조건 형님 편입니다. 게다가 금단 중에서는 순한 맛 아닙니까. 친동생도 이복동생도 아니고 양동생인 걸요. 이해합니다.”
“그런 거 아니다. 릴리를 그딴 저속한 상상에 끼워 넣지 마.”
“으음, 그럼 대체 저는 뭘 해야 합니까? 치정 문제로 귀부인이나 신사의 뒷조사를 해드린 적은 있지만 그런 게 아니라면 방에서 수나 놓을 아가씨를 엿보는 게 영……. 그게, 좀 변태 같습니다, 형님.”
틸리안은 두 손으로 얼굴을 받치고 있었다. 그가 내내 고민하고 있던 부분이라서 코발린에게 할 말이 없었다. 뭐라고 설명한단 말인가? 아직까지는 전부 다 심증이었다. 게다가 코발린을 믿고는 있었지만, 집안의 은밀한 사정까지 털어놓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틸리안의 침묵이 길어지자 이를 오해한 코발린은 홀로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아아, 나의 형님께서 처절하고 질척하며 너절한 짝사랑 중이시구나. 이 댁 아가씨 뒤를 캐는 게 어려운 일은 아니지만, 나의 우상이신 형님이 망가지는 꼴을 보는 게 몹시도 괴롭도다.’
“걱정 마십쇼, 형님. 저만 믿어주세요. 아무도 응원해주지 않더라도! 당당하지 못하더라도! 저만은 형님 편이니까요. 형님께서 그분을 감시하라고 하신다면 그분이 어디를 쳐다보시는지, 웬 놈팡이와 눈이 마주치지는 않는지, 마주친다면 몇 초나 눈을 맞추고 있는지까지 꼼꼼하게 보고하겠습니다. 이래 봬도 유능한 정보원이었으니까요.”
“쓸데없는 건 보고하지 마. 그리고 온종일 지켜보라는 것도 아니다. 방 밖으로 나갈 때만 지켜보라는 거야. 누굴 만나지는 않는지, 밖에 나가면 어디를 가는지, 특별히 찾는 게 있다든지 말이야.”
‘이거 완전 치정 문제로 뒷조사할 때랑 똑같잖아……? 다른 남자를 만나지는 않는지, 어딜 싸돌아다니는지, 뭐 갖고 싶어 하는 건 없는지. 아주 전형적인 틀을 벗어나질 않는걸.’
코발린이 침음을 삼키고 이 음침한 짝사랑의 삐뚤어진 표현을 저지하고자 시도했다. 그로서는 대단한 용기를 발휘한 것이었다. 그는 틸리안의 말이라면 무조건 따르고 봤었으니까.
“형님……. 주제넘다고 생각하실지 모르겠지만 한 말씀 올리자면, 여인의 마음을 얻고자 하시면 이렇게 음침하게 캐낼 게 아니라 직접 물으시는 게 효과적……. 아, 예. 제가 주제넘었군요. 형님이 연애 한 번 안 해 보셨다고 이걸 모르실 리가 없죠.”
코발린은 점점 험악해지는 틸리안의 눈빛에 말을 멈추었지만 이내 불필요한 말을 덧붙였다. 악의는 없지만, 눈치도 없어서 눈총을 사는 그였다. 틸리안은 코발린이 자신을 단단히 오해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그의 오해를 풀어줄 길이 없어 제대로 부정하지 못했고, 코발린의 오해는 깊어져만 갔다.
* * *
릴리는 코발린이 생각했던 유형의 여자가 아니었다. 아침에 늦게 일어나긴 하지만 꽤나 부지런한 편이랄까. 그의 예상처럼 온종일 방 안에서 수나 놓고 있지는 않았다. 방 안에서 식사를 하고 나면 집 안을 빨빨거리며 열심히도 돌아다녔다. 다 큰 어른이 집 안 탐험이라도 하는 걸까? 원래 이집에 살던 사람이 아니니 궁금할 수도 있겠다 싶었지만, 행동이 독특했다. 친딸이든 아니든 그녀는 이 집의 귀한 아씨 아닌가? 그녀가 방을 둘러본다고 그녀에게 눈치 줄 사람 하나 없는데도 행동이 몹시도 조심스러웠다.
그녀는 시중인은 떼놓고서 혼자 복도를 거닐었고 주위에 사람이 없는지 좌우를 살핀 다음 방에 들어갔다. 방에 들어가서도 실내 장식을 살피는 눈이 묘했다. 팔면 얼마나 나올지 살피는 걸까? 난로 위의 촛대를 들었다 놓기도 하고 괜히 창틀을 더듬는 행동은 그로서는 이해하기 힘들었다.
화려한 무늬의 벽지를 뚫어져라 살피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감시하는 입장에서는 딱히 심심하지가 않았지만, 그녀에게 그러고 있는 게 재미있는지 물어보고 싶어졌다. 귀족은 확실히 평민이랑 다른가 보다. 누가 그에게 방의 벽지를 쳐다보고 있으라고 하면, 그것도 이 커다란 저택의 모든 방을 다 둘러보라고 한다면, 코발린에게는 그보다 더한 고문이 없었을 테니까.
아, 드디어 나왔다.
오늘도 온종일 방 구경이나 할 줄 알았던 아가씨가 드디어 밖으로 나왔다. 그래 봐야 저택의 뒤뜰이었지만.
릴리는 나무뿌리를 파고 있었다. 그녀는 풍성한 치맛자락을 손으로 모아 끌어안고 흙바닥에 쪼그려 앉았다. 그러고는 하얗고 깨끗한 손으로 나무뿌리 아래의 흙을 만지는 것이 아닌가. 생긴 건 귀하게 자란 완벽한 아가씨인데 하는 짓은 코흘리개 꼬맹이와 다를 바 없었다. 코발린은 문화 충격을 받을 정도였다.
귀족 놈들, 하나같이 내숭쟁이에 겉과 속이 다르다고 욕했었는데, 이 아가씨도 정말 겉과 속이 다르구나. 코발린은 아가씨에게 모종삽이라도 가져다주고 싶었다. 부족할 거 없는 아가씨가 모종삽 하나 없어서 맨손으로 흙장난을 하다니.
아가씨는 이내 작은 종잇조각을 주워 흙을 털어내고 품속에 감추었다. 흙이 묻은 손을 탈탈 털어 대충 손수건에 닦더니 ‘미유야! 미유!’ 하고 누군가를 불렀다. 타닷, 가벼운 짐승의 발소리가 들리고 이내 자그마한 고양이가 나타났다. 도도한 짐승이라는 편견을 부수는 살가운 놈이었다.
새끼 고양이는 아가씨의 값비싼 드레스에 손톱을 콱콱 박아가며 그녀의 등 위로 올라갔다. 그르렁거리며 비비적대는 모습이 저들이 구면임을 보여주었다. 틸리안이 그녀가 뒤뜰에서 누굴 만나는지 주시하라고 했었으나, 겨우 고양이였던 것이다. 코발린은 헛웃음이 나오는 것을 참았다. 괜한 기우였다. 틸리안 형님이 여자에게 집착하는 사람인 줄은 몰랐는데 말이야. 사랑은 사람을 망가뜨리는구먼. 에휴.
코발린이 한탄하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사이 이번에는 사람의 발소리가 들렸다. 코발린이 휙 고개를 들어보니 그곳엔 갈색 머리의 커다란 청년이 있었다. 옷차림을 보아하니 평민인 것 같았는데 아가씨와 반말까지 하는 것을 보면 보통 친근한 사이가 아닌 것 같았다.
“허억.”
코발린은 절망에 가득 차서 제 입을 틀어막아야 했다. 같은 성을 공유하는 사이라는 넘기 어려운 벽과 약혼자라는 방해물도 모자라서 다른 남자까지 추가되다니! 이걸 보고한다면 형님의 마음은 천 갈래 만 갈래 찢어질 것이 분명했다.
코발린은 형님의 연적임이 분명한 상대를 제 부모의 원수처럼 원한 어린 눈으로 노려보았다. 조용히 지켜보기만 해야 한다는 게 한스러웠다. 아니, 저 아가씨는 우리 형님 같은 분을 놔두고 뭐 저런 남자를!
“아가씨, 안녕. 고양이도 안녕.”
“더글라스, 얘도 이제 이름이 있어. 그치, 미유?”
“아가씨, 설마 얘가 ‘미유’하고 울어서 미유는 아니지?”
“……뭐가 어때서 그래.”
“의외로 작명은 꽝이다 싶어서.”
“미유는 맘에 든대.”
고양이는 제 이름이야 어쨌건 그녀가 주는 살코기에 완전히 맛이 들린 것 같았다. 처음에는 경계하며 밥만 먹고 도망가곤 했는데 이제는 이름을 부르면 달려와서 친한 척을 해댔다. 더글라스는 이 털 뭉치가 그녀에게 들러붙는 게 놀랍지도 않았다. 천년 묵은 뱀 같은 자식도 길들이는 여자인데, 쪼그만 털 뭉치쯤이야.
코달린은 참담한 심정으로 나무 위에서 두 사람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릴리에게 더글라스라고 불린 사내는 정말 그녀와 스스럼없는 사이 같았다. 그들은 두런두런 고양이 얘기를 나누다 금세 본론으로 들어갔다.
“이 집에는 숨겨진 방 같은 건 없어. 오라버니가 한 말이 사실이었나 봐. 아무리 살펴도 그냥 평범한 벽이야. 자작님의 서재 같은 데는 내가 들어가 보지 못했지만, 너네도 못 찾았으니까 아마 없다고 봐야겠지.”
* * *
“하하. 숨겨진 방 같은 건 소설에서나 나오는 거라고. 내 말이 맞지, 안 그래?”
더글라스가 과장되게 유쾌한 척 웃으며 릴리를 향해 눈을 찡긋거렸다. 릴리는 그의 신호를 알아채지 못하고서 그가 한쪽 눈을 깜빡이는 모양을 이상하다는 눈빛으로 쳐다볼 뿐이었다.
‘아가씨, 아가씨. 왜 그래? 하고 쳐다볼 때가 아니잖아!’
더글라스가 필사적으로 무언의 신호를 보내왔지만, 릴리는 미간을 찌푸린 채 고개를 갸웃했다. 그가 무언가 알려주고 싶어 하는 것 같다고 느끼기는 했지만, 도통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다. 릴리는 결국 스스로 알아맞히기를 포기하고 물었다.
“갑자기 무슨 수수께끼라도 내는 거야? 미안하지만, 나 어렸을 때부터 그런데 소질이 없었어.”
다소 의기소침한 목소리로 말하는 릴리를 보고 더글라스가 제 얼굴을 쓸었다. 그래, 이 아가씨는 눈치 따위 놔두고 태어난 사람이었지. 기대한 내가 바보다.
“그럴 것 같긴 했어. 아니야. 별거 아녔어. 그런데, 약혼자 집에는 언제 가려고?”
“이번 주 내로 갈 거야.”
“아가씨 혹시 원한 살만한 일 한 적 있어?”
“글쎄, 아직은 없지 않을까……?”
그렇다면 저 눈빛은 대체 뭐란 말인가? 나무 위의 시선 때문에 더글라스는 지금 정수리가 따끔거릴 지경인데도 릴리는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모습은 썩 잘 숨겼지만, 인기척을 완벽하게 없애지는 못했다. 저렇게 감정을 가득 실어 쳐다보는데 모르기도 힘들지. 릴리 같은 일반인을 감시할 정도는 되었지만, 늘 밤길을 조심해야 하는 더글라스 같은 족속에겐 어림없었다.
그가 오기도 전부터 여기서 릴리를 지켜보고 있던 걸 생각하면 자신이 아니라 릴리에게 붙은 감시인가 본데, 영 의도를 파악하기가 힘들었다. 누구지? 아직 그녀가 이렇다 할 행동을 개시하지 않은 시점에서 감시가 붙은 것은 이상했다. 어디 가서 미움 살 성격도 아닌 아가씨에게 저렇게 살기 어린 눈빛이라니. 아니, 그녀가 아니라 나인가?
‘아가씨. 감시가 붙었는걸? 표정 관리 잘해.’
더글라스가 릴리에게 가까이 붙어 귓속말을 전했다. 그녀의 얼굴은 하얗게 사색이 되었지만, 그는 태평했다. 그가 릴리에게 다가가자 살기가 한층 진해졌다. 살수는 아닌 게 분명했으나 아가씨와의 접촉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것을 보면 아마도,
‘이 아가씨에게 꽤나 집착하는 놈이라는 건데.’
더글라스가 새삼 짠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 버들가지에는 바람 잘 날이 없구나. 약혼자인가? 그럼 곤란한데.
“아가씨 약혼자는 잘 있어?”
“잘 있는 것 같은데, 자꾸 잘 지내지 못하신다고 편지를 보내. 나 때문이래. 그 사람은 아마 길 가다가 넘어져도 내 생각에 넘어졌다며 내 탓을 할 거야.”
“이야, 아주 강적인데?”
더글라스는 하이드에게 강적이 될 거라는 뜻이었지만, 릴리는 다르게 받아들인 듯 결연하게 대답했다.
“맞아. 힘내야지.”
릴리가 작은 두 손을 불끈 모아 쥐었다. 당장 이번 주에 르시엔의 저택에 방문하기로 되어있었다. 르시엔은 결혼하기 전 앞으로 그녀가 살 곳을 구경하러 오는 줄 알았지만, 처음이자 마지막 방문이 될 예정이었다. 릴리는 일이 잘 풀려 다시는 그곳에 방문할 일이 없기만을 바랐다.
“그럼, 아가씨가……, 그걸……, 보통은…….”
“하지만……, 괜찮…….”
릴리와 더글라스가 목소리를 죽이고 속삭이듯이 대화를 나눴기 때문에 코발린은 그들의 대화를 들을 수 없었다. 얼핏 고양이 얘기를 하는 것 같기도 했는데 제대로 된 내용은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뭐야, 무슨 얘기 중이지?’
릴리는 다른 사람이 대화를 엿듣고 있다면 입을 다물어야 하는 게 아니냐고 물었지만 더글라스는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미행을 눈치챘다는 걸 알게 되면 더 골치 아픈 놈이 붙을지도 모르니까. 인적이 드문 곳으로 유인해서 조용히 처리해야 했다. 그나저나 약혼자 쪽에서 붙인 거면, 골치도 아프거니와 진짜 소름 돋는 일인데 말이지. 누굴까?
더글라스와 릴리를 들켜도 상관없는 대화를 속닥이다 내일 또 보자고 인사를 나누며 헤어졌다. 더글라스가 의식하지 말고 자연스럽게 행동하라고 말했지만, 그녀에게는 그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릴리는 자신이 온종일 벽을 들여다보고 있던 것을 어떻게 생각했을지 뒤늦게 착잡해졌다. 그녀는 다른 사람의 시선을 느끼지 못했으나 더글라스는 그것을 바로 알아챈 것을 보면 그녀가 하이드와 그의 대화를 듣게 된 것은 정말이지 엄청난 행운이었던 것이다. 그녀는 앞으로도 행운이 자신을 따라다니길 기도했다.
더글라스는 릴리와 헤어지고 조용히 저택 한구석에 몸을 숨기고 있다 조용히 감시꾼의 뒤를 밟았다. 그는 감시꾼이 이 댁 도련님의 방에 들어가는 것을 보고 조용히 탄식했다.
‘맙소사. 아가씨네 가짜 오라비라고?’
* * *
“형님…….”
코발린은 릴리가 저녁에 방으로 들어가는 것까지 확인하고 창문을 통해 틸리안의 서재로 들어왔다. 착잡한 목소리로 형님을 부르긴 했지만 입을 뗄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의 머뭇거리는 태도에 틸리안이 한쪽 눈썹을 치켜 올렸다.
“뭐냐.”
“그게요, 그분……, 릴리 아가씨는 11시 반에 눈을 떠서 방 안에서 식사하시고 혼자서 저택의 빈방을 뒤지시더라고요. 그냥 방 구경을 하셨다고 해야 할까요. 벽지를 한참을 쳐다보고 만져보기도 하고, 암튼 좀 이상했어요.”
“벽지를 쳐다봐?”
“네. 방을 꼼꼼하게 보더라고요. 물건도 들었다 놓고……. 다 보면 다른 방을 보고, 그런 식으로요. 그러다가 방으로 돌아가서 차와 간식을 드시고, 음 빨간 머리의 하녀와 상당히 친근해 보였습니다. 그러고 나서 뒤뜰로 가 땅을 파더니 무언갈 꺼내고 나서 주머니에 넣고 고양이를 부르더군요.”
“고양이? 이 집엔 고양이가 없을 텐데.”
틸리안이 저 혼자 중얼거리다 이내 고작 고양이를 숨겨두고 화들짝 놀랐을 릴리를 떠올리며 말했다.
“숨기는 게 그거였나. 말하면 키우게 해 줬을 텐데.”
코발린은 그의 미소에 가슴이 미어지는 것을 느꼈다.
‘아닙니다, 형님. 이 아가씨는 고양이보다 더 큰 걸 숨기고 계셨어요.’
“고양이한테 먹을 걸 주시더니, 그게……, 어떤 남자가 와서 아는 척을 했습니다.”
“남자?”
코발린이 질끈 눈을 감으며 이어서 말했다.
“네. 서로 말도 편하게 하고……, 무척 친해 보였어요. 하지만 손을 잡는다거나 뽀뽀하지는 않았으니까 애인이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다고 봅니다.”
“…….”
틸리안의 침묵에 코발린이 한쪽 눈을 슬쩍 떠서 그의 표정을 확인했다. 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있었다.
“형님……! 그러니까 이렇게 음침하게 굴지 마시고 당당하게 마음을 전하시는 겁니다! 그놈보다 형님이 훨씬 잘생기셨어요!”
“그 남자, 어디서 나타난 거지? 저택 안에서 만났다면 초대받은 손님이거나 상인일 텐데.”
“초대 받은 손님은 아니었을 겁니다. 귀족으로 보이지도 않았고요. 평민 같았는데, 상인 같지도 않았어요. 고양이 얘기를 하는 것 같았는데 목소리가 작아서 뒷이야기는 듣지 못했습니다. 내일도 만난다고 하더군요.”
“그자를 그대로 보내준 거냐?”
“저, 그게, 형님이 감시하라고 한 건 아가씨였으니까.”
“인상착의는?”
“갈색 더벅머리에 키는 저보다 반 뼘 정도 컸고, 체격이 좋았어요. 얼굴은 생 양아치 같았습니다. 형님에 비할 바가 못 되죠. 수염은 없었습니다. 20대 후반 정도였어요. 평범한 검은색 바지에 흰색 셔츠 차림이었어요. 음, 그리고…….”
코발린이 눈을 감고 제 머리를 손으로 감싸며 기억력을 되살리려고 애썼다. 뭔가 더 있었던 것 같은데.
“아! 생각났어요. 이름! 아가씨가 그자를 더글라스라고 불렀습니다.”
“알겠다. 내일 그자가 오면 그자를 미행하도록 해. 어떤 사람인지, 무슨 목적으로 릴리에게 접근하는지 알아야 하니까.”
코발린은 굳어있는 틸리안의 얼굴을 흘끔 보고 한숨을 쉬며 돌아갔다. 틸리안은 코발린이 걱정하는 것처럼 실연의 아픔으로 고뇌하는 것은 아니었다. 릴리가 제 3자와 일을 꾸미고 있으리라 예상하고 있었으므로.
그나저나 저택에 숨어 들어와 릴리를 만난 사내는 대체 누구인가. 자신이 고민한다고 답이 나올 리가 없었다. 내일 알아내는 수밖에.
* * *
다음날 릴리는 평소보다 훨씬 일찍 일어났다. 누군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다고 생각하니 의식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누군지 모를 사람이 자신이 늦잠꾸러기라는 사실을 보고받는다는 게 수치스러웠다. 중요한 건 늦잠 따위가 아닌데도 그랬다. 릴리는 아침부터 부지런을 떨며 평소보다 신경 써서 옷을 고르고 괜히 자수를 놓으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대체 어디에 사람이 있다는 거지? 여기는 3층이라서 창밖에서 볼 수도 없을 텐데.
더글라스가 감시꾼 찾아볼 생각 말고 자연스럽게 행동하라고 했으나 마음대로 되지 않아 릴리는 몸만 의자에 붙인 채 눈을 굴리며 주위를 살폈다. 역시 아무것도 눈치챌 수 없었다.
아무것도 안 보이는데 더글라스는 대체 어떻게 알아챈 걸까?
그녀는 한참을 자수를 놓는 둥 마는 둥 하며 지루한 시간을 보내다 뒤뜰로 나갔다. 더글라스가 무슨 생각인지 궁금했다. 감시꾼이 보는 앞에서 만나면 위험한 것 아닌가?
“아가씨.”
“기다리고 있었어?”
“당연하지. 내가 아가씨를 기다리게 할 리가 없잖아?”
“무슨 소리야? 어제도 내가 먼저 와…….”
“쉿.”
더글라스가 자신의 집게손가락을 그녀의 입술에 대고 누르며 또 눈을 찡긋거렸다. 릴리는 질색한 얼굴로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이런 르시엔 같은 짓과는 거리가 멀었던 그가 왜 이러는 건지. 릴리가 미심쩍은 눈으로 바라보자 더글라스는 그녀의 손을 덥석 잡았다.
“연기라고 연기. 감시꾼을 낚아야 하잖아?”
“그런 계획이 있었으면 나한테도 말해줬으면 해. 깜짝 놀랐잖아. 너 어디 아픈 줄 알고.”
두 사람이 손을 잡은 채 속닥거리자 코발린의 눈에서 불똥이 튀었다. 저 놈팡이가 형님의 여동생분을……!
코발린의 눈에는 더글라스가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아가씨를 꼬신 괘씸한 놈,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더글라스는 일부러 그렇게 보이도록 행동하며 감시꾼이 자신에게 붙도록 유도한 것이었지만.
두 사람은 한가롭게 아무 말이다 주워 담다가 금방 헤어졌다. 더글라스는 자연스럽게 밖으로 나와 한참을 걸었다.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골목길을 헤매고 다니던 더글라스는 어느 순간 달리기 시작했다. 코발린은 미행을 위해 거리를 유지하고 있다가 시야에서 더글라스가 사라지자 당황해서 고개를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애송이는 누가 시켜서 나를 미행하는 걸까나.”
막다른 골목을 얼빠진 얼굴로 쳐다보고 있던 코발린은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휙, 고개를 돌렸다. 앞뒤가 막혀 궁지에 몰린 상황이었다.
“젠장! 그건 네놈이 알 거 없어.”
‘망했다…….’
앳된 티가 남아있는 코발린의 얼굴이 사납게 일그러졌다. 그 모습에 더글라스는 한숨이 나오려고 했지만 참았다. 이 댁 도련님은 여동생에게 진짜배기 밀정은 붙이기 싫었나 보다. 어정쩡 하게 구니까 이렇게 쉽게 뒤가 잡히지. 나쁜 놈은 못될 양반이었다. 누구와는 다르게.
더글라스는 만면에 여유로운 웃음을 띠고 일부러 상대를 살살 긁기 위해 말했다.
“하하. 사실 알고 있어. 누가 너 같은 허접한 놈을 붙여놨나 했더니 아가씨의 오라비더라고? 이걸 아가씨에게 말씀드리면 어떤 표정을 지으실까나?”
“아니, 어떻게……!”
“난 너 같은 애송이 말고 그 도련님이랑 이야기하고 싶은데 말이야, 안내해주지 않을래?”
“닥쳐. 네 놈을 죽이고 입을 막을 거다.”
“아이고. 그럴 수나 있겠어? 그냥 평화롭게 대화로 해결하지? 그냥 도련님이나 만나게 해달라니까.”
“네깟 한량 하나 죽이는 것쯤 어렵지 않아.”
“그만.”
더글라스와 코발린 사이의 긴장감이 상승하려던 순간, 뒤에서 틸리안이 나타났다. 더글라스는 뒤를 돌아보며 씨익 웃었고 코발린은 하얗게 질렸다.
“형님! 죄송해요.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됐어. 괜찮으니까 가보도록 해.”
“그치만.”
틸리안이 말없이 고개를 가로젓는 것을 보고 코발린은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터덜터덜 골목을 벗어나 사라졌다. 틸리안은 코발린의 그림자까지 사라지는 것을 보고 한참이 지나서야 입을 뗐다.
“자리를 옮기겠나?”
“조용한 곳으로 가자고.”
두 사람은 조용한 술집에 마주보고 앉았다. 틸리안은 섣불리 말을 꺼내지 않고 식탁 아래로 제 허벅지를 손가락으로 초조하게 두드리고 있었다.
“아가씨에게 미행을 붙인 이유가 뭡니까, 도련님.”
먼저 입을 뗀 것은 더글라스였다.
“그쪽이 릴리에게 접근한 이유는 뭔지부터 밝히는 게 순서겠지.”
“접근이라니요. 먼저 접근한 것은 그 댁의 아가씨입니다. 아가씨한테 직접 여쭤보시지 그러십니까?”
더글라스가 퉁명스럽게 대답하자 틸리안이 표정을 굳히고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 릴리와 함께 바르딘가의 사업을 조사하는 게냐.”
휘유, 더글라스가 휘파람을 불었다. 더글라스가 틸리안을 만나기로 결정한 것은 스스로도 옳은 짓인지 망설였던 도박이었다. 대박일까, 쪽박일까?
“그렇다면 어쩌려고?”
릴리에게 붙은 미행이 틸리안의 짓인 걸 알게 된 후 여러 가지 정황이 눈에 들어왔다. 더글라스가 바르딘 자작가를 조사하는 동안, 이 집의 아들이 맞나 싶을 정도로 사업과 무관한 행적을 보였던 틸리안이었다. 그는 누가 봐도 성실하고 묵묵하게 기사의 길을 걷는 자라 더글라스가 요주의 인물에서 일찌감치 배제시켰던 대상이었다.
그가 최근 들어 가문의 사업을 조사하고 있다는 것은 더글라스도 알고 있었다. 가문의 후계자니까 의아할 일도 아니었다. 그러나 혹시 몰라 주시하고 있었는데 자작에게도 알리지 않고 독단적으로 은밀하게 조사가 이뤄지고 있다는 점이 수상했다.
사실, 생각해 보면 바르딘 자작이 제 아들에게조차 완전히 비밀로 한 것부터가 이상했다. 아무리 틸리안이 기사라고 해도 자작의 유일한 피붙이이자 후계자인데, 무슨 사업을 하고 있는지 정도는 알려야 하지 않나? 게다가 이렇게 중대한 사안이지 않은가.
자작도 틸리안이 알게 된다면 무조건 반대하리라고 생각했던 게지. 틸리안은 조금만 조사해도 어떤 사람인지 쉽게 파악되었다. 발자취는 명쾌할 정도로 분명했고, 가는 방향 또한 흔들리지 않는 사내였으므로. 사람들의 평마저도 지루할 정도로 한결같았다.
7살 때 튼튼해지라고 시킨 검술 수업에서 검을 잡은 이후로 지금까지 검을 놓지 않았다고 했다. 교양이나 취미로 나쁘지 않으니 방치하던 자작도 틸리안이 진지하다는 것을 깨닫자 반대하기 시작했다.
틸리안은 냉혹한 아비의 명령에도 의지를 꺾지 않았다. 경영과 경제 등 자작의 뒤를 잇기 위한 수업도 게을리하지 않겠다는 것을 몸으로 증명해 보이고 나서야 자작은 반쯤 포기했다. 기어이 황실 기사단에 들어갔을 즈음에는 저택이 조용한 날이 없었다던가.
묵묵히 아버지의 뜻을 따르던 틸리안의 처음이자 마지막 반항이라고 했다. 틸리안은 자작의 사업 확장에도 회의적이었지만, 기사가 되겠다며 이미 아버지를 한 번 실망시켰던 그가 성공 가도를 달리는 사업에 왈가왈부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는 길 가다 자신의 지갑을 홈치려던 날치기를 벌하지 않고 데려가 밥부터 먹였다고 했다. 비쩍 마른 어린애의 눈빛과 잽싼 몸놀림을 보고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평민인 사내애를 후원하며 검술 선생까지 붙여다 줬다나. 저택의 사용인들은 하나같이 입을 모아 틸리안을 칭송했다. 아버지를 닮아 조금 무뚝뚝하긴 하지만, 돌아가신 마님처럼 마음이 따뜻하고 올곧으신 분이라고
더글라스는 좋은 의미로 틸리안이 징그러웠다. 그가 좋은 사람이라는 사실은, 사용인들에게 은근슬쩍 물어보지 않더라도 알 수 있었다. 제 눈으로 보기에도 수단 방법 안 가리고 돈을 쓸어 모으는 자작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아들이었다.
그리고 하이드가 어금니를 꽉 깨물어가며 틸리안에 대해 한 이야기를 종합해 보면―아, 물론 하이드의 판단은 걸러 들어야 했다. 그는 릴리와 관련된 사람은 지나치게 편파적이고 악의적인 눈으로 보곤 했으니까―틸리안은 릴리에게 굉장한 호의와 애정을 품은 것으로 보였다.
하이드는 그가 분명 더러운 욕망의 눈으로 그녀를 보고 있을 거라고 말했었지만, 뭐 눈에는 뭐만 보이는 법인지라 더글라스는 그다지 신뢰하지 않았다. 욕망인지 사랑인지 구분하는 것은 더글라스의 몫이 아니었다. 더글라스는 틸리안이 자신과 같은 편인지 구분하면 그만이었으니까.
결과적으로, 틸리안이 도움이 될 것 같다는 게 더글라스의 생각이었다. 물론 이 생각은 오로지 그 혼자만의 생각이었고, 만약 하이드가 알았다간 릴리에게 미행이 붙었다는 사실을 안 순간 틸리안의 멱살부터 잡았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 * *
“나도 돕겠다.”
“내가 뭘 하는 줄 알고 돕는다는 거야? 도련님 가문에 도움이 될 일은 아닐지도 모른다고.”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릴리를 위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대답은 안 해도 되는데, 뭐 하나 물어도 되나? 그쪽, 아가씨 좋아하지.”
“…….”
“침묵도 대답이 되는 법이지.”
“대답할 가치가 없어서 답하지 않았던 것뿐이다.”
더글라스는 조용히 어깨만 으쓱했다. 틸리안이 릴리를 좋아하건 말건 그와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다만 그 덕에 일이 잘 풀린다면 좋은 일이겠지. 하지만 그를 믿는 것은 위험부담이 컸다. 확신이 필요했다.
“자네, 우리 가문의 사용인이더군. 이름이 달라 확신이 들지 않았지만, 인상착의가 일치했어. 매일은 아니고 주에 이삼일 힘쓰는 일을 맡았고, 가명은 벤자민. 아마도 이미 저택을 휘젓고 다니며 필요한 정보를 찾아냈을 테지 나도 모르고 있던 사정까지 낱낱이 알고 있을 거야, 자네는.”
“몸만 수련하시는 줄 알았는데요.”
“기대하던 멍청이가 아니라 아쉬운가? 나의 협조를 바란다면 내가 똑똑한 쪽이 나을 텐데.”
더글라스는 빙긋 웃으며 말을 돌릴 뿐, 자작가의 현황에 대해 알고 있다고 확실히 긍정하지도, 그렇다고 부정하지도 않았다. 철없는 도련님이 풋사랑에 빠져 가문을 내팽개치려는 줄 알았는데, 그것만은 아니었나?
“제가 무엇을 위해 자작가에 숨어들어와 아가씨와 손을 잡았다고 생각합니까?”
“우리 가문과 소넬가가 손대고 있는 사업이 목적이겠지. 릴리는, 파혼이 목적일 거고. 그쪽 뒤에 누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뭘 계획하고 있는지는 대충 감이 오는군.”
“그게 아무렇지도 않으신가 봅니다.”
“아버지는……, 선을 넘으셨어. 아버지의 죗값을 치르는 것도 가문의 후계자인 내가 할 일이다.”
틸리안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버지는 해가 갈수록 돈과 권력에 집착했다. 명예도 도의도 내팽개치고 돈을 갈퀴로 쓸어 모았다. 최근 들어 엄청나게 불어난 자산도 몇 년 전부터 시작한 면 사업 때문인 줄로만 알았다. 꽤 성공한 듯 보였으니까. 그러나 면 사업은 눈속임일 뿐이었다.
자작은 짧은 시간 동안 대규모로 사업을 키우고 있었고, 손대고 있는 사업이 이뿐만이 아니었으니 자작이 이것저것 대용량으로 자제를 사들인다고 해도 아무도 의심하지 않았을 것이다. 평범한 재료는 대놓고, 그렇지 않은 재료는 은밀히 구했겠지.
소넬가는, 타국인 화륜에서 무기를 들여와 파는 것에 만족하지 않았다. 직접 총을 만들어 제국에서 무기 사업을 독점하고자 야욕을 품었다. 총이라는 신식 무기가 돈줄이 되리라고 확신한 바르딘 자작은, 소넬가가 화륜의 총기를 사들이는데 자금을 대다가 이번 결혼으로 가문의 공고히 하여 총기 사업을 함께 독식하고자 했다.
그리하여 바르딘 가문 소유의 자그마한 공장에서 남몰래 총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외곽에 위치한 눈에 띄지 않는 버려진 공장에서 화승총을 만들리라고 누구도 생각지 못하고 있었으니, 그야말로 완벽 범죄였다. 틸리안이 알았다면 자작이 이 일에 손대는 것만큼은 말렸을 것이다.
그는 이전까지 아버지를 감히 말리지 못했다. 자작의 맹욕에는 자신의 탓도 있었으니까. 자작이 눈이 벌게지도록 사업에 집착하는 것은 아내의 죽음 탓이었고, 틸리안은 그 죽음의 직접적이자 간접적인 원인이었으니까. 아마 무리한 출산이 아니었더라면, 그를 낳는 것을 포기했더라면, 어머니가 몇 년은 더 살았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누구도 입 밖으로 꺼내지 않는 자명한 사실이 내내 틸리안의 행동을 묶어놓았다.
게다가 어쩌면 자신이 일찍이 경영에 뛰어들어 아버지의 기대를 충족시켰더라면 이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지도 몰랐다.
틸리안은 자작이 손을 더럽힌 것도, 죄 없는 릴리를 그들 가문의 일에 끌어들인 것도 제 탓이라 여겼다. 이 일은 자신이 해결해야 할 문제였다.
틸리안은 총을 본 적이 있었다. 그 흉악한 쇳덩어리는 좀도둑질이나 일삼던 조무래기가 수년을 수련한 기사를 단숨에 죽일 수 있게 하는 무기였다. 문제가 많은 물건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 소름 끼치는 흉기에 너도나도 손을 뻗고 싶어 했다. 한 방에 사람의 명줄을 끊어버리는 매력적인 악마의 무기.
사람을 칼로 벨 때의 섬뜩함, 검이 몸을 파고드는 순간의 불쾌한 감각, 얼굴에 튀는 따뜻한 피와 잠귀에 맴돌 신음과 비명…….
총은 쏘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러한 것들을 느낄 수 없게 했다. 탕, 소리 하나로 먼 거리에서 사람을 죽일 수 있다. 살인이 그렇게 간단명료해서는 안 되는 일이다. 사람을 죽이는 감각을 모르는 이들이 쉽게 살인을 저질러서는 안 된다.
살인은 언제나 소름 끼치고 두렵고 끔찍한 일로 남아야 한다는 게 틸리안의 생각이었다. 총이 괜히 악마가 퍼뜨렸다는 말이 나오는 게 아니었다. 틸리안은 제국의 황실 기사단이었고, 통제되지 않는 강력한 무기가 제국에 퍼져 제국의 치안을 무너뜨리는 일을 막는 게 그의 일이었고 신념이다. 그는 제 아버지를 진심으로 막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걸 그 쪽에게 준다면 믿을 텐가.”
틸리안은 준비해온 서류 봉투를 그에게 넘겼다. 서류 안에는 바르딘 자작가에 상당한 타격이 될 만한 내용이 담겨있었다. 더글라스가 어떤 마음을 먹고 활용하느냐에 따라 그의 가문을 무너지게 할 수도 있는 자료들.
“뭔데 그렇게 무게를 잡으실까.”
비아냥대며 서류를 꺼내 훑어보던 더글라스의 눈이 단박에 커졌다.
“이건……?”
“이 정도면 그쪽 배후를 만나도 되지 않을까 싶은데.”
더글라스가 서류 뭉치를 제 품에 꼭 끌어안았다. 아, 이 일이 끝나면 바르딘 자작가 방향으로는 소변도 누지 않겠다 다짐했었는데, 자작의 아들과 수양딸의 존재가 이렇게 복될 줄이야. 더글라스는 선물이라도 받은 것 같았다. 웬 횡재야! 몇 달을 공들였던 일의 마무리가 다가오고 있었다. 이 정도 고급 인력이라면 하이드나 황자님도 환영하겠지. 제 감을 믿길 잘했다고, 더글라스가 자축하며 틸리안에게 손을 내밀었다.
“잘해 보자고, 도련님.”
“이제 그쪽이 내 질문에 답할 차례다.”
틸리안이 더글라스가 내민 손을 흘끔 보고 무시한 뒤 더글라스가 슬그머니 식탁 위에 올려놓은 서류 봉투에 제 손을 올렸다. 더글라스가 곤란한 얼굴로 그의 눈을 피했다.
“그래서 릴리에게는 어떻게, 왜 접근한 거지?”
“놀랍게도 말이야, 아까 말했듯이 아가씨 쪽에서 이쪽에 접근했어.”
더글라스는 어쩐지 이 전에도 똑같은 이야기를 했던 것 같은 기시감을 느꼈다. 왜 항상 자신만이 고통받아야 하는가. 아가씨와 관련된 남자들은 정말 그를 피곤하게 만들었다. 더글라스는 절망스럽게 언젠가 하이드에게 했던 말을 다시 반복해야 했다…….
“릴리가 그런 제안을 했다고?”
“몇 번을 말해야 해. 당신네 아가씨가 여간 보통내기가 아니라니까.”
“…….”
틸리안은 릴리가 만지면 부서질 것처럼 여린 아이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몸이 튼튼하지 못하고 다소 심약한 부분은 사실이기도 했다. 그러나 릴리는 상황 판단이 빠르고 영리한 아이였다. 틸리안의 말을 듣고도 스스로 확인하기 위해 자작가의 숨겨진 방을 찾기 위해 온 저택을 뒤지는 철저하고 집요한 성격도 가지고 있었다.
틸리안은 그녀와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렸다. 살짝 부은 눈두덩이와 씁쓸하지만 결연한 얼굴.
릴리는 르시엔의 낯부끄러운 행적과 그녀를 두고 오가는 더러운 말에 절망할 법도 했지만, 그녀는 두 가문의 이해관계와 제 처지를 이성적으로 받아들였었다. 차분하게 납득하고 뒤에서 엎을 생각인 줄은 몰랐지만. 그녀는 그에게 의지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남에게 폐 끼치기 싫어하는 성격과 의외로 집요하고 엉뚱한 면을 생각하면 틸리안은 릴리가 저지른 일이 마냥 놀랍기만 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다른 사람이었다면 엄두도 내지 못했을 일이었다. 틸리안은 그녀가 황자에게 대뜸 거래를 제안했다는 대목을 들으며 지끈거리는 이마를 짚었다.
릴리는 그의 생각보다 훨씬, 지나치게 용감하지 않은가. 제르시스 황자를 아는 틸리안으로서는 혀를 깨물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래서 당신들은 정말로 릴리가 위험을 감수하도록 놔뒀단 말인가?”
“아, 미치겠네!”
더글라스가 머리를 쥐어뜯었다. 또 이런 패턴이라고! 번듯하고 올곧은 기사인 틸리안과 겉만 신사고 속은 사악한 뱀 같은 하이드. 성향이 정 반대인 두 사람이 어떻게 된 게 릴리를 대하는 태도만은 정확히 일치하느냔 말이다. 더글라스는 제 처지가 씁쓸하면서도 릴리가 진심으로 안타까웠다. 이런 과보호 어미 새 같은 남자들 틈바구니에 끼어 있으면 답답해서 숨도 제대로 못 쉴 것이다. 이런 부담스러운 애정이라니. 아무리 극성스러운 부모라도 다 큰 성인에게 저렇게까지는 하지 않을 것이다.
“아아악! 난 몰라! 도련님, 아가씨 얘기는 아가씨랑 같이 하시고요, 조만간 황자님과 자리 만들겠습니다. 저는 이만.”
온몸의 기를 다 뺏긴 기분이었다. 생판 남인, 처음 보는 도둑놈을 후원해 정식 기사로 키운 틸리안이기에 더글라스는 릴리를 향한 호의가 정말 정이나, 가족으로서의 애정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었지만, 지금은 하이드의 생각에 완전 동의했다. 저건 가족을 대하는 태도가 아니라 자기 여자를 대하는 태도였다. 아아, 릴리 아가씨. 죄 많은 여자구나.
* * *
「
릴리 아가씨께
조만간 정식으로 찾아뵙겠습니다. 극진한 기쁨으로 함께했던 수업은 그 이후에 이어가도록 하죠.
몸은 이제 나았습니다. 아가씨께서는 이전에 당부드린 대로 부디 얌전히 저택에 머물러 주시기 바랍니다.
아가씨의 답답함이 오래가지 않도록 모든 일을 금방 해결하겠습니다.
저택에 계시는 게 심심하다면 저를 생각해주십시오.
저를 떠올리며 아가씨 혼자 즐기는 모습을…….
」
탁!
릴리가 편지를 뒤집어 책상 위에 던지듯 신경질적으로 내려놓았다. 정말이지, 선생님은!
하이드는 비록 몸은 멀리 떨어져 있어도, 글자만으로도 그녀를 희롱하는 재주가 있었다. 그는 편지를 쓰고 나서 이것을 읽고 새빨갛게 얼굴을 붉힐 그녀를 상상하며 얄밉게 웃었으리라. 릴리는 차마 이어지는 내용을 읽을 용기가 나지 않아 손부채로 뺨을 식혔다. 안부를 전하는 편지인 줄 알았더니, 안부는 짧았고 용건은 대기 명령이었으며 내용은 대부분이 음담패설이었다.
릴리가 심호흡을 하고 눈을 가늘게 뜬 채로 편지를 마저 읽어내렸다. 혹시나 다른 내용이 더 있지 않을까 해서 읽었지만, 뒤 내용은 이 일이 마무리되면 온갖 방법으로 그녀를 탐하고 싶다는 계획이자 포부가 전부였다. 릴리는 이걸 읽고도 싫은 기분이 들지 않고 오히려 조금 들뜨는 자신에게 자괴감이 들었다. 그래도,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조금이라도 귀띔해줄 수 있는 거잖아!
편지를 읽는 동안 야릇한 상상에 빠졌던 것도 잠시, 릴리는 이내 그에게 화가 났다. 하이드는 정말로 완전히 그녀를 배제하려고 들었다. 흥. 맘대로 하라지! 그러나 그녀는 굴하지 않았다. 더글라스와 제르시스는 그녀의 편이었으니까. 바르딘 자작가에서 쓸모 있는 정보를 찾아내지 못해, 이 일에 자신이 필요 없는 게 아닌가 잠시 좌절했지만, 이래서야 이전까지와 달라진 게 없었다. 보란 듯이 성과를 내서 하이드에게 인정받으리라.
그리고 오늘은 결전의 날이었다. 릴리는 번거로워서 자주 하지 않는 피부 관리까지 해가며 몸단장에 힘을 주었다. 결연하고 비장한 표정에 메리까지 덩달아 긴장한 채 릴리의 머리를 말았다.
“아가씨, 오늘은 굉장히 신경 쓰시네요. 아니라고 말씀하셨지만 역시 약혼자분을 함락시키고 싶으신 거지요?”
“메리, 그런 거 아니라니까.”
“아가씨도 참. 저한테까지 내숭이세요?”
메리가 웃으며 땋아 놓은 머리카락에 빨간 비단 리본을 묶었다. 양 옆머리를 작게 땋아 늘어뜨려 리본을 묶고 남은 머리들은 자연스럽게 드레스 위에서 구불거리도록 했다. 깨끗한 하얀색 바탕에 노랗고 빨간 꽃과 싱그러운 초록색 풀잎의 자수가 놓인 산뜻한 옷이었다. 여름의 생기를 가득 풍기는 드레스를 입고 머리의 양옆에 귀여운 리본까지 단 그녀의 모습은 굉장히 사랑스러웠다.
이 옷은 르시엔이 하루가 멀다 하고 보내오는 선물 상자 중 하나에 들어있던 것이었다. 놀라울 정도로 그녀의 취향인 데다가 너무 과하지도 않아 르시엔에게 좋은 감정이 없던 릴리도 그의 눈썰미 하나만은 인정해주어야겠다고 생각했을 정도였다. 그는 그녀의 치수를 물어보지도 않고 릴리에게 딱 맞는 옷을 주문한 것이다. 어떻게 이렇게 딱 맞지? 가슴과 허리에 빈틈없이 밀착되는 편안한 착용감에 릴리는 조금 아연해졌다.
드레스와 어울리는 리본까지 보내온 섬세함에 메리가 혀를 내둘렀다. 메리는 선물을 뜯어보며 ‘물건은 죄가 없으니까요! 정말 잘 어울려요! 약혼자분의 안목과 감각은 아가씨께서도 인정하셔야 해요!’ 하고 말하며 그를 칭찬하기까지 했다. 릴리가 약혼자의 소문을 말해주자 얼굴이 벌게져서 씩씩대던 기억은 그새 까먹은 모양이었다.
그의 편지들은 날이 갈수록 절절하고 애틋해져서, 편지만 보면 전쟁 통에 헤어진 연인에게 보내는 것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였다. 릴리는 처음에는 감흥 없이 읽는 시늉만 하다가 나중에는 감탄하며 읽었다. 그가 왜 화려한 여성 편력을 자랑하면서도 계속해서 여인들의 사랑을 받아왔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편지를 읽는 동안만큼은 릴리도 그가 정말로 반성하고 자책하고 있는 게 아닐까 생각할 정도였다. 릴리는 그럴 때마다 고개를 흔들며 메리가 일장 연설했던 말을 떠올렸다. 사람은 바뀌지 않는다! 나쁜 남자에게 먹이를 주지 말라!
‘선생님은 내가 이렇게 구애받는 여자라는 거 아시려나 몰라.’
비교는 나쁜 짓이지만, 나 혼자 생각하는 것뿐인데, 뭐. 릴리는 입술을 삐죽이며 하이드가 쓴 편지를 생각했다. 그가 르시엔처럼 자신에게 매달리며 애정 어린 말을 써놓았을 거란 기대는 없었다. 그럼에도 무의식적으로 르시엔의 편지와 그의 것이 비교가 되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하이드와 르시엔은 입장이 다르니까. 릴리는 그에게 실연을 당하고도 매번 새로운 기대를 품었다. 이건 다 선생님이 헷갈리게 행동해서 그런 것이다.
정말이지, 그 아련한 눈빛은 무엇이란 말인가? 왜, 사람은 아플 때 본심이 드러난다고 하지 않나. 그가 열이 올라 누워있을 때 그녀만 쳐다보며 어디에도 못 가게 했던 것을 떠올리면 그의 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게다가 잠결에 놓칠 뻔했던 고백까지 더해지면, 누구라도 하이드가 그녀와 같은 마음이라고 생각하게 되지 않을까?
그러다가도 그저 아파서 누구든 곁에 있어 주길 바란 게 아니었나, 너무 간절해 꿈을 착각한 게 아닌가 하고 시무룩해졌다. 하이드만 생각하면 늘 기분이 오락가락했다.
밀당이라는 게, 그에게는 쉽지가 않았다. 화가 나서 밀어내고 나면 금세 그가 맘 상하진 않았을까 걱정됐고, 당기고 나면 늘 그녀만 그를 당기려고 애쓰는 것 같아 허탈했다. 생각할수록 그녀는 연애에 젬병이었지만, 오늘은 달라야 했다. 그녀는 미인계를 사용해서 르시엔을 꼬드겨야 하니까. 할 수 있어, 릴리.
릴리는 심호흡하고 마차에 올라탔다.
* * *
릴리가 르시엔의 저택으로 가는 마차에 오르기 13시간 전, 틸리안은 제르시스 황자를 만나고 돌아와 곧바로 릴리를 찾았다.
“릴리!”
틸리안은 대답도 듣지 않고 문을 열었다. 릴리는 침대에 얌전히 누워 내일의 계획을 세우고 있다가 그의 갑작스러운 방문에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오라버니?”
“너! 후……, 잠깐 얘기 좀 하자.”
“네? 네.”
릴리는 황망하게 눈을 깜빡이며 대답했다. 황급히 그를 따라온 시종이 열려있는 문 앞에서 숨을 고르고 있었다. 그는 릴리가 차를 내오라고 이르는 것을 만류하고 와인을 내오라고 일렀다.
“와인이요?”
“그래. 너도 적당히 마시는 것 정도는 괜찮겠지.”
릴리는 지난 무도회에서의 추태 이후로 술을 입에 대지 않겠다고 결심했지만, 틸리안의 굳은 얼굴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무슨 일이시길래 이렇게 급하게 오셨어요? 밖에서 무슨 일 있었나요?”
“무슨 일은 내가 아니라 네가 있지.”
틸리안이 잔뜩 낮아진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에 노기가 서려 있어서 릴리는 몹시 당황한 상태에서 눈동자를 굴렸다. 사고 치고 부모님 앞에 불려가 혼나는 아이가 된 기분이었다. 그녀는 머릿속으로 오늘 하루 있었던 일을 되짚어 보았지만, 잘못한 것은 없었다. 그런데도 화난 게 분명해 보이는 틸리안의 얼굴을 보고 있으니 영문 모를 죄책감이 솟아올랐다.
“제가 뭘 잘못했나요?”
틸리안은 대답하지 않고 단전에서부터 끌어올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시종이 와인과 안주를 차려놓았다. 그는 시종이 잔을 채워주려는 것을 마다하고 내보냈다. 릴리가 침묵을 어색하게 느낄 만큼의 시간이 지났다. 틸리안은 와인 한잔을 한 번에 다 비우고 나서야 입을 열었다.
릴리는 그동안 초조하게 제 손끝을 깔짝였다. 뭐 하나 짐작 가는 게 없었지만, 틸리안이 알아서는 안 될 일들이 무수히 떠오른 까닭이었다. 무엇 하나 제대로 해 보지도 못하고 이렇게 오라버니에게 들켜버린 건가? 더글라스와 하이드는 어떡하지? 내가 계획을 망쳐버린 거야?
“다 들었다.”
“뭘, 뭘요?”
틸리안은 사정없이 흔들리는 릴리의 동공을 참담한 마음으로 마주했다. 이렇게 소심하고 여린 애가 어떻게 그런 대범한 짓을 저지르고 다닌 것인지.
“제르시스 전하를 찾아가서 거래를 제안했다지.”
“…….”
릴리는 들켰을지도 모른다고 짐작하긴 했지만, 정말로 다 들켰다는 생각에 머리가 새하얘져서 멍하니 입을 벌리고 있었다. 그녀는 안색이 순식간에 새파래져서 잡아떼야겠다는 생각도 못 하고 충격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었다. 세상에, 어쩌지?
“왜 그런 무모한 짓을 한 거야. 그렇게 파혼이 간절했다면, 나에게 와서 말할 수도 있지 않았느냐. 내가 네게 그리 신뢰가 없었던 게냐?”
틸리안은 목소리를 키우지 않으려 노력하며 와인 잔 가득히 술을 따라 벌컥벌컥 들이켰다. 와인의 맛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차라리 독한 술을 가져오라고 시킬 것을. 술을 잘 마시지 않아 그나마 입에 대는 것이 와인이라 마셨더니 도수가 낮아 취기가 오르지 않았다.
틸리안이 연거푸 술잔을 따르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릴리가 그에게 제 잔을 내밀었다. 틸리안은 자신의 잔을 넘치게 따르던 것과는 달리 잔의 4분의 1만 채우고 와인 병을 내려놓았다. 그 모습에 릴리가 눈살을 찌푸리며 꼴딱꼴딱 제 잔을 비우고 다시 내밀었다. 그녀에게도 술기운이 필요했다.
“제가 어떻게 오라버니에게 말해요…….”
릴리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하며 눈을 질끈 감았다. 그와 마주할 용기가 없었다. 그녀가 그의 가문에 입은 은혜를 배신으로 갚으려 한 것을 이제 틸리안이 다 알고 있다. 그녀가 거리를 두려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먼저 다가와 주고 잘해준 사람이다. 그가 느꼈을 배신감과 분노를 생각하면 당장 따귀를 맞아도 할 말이 없었다.
릴리는 이 가문의 부덕과 부패를 척결해야 함에 있어 단 한 번도 망설인 적이 없었지만, 그와 별개로 틸리안을 속이고 가문의 죄를 파헤치는 데 그녀가 직접 참여한다는 부분에 있어서는 내내 마음이 괴로웠다.
바르딘 자작은 필요 이상으로 그녀에게 융숭한 지원과 고급 교육을 베풀었다. 르시엔의 과거와 사교계의 불명예는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지만, 그것을 감안하더라도 객관적으로 이 결혼의 조건은 그녀에게 손해가 아니었다. 비록 바르딘 자작가가 그녀를 불행이 예정된 삶으로 인도하려고 했을지라도 그녀가 바르딘 자작가에 은혜를 원수로 갚은 것은 부정하기 힘든 사실이었다.
“황자를 찾아갈 수는 있고?”
틸리안이 어이없어하며 말했다. 제르시스는 황실로 매일 출근하는 그도 가까이서 볼 일이 손에 꼽는, 까마득히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이었다. 대뜸 찾아가, 아니 뒤를 밟고서 무언갈 제안하는 일이 가당키나 한 일인가.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의 충격이 아직도 생생했다. 저 작은 몸 어디에서 그런 무모함이 나오는지 모르겠다.
“…저한테 화나셨지요……. 오라버니께는 죄송해요.”
릴리는 그에게 무어라 더 사과의 말을 하고 싶었지만, 더 말하지는 않았다. 더 말해봐야 변명이고 기만이 될 테니까. 그리고 그녀는 자신이 무엇이 미안한지, 진심으로 미안한지 확신할 수 없었다.
“릴리, 내가 화난 건 네가 위험한 일을 해서지, 다른 이유가 아니다. 이 일로 널 원망하는 게 아니야.”
“…….”
“그런 무모한 일을 저지르기 전에 내게 말해주었더라면…….”
“그럼 뭐가 달라지나요?”
“설마 너는 내가 이 일에 아버지와 뜻을 같이 할 거라고 생각하고 있는 건가?”
“……그야, 오라버니의 아버지고 오라버니의 가문이잖아요.”
두 사람 사이에 침묵이 감돌았다. 릴리가 어색함을 이기지 못하고 술잔을 기울이는 것을 틸리안이 뺏었다. 자신이 술을 마시자고 해놓고 잔을 뺏는 기이한 행동에 릴리는 또다시 황망한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너에게 이 결혼을 막아보겠다고 한 것은 진심이었다. 너는 몇 번을 말해도 믿어주지 않았지만.”
“그치만 이건…….”
“그놈과의 결혼과는 별개로 나는 아버지가 이런 일을 하는 걸 바라지 않아. 내가 그따위 짓에 동참할 거라고 생각했다면 오해다.”
말끄러미 그를 올려다보는 눈에는 의문과 혼란이 가득했다. 릴리가 대답하지 않는 동안에도 틸리안은 쉬지 않고 술잔을 비웠다. 릴리가 술병을 잡아챘지만 이미 마지막 잔까지 따르고 텅 빈 병이었다. 틸리안은 어두운 눈빛으로 릴리를 보며 코르크를 땄다. 그는 자신의 기분을 그녀가 알아주길 바라는 자신이 우스웠다. 그가 무슨 말을 하겠는가? 그녀가 그가 했던 말들은 빈말로 생각하고 그를 믿지 않아 제 스스로 앞길을 도모한 것이 서운하고 화가 난다고. 이런 감정은 타당하지 않았다.
릴리의 판단은 객관적으로 옳았으니까. 겨우 몇 달 본 사람이 진짜 가족이 될 리 없었고, 그의 진짜 가족은 바르딘 자작이었다. 릴리가 그를 믿지 않고 이 일을 숨기려 한 것은 현명하고 타당했다. 그러니 그는, 이 타당하지 못한 말도 안 되는 서러움을 그녀에게 털어 내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답답한 속을 술로 데워도 기분은 전혀 나아지지 않고 가라앉았다. 그녀는 자신에 대해 잘 모르니 그가 아버지에게 동참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게 당연했지만, 그 사실이 못 견디게 씁쓸했다.
“너는 어찌 그리 영리하느냐.”
나는 그러지 못해 괴롭구나. 틸리안의 얼굴이 울 듯이 구겨졌지만, 눈물이 맺히는 일은 없었다. 릴리는 틸리안이 제 편을 들어주는 것에 안도했지만, 그의 분위기가 처져있는 까닭에 안심한 내색도 하지 못하고 그가 술 마시는 모습을 쩔쩔매며 바라보고 있었다.
“오라버니…….”
지금 감사하다고 말해도 되는 걸까? 그는 역시 아버지의 뜻을 거스르는 것이 괴로운 거겠지? 릴리는 그의 심정을 헤아릴 수 없어 답답한 마음에 그의 손을 잡았다. 말로 전할 수 없는 복잡한 마음이 손의 온기로 전해지길 바랐다. 그가 자신의 손을 잡았을 때도 이런 마음이었을까?
틸리안은 릴리의 손이 닿자 불에 덴 듯 거칠게 뿌리쳤다. 그의 눈에는 동요가 가득했다.
“아……, 죄송해요.”
그의 격한 거부에 릴리가 민망해하며 자신의 손을 가슴께로 거두었다. 틸리안은 여태껏 들이켰던 술이 드디어 효과를 발휘하는 것처럼 갑작스럽게 열이 올랐다. 취한 것인가?
그녀가 닿은 찰나의 순간이 손등에 지워지지 않는 문신처럼 남아있었다. 틸리안이 책상 밑에서 그녀의 손이 닿았던 손등을 쓸었다. 화끈거리는 얼굴은 술기운이리라. 그는 스스로에게 변명하며 화제를 전환했다.
“……릴리. 이 일에서 빠지거라.”
“네?”
“네가 나설 필요가 없어. 자작가의 일이라면 너보다 내가 더 잘 알겠지.”
“그건 그렇지만…….”
수긍하지 않는 그녀를 틸리안이 의아하게 쳐다보았다.
“싫어요.”
“뭐?”
“싫다고요. 오라버니가 르시엔 경 집에 찾아가서 그 사람 방에 들어갈 수 있나요?”
“너도 그럴 수 없지. 그자가 네게 무슨 짓을 할 줄 알고?”
틸리안이 완고한 얼굴로 말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릴리는 아직 르시엔 소넬의 악명을 몰라서 저런 소리를 하는 것이었다. 그자가 그녀의 앞에서는 신사인 척 예의 바르게 굴기에 소문이 과장이라고 여기는 게지. 그자는 처음 만난 여자도 한 시간이면 자신 앞에 알몸으로 서 있게 만들 수 있다고 남들 앞에서 큰소리치던 남자였다. 소넬가, 그것도 르시엔의 방에 릴리가 들어가는 상상만으로도 심히 불쾌했다. 틸리안의 턱에 단단하게 힘이 들어갔다.
“걱정하지 마세요. 저한테 오라버니가 걱정하시는 만큼 무례하게 굴지는 않을 거예요.”
“릴리, 너는 겁이 너무 없어. 말도 안 되는 소리 말거라.”
틸리안의 말에 릴리의 표정이 차갑게 식었다. 이 지겨운 논쟁을 틸리안과 반복하게 될 줄은 몰랐다. 릴리는 이 주제가 정말로 지겨웠다.
“말이 되고 안 되고는 오라버니가 판단할 일이 아니에요.”
“너는 그자가 어떤 자인지 몰라!”
“그런 사람과 결혼시키려고 했으면서 이제 와 방 안에 둘이 있는 게 걱정이신가요?”
“릴리.”
차분하게 제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릴리가 뜨끔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도 못된 말을 했다는 자각은 있었으니까. 틸리안이 얼마나 그녀를 위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이 결혼에 있어서 그도 그녀 만큼이나 반대한다는 것도, 이제는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일부러 못된 말로 그를 상처 주었다. 릴리는 위장이 따끔거리는 것을 느끼며 틸리안의 괴로운 얼굴을 못 본 척하고 술잔을 비웠다. 두 사람 다 안주에는 거의 손도 대지 않은 채로 벌써 두 병을 비웠다.
“오라버니가 절 걱정해서 반대하시는 거 알아요. 하지만 절 믿어주세요.”
“이건 믿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야.”
“그리고 오라버니가 허락하고 말고의 문제도 아니죠.”
두 사람 사이에 벽을 세우는 말이었다. 틸리안이 릴리의 비장한 얼굴을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후……. 정확히 뭘 어쩌려는 거냐. 계획은 있는 거야?”
한층 누그러진 그의 목소리에 릴리의 얼굴이 밝아졌다.